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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盟錄後敘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慶山縣令 李彙載(1795~1875)가 玉山에 있을 때, 어떤 한 山人이 문서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1404년(태종 4)의 공신회맹록과 金英烈에게 하사한 賜牌와 功臣錄券이였다. 이에 공신회맹록 뒤에 쓴 글이다. 1846년(헌종 12)년에 지은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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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谷影堂重修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족후손 拓庵 金道和(1825∼1912)가 1868년(고종 5)에 장성의 鶴林書院이 철폐된 후, 김영렬의 畵像을 모실 影堂을 重修할 때 쓴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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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遠契序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21세손 金洛卿이 1933년에 김영렬의 影堂을 玉井으로 옮긴 후, 후손들과 지역 사림들이 영당을 유지하기 위해 追遠契를 조직할 때 지은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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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書閣上梁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31년 태종대의 「공신회맹문」을 봉안할 丹書閣을 건립할 때 金鴻洛이 지은 상량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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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川書院記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58년부터 건립하기 시작한 新川書院을 완성한 후에 1959년 후손 金正模가 쓴 기문이다. 김영렬의 많은 후손들이 힘을 모아 신천서원을 건립한다는 것과 김영렬의 훌륭한 사적을 기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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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川書院奉安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59년 신천서원을 건립하고 김영렬의 위패를 봉안할 때 후손 金周悳이 지은 봉안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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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堂上梁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講堂을 짓고 金景植이 지은 상량문이다. 김영렬의 ‘乘家純孝‧報國貞忠‧靖亂佐命’의 정신을 尊慕하는 내용과 태종에게 입은 성대한 은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서 悠悠自適하는 삶 등을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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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敎堂記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63년 金周悳이 지은 글이다. 錦繡 漢川 가에 景勳祠를 짓고, 그 중간에 立敎堂을 지었다. 東齋를 ‘兢惕’이라고 하고, 西齋를 ‘修省’이라고 하였다. 경훈사 주변의 빼어난 산수와 김영렬의 훌륭한 공적과 산수 사이에서 悠悠自適한 삶을 기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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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805년(순조 5)에 후손 金世躍이 쓴 발문이다. 서문을 쓰는 데 있어 金百祥과 金翊中 등이 朴光一의 집 등에서 수집한 글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박광일은 김영렬과 함께 佐命功臣이었던 朴錫命(1370~1406)의 후손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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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67년 후손 金應煥이 지은 발문이다. 김영렬은 도에 가까운 자질로 堯‧舜의 대책을 시험하였고, 이후에는 孟巖의 아래에 물러나 舊業을 힘써 익혔다. 김응환은 하늘이 김영렬에게 몇 년을 더 빌려 주었다면 큰 일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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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영렬1969년 맹암집을 3차로 간행하면서 邊時淵이 지은 발문이다. 맹암집이 여러 차례 병화를 당하여 남은 것이 매우 영성했는데, 1805년(순조 5)에 재간을 하고, 1969년에 삼간을 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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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실기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방촌실기(厖村實紀) 厖村 黃喜의 문집. 木版本, 跋: 黃贊周(1897), 4卷 2冊: 四周雙邊, 半郭 19.0×15.3㎝, 有界, 10行 21字, 註雙行,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3×21.2㎝. 1925년 金勝鉉과 황희의 후손 黃正淵에 의해 간행되었다. 속제목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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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題吉州客舍(以上出東國輿地勝覽), 勤政殿元朝會宴(見東文選), 中樞院使李(貞幹)慶壽詩(二首, 孝靖公實記), 挽金桑村(自粹, 出桑村實記),次二憂堂李(瓊)伴鷗臺韻(出二憂堂集), 贈金遯齋(南澤, 出金氏家乘), 三傳韻呈金省齋(益生), 次卓景濂(光茂)韻(出卓氏家乘, 附原韻), 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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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言官補外疏 3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臺官을 外職에 補任한 경우, 능력이 있으면 임기전이라도 다시 대간으로 발탁하여 쓸 것을 건의한 상소이다. 1440년(세종 22) 7월 18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90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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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設鎭移排疏 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전라도에 있는 兆陽鎭을 高興으로 옮기는 문제를 논한 상소이다. 1440년(세종 22) 7월 18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90에 실려 있다. 마지막 부분은 缺落으로 표시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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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罷興天舍利閣慶讚疏 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興天寺의 舍利閣에 대해 경축 행사를 베푸는 일을 철회할 것을 건의한 상소이다. 황희의 排佛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1441년(세종 23) 윤11월 23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94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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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貢法難行箚(出國史) 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3년간 시범 시행해 본 貢法이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확대하지 말고 각 道의 형편에 맡길 것을 건의한 상소이다. 1440년(세종 22) 7월 13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90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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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六典所載不可輕改箚(出國史) 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노비를 결정하는 방식과 관련된 六典의 내용을 개정하는 문제를 반대한 상소이다. 1440년(세종 22) 7월 13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90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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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終時遺子孫書 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임종할 때 자손에게 남긴 글이다. 家禮에 따라 장례를 치르되, 형편과 능력에 따라 적절히 변통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히 불교식 예법은 따르지 말 것도 훈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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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領議政箋 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영의정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온갖 병치레로 몸이 불편한 데에다 나이도 70이 넘은 것을 이유로 들었다. 1432년(세종 14) 4월 20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56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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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賜几杖箋 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世宗으로부터 几杖을 하사받고 사은의 뜻으로 올린 글이다. 의자는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지팡이에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다는 묘사가 보인다. 1433년(세종 14) 5월 12일에 올린 것으로, 세종실록권56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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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諫安(省)畵像贊(出廣州安氏家乘) 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대사간을 지낸 安省의 畵像에 쓴 贊이다. 출처가 廣州安氏家乘으로 표기되어 있다. 安省(1344~1421)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日三이고, 호는 雪泉‧泉谷이며, 본관은 廣州며, 시호는 思簡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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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白氏族譜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405년(태종 5) 집현전대제학으로 있을 때 지은 水原白氏 족보 서문이다. 