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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16451

    2. 갈천리(葛川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갈천리의 위치와 연혁 갈천리 동명의 유래는 갈면의 갈(葛)자와 옥천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HXMLPIC ID="001"></HXMLPIC> 이 마을은 영해에서 서쪽으로 12km되는 거리이며 창수면 소재지에서는 약 8km지점에 위치하여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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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2

    3. 미곡리(美谷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미곡리의 위치와 연혁 미곡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의 산세가 아름다운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등운산 밑이 되므로 미실(美實) 또는 미곡이라 했다고 한다.<HXMLSUP ID="013"></HXMLSUP> 이 마을은 영해에서 서쪽으로 91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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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3

    4. 백청리(栢靑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백청리의 위치와 연혁 백청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18km정도 되며, 영덕군 소재지에서 가장 먼 거리인 32km지점에 위치한 옷재(烏峴) 아래에 있다. 동쪽에는 독경산(讀經山)이 솟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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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4

    5. 보림리(寶林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보림리의 위치와 연혁 보림리의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16km 정도 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 12km 정도 되며, 백청동 아랫마을이며, 본 면의 서쪽과 북쪽 산간의 취락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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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5

    6. 삼계리(三溪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삼계리의 위치와 연혁 삼계리의 동명의 유래는 옷재(烏峴)에서 발원(發源)하여 보림·인천을 거쳐 흐르는 내와 삼승령(三僧嶺)에서 발원하여 수리를 거쳐 흐르는 내와 칠보산(七寶山)에서 발원하여 국골(菊谷)을 거쳐 흐르는 내가 합류(合流)하는, 곧 세 골짜기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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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6

    7. 수 리(水 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수리의 위치와 연혁 수리 동명의 유래는 숯을 구웠으므로 숯골·숙골·수곡·탄동리(炭洞里)·수동(壽洞)이라 하다가 수동(水洞)이라 기록하였다.<HXMLSUP ID="027"></HXMLSUP>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20km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 약 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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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7

    8. 신기리(新基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신기리의 위치와 연혁 신기리 동명의 유래는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 새술막 또는 신기라 하였다. <HXMLPIC ID="001"></HXMLPIC>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4km가 좀 더 되는, 곧 918번 도로에서 69번 도로로 갈라지는 창수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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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8

    9. 신리리(新里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신리리의 위치와 연혁 <HXMLPIC ID="001"></HXMLPIC> 신리리의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배와 같이 된 지형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배실(新梨)이라 했다고 하며,<HXMLSUP ID="037"></HXMLSUP> 일설에는 마을에 큰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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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59

    10. 오촌리(梧村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오촌리 위치와 연혁 오촌리 동명의 유래는 오동나무가 많았으므로 오동나무말, 줄여서 오말 또는 오촌이라 하였다. 오촌리는 영해에서 약 12km정도 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 약 8km정도 되는 거리에 있으며 69번 지방도로가 마을 복판을 통과한다. 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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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0

    11. 인량리(仁良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인량리의 위치와 연혁 <HXMLPIC ID="001"></HXMLPIC> 인량리 동명의 유래는 예로부터 명현거유(名賢巨儒)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많이 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4km 정도 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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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1

    12. 인천리(仁川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인천리의 위치와 연혁 인천리는 원래 인아리(仁雅里, 이나리, 이내리)로 마을 주위의 산과 바위, 마을 앞 냇물이 맑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16km 정도 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 약 12km 지점에 있으며 69번 지방도로가 마을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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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2

    13. 창수리(蒼水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 창수리의 위치와 연혁 창수리의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창수원(蒼水院)이라는 숙식(宿食)시설이 있어 창수원 또는 창수라 하였다.<HXMLPIC ID="001"></HXMLPIC> 이 마을은 영해에서 약 16km 정도 되며 창수면 소재지에서 약 12km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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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3

