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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4951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조선시대 / 250책 / 필사본/등록류 / 서울대학교규장각 / 서울 / 선장
    타기관 서비스 자료입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2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5.용만문견록(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龍灣聞見錄) / 조선 선조 25년(1592) / 1책 / 필사본/사본류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선장
    《용만문견록(龍彎聞見錄)》은 정탁(鄭琢, 1526∼1605)이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주(義州)에 왕을 호종(扈從)하고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장군들을 영접한 전말을 적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시는 정간(貞簡), 약포(藥圃)는 자호이다. 중종 21년(1562)에 예천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3년(1558)에 33세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교리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1568)하고, 두 차례나 사절(1581, 1589)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가서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에 힘썼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이 사형 선고되자 상소를 올려 구제하였다. 정탁은 선조 33년(1600)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등록되면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정탁은 유학과 역사는 물론 천문ㆍ지리ㆍ상수(象數)ㆍ병법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여 박학다식하였다. 유성룡ㆍ노수신과 더불어 '영남 3대가'라 불려졌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 책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간단히 쓰고 이어 명(明)의 사신(使臣), 장군(將軍)들인 송응창(宋應昌)ㆍ이여송(李如松)ㆍ장삼외(張三畏)ㆍ호환(胡煥) 등을 접대한 전말을 기재하였다. 본문 중에는 호환에게 보낸 서신(書信)과 회답(回答)이 수록되어 있고 끝에는 양대박창의록(梁大樸倡義錄)이 부편(附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대명교섭(對明交涉)의 한 자료이다. 이 책은 임란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며, 특히 조(朝)ㆍ명(明)ㆍ일(日)관계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임진기록 중에 극히 일부이지만 자구(字句)가 손상되어 내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아쉽다. 【 번역 해제 】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조선 중기의 명신인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다가 철수하는 명나라 장수들을 왕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나가 접대할 때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이다. 초서로 된 필사본 1책으로, 본문만 63쪽이다. 제목의 ‘용만(龍灣)’은 의주의 다른 이름이고, ‘문견록’이란 그야말로 듣고 본 상황을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당시 대체적인 것은 이미 공식적으로 서계(書啓)를 통해 다 보고하였으나, 과거부터 중국을 오가며 듣고 본 것을 기록하는 고사가 있으므로, 국가와 관계되는 일들을 여사(餘事)로 볼 수 없어 이를 기록한다고 앞머리에 이 문서를 작성하게 된 동기를 밝혀 놓았다. 내용을 보면, 당시 파병군 최고 사령관 격인 경략(經略)이었던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 중군도독부 도독(中軍都督府都督) 이여송(李如松), 중영좌부장 도독첨사(中營左副將都督僉事) 양원(楊元), 밀운영 영병도사 도지휘(密雲營領兵都司都指揮) 방시휘(方時輝) 등 철군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 의주에 집결 중인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였던 내용을 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체제는 인물의 직함과 출신지 및 자호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 조선에 온 날짜와 경로와 접대 경위 등을 밝혔다. 이어 상공(相公) 호환(胡煥)과 필담으로 주고받은 내용과 그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호환은 당시 직책이 없는 선비로서 총병(摠兵) 유정(劉綎)을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의주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명나라에서 철군하는 와중에 조선에 남아 있던 총병 유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전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철군의 부당함과 증원군을 파견해 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또한 편지에는 구체적인 적의 장단점과 이를 깨뜨릴 수 있는 전술까지도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서 약포의 탁월한 정세판단과 군사적 안목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는 당시 의주 부윤 김신원(金信元)이 호환(胡煥) 상공에게 보인 첩(帖)과 그에 대한 호환(胡煥) 상공의 답첩, 그리고 참군(參軍) 심무시(沈懋時)가 이부윤에게 답한 첩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은『약포집(藥圃集)』에 없는 부분이며, 한편 문집에는 있는 척금(戚金), 동공(佟公), 장삼외(張三畏)와 수작(酬酌)한 내용이『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에는 실려 있지 않다. ( 작성자 : 오덕훈 )
    출처 : 문화재청
  • 474953

    양산 대성암 집주두공부초당시(梁山 大聖庵 集註杜工部草堂詩) / 조선 세종 13년(1431) / 1책 / 목판본/관판본 / 대성암주지 / 경남 양산시 / 선장
    중국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에 남송(南宋)의 채몽필(蔡夢弼)이 주석을 붙인 책을 조선조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다. 태종 이후 세종에 이르러 왕조의 기반이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자 사대부들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에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여유는 그들로 하여금 사대부의 교양으로서 문예적 취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한시 창작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중국 시인의 시집이 여러 종 간행되었던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그 중 특히 두보는 이들이 각별히 애호하는 시인이었기에 두보의 시집만도 몇 종이 간행되었다. 이 책도 그 중의 하나로서, 다른 시집들에 비해 두보시에 대한 주석과 해설이 아주 상세한 것이 특징이다. 이 책에는 두보가 성도(成都)의 초당(草堂)에 거주할 때부터 기주(夔州)와 담주(潭州) 일원에 머물러 있을 때까지 지은 시가 시기별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 편집은 남송의 노은(魯訔)이 한 것이다. 이 책의 끝에 붙은 윤상(尹祥, 1373~1455)의 발문에 의하면, 조선 초 두보시의 학습을 갈망했던 사대부들의 바램에 따라 밀양부(密陽府)에서 간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모두 몇 책으로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그 중 마지막 책으로서 권33에서 권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보의 시 232편이 실려 있고, 외집(外集)으로 두보의 시에 화답한 대표적인 작품 44편이 부록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4

    양산대성암소장동인시화(梁山大聖庵所藏東人詩話) / 조선 성종 8년(1477) / 1책 / 목판본/관판본 / 대성암주지 / 경남 양산시 / 선장
    조선 초기의 이름난 문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우리나라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품평한 시화집(詩話集)이다. 상하 2권 1책의 목판본 책이다. 서거정은 자가 강중(剛中)이오, 호는 사가(四佳)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성종조(成宗朝)에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특히 시에 탁월하였다. 그는 작가의 후천적 자질을 중시하여 한시 창작에서`문기(文氣)’를 중시하였으며, 또한 작품의 실제 창작에서도 고사(故事)의 세련된 활용을 강조하는 `용사론(用事論)’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이 한시를 품평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동인시화』는 제목 그대로`동인(東人)’ 즉 우리나라의 시인과 시를 대상으로 비평하고 있는데, 모두 149조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ㆍ박인범으로부터 고려조의 시인들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조선초기의 권근ㆍ변계량 등의 작가들까지도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순수하게 시인과 한시만을 품평한 최초의 시화집이라는 의의가 있다. 이 책에는 두 편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1474년 강희맹(姜希孟)의 서문과 1475년 김수온(金守溫)의 서문이다. 또 끝에 두 편의 발문이 있는데, 1477년에 최숙정(崔淑精)과 양성지(梁誠之)가 쓴 것이다. 양성지의 발문에 의하면 이 책은 1477년 밀양부에서 간행한 최초의 간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5

    양산 대성암 두공부시범덕기비선(梁山 大聖庵 杜工部詩范德機批選) / 조선 태종 10년(1410) / 1책 / 목판본/관판본 / 대성암주지 / 경남 양산시 / 선장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원나라 때 범형(范 木+亨, 1272~1330)이 선별하고, 잘된 대목에 비점(批點)을 붙인 책이다. 원나라 정내(鄭鼐)가 편찬했던 것을 다시 조선 태종10년(1410)에 유은지(柳隱之)ㆍ정중성(鄭仲誠)ㆍ허성(許誠)이 복간한 책이다. 범형은 청강(淸江) 사람으로 자가 덕기(德機)인데, 시에 아주 능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안목으로 두보의 시 가운데 311편을 뽑아 오언과 칠언, 고시(古詩)와 율시(律詩)의 형식별로 나누어 모두 6권으로 엮었다. 원나라에서 간행되었던 이 책이 고려에 전해진 것은 극히 일부였을 터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그나마 귀해져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황해도 병마도절제사였던 유은지와 해주목 판관이었던 허성(1382~1441)은 연안(延安)에서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을 지냈던 송석견(宋石堅)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그로 하여금 간행을 주관토록 했던 것이다. 당시 6권 3책으로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제3책만이 남아 전한다. 이 책이 이후에도 다시 간행된 적이 있으나, 현전하는 것 가운데서는 이것이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중국 명가 시선집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6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 / 조선 선조 34년(1601)~영조 10년(1734) / 3책 / 필사본/등록류 / 사천시 / 경남 사천시 / 선장
    이 자료들은 곤양군 소곡면(현 사천시 곤명면) 소곡산에 있는 세종대왕과 단종대왕 태실지에 대한 보수과정을 기록해 놓은 의궤 책자이다. 태실(胎室)은 태(胎)를 묻은 곳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몸에서 태를 잘라내어 버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태를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이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이를 중시하여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묻어두는 태실을 조성하였다. 왕의 태실은 왕이 즉위하는 해에 주로 만들어졌는데, 풍수상 길한 곳을 골라 그 곳에 태실지를 조성하고 여러 가지 석물(石物)을 설치하여 성역화하였다. 이런 태실지의 시설물들이 세월이 흘러, 또는 변란으로 인해 훼손되면, 조정에서는 중앙의 관련 기관과 인근 고을의 인력을 동원하여 보수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작업이 끝나면 이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4건 작성하여 이중 하나는 곤양군 관아에 보관하고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 자료들은 곤양군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로 지정된 의궤는 3책이다. 만력 29년(선조 34, 1601)에 작성된』경상도 곤양지 세종대왕태실 석난간 수개 의궤(慶尙道 昆陽地 世宗大王胎室 石欄干 修改 儀軌)』는 보존상태가 나빠서 일부분이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이 많다. 현재까지 이 책은 태실수개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의궤는 임란중에 왜적들에 의해 손상된 세종태왕 태실을 보수한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즉 태실의 석난간(石欄干)이 모두 훼손되고 석주(石柱) 8개중 2개가 깨어지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선조 32년(1599) 10월경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조사와 보수방안을 논의하였으나, 아직 임진왜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긴박하고 황폐화된 상황이었고, 또 흉황을 맞아 몇 차례 연기되다가 선조 34년에 가서야 일을 마쳤다. 이 자료는 이런 개수과정과 이때 시행된 각종 제례, 제례 참여자의 명단, 제례의식과 진설도(陳設圖) 등을 담고 있다. 옹정 8년(영조 6, 1730)에 작성된 『경상도 곤양지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 의궤(慶尙道 昆陽地 世宗大王 端宗大王 胎室 修改 儀軌)』는 세월이 흐르면서 세종대왕 태실과 단종대왕 태실에 설치된 석물도 훼손되었기 때문에, 1730년 조정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다음해에 세종대왕과 단종대왕의 태실 주위를 재정비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말미에 『제의진설도(祭儀陳設圖)』 이외에 세종대왕태실석난간배설도(世宗大王胎室石欄干排設圖), 단종대왕태실도(端宗大王胎室圖)가 더 추가되어 있다. 옹정 12년(1734)에 작성된 『경상도 곤양지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표석수립시 의궤(慶尙道 昆陽地 世宗大王 端宗大王 胎室 表石竪立時 儀軌)』는 1731년 세종, 단종 태실의 개수공사에서 보류되었던 표석을 세우는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7

    정덕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 司馬榜目) / 조선 중종 8년(1513)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경상대학교 / 경남 진주시 / 선장
    『정덕계유년사마시방목(正德癸酉年司馬試榜目)』이란 중종 8년(1513) 계유년에 실시된 사마시(司馬試) 즉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합격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은문(恩門)이라 하여 당시 시험관의 명단도 첨부되어 있는데 이 시험관들 중에는 학자나 정치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소세양(蘇世讓), 심정(沈貞), 김안국(金安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생원시 합격자와 진사시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다. 즉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에 대한 인적 사항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인적 사항에는 응시 당시의 신분, 합격자의 성명, 자(字), 본관, 거주지, 부의 직함과 이름 등이 포함된다. 예컨대 생원 장원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학(幼學) 이약빙(李若冰) 희초(喜初) 본광주(本廣州) 거경(居京) 부 승훈랑 행함창현감 자(父 承訓郞行咸昌縣監 滋)”로 기록되어 있다. 형제 관계나 부모 생존 여부 등이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이 방목에는 그러한 사항이 빠져 있다. 『정덕계유년 사마시 방목』은 을해자로 인쇄되었으며, 이 방목은 원래 향토사학자 김상조가 소장하고 있다 경남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방목에 「단패고가(丹邶古家)」, 「대하고가지장(大瑕古家之章)」, 「김상조인(金相朝印)」, 「오림(梧林)」 등이 찍혀 있으며 이는 모두 김상조의 장서인이다. 이 방목은 2004년 3월에 경남 유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동일한 방목인 경주 독락당 소장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이언적 수택본으로 알려져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8

    의령향안 및 관련문헌(宜寧鄕案 및 關聯文獻) / 조선 광해군 6년(1614)~대한제국(1898) / 7책10점 / 필사본/사본류 / 의령향교 / 경남 의령군 / 선장
    의령향안 및 관련문서는 경남유형문화재 제4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부목록은 향안 5책, 향약계안 1책, 문헌철 1건, 고문서 1건 등이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족들은 향촌사회에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유향소(留鄕所)와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수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견제하며 향리들을 통제해왔다. 향안(鄕案)은 이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인물들 즉 향원(鄕員)들의 명단이다. 사족들 중에도 유력 성씨의 중요 인물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이 향안을 통해 조선시대 의령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유력 성씨의 상황과 그들 간의 세력관계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향안 5책 및 문헌철 (1) 향안 1 : 만력(萬曆) 42년(1614) 3월 (2) 향안 2 : 만력(萬曆) 46년(1618) 무오(戊午) 중수 (3) 향안 3 : 숭정(崇禎) 8년(1635) 을해(乙亥) 11월 중수 (4) 향안 4 : 정축(丁丑, 1697) 5월 초5일 (5) 향안 5 (6) 향안(鄕案)과 관련된 기타 문헌철(모음) 2. 고문서 (1) 단자(單子) 및 향선생천망기철(鄕先生薦望記綴) (2) 통문류(通文類, 계축(癸丑, 1673) 11월) 2건 (3) 완의(完議, 계해(癸亥, 1683) 윤6월) 3. 향약계안(鄕約契案) 1책 현재 의령향교에는 의령향안 및 관련 문헌들이 다량으로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 향안 원본이 남아있는 지역은 많지 않다.(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여러 책의 향안 원본을 하나로 묶어 발간한 경우는 많은 지역에서 볼 수 있다.) 경남지역에서는 진주, 단성이 알려져 있고, 이외에 의령 향교에 향안 원본 5책이 소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령에서는 이외에도 향안추록이나 신안(新案) 등을 하나로 묶은 형태의 것이 남아 있고 또 향안입록과 관련된 문서들이 여러 건 발견 되는데, 이런 종류의 문헌은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59

    의령 화양리 동안(宜寧 華陽里 洞案) / 조선 인조 24년(1646)~1956 / 27책 / 필사본/사본류 / 신우동 / 경남 의령군 / 선장
    「의령화양리동안」은 총27책으로 경남유형문화재 제415로 지정되어 있다. 향약(鄕約)은 향촌사회의 유교적 교화에 중요한 매개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근거를 둔 사림세력들의 향촌사회 자치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림관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향약은 원래 중국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에서 유래되어 주자가 다듬은 것으로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기본 강령으로 해서 여러 조목들이 첨가된 향촌자치 규약이었다. 이 향약은 고을 전체적으로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족적 기반이 상당한 촌락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동약(洞約)을 실시해 왔다. 의령에서도 향약은 일찍부터 시행되어 왔다. 이미 15세기 중반에 강렬(姜烈:1400∼1465)이 자기가 살던 계곡에서 동약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약이 수백 년 동안 실시되면서 그 자료를 남긴 경우는 전국적으로 보아도 흔하지 않다. 화정면 화양리에는 「화양리안(華陽里案)」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화양면 일대에 시행된 동약에 참여한 인사의 명부로서 1646년 이후 1956년까지 300여 년간의 동안이 28책으로 온전히 남아 있다. 이들 문헌 중 1916년의 병진년 동안부터는 ‘화양리안’이라 한 것으로 보아 화양리(면) 일대에 시행된 동약과 관련된 동안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동안은 일시적인 것만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와같이 임란 직후부터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까지의 동안이 남아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자료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책 수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의령지역의 자율적인 향약시행의 전통이 어느 곳 보다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60

    진주 연계재 고문헌(晉州蓮桂齋古文獻) / 조선 현종 12년(1671)~대한제국(1910) / 18책 / 필사본/사본류 / 경상대 / 경남 진주시 / 선장
    진주연계재 소유의 진주연계재소장고문헌은 향안(鄕案) 7책 및 천주안(薦主案) 1책, 연계안(蓮桂案) 및 연계재 재임안(蓮桂齋 齋任案) 10책 등 총 18책으로서 경남유형문화재 제4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족들은 향촌사회에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유향소(留鄕所)와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수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견제하며 향리들을 통제해왔다. 향안(鄕案)은 이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인물들 즉 향원(鄕員)들의 명단이다. 사족들 중에도 유력 성씨의 중요 인물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이 향안은 조선시대 진주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유력 성씨의 상황과 그들 간의 세력관계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 연계재에는 향안 7책과 천주안 1책이 보관되어 있다. ‘사마안(司馬案)’이라 하면 해당 고을과 관련된 인물로서 사마시(司馬試 :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자를 수록한 명안(名案)을 지칭한다. ‘연계안(蓮桂案)’이라 하면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뿐만 아니라 대과인 문과에 합격한 인물까지도 수록한 것을 지칭한다. 연계안은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의 명단인 ‘연안(蓮案)’과 문과에 합격한 인물의 명단이 ‘계안(桂案)’으로 구분되어 수록된다. 연안을 ‘연방안(蓮榜案)’이라고도 칭하고 계안을 ‘계적안(‘桂籍案)’이라고도 칭한다. 그런데 ‘청금록(靑衿錄)’이라 할 때는 향교나 서원에 입적된 학생의 명단을 지칭한다. 그런데 연계안과 관련해서 청금록이란 명칭을 쓴 것은 이들이 비록 소과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학문에 정진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근신하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 초기부터 일부 고을에서는 유향소와는 별도로 사마시에 합격한 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고을 내에 사마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연대감을 과시하고 또 효율적인 학문 연마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사마소는 후기로 오면서 대부분의 고을에 세워진다. 그런데 나중에는 연계안이 만들어지면서 이 기구도 연계재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또 회원도 사마시 합격자 뿐만 아니라 문과 합격자도 포함되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연계재의 향안은 일부 향안이 상당부분 도할된 채로 보관되어 있고, 또 일부 향안에는 당시 향안이 훼손된 상황을 알려주는 글이 있어 당시 향안입록을 둘러싸고 각 가문과 계층간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모습들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향안의 원본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당시 사회모습의 일단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61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 조선 순조 9년(1809)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809년(순조 9) 1월 22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순조(純祖)가 혜경궁(惠慶宮)에게 전문(箋文)과 치사(致詞), 표리(表裏)를 올리고, 2월 27일에 혜경궁에게 진찬(珍饌)을 올린 행사를 정리한 의궤이다. 순조는 1808년 연말에 이 행사를 거행할 것을 명령하면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말고 예조(禮曹)에서 전담하여 일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이 행사는 예조에서 주관했다. 1. 행사 주인공과 저술 배경 (1) 행사의 주인공 행사의 주인공은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1735~1815)이다. 혜경궁은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둘째 딸이며, 어머니는 황해관찰사를 역임한 이집(李潗)의 딸이었다. 혜경궁은 1735년(영조 11) 6월 18일에 한양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743년 11월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1744년 1월 11일에 가례를 거행하였고,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1월 22일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입궁(入宮)하였다. 1750년에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지만 3세에 요절하였고, 1752년에 정조를 낳았다. 1762년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하면서 친정으로 쫓겨 나갔다가 얼마 후 궁궐로 돌아왔다. 이 때 영조는 가효당(嘉孝堂)이란 편액을 써 주고 혜빈(惠嬪)이란 칭호를 내렸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3월에 혜경궁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1795년 윤2월에는 정조와 함께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방문하고 화성 행궁에서 회갑 잔치를, 본인의 생일인 6월 18일에 창덕궁 연희당(延禧堂)에서 회갑 잔치를 하였다.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고 벽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죽임을 당했고, 1804년 손자인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면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1804년 1월에 혜경궁은 세자빈에 책봉된 지 60주년이자 7순(旬)이 되는 해를 맞아 진하(陳賀)를 받았고, 1809년에 관례를 거행한 지 60주년을 맞아 진찬(進饌)을 받았다. 1815년 12월 15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고, 1816년 3월 3일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시호는 헌경(獻敬)이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10월에 왕후로 추존되어 능호가 융릉(隆陵)이 되었고, 그해 11월에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⑵ 저술 배경 이 책은 1809년에 혜경궁의 관례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거행한 후 작성한 의궤이다. 진찬 다음날인 1809년 2월 28일에 순조는 승지 박종훈(朴宗薰)에게 1795년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범례를 따라 의궤를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3월 17일에 승지 홍석주(洪奭周)는 의궤 이름을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로 하겠다고 보고하여 순조의 허락을 받았다. 