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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王士章(珞)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王珞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韓愈가 그의 친구를 위해서 지은 「弔李元賓墳」이라는 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친구를 잃은 슬픔을 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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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洪景初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洪昇(1612~1688)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조선시대의 학자로 字는 景初이고, 號는 鼎崖이며, 本貫은 南陽이다. 都事를 역임한 善慶의 아들로 1654년(효종 5)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천거를 받아 南別殿參奉이 되었으나 老親의 奉養을 위해 사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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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盧咸悅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盧咸悅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縣監을 역임하고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크게 壽를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와병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하여 그 슬픔을 전하면서 가족들의 애통한 심정도 함께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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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器哉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李器哉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資質이 뛰어나고 배움은 근원이 있었으며, 言行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전하면서 특별한 병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슬픔이 더욱 애절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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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次山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權坵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평생을 知己로 여겨왔는데, 내 병을 걱정하며 보내온 편지 먹이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났느냐고 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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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子升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金子升에게 올리는 祭文이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함께 했는데, 어찌 이렇게 서둘러 먼저 떠났느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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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壻星輝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사위 李星輝를 위해 지은 祭文이다. 병이 얻었을 때 가 보았으나 병세가 매우 심하여 직접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는데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어 몹시 애통하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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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弟(秇)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從弟인 秇를 위해 지은 祭文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하늘이고 믿지 못할 것이 사람이라면서 같은 방에서 태어난 1살 어린 동생이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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悼亡女金宗濟妻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딸인 金宗濟의 처를 애도하기 위해 지은 祭文이다. 32년을 부모와 자식으로 지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애통하기 그지없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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悼亡女李元柱妻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딸인 李元柱의 처를 애도하기 위해 지은 祭文이다. 후손이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나 후손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나 슬프기는 마찬가지라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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悼殤孫源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일찍 세상을 떠난 손자 源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祭文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손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슬픔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고 전하면서 장수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름도 ‘源’으로 지었는데 이렇게 일찍 나의 곁을 떠나 애통하기 그지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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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稷壇祈雨祭文(代睦地主作) 29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社稷壇에서 祈雨祭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祭文이다. 백성을 貴하게 여기고 社稷은 그 다음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식량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가뭄을 이길 수 있도록 비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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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書冊記後 1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先世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서책을 모으고 나머지는 스스로 갈무리해 둔 것을 합하여 종가에 간직하여 두고는 장서실을 엄히 단속하였다고 하면서 서책을 귀중하게 여기고 잘 간수해야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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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恭人延安李氏行蹟 1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1618년(광해군 10) 저자가 12세가 되던 해에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난 先妣 延安李氏의 행적을 간단하게 기록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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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汝止箴(幷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임금은 반드시 그 마음을 거두어 경계해야 하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임금이 이미 聖人이라고 해서 다스리도록 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 것이니 先聖을 謁見하는 날에 많은 선비들을 모아 箴言을 짓도록 한 것은 전에 없던 성대한 일이라고 하면서 잠언을 지어 받쳤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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赭赭鞕銘 3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中國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炎帝가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花草를 사용하여 약재의 약효와 독성은 물론 차거나 따뜻한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던 神鞭인 ‘赭鞕’에 관련된 고사를 인용하여 천고에 길이 남을 유용한 업적을 남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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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城濟民樓榜會記 