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紹修書院文成公畵像重修告由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소수서원에 있는 文成公 安珦(1243∼1306)의 화상을 중수하면서 고유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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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安告辭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화상을 봉안할 때의 고사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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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甁山黃丈(訒)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甁山 黃訒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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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村山所祭亡子瓔之柩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梧村 산소에 亡子 곽영의 영구에 제사할 때의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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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樂堂祭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黃暹(1544∼1616)을 추도하는 제문이다. 황섬은 자는 景明, 호는 息庵, 본관은 창원이다. 수락당은 만년의 거처지다. 문과에 급제한 후 안동부사·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난 때 모운사에 제수되어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웠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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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先生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寒岡 鄭逑(1543∼1620)를 추도하는 제문이다. 자는 道可,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이다. 吳健에게 수학하였고, 조식과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창녕현감·공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병진·의약·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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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姪士養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從姪 士養을 추도하는 제문이다. 저자는 사양과 숙질간이지만 인정은 父子와 같으며, 백날을 하루같이 마음으로 기약한 사이임을 드러내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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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夏寒亭朴公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夏寒亭 朴漉(1542∼1632)을 추도하는 제문이다. 아버지는 嘯皐 朴承任이며,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하한정은 영주 초곡에 지은 정자로, 한여름에도 전혀 덥지 않고 오히려 춥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가학적 전통과 학문적 관계를 상기하며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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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黃公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성균관 생원 黃得謙(1515∼1596)의 묘갈명이다. 자는 汝益, 본관은 창원이다. 창원황씨는 고려 때 名相 黃石柱의 후예로 대대로 偉人을 배출하였으며, 中郞將 黃承厚 때 순흥으로 이거하였다. 조부 黃漢弼은 인품과 학문이 뛰어났으며, 특히 錦溪 黃俊良(1517~156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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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義衛權公墓碣銘(幷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忠義衛 權懽(1544∼1617)의 묘갈명이다. 자는 應和, 본관은 안동이다. 권환은 權溥(1262 ~1346)의 후손이며 陽村 權近(1352~1409)은 그의 6대조가 된다. 아버지 權輥이 진사 黃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그를 낳았다.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母弟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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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正字李公墓碣銘(幷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성균관정자 李徽音(1575∼1609)의 묘갈명이다. 자는 汝翕, 본관은 경주이다. 경주이씨는 신라 초 李謁平 이후, 여말에 霽亭 李達衷(?~ 1385)은 강직함과 문장으로 일세에 뛰어났고,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조선 세조 때 李興尙은 鷄林君에 봉해졌으니 그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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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禮院引儀黃公墓碣銘(幷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통례원인의 黃忱(1546∼1622)의 묘갈명이다. 자는 汝誠, 본관은 평해이다. 고려 때 世子檢校 벼슬을 한 黃仁溫 이후, 공민왕 때 헌납 벼슬을 한 黃瑾, 조선조에 공조판서인 黃有定, 학행으로 천거되어 지평 벼슬을 한 黃銓이 있으며, 조부 黃瑀는 덕망이 높았다. 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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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張公墓誌銘(幷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성균진사 張汝華(1566∼1621)의 묘지명이다. 호는 砂溪다. 저자는 장여화의 孝悌와 忠信이 남보다 뛰어난 점을 드러내어 ‘眞儒’’로 자리매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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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正字墓誌銘(幷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성균관정자 李徽音(1575∼1609)의 묘지명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묘갈명에 자세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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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林權公墓誌 8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竹林 權山海(1403∼?)의 묘지명이다. 자는 德甫, 죽림은 그의 호다. 증조 權希正은 감찰벼슬을 하였고 시호는 文靖이며, 조부 權軺는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權寬이고 어머니는 김해최씨 崔仲雲의 따님이다. 일찍이 從祖 文景公에게 수업하였고, 宗簿寺副正에 제수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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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密直提學安公墓誌 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密直提學에 추증된 安碩의 묘지명이다. 조부는 安得財이고, 아버지는 安希諝며, 어머니는 安成器의 따님이다. 고려 때 태어나 登第하였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判典客 安軒과文貞公安軸(1282~1348),文敬公 安輔(1302 ~1357), 順興君 安輯 등 네 아들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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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夢(幷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1620년(인조 12) 섣달 11일에 許永宗과 함께 隱求堂에서 유숙할 때, 꿈속에서 주자와 여조겸을 만나 수작한 뒤, 깨어나 그 느낌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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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谷蟄窩說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단곡에서 칩거할 때 ‘蟄’자의 의미에 대해 밝힌 글이다. 