의궤는 내각(內閣, 규장각)에서 편찬하였고, 3월 22일에 혜경궁에게 의궤 1건이, 3월 23일에 순조에게 의궤 1건이 올려졌다. 2. 서지 사항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책(97장)이며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British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표지는 청색 비단이고 제첨은 흰색 비단에 “己巳進表裏進饌儀軌 全”이라 기록하였다. 책을 묶을 때 놋쇠 물림에 원환(圓環), 5개의 박을정(朴乙丁), 국화동(菊花童)을 사용하였고, 본문에는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기록하여 의람용 의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기록에 의하면 세로 47cm이며, 1891년 10월 2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 책은 본문에 오자(誤字)가 있으면 해당 부분을 도려내고 종이를 덧대어 깨끗하게 정사(正寫)했다. 3. 체제와 내용 ⑴ 체제 책의 권수(卷首)에 수록된 목차를 보면 택일(擇日), 좌목(座目), 도식(圖式), 전교(傳敎), 연설(筵說), 악장(樂章), 치사(致詞), 전문(箋文), 의주(儀註), 계사(啓辭) 부계목(附啓目),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찬품(饌品) 부채화(附菜花), 기용(器用), 배설(排設), 의장(儀仗), 참반(參班), 의위(儀衛), 공령(工伶), 상전(賞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19세기에 작성된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전형적인 체제이다. ⑵ 내용 택일(擇日) 택일에서는 각 행사를 거행한 일자가 정리되어 있다. 1809년 1월 10일에 순조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전문, 치사, 표리를 올리는 의식을 연습했다. 1월 22일에는 순조는 경춘전에서 전문, 치사, 표리를 직접 올렸고, 2월 27일에는 경춘전에서 진찬을 거행했다. 좌목(座目) 좌목은 행사를 집행하는 실무를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이다. 표리 등을 올리는 행사는 예조에서 주관했다. 도식(圖式) 도식에는 경춘전도(景春殿圖), 진표리도(進表裏圖), 진찬전내도(進饌殿內圖), 서보계도(西補階圖), 동보계도(東補階圖), 등가도(登歌圖), 헌가도(軒架圖), 진표리도, 진찬도, 전내도(殿內圖), 서보계도, 동보계도, 등가도, 헌가도, 채화도(菜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교(傳敎) 전교는 행사와 관련한 국왕의 명령을 정리한 것으로, 1808년 12월 1일부터 1809년 3월 19일까지 기록이다. 연설(筵說) 연설은 국왕이 신하를 만나 명령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1808년 12월 1일부터 1809년 2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악장(樂章) 악장은 의식에 사용된 악장으로 진찬 때 먼저 부르는 선창악장(先唱樂章)과 뒤에 부르는 후창악장(後唱樂章)이 있다. 이는 모두 규장각 검교직각(檢校直閣)이던 심상규가 작성하였다. 치사(致詞) 치사는 표리 등을 올리고 진찬을 거행하는 행사에서 왕대비와 혜경궁의 덕을 찬양하여 올린 문서를 말한다. 전문(箋文) 전문은 1월 22일에 혜경궁에게 표리 등을 올릴 때 함께 올린 축하의 글이다. 여기에는 순조가 올린 전문과 의빈이 올린 전문이 있고, 척신이 올린 전문은 의빈 것과 같다고 했다. 의주(儀註) 의주는 행사의 의식 절차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참석자의 자리 배치, 의장 및 기물(器物)의 배치, 참석자의 움직임, 연주 음악과 무용을 수록하였다. 계사(啓辭) 부계목(附啓目) 계사와 계목은 행사를 주관한 예조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를 말한다. 이를 보면 혜경궁이 볼 수 있도록 진찬 의주(儀註)를 한글로 작성하게 했으며, 진찬일은 처음에는 1809년 3월 10일로 정해졌다가 2월 27일로 바뀌었다. 이문(移文) 행사를 주관했던 예조에서 다른 관청에 보낸 공문서이다. 내관(來關) 내관은 상급 관청이나 동급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로 예조의 이문을 받은 병조와 화성부에서 답변한 것이다. 감결(甘結) 감결은 행사를 주관한 예조에서 하급 관청에 지시한 내용이다. 찬품(饌品) 부채화(附菜花) 찬품은 진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제공된 음식의 재료와 규격을 정리한 것이다. 기용(器用) 기용은 표리 등을 올리고 진찬을 거행할 때 사용된 도구를 정리한 것이다. 배설(排設) 배설은 경춘전에 설치한 물품의 목록을 정리한 것이다. 의장(儀仗) 의장은 표리 등을 올릴 때 혜경궁, 순조, 왕비의 의장과 진찬을 거행할 때 혜경궁, 왕대비, 순조, 왕비의 의장이 정리되어 있다. 참반(參班) 참반은 표리 등을 올릴 때와 진찬을 거행할 때 참여한 의빈과 척신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의위(儀衛) 의위는 행사를 보조하는 인원들이 배치된 상황과 각각의 업무를 정리한 것이다. 공령(工伶) 공령은 행사에 참여한 악공(樂工)과 의장(儀仗)을 들었던 차비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상전(賞典) 상전은 행사에 참여한 인물을 시상한 내용이다. 4. 자료의 가치 ⑴ 서지적 가치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어람용 2건이 제작되어 혜경궁과 순조에게 올렸고 이는 모두 외규장각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별도로 순조는 규장각에도 1건을 보관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의궤가 만들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56년에 작성된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을 보면, 1건은 1839년에 대교(待敎) 남병철(南秉哲)이 외규장각에 봉안했고, 다른 1건은 1856년에 검교제학(檢校提學) 김병기(金炳冀)가 외규장각에 봉안했다. 따라서 외규장각에 있던 2건의 의궤 가운데 1건이 현재 대영도서관에 있고, 나머지 1건은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필사본으로 작성된 어람용 의궤의 유일본이다. 이와 별도로 장서각에 《혜경궁진찬소의궤(惠慶宮進饌所儀軌)》 1책(64장)이 있다. 이는 본문의 판심에 “禮曹上”으로 인쇄된 용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행사를 주관했던 예조에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체제는 목록, 좌목, 전교, 계사, 이문, 내관, 의주, 감결, 상전으로만 구성되어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체제보다 소략하고, 의궤의 백미라 할 도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혜경궁진찬소의궤》에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에 보이지 않는 기록이 나타나므로 두 책을 대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⑵ 내용적 가치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809년 관례 60주년을 맞이한 혜경궁을 위해 거행한 두 가지 행사를 기록한 유일한 의궤이다. 이 의궤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과 행사 참석자, 행사의 절차, 행사의 소요된 물품의 내역과 경비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행사를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의궤의 백미는 49면으로 이루어진 도식에 있다. 도식은 참석자 및 의장의 위치를 문자로 표시한 도식과 실제 형상을 천연색으로 그리고 문자를 기록한 도식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천연색 그림은 의궤 최고의 수준이다. 가령 혜경궁에게 진찬을 올리는 진찬도를 보면 혜경궁의 좌석 뒤에 세워진 병풍의 그림까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이 상세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의궤의 도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정조 대에 작성된 것으로 최고의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목판으로 찍은 그림이기에 흑백으로만 나타난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도식은 정조 대에 작성된 의궤의 도식에 필적하는 수준이면서 천연색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유일한 가치를 가진다. ⑶ 연구사적 가치 영국에 있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그 전문(全文)이 입수되지 않아 연구가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연구는 임미선이 행사 관련 음악을 검토한 것이 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이후 혜경궁의 지위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이 의궤는 19세기 정치사의 전개와 함께 일어난 혜경궁의 지위 변화, 순조의 혜경궁에 대한 예우, 19세기 왕실 잔치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작성자: 김문식)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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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수리도감의궤(宗廟修理都監儀軌) / 조선 인조 15년(1637)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1. 머리말 『종묘수리도감의궤』는 1637년(인조15) 병자호란 이후 훼손된 종묘와 영녕전의 신실(神室) 내부를 수리하고 신주(神主)를 다시 만들고 거기에 글을 쓰는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이곳은 ‘효’와 ‘충’, ‘예’와 ‘악’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가 고스란히 농축된 곳이다. 전통시대에 ‘국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종묘와 사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의 등급을 가장 높은 등급인 대사(大祀)에 편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매우 중요시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본서는 그처럼 중요시했던 종묘가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으로 훼손되자 이의 정비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일반적으로 의궤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 그 행사의 준비 과정과 진행 과정, 의식 절차,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 후의 논상(論賞) 및 사후 처리 내용 등 제반 사항을 정리하여 기록한 행사의 보고서이다. 본 의궤 또한 그러한 성격을 띤다. 종묘와 관련된 의궤로 『종묘의궤(宗廟儀軌)』ㆍ『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가 있는데 본 의궤는 『종묘의궤』나 『종묘의궤속록』과 달리 일반의궤에 해당하며 현전하는 종묘 관련 의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되었다. 2. 종묘수리도감의 혁파와 『종묘수리도감의궤』의 편찬 경위 전란이 종결되고 경성으로 돌아온 인조와 위정자들은 우선 훼손되거나 잃어버린 신주를 다시 만들거나 고쳐 쓰는 일부터 착수했다. 그런데 당시는 신주만이 아니라 종묘 신실(神室) 내부의 정비도 필요했다. 처음에는 종묘의 중요함을 고려해 ‘도감’이라 칭하고자 했으나 전란 직후이기에 일을 간약(簡約)하게 하고자 ‘수리소’라고 명명했다. 그러한 결정이 열성들의 혼령을 모신 곳을 담당하기에는 타당하지 않았으며 또 실제 일을 행할 때 중요도를 고려해 마침내 담당 주관기관을 ‘수리도감’으로 고쳤음을 알려준다. 신실 내부의 수리와 신주의 개조가 주요 현안으로 오르면서 종묘를 전반적으로 수리하게 되어 공역이 커지면서 담당 기관의 성격을 바꾼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부터 문헌에는 ‘종묘수리도감(宗廟修理都監)’이라고 되어 있다. 본 의궤에는 본서의 편찬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정리해 놓은 ‘의궤(儀軌)’ 혹은 ‘의궤사목(儀軌事目)’이라는 항목이 없어서 본 의궤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의궤청은 어디에 배설했고, 의궤 편찬의 담당은 누가 맡았는지, 몇 책을 제작하여 어디에 분상(分上)했는지, 장정은 어떻게 했는지 등등 본서를 통해서는 알기가 어렵다. 본서는 국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으로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종묘수리도감(宗廟修理都監)』(藏 K2-3587)이 있을 뿐이다. 후자는 본서를 편찬하던 당시 어디에 보관되어 있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3.『종묘수리도감의궤』 의 서지사항 및 내용 (1) 서지사항 『종묘수리도감의궤』는 장서각 소장 『종묘수리도감』본과 동일한 내용을 수록했다. 다만 『종묘수리도감』은 전반적으로 상태가 좋지 못해 글자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종묘수리도감의궤』의 앞 3장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이 『종묘수리도감』에는 맨 앞 2장인데, 절반 이상이 떨어져나가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본 의궤의 말미에 수록한 종묘수리도감 담당자들의 수결이 『종묘수리도감』에는 떨어져나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시대 국가 행사는 일반적으로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그런 만큼 의궤도 하나의 의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의궤는 여러 곳에서 각자 맡은 일을 의궤로 작성하고 그러한 의궤를 합쳐서 한 질을 이루었다. 도청에서 편찬하는 도청의궤(都廳儀軌), 일방(一房)ㆍ이방(二房)ㆍ삼방(三房)의 각방의궤(各房儀軌), 지석소(誌石所)ㆍ우주소(虞主所)ㆍ별공작(別工作)의 각소의궤(各所儀軌) 등 이러한 의궤들을 묶어서 소위 말하는 ‘무슨무슨 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담당처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만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각종 물품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중요한 행사를 거행할 때에는 더욱 많은 인력과 물품이 필요함은 물론이었다. 반면, 본서는 이와 같은 일반의궤와 체제 면에서 같지 않다. 이 의궤는 목록이 수록되어 있지 않고, 1636년 12월 10일 청군의 침략부터 1637년 7월 6일자까지 훼손된 종묘와 영녕전의 신실 내부를 수리하고 신주를 개조한 사실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따라서 국왕이 내린 명령인 전교(傳敎), 신하들이 국왕에게 아뢰는 계사(啓辭), 감결(甘結)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기사를 날짜순으로 기록한 등록(謄錄)에 가깝게 서술되어 있다. 감결은 상위기관에서 하급관청에 실무 처리를 지시한 공문서이다. (2) 내용 『종묘수리도감의궤』의 주요 내용은 크게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망실된 인순왕후의 신주와 나머지 칼에 의해 흠집이 생기거나 모래나 흙에 긁히고 기름때 등으로 더렵혀진 신주들을 향탕으로 세척한 뒤 그대로 사용할 것인지, 개조해야 하는지, 개조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지 등이 논란이 되었다. 두 번째는 신주의 재료인 밤나무의 건정(乾正)에 따른 신주의 개조와 신주궤(神主匱)의 마련이었다. 세 번째는 개조한 신주를 시민당에서 쓸 것인지 종묘에서 쓸 것인지 제주(題主)할 장소에 관한 논의였다. 네 번째, 임시로 시민당에 봉안한 신주를 종묘로 옮겨 봉안할 때 홍화문(弘化門)으로 할 것인지, 북신문(北神門)을 경유할 것인지, 정로(正路)를 따라 이동할 것인지 경로에 관한 논의였다. 주요 내용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부분에 당시 종묘와 영녕전을 수리하기에 이른 배경을 간략히 기술하였다. 그에 따르면, 1636년 12월에 청나라 병사들이 경성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종묘의 신주와 사직의 위판을 먼저 강화도로 옮겼지만 이곳이 함락되자 급히 이 의물들을 땅에 묻어서 감추었다. 그러나 청나라 병사들이 이를 찾아 파헤쳤고, 이 와중에 인순왕후의 신주를 잃어버리고 나머지 종묘와 영녕전의 나머지 신주들도 손상을 입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사직의 위판은 이를 받치는 부방(趺方) 4개를 모두 잃어버렸다. 청과 강화(講和)한 뒤 ‘묘사주’를 창경궁의 시민당에 임시로 봉안했다. 이후 2월 26일 종묘서(宗廟署)에서 종묘 내부의 수리와 신주의 봉안을 건의하였는데 이때부터 7월 6일까지 기사가 날짜별로 적혀있다. * 2월 29일 : 수리소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감역관(監役官)을 각각 차출했다. 당상은 종묘서 도제조(都提調) 김류와 종묘서 제조(提調) 최명길(崔鳴吉), 장례원 판결사 박명부(朴明榑)로 낙점되었다. 낭청은 사직 조계원(趙啓遠)과 종묘서 령 지봉수(池鳳遂)로 결정되었고, 감역관은 종묘서 직장 남급(南礏)과 종묘서 봉사 민희원(閔希遠), 종묘서 부봉사 목기선(睦嗜善)으로 각각 차하되었다. 이들 담당자들의 명단을 적은 부분이 의궤라면 「좌목(座目)」에 해당한다. 종묘 수리를 위한 수리소가 설치되고 담당자가 정해졌으며, 30일에는 사목(事目)이 만들어졌다. * 3월 3일 : 조주청을 종묘수리소에 합설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조주청 사목을 마련하고 그 담당자를 뽑았다. * 3월 7일 : 종묘수리소는 종묘수리도감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종묘ㆍ영녕전 신주의 개조 대상 범위를 둘러싸고 인조와 대신들이 입장을 달리했다.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었거나 기름에 밴 신주 모두를 개조하자는 것이 인조의 생각이었고, 신하들은 심하게 손상을 입었거나 기름에 많이 오염된 신주만을 대상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 3월 16일 : 도제조와 제조 최명길, 예조참의 최연(崔葕)이 시민당에 나아가 봉심한 뒤 신주의 개조의 여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개조할 필요 없음[不當改]’, ‘개조할 정도는 아님[不至當改]’, ‘개조해야 함[當改]’ 등 세 부분으로 나눈 별단을 올렸다. * 3월 18일 : 묘사주의 개조를 근거로 삼을 만한 문헌을 상고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선정신 이황(李滉)의 문집, 『예기(禮記)』, 『통전(通典)』, 중국 역대 역사 기록 등을 참고했다. * 3월 25일 : 개조해야 할 종묘의 신주가 29위인데 밤나무의 건정이 힘들며, 양전(兩殿: 종묘와 영녕전)의 수리가 거의 완료되었다는 내용이다. * 3월 29일 : 종묘서 도제조 영의정 김류는 영중추부사 이홍주(李弘胄)로, 제조 이조판서 최명길은 행 부사직 윤지(尹墀)로 개차(改差)했다. 또 신주궤를 만들 재료인 피나무 판자[椵板]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논의이다. * 3월 30일 : 종묘와 영녕전 각 실의 파손된 곳에 대한 보수와 수리를 마쳤다는 것과 그 밖에 양전에 미비한 물품의 목록과 양전 안에 배설할 완점(薍簟)을 나열했다. * 4월 4일 :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길일은 윤4월 21일로, 시민당에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지낼 시각은 같은 날 묘시로 추택(推擇)했다. * 4월 15일 : 종묘의 신주를 봉심한 결과 옛날과 지금의 제도가 같지 않아, 이번에 신주를 개조하고 제주할 때 이전의 규례를 따르도록 전교했다. 이는 윤4월 8일 종묘수리도감에서 새로 만들어야 할 종묘 신주의 제도 및 치수에 관한 단자(單子)로 인조에게 올려졌다. * 윤4월 15일 : 시민당에서 종묘까지 올 때의 경로를 홍화문에서 북신문으로 정했다. 또 예조판서 한여직(韓汝溭)이 개조할 대상을 28위에서 10여 위로 축소할 것을 상소했다. 이후 개조해야 할 신주의 대상을 두고 다시 논의가 일었다. * 윤4월 19일 : 종묘ㆍ사직의 도제조와 제조가 분실한 인순왕후의 1위 이외에 응당 개조해야 할 신위로 5위만을 별단으로 올리자 인조가 너무 적다고 답했다. 이때 인조가 부표한 신위는 모두 11신위였다. 종묘의 신위는 인순왕후의 궐위를 포함하여 원경왕후ㆍ세종ㆍ문정왕후ㆍ인성왕후ㆍ선조ㆍ의인왕후ㆍ인목왕후ㆍ원종ㆍ인헌왕후 등 모두 10위였고, 영녕전은 의비 1위뿐이었다. * 윤4월 20일 : 인조와 신하들이 조율하여 최종 11위로 결정되었다. 인순왕후의 궐위를 포함해서 종묘는 원경왕후ㆍ세종ㆍ문정왕후ㆍ인성왕후ㆍ선조ㆍ의인왕후ㆍ인목왕후ㆍ원종ㆍ인헌왕후 등 10위, 영녕전은 의비 1위였다. * 윤4월 24일 : 신주의 봉이(奉移) 경로에 대해 예조에서는 인조에게 북신문을 권하지만 인조는 정로를 경유하여 이안(移安)하도록 전교했다. 또 이날 숙녕전에 봉안되는 신주에 글을 썼고, 제주관(題主官)은 첨지중추부사 이경헌(李景憲)이었다. * 윤4월 27일 : 종묘ㆍ사직의 신주ㆍ위판을 씻고 개제주(改題主)할 길일은 5월 4일 묘시로, 이들을 받들어 옮길 길일은 같은 달 6일 묘시로 정했다. * 5월 1일 : 행 판결사 박명부가 인순왕후의 신주에 글을 쓰는 장소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소를 올렸다. 처음에 예조의 견해를 따라 시민당에서 제주하기로 정탈했다가 다시 이경석(李景奭)의 차자로 인해 종묘로 바꾼 것에 대한 이의였다. 예조에서는 박명부의 상소로 인해 또 장소를 변경한다면 끝내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곤란하게 여겼고, 인조도 동의했다. * 5월 2일 : 사직의 위판을 이제 받들어 옮겨야 하는데 부방으로 쓸 밤나무가 아직까지 건조 중이어서 가부방(假趺方)을 사용하여 이안하기로 결정했다. 또 종묘수리도감에서 종묘ㆍ영녕전ㆍ숙녕전의 신주를 넣을 신주궤 41부를 신주를 봉안하는 (5월) 6일까지 만들어 바치기가 어렵다고 보고했다. 또 응당 고쳐 만들 신주 5위는 시민당에서 개제주하고, (5월) 4일 새벽에 북신문을 통해 종묘로 배진(陪進)하기로 결정했다. * 5월 4일 : 신주를 고쳐 썼다. 제주관은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행 첨지중추부사 이경헌, 예조참의 조문수(曹文秀)였다. 이날 명종의 신주도 개조하기로 정하여 (5월) 6일 열성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한 뒤 궐위(闕位)를 개제할 때 명종의 신주도 동시에 개제하기로 했다. * 6월 22일 : 종묘 10실과 영녕전 8실을 수리한 내역을 각 실마다 상세하게 정리하여 제시했다. 또 내궤(內匱) 41부와 외궤(外匱) 41부, 도합 82부를 만들 때 필요한 물품을 매우 구체적으로 수록했다. * 7월 6일 : 제주관, 제주할 때 필요한 물품, 신주를 씻을 때 필요한 물품, 임시로 봉안할 때 필요한 물품, 매안할 때 필요한 물품 등을 나열했다. 이어서 상지관(相地官)과 사지(事知) 사토장(沙土匠), 고지기[庫直], 사령(使令), 서원(書員)의 명단이 나온다. 본서의 말미에는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감조관 등 종묘수리도감 담당자들의 수결이 있다. 4.『종묘수리도감의궤』의 가치와 의의 1636년(인조 14)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국가의 존립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전란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막대한 경제적 손실, 종묘를 비롯한 문화재의 파괴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거빈(去邠)을 서둘렀다. 그때 국왕과 함께 출성(出城)한 성물(聖物)이 바로 종묘ㆍ영녕전의 신주와 사직의 위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를 건립할 때 제일 먼저 거론할 정도로 중요한 종묘가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훼손되었다. 무엇보다 종묘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신주까지 문제가 생기자 전란이 종식과 더불어 곧바로 이의 정비부터 서둘렀다. 조선이 건립된 이래로 종묘의 신주가 상당수 훼손된 것은 병자호란이 거의 처음이었다.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신주를 조성해서 종묘에 봉안한 뒤 기존 신주를 대신해서 새롭게 신주를 조성한다거나 신주의 내용을 고쳐 쓰는 것은 매우 어렵게 여기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전란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새로이 조성해야 하는 사정이 발생한 것이었다. 『종묘수리도감의궤』는 병자호란 직후 손상된 종묘와 영녕전의 신주를 새로 조성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어떤 신주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 새로 조성한 신주는 어디에서 글을 써야 하는지, 임시로 봉안한 처소에서 종묘로 이동할 때 어떤 길을 경유해야 하는지 등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는 본서가 현전하는 의궤 중에서 종묘 관련 의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되었다는 사실과도 깊은 관련이 깊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찬자료에서 종묘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나 임진왜란으로 그전까지 편찬된 의궤가 소실된 상황에서 1637년에 편찬된 본서의 편찬시기가 가장 앞선다. 그 때문에 종묘의 내외 의물이 손상된 상황에서 이의 정비를 보여주어 향후 신주를 훼손하여 새로 조성해야 할 때 참고가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중요한 의의를 하나 더 꼽는다면, 병자호란 직후 종묘를 정비하면서부터 신주궤에 대한 형태, 곧 내궤의 앞면을 비워두어 신주의 출납을 편리하게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신주궤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는 내궤의 앞면이 막혀 있고, 이때 앞면을 비워두면서 1758년(영조34)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앞면이 뚫린 내궤를 볼 수 있다. 『종묘수리도감의궤』는 『인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관찬 자료에서 확인되는 기록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실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이 왕실 의례 가운데 종묘 전례를 연구하는 이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작성자: 이현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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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6.임진기록(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壬辰記錄) / 조선 선조 27년(1594) / 2책 / 필사본/사본류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선장
