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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87001

    晹。寫梅谷<인명 type="이름">李<line/> 景道</인명>慰疏及輓。書<지명>遠村</지명>羲賓戚兄兼付源鳳哀辭。<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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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2

    晹。午後。自<지명>台溪</지명>傳梅谷慰疏。徃<지명>棊谷</지명>夜央叅<line/> 姑母忌祭。<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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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3

    晹。食後。唁<지명>石南</지명>丈大祥。徃<지명>松川</지명>拜佛。旋哭三從尊姑母几筵。夕後。致奠。猝有寒氣頭痛可<line/> 悶。<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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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4

    晹。晩發憇<지명>法興</지명>李承璉宿從叔。聞基勳姪生男云。<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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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5

    晹。話于範九。由三時車歸。<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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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6

    晹。<line/>
    출처 : 유교넷
  • 387007

    晹。<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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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8

    晹。<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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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09

    從弟釣叟行略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사촌 동생 釣叟 金魯鍊(1745∼1784, 字 得翁)의 行略이다. 渴睡軒 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맏형은 象鍊(자 德翁), 둘째 형은 龜鍊(자 壽翁)이다. 두 형은 학문에 전념하느라 집안일에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고, 두 동생은 아직 어려 부모의 노고를 살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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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0

    從弟無庵子行略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사촌 동생 無菴子 金晩鍊(1748∼1783, 字 成翁)의 행략이다. 갈수헌 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헌걸찬 체격에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도량도 넓고 두터워 일찍이 한 번도 疾言遽色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郭氏에게 장가들어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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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1

    兄子永堅行略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조카 金永堅(1754∼1782)의 행략이다. 그는 金若鍊의 형인 虎鍊(1718∼1799)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진성이씨로 松齋 李堣의 후손이다. 성품이 매우 너그럽고 부드러웠으며, 우아한 용모에 온화한 기품을 지녔다. 한번은 문을 열었다가 곧바로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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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2

    滄浪子行略(1793)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8촌 동생인 滄浪子 金漢鍊(1734∼1783, 字 幼濯)의 行略이다. 雙巖 金埅의 長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科擧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四書辨疑에는 관심이 깊어 國子生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1762년(영조 38)에 과거에 응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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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3

    從姪永說行略(1793)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從姪인 永說(1771∼1792, 字 礪若)의 行略이다. 22세의 나이로 短命한 그는 渴睡軒 㙔의 넷째 아들인 無菴子 晩鍊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玄風郭氏 師宗의 딸이다. 8세에 어머니가 죽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형이 있었지만 성품이 괴팍하고 술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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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4

    亡子生卒記略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죽은 아들 永忠(1760∼1795)의 生卒記이다. 위로 형이 셋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였기 때문에 영충을 장남으로 하였다. 김약련은 19세에 아들 ‘祿星’을 낳았으나 겨우 5살 만에 죽었다. 4년 뒤인 27세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꿈속에 駿馬로 보았기 때문에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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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5

    季子志行記略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막내아들 永悳(1766∼1798, 字 直心)에 대한 기록이다. 43세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두 동생 魯鍊과 晩鍊, 두 조카 永堅과 永說, 그리고 두 아들 永忠과 永悳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전하고 있다. 김약련은 사람이 夭折하는 것은 時運과 家運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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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6

    左議政貞烈公浩然亭崔公神道碑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浩然亭 崔德潤(1376∼1445)의 神道碑銘이다. 자는 汝和, 본관은 通川이다. 아버지 雲海는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密直副使에 올랐고, 어머니는 楊氏로 之壽의 딸이다. 1410년(태종 10)에는 三南都巡察使가 되어 호남의 臨陂‧相地 등지에 출몰하는 왜적들을 물리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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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7

    資憲大夫吏曹判書權公神道碑銘幷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上舍 權讜과 그의 동생 員外郞 權訪의 부탁으로 인해 지은 權輗(1495∼1549)의 神道碑銘이다. 권예의 자는 景信, 호는 磨崖이다. 권당과 권방의 말에 의하면 권예에 대한 근거자료로는 퇴계 이황이 宋台叟에게 쓴 편지글을 토대로 퇴계에게 비명을 요청했었는데, 이때 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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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8

    丹城縣監權公墓碣銘幷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丹城縣監을 지낸 權鏡(1674∼1734)의 묘갈명이다. 권경의 자는 明叔, 初名는 瑺, 初字는 景玉, 自號는 梧窩, 본관은 안동이다. 아버지는 守經, 어머니는 驪興李氏로 長春의 딸이다. 16세에 鄕解를 치렀는데, 考官이 일찍부터 권경의 이름을 듣고 서로 더불어 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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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19

    成均生員東渠宋公墓碣銘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宋希濂의 부탁으로 지은 宋鼎鋎(1711∼ 1778)의 묘갈명이다. 자는 仲和, 初名은 鼎鐋, 호는 東渠, 본관은 冶城이다. 아버지 最基는 詞華에 뛰어났으며, 어머니는 진성이씨 成翼의 딸이다. 1763년(영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42년 아버지를 모시고 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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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0