白氏의 시조는 중국 당나라 때 신라로 망명한 松溪公(白宇經)임을 말하면서, 그의 후손인 明玉의 부탁으로 이 서문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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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肅公松隱朴公墓表 10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고려의 遺臣 朴天翊의 묘표이다. 조선 태조가 다섯 번이나 요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은 박천익의 절의를 칭송하고 있다. 1400년(정종 2) 4월(孟夏) 상순에 지었다고 부기되어 있다. 박천익(1332~1398)은 고려의 문신으로, 자는 太始이고, 호는 松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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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徐(騭)爲師廬墓碑文(光緖丙子知禮人拓基於衙舍後得此碑) 1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효자 徐騭이 스승을 위하여 시묘살이를 한 행적을 기린 비문이다. 徐騭의 아들인 存達의 부탁으로 지었다. 徐騭은 호가 南溪이며, 利川 사람이다.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玧의 손자이고, 목사를 지낸 强의 아들이다. 盤曲 張志道에게 배웠다. 스승이 돌아가시자 3년 시묘살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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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黨伯忠憲公巖谷楊公行狀 1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중국 원나라 魯國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정착한 淸州楊氏의 시조 楊起의 행장이다. 楊起는 자가 可尹이고 호는 巖谷이다. 중국 원나라 때 侍中 벼슬을 지낸 幹의 손자이고 仁保의 아들이다. 원나라에서 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都僉議政丞과 中書省政丞을 역임하며, 청백리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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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厖村先祖遺文跋 20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後孫 五가 지은 遺文의 발문이다. 황희의 문집이 임진‧병자 양난의 와중에 불에 타 없어졌음을 안타까워 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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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遺墨遺物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황희 遺墨 도판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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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書遺墨後 23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후손 麟老가 遺墨 뒤에 쓴 글이다. 유묵은 당나라 사람의 시를 쓴 것인데, 從叔인 處士公(趾熙)이 西湖의 선비 李之棠으로부터 입수하였다고 하였다. 황희 유물로는 玉書鎭과 珊瑚纓, 龍文硯 등 일부가 山陽 大道村에 남아 있으며, 임금이 하사한 通天犀帶는 關西 사람 하나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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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識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金炳德이 쓴 것이다. 빌려왔던 황희의 犀帶를 본가로 돌려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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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徐相雨이 쓴 것이다. 1894년(고종 31) 가을 후손인 君禾+憲에게 犀帶를 빌렸다가 돌려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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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황희의 年譜이다. 死後에 추진된 崇慕 사업도 연도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생애와 관련된 직접 자료들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63년(1세, 공민왕 12) 2월 10일 巳時에 松京(開城)의 可助里에서 태어남. ◦1376년(14세, 우왕 2) 蔭職으로 福安宮錄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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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祭文(1731) 1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731년(영조 7) 英祖가 禮曹正郞 韓斗一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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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746) 1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746년(영조 26) 9월 英祖가 南泰溫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 황희의 영정을 본 감회를 함께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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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775) 20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775년(영조 51) 6월 英祖가 左副承旨 洪景顔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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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789) 20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789년(정조 13) 2월 正祖가 承旨 金履正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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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789) 20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789년(정조 13) 正祖가 右承旨 朴天衡을 玉洞書院에 보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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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808)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808년(순조 8) 純祖가 禮曹左郞 鄭華錫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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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825)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825년(순조 25) 純祖가 禮曹正郞 黃宗鉉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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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842)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842년(헌종 8) 憲宗이 交河 兼 通津府使 趙義錫을 통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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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872)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1872년(고종 9)에 高宗이 내린 사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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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洞書院奉安祭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玉洞書院 奉安文이다. 荷塘 權斗寅(1643 ~1719)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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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작자 미상의 享祀 祝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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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溪書院常享祝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작자 미상의 滄溪書院 享祀의 祝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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伴鷗亭遺像奉安祭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伴鷗亭의 影堂에 遺像을 봉안하고 쓴 奉安文이다. 圃巖 尹鳳朝(1680~1761)가 썼다. 황희의 묘소 가까이 있는 옛터에 건립되었고 규모는 3칸이며 金蠅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등 영당의 위치 및 규모와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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伴鷗亭影堂重建奉安祭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伴鷗亭에 影堂을 중건하고 쓴 奉安文이다. 梅山 洪直弼(1776~1852)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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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享祀 祝文이다. 지은이는 ‘前人’이라고만 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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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湖書院常享祝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岐湖書院의 享祀 祝文이다. 心齋 宋煥箕(1728∼1807)가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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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陽書院常享祭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山陽書院의 享祀 祝文이다. 洪勉燮이 지었다. 山陽書院은 1824년(순조 24) 洪勉燮을 비롯한 삼척 지방 士林이 황희가 강원 관찰사로 있을 때 흉년을 구휼한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삼척시 원덕읍에 지은 召東祠가 1857년(철종 8) 서원으로 승격된 것이다. 18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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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山陽書院의 享祀 祝文이다. 肅齋 趙秉悳(1800~1870)이 썼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