    《임진기록(壬辰記錄)》은 정탁(鄭琢, 1526∼1605)이 임진왜란 7년간의 주요 기사를 모은 것으로, 명과 관련된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 정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시는 정간(貞簡), 약포(藥圃)는 자호이다. 중종 21년(1562)에 예천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3년(1558)에 33세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교리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1568)하고, 두 차례나 사절(1581, 1589)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가서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에 힘썼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이 사형 선고되자 상소를 올려 구제하였다. 정탁은 1599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으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를 거쳐 선조 36년(1603)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사망 후 위성공신에 등록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예천(醴泉)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저서로는 《약포집(藥圃集)》,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임진기록(壬辰記錄)》의 주요 내용은 경상우도지역의 전투상황과 적정 및 군량해결방안을 중앙에 보고한 내용, 전라감사 이정암(李廷馣)이 토로한 내용, 이순신과 권율의 장계(狀啓),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이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문답한 내용, 연병(鍊兵)에 관해서 비변사(備邊司)에서 올린 의견서, 김덕령(金德齡)의 장계(狀啓), 약포 자신이 지은 약포가보약서초고(藥圃家譜略敍草稿), 만권루선(萬卷樓選)과 다른 사람들이 약포에게 보낸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만행과 명원군(明援軍)의 성과를 기록한 송응창(宋應昌)의 글, 광동도어사(廣東都御史) 당일붕(唐一鵬)과 과도관(科道官)의 제본등서(題本謄書), 이여송(李如松)의 자변문(自辨文), 한어사(韓御史) 표문(表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보낸 답서(答書), 하남도어사(河南都御史) 황일용(黃一龍)의 통보(通報)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번역 해제 ] *『임진기록(壬辰記錄)』- 상권, 하권 『임진기록(壬辰記錄)』은 정탁(鄭琢, 1526~1605)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자신의 경험과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공문서 등을 적은 기록이다. 모두 상ㆍ하의 2책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보물 464호로 지정된 ‘정탁 문적 - 약포유고 및 고문서(鄭琢 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 가운데 하나로서 464-6호로 지정되어 있다. 1.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행적 조선중기의 문신인 정탁은 1526년(중종21)에 경상도 예천 북쪽 금당곡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이충(以忠)이고, 어머니 평산(平山) 한씨(韓氏)는 상주에서 예천으로 이주해 온 진사 한종걸(韓終傑)의 딸이다. 청주 정씨는 고려 말에 정극경(鄭克卿)의 8세손 침(賝)이 그의 아버지 오(傲)의 외가인 안동부 동쪽 가구촌(佳邱村)으로 이주해 오면서 안동부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청주 정씨는 안동부 서쪽의 회곡촌(檜谷村)과 저전촌(苧田村), 동쪽의 지내동(池內洞), 도기촌(道岐村), 도답촌(刀畓村) 등으로 확산되어 세거했다. 정탁은 관직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고, 이런 정탁의 태도는 40여 년간 관료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정탁은 온건하고 균형 잡힌 관료로서의 자세를 보이면서, 일생을 학문에 힘쓴 학자형 관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임진왜란에 임하여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전란을 극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에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이순신(李舜臣)을 앞장서서 구명하여 그를 백의종군하게 하였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활약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정탁의 공이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탁은 67세로 우찬성 겸 내의원 제조였다. 정탁은 선조를 따라 호종하여 영변까지 갔다가 6월 분조(分朝)가 행해지자 세자(광해군)를 따라 배종(陪從)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초기 그는 분조에서 왕세자의 스승이자 유력한 조언자로서 군무를 수행하며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힘썼다. 정탁의 분조 참여는 1592년 6월 14일부터 1593년 1월 20일까지가 1차이다. 2차 분조에의 참여는 1593년 윤11월 19일부터 1594년 8월 25일까지이다. 특히 2차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명과 일본 사이에 화의(和議)에 관련된 논의가 일어나자 그는 이를 반대하면서 힘써 싸워 이길 것을 주장하고, 구체적인 방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2. 『임진기록(壬辰記錄)』의 형식과 내용 『임진기록(壬辰記錄)』은 제목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7년 동안에 정탁이 경험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상, 하의 2책으로, 하책에는 부록이 붙어 있다. 필사본으로 모두 정탁이 직접 쓴 것이다. 내용은 크게 상책(162면)과 하책(184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는 형식과도 관련이 되는데 대체로 상책에는 공식적으로 주고받은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에는 조선 내부에서의 장계뿐만이 아니라 명 정부와 명의 장수 사이에, 또는 명과 조선 사이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그리고 명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가 포함되었다. 하책은 1592년(선조25) 9월 3일부터 시간의 순서에 따라 1601년(선조34)까지 사건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일지에 가까운 기록이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포함하여 전후까지 포괄하여 기록하였다. 매일을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니고, 기록이 될 만한 사건을 중심으로 필요한 경우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130면(부록 제외)으로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지 형식이기는 하나 1597년(선조30) 전후로는 입계한 글이나 비변사에 계하(啓下)하는 글도 옮겨 적어 놓아서 상책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하책의 뒷부분에는 부록이 있다. 부록에는 상당히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고향에 물러나 있는 정탁에게 곡식과 찬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는 차자(箚子)도 있고, 날씨에 관련된 것을 서술한 세시기사(歲時紀事), 의서(醫書)인 『소문(素問)』의 후기(候氣), 여덟 절기의 기후, 천시(天時)에 관해 소소하게 점치는 내용, 운전류(雲箋類)에서 각종 편지에서 쓰는 표현을 모은 내용, 이춘영(李春英)이 보낸 편지 2통, 상주(尙州) 유생 한진(韓璡)의 편지, 도촌 팔영(桃村八詠), 금역당(琴易堂), 차운시(次韻詩), 위장(衛將)·별무사(別武士)·금군(禁軍)·대장 군관(大將軍官)의 명단, 상소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편지를 쓸 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에 관한 서술이다. 가. 상책(上冊) 내용 「사평(司評) 김언욱(金彦勖)이 보내온 진영의 기별」의 이전에는 군량을 조달하다 애쓴 누군가의 부음(訃音)에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글이 있다. 「(송응창)노포문(露布文)」은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한 죄상을 밝히고,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는 상황을 개략한 다음 평양을 평정하고, 개성을 함락시켰으며, 임진강과 한강가까지 갔다가 벽제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으로부터 강화 요구와 함께 신하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결국 난을 평정하여 일본군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겸삼도수군통제사 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兼三道水軍統制使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이 왜적을 불태워 무찌른 일로 삼가 진달한 일」에서는 거제에 숨어 있던 적들을 이순신에게 알려서 적을 무찌른 정황, 조방장 어영담이 진해에서 나온 왜선을 협공하여 모두 부수고 불태운 전황, 당항포의 왜적을 물리친 어영담의 치보, 고성과 진해에서 마음대로 하던 적들이 이제는 제멋대로 드나들지 못할 것이라는 정황 등을 담았다. 「만력(萬曆) 22년 3월 10일 통제사 이순신이 3월 13일에 봉계(封啓)한 초안」에서는 고령(高靈)에서 담도사(譚都司)가 보내온 문서를 수령하여 등서하여 올린 내용, 왕세자는 거느리고 갈 군사가 있어야 하므로 왕세자에게 자문(咨文)을 보낸 다음 선발하여 조련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과도관(科道官)의 제본(題本) 20일」에서는 광동도 어사(廣東道御使) 당일붕(唐一鵬)이 올린 글에서 ‘왜(倭)에 대한 근심이 매우 절박하니,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에 마땅히 평양(平壤) 변방에서 패군한 장수를 아울러 안무(按撫)함으로써 국위(國威)를 떨치소서.’라는 내용이다. 「사천사(司天使)의 제본(題本), 1593년 1월 22일」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위유(慰諭)하러 온 행인사 행인 사헌(司憲)이 올린 글로 ‘조선에 대한 염려는 두루 뒤처리를 잘해야 한다고 한 의론이 마땅하니, 의당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전적으로 결단하셔서 만전을 도모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다. 「송응창(宋應昌)이 입공(入貢)에 대해 의논한 제본, 1593년 1월 24일」은 경략 시랑(經略侍郞) 송응창이 올린 글로서 ‘외람되이 왜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보고하면서 우러러 성상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 제독(李提督)의 자변(自辨)」은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올린 글로서 ‘이국(異國)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을 갔을 때의 위태롭고 고생스러웠던 온갖 정황에 대해 여러 말들이 일정하지 않아 심정을 밝히기가 어려우니, 간절히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속히 죄주시어 내침으로써 사람들의 비난을 달래시고 공론(公論)을 밝히라’는 내용이다. 「병부(兵部)의 복제(覆題 回報), 1594년 2월 3일」은 병부에서 올린 글로서 ‘험고함을 믿고 있는 왜구로 인해 편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신(武臣)의 공을 서훈(敍勳)하는 일을 너무 함부로 하고 엉성하게 따르려 하니, 논박의 직책을 맡겨 주심으로써 큰 법을 신중히 하시고 나라의 체통을 중하게 하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황제는 이여송은 조정의 처분을 따를 것과 다시 전장에 보낸다는 처분을 하고 있다. 「어사 한취선이 올린 표문(票文)」은 흠차 순무요동지방찬리군무 겸관비왜 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都察院右僉都御史) 한취선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칙유한 내용이다.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총병 유정(劉綎)에게 보낸 답서」는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조선의 왕자들을 살려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있으며, 장차 자신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고, 화해를 위해 명나라가 즉시 물러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도독[유정] 존부 노선생 대인에게 편지를 바칩니다[奉都督尊父老先生大人狀]」는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명나라 사람 강옥호(康玉湖)가 가등청정을 비호하는 내용을 유정에게 보낸 것이다. 「조선 총병(總兵) 고 아무개[고언백(高彦伯)]에게」는 가등청정이 1594년 3월 3일에 보낸 편지로서 배신(陪臣)과 왕자는 회보(回報)할 가망이 없으니, 오래 기다렸지만 조속히 뒷날의 소식을 기약해야 할 것과 명과 조선의 사람을 기다려 의논할 것 등을 전하는 내용이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도원수 권율[資憲大夫知中樞府事都元帥 臣權]」은 같은 제목으로 3개가 있다. 첫 번째는 창원 부사(昌原府使) 최근(崔謹)의 치보(馳報)에 따른 것이고 두 번째는 경상 방어사(慶尙防禦使) 김응서(金應瑞)의 치보에 따른 것이며, 세 번째는 소서행장이 보낸 왜인 조파총(曹把總)을 접견하고 도로 밀양으로 보내고 파견된 중국 관리가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보낸 유첩(諭帖)을 등서한 내용이다. 「비망기, 4월 26일」는 선조가 노성한 사람이 진휼 당상(賑恤堂上)으로 있는 것이 염려되어 연소한 재신(宰臣)으로 바꾸라는 명에 김우옹을 추천하는 것으로 회달(回達)하는 내용이다. 「2월 12일 통보(通報)」는 하남도어사(河南道御使) 황일룡(黃一龍)의 글에 ‘왜노는 매우 교활하고 사특하여 봉공(封貢)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황상께서 속히 결단하시어 변방의 흔단(釁端)을 막고 만세토록 치안을 보전하소서.’라는 내용으로 경략 송응창과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이 왜와 통공(通貢)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과 왜와 통공할 경우 있을 수 있는 각종 문제점을 조목조목 들고 있다. 「4월 4일 계하(啓下)」에서는 왜의 진영에 사인(士人) 이겸수(李謙受) 등을 보내서 주고받은 내용을 상세하게 전하는 내용이다. 「비변사 계본(備邊司啓本)」은 비변사 낭청에서 조정의 역대 제도가 진관(鎭管) 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변화한 대체적인 흐름에 대해 서술하고,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은 자신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진주 동쪽의 대곡리(大谷里)로 진영을 옮겨서 진을 치고 있으나 시간을 지체하며 공을 이룬 것이 없으며, 함께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쇄환할지 아니면 그대로 지키는 책임을 맡길지 조정에 처치를 의뢰하는 내용이다(1594년 5월 10일). 다음에는 「굶주리는 이들을 가엾게 생각하다[憫饑]」는 제목의 고풍시(古風詩) 1수가 있다. 나. 하책(下冊) 내용 하책은 1592년 9월 3일부터 중국의 장수나 사신들을 만나 연회하거나 전별한 것을 중심으로 일지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또 선조가 인재를 뽑는 10개의 조목을 내리고, 재상들에게 천거하라는 명에 따라 자신이 올린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인물평을 적었다. 그리고 화친을 주장하는 자에 대해 입계하려고 한 차자의 내용에서, 화친을 하려고 손을 놓는다면 오히려 오랑캐들이 욕심을 내어 장차 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중국을 핑계로 삼아 연기할 것을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1594년 11월 12일에 선조가 경연에 나가는 내용 및 정탁 자신도 이에 참여하여 진강한 내용 등도 기록하였다. 또 당시 논의된 기인(其人)에 관한 일에 대해서 정탁은 상공(常貢) 때문에 부득이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조정에서 절약하여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599년 9월에 부모님의 분묘에 성묘하러 남쪽으로 가면서 예천의 집에 들르고 안동으로 가서 관직을 그만둘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소하였다. 거듭 상소하여 봉상시 도제조 직임만 체차되었다. 1600년 2월에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렸고, 수용되지 않아, 다시 체차를 청하였다. 이에 4월에 체차를 명하는 유지를 받았고,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의인왕후의 승하 소식을 듣고 곡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죄하지 말라는 유지를 받았고, 발인에 임박하여 희방사까지 가다가 병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또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현궁(玄宮) 자리를 고치다가 장례 기한을 넘기게 된 것에 대해 차자를 올려 조종조에서 정한 제도를 우선하고 술가의 말을 참조만 해야 함을 강조하려고 하였는데, 입계하지는 않았다. 12월에 다시 대상(大喪)이 났는데도 지방에 있었던 죄를 청하였다. 1601년 1월 선조가 지방관을 통해 음식물을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을 아뢰었다. 다. 부록(附錄) 내용 부록은 고향에 물러나 있는 정탁에게 곡식과 찬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는 차자(箚子)가 있는데, 이는 올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세시기사(歲時紀事), 매월 초하루에 미리 천시(天時)와 기색(氣色)을 점치다, 여덟 절기의 운기(雲氣)를 미리 점치다, 노을의 채색을 미리 점치다, 사계절의 바람을 점치다[四季占風] 등의 내용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의서(醫書)인 『소문(素問)』의 후기(候氣), 여덟 절기의 기후, 천시(天時)에 관해 소소하게 점치는 내용으로 해점, 달점, 별점과 바람·비·구름·이슬·우레·번개·서리·눈·물·땅·사시(四時)의 갑자(甲子)·입춘(立春)의 일진(日辰)·무지개를 논하는 것과 바람이 없으면 비가 오는 확실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3. 『임진기록』의 가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기록』은 정탁이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공적인 관료로서 활동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된 기록이다. 특히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각종 외교문서의 원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을 둘러싼 갈등과 그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 조선 조정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문서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정탁이 이 시기 맡고 있던 직책이 외교 관련의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여송의 패전 책임에 관해 병부에 조사를 시킨 내용이나 이여송의 자변서, 병부의 복제 등 일괄문서를 제시하여 당시 어떤 정황이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다른 기록들과는 차이가 있다. 더불어 정탁이 자신이 올린 상소나 차자에 대해서도 어떤 맥락에서 이를 올렸는지, 또 그 조치가 어떠하였는지, 혹은 올리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함으로써 개인과 관련된 일체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성자 : 정재훈)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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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상(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上) / 조선 숙종 14년(1688)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1. 머리말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8년 8월 26일 장렬왕후가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한 뒤 이해 12월 16일 창경궁 문정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장과 관련한 제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의궤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 그 행사의 준비 과정과 진행 과정, 의식 절차,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 후의 논상(論賞) 및 사후 처리 내용 등 제반 사항을 정리하여 기록한 행사의 보고서이다. 그러한 의궤는 행사의 성격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본 글에서 다루려는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까다로운 내용을 수록하면서도 분량면에서 가장 방대했던, 그리고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흉례 관련 의궤 중 하나이다. 왕후의 국상은 일반적으로 국장(國葬), 내상(內喪)이라 일컬었다. 내상은 국왕보다 앞에 죽느냐 뒤에 죽느냐에 따라 상기(喪期)가 달랐다. 국왕보다 앞에 죽으면 기년상(期年喪, 1년상)을, 뒤에 죽으면 3년상을 치렀는데,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배우자인 인조보다 나중에 승하하였기 때문에 3년의 상제(喪制)를 치렀다.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제9실에 봉안되어 있는 인조의 신실(神室)에 부묘되었다. 2. 왕후 국장에 대한 국가전례서 규정: [국조오례의] 흉례조 조선의 국가전례는 태종대부터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대에 본격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때 정리한 책이 바로 1451년(문종1)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이를 바탕으로 1474년(성종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조선에서 편찬된 대표적인 국가전례서로, 고려의 유습이 남아 천자국의 전례가 포함된 [세종실록오례]와는 달리 제후국에 걸맞게 재편된 예서(禮書)라 할 수 있다. 1688년(숙종14)에 승하한 장렬왕후의 국장은 [국조오례의]를 따라 치러졌다. 여기서 규정된 흉례 조목들은 국왕의 국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왕후의 국장을 위한 조목들을 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종(初終), 복(復), 역복불식(易服不食), 계령(戒令), 목욕(沐浴), 습(襲), 전(奠), 위위곡(爲位哭), 거림(擧臨), 함(含), 설빙(設氷), 영좌(靈座), 명정(銘旌), 고사묘(告社廟), 소렴(小歛), 전(奠), 치벽(治椑), 대렴(大歛), 전(奠), 성빈(成殯), 전(奠), 여차(廬次), 성복(成服), 복제(服制),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 조석곡전급상식의(朝夕哭奠及上食儀), 삭망전(朔望奠), 의정부솔백관진향의(議政府率百官進香儀), 치장(治葬), 청시종묘의(請諡宗廟儀),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 내상청시여상청시종묘의(內喪請諡如上請諡宗廟儀),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 계빈의(啓殯儀), 조전의(祖奠儀), 견전의(遣奠儀), 발인반차(發引班次), 발인의(發引儀), 노제의(路祭儀), 천전의(遷奠儀), 입주전의(立主奠儀), 반우반차(返虞班次), 반우의(返虞儀), 안릉전의(安陵奠儀), 산릉조석상식의(山陵朝夕上食儀), 혼전우제의(魂殿虞祭儀), 졸곡제의(卒哭祭儀), 혼전조석상식의(魂殿朝夕上食儀), 혼전사시급납친향의(魂殿四時及臘親享儀), 섭사의(攝事儀), 혼전속절급삭망친향의(魂殿俗節及朔望親享儀), 섭사의(攝事儀), 사시급납속절삭망향산릉의(四時及臘俗節朔望享山陵儀), 친향산릉의(親享山陵儀), 연제의(練祭儀), 상제의(祥祭儀), 담제의(禫祭儀), 부묘의(祔廟儀) 주의할 점이 있는데, 바로 조문을 오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인조를 전후로 중원(中原)의 주인이 명이나 청이냐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의절인데, 명 사신을 맞이하는 의절은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청과 관련한 여러 의절은 국가전례서에는 실린 곳이 없고, 등록(謄錄) 및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참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조오례의] 흉례조에 규정한 위 조목들은 3년 동안 거행하는 국장 절차 전반에 대한 의절을 규정한 항목들로, 장렬왕후의 국장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3. 장렬왕후의 승하와 국장도감의 설치 장렬왕후는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1635년(인조13) 인조의 첫 번째 비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자, 1638년(인조16) 12월에 비로소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으로 건원릉(健元陵)의 옆에 위치해 있다. 9월 1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 빈전)에서 성빈(成殯)하였다. 12월 15일 발인(發靷)하여, 이날 산릉의 정자각(丁字閣)에 재궁(梓宮)을 봉안하였다. 다음날인 12월 16일 재궁을 현궁(玄宮)에 내리고[하현궁(下玄宮)], 이날 곧바로 반우(返虞)하여,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대개 삼년상이라고 할 때의 ‘3년’은 만 3년이 아니라 햇수로서의 3년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27개월에 해당한다. 그리고 위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장렬왕후의 국상은 27개월 상기 중에서도 5개월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에는 이 기간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국조오례의] 흉례조에 따른다면 초종(初終)부터 반우(返虞)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셈이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국장에 관한 일반 일을 맡아 보던 임시 관아로,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곧바로 설치되었다. [국조오례의] 계령(戒令)조에 따르면, 국장도감에서는 재궁・거여(車輿)・책보(冊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기(明器)・길흉의장(吉凶儀仗)・상유(喪帷)・포연(鋪筵)・제기(祭器)・제전(祭奠)・반우(返虞)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4. 국장도감의 혁파와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편찬 경위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책 이름에 ‘국장’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3년 동안 진행되는 국장의 전 과정을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의궤는 왕후의 승하부터, 산릉에 시신을 매안한 뒤 신주를 받들고 돌아와 혼전에 봉안하기까지, ‘국장도감’에서 담당했던 일만을 기록하였다. 국왕이나 왕후가 장례는 일반적으로 승하한 지 5개월이 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장렬왕후도 8월에 승하하여 12월에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이 걸렸으므로 기본 규정을 준수한 셈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승하부터 반우까지 대략 5개월 동안 있었던 일이 담겨 있다.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는 것으로 국장도감은 그 임무를 마쳤고 이내 혁파되었다. 혁파 시점은 대개 반우하는 날이었다. 장렬왕후의 경우 또한 12월 16일 반우한 날에 국장도감의궤의 사목(事目)이 마련되었다. 사역원에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해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편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본 의궤의 완료 시점은 빨라도 1689년(숙종15) 5월 10일 이후였고, 그 과정까지 본 의궤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본 의궤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시간적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의절로 헤아린다면 승하부터 반우까지의 관련 내용만을 담고 있지만, 이 의궤가 편찬되고 완료되는 과정까지 수록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뒷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2책으로 총 5건을 제작하였다. 국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 1건, 그리고 분상용(分上用) 4건인데, 분상용은 춘추관(春秋館), 의정부, 예조, 강화부에 각 1건을 보관하였다. 이중에서 어람용 1건과 보관처가 분명하지 않은 분상용 1건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5.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서지 사항 및 내용 현재 남아 전하는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2건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어람용 1건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분상용 1건이 그것이다. 어람용 1건은 2책이 모두 전하지만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제1책이 누락되고 제2책만 전하는 영본이다. 따라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의궤는 어람용 1건 뿐이다. 어람용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두 책이 모두 전하고 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나, 제2책 이방의궤(二房儀軌)의 「품목질(禀目秩)」에서 9면에서 12면까지 총 4면이 없다. 다행히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奎 14867)에 어람용에서 누락된 4면을 수록하고 있어서 두 기관의 소장본이 상호 보완할 수 있다. 다음은 본서의 체제이다. 제1책에 실린 목록이 본서 전체의 목록이다. 좌목(座目), 계사(啓辭), 별단(別單), 장계(狀啓), 이문(移文), 품목(稟目), 감결(甘結), 예관(禮關), 의궤(儀軌), 논상(論賞),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분전설사(分典設司), 분장흥고(分長興庫), 지석소(誌石所), 우주소(虞主所), 별공작(別工作)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의궤의 본문에서는 이 목록의 순서대로 내용을 싣지 않았다. 제1책에서는 크게 도청의궤(都廳儀軌)[좌목~논상]와 일방의궤(一房儀軌),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로 구성되어 있다. 제2책에서는 크게 이방의궤(二房儀軌), 분장흥고의궤(分長興庫儀軌), 삼방의궤(三房儀軌)로 구성되어 있다. 순서가 전체 목록과 다르게 편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소위 각소의궤(各所儀軌)를 제대로 싣고 있지 않다. 특히 분전설사의궤, 지석소의궤, 우주소의궤는 의궤의 체제를 갖추기는커녕 삼방의궤 안에 지석소수본질(誌石所手本秩), 우주소수본질(虞主所手本秩), 분전설사수본질(分典設司手本秩)의 형태로 실려 있다. 각각의 수본질을 싣는 순서 또한 전체 목록의 순서와 다르게 되어 있다. 전체 목록을 보면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역시 도청의궤, 각방・각소의궤대로 체제를 갖추고자 했었지만, 막상 각 의궤를 수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처음 의도대로 편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음은 본서의 내용이다. 체제에서 언급한 그대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제1책 목록 다음에 「좌목」이 아닌 권수(卷首)에 해당하는 내용을 실었다. 장렬왕후의 승하부터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고 반우하여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중요 의절을 중심으로 국장 과정을 날짜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에 시호・휘호・전호・능호를 기술하였다. 그 밖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각 항목에 따른 내용을 충실하게 싣고 있다. 본서가 어람용인만큼, 종이 재질[초주지(草注紙)], 붉은 인찰선, 반듯한 글씨체 등 여러 면에서 다른 책보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특히 각종 기물을 그린 그림과 반차도가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6.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편찬의 의의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8년 8월 장렬왕후가 승하한 뒤 이해 12월 장례를 치르고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장 과정 전반에 대해 기록한 유일본 의궤이다. 