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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陸千選跋(承命製進)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왕명으로 지은 『杜陸千選』의 발문이다. 杜甫‧陸游의 시는 管絃의 音이라고 하였다. 주상이 두 대가를 表章하기 위하여 직접 선별하여 刪削하였으니 인심을 맑게 하고 大雅의 근본을 떨친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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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巖集跋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한강 정구의 문인 止巖 都慎修(1598~1650)의 문집 발문이다. 후손의 청탁을 받고 지은 것이다. 도신수는 현종대 의례소를 올린 竹軒 都愼徵의 형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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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書六代祖考紫巖先生朝聞錄後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紫巖 李民寏(1573~1649)의 『朝聞錄』의 발문이다. 이민환은 1618년(광해군 10) 강홍립을 따라 深河전투에 종군하였다가 청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 당시의 기록이 『朝聞錄』이다. 여기에는 이민환의 충절을 볼 수 있으며, 구금 중에 중국문인들이 남긴 성리서들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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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護軍李公柏田殉節錄後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병자호란 때 순절한 李承昌의 『순절록』의 발문이다. 이승창은 동계 정온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柏田에서 전사했다. 공의 아들 爾南은 공이 돌아가실 때 9살로 명이 망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의성의 社谷으로 낙향하여 숭정처사라 자호하였다. 후손 李貴輝와 李時白의 청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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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園柳公遺事後識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柳平佑의 부탁을 받고 烏園 柳公의 遺事에 識를 붙인 것이다. 烏園공은 군위 사람으로 林下에서 학문에 진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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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徐君(達熙)悼寃錄後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徐達熙는 이희발의 종생질의 아들로 그 大父 邁野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22세로 요절하였다. 금년 봄에 邁野공이 遺草 1책과 장례시 輓誄 및 悼寃錄을 보여주므로 감회가 새로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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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鶴城養士齋蓮桂案後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울산의 양사제 蓮桂案에 쓴 識文으로 울산의 양사재를 세우면서 소‧대과의 入格者를 적었는데 자신도 타향의 인물로서 들어있으니 連書해서 한부 주면서 이곳의 뜻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후지를 쓴다고 하였다. 울산은 이희발의 출생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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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金氏三烈士遺事後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병자호란 때 순절한 金燁‧金煌‧金燦 삼형제의 행적을 기록한 『三烈士實記』의 후지다. 삼형제 모두 무과에 급제하고 병자호란 당시 雙嶺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손 金泌璟의 부탁을 받고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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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內閣繕寫權椽日記後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정조대 內閣繕寫의 일로 상경하여 복무한 서리 潛叟 權椽의 일기를 읽고 후지를 붙인 것이다. 일기는 權椽이 『五經百編』의 간행을 위하여 70여 일 동안 복무하면서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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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德傳(此下奎章閣講製時奉敎製進)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萬德은 제주의 기생으로 그 성씨는 알 수 없다. 義를 좋아하고 베품을 좋아하여 옛 女俠의 類였다. 甲乙년간에 제주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저축한 600斛을 내어 기민을 구휼하였다. 주상이 상을 내리고자 하니 사양하고 상경하여 서울과 육지의 명승을 구경하고자 한다고 청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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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幾神說(奉敎製進)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왕명으로 지은 說로 誠‧幾‧神의 의미와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誠은 一理로 渾然하여 곳에 따라 克滿하되 가득 참도 없고, 흠결도 없는 것이 誠이요, 음양으로 나뉘어 동정이 찬연하고 단서를 가히 정연히 찾을 수 있어 조리가 있는 것이 幾요, 仁에서 비롯하여 의를 행하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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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之謂誠說(奉敎製進)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것이 命이요,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부한 것이 性이니 자사가 말한 天命之性이나 맹자가 말한 性善의 說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人物이 나면 품부한 氣가 잇는 것이니 天命之理가 그 중에 있는 것이다. 이황의 「心統性情圖」에 기반 하여 입론을 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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纔說性時便已不是性說(奉敎製進)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性에 대하여 논한 說이다. 性은 理만을 가지고 논할 때도 있고 理氣를 합하여 논할 때도 있다. 즉 자사가 말한 ‘天命之謂性’의 性과 『논어』의 ‘性相近’의 性은 구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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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往大來贊(奉敎製進)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易에 대하여 논한 글이다. 천지음양의 순환에 대하여 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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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和尺銘(幷序,奉敎製進)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1797년(정조 20) 정조가 中和尺詩를 짓고 자를 내리자 그에 대한 銘을 지은 것이다. 자라고 하는 것은 중화로 이름하고 令節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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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薰琴銘(奉敎製進)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琴에 대한 銘으로 정조의 명으로 지은 것이다. 琴音이 울리듯 전국에 德音이 퍼질 것을 기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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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學士晩秀木屐銘(奉敎製進)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李晩秀의 나막신에 대한 銘이다. 나막신의 형태와 군자의 행도를 비유하여 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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硯銘(幷小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20여 년 동안 사용한 벼루에 명을 붙인 것이다. 