4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龜城 濟民樓의 모임에 대한 記文이다. 1673년(현종 14) 여름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9명이 濟民樓에서 모임을 가지고 詩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古今 사람들의 공통된 즐거움이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울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즐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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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詞 5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李玄逸‧金邦杰‧柳百之‧李在憲‧權斗寅‧金聲弼‧孫萬碓‧李埰‧成世璜‧李在寬‧金邦烈‧朴廷薛‧蔡獻徵‧崔文湜‧洪克己‧李坽‧李元白‧李龜齡‧康用直‧李葆英‧成震丙‧金樺‧李冑昌‧成虎英‧李冑興‧宋光井‧李世貞‧金世維‧宗人立+夾‧李在隆‧李在完‧宋德成‧李碩達‧金啓祥‧金萬秋‧鄭必達 등이 쓴 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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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李在憲‧從姪 元胤‧從姪 章胤 등이 쓴 제문이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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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7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李光庭(1636~?)이 쓴 저자의 行狀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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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李雲徵(?~1717)이 쓴 저자의 墓碣銘이고, 내용은 行狀과 비슷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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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友堂記 23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曺挺融(1598~?)이 쓴 四友堂 記文이다. 사우당은 저자가 擧業에 대한 뜻을 버리고 以文會友의 장소로 九龍 산기슭에 마련한 거처의 堂號이다. 네 가지 벗은 바로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로 그 기질이나 풍격이 모두 식물 중에서도 君子에 속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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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友堂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從姪 元胤이 쓴 四友堂 序文이다.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 등 사우가 각각 冬松‧秋菊‧雪梅‧霜竹의 기질과 풍격을 지니고 있어서 벗으로 삼을 만 하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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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玉杖記 27 / 기록자료>고도서 / 조릉司諫 李馥(1626~1688)이 쓴 記文이다. 1674 년(현종 15) 여름에 商山을 지나다가 저자의 거처에 들렸을 때, 저자가 黃玉杖을 보여주며 기문을 청하여 지었다고 하였다. 지팡이는 겉이 황색이고 안은 옥처럼 생겼는데, 五臺山에서 商人이 얻어서 저자에게로 전해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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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오여벌경암집(敬菴集) 敬菴 吳汝橃의 문집. 木活字本,序:李晩燾‧金東鎭(1932), 跋: 權世淵‧金輝轍, 後序:宋寅鈺(1926)‧趙昺奎, 後識:吳應澈‧吳學璣(1933), 6卷 3冊: 四周雙邊, 半郭 20.0× 15.0㎝,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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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립구계집(龜溪集) 龜溪 李中立의 문집. 石印本, 序:金東鎭(1952)‧孫厚翼, 跋: 南相春(1952)‧李宰東, 2卷 1冊: 四周雙邊, 半郭 21.0×16.0㎝,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30.0×19.7㎝. 13세손인 宰東이 쓴 발문에 의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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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훤당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부훤당집(負暄堂集) 負暄堂 金楷의 문집. 木版本, 序: 柳範休, 4卷 2冊: 四周雙邊, 半郭 20.0×15.5㎝, 有界, 10行 21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1.2×21.0㎝. 1750년(영조 26) 무렵 편집된 것으로 보이나, 5세손 佑良이 남은 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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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咏葵花, 咏盆梅, 次柳爾能(世鳴)評文體韻, 次龍宮倅朴(重徽)淸凉山韻, 題負暄堂, 負暄堂六十韻, 送禮安倅李明卿罷官歸京, 次全天叙(五倫)石湖韻, 題躑躅根木枕, 又, 蟾枕寓言, 道村八景, 往淸風郡與主倅金(昌協)其季(昌翕)相昌和, 又, 又, 又, 又, 又, 又, 淸風郡吟贈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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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題負暄堂壁上,己卯仲春築階種花仍成四首,辛未春與李參奉信古同作會行下第同還馬上次信古韻, 命朝孫種四松, 次金(佶)韻送疎首金(侃)西行, 謝高美叔(徽世)贈竹杖, 俗離山, 宿龍華村早發偶吟, 獅子庵感題, 過熊峴口占, 行到濶其巖口吟, 宿大乘寺馬病晩發, 夕宿松林寺,訪仙遊洞,夏日撿剔盆梅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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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禮釐正後嶺儒請告廟再疏(1678)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典禮가 바로 잡힌 뜻을 告廟하라는 주장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批答이 내리자 다시 상소한 글. 송시열은 孝宗을 庶子라고 칭했으니 君父의 존엄을 폄하하고 嫡統을 문란시킨 것이며, 이를 先王(顯宗)이 바로잡고 임금(肅宗)께서 계승하여 國命이 維新되었으니, 宗廟에 고하여 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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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疏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告廟를 거듭 주장한 상소문이다. 孝宗과 顯宗의 神靈은 물론 온 나라 신민이 고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며, 또 이런 일은 천하의 議論을 모아 결정해야 하는데, 임금이 다른 논의를 막으려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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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師廟爵獻釐正疏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太師廟의 爵獻의 시정을 청한 상소문이다. 太師廟는 고려 개국시기의 金宣平‧權幸‧張吉을 모신 사당이다. 그 후 사당은 훼손되어 터만 남았을 뿐이고, 位版을 관청에 보관하다가 제사지낼 때 설치하였는데 嘉靖 연간에 金光轍과 權喆이 보관된 位版을 사고 옛 터에 사당을 세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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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高進士汝含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高世章(1641~1690, 字 汝含)에게 보낸 편지이다. 疏를 올리는 일이 거의 실마리가 갖추어져 결국 소를 올리게 된 터이지만, 소를 작성하는 거취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로는 의리상 나가야 하지만 둘 관계로서는 다소간 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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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高汝含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高世章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호남과 호서지방에서는 상소를 올릴 기미가 있다고 하니, 만일 영남의 상소가 이들 지역보다 늦는다면 좋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초반에 빨리 상소해야 한다는 형세를 거스르지 말자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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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高汝含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高世章에게 보낸 편지이다. 