본서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자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관찬 자료에서 확인되는 기록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사실들을 이 의궤가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인반차도를 비롯한 각종 채색 도설(圖說)을 수록하여 조선후기 왕후의 국장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할 것이다. 물론 본서에서 네 장이 결락되었지만, 이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분상용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참고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밖에 국장도감 담당자와 참여자, 관련 관서 간의 업무 협조, 국장 진행을 위한 각종 기물의 종류와 규격 및 그 제작에 소요된 물품의 종류, 수량, 조달 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조선의 의례사,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생활사 등 여러 방면의 연구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장렬왕후 국장 의례를 연구하고자 할 때, 빈전・혼전을 건축적으로 접근하고자 할 때, 왕릉에 묻는 의복[복완]과 기물[명기, 의물]을 살피고자 할 때, 그 밖에 다른 분야에서 참고하고자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의궤이다. 조선시대 왕실 연구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학제 간 융합 연구도 가능하기를 기대한다. (작성자: 이현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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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하(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下) / 조선 숙종 14년(1688)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1. 머리말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8년 8월 26일 장렬왕후가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한 뒤 이해 12월 16일 창경궁 문정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장과 관련한 제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의궤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 그 행사의 준비 과정과 진행 과정, 의식 절차,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 후의 논상(論賞) 및 사후 처리 내용 등 제반 사항을 정리하여 기록한 행사의 보고서이다. 그러한 의궤는 행사의 성격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본 글에서 다루려는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까다로운 내용을 수록하면서도 분량면에서 가장 방대했던, 그리고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흉례 관련 의궤 중 하나이다. 왕후의 국상은 일반적으로 국장(國葬), 내상(內喪)이라 일컬었다. 내상은 국왕보다 앞에 죽느냐 뒤에 죽느냐에 따라 상기(喪期)가 달랐다. 국왕보다 앞에 죽으면 기년상(期年喪, 1년상)을, 뒤에 죽으면 3년상을 치렀는데,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배우자인 인조보다 나중에 승하하였기 때문에 3년의 상제(喪制)를 치렀다.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제9실에 봉안되어 있는 인조의 신실(神室)에 부묘되었다. 2. 왕후 국장에 대한 국가전례서 규정: [국조오례의] 흉례조 조선의 국가전례는 태종대부터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대에 본격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때 정리한 책이 바로 1451년(문종1)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이를 바탕으로 1474년(성종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조선에서 편찬된 대표적인 국가전례서로, 고려의 유습이 남아 천자국의 전례가 포함된 [세종실록오례]와는 달리 제후국에 걸맞게 재편된 예서(禮書)라 할 수 있다. 1688년(숙종14)에 승하한 장렬왕후의 국장은 [국조오례의]를 따라 치러졌다. 여기서 규정된 흉례 조목들은 국왕의 국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왕후의 국장을 위한 조목들을 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종(初終), 복(復), 역복불식(易服不食), 계령(戒令), 목욕(沐浴), 습(襲), 전(奠), 위위곡(爲位哭), 거림(擧臨), 함(含), 설빙(設氷), 영좌(靈座), 명정(銘旌), 고사묘(告社廟), 소렴(小歛), 전(奠), 치벽(治椑), 대렴(大歛), 전(奠), 성빈(成殯), 전(奠), 여차(廬次), 성복(成服), 복제(服制),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 조석곡전급상식의(朝夕哭奠及上食儀), 삭망전(朔望奠), 의정부솔백관진향의(議政府率百官進香儀), 치장(治葬), 청시종묘의(請諡宗廟儀),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 내상청시여상청시종묘의(內喪請諡如上請諡宗廟儀),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 계빈의(啓殯儀), 조전의(祖奠儀), 견전의(遣奠儀), 발인반차(發引班次), 발인의(發引儀), 노제의(路祭儀), 천전의(遷奠儀), 입주전의(立主奠儀), 반우반차(返虞班次), 반우의(返虞儀), 안릉전의(安陵奠儀), 산릉조석상식의(山陵朝夕上食儀), 혼전우제의(魂殿虞祭儀), 졸곡제의(卒哭祭儀), 혼전조석상식의(魂殿朝夕上食儀), 혼전사시급납친향의(魂殿四時及臘親享儀), 섭사의(攝事儀), 혼전속절급삭망친향의(魂殿俗節及朔望親享儀), 섭사의(攝事儀), 사시급납속절삭망향산릉의(四時及臘俗節朔望享山陵儀), 친향산릉의(親享山陵儀), 연제의(練祭儀), 상제의(祥祭儀), 담제의(禫祭儀), 부묘의(祔廟儀) 주의할 점이 있는데, 바로 조문을 오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인조를 전후로 중원(中原)의 주인이 명이나 청이냐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의절인데, 명 사신을 맞이하는 의절은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청과 관련한 여러 의절은 국가전례서에는 실린 곳이 없고, 등록(謄錄) 및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참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조오례의] 흉례조에 규정한 위 조목들은 3년 동안 거행하는 국장 절차 전반에 대한 의절을 규정한 항목들로, 장렬왕후의 국장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3. 장렬왕후의 승하와 국장도감의 설치 장렬왕후는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1635년(인조13) 인조의 첫 번째 비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자, 1638년(인조16) 12월에 비로소 계비(繼妃)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으로 건원릉(健元陵)의 옆에 위치해 있다. 9월 1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 빈전)에서 성빈(成殯)하였다. 12월 15일 발인(發靷)하여, 이날 산릉의 정자각(丁字閣)에 재궁(梓宮)을 봉안하였다. 다음날인 12월 16일 재궁을 현궁(玄宮)에 내리고[하현궁(下玄宮)], 이날 곧바로 반우(返虞)하여,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대개 삼년상이라고 할 때의 ‘3년’은 만 3년이 아니라 햇수로서의 3년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27개월에 해당한다. 그리고 위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장렬왕후의 국상은 27개월 상기 중에서도 5개월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에는 이 기간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국조오례의] 흉례조에 따른다면 초종(初終)부터 반우(返虞)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셈이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국장에 관한 일반 일을 맡아 보던 임시 관아로,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곧바로 설치되었다. [국조오례의] 계령(戒令)조에 따르면, 국장도감에서는 재궁・거여(車輿)・책보(冊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기(明器)・길흉의장(吉凶儀仗)・상유(喪帷)・포연(鋪筵)・제기(祭器)・제전(祭奠)・반우(返虞)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4. 국장도감의 혁파와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편찬 경위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책 이름에 ‘국장’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3년 동안 진행되는 국장의 전 과정을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의궤는 왕후의 승하부터, 산릉에 시신을 매안한 뒤 신주를 받들고 돌아와 혼전에 봉안하기까지, ‘국장도감’에서 담당했던 일만을 기록하였다. 국왕이나 왕후가 장례는 일반적으로 승하한 지 5개월이 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장렬왕후도 8월에 승하하여 12월에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이 걸렸으므로 기본 규정을 준수한 셈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승하부터 반우까지 대략 5개월 동안 있었던 일이 담겨 있다.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는 것으로 국장도감은 그 임무를 마쳤고 이내 혁파되었다. 혁파 시점은 대개 반우하는 날이었다. 장렬왕후의 경우 또한 12월 16일 반우한 날에 국장도감의궤의 사목(事目)이 마련되었다. 사역원에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해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편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본 의궤의 완료 시점은 빨라도 1689년(숙종15) 5월 10일 이후였고, 그 과정까지 본 의궤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본 의궤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시간적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의절로 헤아린다면 승하부터 반우까지의 관련 내용만을 담고 있지만, 이 의궤가 편찬되고 완료되는 과정까지 수록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뒷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2책으로 총 5건을 제작하였다. 국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 1건, 그리고 분상용(分上用) 4건인데, 분상용은 춘추관(春秋館), 의정부, 예조, 강화부에 각 1건을 보관하였다. 이중에서 어람용 1건과 보관처가 분명하지 않은 분상용 1건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5.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의 서지 사항 및 내용 현재 남아 전하는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2건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어람용 1건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분상용 1건이 그것이다. 어람용 1건은 2책이 모두 전하지만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제1책이 누락되고 제2책만 전하는 영본이다. 따라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의궤는 어람용 1건 뿐이다. 어람용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두 책이 모두 전하고 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나, 제2책 이방의궤(二房儀軌)의 「품목질(禀目秩)」에서 9면에서 12면까지 총 4면이 없다. 다행히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奎 14867)에 어람용에서 누락된 4면을 수록하고 있어서 두 기관의 소장본이 상호 보완할 수 있다. 다음은 본서의 체제이다. 제1책에 실린 목록이 본서 전체의 목록이다. 좌목(座目), 계사(啓辭), 별단(別單), 장계(狀啓), 이문(移文), 품목(稟目), 감결(甘結), 예관(禮關), 의궤(儀軌), 논상(論賞),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분전설사(分典設司), 분장흥고(分長興庫), 지석소(誌石所), 우주소(虞主所), 별공작(別工作)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의궤의 본문에서는 이 목록의 순서대로 내용을 싣지 않았다. 제1책에서는 크게 도청의궤(都廳儀軌)[좌목~논상]와 일방의궤(一房儀軌),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로 구성되어 있다. 제2책에서는 크게 이방의궤(二房儀軌), 분장흥고의궤(分長興庫儀軌), 삼방의궤(三房儀軌)로 구성되어 있다. 순서가 전체 목록과 다르게 편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소위 각소의궤(各所儀軌)를 제대로 싣고 있지 않다. 특히 분전설사의궤, 지석소의궤, 우주소의궤는 의궤의 체제를 갖추기는커녕 삼방의궤 안에 지석소수본질(誌石所手本秩), 우주소수본질(虞主所手本秩), 분전설사수본질(分典設司手本秩)의 형태로 실려 있다. 각각의 수본질을 싣는 순서 또한 전체 목록의 순서와 다르게 되어 있다. 전체 목록을 보면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역시 도청의궤, 각방・각소의궤대로 체제를 갖추고자 했었지만, 막상 각 의궤를 수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처음 의도대로 편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음은 본서의 내용이다. 체제에서 언급한 그대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제1책 목록 다음에 「좌목」이 아닌 권수(卷首)에 해당하는 내용을 실었다. 장렬왕후의 승하부터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고 반우하여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중요 의절을 중심으로 국장 과정을 날짜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에 시호・휘호・전호・능호를 기술하였다. 그 밖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각 항목에 따른 내용을 충실하게 싣고 있다. 본서가 어람용인만큼, 종이 재질[초주지(草注紙)], 붉은 인찰선, 반듯한 글씨체 등 여러 면에서 다른 책보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특히 각종 기물을 그린 그림과 반차도가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6.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편찬의 의의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8년 8월 장렬왕후가 승하한 뒤 이해 12월 장례를 치르고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장 과정 전반에 대해 기록한 유일본 의궤이다. 본서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자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관찬 자료에서 확인되는 기록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사실들을 이 의궤가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인반차도를 비롯한 각종 채색 도설(圖說)을 수록하여 조선후기 왕후의 국장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할 것이다. 물론 본서에서 네 장이 결락되었지만, 이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분상용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참고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밖에 국장도감 담당자와 참여자, 관련 관서 간의 업무 협조, 국장 진행을 위한 각종 기물의 종류와 규격 및 그 제작에 소요된 물품의 종류, 수량, 조달 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조선의 의례사,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생활사 등 여러 방면의 연구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장렬왕후 국장 의례를 연구하고자 할 때, 빈전・혼전을 건축적으로 접근하고자 할 때, 왕릉에 묻는 의복[복완]과 기물[명기, 의물]을 살피고자 할 때, 그 밖에 다른 분야에서 참고하고자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의궤이다. 조선시대 왕실 연구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학제 간 융합 연구도 가능하기를 기대한다. (작성자: 이현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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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무녹훈도감의궤 상(奮武錄勳都監儀軌 上) / 조선 영조 5년(1729)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 『분무녹훈도감의궤』- 상권, 하권 『분무녹훈도감의궤』는 1728년(영조4) 3월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함)을 진압하고 공신을 책봉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책 제목의 ‘분무(奮武)’는 공신들의 훈호(勳號)인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决幾効力奮武功臣)’에서 나왔다. 1. 저술 배경 이 책은 무신란을 진압하고 공신을 녹훈하는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무신란은 1728년 3월 14일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는 반군은 청주를 장악한 후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3월 24일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안성과 죽산에서 격파되었다. 영남과 호남에서도 호응이 있었다. 영남에서는 3월 20일에 정희량(鄭希亮)이 안음에서 일어나 거창, 합천, 함양 등지를 장악하였지만, 경상감사 황선(黃璿)이 관군을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호남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무장에 유배중인 박필몽(朴弼夢)과 내통하였으나 전라감사와 연결에 실패하여 난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4월 19일에 영조는 숭례문(崇禮門) 누각에 나가 오명항이 바치는 난적 세 사람의 수급(首級)을 받았고, 4월 22일에는 종묘와 사직에 반란을 평정하였음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이후로 공신 녹훈이 이루어져 7월 18일에 영조는 공신들과 함께 신무문(神武門) 밖에 설치한 단에서 회맹제(會盟祭)를 지냈고, 다음날 공신들에게 교서(敎書)를 나눠주었다. 이 의궤는 1729년 5월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1730년 3월경에는 편찬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1730년(영조6) 8월 3일에 조석명(趙錫命)이 영조에게 『분무녹훈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 3건의 선사(繕寫)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의궤는 의궤도감(儀軌都監)에서 편찬하였으며, 어람용 1건과 의정부(議政府)와 충훈부(忠勳府)에 분상할 2건을 합하여 총 3건을 제작했다. 2. 서지 사항 『분무녹훈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는 상권과 하권 2책이며, 상권은 257장, 하권은 259장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할 때 상권에 ‘CORÉEN 2440’, 하권에 ‘CORÉEN 2439’라는 도서번호를 부여하였다. 원래의 표지는 연꽃 문양이 있는 초록색 비단[草綠大段]이었지만 현재는 갈색 비단으로 개장(改粧)되었다. 표지의 제첨(題簽)은 흰색 비단[白綾]에 “奮武錄勳都監儀軌 上ㆍ下”라 기록하고, 내제(內題)는 “옹정육년무신삼월일 분무녹훈도감의궤(雍正六年戊申三月日 奮武錄勳都監儀軌)”이다. 책을 묶을 때 놋쇠 물림에 원환(圓環), 5개의 박을정(朴乙丁), 국화동(菊花童)을 사용하였고, 본문은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기록하여 어람용 의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한 본문에 오자(誤字)가 있으면 해당 부분을 도려내고 종이를 덧대어 깨끗하게 정사(正寫)했다. 책의 크기는 48.0×36.0cm이다. 3. 체제와 내용 (1) 체제 책의 권수(卷首)에 수록된 목차를 보면 상권(上卷)은 추안질(推案秩), 장계질(狀啓秩), 비망기질(備忘記秩), 연설질(筵說秩)이 있다. 이중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추안질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하권(下卷)은 계사질(啓辭秩), 어제 수서질(御製手書秩), 노포(露布), 축문질(祝文秩), 교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인등서(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의정부 통고중외문(議政府通告中外文), 교분무공신원종록권두사서(敎奮武功臣原從錄券頭辭書), 회맹제 제문(會盟祭祭文), 회맹후 반축서(會盟後頒軸書), 교제공신등서(敎諸功臣等書), 사전문(謝箋文), 토역주문(討逆奏文), 소차질(疏箚秩), 품목질(稟目秩), 감결질(甘結秩), 이문질(移文秩), 내관질(來關秩), 의주질(儀註秩), 일방의궤(一房儀軌), 이방의궤(二房儀軌), 삼방의궤(三房儀軌),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 의궤도감등록(儀軌都監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내용 * 추안질(推案秩) 1728년(영조4) 3월 12일부터 1729년 3월 29일까지 영조가 반란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한 내용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중죄인은 이인좌처럼 능지처참되어 서울 거리에 목을 걸어두었다가 소금에 절인 후 전국을 순회하며 보이게 했고, 가산(家産)을 빼앗고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심문이 계속되는 동안 수차례 형벌을 받다가 사망한 사람도 많았고, 죄가 가벼운 경우에는 원지(遠地)로 유배를 갔다. * 장계질(狀啓秩)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비롯하여 진압에 나선 관리들이 영조에게 보고한 장계(狀啓)와 이에 대한 국왕의 답변을 정리하였다. * 비망기질(備忘記秩) 영조가 내린 비망기를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 연설질(筵說秩) 영조가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 계사질(啓辭秩) 공신 녹훈을 담당한 실무 관청에서 영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 어제수서질(御製手書秩) 영조가 신하들에게 내린 수서(手書)이다. * 노포(露布) 1728년 4월 19일, 사로도순부사 오명항이 역적을 물리친 후 발표한 노포(露布)의 전문(全文)이다. 지제교(知製敎) 정우량(鄭羽良)이 작성했다. * 축문질(祝文秩) 1728년 4월 22일, 반란을 평정한 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사직(社稷)에 고유제를 올릴 때의 축문(祝文)이다. * 교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인등서(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1728년 4월 22일, 영조가 서울과 지방의 대소 신료(臣僚), 기로(耆老), 군민(軍民), 한량인(閑良人)들에게 내린 교서이다. * 의정부 통고중외문(議政府通告中外文) 1728년 6월 1일, 의정부에서 서울과 지방에 통고한 글이다. 대사간 송인명(宋寅明)과 교리 신치운(申致雲)이 지었고, 영의정 이광좌와 대제학 윤순이 첨삭하였다. * 교분무공신원종록권두사서(敎奮武功臣原從錄券頭辭書) 1728년 7월 15일,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녹권(錄券)의 머리말[頭辭]로 쓴 교서이다. 지제교 오광운(吳光運)이 작성했다. * 회맹제 제문(會盟祭祭文) 1728년 7월 18일, 회맹제에 사용한 제문(祭文)이다. 제문은 반란 사건의 발생과 진압 과정을 소개한 후 공신들에게 은혜와 예우가 흡족하고 마음과 뜻이 부합하니, 국왕과 공신들이 함께 국사를 논의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 회맹후 반축서(會盟後頒軸書) 1728년 7월 19일, 회맹제를 올린 후 공신들에게 교서를 나눠준다는 교서이다. 예문관 제학 서명균(徐命均)이 작성했다. 국난(國難)이 평정되었지만 아직 걱정되는 일이 많으니 총애와 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고락(苦樂)을 함께하는 의리에 힘쓰라는 내용이다. * 교제공신등서(敎諸功臣等書) 영조가 분무공신으로 녹훈된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이다. 교서를 받은 공신과 이를 작성한 지제교(知製敎), 교서를 필사한 서사관(書寫官)의 명단을 보면 15인의 공신에게 각각 다른 내용의 교서가 내려졌다. * 사전문(謝箋文) 1728년 7월 20일, 15인의 공신이 영조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올린 전문(箋文)이다. * 토역주문(討逆奏文) 1728년 8월 10일, 영조가 청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흉적을 토죄(討罪)하였음을 알리는 주문(奏文)이다. * 소차질(疏箚秩) 신하들이 영조에게 올린 소차(疏箚)와 이에 대한 영조의 답(答)을 정리하였다. 대부분 분무공신의 녹훈을 사양하고 영조가 이를 달래는 내용이다. * 품목질(稟目秩) 녹훈도감 소속의 하급 관리가 올린 품목(稟目)을 정리한 것으로, 도감의 당상(堂上)이 처리했다. * 감결질(甘結秩) 녹훈도감에서 타 기관으로 보낸 감결(甘結)이다. 1728년 5월부터 1729년 6월까지 작성되었으며, 필요한 물품이나 인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 이문질(移文秩) 녹훈도감에서 타 기관으로 보낸 이문(移文)이다. 1728년 4월부터 1729년 3월까지 작성되었으며, 공신 녹훈의 전례를 파악하고 행사를 집행하기 위한 실무적 내용이 많다. * 내관질(來關秩) 타 기관에서 녹훈도감으로 보내온 관문(關文)이다. 1728년 4월부터 1729년 5월까지 접수되었으며, 녹훈도감에서 보낸 문서에 답하거나 행사와 관련하여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다. * 의주질(儀註秩) 1728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거행된 네 가지 행사의 의주(儀註)이다. 7월 18일의 회맹제의(會盟祭儀)는 전하(영조)와 공신, 제관들이 회맹제를 올리는 의례이다. 7월 19일의 교서반포의(敎書頒布儀)와 공신음복의(功臣飮福儀)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교서반포의는 영조가 교서를 반포하는 의례이다. 공신음복의는 공신들이 교서와 사물을 받은 후 회맹제를 지낸 제관(祭官)들과 함께 전하가 내린 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7월 20일의 진사전의(進謝箋儀)는 전하에게 감사 전문을 올리는 의례이다. * 일방의궤(一房儀軌) 먼저 의궤도감의 좌목(座目)이 나온다. 당상(堂上)은 해은부원군 오명항과 풍능군 조문명이고, 도청(都廳)은 홍문관 부응교 성덕윤(成德潤)이다. 일방의궤는 직조색(織造色)과 교서색(敎書色)을 담당하였다. 1728년 5월 7일부터 8월 23일까지 기록이며, 일방에서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교서와 회맹축, 화상(畵像)을 제작할 때 사용할 생초(生綃)는 장인을 일방에 소속시켜 직조하였고, 교서의 초안을 쓰고 영조가 내린 어필 현판을 제작하였다. * 이방의궤(二房儀軌) 이방의궤는 화상색(畵像色)을 담당하였다. 분무공신 15인의 화상을 제작할 때 생초(生綃), 남대단(藍大段), 백릉(白綾), 모변지(毛邊紙), 저주지(楮注紙), 백지(白紙), 당주홍(唐朱紅), 동황(同黃), 삼록(三碌) 등이 필요했다. * 삼방의궤(三房儀軌) 삼방의궤는 인출색(印出色)을 담당하였다. 대전(영조)과 세자궁에 진상하는 회맹록(會盟錄) 2건(件), 반사(頒賜)하는 회맹록 492건, 원종녹권(原從錄券) 8,778건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물품 내역이 나타난다. *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 진상하는 회맹축을 담을 궤자(樻子) 1부(部), 진상하는 회맹녹권을 담을 흑칠책갑(黑漆冊匣) 2부, 교서궤(敎書樻) 15부, 교서축(敎書軸) 15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물품 내역이 있다. * 의궤도감등록(儀軌都監謄錄) 1729년 5월에 녹훈의궤(錄勳儀軌)를 편찬하는데 필요한 물품, 7월에는 충훈부의 기공각(紀功閣)에 봉안할 어휘훈안(御諱勳案) 1건, 신공신현판(新功臣懸板) 1부(部)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12월에는 어람(御覽) 1건에 필요한 초주지(初注紙)와 의정부, 충훈부에 보낼 2건에 필요한 저주지(楮注紙)를, 1730년 3월에는 어람등록(御覽謄錄) 2책과 각처에 보관한 등록(謄錄) 4책에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마지막 장에는 의궤도감의 당상, 도청, 낭청의 명단과 수결(手決)이 있다. 4. 자료의 가치 (1) 서지적 가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어람용 1건이 제작되어 외규장각으로 이동하였고, 분상용 2건은 의정부와 충훈부에 배포되었다. 이 책은 어람용으로 제작되어 외규장각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어람용 유일본이며, 완질이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이와 별도로 규장각에 『분무녹훈도감의궤』(규14935) 1책(242장)이 있다. 상권과 하권 가운데 하권에 해당한다. 권의 장수는 어람용과 차이가 있는데 물목(物目)을 기록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책이 의정부와 충훈부 중 어디에 있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 내용적 가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의 전모를 밝혀주는 의궤이다. 