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87301
上黃貞窩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정와 황용한에게 올린 편지이다. 모친의 병이 5년을 이어지니 애타는 마음을 말로 할 수 없고, 자신은 바람을 쫓듯 동분서주하였으니 웃음만 나올 뿐이라고 하였다. 늘 한 밤중에 잠 못 드는 것이 이뿐만이 아니라 고인들이 문장과 학술로 당세에 칭송을 받던 나이도 이미 지출처 : 유교넷 -
387302
答柳定齋誠伯(致明)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 답한 편지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없으니 늘 안타깝다고 하였다. 참봉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은 하늘이 영남을 버린 것이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애통하다고 하였다. 저자 자신의 집안도 골육의 아픔이 한둘이 아니라출처 : 유교넷 -
387303
答權穉成丈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權徶(字 穉成, 1770~1837)에게 답한 편지이다. 喪事에 위로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곧 답장을 올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였다. 집안에 화가 겹쳐 십 수 년 사이에 상사가 이어졌고 심지어 반 달 사이에 상사가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였다. 상자 속의 원고는 여러출처 : 유교넷 -
387304
上李丈(泰淳)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泰淳(1759~?1840)에게 올린 편지이다. 초봄에 부임을 전별하는 자리에 나가서 술잔을 올리지 못하고 편지로 대신하니 송구하다고 하였다. 삼가 세 가지 경계할 일을 말씀드린다고 하였다. 하나는 서쪽 지방의 풍토가 남쪽 지방의 음식과 다르니 기거함에 몸을 손상시키출처 : 유교넷 -
387305
上李丈 3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丈에게 올린다고 하였는데 내용으로 보아 앞의 이태순에게 올린 편지 같다. 都目政事가 이미 여러 번 지났으나 벼슬에 제수한다는 소식이 없으니 그대는 유감없이 생각할 것이지만 재야에 있는 사람은 世道를 위해 개탄하다고 하였다. 벼슬에 나가는 대신, 여러 어른과 도산과출처 : 유교넷 -
387306
上內舅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외숙에게 올린 편지이다. 5년 만에 잠시 만나 회포를 다 토로하지 못하여 서운하였는데, 오랜 장마로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고 하였다. 두루 집안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였다. 외숙모의 行記는 아직 편차를 이루지 못했으나 당시 誄文을 참고하고 자출처 : 유교넷 -
387307
與李子木丈(秉鐸)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秉鐸에게 보낸 편지이다. 樊巖의 문집이 간행된 것은 매우 다행이지만 玉川의 묘갈명이 뽑힌 것은 매우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그 당시 沈某의 글은 正論이라 할 만하지만 아직 어떠한지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나주의 眉泉도 이미 復享하였고, 홍양의 魚在洞도 본가에 집을 짓출처 : 유교넷 -
387308
與陁陽諸老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陁陽書院의 여러 어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선조의 글을 간행하는 일을 작년 초겨울에 시작하여 재목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지난 臨皐書院의 모임은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해 여론이 어떤지 듣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였다. 문자와 돈을 보내준 것은 감사하게 생각한 것이출처 : 유교넷 -
387309
上宰相 3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당시 영의정에게 올린 편지이다. 「대동운부군옥」의 발간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대동운부군옥」의 가치와 鶴峯 외에 그 가치를 인정하고 간행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한 사연을 적고 영의정께서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어달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10
與李元緯 3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元緯에게 보낸 편지이다. 友道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적은 것이다. 이원위가 뜻이 너무 고상하여 세속의 짜고 신 것은 일체 등지고 모두 제거하려는 뜻이 있는 것에 대해, 군자는 의지를 가지고 지키는 것이 있어서 의리와 이욕, 그리고 시비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고 세속의출처 : 유교넷 -
387311
上柳豐安君(相祚)使行 3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청나라로 사신가는 柳相祚(1763~?1838)에게 올린 편지이다. 노년에 먼 길을 가기 쉽지 않으나 임금의 바람과 당시 중망이 있으니 잘 갔다 오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先先生이 사신 갔던 해가 己丑년인데, 올해가 기축년이니 우연이 아니라고 하였다. 吳仲周의 자손 중에출처 : 유교넷 -
387312
答鄭魯庵丈 3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魯庵 鄭丈에게 답한 편지이다. 종제가 죽은 후로 외롭게 지낸다고 하였다. 문하에 찾아가 차근차근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하였다. 근래에 士風이 날로 무너져 덕을 온전히 보전하는 사람이 드문데, 집사께선 어려운 세상에 몸을 잘 보전하였으니 더욱 몸을 잘 보중하여 영남 사출처 : 유교넷 -
387313