사람의 출처는 결국 운수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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枯竹說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枯竹에 대한 저자의 느낌을 적은 글이다. 金花社 곁에 심은 대나무가 봄,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다가 가을 겨울이면 말라버리는 것을 보고, 대나무의 성질과 인간의 출처를 견주어 저자의 삶의 지향을 드러내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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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品優劣辯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백운동서원에 심어져 있는 烏竹과 淡竹에 대해 창석 이준과 竹品의 우열을 논변한 글이다. 저자는 烏竹보다는 淡竹의 ‘淡’이 함축하고 있는 내재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오죽에 대한 편벽된 미의식을 비판하고 담죽예찬론을 편 이면에는 인재를 외양과 이름으로만 평가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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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金生卒業小學說 14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김생이 『소학』을 배우다가 왜란 때문에 다 배우지 못하고 집으로 갔다가 재차 찾아와 『시경』을 배우고자 하였다. 이에 저자는 『시경』보다 『소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면서 다 배우지 못한 『소학』을 마져 배울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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幹巖說贈玹 15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장남 곽현이 단곡의 어귀에 암자를 지어놓고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자, 저자는 주역의 蠱괘에 나오는 ‘幹’의 의미를 가져와 이름을 부여하고, 나아가 집안을 잘 지켜나갈 것을 당부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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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純傳 15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裵純은 풍기의 죽계 상류, 즉 ‘배점’마을에서 무쇠를 다루어 기구를 생산하고 있던 대장장이다. 저자는 배순의 근면성과 선행을 소개하여 지배층의 타락한 심성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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闡幽錄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師友錄에 보였던 인물 중에 영주의 金蓋國과 金隆, 풍기의 安應一과 南, 도촌의 權虎臣, 영주의 權를 뽑아 그들의 탁월한 행적을 특기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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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友錄(先生易簀日絶筆) 31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저자가 임종시 口授하여 엮은 것으로, 예안의 日休堂 琴應夾(1526~1586)을 필두로 풍산의 琴夢馹에 이르기까지 43명의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다. 당대 선비들과의 교유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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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鶴沙 金應祖(1587∼1667)가 쓴 저자의 묘갈명이다. 행장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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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2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八友軒 趙普陽(1709~1788)이 쓴 저자의 행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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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皐里社初享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白皐里社의 初享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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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 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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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9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小山 李光靖(1714∼1789)이 쓴 저자의 문집 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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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宇宙庵集 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放歌, 謝禹子正贈盆梅, 獨歎息行, 不平曲, 送白雲歌, 贈印珍師, 和贈李季獻, 鳳兮歎, 贈志雲和尙, 伏次家大人韻, 白鶴歌, 文殊庵贈老釋, 春帖, 登樓, 謹次, 靜觀吟, 寒食, 待友不至, 贈李明伯, 贈申丈謹之, 九月十三日到泉谷阻雨留店吟得一絶(西行), 翌日路上吟, 十一月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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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誅賊臣李爾瞻疏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1618년(광해군 10)에 이이첨을 목베어 죽일 것을 청하는 소장이다. 이이첨 부자가 힘없는 士族과 고할 데 없는 下賤들을 겁탈하고, 인재를 구하는 과거를 私門의 당파를 부식하는 도구로 삼는 등 더할 수 없는 비행과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 죄상을 빠짐없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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獄中答上嚴府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곽진옥중에서 아버지에게 올린 편지이다. 아버지의 안부와 자신의 심경을 담아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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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대소재집(大疎齋集) 大疎齋 權顯相의 시문집, 4卷 2冊, 四周雙邊, 半郭 20.5 × 17.0㎝,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31.6 × 21.0㎝. 저자의 손자 權煥이 유고를 柳致皜(1800~1862)에게 부탁하여 刪定하고 1857년(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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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行子, 述懷, 上立齋鄭先生(幷小序), 立齋先生有贈別韻追次以呈, 附原韻, 病寄從弟純如(道相)澗亭寓所, 上立齋鄭先生二首, 輓李寡齋(鎭東)丈, 余與穉承有爭戱文字金禹文(玄壽)有書諷頗持兩端, 澗亭有老梅一本禿然無枝春來數蘂花依然若人家壁上所畵人謂奇格今春忽枯死此是亭中舊物惜也四兄周宅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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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輓徐南厓幼祥(幹發), 見黃瓚于(中琯)書將修整貞窩集刊以來春有感卻寄, 次呈權公賴(世求)慶壽韻(幷小序), 輓朴君重(漢汲), 輓族兄聽澗公, 輓豐安君柳公(相祚), 輓鶴棲柳公(台佐), 春朝, 示諸弟, 春雨, 重陽後二日, 輓金宅謙(璣吉), 輓金聲遠(永奎), 寓中偶吟, 鄭穰叟(昌熙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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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立齋 鄭宗魯(1738~1816)에게 올린 편지이다. 