    成均進士秋月堂韓公墓碣銘幷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秋月堂 韓山斗(1556∼1627)의 묘갈명이다. 字는 士瞻, 본관은 韓山이다. 忠簡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日就, 어머니는 永貞秦氏로 참봉 晃의 딸이다. 정유재란에 대신들이 또다시 도성을 비우고 播遷할 것을 주장하니 초야의 布衣로 상소하여 도성을 사수할 것과 왕의 親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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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1

    中訓大夫軍資監副正高公墓碣銘幷序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軍資監副正을 지낸 高景福(1541∼1582)의 묘갈명이다. 그의 자는 仲이다. 아버지는 음보로 참봉직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眞城李氏로 護軍 壎의 딸이다. 그는 외가인 周村에서 생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지만, 그의 死後에 임진왜란을 만나 부인 권씨가 아이들을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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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2

    通訓大夫兵曹佐郞宋君墓碣銘幷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병조좌랑을 역임한 宋東胤(1729∼1799)의 묘갈명이다. 자는 夏承, 아버지는 亨泰(字 來仲), 어머니는 禮安金氏 學昌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10세 이후에는 監察 趙元升에게 수업하였다. 1762년(영조 38)에 明經科에 합격하여 承政院에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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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3

    刑曹都官正郞을 지낸 農隱 金緘의 묘갈명이다. 자는 重黙,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安이다. 애당초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親命때문에 1438년(세종 20)에 과거에 급제하여 尙州判官을 역임하였으며, 1460년(세조 6)에는 형조도관정랑에 올랐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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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4

    處士高敞吳公墓表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吳錫權(1717∼1771)의 묘표이다. 자는 爾稱, 본관은 高敞이다. 생부는 聖昌으로, 문행이 있었고, 생모는 羽溪李氏 基顯의 딸이다. 叔父 聖欽(호 省庵)이 자식이 없어서 그의 繼子가 되었다. 어머니는 奉化琴氏 重世의 딸이다. 6대조인 竹牖 吳澐이 榮州에 살면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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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5

    長陵參奉權公墓表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權聖河(1700∼1757)의 묘표이다. 자는 幼淸, 본관은 안동이다. 아버지는 丹城縣監을 지낸 鏡이며, 어머니는 慶州金氏 以厚의 딸이다. 함창에서 거주하였다. 1738년(영조 1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해 어머니상을 당해 服을 마친 후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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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6

    孝子金君墓表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효자로 이름난 金潛(1715∼1765)의 묘표이다. 자는 而昭, 본관은 禮安이다. 아버지는 鳴國이다. 色養으로 아버지를 섬기다가 상을 당하자 장사지내기 전에는 미음만 먹다가 장사지낸 후에는 과일과 채소를 먹지 않았다. 술 때문에 병세가 심해진 아버지를 보고는 종신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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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7

    先祖七世墳塋傳疑碑識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7대조 무덤에 대한 글이다. 예안현 백운산에 7대조 先塋이 있었는데, 이곳을 타인이 점유해 그 아래위로 무덤을 썼다. 이에 예안현은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곳임을 언급하면서 白雲山을 ‘正字洞’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7대조가 집현전정자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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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8

    資憲大夫工曹典書黃公祭壇碑識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工曹典書를 역임한 黃有定(1343∼?)의 祭壇 碑誌이다. 황유정의 무덤은 榮州郡 동쪽 20리 艾洞에 있었으며, 아들 銓의 무덤이 그 위에 있었다. 그러나 碑碣이 없어서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제단비를 세우면서 황유정의 가계와 업적을 기술해놓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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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29

    贈通政大夫兵曹參議柳公祭壇碑識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병조참의에 증직된 柳敬孫 祭壇 碑誌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오랜 세월에 碑碣없는 무덤이 허물어졌고, 족보에도 무덤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어찌하지 못하다가 지금 많은 후손들의 공의인 追遠報本의 뜻을 내세워 대략적인 위치에 제단비를 세우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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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0

    處士仁同張公墓誌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張漢迪(1714∼1780)의 묘지명이다. 자는 惠吉, 본관은 仁同이다. 생부는 晩柱, 생모는 연안김씨 사인 命世의 딸인데, 백부인 晩杓의 繼後가 되었다. 어려서는 부모 병간호 때문에 배우지 못하다가 20세가 되어서야 책을 읽었다. 이후 과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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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1

    家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저자의 사촌 동생인 金象鍊이 지은 家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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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2

    行狀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金이 지은 저자의 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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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3

    墓銘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黃龍漢이 지은 저자의 묘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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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4

    跋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
    逸圃 朴時源이 지은 斗庵集 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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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5

