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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16551

    肅淸祠奉安祭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肅淸祠 봉안 제문이다. 후손 源善이 썼다. 肅淸祠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 있는 祠宇로, 1897년에 창건되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52

    常享祝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享祀 祝文이다. 지은이는 ‘前人’이라고만 되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416553

    沙鶩里影幀改摹奉安祭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沙鶩里에 모셔져 있는 影幀의 改摹本을 만들었을 때의 奉安文이다. 후손 翎鍾이 썼다.
    출처 : 유교넷
  • 416554

    本傳 2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의 本傳이다. 지은이는 미상이다. 󰡔文宗實錄󰡕권12에 실려 있는 本傳의 내용과 거의 같다.
    출처 : 유교넷
  • 416555

    墓誌銘 3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의 墓誌銘이다. 希賢堂 申叔舟(1417~1475)가 지었다. 내용은 아래의 神道碑文과 대동소이하다.
    출처 : 유교넷
  • 416556

    神道碑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의 神道碑文이다. 지은이는 ‘前人’이라고만 되어 있다. 요지는 서두에 있는 황희의 인물소개 내용과 같다.
    출처 : 유교넷
  • 416557

    畵像贊 3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의 畵像贊이다. 木齋 洪汝河(1620~1674)가 썼다.
    출처 : 유교넷
  • 416558

    (附)書畵像贊後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洪汝河의 畵像贊 뒤에 붙인 글이다. 후손 莘老가 썼다.
    출처 : 유교넷
  • 416559

    小識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小識이다. 지은이는 미상이다. 황희 영정의 전승과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황희의 영정은 처음 2본이 있었다. 이 가운데 1본은 후손인 承旨 洛이 파주 교하 금승리 아래 있는 선영 밑에 영당을 지어 봉안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고, 다른 1본은 1580년(선조
    출처 : 유교넷
  • 416560

    遺事 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출전과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廣寒樓記:황희의 막내아들 烈成公 守身이 지은 글이다. 황희까지의 황씨 家系를 간략히 적고 있다. ◦六世孫文貞公廷彧所記:황희의 옛 집터를 보고 중국 사신이 大賢이 나
    출처 : 유교넷
  • 416561

    送黃判書巡問平安道詩 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平安道巡問使로 떠나는 황희를 전별하는 시이다. 獨谷 成石磷(1338~1423)이 지었다. 두 사람이 조정에서 함께 근무할 때의 인연을 술회하면서 평안도순문사로서의 직책을 잘 수행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416562

    又 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平安道巡問使로 떠나는 황희를 전별하는 이다. 春谷 鄭擢(1363~1423)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63

    詩卷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황희가 평안도순문사로 떠날 때 지인들이 써준 전별시를 엮은 시권의 서문이다. 申叔舟가 썼다.
    출처 : 유교넷
  • 416564

    禮部韻略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禮部韻略󰡕의 서문이다. 克一 金孟(1410~1483)이 썼다. 황희는 40여 년 간 文衡(大提學)으로 있으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禮部韻略󰡕이 과거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교재라고 판단하여 간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그 뒤 손
    출처 : 유교넷
  • 416565

    召公臺銘(幷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召公臺의 명문이다. 止亭 南袞(1471~1527)이 썼다. 召公臺는 三陟府의 남쪽 70리 지점인 瓦縣 위에 있다. 1423년 황희가 강원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흉년을 구휼할 때 휴식하던 곳이다. 황희가 내직으로 옮겨간 후 백성들이 그 은공을 기려 돌을 모아 대
    출처 : 유교넷
  • 416566

    伴鷗亭記 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坡州에 있는 伴鷗亭의 記文이다. 眉叟 許穆(1595~1685)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67

    題伴鷗亭詩(沈世俊) 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伴鷗亭을 주제로 한 시이다. 지은이는 沈世俊으로 되어 있다. 이하 9편 모두 역시 伴鷗亭에 대한 시이다. 지은이를 병기하면 다음과 같다. 又(伴鷗亭韻, 後孫 爾章), 又(宋泗源), 又(韓德觀), 又(金翊夏), 又(後孫 櫶), 又(兪鎭九), 又(朴珪緖), 又(後孫 甲善
    출처 : 유교넷
  • 416568

    玉洞書院請額疏(1789,後孫巖老) 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1789년(정조 13)에 올려진 玉洞書院의 사액 請願疏이다. 황희를 모시는 서원이 尙州의 玉洞書院과 長水의 滄溪書院 두 곳인데, 모두 사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은 하지만 사액은 국가의 은전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왕께서 결정하는 것이 옳겠다는 禮曹의 回啓와 이를 윤
    출처 : 유교넷
  • 416569

    玉洞書院上梁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玉洞書院의 상량문이다. 希菴 蔡彭胤(1669 ~1731)이 지었다. 옥동서원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서원으로, 1518년(중종 13)에 처음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사액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
    출처 : 유교넷
  • 416570