갈아도 갈리지 않는 절개가 있으니 한 조각의 돌이라도 귀한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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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銘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문방사우 중 하나인 먹에 대한 銘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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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本朝農民等謝下求農書綸音箋(奉敎製進)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농서를 구하는 윤음이 내린 것에 대하여 농민들이 감사를 표하는 것에 대한 擬箋이다. 농업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농업에 유념하는 聖德이 가득할 것이라고 칭송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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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本朝人瑞錄老人七萬五千一百餘人進壽五百八十九萬八千二百歲箋(奉敎製進)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擬箋이다. 나라에 노인이 많은 것은 정치가 잘 이루어졌음을 말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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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本朝內閣進新印御定奎章全韻箋(奉敎製進)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奎章全韻』이 새로 인간되어 진상되는 것을 축하하는 擬箋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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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本朝御醫進濟衆新編箋(奉敎製進)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어의가 『濟衆新編』을 진상하는 것을 축하하는 擬箋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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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本朝湖南道臣請修劉仁軌所築帶方城以重關防箋(奉敎製進)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帶方城을 중수할 것을 청한 전라도관찰사의 행정은 관방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하고, 국방과 築城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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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窩先生鄭公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南窩 鄭東弼(1740~1820)의 행장이다. 자는 季祥, 본관은 延日이다. 고려조 명신 鄭襲明의 후손으로 梅軒 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永川李氏 秀春의 딸과 月城孫氏 是采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百弗庵 崔興遠‧大山 李象靖의 문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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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堂先生孫公行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慕堂 孫處訥(1553~1634)의 행장이다. 자는 幾道, 본관은 一直이다. 청호서원에 배향되었다. 溪東 全慶昌과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장현광‧서사원과 서로 도의로 강마했다. 임진왜란 당시 서사원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웠다. 연경서원을 중수하는데 앞장섰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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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園朴公行狀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東園 朴重慶(1726~1782)의 행장이다. 자는 威汝, 본관은 咸陽이다. 아버지는 成德이고 어머니는 光州金氏 瀚의 딸이다. 晩軒 朴成玉의 문인이다. 南野 朴孫慶과 학문으로 교유했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1764년(영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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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大父喜懼堂尹公行狀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외조부인 喜懼堂 尹德殷(1717~1776)의 행장이다. 파평인으로 通德郞 就五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月城孫氏 是禎의 딸이다. 생부의 휘는 烳이고 생모는 寧越辛氏 必碩의 딸이다. 1717년(숙종 43) 용궁현 대죽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出后했다. 부인은 一善金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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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舅尹公行狀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外叔 尹俔(1752~1822)의 행장이다. 자는 龍見이고 파평인이다. 아버지는 德殷이고 어머니는 一善金氏 玄湸의 딸이다. 부인은 竺山全氏 達采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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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竹窩孫公行狀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醉竹窩 孫鍾應(1767~1831)의 행장이다. 자는 孝徵이고 밀양인이다. 아버지는 容窩 以魯이고 어머니는 密城朴氏 處士 의 딸이다. 부인은 豊山柳氏 龜祚의 딸로 3남 3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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靖庵柳公行狀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靖庵 柳隰(1504~1570)의 행장이다. 자는 原叔이고 文化人이다. 아버지는 參奉 壽江이고, 어머니는 一善金氏 鍾城府使 緣의 딸이다. 牛庵 李世憲에게 학문을 배웠다. 선조 초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부인은 영천이씨 贈都承旨 世憲의 딸로 1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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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隱趙公行狀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梅隱 趙承洙(1760~1830)의 행장이다. 자는 子希이고 풍양인이다. 承旨 錫龍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월성손씨 雲億의 딸이다. 繼妣는 남양홍씨 有圭의 딸과 娥林慎氏 思大의 딸이다. 부인은 함양박씨 참봉 漢東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述立의 부탁으로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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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人永川李氏行狀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安人 영천이씨(1673~1733)의 행장이다. 아버지는 通德郞 重燫이고 어머니는 진보이씨 全五의 딸이다. 博士 琴暹에게 출가했다. 4남 1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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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氷齋趙公行狀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淵氷齋 趙相迪(1721~1756)의 행장이다. 자는 惠吉이고 함안인이다. 아버지는 壽秩 嘉義大夫 景沂이고 어머니는 貞夫人 全義李氏 震郁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생원이 되었다. 5남 1녀를 두었다. 손자 基晉의 청으로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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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祖考贈左承旨若無齋府君家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증조부인 若無齋 李秀春(1675~1740)의 행장이다. 자는 仁甫이고, 호는 若無齋다. 