평소 존양의 공을 쌓은 高世章이라면 이번에 당한 일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성심껏 도와주니 매우 다행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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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進士(昌協)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農巖 金昌協(1651∼1708)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方領‧袵‧續袵‧鉤邊 등에 대해서 옷을 입는 방법, 옷을 다는 위치 등 매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설명까지 하고 있어 조선시대 의복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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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孫慶州敵萬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慶州府尹孫萬雄(1643∼1712)에게보낸 편지이다. 英陽郡守 鄭아무개의 죽음은 향리의 불행 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안타까운 일임을 전하면서, 병 때문에 집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알리고 있다. 손만웅은 字는 敵萬이고, 號는 野村이며, 本貫은 慶州이다. 父는 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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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孫敵萬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孫萬雄에게 보낸 편지이다. 안부인사와 老衰한 늙은이들이 참여할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 이에 노쇠함을 무릅쓰고 모임에 참여하였으나, 좌우를 돌아보아도 친하게 지낼 사람이 없었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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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槐山(南一)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槐山郡守 金南一(1635∼1696)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동안 문안 편지도 자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말과 함께 봄이 되면 찾아가겠다는 내용이다. 김남일의 字는 重伯이고, 號는 砥南이며, 本貫은 宣城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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潁濱書堂移設記(1686)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친구인 高世章이 주관하는 영빈서당의 연혁을 기록한 글이다. 이 서당은 처음에 鴒原寺 옛터에 자리 잡아 竹林이라 하였는데 자리가 협소하여 樹介谷으로 옮기고 近嵒이라 하고, 옛 서당은 修禊所로 삼았고, 비록 서당이지만 이미 서원의 규모를 갖추었기에 제사기능도 수행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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負暄堂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저자의 당호를 ‘負暄堂’이라 이름 붙인 것에 대한 설명이 담긴 기문이다. 부훤당은 송나라에 한 농부가 ‘따뜻한 햇볕을 쪼이는 방법을 아뢰면 후한 상이 있을 것이다[獻曝]’라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어리석은 송나라 야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이를 어리석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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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坡精舍記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친구 申穆爾의 竹坡精舍에 붙인 기문이다. 신목이가 사람들과 떨어져 조용히 살려는 뜻을 가지고 1701년(숙종 27) 마땅한 장소를 발견했으나 대나무만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마침 그 곳 지명이 竹田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느 날 밤 우연히 풀 속에 파묻힌 대나무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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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棄堂記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內再從 鄭鍹(1634~1717)의 三棄堂에 대한 기문이다. 鄭鍹은 자신이 文과 禮와 農이 부족하다고 여겨 三棄라고 하였으나, 저자는 文은 經天緯地나 勤學好問이고 禮는 天理節文과 人事儀則이며, 農은 人情의 밭을 經術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삼기를 스스로 잘못이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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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勞堂記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南極柱(字 時晦)의 勞勞堂에 대한 기문이다. 堂의 명칭을 ‘勞勞’라 이름 붙인 이유는 밖으로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手苦의 뜻을 취하고, 안으로는 애써 부지런히 수고를 다 한다는 뜻에서 취했지만, 扁額은 반대로 自足이라 했으니, 이는 아침에는 수고하고 저녁에는 자족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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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菊軒記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친구 蔡耈徵의 友菊軒에 대한 기문이다. 저자의 知己였던 채고징은 평소 사람보다는 식물인 국화나 소나무 같은 것을 벗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거처하는 곳조차 ‘友菊軒’이라 명명한 것에 대한 친구를 진정으로 아끼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충고를 한다. 그러나 실상은 知己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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遯翁堂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權明仲의 遯翁堂에 대한 기문이다. 권명중이 자신의 집을 ‘遯翁堂’이라 命名한 것에 의구심이 생긴 저자는 ‘遯’은 ‘退’의 의미이니 벼슬길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물러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권명중은 일찍이 功名에 뜻을 두어 弱冠에 성균관에 올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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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家里記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자신이 이사한 保家里에 대한 기문이다. 저자는 만년에 처와 네 아이가 한꺼번에 죽고 집까지 화재를 입었다. 그래서 보가리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을 몰랐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保家里란 사람이 자신이 살던 집을 잃으면 집안을 보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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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庄設壇立碑事蹟記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宗姪 金壽遠과 그의 宗人 金重安이 太師墓에 設壇하고 立碑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저자는 먼저 태사인 김선평이 신라를 등지고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운 것은 張子房이 項羽의 휘하에 있다가 劉邦에게로 가서 공을 세운 경우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처음에는 태사묘의 위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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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綱堂記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三綱堂에 대한 기문이다. 永嘉의 屬縣인 豊山은 예부터 宏儒‧碩士와 충신‧효자‧열부들이 배출되었는데, 열녀로는 兪天柱의 아내 김씨가 남편을 위해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고, 李橿의 며느리는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단식하여 목숨을 끊었고, 효자로는 어버이의 등창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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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川書院廟宇上樑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해菊坡 全元發(?∼1421)을 蘇川書院에 제향하기 위해 廟宇를 지을 때 올린 상량문이다. 전원발은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龍宮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竺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