    1. 조선시대의 인구 및 호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誌)나 부지(府誌) 또는 군지(郡誌) 등에는 면 단위의 인구·호수 통계는 기록되지 않고 부(府)단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정조(正祖)연간에 기록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면 단위의 인구와 호수가 나와 있다. 조선시대의 영해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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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4

    2. 근·현대의 인구와 호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으나, 광복의 기쁨도 얼마 가지 않아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전후 복구를 통해 1960년대 이후 197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사회로의 준비하는 시기로 두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사회의 모습을 일신하는 결과(1980년대)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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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5

    1. 개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창수면의 마을 분포는 동쪽의 인량리에서 서쪽의 백청리에 이르기까지 13개리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마을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해로 흐르는 냇물이 마을 중앙, 또는 변두리로 흘러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들로 멀리는 부족국가시대에서부터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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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6

    2. 가산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가산1리는 가사리(佳士里) 또는 단산(丹山)이라고도 하였으며, 마을을 개척한 분은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박씨터전에 이씨골매기라는 마을제당의 전설로 보아 박씨가 터를 잡았고 이씨가 마을을 형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뒤 안동권씨와 영양남씨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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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7

    3. 갈천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갈천1리는 갈산(葛山) 또는 갈면(葛面)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약 8백여년 전에 누군가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하며, 고종(高宗) 16년(1897)경에 재령이씨 운서(雲棲) 이현규(李鉉圭)가 갈면이라 했다 하며 절못·새못(寺村, 新村)은 숙종 31년(1705)경 무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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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8

    4. 미곡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미곡리는 미실이라고도 부르며 옛날 검사(檢使) 유원서(兪元瑞)가 개척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약 7백년 전에 정씨(鄭氏)가 들어와 정촌(鄭村)이라 하다가 조선 초기에 신자악(申自嶽, 1359[공민왕8]~[세종22])이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그 후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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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69

    5. 백청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백청리는 조선 성종(成宗)에서 중종(中宗) 연간(1487~1507 ?)<HXMLSUP ID="019"></HXMLSUP>에 김씨(金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으며 약 백년 뒤에 수안김씨 진사(進士) 김필경(金必慶)공이 입주하여 흘리(屹里, 허리골)라 했으며, 함창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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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0

    6. 보림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보림리는 성종(成宗) 19년(1488)경에 원씨(元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버임이라 했다 하며 그 뒤 무안박씨가 입주하여 옷재(烏峴)라 하였다가 보림(寶林)이라 하였다. 1992년도 성씨별 가구분포를 보면<HXMLSUP ID="022"></HXMLSUP>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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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1

    7. 삼계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삼계1리는 옛날 상산(商山)이라 하다가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배목(舟項)이라고도 하며 또 등운산(騰雲山)의 운(雲)자를 따서 운계(雲溪)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 성종(成宗, 1469~1494)때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광해군(光海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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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2

    8. 수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수리는 숯골이라 하여 탄동(炭洞), 수동(壽洞), 수동(水洞)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약 5백여 년전 원씨(元氏)와 주씨(朱氏)가 입주하였다고 하며 선조(宣祖) 40년(1607)경에 최씨(崔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함양박씨 원모재(遠慕齋) 종산(從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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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3

    9. 신기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신기리는 새술막이라고 하는데 옛날 새로운 주막이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누가 개척하였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신기2리인 우장골(葦長谷)은 진성이씨 영해 입향조인 영모당(永慕堂) 이선도(李善道)공의 후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1992년도 성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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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4

    10. 신리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신리는 새배실 또는 벽수(碧水)라고도 불렀다. 현재 행정구역상 벼락딤(霹落村)·도리갈면(上葛洞)·마르배기(馬村)<HXMLSUP ID="038"></HXMLSUP>가 신리에 해당된다. 1992년도 성씨별 가구분포를 보면, 총 100가구 중 월성이씨 13가구, 재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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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5