    又 1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玉洞書院의 상량문이다. 李增曄(1674~?)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71

    中山行(瞻拜白玉洞影堂有感而作,幷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상주 백옥동에 있는 황희의 影堂을 참배하고 감회를 적은 글이다. 지은이는 金相定으로 되어 있다. 直提學 洪汝剛이 명나라로 사신을 가며 외동딸을 걱정하자, 황희가 아들 保身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맞이함으로써 걱정을 덜어준 일이 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황씨의 일파 하나가
    출처 : 유교넷
  • 416572

    玉洞書院重修記 1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玉洞書院 중수기이다. 지은이는 閔種烈이다. 丙戌年에 尙州牧使로 부임해 왔다가 서원의 초헌관이 되는 영예를 누린 바 있으며, 서원이 너무 낡아 士林 및 本孫들과 의논하여 보수하기로 하고 3월말 4월초에 착공하여 4개월에 걸려 준공하였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416573

    滄溪祠宇重修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長水의 滄溪祠宇 중수기이다. 趙明履가 지었다. 창계사우는 1693년(숙종 19)에 창건되고 1743년(영조 19)에 중수되었는데, 마침 장수 수령으로 부임해 있던 황희의 후손 顥源과 그의 從兄 景源의 부탁으로 기문을 쓴다고 그 연유를 밝히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416574

    坡湖影堂上梁文(後孫禾+夾) 1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伴鷗亭 影堂의 상량문이다. 후손 禾+夾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75

    山陽書院廟庭碑銘(幷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1861년(철종 12)에 세워진 三陟의 山陽書院 廟庭碑銘이다. 지은이는 李景在이다. 召公臺로부터 召東祠를 거쳐 1857년(철종 8) 서원으로 승격된 山陽書院의 내력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416576

    召東祠記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召東祠의 건립내력을 쓴 기문이다. 召東祠를 건립한 洪勉燮의 청으로 安東大都護府使를 지낸 金尙鉉이 지었다. 召東祠의 위치는 召公臺로부터 4里 거리라고 되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416577

    請錄用後孫疏 2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功臣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황희와 허조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청원하는 소이다. 趙泰東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78

    靈神菴重修上梁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靈神菴의 중수 상량문이다. 後孫인 磻老가 썼다. 靈神菴은 坡州의 長壽山 薇蕨峯 아래에 있는, 황희의 묘소 齋舍이다. 세월이 흘러 齋舍가 퇴락하자 서울에 사는 종손이 중수를 발의하였는데, 尙州의 支孫들이 호응하여 종손을 有司로 삼아 일을 완수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출처 : 유교넷
  • 416579

    又 3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靈神菴의 중수 상량문이다. 後孫 麟老가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80

    金蠅里祠宇重修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金蠅里 祠宇의 중수기이다. 後孫 命周가 지었다. 옛 사당이 퇴락함에 따라 자손들이 뜻을 모아 중수했으며, 본래의 장소는 지대가 낮아 습했던 까닭에 높고 묘소에 더 가까운 터를 골라 체제는 옛 모습을 따르되 지붕만 바꾸어 3년 만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416581

    舊實紀跋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舊實紀의 발문이다. 李選이 지었다. 세월이 흘러 황희와 관련된 기록들이 인멸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후손인 暐가 기록한 실기 1책과 기타 여러 자료들을 채록한 것에다가 황희의 아들들인 胡安公‧少尹公‧烈成公 세 사람의 碑誌와 遺文 그리고 長川世蹟記의 내용까지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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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82

    戊申修譜時實紀序 3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戊申年에 長水黃氏의 족보를 증보할 때 같이 편찬한 實紀의 서문이다. 後孫인 禾+夾이 지었다. 족보의 증보작업에 맞추어 여러 종친들과 뜻을 모아 諸家의 문집과 野錄 속에 산재해 있는 황희 관련 기록을 편집하여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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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83

    伴鷗亭重修記 39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伴鷗亭의 중수기이다. 後孫 蘭善이 지었다. 伴鷗亭에 대한 간략한 내력이 적혀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반구정은 선조인 翼成公(黃喜)이 은퇴하여 쉬던 곳으로, 坡州의 서쪽 임진강 가에 있다. 물이 빠지면 흰 갈매기가 날아드는데, 그 깃과 털의 깨끗함이 세속의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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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84

    又 41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伴鷗亭의 중수기이다. 尹喜求가 지었다. 1905년 중건된 후 10년 뒤에 여러 후손의 청을 받고 쓴다고 되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416585

    伴鷗亭重建上梁文 42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伴鷗亭의 重建 上梁文이다. 鄭夏黙이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416586

    年譜跋 45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年譜 발문이다. 徐相雨가 지었다. 年譜는 후손인 蘭善이 편집하였으며, 자신은 초고를 1896년(건양 1)에 보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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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87