이 의궤는 영조가 무신란에 연루된 죄인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내용,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조와 신하들이 나눈 대화와 왕래한 문서, 공신과 원종공신의 명단, 공신을 결정하는 과정의 논의 내용과 회맹제의 절차, 공신에게 교서를 나눠주는 절차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행사를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영조가 주모자인 이인좌를 심문한 내용은 대화체로 기록되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15인의 공신에게 나눠준 15가지 교서의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3) 연구사적 가치 영조가 즉위한 초기에 발생한 무신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죄인을 심문한 추안(推案)과 반란군을 진압한 관군이나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의 기록, 공신에게 나눠준 녹권(錄券), 회맹록(會盟錄) 등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영조의 명령에 따라 중앙 기관에서 편찬한 자료로 무신란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자료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 『분무녹훈도감의궤』는 공신 녹훈과 관련된 의궤나 등록 가운데 가장 나중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있는 『정사진무양공신등록(靖社桭武兩功臣謄錄)』(1623~1626),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1627~1628),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1644~1646)는 모두 인조 대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의궤는 조선시대 공신 녹훈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와 별도로 『분무녹훈도감의궤』가 편찬될 때 작성된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이 남아있으므로, 두 자료를 합하여 연구할 필요도 있다. 이 책의 번역본이 보급되면 관련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작성자: 김문식)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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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무녹훈도감의궤 하(奮武錄勳都監儀軌 下) / 조선 영조 5년(1729)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 『분무녹훈도감의궤』- 상권, 하권 『분무녹훈도감의궤』는 1728년(영조4) 3월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함)을 진압하고 공신을 책봉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책 제목의 ‘분무(奮武)’는 공신들의 훈호(勳號)인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决幾効力奮武功臣)’에서 나왔다. 1. 저술 배경 이 책은 무신란을 진압하고 공신을 녹훈하는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무신란은 1728년 3월 14일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는 반군은 청주를 장악한 후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3월 24일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안성과 죽산에서 격파되었다. 영남과 호남에서도 호응이 있었다. 영남에서는 3월 20일에 정희량(鄭希亮)이 안음에서 일어나 거창, 합천, 함양 등지를 장악하였지만, 경상감사 황선(黃璿)이 관군을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호남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무장에 유배중인 박필몽(朴弼夢)과 내통하였으나 전라감사와 연결에 실패하여 난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4월 19일에 영조는 숭례문(崇禮門) 누각에 나가 오명항이 바치는 난적 세 사람의 수급(首級)을 받았고, 4월 22일에는 종묘와 사직에 반란을 평정하였음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이후로 공신 녹훈이 이루어져 7월 18일에 영조는 공신들과 함께 신무문(神武門) 밖에 설치한 단에서 회맹제(會盟祭)를 지냈고, 다음날 공신들에게 교서(敎書)를 나눠주었다. 이 의궤는 1729년 5월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1730년 3월경에는 편찬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1730년(영조6) 8월 3일에 조석명(趙錫命)이 영조에게 『분무녹훈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 3건의 선사(繕寫)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의궤는 의궤도감(儀軌都監)에서 편찬하였으며, 어람용 1건과 의정부(議政府)와 충훈부(忠勳府)에 분상할 2건을 합하여 총 3건을 제작했다. 2. 서지 사항 『분무녹훈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는 상권과 하권 2책이며, 상권은 257장, 하권은 259장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할 때 상권에 ‘CORÉEN 2440’, 하권에 ‘CORÉEN 2439’라는 도서번호를 부여하였다. 원래의 표지는 연꽃 문양이 있는 초록색 비단[草綠大段]이었지만 현재는 갈색 비단으로 개장(改粧)되었다. 표지의 제첨(題簽)은 흰색 비단[白綾]에 “奮武錄勳都監儀軌 上ㆍ下”라 기록하고, 내제(內題)는 “옹정육년무신삼월일 분무녹훈도감의궤(雍正六年戊申三月日 奮武錄勳都監儀軌)”이다. 책을 묶을 때 놋쇠 물림에 원환(圓環), 5개의 박을정(朴乙丁), 국화동(菊花童)을 사용하였고, 본문은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기록하여 어람용 의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한 본문에 오자(誤字)가 있으면 해당 부분을 도려내고 종이를 덧대어 깨끗하게 정사(正寫)했다. 책의 크기는 48.0×36.0cm이다. 3. 체제와 내용 (1) 체제 책의 권수(卷首)에 수록된 목차를 보면 상권(上卷)은 추안질(推案秩), 장계질(狀啓秩), 비망기질(備忘記秩), 연설질(筵說秩)이 있다. 이중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추안질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하권(下卷)은 계사질(啓辭秩), 어제 수서질(御製手書秩), 노포(露布), 축문질(祝文秩), 교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인등서(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의정부 통고중외문(議政府通告中外文), 교분무공신원종록권두사서(敎奮武功臣原從錄券頭辭書), 회맹제 제문(會盟祭祭文), 회맹후 반축서(會盟後頒軸書), 교제공신등서(敎諸功臣等書), 사전문(謝箋文), 토역주문(討逆奏文), 소차질(疏箚秩), 품목질(稟目秩), 감결질(甘結秩), 이문질(移文秩), 내관질(來關秩), 의주질(儀註秩), 일방의궤(一房儀軌), 이방의궤(二房儀軌), 삼방의궤(三房儀軌),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 의궤도감등록(儀軌都監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내용 * 추안질(推案秩) 1728년(영조4) 3월 12일부터 1729년 3월 29일까지 영조가 반란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한 내용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중죄인은 이인좌처럼 능지처참되어 서울 거리에 목을 걸어두었다가 소금에 절인 후 전국을 순회하며 보이게 했고, 가산(家産)을 빼앗고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심문이 계속되는 동안 수차례 형벌을 받다가 사망한 사람도 많았고, 죄가 가벼운 경우에는 원지(遠地)로 유배를 갔다. * 장계질(狀啓秩)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비롯하여 진압에 나선 관리들이 영조에게 보고한 장계(狀啓)와 이에 대한 국왕의 답변을 정리하였다. * 비망기질(備忘記秩) 영조가 내린 비망기를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 연설질(筵說秩) 영조가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 계사질(啓辭秩) 공신 녹훈을 담당한 실무 관청에서 영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 어제수서질(御製手書秩) 영조가 신하들에게 내린 수서(手書)이다. * 노포(露布) 1728년 4월 19일, 사로도순부사 오명항이 역적을 물리친 후 발표한 노포(露布)의 전문(全文)이다. 지제교(知製敎) 정우량(鄭羽良)이 작성했다. * 축문질(祝文秩) 1728년 4월 22일, 반란을 평정한 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사직(社稷)에 고유제를 올릴 때의 축문(祝文)이다. * 교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인등서(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1728년 4월 22일, 영조가 서울과 지방의 대소 신료(臣僚), 기로(耆老), 군민(軍民), 한량인(閑良人)들에게 내린 교서이다. * 의정부 통고중외문(議政府通告中外文) 1728년 6월 1일, 의정부에서 서울과 지방에 통고한 글이다. 대사간 송인명(宋寅明)과 교리 신치운(申致雲)이 지었고, 영의정 이광좌와 대제학 윤순이 첨삭하였다. * 교분무공신원종록권두사서(敎奮武功臣原從錄券頭辭書) 1728년 7월 15일,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녹권(錄券)의 머리말[頭辭]로 쓴 교서이다. 지제교 오광운(吳光運)이 작성했다. * 회맹제 제문(會盟祭祭文) 1728년 7월 18일, 회맹제에 사용한 제문(祭文)이다. 제문은 반란 사건의 발생과 진압 과정을 소개한 후 공신들에게 은혜와 예우가 흡족하고 마음과 뜻이 부합하니, 국왕과 공신들이 함께 국사를 논의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 회맹후 반축서(會盟後頒軸書) 1728년 7월 19일, 회맹제를 올린 후 공신들에게 교서를 나눠준다는 교서이다. 예문관 제학 서명균(徐命均)이 작성했다. 국난(國難)이 평정되었지만 아직 걱정되는 일이 많으니 총애와 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고락(苦樂)을 함께하는 의리에 힘쓰라는 내용이다. * 교제공신등서(敎諸功臣等書) 영조가 분무공신으로 녹훈된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이다. 교서를 받은 공신과 이를 작성한 지제교(知製敎), 교서를 필사한 서사관(書寫官)의 명단을 보면 15인의 공신에게 각각 다른 내용의 교서가 내려졌다. * 사전문(謝箋文) 1728년 7월 20일, 15인의 공신이 영조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올린 전문(箋文)이다. * 토역주문(討逆奏文) 1728년 8월 10일, 영조가 청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흉적을 토죄(討罪)하였음을 알리는 주문(奏文)이다. * 소차질(疏箚秩) 신하들이 영조에게 올린 소차(疏箚)와 이에 대한 영조의 답(答)을 정리하였다. 대부분 분무공신의 녹훈을 사양하고 영조가 이를 달래는 내용이다. * 품목질(稟目秩) 녹훈도감 소속의 하급 관리가 올린 품목(稟目)을 정리한 것으로, 도감의 당상(堂上)이 처리했다. * 감결질(甘結秩) 녹훈도감에서 타 기관으로 보낸 감결(甘結)이다. 1728년 5월부터 1729년 6월까지 작성되었으며, 필요한 물품이나 인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 이문질(移文秩) 녹훈도감에서 타 기관으로 보낸 이문(移文)이다. 1728년 4월부터 1729년 3월까지 작성되었으며, 공신 녹훈의 전례를 파악하고 행사를 집행하기 위한 실무적 내용이 많다. * 내관질(來關秩) 타 기관에서 녹훈도감으로 보내온 관문(關文)이다. 1728년 4월부터 1729년 5월까지 접수되었으며, 녹훈도감에서 보낸 문서에 답하거나 행사와 관련하여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다. * 의주질(儀註秩) 1728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거행된 네 가지 행사의 의주(儀註)이다. 7월 18일의 회맹제의(會盟祭儀)는 전하(영조)와 공신, 제관들이 회맹제를 올리는 의례이다. 7월 19일의 교서반포의(敎書頒布儀)와 공신음복의(功臣飮福儀)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교서반포의는 영조가 교서를 반포하는 의례이다. 공신음복의는 공신들이 교서와 사물을 받은 후 회맹제를 지낸 제관(祭官)들과 함께 전하가 내린 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7월 20일의 진사전의(進謝箋儀)는 전하에게 감사 전문을 올리는 의례이다. * 일방의궤(一房儀軌) 먼저 의궤도감의 좌목(座目)이 나온다. 당상(堂上)은 해은부원군 오명항과 풍능군 조문명이고, 도청(都廳)은 홍문관 부응교 성덕윤(成德潤)이다. 일방의궤는 직조색(織造色)과 교서색(敎書色)을 담당하였다. 1728년 5월 7일부터 8월 23일까지 기록이며, 일방에서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교서와 회맹축, 화상(畵像)을 제작할 때 사용할 생초(生綃)는 장인을 일방에 소속시켜 직조하였고, 교서의 초안을 쓰고 영조가 내린 어필 현판을 제작하였다. * 이방의궤(二房儀軌) 이방의궤는 화상색(畵像色)을 담당하였다. 분무공신 15인의 화상을 제작할 때 생초(生綃), 남대단(藍大段), 백릉(白綾), 모변지(毛邊紙), 저주지(楮注紙), 백지(白紙), 당주홍(唐朱紅), 동황(同黃), 삼록(三碌) 등이 필요했다. * 삼방의궤(三房儀軌) 삼방의궤는 인출색(印出色)을 담당하였다. 대전(영조)과 세자궁에 진상하는 회맹록(會盟錄) 2건(件), 반사(頒賜)하는 회맹록 492건, 원종녹권(原從錄券) 8,778건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물품 내역이 나타난다. *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 진상하는 회맹축을 담을 궤자(樻子) 1부(部), 진상하는 회맹녹권을 담을 흑칠책갑(黑漆冊匣) 2부, 교서궤(敎書樻) 15부, 교서축(敎書軸) 15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물품 내역이 있다. * 의궤도감등록(儀軌都監謄錄) 1729년 5월에 녹훈의궤(錄勳儀軌)를 편찬하는데 필요한 물품, 7월에는 충훈부의 기공각(紀功閣)에 봉안할 어휘훈안(御諱勳案) 1건, 신공신현판(新功臣懸板) 1부(部)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12월에는 어람(御覽) 1건에 필요한 초주지(初注紙)와 의정부, 충훈부에 보낼 2건에 필요한 저주지(楮注紙)를, 1730년 3월에는 어람등록(御覽謄錄) 2책과 각처에 보관한 등록(謄錄) 4책에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마지막 장에는 의궤도감의 당상, 도청, 낭청의 명단과 수결(手決)이 있다. 4. 자료의 가치 (1) 서지적 가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어람용 1건이 제작되어 외규장각으로 이동하였고, 분상용 2건은 의정부와 충훈부에 배포되었다. 이 책은 어람용으로 제작되어 외규장각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어람용 유일본이며, 완질이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이와 별도로 규장각에 『분무녹훈도감의궤』(규14935) 1책(242장)이 있다. 상권과 하권 가운데 하권에 해당한다. 권의 장수는 어람용과 차이가 있는데 물목(物目)을 기록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책이 의정부와 충훈부 중 어디에 있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 내용적 가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의 전모를 밝혀주는 의궤이다. 이 의궤는 영조가 무신란에 연루된 죄인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내용,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조와 신하들이 나눈 대화와 왕래한 문서, 공신과 원종공신의 명단, 공신을 결정하는 과정의 논의 내용과 회맹제의 절차, 공신에게 교서를 나눠주는 절차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행사를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영조가 주모자인 이인좌를 심문한 내용은 대화체로 기록되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15인의 공신에게 나눠준 15가지 교서의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3) 연구사적 가치 영조가 즉위한 초기에 발생한 무신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죄인을 심문한 추안(推案)과 반란군을 진압한 관군이나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의 기록, 공신에게 나눠준 녹권(錄券), 회맹록(會盟錄) 등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무녹훈도감의궤』는 영조의 명령에 따라 중앙 기관에서 편찬한 자료로 무신란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자료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 『분무녹훈도감의궤』는 공신 녹훈과 관련된 의궤나 등록 가운데 가장 나중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있는 『정사진무양공신등록(靖社桭武兩功臣謄錄)』(1623~1626),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1627~1628),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1644~1646)는 모두 인조 대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의궤는 조선시대 공신 녹훈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와 별도로 『분무녹훈도감의궤』가 편찬될 때 작성된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이 남아있으므로, 두 자료를 합하여 연구할 필요도 있다. 이 책의 번역본이 보급되면 관련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작성자: 김문식)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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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상(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上) / 조선 영조 28년(1752)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1. 의소세손은 누구인가? 1752년(영조 28) 3월부터 5월까지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소를 양주(楊州) 안현(鞍峴)에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조선의 왕세손이자 추존 왕세자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장조(莊祖, 사도세자:1735~1762)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정(琔)이고, 초명은 창흥(昌興)이었다. 의소(懿昭)는 시호이다. 정조의 동복형이자 은언군ㆍ은신군ㆍ은전군의 이복형이다. 사후 고종 때에 세자와 태자로 추존되었다. 1750년 8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출생하였는데, ‘날 때부터 석대(碩大)하였고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인 1752년 3월 4일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사망하였다. 1751년 5월 13일에 세손으로 봉하여 오장복(五章服)을 입히고 숭문당(崇文堂)에서 품에 안고 예를 행하였다. 책봉할 때에 이름을 정(琔)이라 하고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기거하였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52년 4월 12일 세손의 빈궁(殯宮)에 ‘의소’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사실 처음 의소세손을 낳았을 때 영조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영조가 총애하던 화평옹주가 해산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평옹주를 꿈에 본 후 영조는 옹주의 환생으로 생각하고 세손을 각별히 대하였다. 의소세손은 짧은 생애 만큼이나 그에 관한 기록도 소략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묘소 조성에 사용된 의식이 『상례보편』에 의거했음이 나타난다. 『상례보편』은 『국조상례보편』을 말하는 것으로, 상례(喪禮) 가운데 하교하여 줄여 없애거나 이정(釐正)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상례수교(喪禮受敎)』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라 한 것이다. 영조대에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후 상례에 관한 의례는 『국조오례의』 규정보다 우선하여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의궤의 기록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에는 물론이고,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 때에 『국조상례보편』의 원칙은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에 준거의 틀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영조실록』은 봉묘의 규격과 후면에 쓴 어제문(御製文)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영조가 의물의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이라고 한 부분은, 세손의 묘소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왕실의 무덤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이 최고의 격을 갖추었고, 능 다음으로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한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園)이 있었다. 세자나 세손의 무덤은 일반 사대부의 무덤처럼 묘(墓)로 칭하였다. 2. 의궤의 구성과 주요 내용 본 의궤는 의소세손의 장례 후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1752년 3월 4일 세손이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자, 빈궁(殯宮)ㆍ예장(禮葬)ㆍ묘소(墓所) 세 도감(都監)이 설치되었다. 왕의 장례식에 빈전(殯殿)ㆍ국장(國葬)ㆍ산릉(山陵) 도감이 설치되는데 비하여, 세손의 장례였기 때문에 빈궁, 예장, 묘소의 세 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이 가운데 묘소도감에서는 의소세손이 묻힐 묘소와 의례를 행할 건축물을 영건하는 일을 주로 추진하였는데 이 공역(工役)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본 의궤이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세자나 세손빈의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소현세자묘소도감의궤(昭顯世子墓所都監儀軌)』,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소도감의궤』, 『효명세자(孝明世子) 묘소도감의궤』 등이 소장되어 있다. 왕세손의 묘소를 조성한 경우는 흔치 않는 사례로서 본 의궤가 유일하다. 조선후기 묘소도감의궤는 대체로 4건 내지 5건 정도가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작 기간의 경우 일정한 기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나 대체로 2개월 내지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 의궤의 편찬은 묘소도감에서 담당했고, 의궤는 행사가 완료된 후에 상하 2책으로 편찬되었다. 상책은 좌목(座目)ㆍ계사(啓辭)ㆍ이문(移文)ㆍ내관(來關)ㆍ감결(甘結)이 수록되어 있고, 하책은 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ㆍ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과는 달리 상책에 감결에 이어 의궤ㆍ서계ㆍ논상이 수록되었고, 하책은 번와소까지 기록되어 있다. 목록과 본문의 내용의 다른 것은 의궤의 제작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양상인데, 의궤가 문서철의 성격인 만큼 목록의 순서대로 문서를 정리하다가 여의치 않은 경우 문서의 순서를 조정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책의 160장 이후에는 일부 접혀진 자국이 있는 것도 눈에 뛴다. 제1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으며, ‘COREEN 2512’라는 도서 번호가 붙어있다. 표지에 ‘懿昭世孫墓所儀軌上(懿昭墓 壬申)’이라는 첨지도 붙어있다. 표지에 이어서 본 의궤의 상권 가장 앞부분에는 옹가전면도(甕家前面圖)와 옹가후면도(甕家後面圖)가 나온다. ‘옹가(甕家)’는 국가의 장례가 있을 때 비와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관이 들어갈 구덩이 위쪽에 임시로 세우는 뜸집이나 장막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옹가의 그림과 함께 기둥ㆍ도리(道里)ㆍ춘연(春椽)의 개수와 길이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옹가전면도와 옹가후면도에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는데, 이것은 파리국립도서관이 절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에는 책의 목차에 해당하는 ‘의소세손 묘소도감의궤 목록(目錄)’이 나온다. 목록은 좌목(座目), 계사(啓辭),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각소(各所)-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 부(附)-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하단에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다. 목록에 이어서 첫 부분은 ‘乾隆 十七年 壬申 三月 日 墓所都監儀軌’로 시작된다. 이 부분에는 의소세손의 훙서(薨逝) 일시 및 묘소도감의 담당 인물들 명단이 실려 있다. 계사질(啓辭秩)은 의소세손이 훙서한 3월 4일부터 묘소에 장사지내고 마무리 작업을 한 5월 15일까지 묘소도감에서 왕에게 올린 문건 및 여타 기관에서 관련 사안을 올린 문건과 재가를 받은 내용을 날짜순으로 모은 것이다.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 분장에 관한 것, 필요한 자재 조달 및 공역의 진행에 관한 보고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문질(移文秩)은 묘소 조성의 공역(工役)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묘소도감에서 동급 기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보낸 공문서들을 시간 순서대로 모아 놓은 것이다. 수신처는 강원감영ㆍ황해감영ㆍ경기감영 등 각도의 감영 및 지방관 그리고 공역과 관련되어 인력과 물품 등을 관할하는 훈련도감ㆍ호조ㆍ선혜청ㆍ한성부ㆍ진휼청 등의 중앙의 관서들이다. 주요 내용은 묘소 조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인 석물ㆍ재목ㆍ철물 등의 공급을 비롯하여, 각도에 배당한 석수ㆍ목수ㆍ역부 등 묘소 조성에 필요한 인력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내관질(來關秩)에는 장흥고(長興庫)ㆍ와서(瓦署)ㆍ선공감(船工監)ㆍ호조(戶曹)ㆍ강원 감사ㆍ황해 감사 등에서 보낸 첩정(牒呈)이 실려 있다. 담당자를 분차(分差)한 일과 묘소 조성에 필요한 소요 물품 및 각종 물품의 조달 상황, 장인(匠人)과 모군(募軍)들의 요포 지급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각 첩정(牒呈)의 말미에는 ‘접수함’ 등 접수의 여부를 표시해 두었다. 감결질(甘結秩)은 묘소도감에서 하급 관청에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내린 공문을 모은 것으로, 필요한 물자와 인원 조달에 관한 내용 및 각종 의식의 시행 날짜 및 준비 상황 등이 주로 기재되어 있다. 각각의 문서 말미에는 어느 관청에 보낸 문서인지 명시되어 있다. 이어서 목록과는 달리 부(附) 의궤(儀軌), 서계(書啓), 논상(論賞)에 해당하는 내용이 상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맨 앞의 목록에는 부 의궤와 서계, 논상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들이 모두 상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의궤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 의궤에 해당하는 사항은 ‘임신년 5월 10일 의궤’라고 한 후에 ‘빈궁ㆍ혼궁ㆍ예장ㆍ묘소도감의 의궤사목(儀軌事目)에 대한 별단(別單)’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사목은 의궤의 제작과 관련된 사항으로, 세 도감의 처소는 전의감(典醫監)으로 한다는 것, 세 도감에서 각 5건씩 작성하는데, 1건은 어람용이고 나머지 4건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강화부 등에 나누어 보관한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분상처로 어람용을 비롯하여 총 5곳이 나타나 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의궤는 어람용 1건 뿐이다. 특히 의소세손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상, 하 2 책의 경우도 실제적으로 어람용 1건만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의소세손의 장례와 관련된 연구에 있어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외규장각 의궤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어 서계(書啓)에 해당하는 내용으로는 ‘세 도감의 도제조 이하의 명단을 서계하라’는 기록에 나타난다. 5월 15일 묘소도감에서는 별단(別單)’을 올렸다. 별단에는 도제조로부터 도청, 낭청, 상지관 등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근무일수를 기록하였고, 장인들은 소속 부서별로 그 명단을 기록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3월 4일에 계하(啓下)를 받아 5월 15일까지 근무한 것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제작과 관련하여서는 8월 20일의 기록이 주목된다. 즉 의궤를 장황(粧䌙)해 보니 한 책으로 만들면 열람하기에 불편하여 두 책으로 나누어 만들겠다고 아뢰고 이를 허락한 내용이 나온다. 본 의궤가 2책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빈궁도감과 혼궁도감의 의궤는 근년의 규례대로 한질로 만든다.’