영천인으로 通德郞 重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恭人 진성이씨 全五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文簿를 관장했다. 부인은 星山呂氏 通德郞 文徵의 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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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贈吏曹參判府君家狀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조부 李德祊(1701~1750)의 행장이다. 자는 應漢이고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는 若無齋 秀春이고 어머니는 星山呂氏 通德郞 文徵의 딸이다. 부인은 예안김씨 通德郞 弘烈의 딸이다. 손자 羲發이 형조판서가 되자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부인은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3남 1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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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贈吏曹判書府君家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아버지 李宜明(1745~1791)의 행장이다. 자는 季俊이고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는 贈吏曹參判 德祊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 通德郞 弘烈의 딸이다. 아들 희발의 貴로 인하여 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4남 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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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贈貞夫人坡平尹氏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어머니 파평윤씨(1743~1823)의 행장이다. 아버지는 德殷이고 어머니는 一善金氏 玄湸의 딸이다. 나이 20에 李宜明에게 출가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 희발의 貴로 인하여 貞夫人에 증직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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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室贈貞夫人眞寶李氏遺事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부인 진보이씨(1763~1809)의 행장이다. 아버지는 龜洛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 德河의 딸이다. 1784년(정조 8) 시집와서 정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다. 1791년(정조 15) 先考의 상을 당하여 나는 천리 밖에 있어 부인이 일을 전담하였다고 하였다. 4남 1녀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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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兄秀才遺事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요절한 兄 李某(1764~1778)의 遺事이다. 어려서 죽은 형을 그리면서 쓴 것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음을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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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子通德郞魯奎遺事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일찍 죽은 아들 李魯奎(1786~1844)의 遺事이다. 자는 宗瑞이고 前刑曹判書 李羲發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貞夫人 진성이씨로 龜洛의 딸이다. 입재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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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巖尹公墓碣銘(幷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花巖 尹弘鳴(1565~?)의 묘갈명이다. 자는 應時이고 파평인이다. 아버지는 彭良이고 어머니는 鶴城朴氏이다. 부인은 三陟沈氏 監察 元宗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刑曹佐郞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大龍巖 아래에서 적선 수십 척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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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窩鄭公墓碣銘(幷序)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南窩 鄭東弼(1740~1820)의 묘갈명이다. 자는 季祥, 본관은 延日이다. 고려조 명신 鄭襲明의 후손으로 梅軒 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永川李氏 秀春의 딸과 月城孫氏 是采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百弗庵 崔興遠‧大山 李象靖의 문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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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西朴公墓碣銘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竹西 朴漢遇(1764~1800)의 묘갈명이다. 자는 留成이고 아버지는 郡守 重慶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 建基의 딸이다. 南野 朴孫慶의 문인이다. 부인은 영천이씨로 宜中의 딸이니 필자 이희발의 從姊다. 2남 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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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練主簿李公墓碣銘(幷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訓練主簿 李碩文(1713~1773)의 묘갈명이다. 자는 士實이고 星山人이다. 아버지는 爾紳이고 어머니는 冶爐宋氏 禁府都事 遠基의 딸이다. 1739년(영조 15) 무과에 급제하고 訓練院 主簿‧松坡鎭將를 역임했다. 부인은 淑人 풍양조씨로 通德郞 命星의 딸이다. 2남 3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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亦樂齋金公墓碣銘(幷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亦樂齋 金致寬(1569~1661)의 묘갈명이다. 자는 而栗이고 본관은 의성이다. 아버지는 參奉 應周이고 어머니는 安東權氏로 참봉 舜卿의 딸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부인은 宜寧玉氏로 참봉 球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다. 1849년(철종 즉위) 후손 弼元‧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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徵士吳公墓碣銘(幷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吳國華의 묘갈명이다. 오국화는 해주인으로 고려가 망할 때 舊國의 遺臣으로 西山의 절개를 지켜 의성에 은거했다. 남쪽의 오씨들은 모두 공을 시조로 삼으나 그 행적을 증거할 만한 것이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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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姊徐夫人墓碣銘(幷序) 39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邁野 徐活의 부인 영천이씨(1759~1781)의 행장이다. 宜中의 딸이다. 어머니는 오천정씨로 通德郞 重簠의 딸이다. 부도를 잘 지켜 종당의 칭찬이 자자했으나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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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永川李氏墓誌銘(幷序)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종질녀 영천이씨(1761~1837)의 묘지명이다. 元發의 딸이다. 어머니는 월성손씨 생원 憙一의 딸이다. 고성인 進士 李宗休에게 출가하였다. 5남을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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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贈吏曹判書府君墓誌 44 / 기록자료>고도서 / 이희발아버지 李宜明(1745~1791)의 墓誌이다. 자는 季俊이고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는 贈吏曹參判 德祊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 通德郞 弘烈의 딸이다. 부인 파평윤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