與趙弘濟(述立) 39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趙述立에게 보낸 喪事의 위로 편지이다. 先先生의 보살핌을 받아 부형과 다름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날에 집안에 슬픈 일이 있었고, 장례 날에도 제자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先先生의 죽음은 吾道의 액운이라 하면서, 그대는 선조의 유업을 잘 이어서 士友들의 바람에출처 : 유교넷 -
387314
答徐城主(畊輔) 39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성주 徐畊輔에게 답한 편지이다. 태수를 한 번 찾아뵈려고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안부 편지를 보내주니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15
答黃瓚于 4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黃瓚于에게 답한 편지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안부편지를 보내 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貞窩遺稿는 이미 정돈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내년 봄에 간행한다고 하니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16
馬山南遊詩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1810년(순조 10)에 족형 周宅, 종제 純如 등 부형들과 남해의 마산포를 유람하고 지은 시에 서문을 쓴 것이다. 자신은 병으로 직접 가지는 못하였기에 고금 유람에 관한 고사를 열거하여 유람을 대신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17
鄕校藏書節目小敘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1815년(순조 15) 군에서 明經을 시험하고 군수 李羲溫이 이곳에 와서 학교를 부흥시키고 돈을 내어 향교에 경서를 마련해 주었다. 이희온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것을 기록하고 아울러 장서의 절목을 기록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18
婣孝契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재종숙 집안의 사위들이 처가의 어려운 형편을 돕기 위해 힘을 보태기로 하고 계를 모으고 ‘婣孝契’라 한 것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87319
贈參議崔公狀後敘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贈參議 崔公의 行狀을 읽어보고 감회를 적은 것이다. 최공은 임진왜란 때 공신 和城君의 후손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의 손에 길러졌다가 장성해서는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묘소를 보살폈다. 이인좌의 난에는 安城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후에출처 : 유교넷 -
387320
大疎軒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大疎라고 편액을 하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선조께서 軒을 만든 지 8,9대가 지나 담장과 벽이 무너졌는데도 수리할 줄 모르니 성근[疎] 것이요, 독서하고 행실을 닦았지만 문호가 쇠퇴한 것을 걱정하지 않으니 성근[疎] 것이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지 못해 종족에게출처 : 유교넷 -
387321
鄕射堂重修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鄕射堂을 중수하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향사당은 1493년(성종 24)에 鄕射를 위해 지은 것이다. 그 후 네 선생을 당에서 제사지내면서 사당을 겸하게 되었고 그 후 사당의 기능만 하게 되었지만 옛날의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근년에 사당이 심하게 무너져 고을출처 : 유교넷 -
387322
洛阿草堂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洛阿草堂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洛阿草堂은 秋得來가 지은 것으로 성 남쪽 龜山의 북쪽 일명 鳳丘라는 곳에 있다. 봉황이 언덕에 깃들고 洛水에서 나오네[棲阿出洛]에서 뜻을 취하여 편액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87323
百承閣記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百承閣을 지은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百承閣은 선조인 권문해의 「大東韻府群玉」의 목판을 보관한 곳이다. ‘百承’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朱子 藏書室銘에서 따온 것으로 백세토록 계승한다는 의미로 오래 전해지기를 바라는 의미이다.출처 : 유교넷 -
387324
書退溪先生與先祖草澗府君手帖後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선조 초간 권문해가 약관 시절에 도산의 寒棲菴에 한 달 머물며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돌아올 때 퇴계 선생이 손수 「夙興夜寐箴」을 써서 주셨다. 그러나 부군이 돌아가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서적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이 첩이 있었다출처 : 유교넷 -
387325
書申烈婦朴氏行蹟後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聞喜(聞慶)의 열부 신씨 행적을 읽고 감회를 적은 것이다. 부인의 행적을 읽어보니 어릴 때 행실에서부터 절개를 지켜서 죽은 날까지 행실이 한결같이 법도에 맞은 것은 이 부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이미 죽기를 맹세하고 아들이 죽은 날 목출처 : 유교넷 -
387326