    11. 오촌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오촌리는 오말이라고도 부르며, 고려(高麗) 고종(高宗) 말년에서 충렬왕(忠烈王, 1259~1274) 초에 안씨(安氏)가 개척하여 오말이라 하였고 그 뒤 오씨(吳氏)가 입주하여 오장골이라고도 하였다.<HXMLSUP ID="040"></HXMLSUP> 그 뒤 광해(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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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6

    12. 인량리 성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이재곤
    인량리는 잉량화(仍良火)라 하다가 조선 초기에 비개동(飛蓋洞), 중기에 익동(翼洞)이라 했으며 광해군(光海君) 2년(1610)에 인량으로 개칭하였다.<HXMLSUP ID="044"></HXMLSUP> 이 마을은 광해군 7년(1615)에 이미 향약(鄕約, 洞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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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7

    맹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맹암집(孟巖集) 孟巖 金英烈의 문집. 石印本, 序: 金正模(1906), 舊序: 金壽祖‧沈允之(1805), 重刊序: 金氵+冀洙(1844), 跋: 金世躍(1805)‧金應煥(1967)‧邊時淵(1969), 2卷 1冊: 四周雙邊, 半郭 19.2×14.4㎝, 有界, 10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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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雪夜, 赴召感吟, 南山詠雲, 退居詠懷, 孟洞草堂, 退居詠懷, 孟洞草堂, 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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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79

    辭職疏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고려조에 입은 은택이 큰데다 盛滿을 경계하는 가법을 앞세우고, 또 자신은 이미 삼품의 직위를 차지하여 기대하던 바에 이미 지나치고 분수에 넘친다는 점, 아버지의 연세가 높다는 점을 들어 사직하고 싶다는 내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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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0

    答趙相(英茂)書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趙英茂(?∼1414)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두에서 저자 자신은 비루한 자질로 국가의 성대한 은혜를 입었지만, 盛恩에 보답할 길이 없어 매우 두렵다고 하였다. 이어서 국가가 비록 건국 초기이지만, 성왕의 밝은 덕과 어진 신하들의 보좌가 있으니 堯‧舜 3대의 성대한 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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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1

    答李贊成(叔蕃)書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李叔蕃(1373∼1440)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는 자신의 얕은 재주에 비해 성대한 은혜를 입었다고 하며, 아울러 관직에서 물러나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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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2

    答權陽村(近)書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陽村 權近(1352∼1409)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는 병치레를 하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이어서 산림에 은거하더라도 부인과 상의하면 조상님께 올릴 祭需는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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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3

    答李容軒(原)書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容軒 李原(1368∼1430)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는 늙고 병들어 산림에서 노니는 취미가 없는데, ‘道’라고 말하는 것은 과분한 처사라고 하였다. 이원 당신이 은거하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임금께서 당신의 충성과 덕을 잘 알고 있으니 사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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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4

    會盟錄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李芳遠이 신하로써 開國定社佐命功臣 등을 이끌고 皇天上帝와 宗廟社稷과 山川百神의 혼령에게 고하는 글이다. 먼저 태조가 神武한 자질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입어 한 나라의 군주가 될 때, 자신 또한 勳臣들과 함께 피로 동맹을 맺어 대업을 도와 이루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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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5

    功臣錄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太宗朝의 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의 신분과 훈급을 기록한 글이다. 일등 4인, 2등 3인, 3등 9인, 4등 22인으로 총 38인인데, 良昭公 김영렬은 삼등에 올라 있다.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국조보감󰡕의 기사와 주를 인용하여 朴苞가 왕자 芳幹을 옹위하여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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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6

    出國史(追補)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수군의 지휘자로 왜구를 방어한 이력을 적은 기록이다. “1395년(태조 4) 8월 9일, 右道 水軍僉節制使 김영렬이 왜선 한 척을 탈취하고 왜구 20명을 생포해 바친 공으로 廐馬 한 필과 비단과 官醞을 하사했다[太祖四年 乙亥 八月 九日戊子 右道水軍僉節制使金英烈 捕倭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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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7