    류천집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柳川 柳初의 시문집. 3卷 2冊. 四周雙邊, 半郭 19.5×15.5㎝, 有界, 10行17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30.8×20.4㎝. 저자가 남긴 유문이 많았는데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수습한 것이 완전하지 못하였다. 후손 道均과 道祐가 발의하여 寅榮과 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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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6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服松葉, 松偃蹇於空谷之中蓬蒿纏繞而困之螻蟻侵穴而厄之爲作一絶竝古風以詠, 子秋往達城上薪峴氣困小憩俯視河村山川依舊景物不改而十年之內人事大變雖欲追其彷彿而不可得也思痛骨哀淚滿眶因成絶以抒哀思, 滯雨留軍威旅店獨臥無端吟短絶, 壬子孟秋余以一家稽疑事聞達城有日者金順福者以揲蓍有名將往質焉到軍威威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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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7

    與趙參判書 8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조참판에게 보낸 편지이다. 관동의 승경을 마음껏 유람할 수 있게 됨이 부럽다는 것과 곤궁한 백성들의 삶을 보살필 수 있도록 정사를 펼치라는 당부의 내용이다. 親家가 가까우니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혼정신성의 도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니 매우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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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8

    奉化縣의 鄕約長에게 보낸 敎諭文으로 고을에 인륜도덕을 펼치라는 내용이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이유는 禮義가 있기 때문이다. 예의의 유무는 작은 것을 다투는 사이에 결정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예의라는 것은 일상생활에 드러나는 인륜이라고 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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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39

    書書傳大文抄錄後 3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書傳大文抄錄」은 『서전』의 대문을 뽑아서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서전의 양이 많아서 집에 있을 때는 찾아보기에 여유가 있지만 집밖을 나서거나 말을 타고 갈 때에는 쉽게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본문을 10분의 1로 줄여서 책으로 만들었는데, 밖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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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0

    大臣 4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대신의 직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은 것이다. 대신이란 道로써 군주를 섬기는 사람이다. 군주에게 허물이 있으면 諫言을 하고 반복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혹은 선왕의 대신으로서 선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국가와 죽음을 같이 해야 할 경우 차마 떠나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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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1

    洪持平說某相事 5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국가에 중대한 책임을 가진 재상이 公卿들을 무시하고 정무를 소홀히 했으며 끝내는 흉악한 모의를 꾀하다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 洪持平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모재상이 죽음을 당한 것은 自招한 일이라 하였다. 홍지평이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닭이 울면 일어나 재상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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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2

    書丁巳榜目後 6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1617년(광해군 9) 『司馬榜目』을 보고 감회를 적은 것이다. 저자가 정사년(161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명단을 보니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몇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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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3

    霜露齋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霜露齋는 西厓 柳成龍(1542∼1607)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 건축물이다. 승려 甫右의 도움으로 서애 선생이 죽은 후 5년이 되는 1611년(광해군 3)에 창건하고 ‘霜露齋'라는 현판을 달았다. 霜露齋라고 한 것은 『禮記』 「祭義」에 “서리가 내리면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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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4

    安命說 8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모든 일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天命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평생 문장에 힘을 써서 농사일에 힘을 쓰지 못했고, 작은 관직도 얻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문장에도 힘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늙을수록 도는 더욱 곤궁해지고 집안이 가난하여 몸은 더욱 곤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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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5

    河隈大家上樑文(先生十餘歲時作) 10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하회 종가를 지을 때 상량식에 올린 글이다. 10여세에 지은 것이라 한다. 상량한 후에 훌륭한 후손 많이 나고, 어른들은 장수하며, 날마다 온 집안에 기쁘게 웃는 소리 넘쳐나며 해마다 오곡이 풍년드는 경사가 있으며,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에 길이 즐겁고 후손들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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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6

    省亡弟墓辭(墓在松峴) 12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죽은 아우의 묘소를 살피고 쓴 哀辭이다. 4년 만에 찾아오니 묵은 풀이 덮여 있고 쑥이 해를 가리고 있으니 묘소 옆을 방황하며 탄식하고 몰래 눈물 흘린다고 하였다. 어린 나이에 육신을 이곳에 묻었으니, 부모의 품도 알지 못하고 형제의 사랑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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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7

    哭子辭 12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은 아들을 애통해 하는 哀辭이다. 나의 아들이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고, 이웃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 죽으니 두 집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울려서 하늘에 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웃 아이는 조금 성장했으니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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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8

    祭洪無住(鎬)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洪鎬(1586~1646)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洪鎬는 본관이 缶林, 자는 叔京, 호는 無住‧東洛이다. 鄭經世의 문인으로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2년 전적과 박사에 이르렀고, 1623년(인조 1)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괄의 난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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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49

    祭表兄李菊牕(燦)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李燦(1575∼165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李燦은 본관이 驪州, 자는 仲明, 호는 菊牕으로 外叔 柳成龍에게 수학하였다. 젊어서 자주 병을 얻어, 스스로 병을 고치기 위해 독학으로 의술을 연구하여 名醫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32년(인조 10) 御醫도 못 고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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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7050

    祭李蒙齋(祥龍)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李祥龍(1573∼162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李祥龍은 본관이 全州, 자는 景見, 호는 蒙齋이다. 예천 유천에 살았으며, 熙寧君(태종의 6子)의 後孫이다. 진사에 합격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父喪을 당하여 侍墓하였다. 梧里 李元翼이 경상도를 순찰하다가 그의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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