職窩說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職’으로 당호를 삼은 연유를 적은 것이다. 천하 만물에 어느 것 하나 직분이 없는 것이 없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도 그 사이에 직분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이 만약 직분을 알지 못하면 크게는 예의와 충효에 어두울 것이고, 작게는 화복과 득실의 상황에 늘 근심하게출처 : 유교넷 -
387327
戒馬說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말에 비유하여 젊은 사람의 심성은 주위의 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 집에 망아지와 소가 같은 우리에 살면서 서로 해치지 않고 마치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영주에서 어떤 손이 말을 타고 왔기에 같은 우리에 매어 두게 되었다. 그런출처 : 유교넷 -
387328
文章辨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저자의 文章觀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수레라는 것은 짐을 싣기 위한 것인데, 수레를 만들어 놓고 짐을 싣지 않으면 비록 바퀴와 끌채를 화려하게 장식해도 헛된 수레일 뿐이고, 옷은 입기 위한 것인데 옷을 만들어 놓고 입지 않으면 비록 화려하게 수를 놓았더라도 헛된 옷일출처 : 유교넷 -
387329
不求堂先生金公請贈事上言(代儒生作)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不求堂 金迬에게 관작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 달라고 임금에게 올린 소이다. 金迬은 정묘호란 때 號召使 張顯光의 막하에서 계획을 도왔고, 병자호란 때는 성균관 유생들과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성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의병을 모아 漢院에 도착했으나 강출처 : 유교넷 -
387330
贈參判竹林先生權公請諡事呈巡相文(代儒生作)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竹林 權山海의 시호를 청하기 위해 관찰사에게 올린 글이다. 권산해는 명문가의 자제로 조정에서 관직을 여러 번 내려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선왕에게 보답하지 못한 것을 어린 임금에게 보답한다고 하면서 단종 때 첨정의 벼슬을 하였다. 단종이 선위하자 벼슬을 내놓고 여러출처 : 유교넷 -
387331
壬辰殉節士贈持平朴公請旌閭事呈官文(代儒生作)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임진왜란 때 순절한 朴友賢의 정려를 청하기 위해 관에 올린 글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충주로 진격하자 박우현은 비록 현재 벼슬은 없지만 대대로 충효를 지켜온 가문으로 나라가 위급하니 목숨을 바쳐 의리를 세울 때이며, 충주는 부모의 고향이니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출처 : 유교넷 -
387332
北溪書堂重修上樑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北溪書堂을 중수할 때 상량식에 지은 글이다. 北溪書堂은 문경 산북에 위치한 것으로 1692년(숙종 18)에 고을의 어른들이 교육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상량한 후에 文敎가 중흥하고 서당은 쇠퇴하지 않고 육경을 외고 사서를 읽어서 재주 있는 사람을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출처 : 유교넷 -
387333
小宗家重修上樑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小宗家를 중수할 때 상량식에 지은 글이다. 상량한 후에 소나무처럼 점점 무성하고 달처럼 항상 밝게 남아서 경사가 이어지고 자손이 번성하며 선조를 이어서 즐거움이 넘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34
書堂上樑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서당을 짓고 상량식에 지은 글이다. 상량한 후에 儒敎가 날로 성대해지고 科業은 대대로 더해지고 훌륭한 이들이 서당에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35
曾叔祖處士公行狀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曾叔祖 權墄의 행장이다. 자는 丹彦, 본관은 醴泉, 1722년(경종 2)에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기품이 있었고 특히 인륜에 돈독하였다. 1757년(영조 33)과 1760년(영조 36)에 부모가 연이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奉祭祀에 정성을출처 : 유교넷 -
387336
恭人完山崔氏行記 3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恭人은 진사인 외숙 남양홍공의 어진 부인으로 1764년(영조 40)에서 태어나서 1815년(순조 15)에 세상을 마쳤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착했고, 18세에 진사에게 시집갔다. 시부모에게 효도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동서간의 우애도 마치 형제간 같았다. 집안이 평소출처 : 유교넷 -
387337
通訓大夫司憲府持平下晩邊公行狀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공은 휘가 始暹, 자는 日進, 본관은 原州이다. 1773년(영조 49)에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아울러 科擧공부도 하였다. 재주가 영민하고 견해가 투철하며 章句에서 제가의 註疏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801년(순조 1)에 2출처 : 유교넷 -
387338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朝奉大夫宗簿寺僉正竹林先生權公行狀 39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선생은 휘가 山海, 자는 德甫, 본관은 安東이다. 1403년(태종 3) 龍宮縣에서 태어났다. 權軫(從祖父)의 門人으로 세종 조에 錄事·注簿로 천거되었으나 戚誼의 情實이라는 오해가 있을까 사양하고 成三問·朴彭年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1454년(단종 2) 僉正이 되고,출처 : 유교넷 -
387339