고 하였는데, 현존하는 『의소세손빈궁혼궁도감의궤(懿昭世孫殯宮魂宮都監儀軌)』가 빈궁과 혼궁이 합쳐진 제목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 규례가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의궤의 상책에서 눈여겨 볼 내용은 영조가 세손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을 하는데 있어서, 체모는 갖추되 차등 있게 진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때, 그 제도는 효장세자를 장사지냈을 때의 예로써 하려고 했다. 영조가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각별히 절약할 것을 강조했던 점도 주목된다. 한편, 의소세손의 묘소를 조성하는 작업에서 목재의 조달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으며, 이를 위해 묘소도감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서 주의를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책은 공역을 담당한 각소(各所)에 대한 기록으로, 내용은 각소(各所) 별로 정리하여 실려 있다. 석회(石灰)ㆍ세사(細沙)ㆍ황토(黃土) 세 가지를 섞어서 묘소의 광(壙)과 봉분을 만드는 역소인 삼물소(三物所), 묘소 일원에 정자각(假丁字閣)ㆍ옹가(瓮家)ㆍ비각ㆍ홍살문 등 각종 목조 건물의 축조를 담당하는 조성소(造成所), 묘에 배설하는 석물을 만드는 대부석소(大浮石所), 공역에 필요한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爐冶所), 묘역의 이지러진 지형에 흙을 보강하고 사초(莎草)를 입히는 보토소(補土所), 건축물 및 향어로(香御路)에 쓰이는 석물을 만드는 소부석소(小浮石所), 돌을 나르는 수석소(輸石所), 이외의 필요한 물품을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별공작(別工作), 재궁(齋宮) 및 찬궁(欑宮) 그리고 각종 건물에 들어가는 도배(塗褙) 및 바닥에 까는 포진(鋪陳)을 마련하는 분장흥고(分長興庫), 기와와 벽돌을 구워 제공하는 번와소(燔瓦所)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묘소도감의궤의 각소의궤(各所儀軌)에는 광(壙)의 조성, 정자각과 옹가 등의 축조, 각종 철물의 제작, 묘소 주변의 대석물(大石物)의 조성, 묘소 주변의 흙을 돋우는 작업, 묘소 주변 부속 건물의 석물 제작, 석물의 운반, 도청 이하 각소에 지급하는 비품의 제작, 돗자리와 유둔(油芚) 등의 관리, 기와 벽돌의 제작 등 작업에 관한 기록이 기본적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각종 건축물에 소용된 재료와 작업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實名)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마지막 부분에는 도감의 핵심 인물의 수결이 적혀 있다. 도제조 행판중추부사 김(金:김약로)의 수결을 비롯하여, 제조 한성판윤 박(朴:박문수)의 수결, 도청 공조판서 원(元:원경하)과 부사과 홍(洪:홍낙성)의 수결, 낭청 통례원 인의 임(任:임과)의 수결이 표시되어 있어서 당대에 이들이 사용한 서명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는 조선왕실에서 흔치 않는 세손의 묘소 조성에 관한 의궤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왕실 문화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특히 왕릉의 조성에 비해 격을 낮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왕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와 비교 연구를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작성자: 신병주)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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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하(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下) / 조선 영조 28년(1752)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1. 의소세손은 누구인가? 1752년(영조 28) 3월부터 5월까지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소를 양주(楊州) 안현(鞍峴)에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조선의 왕세손이자 추존 왕세자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장조(莊祖, 사도세자:1735~1762)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정(琔)이고, 초명은 창흥(昌興)이었다. 의소(懿昭)는 시호이다. 정조의 동복형이자 은언군ㆍ은신군ㆍ은전군의 이복형이다. 사후 고종 때에 세자와 태자로 추존되었다. 1750년 8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출생하였는데, ‘날 때부터 석대(碩大)하였고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인 1752년 3월 4일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사망하였다. 1751년 5월 13일에 세손으로 봉하여 오장복(五章服)을 입히고 숭문당(崇文堂)에서 품에 안고 예를 행하였다. 책봉할 때에 이름을 정(琔)이라 하고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기거하였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52년 4월 12일 세손의 빈궁(殯宮)에 ‘의소’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사실 처음 의소세손을 낳았을 때 영조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영조가 총애하던 화평옹주가 해산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평옹주를 꿈에 본 후 영조는 옹주의 환생으로 생각하고 세손을 각별히 대하였다. 의소세손은 짧은 생애 만큼이나 그에 관한 기록도 소략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묘소 조성에 사용된 의식이 『상례보편』에 의거했음이 나타난다. 『상례보편』은 『국조상례보편』을 말하는 것으로, 상례(喪禮) 가운데 하교하여 줄여 없애거나 이정(釐正)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상례수교(喪禮受敎)』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라 한 것이다. 영조대에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후 상례에 관한 의례는 『국조오례의』 규정보다 우선하여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의궤의 기록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에는 물론이고,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 때에 『국조상례보편』의 원칙은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에 준거의 틀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영조실록』은 봉묘의 규격과 후면에 쓴 어제문(御製文)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영조가 의물의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이라고 한 부분은, 세손의 묘소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왕실의 무덤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이 최고의 격을 갖추었고, 능 다음으로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한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園)이 있었다. 세자나 세손의 무덤은 일반 사대부의 무덤처럼 묘(墓)로 칭하였다. 2. 의궤의 구성과 주요 내용 본 의궤는 의소세손의 장례 후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1752년 3월 4일 세손이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자, 빈궁(殯宮)ㆍ예장(禮葬)ㆍ묘소(墓所) 세 도감(都監)이 설치되었다. 왕의 장례식에 빈전(殯殿)ㆍ국장(國葬)ㆍ산릉(山陵) 도감이 설치되는데 비하여, 세손의 장례였기 때문에 빈궁, 예장, 묘소의 세 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이 가운데 묘소도감에서는 의소세손이 묻힐 묘소와 의례를 행할 건축물을 영건하는 일을 주로 추진하였는데 이 공역(工役)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본 의궤이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세자나 세손빈의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소현세자묘소도감의궤(昭顯世子墓所都監儀軌)』,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소도감의궤』, 『효명세자(孝明世子) 묘소도감의궤』 등이 소장되어 있다. 왕세손의 묘소를 조성한 경우는 흔치 않는 사례로서 본 의궤가 유일하다. 조선후기 묘소도감의궤는 대체로 4건 내지 5건 정도가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작 기간의 경우 일정한 기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나 대체로 2개월 내지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 의궤의 편찬은 묘소도감에서 담당했고, 의궤는 행사가 완료된 후에 상하 2책으로 편찬되었다. 상책은 좌목(座目)ㆍ계사(啓辭)ㆍ이문(移文)ㆍ내관(來關)ㆍ감결(甘結)이 수록되어 있고, 하책은 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ㆍ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과는 달리 상책에 감결에 이어 의궤ㆍ서계ㆍ논상이 수록되었고, 하책은 번와소까지 기록되어 있다. 목록과 본문의 내용의 다른 것은 의궤의 제작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양상인데, 의궤가 문서철의 성격인 만큼 목록의 순서대로 문서를 정리하다가 여의치 않은 경우 문서의 순서를 조정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책의 160장 이후에는 일부 접혀진 자국이 있는 것도 눈에 뛴다. 제1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으며, ‘COREEN 2512’라는 도서 번호가 붙어있다. 표지에 ‘懿昭世孫墓所儀軌上(懿昭墓 壬申)’이라는 첨지도 붙어있다. 표지에 이어서 본 의궤의 상권 가장 앞부분에는 옹가전면도(甕家前面圖)와 옹가후면도(甕家後面圖)가 나온다. ‘옹가(甕家)’는 국가의 장례가 있을 때 비와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관이 들어갈 구덩이 위쪽에 임시로 세우는 뜸집이나 장막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옹가의 그림과 함께 기둥ㆍ도리(道里)ㆍ춘연(春椽)의 개수와 길이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옹가전면도와 옹가후면도에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는데, 이것은 파리국립도서관이 절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에는 책의 목차에 해당하는 ‘의소세손 묘소도감의궤 목록(目錄)’이 나온다. 목록은 좌목(座目), 계사(啓辭),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각소(各所)-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 부(附)-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하단에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다. 목록에 이어서 첫 부분은 ‘乾隆 十七年 壬申 三月 日 墓所都監儀軌’로 시작된다. 이 부분에는 의소세손의 훙서(薨逝) 일시 및 묘소도감의 담당 인물들 명단이 실려 있다. 계사질(啓辭秩)은 의소세손이 훙서한 3월 4일부터 묘소에 장사지내고 마무리 작업을 한 5월 15일까지 묘소도감에서 왕에게 올린 문건 및 여타 기관에서 관련 사안을 올린 문건과 재가를 받은 내용을 날짜순으로 모은 것이다.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 분장에 관한 것, 필요한 자재 조달 및 공역의 진행에 관한 보고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문질(移文秩)은 묘소 조성의 공역(工役)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묘소도감에서 동급 기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보낸 공문서들을 시간 순서대로 모아 놓은 것이다. 수신처는 강원감영ㆍ황해감영ㆍ경기감영 등 각도의 감영 및 지방관 그리고 공역과 관련되어 인력과 물품 등을 관할하는 훈련도감ㆍ호조ㆍ선혜청ㆍ한성부ㆍ진휼청 등의 중앙의 관서들이다. 주요 내용은 묘소 조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인 석물ㆍ재목ㆍ철물 등의 공급을 비롯하여, 각도에 배당한 석수ㆍ목수ㆍ역부 등 묘소 조성에 필요한 인력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내관질(來關秩)에는 장흥고(長興庫)ㆍ와서(瓦署)ㆍ선공감(船工監)ㆍ호조(戶曹)ㆍ강원 감사ㆍ황해 감사 등에서 보낸 첩정(牒呈)이 실려 있다. 담당자를 분차(分差)한 일과 묘소 조성에 필요한 소요 물품 및 각종 물품의 조달 상황, 장인(匠人)과 모군(募軍)들의 요포 지급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각 첩정(牒呈)의 말미에는 ‘접수함’ 등 접수의 여부를 표시해 두었다. 감결질(甘結秩)은 묘소도감에서 하급 관청에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내린 공문을 모은 것으로, 필요한 물자와 인원 조달에 관한 내용 및 각종 의식의 시행 날짜 및 준비 상황 등이 주로 기재되어 있다. 각각의 문서 말미에는 어느 관청에 보낸 문서인지 명시되어 있다. 이어서 목록과는 달리 부(附) 의궤(儀軌), 서계(書啓), 논상(論賞)에 해당하는 내용이 상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맨 앞의 목록에는 부 의궤와 서계, 논상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들이 모두 상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의궤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 의궤에 해당하는 사항은 ‘임신년 5월 10일 의궤’라고 한 후에 ‘빈궁ㆍ혼궁ㆍ예장ㆍ묘소도감의 의궤사목(儀軌事目)에 대한 별단(別單)’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사목은 의궤의 제작과 관련된 사항으로, 세 도감의 처소는 전의감(典醫監)으로 한다는 것, 세 도감에서 각 5건씩 작성하는데, 1건은 어람용이고 나머지 4건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강화부 등에 나누어 보관한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분상처로 어람용을 비롯하여 총 5곳이 나타나 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의궤는 어람용 1건 뿐이다. 특히 의소세손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상, 하 2 책의 경우도 실제적으로 어람용 1건만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의소세손의 장례와 관련된 연구에 있어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외규장각 의궤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어 서계(書啓)에 해당하는 내용으로는 ‘세 도감의 도제조 이하의 명단을 서계하라’는 기록에 나타난다. 5월 15일 묘소도감에서는 별단(別單)’을 올렸다. 별단에는 도제조로부터 도청, 낭청, 상지관 등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근무일수를 기록하였고, 장인들은 소속 부서별로 그 명단을 기록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3월 4일에 계하(啓下)를 받아 5월 15일까지 근무한 것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제작과 관련하여서는 8월 20일의 기록이 주목된다. 즉 의궤를 장황(粧䌙)해 보니 한 책으로 만들면 열람하기에 불편하여 두 책으로 나누어 만들겠다고 아뢰고 이를 허락한 내용이 나온다. 본 의궤가 2책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빈궁도감과 혼궁도감의 의궤는 근년의 규례대로 한질로 만든다.’고 하였는데, 현존하는 『의소세손빈궁혼궁도감의궤(懿昭世孫殯宮魂宮都監儀軌)』가 빈궁과 혼궁이 합쳐진 제목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 규례가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의궤의 상책에서 눈여겨 볼 내용은 영조가 세손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을 하는데 있어서, 체모는 갖추되 차등 있게 진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때, 그 제도는 효장세자를 장사지냈을 때의 예로써 하려고 했다. 영조가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각별히 절약할 것을 강조했던 점도 주목된다. 한편, 의소세손의 묘소를 조성하는 작업에서 목재의 조달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으며, 이를 위해 묘소도감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서 주의를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책은 공역을 담당한 각소(各所)에 대한 기록으로, 내용은 각소(各所) 별로 정리하여 실려 있다. 석회(石灰)ㆍ세사(細沙)ㆍ황토(黃土) 세 가지를 섞어서 묘소의 광(壙)과 봉분을 만드는 역소인 삼물소(三物所), 묘소 일원에 정자각(假丁字閣)ㆍ옹가(瓮家)ㆍ비각ㆍ홍살문 등 각종 목조 건물의 축조를 담당하는 조성소(造成所), 묘에 배설하는 석물을 만드는 대부석소(大浮石所), 공역에 필요한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爐冶所), 묘역의 이지러진 지형에 흙을 보강하고 사초(莎草)를 입히는 보토소(補土所), 건축물 및 향어로(香御路)에 쓰이는 석물을 만드는 소부석소(小浮石所), 돌을 나르는 수석소(輸石所), 이외의 필요한 물품을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별공작(別工作), 재궁(齋宮) 및 찬궁(欑宮) 그리고 각종 건물에 들어가는 도배(塗褙) 및 바닥에 까는 포진(鋪陳)을 마련하는 분장흥고(分長興庫), 기와와 벽돌을 구워 제공하는 번와소(燔瓦所)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묘소도감의궤의 각소의궤(各所儀軌)에는 광(壙)의 조성, 정자각과 옹가 등의 축조, 각종 철물의 제작, 묘소 주변의 대석물(大石物)의 조성, 묘소 주변의 흙을 돋우는 작업, 묘소 주변 부속 건물의 석물 제작, 석물의 운반, 도청 이하 각소에 지급하는 비품의 제작, 돗자리와 유둔(油芚) 등의 관리, 기와 벽돌의 제작 등 작업에 관한 기록이 기본적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각종 건축물에 소용된 재료와 작업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實名)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마지막 부분에는 도감의 핵심 인물의 수결이 적혀 있다. 도제조 행판중추부사 김(金:김약로)의 수결을 비롯하여, 제조 한성판윤 박(朴:박문수)의 수결, 도청 공조판서 원(元:원경하)과 부사과 홍(洪:홍낙성)의 수결, 낭청 통례원 인의 임(任:임과)의 수결이 표시되어 있어서 당대에 이들이 사용한 서명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는 조선왕실에서 흔치 않는 세손의 묘소 조성에 관한 의궤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왕실 문화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특히 왕릉의 조성에 비해 격을 낮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왕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와 비교 연구를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작성자: 신병주)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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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상(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上) / 조선 영조 28년(1752)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 세손의 예장(禮葬)에 대한 법전 및 국가전례서 규정 의소세손(1750~1752)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에게는 친형이 된다. 1750년(영조 26)에 태어났고, 이듬해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 세손의 생전과 사후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는 이는 의소세손이 유일하다. 생전의 기록으로는 그의 ‘세손’ 책봉을 기록한 ?의소세손책례도감의궤(懿昭世孫冊禮都監儀軌)?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사후의 기록은 법전과 국가전례서에 조금 있을 뿐 관찬 자료와 의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752년본 ?국조상례보편? 제4책 마지막에 수록된 「의소세손상수교(懿昭世孫喪受敎)」는 의소세손의 상례 때의 수교를 모아 놓은 것으로 모두 68조를 수록하고 있다. 「의소세손상수교」는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에는 ‘수교 두 편은 의주와 서례가 달라 지금 재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록하지 않았으나, 1788년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실려 있다. 수교 이외에 의소세손 상장과 관련한 기록은 관찬 자료인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의궤에 잘 남아 있다. 의소세손 관련 의궤는 현재 세 기관에 분산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에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와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에는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懿昭世孫殯宮魂宮兩都監儀軌)?와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의소세손궁예장의궤(懿昭世孫宮禮葬儀軌)?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소세손궁예장의궤?는 예장 과정을 소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2. 의소세손의 상장(喪葬) 절차와 의궤의 편찬 1) 의소세손의 상장 절차 전통시대 ‘예(禮)’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등급을 구분 짓는 것으로 국왕과 왕후의 장례를 ‘나라의 장례’라는 뜻으로 ‘국장(國葬)’, 세자나 세자빈은 한 등급 낮추어 ‘예장(禮葬)’이라 일컬었다. 국왕의 상을 ‘대상(大喪)’, 왕후의 상을 ‘내상(內喪)’, 세자의 상을 ‘소상(小喪)’, 세자빈의 상을 ‘소내상(小內喪)’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국장과 예장의 구별은 ‘국장도감의궤/예장도감의궤’ ‘빈전혼전도감의궤/빈궁혼궁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원소도감의궤/묘소도감의궤’ 등 흉례 관련 의궤의 서명(書名)에서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세손의 예장은 세자의 예장 등과 거의 비슷하나 세자와 세손은 엄연히 신분상 등급이 다르므로 의절이 아닌 묘소의 조성 등에서는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3도감의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묘소에 차등을 두라고 이미 하교하였으니, 문석(文石)・망주(望柱)・장명등(長明燈) 외에는 단지 호석(虎石)과 마석(馬石)을 각각 한 쌍씩만 설치하되 종전의 제도에 비하여 모두 4분의 1을 감하고 혼유석(魂遊石)과 표석(表石)도 두 자[尺]를 감하며 정자각(丁字閣)의 길이와 넓이도 4분의 1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2) 의소세손의 흉례 관련 의궤의 편찬 현재 의소세손의 상장과 관련한 의궤는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의소묘영건청의궤?가 전한다. 그 중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와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는 삼년상이 끝난 뒤에 편찬되는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의궤이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은 묘소에 시신을 매안한 뒤 신주[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와 혼궁에 봉안하기까지 ‘예장도감’에서 담당한 일만을 기록하였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도 묘소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혼궁에 봉안하기까지 ‘빈궁혼궁도감’에서 담당한 일만을 기록하였다. 두 의궤는 혼궁에 신주를 봉안한 뒤 ‘예장도감’과 ‘빈궁혼궁도감’은 혁파되었고, 이후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두 의궤의 편찬에 들어갔다. 1752년 5월 10일에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殯宮魂宮禮葬墓所三都監儀軌事目)’을 마련한 데서 알 수 있다. 의소세손의 흉례 관련 의궤는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이라는 항목명에서 알 수 있듯이 빈궁혼궁・예장・묘소 3도감의 의궤를 함께 편찬하였다. 그 중 빈궁과 혼궁 두 도감의 의궤는 합하여 1질로 만들었다. 세 의궤의 편찬을 위한 도감의 처소는 전의감(典醫監)으로 결정되었다. 세 의궤는 각각 5건 제작되었는데 어람용(御覽用) 1건과 의정부・춘추관(春秋館)・예조・강화부(江華府) 등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 각 1건이 제작되었다. 3.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체제와 내용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1752년(영조 28) 3월에서 5월까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의 예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묘소에서 장례를 치른 뒤 혼궁인 창경궁의 강서원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예장도감에서 담당한 일을 기록하였다. 전체 불분권(不分卷)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책은 예장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좌목」인 이조별단, 3월 4일자 세 도감이 회동하여 수계(修啓)한 것으로 도감의 운영 규칙을 적은 「빈궁예장묘소삼도감사목(殯宮禮葬墓所三都監事目)」으로 시작한다. 계사질(啓辭秩)에는 예장과 관련하여 예장도감과 호조판서, 예조 등에서 국왕에게 올린 계사(啓辭)와 이에 대한 국왕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다. 별단질(別單秩)에는 제술관(製述官)과 서사관(書寫官) 및 그 예차(預差: 예비 인원)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고, 예장을 치른 뒤 불에 태울 물목들을 나열해 놓은 ‘소화별단(燒火別單)’이 있다. 다음으로 예장도감에서 다른 관청에 보낸 협조 공문을 모은 ‘이문질(移文秩)’, 경기감사・병조・묘소도감・혼궁도감・금위영・훈련도감・이조・여사청(轝士廳) 등에서 예장도감에 보낸 관문을 모아 놓은 ‘내관질(來關秩)’, 낭청이 도청에 올린 문서인 ‘품목질(稟目秩)’, 예장도감에서 하급관청에 실무 처리를 지시한 ‘감결질(甘結秩)’, 예조에서 예장도감에 보낸 공문을 모아 놓은 ‘예관질(禮關秩)’ 등 각종 공문서를 통해 예장 준비 과정과 관서 간 업무 협조 과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은 각종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를 기록한 ‘의주질(儀註秩)’과 본 의궤의 편찬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정리해 놓은 5월 10일자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殯宮魂宮禮葬墓所三都監儀軌事目)’이 정리되어 있다. 빈궁혼궁도감의궤, 예장도감의궤, 묘소도감의궤가 각각 5건 제작되었고, 그 중 1건은 어람용이고 나머지 4건은 의정부・춘추관・예조・강화부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으로 제작되었다. 이어서 도제조 이하부터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예장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과 그들에 대한 포상 내역을 적은 비망기가 실려 있다. 다음은 일방의궤로 예장에 필요한 각종 가마를 제시하고 있으며 ‘각양물건조작질(各樣物件造作秩)’에는 각종 물건의 조성을 위해 소요 물자의 종류 및 수량, 규격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으며, 그 중에는 기물을 채색으로 그린 것도 있다. 일방에서 필요한 물자의 종류 및 수량, 규격 등과 관련하여 일방의 낭청이 예장도감의 당상에게 여쭙는 공문을 모은 ‘품목질’, ‘이문질’, ‘내관질’, ‘감결질’, 일방의 감조관(監造官)이 예장도감의 당상에게 여쭙는 공문을 모은 ‘수본질(手本秩)’ 등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문건들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다음은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實入秩), 용환질(用還秩), 전배용환질(前排用還秩), 신조급전배용후환하질(新造及前排用後還下秩), 호조전배철물산판질(戶曺前排鐵物筭板秩), 소화물건질(燒火物件秩) 등을 차례로 수록하였다. 이어서 이러한 각종 물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명단을 써 놓은 ‘공장질(工匠秩)’을 실었다. 말미에는 28면에 걸친 채색의 발인반차도를 첨부해 놓았다. 궁궐의 빈궁에서 재실(梓室)을 받들어 내어 묘소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는 발인 행렬을 그린 그림이다. 하책은 이방, 삼방, 분전설사, 분장흥고, 지석소, 우주소, 별공작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방의궤에는 관장하는 업무 내역 및 담당자들의 명단에 이어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문건[품목질, 감결질, 이문질, 내관질]이 있다. 또 공문서를 비롯해 복완질(服玩秩), 길의장질(吉儀仗秩), 흉의장질(凶儀仗秩), 명기질(明器秩), 반우하는 즉일(卽日) 혼궁에 입배(入排)하는 선(扇)・개(盖)・기구(機具)와 발인하기에 앞서 혼궁도감에 이송(移送)하는 물품의 나열 등 이방에서 마련해야 하는 물품 제작을 위해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수량, 규격 등을 자세히 제시해 놓았으며, 그 중에는 기물을 채색으로 그린 것도 있다. 