    延諡顚末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1423년(세종 5) 議政 權軫(1357∼1435)이 ‘良昭’라는 諡號 備望을 入啓하여 윤허를 받은 사실로부터, 贈諡와 아울러 贈職이 함께 이루어진 사실, 이미 있었던 화상을 자손가로 보내면서 禮官으로 하여금 致祭한 내력을 간단히 적은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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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8

    賜祭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모두에 前參判義城君의 忠貞은 실로 국가가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훈열과, 歃血同盟으로 敵徒의 예봉을 무릅쓰고 심력을 바친 결과 그분들과 함께 성대한 명성을 이루었음에 대한 致辭를 적었다. 공을 이루었음에도 물러나 初志를 지킨 덕을 흠모하여 작위를 더하고 시호를 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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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89

    畵像贊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태종이 그리도록 명령한 김영렬의 畵像에 대해 沈德符(1328~1401)와 李原(1368~1430)‚ 李升商 등이 쓴 贊文 3건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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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0

    畵像敘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1579년(선조 12) 族後孫 東岡 金宇顒(1540 ∼1603)이 지었다. 김영렬은 太宗朝 靖亂佐命功臣으로, 宗社가 태평하기를 기다려 사직소를 올리고 孟洞의 산수 사이에서 소요하였다. 죽은 뒤 세종대왕이 특별히 加資하여 諡號를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하면서 화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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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1

    墓碣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1530년(선조 26) 族後孫 金正國(1485∼1541)이 지었다. 김영렬의 字는 烈之, 本貫은 義城, 1370년(고려 공민왕 19) 義城에서 태어났다. 나이 겨우 학업에 뜻을 둘 정도에 石灘 李存吾 선생과 冶隱 吉再 선생이 만나보고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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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2

    行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1540년(중종 35) 沈連源(1491∼1558)이 지었다. 내용은 「묘갈문」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대대로 麗朝의 녹을 먹던 望族으로 나라가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조정에 서게 되는 심리적 갈등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즉 아버지 紘이 출사를 권하면서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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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3

    事實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遜齋 朴光一(1655∼1723)이 지었다. 묘갈문과 행장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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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4

    鶴林祠禮成祝文(失傳)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失傳’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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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5

    丁享祝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鶴林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할 당시의 축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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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6

    麥井祠奉安祭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遜齋 朴光一이 지었다. 良昭公 金英烈의 위패를 영당에 함께 봉안하여 향사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제문이다. 김영렬이 여러 번 징소에도 응하지 않으므로, 태종이 공을 그리워하여 화상을 그려 흠모의 정을 표시한 바 있었는데, 공이 돌아가자 세종이 화상을 자손가에 돌려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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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7

    附諸賢次韻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次孟洞草堂詩」라는 제목으로 相國 趙溫, 容軒 李原, 參判 沈龜齡, 代言 李膺, 獨谷 成石磷, 信齋 韓尙敬, 亨齋 李稷, 相國 金承霔이 지은 차운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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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498

    與孟巖金參判書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相國 趙英茂가 저자 김영렬에게 보낸 편지이다. 국가의 공이 높아 임금이 勳臣으로 대우한 사실을 서술하면서, 아울러 김영렬이 관직을 그만두고 長湍의 孟洞으로 내려간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416499

    與孟巖金參判書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李叔蕃이 저자 김영렬에게 보낸 편지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또한, 나라에 일이 많은데 산림으로 내려가 한가하게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舜임금과 주나라에 어진 신하가 있었다는 고사를 언급하면서, 다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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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00

    與孟巖金參判書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
    陽村 權近이 저자 김영렬에게 보낸 편지이다. 산림에서 은거하고 있는 권근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이어서 얼마 전에 옛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때 그대가 몹시 그리웠다고 하였다. 훗날, 술 한 병 가지고 높은 바위 아래에서 酬唱하고 싶다는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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