大東韻玉告成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대동운부군옥」의 판각을 완성한 것을 아뢴 글이다. 權文海(1534~1591)가 元의 陰時夫가 지은 『韻府群玉』의 체재를 본떠 만든 것으로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각종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韻에 따라 배열했다. 권문해가 대구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김성일과 정구의출처 : 유교넷 -
387340
祭貞窩先生黃公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貞窩 黃龍漢(1744~1818)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黃龍漢은 자가 稚見, 호는 貞窩, 본관 昌原이다. 黃暹의 후손으로 李象靖의 문인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문하에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戚後生으로 문하에서 공부하여 존모함은 있지만 스스로 얻은 것은 없다고 하출처 : 유교넷 -
387341
祭松皐柳丈(延燁)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柳廷燁(1737~?181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柳廷燁은 자는 明瑞, 호는 松皐, ?본관은 全州, 安東에 거주하였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42
祭鶴林權公(訪)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權訪(1740~1808)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權訪은 본관이 安東, 자는 季周, 호는 鶴林, 安東에 거주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1763년(영조 3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83년(정조 7)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부정자를 지내고, 1787년(정조 11) 종부시주출처 : 유교넷 -
387343
祭柳丈(宗睦)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柳宗睦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선친과 절친한 벗이었던 이의 제사에 남다른 슬픔을 서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44
祭龜窩先生金公()文(代人作)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金(1739~1816)의 제사에 올린 글로 남을 위해 대신 지은 것이다. 金은 본관이 義城, 자는 子野, 호는 龜窩, 安東에 거주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1773년(영조 4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77년(정조 1)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맑은 얼출처 : 유교넷 -
387345
祭外舅梅竹軒李公(宅淳)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宅淳(1744~1810)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李宅淳은 본관이 眞城, 자는 于揆, 호는 梅竹軒이고, 安東에 거주하였다. 퇴계 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나 風儀가 준수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선조의 유업을 잘 이었다고 하였다. 이제 공이 돌아가시니 나의 어리석음을 열어줄출처 : 유교넷 -
387346
祭鄭叔顒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鄭象觀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鄭象觀 같은 훌륭한 재주와 문장을 가졌지만 중국에 태어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자신의 재주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또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47
祭服齋純如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從弟인 權道相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權道相(1786~1818)은 본관이 醴泉, 자는 純如, 호는 服齋, 예천과 용문에 거주하였다. 南漢朝의 門人이다. 동당의 형제간으로 학문과 수양을 함께 하였는데 일찍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48
祭李景時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李景時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옥 같은 그대의 모습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니 더욱 눈물이 흐른다고 하였다. 봄바람 불고 꽃피는 도산에서 다시는 그대와 함께 놀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87349
祭李巡相(在秀)文(代鄕儒作)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觀察使 李在秀의 제사에 올린 글로 예천 유림을 대신해서 지었다. 이관찰사가 군민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준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근래에 백성들이 고통에 빠지고 간악한 아전들은 법을 멋대로 고쳐서 백성들은 화를 겪었는데 관찰사가 밝은 눈으로 법률을 잘 다스려서출처 : 유교넷 -
387350
祭族曾大父(垞)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현상權垞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여러 손자들이 숲처럼 벌려서 복이 끊이지 않으니 공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겠지만 문중을 돌아보고 후생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으니 어디에 의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