다음은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 용환질, 물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명단을 써 놓은 장인질(匠人秩)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삼방의궤이다. 삼방에서 준비하고 마련하는 물목(物目)부터 소개하고 있다[물목질(物目秩)]. 시죽책(謚竹冊), 시옥인(諡玉印), 애죽책(哀竹冊), 증옥(贈玉), 증백(贈帛), 신주(神主), 혼백함(魂帛函)을 담는 토등방상자(土籐方箱子), 지석(誌石), 표석(表石) 등이다. 이어서 담당자들의 명단을 나열한 뒤, 삼방에서 마련해야 하는 물품 제작을 위해 각 물품마다 소요 물자의 종류와 수량, 규격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품 중에는 채색 그림까지 수록한 것도 있다[각양물종소입마련(各樣物種所入磨鍊)]. 이어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문건[품목질, 이문질, 내관질, 수본질]이 있다. 다음은 예장도감 조직의 한 부서로 전설사의 일을 분장(分掌)하기 위해 임시로 따로 둔 분소인 분전설사(分典設司)의 업무를 적은 분전설사의궤, 분장흥고(分長興庫)의 업무를 적은 분장흥고의궤이다. 수본질, 곳곳에 까는 깔개를 나열한 포진질(鋪陳秩), 초석우비질(草席雨備秩), 유우비질(油雨備秩),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 용환질을 차례로 실었다. 다음은 지석과 관련된 업무를 맡은 지석소의궤, 우주의 조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우주소의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특별히 선공감(繕工監)에 두던 임시 부서인 별공작의궤이다. 본 의궤의 말미에는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등 예장도감 담당자들의 수결이 있다. 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역사적 의의 1) 서지적 가치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책의(冊衣)는 초록 비단이고, 표제는 쓰여 있지 않다. 변철(邊鐵)은 놋쇠, 국화동(菊花童) 5개가 있고, 세 번째 국화동에 원환(圓環)이 있다. 지질(紙質)은 초주지(草注紙)이다. 표지를 넘기면 ‘의소세손예장의궤(懿昭世孫禮葬儀軌) 상(上) 의소묘(懿昭墓) 임신(壬申)’이라고 쓴 첨지가 있다. 판심 사항을 살펴보면, 붉은 인찰선으로 된 사주쌍변(四周雙邊), 행관(行款)은 12행(行) 24자(字), 주(註)는 쌍행(雙行), 판심(版心)과 장차(張次)는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본 의궤인 어람용 1건 뿐으로 대조 및 교감할 의궤가 없다는 점이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1종이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 의궤라는 점에서 본서의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2) 내용적 가치 의소세손의 예장은 할아버지 영조가 국왕으로 재위해 있고,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있는 가운데 치러졌다. ?국조상례보편?에 세손과 관련한 규정을 넣지는 못하였지만 「의소세손상수교」가 부기되어 있다. 법령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수교가 국가전례서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의소세손의 예장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세손과 관련하여 그 상장 과정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로, 관찬자료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및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의소묘영건청의궤? 네 의궤가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의소세손의 예장 과정 전체를 알 수 있다. 그 중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예장도감 조직의 한 부서인 도청의 업무를 적은 도청의궤와 각방・각소의궤, 그리고 28면에 걸친 채색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로 구성되어 조선후기 세손의 예장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해진다. (작성자: 이현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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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하(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下) / 조선 영조 28년(1752) / 1책 / 필사본/필사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 번역 해제 ]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 세손의 예장(禮葬)에 대한 법전 및 국가전례서 규정 의소세손(1750~1752)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에게는 친형이 된다. 1750년(영조 26)에 태어났고, 이듬해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 세손의 생전과 사후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는 이는 의소세손이 유일하다. 생전의 기록으로는 그의 ‘세손’ 책봉을 기록한 ?의소세손책례도감의궤(懿昭世孫冊禮都監儀軌)?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사후의 기록은 법전과 국가전례서에 조금 있을 뿐 관찬 자료와 의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752년본 ?국조상례보편? 제4책 마지막에 수록된 「의소세손상수교(懿昭世孫喪受敎)」는 의소세손의 상례 때의 수교를 모아 놓은 것으로 모두 68조를 수록하고 있다. 「의소세손상수교」는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에는 ‘수교 두 편은 의주와 서례가 달라 지금 재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록하지 않았으나, 1788년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실려 있다. 수교 이외에 의소세손 상장과 관련한 기록은 관찬 자료인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의궤에 잘 남아 있다. 의소세손 관련 의궤는 현재 세 기관에 분산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에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와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에는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懿昭世孫殯宮魂宮兩都監儀軌)?와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의소세손궁예장의궤(懿昭世孫宮禮葬儀軌)?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소세손궁예장의궤?는 예장 과정을 소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2. 의소세손의 상장(喪葬) 절차와 의궤의 편찬 1) 의소세손의 상장 절차 전통시대 ‘예(禮)’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등급을 구분 짓는 것으로 국왕과 왕후의 장례를 ‘나라의 장례’라는 뜻으로 ‘국장(國葬)’, 세자나 세자빈은 한 등급 낮추어 ‘예장(禮葬)’이라 일컬었다. 국왕의 상을 ‘대상(大喪)’, 왕후의 상을 ‘내상(內喪)’, 세자의 상을 ‘소상(小喪)’, 세자빈의 상을 ‘소내상(小內喪)’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국장과 예장의 구별은 ‘국장도감의궤/예장도감의궤’ ‘빈전혼전도감의궤/빈궁혼궁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원소도감의궤/묘소도감의궤’ 등 흉례 관련 의궤의 서명(書名)에서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세손의 예장은 세자의 예장 등과 거의 비슷하나 세자와 세손은 엄연히 신분상 등급이 다르므로 의절이 아닌 묘소의 조성 등에서는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3도감의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묘소에 차등을 두라고 이미 하교하였으니, 문석(文石)・망주(望柱)・장명등(長明燈) 외에는 단지 호석(虎石)과 마석(馬石)을 각각 한 쌍씩만 설치하되 종전의 제도에 비하여 모두 4분의 1을 감하고 혼유석(魂遊石)과 표석(表石)도 두 자[尺]를 감하며 정자각(丁字閣)의 길이와 넓이도 4분의 1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2) 의소세손의 흉례 관련 의궤의 편찬 현재 의소세손의 상장과 관련한 의궤는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의소묘영건청의궤?가 전한다. 그 중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와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는 삼년상이 끝난 뒤에 편찬되는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의궤이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은 묘소에 시신을 매안한 뒤 신주[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와 혼궁에 봉안하기까지 ‘예장도감’에서 담당한 일만을 기록하였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도 묘소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혼궁에 봉안하기까지 ‘빈궁혼궁도감’에서 담당한 일만을 기록하였다. 두 의궤는 혼궁에 신주를 봉안한 뒤 ‘예장도감’과 ‘빈궁혼궁도감’은 혁파되었고, 이후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두 의궤의 편찬에 들어갔다. 1752년 5월 10일에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殯宮魂宮禮葬墓所三都監儀軌事目)’을 마련한 데서 알 수 있다. 의소세손의 흉례 관련 의궤는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이라는 항목명에서 알 수 있듯이 빈궁혼궁・예장・묘소 3도감의 의궤를 함께 편찬하였다. 그 중 빈궁과 혼궁 두 도감의 의궤는 합하여 1질로 만들었다. 세 의궤의 편찬을 위한 도감의 처소는 전의감(典醫監)으로 결정되었다. 세 의궤는 각각 5건 제작되었는데 어람용(御覽用) 1건과 의정부・춘추관(春秋館)・예조・강화부(江華府) 등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 각 1건이 제작되었다. 3.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체제와 내용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1752년(영조 28) 3월에서 5월까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의 예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묘소에서 장례를 치른 뒤 혼궁인 창경궁의 강서원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예장도감에서 담당한 일을 기록하였다. 전체 불분권(不分卷)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책은 예장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좌목」인 이조별단, 3월 4일자 세 도감이 회동하여 수계(修啓)한 것으로 도감의 운영 규칙을 적은 「빈궁예장묘소삼도감사목(殯宮禮葬墓所三都監事目)」으로 시작한다. 계사질(啓辭秩)에는 예장과 관련하여 예장도감과 호조판서, 예조 등에서 국왕에게 올린 계사(啓辭)와 이에 대한 국왕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다. 별단질(別單秩)에는 제술관(製述官)과 서사관(書寫官) 및 그 예차(預差: 예비 인원)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고, 예장을 치른 뒤 불에 태울 물목들을 나열해 놓은 ‘소화별단(燒火別單)’이 있다. 다음으로 예장도감에서 다른 관청에 보낸 협조 공문을 모은 ‘이문질(移文秩)’, 경기감사・병조・묘소도감・혼궁도감・금위영・훈련도감・이조・여사청(轝士廳) 등에서 예장도감에 보낸 관문을 모아 놓은 ‘내관질(來關秩)’, 낭청이 도청에 올린 문서인 ‘품목질(稟目秩)’, 예장도감에서 하급관청에 실무 처리를 지시한 ‘감결질(甘結秩)’, 예조에서 예장도감에 보낸 공문을 모아 놓은 ‘예관질(禮關秩)’ 등 각종 공문서를 통해 예장 준비 과정과 관서 간 업무 협조 과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은 각종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를 기록한 ‘의주질(儀註秩)’과 본 의궤의 편찬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정리해 놓은 5월 10일자 ‘빈궁혼궁예장묘소삼도감의궤사목(殯宮魂宮禮葬墓所三都監儀軌事目)’이 정리되어 있다. 빈궁혼궁도감의궤, 예장도감의궤, 묘소도감의궤가 각각 5건 제작되었고, 그 중 1건은 어람용이고 나머지 4건은 의정부・춘추관・예조・강화부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으로 제작되었다. 이어서 도제조 이하부터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예장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과 그들에 대한 포상 내역을 적은 비망기가 실려 있다. 다음은 일방의궤로 예장에 필요한 각종 가마를 제시하고 있으며 ‘각양물건조작질(各樣物件造作秩)’에는 각종 물건의 조성을 위해 소요 물자의 종류 및 수량, 규격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으며, 그 중에는 기물을 채색으로 그린 것도 있다. 일방에서 필요한 물자의 종류 및 수량, 규격 등과 관련하여 일방의 낭청이 예장도감의 당상에게 여쭙는 공문을 모은 ‘품목질’, ‘이문질’, ‘내관질’, ‘감결질’, 일방의 감조관(監造官)이 예장도감의 당상에게 여쭙는 공문을 모은 ‘수본질(手本秩)’ 등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문건들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다음은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實入秩), 용환질(用還秩), 전배용환질(前排用還秩), 신조급전배용후환하질(新造及前排用後還下秩), 호조전배철물산판질(戶曺前排鐵物筭板秩), 소화물건질(燒火物件秩) 등을 차례로 수록하였다. 이어서 이러한 각종 물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명단을 써 놓은 ‘공장질(工匠秩)’을 실었다. 말미에는 28면에 걸친 채색의 발인반차도를 첨부해 놓았다. 궁궐의 빈궁에서 재실(梓室)을 받들어 내어 묘소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는 발인 행렬을 그린 그림이다. 하책은 이방, 삼방, 분전설사, 분장흥고, 지석소, 우주소, 별공작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방의궤에는 관장하는 업무 내역 및 담당자들의 명단에 이어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문건[품목질, 감결질, 이문질, 내관질]이 있다. 또 공문서를 비롯해 복완질(服玩秩), 길의장질(吉儀仗秩), 흉의장질(凶儀仗秩), 명기질(明器秩), 반우하는 즉일(卽日) 혼궁에 입배(入排)하는 선(扇)・개(盖)・기구(機具)와 발인하기에 앞서 혼궁도감에 이송(移送)하는 물품의 나열 등 이방에서 마련해야 하는 물품 제작을 위해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수량, 규격 등을 자세히 제시해 놓았으며, 그 중에는 기물을 채색으로 그린 것도 있다. 다음은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 용환질, 물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명단을 써 놓은 장인질(匠人秩)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삼방의궤이다. 삼방에서 준비하고 마련하는 물목(物目)부터 소개하고 있다[물목질(物目秩)]. 시죽책(謚竹冊), 시옥인(諡玉印), 애죽책(哀竹冊), 증옥(贈玉), 증백(贈帛), 신주(神主), 혼백함(魂帛函)을 담는 토등방상자(土籐方箱子), 지석(誌石), 표석(表石) 등이다. 이어서 담당자들의 명단을 나열한 뒤, 삼방에서 마련해야 하는 물품 제작을 위해 각 물품마다 소요 물자의 종류와 수량, 규격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품 중에는 채색 그림까지 수록한 것도 있다[각양물종소입마련(各樣物種所入磨鍊)]. 이어 관련 관서들과의 업무 협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문건[품목질, 이문질, 내관질, 수본질]이 있다. 다음은 예장도감 조직의 한 부서로 전설사의 일을 분장(分掌)하기 위해 임시로 따로 둔 분소인 분전설사(分典設司)의 업무를 적은 분전설사의궤, 분장흥고(分長興庫)의 업무를 적은 분장흥고의궤이다. 수본질, 곳곳에 까는 깔개를 나열한 포진질(鋪陳秩), 초석우비질(草席雨備秩), 유우비질(油雨備秩), 물자의 이용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은 실입질, 용환질을 차례로 실었다. 다음은 지석과 관련된 업무를 맡은 지석소의궤, 우주의 조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우주소의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특별히 선공감(繕工監)에 두던 임시 부서인 별공작의궤이다. 본 의궤의 말미에는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등 예장도감 담당자들의 수결이 있다. 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역사적 의의 1) 서지적 가치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의 책의(冊衣)는 초록 비단이고, 표제는 쓰여 있지 않다. 변철(邊鐵)은 놋쇠, 국화동(菊花童) 5개가 있고, 세 번째 국화동에 원환(圓環)이 있다. 지질(紙質)은 초주지(草注紙)이다. 표지를 넘기면 ‘의소세손예장의궤(懿昭世孫禮葬儀軌) 상(上) 의소묘(懿昭墓) 임신(壬申)’이라고 쓴 첨지가 있다. 판심 사항을 살펴보면, 붉은 인찰선으로 된 사주쌍변(四周雙邊), 행관(行款)은 12행(行) 24자(字), 주(註)는 쌍행(雙行), 판심(版心)과 장차(張次)는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본 의궤인 어람용 1건 뿐으로 대조 및 교감할 의궤가 없다는 점이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1종이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 의궤라는 점에서 본서의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2) 내용적 가치 의소세손의 예장은 할아버지 영조가 국왕으로 재위해 있고,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있는 가운데 치러졌다. ?국조상례보편?에 세손과 관련한 규정을 넣지는 못하였지만 「의소세손상수교」가 부기되어 있다. 법령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수교가 국가전례서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의소세손의 예장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세손과 관련하여 그 상장 과정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로, 관찬자료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및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의소세손빈궁혼궁양도감의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의소묘영건청의궤? 네 의궤가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의소세손의 예장 과정 전체를 알 수 있다. 그 중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예장도감 조직의 한 부서인 도청의 업무를 적은 도청의궤와 각방・각소의궤, 그리고 28면에 걸친 채색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로 구성되어 조선후기 세손의 예장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해진다. (작성자: 이현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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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7.선조시집유묵(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先祖詩集遺墨)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책 / 시고류/시고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선장
    조선 중기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임란 때 지은 시(詩)를 필사해 둔 것이다. 모두 4편의 시서(詩序)와 관련된 모두 51수(首)의 시가 필사되어 있다. 정탁이 명나라 장수(將帥)ㆍ막료(幕僚)들과 교류했던 모습과 당시의 심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첫째는 이여송(李如松)을 장수로 한 명나라 지원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1593년 가을 귀국 길에 오를 때 왕명을 받들어 의주(義州)까지 전별(餞別)했을 때에 지은 16편 16수이다. 둘째는 1594년 이제민(李齊閔) 등 친구 6명이 방문하자 그간 전란으로 죽고 흩어졌음을 한탄하며 지은 4편 5수이다. 셋째는 1598년(73세) 12월 기로소(耆老所)에서 해당자를 들인다는 말을 들었으나 전란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드물어 안타깝다는 심정을 읊은 4편 6수이다. 넷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명군의 군량(軍糧)을 감독하러 왔던 도통판(陶通判)이 3년간 머물며 엄격한 근무자세를 보고 찬미한 5편 15수이다. 이어 1599년 겨울에 지은 별도의 시 2수가 실려 있다. 이들 중에는 정탁의 《약포집(藥圃集)》에 실리지 않은 것도 더러 있다. 이밖에 앞쪽에 경진(京珍)에게 올린 서간 1통이 있고, 말미에는 1583년 3월 징상인(澄上人)에게 준 칠언절구 3편 7수가 실려 있다. 【 번역 해제 】 이『용만시집(龍灣詩集)』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지어서 자필로 직접 쓴 시집(詩集)이다. 그 내용은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25)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여 병란(兵亂)이 치열하므로 서울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왕이 서(西)로 파천(播遷)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26)에 명(明)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장수를 명하여 보내서 아군(我軍)과 합세(合勢)하여 왜적(倭賊)을 정토(征討)하여 삼경(三京: 개성, 평양, 경주)이 수복되었다. 이 해 가을에 왕이 서울로 돌아오고 명(明)나라 구원병이 환국하였다. 이때 정탁(鄭琢)이 왕의 명령을 받고 출사(出使)하여 잔치를 베풀어서 천장(天將: 명나라 장수)을 위로하고 전별하였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수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그 간에 남은 잔적(殘賊)들이 아직도 남쪽 변방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신민(臣民)들의 통분함이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정탁(鄭琢)이 울분함으로 병이 됨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 전별하거나 근심으로 지내는 등의 회포를 서술하여 읊은 시(詩)가 모두 통박(痛迫)한 심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일의 잊지 못할 자료로 삼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송응창(宋應昌) 경략막부(經略幕府)에 지어준 시(詩)와 이여송(李如松) 제독막부(提督幕府)에 지어준 시(詩)가 모두 왜적(倭賊)을 격퇴(擊退)하는데 협력해 줌을 감사하고 이별함을 섭섭히 여기는 뜻이 들어 있다. 송경략(宋經略)에게 지어준 시(詩)에는 삼한(三韓)의 고을이 지도와 호적을 도로 찾고 팔도(八道)의 백성들이 멸망함을 면했다고 하였고, 또 황제(皇帝)의 은혜가 이렇게 지극하니 동해(東海)에 비하면 어느 것이 더 얕고 깊겠는가 하였다. 이제독(李提督)에게 지어준 시(詩)에는 노래와 칭송함으로 능히 융성한 덕택을 모사하지 못하니 대그릇 밥과 병의 장물로 어찌 작은 정성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신묘(神妙)한 공(功)은 산하(山河)와 함께 웅장하고 큰 덕택은 조화를 따라 머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주청사(奏請使) 황경미(黃景美)와 주청서장관(奏請書狀官) 김이경(金而敬)이 연경(燕京)으로 갈 때에 증별시(贈別詩)를 지어주었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지어준 시(詩)가 그때그때의 감회(感懷)를 읊어서 써준 것이니, 이 시집(詩集)은 역사적으로 참고할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시학(詩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상고하여 연구할 점이 많다. ( 작성자 : 김연뢰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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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8.약포선조유묵(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藥圃先祖遺墨)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책 / 시고류/시고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선장
    조선중기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에서 피난하던 시절, 민간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ㆍ필사한 것이다. 정탁은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상수(象數)ㆍ병가(兵家) 등에 두루 통했던 인물이다. 내용은 도적이나 적군ㆍ귀신ㆍ동티ㆍ재액(災厄) 등을 막기 위한 벽사(辟邪)ㆍ비결(秘訣)ㆍ주문(呪文)ㆍ부적(符籍) 등에 관한 것들이다. 당시 민간에 퍼져있던 여러 민속신앙적 양태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 내용은 《약포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데, 내용상으로도 일정한 체제가 없다. 예를 들어 맨 앞의 <신선의 오병 도적 피하는 법[神仙避五兵寇軍法]>은 자황(雌黃) 2냥, 웅황(雄黃) 2냥, 명반(明礬) 2.5냥 등을 갈아 수탉 벼슬피로 버무려 은행처럼 만들고, 5개를 삼각 천주머니에 넣어 일반인은 왼쪽 팔뚝에 차고 군인은 허리춤에 차며 문 위에 매달면, 모든 도적과 흉한 군사가 절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함께 그려놓은 <도둑 잡는 부적[收寇符]>은 옥녀(玉女)에게 고하고 향을 피우면서 이것을 써서 도적들이 다니는 길에 묻어놓으면 그 도적이 잡힌다는 식이다. 이밖에 부적에 쓰인 점획의 상징적 의미를 적은 것, 장수(將帥)를 부르는 주문이나 강을 지나고 바다를 건널 때의 점(占), 또는 영(靈)ㆍ뢰(雷)ㆍ벽(霹)ㆍ력(靂) 등의 글자를 응용한 부적 등이 흥미롭다. 또 <소림산가람주(少林山伽藍呪)>라 하여 중국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주문은 승병(僧兵)들이 읊었음직하며, <팔진기조제물(八陣起操祭物)>이라 하여 제갈량(諸葛亮)의 여덟 진법을 일으키기 위한 제사관련 기록도 흥미롭다. [ 번역 해제 ] 1.『약포선조유묵』의 개요와 저술 배경 『약포선조유묵(藥圃先祖遺墨)』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 병가(兵家)와 도교(道敎)에서 유래한 의식(儀式), 법술(法術), 부록(符籙), 주문(呪文), 수결(手決), 기문둔갑(奇門遁甲)과 육임(六壬)의 술법 등 각종 술수(術數)에 대한 지식을 친필로 정리해 둔 유묵(遺墨)이다. 이 책은 목판으로 간행된 적이 없는 필사본 유일본으로서, 청주정씨 고평종중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이며, 보물 제494-8호로 지정되었다. 『약포선조유묵』은 33.9×28.4cm, 총51면의 저지(楮紙)에 오침선장(五針線裝)으로 편철된 필사본으로서, 표지 왼쪽에는 대자(大字)로 ‘약포선조유묵’(藥圃先祖遺墨)으로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용사잡록(龍蛇雜錄)’으로 기재되어 있다. 표지 제목으로 볼 때, 이 책은 용(龍)의 해를 뜻하는 임진(壬辰, 1592)년과 뱀[蛇]의 해를 의미하는 계사(癸巳, 1593)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의 전쟁 상황 중에 정탁이 직접 자료를 모아서 기록한 유묵을 정탁 사후에 후손이 책으로 상재한 것으로서, 정탁이 임진왜란 때 보고 들은 내용들을 기록한 『용사잡록(龍蛇雜錄)』(보물 제494-8호)과 함께 ‘잡록’(雜錄)의 형태로 묶으려고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포선조유묵』은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독창적인 저술이 아니라 전쟁에 유용한 도교 법술들을 접하는 대로 두서없이 모아서 산발적으로 채록한 유묵이다. 이에 따라 필체 역시 전반적으로 단정한 정서(淨書)가 아니라 해서, 행서, 초서 등이 마구 뒤섞여 있으며,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이 산삭(刪削)되지 않고 중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신선(神仙)이 오병(五兵)을 피하는 관군(冠軍)의 법[神仙避五兵冠軍法]」과 「윤공(尹公)이 병인(兵刃)과 도적을 피하여 몸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법[尹公避兵刃盜賊不能近身法]」 및 「신선이 오병을 피하는 관군의 법[神仙避五兵冠軍法]」은 유사한 내용이 변형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도적을 잡아들이는 부적[收寇符]」, 「호랑이를 굴복시키는 부적[伏虎符]」는 동일한 내용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형과 중복 현상은 『약포선조유묵』이 체계적으로 구상된 작품이 아니라 다양한 출처로부터 접한 자료들을 산발적으로 수집하여 급하게 채록한 저술임을 잘 보여준다. 『약포선조유묵』에 초록된 내용들은 대체로 명나라로부터 유입된 자료들이다. 예컨대, 조총(鳥銃)과 복량기(伏狼機)를 막아주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과 중국이 서양의 무기를 도립한 명(明)나라 이후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으로 유입된 자료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본서에 채록된 자료들은 도교의 도관(道觀)에 보관되어 도사(道士)들만 보던 비본(秘本)들 혹은 『정통도장(正統道藏)』처럼 국가적으로 집성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된 공인 선본(選本)들이 아니다. 상당수의 자료들은 『정통도장(正統道藏)』에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지만, 글자의 출입과 변형을 고려해 볼 때, 『정통도장(正統道藏)』보다는 오히려 『서호이집(西湖二集)』이나 『태평광기(太平廣記)』처럼 명-청(淸) 시대 중국의 기층 민간사회에서 널리 유행했던 병가와 도교의 잡다한 관련 자료들로부터 파생된 것들로 추정된다. 