일찍이 선생의 명망을 듣고 그리워하던 차에 뵙게 되니, 비록 緖論을 듣거나 제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난 날 썩고 비었던 마음이 곧 가득찬 것을 깨달았으니 30년 생애에 큰 다행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계시는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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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입재 정종로에게 올린 편지이다. 몇 년 동안 뵙지 못해 그리움만 간절하다고 하였다. 자신은 나이가 30이 넘었지만 아직 뜻이 확고하게 서지 못하여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독서를 하여도 문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경전을 들고 선생님 앞에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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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입재 정종로에게 올린 편지이다. 해가 바뀌니 더욱 그리움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講會에 여러 군자들이 모였으니 이것은 동남지방의 성대한 일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집안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운수가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道院 강회는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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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입재 정종로에게 올린 편지이다. 선생께서 80된 나이로 도가 오묘한 곳에 이르고 신선의 비결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斯文을 이끌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부친의 병환 때문에 해를 이어 애를 태우며 동분서주하였으나 물결 위를 달리고 바람을 쫓듯 효과가 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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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代門父老作)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입재 정종로에게 올린 편지로 문중의 어른들을 대신하여 지었다. 선조인 草澗 權文海의 문집 校勘을 부탁한 글이다. 초간 선조가 일찍 퇴계 선생을 사사하여 크게 師友들의 인정을 받았던 사실은 행장이나 묘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남은 유집을 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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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立齋先生別紙(大學疑目)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입재 정종로에게 올린 편지로 『대학』의 의문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宋德隆盛, 入德之門, 明明德, 格物而后知至, 穆穆文王…止於信, 聽訟章, 心不在, 孝弟慈, 上恤孤民不倍, 其事不終 등에 대해 문답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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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南損齋先生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損齋 南漢朝(1744~1809)에게 올린 편지이다. 선생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從弟 道相이 다행하게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늘 선생의 풍모와 범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사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고 하였다. 죽기 전에 꼭 종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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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損齋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손재 남한조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 번 상례에 대해 경솔하게 질문한 것에 대해 은혜롭게 돌보아 주시고 미혹한 사람을 인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였다. 喪期가 다가온다고 먼저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시니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가를 내서 찾아뵙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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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叔顒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鄭象觀(字 叔顒)에게 보낸 편지이다. 崔孝述의 字序를 읽어보니 죽음을 느슨히 하고 법률을 느슨히 하게 하는 곳이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물었다. 종종 句讀를 떼기 어려운 곳도 있으니 다시 살피기 바란다고 하였다. 집사의 문장은 先秦에 근접하였으나 자신의 문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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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叔顒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정상관에게 보낸 편지이다. 文章 작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보내준 문장을 읽어보니, 글자가 기이한 것은 揚雄과 비슷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班固와 비슷하지만 자신은 구두도 떼기 어려우니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남들은 문장작법을 바꾸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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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南誠齋(漢皜)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誠齋 南漢皜(1760~1821)에게 올린 편지이다. 남한호는 손재 남한조의 재종제이다. 손재 선생의 喪禮가 끝나가니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였으며, 遠塘에 喪事가 뜻밖에 나왔으니 또한 애통하다고 하였다. 손재선생께는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편지로 가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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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南誠齋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성재 남한호에게 답한 편지이다. 남한호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한 글이다. 과거를 보고 돌아오니 보내신 편지가 도착해 있어서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은 연연할 것이 없으나 반평생을 夢寐간에 보내고 조금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先師(남한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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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南誠齋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성재 남한호에게 올린 편지이다. 근래에 병이 나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무엇 때문에 병이 났으며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물었다. 손재 남한조와 입재 정종로 집안의 문자들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으니 이 책임이 모두 선생에게 있으니 도를 위해서 스스로 아끼고, 억지로라도 약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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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黃貞窩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貞窩 黃龍漢(1744~1818)에게 올린 편지이다. 戚後生으로 선생의 덕을 사모함이 남들보다 깊었는데,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나서 찾아 뵌 것이 너무 늦었고 물러난 것이 너무 빠른 것이 한스러웠다고 하였다. 조부 문집을 구성하는 일은 당세에 맡을 만한 사람은 선생뿐이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