    又 46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年譜 발문이다. 後孫 心顯이 지었다. 집에 간직되어 오던 방촌선생의 연보와 遺蹟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다가 파주의 집안사람 집에서 族叔인 尙州의 蘭善이 편집한 연보를 얻어,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간행 기회를 엿보다 70이 넘은 나이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출처 : 유교넷
  • 416588

    新增實紀跋 47 / 기록자료>고도서 / 황희
    증보판 實紀의 발문이다. 後孫 贊周가 지었다. 1897년(광무 1) 후손인 心顯을 방문하였다가, 그가 實紀의 謄寫本을 보이며 교정과 발문을 부탁하기에 외람되이 쓰게 되었다고 연유를 밝히고 있다. 實紀 간행과 관련된 개략적인 내용은 冒頭에 있는 소개 내용과 같다.
    출처 : 유교넷
  • 416589

    송간집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송간집(松澗集) 松澗 黃應奎의 문집. 木版本, 跋:李忠鎬(1927), 3卷 2冊:四周雙邊, 半郭 19.7×17.0㎝,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0×21.0㎝. 문집 3권 중 2권이 詩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은 없다. 卷1에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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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0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岬寺夢占, 岬寺月夜, 答僧詩, 天王峯, 南獅子寺, 南獅子寺偶懷, 中峯寺, 岬寺夜坐次僧韻, 白馬江懷古,謝畿伯尹尙中(卓然)給曳船軍, 奉恩寺次僧韻, 郊墟雨霽, 貧人問答, 典牲署樓野望(二首), 憶龍門山寄楊根宰金(銑), 署樓初秋, 兼祭泰陵有感, 次南雙湖仲素(尙文), 閱洪恥齋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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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1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憶道谷寄李大用, 秋夜書懷, 過靄潭茅舍, 登高醉歸自笑, 至月宿山房, 和郭大容(瀚), 南至日和李景述(克承), 雪中再和景述, 松澗, 何物令吾羡, 何物在山谷, 次具景瑞贈野趣韻, 與柳而見期會雨未果, 景濂亭次韻, 惜春(二首), 呈尹淸風遊三島, 東嶺望陶山, 病栢語嶺松, 伯牙語鍾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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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2

    丹陽郡陳弊疏(1579) 1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1579년(선조 12) 저자가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목격한 단양군의 積弊와 이를 바로 잡을 方策을 올린 상소문이다. 당시 단양은 정부에서도 ‘棄邑’이라 할 정도로 피폐했으며, 이미 명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黃俊良의 상소로 각종 役을 십년간 감면한 전력이 있었다. 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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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3

    甲午謝恩疏(1594) 7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疏의 앞부분은 缺落되고 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저자가 가산을 털어 군량미를 제공한 공으로 1594년(선조 27)에 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지만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이와 함께 本道(경상도)時務策도 상소에 포함되어 있으며, 소의 말미에는 저자의 시무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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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4

    與紹修洞主 12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소수서원 안에 나무를 심고 돌계단을 설치하는 일로 소수서원의 원장과 監官 등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저자는 편지에서 당시 소수서원의 명륜당과 景濂 주변에 나무가 없어서 소수서원 전체가 밖으로 드러나 은연한 기세가 없으니 解凍을 기다려 나무를 심자고 건의하고, 나무를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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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5

    紹修書院典禮廳敘 12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소수서원의 원장 金天祥이 보낸 편지를 받고, 저자가 소수서원의 전례청 건립에 대한 시말을 적은 글이다. 본래 소수서원에는 건립 당시부터 전례청이 없어서 춘추 제례 때마다 假廳을 만들어 제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1527년(종종 22)에 원장 南忠良과 有司 安好義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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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596

    雲水亭小敘(淸道,1577) 13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청도군수로 재임 중이던 1577년(선조 10)에 청도의 父老들이 운수정을 이전하고, 정자의 이름을 저자에게 지어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본래의 운수정 정자는 倉 옆에 있어서 늘 화재가 염려되었는데, 이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옮기고자 한 장소는 북쪽으
    출처 : 유교넷
  • 416597

    自題畵像贊 13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임진왜란 때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지은 화상찬으로, “孫子와 吳子의 兵法을 배우지 못했으니, 國恥를 雪冤하기 어렵다”는 한탄을 적은 글이다.
    출처 : 유교넷
  • 416598

    高祖妣 谷城任氏의 묘지에 加土한다는 고유문으로, 榮川郡守 李大震을 대신하여 지은 글이다.
    출처 : 유교넷
  • 416599

    慰安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高祖妣 谷城任氏의 묘지에 加土할 때 風雨로부터 보호하여 兆域이 무궁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416600

    仙巖祠宇移安告由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황응규
    청도군 매전면에 있는 운수정에서 선암의 선암서원으로 三足堂 金大有나 逍遙堂 朴河淡 두 선생의 위패를 선암서원으로 옮기고 난 후, 개칭한 선암서원의 移安을 신께 고하는 글이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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