다만 책에 담긴 내용들이 명대의 자료들이 일부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의 사신들이나 장수들 혹은 명나라에 갔을 때 만난 유학자들로부터 습득한 지식일 가능성이 높다. 『약포선조유묵』은 평소 천문, 지리, 인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 광범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히 도교적 술수와 병가의 병법에도 두루 능통했던 정탁이 임진왜란의 비상사태를 당하여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신비적인 도술과 주술적인 술법까지도 적극 활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했던 고심의 산물이었다. 요컨대, 병법의 활용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국난극복책이라면, 전쟁에 유용한 각종 도교적 법술과 부적, 주문, 기문둔갑의 술수 등을 망라한 『약포선조유묵』의 방식은 비합리적이고 주술적인 국난극복책이었던 것이다. 2. 저자의 생애와 활동 정탁은 조선 중기 예천(醴泉)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임진왜란 때에 정탁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적극 참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좌찬성으로서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으며, 분조(分朝) 이후에는 세자 광해군을 호종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직접 나가려고 했으나 선조가 만류할 정도로 솔선수범했다. 그는 전쟁 상황에서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활약했다. 첫째, 명나라와 원만한 외교관계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정탁은 1582년 진하사, 1589년 사은사로 두 차례 명나라에 방문하면서 명나라 지도층과 친분을 쌓았으며, 임진왜란에서는 영위사로서 명나라 원병을 영접하면서 명나라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기반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합심하여 일본 군대를 물리치는 데 공헌했다. 둘째, 적극적인 인재 천거와 언론 활동을 통해서 위기에 처한 전쟁 영웅들을 구원했다. 정탁은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비롯해서 억울한 옥사를 당한 인사들을 변호했으며,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김덕령(金德齡, 1567~1596) 등의 의병(義兵) 대장들을 천거했으며, 전란 중에 억울한 누명을 쓴 김덕령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소를 올려서 죽음의 위기에 빠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죽음에서 건져서 백의종군하게 만들었다. 셋째, 선비로서 기본적으로 익히는 경학(經學) 외에 각종 병법과 술수류의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활용하여 전란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명나라로부터 수용한 병법 지식을 활용하여 팔진법과 육화진법 등의 진법을 연구하고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을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함께 협공하는 수륙병진협공책을 건의했으며, 조선과 왜적의 군사 무기와 특장점 등을 비교 검토하여 대비책을 제시하는 합리적 대응책 뿐만 아니라 도교적 법술과 기문둔갑의 술수 등 비합리적 방법까지 활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약포선조유묵』은 이러한 고심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3.『약포선조유묵』의 자료와 정본 작업 『약포선조유묵』은 임진왜란에서 왜군(倭軍)과 전쟁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각종 도교적 부록(符籙), 주문(呪文), 기문둔갑(奇門遁甲) 작법(作法)과 의식 등을 모아서 기록했다. 따라서 정탁이 독자적으로 저술한 단행본이 아니며, 특정한 저술을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다. 명(明)나라 주즙(周楫)의『서호이집(西湖二集)』처럼 명나라 민간에서 유행한 각종 도교 술법 자료와 북송(北宋)의 증공량(曾公亮)과 정도(丁度)가 찬술한 『무경총요(武經總要)』같은 병가의 병법 자료 중에서 전쟁에 유용한 내용을 두서없이 모아서 산발적으로 채록한 것이다. 저본이 되는 자료들은 모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중국 명나라로부터 유입된 자료로 추정된다. 『약포선조유묵』에 기록된 내용의 저본이 되는 자료를 확정지을 만한 단서를 정탁의 저술과 역사기록 등에서 명시적으로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의 구성과 특성을 고려할 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쟁에 직접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출처로부터 비롯된 자료들을 급하게 두서없이 채록한 것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본서의 정본화와 번역과정에서는 이러한 자료적 특성을 감안하여 실제로 명나라 장수들이나 인사들이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자료들을 중심으로 북송대의 『무경총요』와 명대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를 비롯한 병가(兵家)류 저술들과 더불어 『육임대전(六壬大全)』,『둔갑부응경(遁甲符應經)』, 『둔갑연의(遁甲演義)』 등 기문둔갑과 육임의 술수(術數)류 자료 및 『서호이집(西湖二集)』과 『정통도장(正統道藏)』에 나오는 각종 도교(道敎)류 자료를 참고하여 교감, 표점 및 교열을 진행하고, 병가류, 술수류, 도교류의 전문지식에 오류를 바로잡았다. 아울러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이해가 가능하도록 정본화와 번역 과정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전문용어에 대한 주석을 붙이고 오류가 생긴 이유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4.『약포선조유묵』의 구성과 내용 『약포선조유묵』은 전쟁시 필요한 병가와 도교 및 술수의 각종 지식들을 선별하여 채록한 저술로서, 대체로 전쟁의 해를 피하는 주술적 처방, 적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한 다양한 부적들과 주문들 및 그에 대한 설명들, 뇌신(雷神)들을 중심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신병(神兵)을 제련하는 비밀스런 도교 의식들, 관상(觀相)으로 기운과 색깔을 살펴서 길흉을 판단하고 신병을 빨리 움직이는 비법, 손가락을 활용해서 신장(神將)과 신병을 제련하는 수결법(手訣法) 혹은 겹법(掐法), 팔진(八陣)을 배열하고 기문둔갑의 법술(法術)을 수행하기 위한 의례적 방법과 제물(祭物) 및 기문둔갑 포국과 격국에 따른 길흉 판단 등으로 산만하게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인 구성의 순서에 따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의 해를 피하는 주술-의학적 처방(處方)으로서,「신선(神仙)이 오병(五兵)을 피하는 관군(冠軍)의 법[神仙避五兵冠軍法]」과 「윤공(尹公)이 병인(兵刃)과 도적을 피하여 몸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법[尹公避兵刃盜賊不能近身法]」및 「신선이 오병을 피하는 관군의 법[神仙避五兵冠軍法]」 등이 동일한 내용인데도 제목을 달리하여 본문에서 흩어진 채 나타난다. 둘째, 『약포선조유묵』은 적을 이기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부적들을 다수 기재했으며, 부적을 만드는 방식인 작법(作法)과 더불어 부적의 구성요소들을 분리해서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산형(散形)과 그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졌을 때 이루는 취형(聚形)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셋째, 『약포선조유묵』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도교 의식들을 수록하고 있다. 하늘을 다스리며 전쟁을 담당하는 뇌부(雷部)의 모든 신장들을 소환하는 뇌법(雷法)과 그것을 시행하기 위한 의식들, 각종 부적에 쓰는 다양한 도교 신명(神明)들의 비밀스런 자호들을 호명하고 주문과 각종의식을 병행함으로써 전쟁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의례적 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넷째, 『약포선조유묵』에는 도교전통의 다양한 수결(手決)이 소개되었다. 신병 제련을 위해 사용된 천근결(千斤決) 외에 「신장과 신병을 제련하여 둔갑하는 수결법[練將練兵遁甲訣法] 」을 통해서 좌검결(左劍訣), 우검결(右劍訣), 금패(金牌), 옥인(玉印), 청뢰결(靑雷訣), 뇌국(雷局), 우수진무결(右手眞武訣), 육정결(六丁訣), 팔묘결(八廟訣), 천정결(天丁訣), 구병결(驅病訣), 철쇄결(鐵鎖訣), 혼원조사(混元祖師) 심인(心印), 귀결(龜訣), 박귀결(縛鬼訣), 착귀결(捉鬼訣), 착괴결(捉怪訣), 구충황결(驅蟲蝗訣), 천심결(天心訣), 해주결(解呪訣), 칠성결(七星訣), 변신결(變神訣)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수결은 전쟁 승리를 위한 도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중요하게 활용되는 방식이다. 다섯째, 『약포선조유묵』에는 전쟁 수행에 유용한 주문들이 다수 소개되었다. 정탁은 전쟁시 천신과 천병을 동원하는 주문으로서, 구천(九天)의 호령(號令)에 따라 천신(天神)과 천병(天兵)을 출동시키고 거두어들이는 초장주(招將呪)와 회신주(回神呪)의 주문과 출병기(出兵旂)과 수병기(收兵旂)에 쓰는 주문 등을 제시하는 한편, 신병을 제련하는 비밀 의식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주문들을 소개하였다. 여섯째, 『약포선조유묵』은 기문둔갑(奇門遁甲)의 구궁(九宮)에서 가운데 중궁(中宮)을 뺀 팔진(八陣)에서 신병을 제련하기 시작할 때 쓰는 제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곱째, 『약포선조유묵』은 임진왜란에서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 기문둔갑(奇門遁甲)과 육임(六壬)의 원리에 따라 시간과 방위를 배치하는 포국(布局)을 하고 그와 연관된 법술(法術) 의식을 설명하였다. 『약포선조유묵』은 ‘귀인(貴人)이 천문(天門)에 오르는 격국’을 설명하면서 일어나는 혼동에 대한 질문과 해답만을 기록했다. 이는 전쟁에 유리하고 불리한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에 대한 공격과 수비를 준비하려는 정탁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한편, 『약포선조유묵』 말미에는 기문둔갑과 육임의 원리를 활용하여 포국(布局)할 때 생기는 혼동이나 의문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데, 기문둔갑과 육임의 원리에 대한 혼동스런 의문을 해소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5.『약포선조유묵』의 가치와 의의 『약포선조유묵』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비상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는 외교적 방식과 무기 계발과 병법 운용의 합리적 방법에 더하여, 명나라에서 유입된 병가(兵家)와 도교(道敎) 및 술수류의 지식들을 동원하여 주술-의례적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고심을 담은 저술이다. 정탁은 경학(經學) 외에도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易數), 병가(兵家) 등에도 두루 능통했는데, 특히 팔진법(八陣法)과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연구하였으며, 임진왜란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해서 명나라 원병을 요청하고 곽재우, 김덕령, 이순신 등의 명장들을 천거하고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 구원하는 등 전쟁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약포선조유묵』은 한국 역사의 흐름 가운데 전쟁에 쓰는 각종 의식, 법술, 주문, 부적, 수결, 기문둔갑과 육임의 술법 등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해서 실제로 활용하려고 했던 움직임을 실증한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명나라에서 유입된 병가와 도교와 술수류 지식들이 조선 역사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고, 호흡수행이나 의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조선 도교의 사회문화적 영역이 전쟁을 계기로 도교 의식, 법술, 주문, 부적, 수결, 기문둔갑과 육임의 술법까지 확장되어 실제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전쟁의 승리를 위해 중요하게 부각된 뇌신(雷神)과 뇌법(雷法)에 대한 주술-의례적 관심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뇌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 대한 신앙과 의식을 전하는 『옥추경(玉樞經)』이 조선 후기 민간에 광범하게 확산되어 영향을 미치다가 근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직접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을 자처하면서 ‘구천상제(九天上帝)’의 화신임을 주장하는 증산교의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약포선조유묵』은, 비록 일부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지만,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민간 종교의 역사적 흐름에 앞서 전쟁의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종교적 자원으로 뇌신과 뇌법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었음을 실증하는 종교문화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작성자 : 박종천)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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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9.약포선조간첩(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藥圃先祖簡帖) / 조선 선조 36년(1603)~선조 37년(1604) / 2첩 / 간독류/간독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첩장
    조선 중기 16세기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보낸 편지 36통을 실은 첩이다. 한 첩에 26통을 실었으며 다른 한 첩에 10통의 서간을 실었다. 편지를 받는 수신자(受信者)는 전라도 장수찰방(長水察訪)으로 있던 큰아들 정윤위이다. 정윤위는 정탁의 큰아들로 자(字)는 시형(時亨)이다. 발송한 시기는 편지 말미마다 쓰인 연월일로 보아 정탁의 말년에 해당하는 계묘(1603)ㆍ갑진(1604)의 두 해이다. 정탁의 문집 《약포집(藥圃集)》에는 정윤위에게 보낸 서간이 모두 13통 실려 있는데, 본 서첩에는 그 중 9통이 들어 있다. [ 번역 해제 ] *『약포선조간첩(藥圃先祖簡帖)』 - 1책, 2책 1. 머리말 『약포선조간첩(藥圃先祖簡帖)』은 정탁(鄭琢, 1526~1605)이 둘째 아들 정윤위(鄭允偉, 1564~1629)에게 보낸 간찰을 모아 엮은 첩이다. 정탁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한 뒤 문과를 거쳐 좌의정에 오른 인물로, 특히 김덕령(金德玲)의 무고함을 변호하고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사형의 위기에 처한 이순신(李純信)을 구한 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임진왜란 극복 과정과 문학적 성취는 다수의 선행 연구를 통하여 대략을 살필 수 있다. 이 간찰첩은 1, 2첩으로 나뉘어져 모두 27편의 간찰이 실려 있는데 분량이 소략하여 그의 사상이나 업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특별한 자료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정탁이 정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낸 만년의 일상과 관심을 이해하는 단초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2. 정탁의 가계와 생애 및 학문세계 정탁은 본관이 청주(淸州), 자(字)가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다. 청주 정씨의 시조는 고려 의종 때 중랑장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이며 그의 후손들은 고려조에서 대를 이어 이름난 벼슬을 하였다. 아버지 정이충(鄭以忠)은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ㆍ세자사ㆍ청원부원군(純忠積德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淸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어머니는 평산 한씨(平山韓氏)로 고려 예의판사(禮儀判事) 한철중(韓哲沖)의 후예이다. 11세에 아버지를 따라 현재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모사골에 갔다. 그곳에서 삼가 현감(三嘉縣監)을 지냈던 중부(仲父)에게 수업하다가 17세에 퇴계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조목(趙穆), 금난수(琴蘭秀) 등과 종유하였다. 20세에 다시 금당실로 와서 살았다. 23세에 부인 반씨(潘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관물당(觀物堂) 충(沖)의 따님이며 검열(檢閱)을 지낸 이구(李構)의 외손녀이다. 이곳 외가와 처가에서 분급 받은 전장과 노비를 바탕으로 재지(才智)를 갖춘 사족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문호를 흥기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7세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에 입문한 뒤 1599년(선조32)인 74세에 예천으로 하향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중앙 관료로서 보냈다. 1592년 왜구가 쳐들어오자 어가를 호종하여 피난을 갔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왕을 영변까지 호종하면서 명나라 장수들과 작전 관계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는데, 피난 중 의주에서 있었던 일과 명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문서와 논의들은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에 남아 있다. 분조(分朝) 후에는 전장에서 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고, 1594년 가을까지 동궁을 모시고 전주ㆍ공주ㆍ홍주 등지를 다니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1596년 71세에 김덕령을 신구(伸救)하여 석방하라는 특명을 받았고,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국문을 받자, 무고함을 역설하여 죽음에서 구원하여 백의종군할 수 있게 하였다. 1605년 80세를 일기로 예천군 고평리 집에서 별세하였다. 부음을 들은 선조는 크게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게 하였다. 1635년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640년에 예천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 되었다가, 1700년에 사람들이 도정서원(道正書院)을 세워 향사하였다. 연보에 의하면, 정탁은 어릴 때부터 중부인 삼가 현감 정이흥(鄭以興)에게 수업하였다. “8세에 처음으로 수학하였는데 즉시 대의(大義)를 통달하였고, 번거롭게 과정을 독려하지 않아도 문사(文思)가 날로 진취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약포는 13세 때 학질(瘧疾)을 심하게 앓았는데, 내가 몰래 병소(病所)에 들어가 보니 겨우 통증이 진정되었을 뿐인데도 벌써 일어나 앉아서 산법(算法) 도구를 방에 가득 펼쳐 놓고는 기삼백(朞三百)ㆍ기삭(氣朔)ㆍ치윤(置閏)의 법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회고는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1542년(중종37)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서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 실천하는 공부를 더하였다. 1552년(명종7) 봄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해 가을 태학에서 유학하였는데, 재유(齋儒)들이 구두(句讀)만을 일삼았으나, 선생은 홀로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1561년(명종16) 진주 교수(晉州敎授)로 임명되어 진주에 있을 때 남명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천길 우뚝한 절벽 같은 그의 장중한 기상을 따라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약포가 내직에 임명되어 하직인사를 왔을 때 남명은 그에게 소 한 마리를 주면서 “자네는 언사나 기질이 너무 민첩하니 묵묵하게 꾸준히 행동하여 원대한 경지에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소처럼 묵묵히 꾸준히 행동하도록 하라.”라고 당부하였다. 그가 평생 지조를 굽힘이 없이 꿋꿋하게 살아간 것은 남명의 가르침에서 받은 양향이 많았다고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1566년(명종21) 수찬ㆍ부교리ㆍ교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경악(經幄)에 재직한 것이 모두 30년이나 되는데, 이것은 그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과 비견할 만한 학문 수준에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정온(鄭蘊, 1569~1641)은 「묘지명」에서 정탁의 학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많은 훈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무엇인지를 알아 실천하는 공부를 하였으며 구이지학(口耳之學)은 손대지 않았다.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좋아하여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암송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소학(小學)』을 독실하게 믿고, 항상 허노재(許魯齋)의 ‘공경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고 높이기를 부모(父母)와 같이 한다.’라는 말을 들어서 말하기를 ‘학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글에서 초록(抄錄)하여 『소학연의(小學衍義)』를 만들어서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의 뜻을 넓히고자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상수(象數)와 병가(兵家)에 관한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그 귀추를 터득하였으며, 선비가 병법(兵法)을 알지 못하면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고 팔진법(八陣法)과 육화법(六花法) 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약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관에 따라 사뭇 다르다. 『선조실록』38년 10월 2일자 기사에 보이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의 졸기(卒記)에 “탁은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에는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향실(香室)에 직숙(直宿)하던 날 문정왕후가 향을 가져다가 불공을 드리려고 하자, 탁이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세에 중시되고 이어 현로(顯路)에 통하게 되었으며, 뒤에 호성공(扈聖功)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에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니 고인들의 치사하던 기풍이 있었다. 작위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반해, 『선조수정실록』은 “정탁은 예천(醴泉) 사람으로 류성룡(柳成龍)과 친해서 재상이 되었으나 매사 우유부단하였다. 그러다가 성룡이 조정에서 떠나자 탁도 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나이가 차서 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라고 하였다. 편찬자의 당색에 따라 북인 쪽에서 다소 호의적으로 기록했다면 서인 쪽에서는 매우 탐탁지 않게 보았던 모양이다. 3.『약포선조간첩』의 구성과 내용 『약포선조간첩』은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아 누가 언제 성첩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신자가 모두 둘째 아들 윤위(允偉)로 되어 있어 그의 후손이 성첩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약포선조간첩』은 2첩으로 구성되었는데 1첩에 27편, 2첩에 10편의 간찰이 실려 있다. 1첩의 앞부분은 발신 일자 순으로 성첩되어 있으나 뒤로는 편차에 특별한 기준을 발견하기 어렵다. 각 첩의 표제면 다음에 피봉과 내용을 오려 붙였다. 피봉에는 수신자와 수신처가 적혀 있다. 수신자는 모두 둘째 아들 윤위이고 수신처는 그의 근무처이던 장수 우재(長水 郵齋)ㆍ장수 우사(長水 郵舍)ㆍ장수 우아(長水 郵衙) 등으로 되어 있다. 피봉은 수신자와 수신처를 기록하였는데, 이를 분리하여 본문 좌우에 붙인 경우와 측면에 상하로 붙인 경우도 있다. 발신자 아래에는 약포의 수결이 표시되어 있고 추신이 적혀 있는 곳도 있다. 규격이 제한된 지면에 배접하여 붙이느라 내용 부분만 붙이고 여백은 모두 잘라 내었다. 한 통의 내용이 나뉘어져 다른 지면에 붙여지거나 한 지면에 3통의 간찰이 붙여진 곳도 있다. 4. 자료적 가치 * 가. 원본 자료의 확인 『약포선조간첩』에 실린 간찰은 상당수가 『약포집』에 실려 있으나 문집 편찬 과정에서 글자의 교정이 이루어지거나, 일부 내용만 수록된 경우가 많아 『약포선조간첩』을 통해 문집 편찬본과 원본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예를 들어 5월 12일의 간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상당히 긴 내용이 담겨 있다. (夢弼)所傳本月初二日所裁爾書, 端陽前一日, 已得見之, 而(夢弼)則時未及相見。書中所示賜號一款, (李儀甫)之說, 實有所據, 當採用其說矣。新謁之行, 則正郞之行, 過期不到否, 難知也。然而不出今明, 當有消息, 有以處之耳。且中(柰城)婚事, 已爲牢定, 無容更改, 以本月念八爲設醮日期。爾行須及念間來見耶! 諸具已爲草設, 至如不可優用而未圖之物, 想(允穆)之書, 大槪及之耶。(時亨)過(金谷)省掃後, 則令上寺讀書。當欲直送于爾所, 人馬未得圖之, 姑留山寺耳。父母俱老, 幾不當事, 今臨一家大事, 不能指揮, 甚似掣絆之人, 可笑可笑。然而別無大段疾病, 勿慮勿慮。餘具前後書, 今姑不備。仲夏上旬後二日, 父。[手決] 그러나『약포집』에는 앞부분과 가운데 부분의 혼사와 관련된 내용 및 끝부분은 생략된 채 주요 내용만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書中所示賜號一款, 李儀甫之說, 實有所據, 當采用其說矣。 時亨過金谷省埽後, 令上寺讀書, 欲直送于爾所, 人馬不得圖之, 姑留山寺耳。 父母俱老, 幾不省事, 家事不能指揮, 甚似絆掣之人, 可笑。 문집에 수록된 내용 중에도 “則”과 “當” 자가 탈락되었고, “當事”가 “省事”로, “今臨一家大事, 不能指揮”가 “家事不能指揮”로 수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 나. 노정치가의 만년의 일상과 관심을 엿볼 수 있음. 정탁은 1599년(선조32) 차자를 올려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러 갈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이 첩에 실린 간찰들은 1603년(선조36)과 1604년(선조37) 즉 78, 79세 사이에 쓰여진 것들로 임종하기 한두 해 전의 일상 모습이 담겨 있다. 정탁 본인과 가족의 질병과 건강 상태를 비롯하여 조상의 제사, 지인들의 죽음, 손자의 학업, 손녀들의 혼인, 묘 터의 선정과 이장, 위토의 확충 등 다양한 삶의 단편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한 정치가의 노년의 일상과 관심들을 조명해 볼 수 있다. * 다. 지방관의 생활 단면을 엿볼 수 있음.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급가(給假)」에 의하면 근친(覲親)ㆍ소분(掃墳)ㆍ영친(榮親)ㆍ영분(榮墳)ㆍ분황(焚黃)ㆍ혼가(婚嫁)ㆍ장례(葬禮)에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외직을 맡은 관리의 경우 전성지양(專城之養)의 관례에 따라 부모 봉양을 위한 여러 가지 물건도 보냈다. 제사를 앞두고는 청어․참기름 등을 비롯한 제물을, 자녀의 혼례에는 자리[席]ㆍ요[褥]ㆍ휘장[門帳] 같은 도구를 마련하여 전했고 붓과 먹 등의 문방구와 병의 치료에 필요한 약제도 때맞추어 보냈다. 그렇지만 근무지가 내륙지방인 탓도 있지만 제물로 보낸 어물의 경우 청어뿐이어서 소박하기 그지없다. * 라. 혼례의 정일(定日)과 신행에 관한 모습을 살필 수 있음. 이 간찰첩에는 손녀들의 혼인과 조상들의 제사에 관한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단편적이나마 지금은 볼 수 없는 당시의 모습들을 살필 수 있다. 먼저 정해진 혼례 일자가 양가의 형편에 따라 바뀌는 경우, 편지를 통하여 의견을 주고받으며 날짜를 다시 결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길하고 허물이 없는 날을 잡기 위해 점쟁이의 의견까지 참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신행에 사용한 교통수단의 종류와 쓰임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자리[席]ㆍ요[褥]ㆍ배[梨]ㆍ휘장[門帳] 같은 자질구레한 도구들도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아들에게 구해 주기를 부탁하였는데, 신행할 때 사용된 소도구의 종류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 마.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엿볼 수 있음. 약포는 이 간찰을 쓸 당시 여든이 다 되었지만 아들이 관직에 나가 있고 손자는 독서하러 절에 올라가 있어서 직접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를 주관한 경우도 있었다. 손녀들의 혼사가 거듭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과를 비롯한 주요한 제물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으며 물목이 넉넉하다고 느낄 때는 매우 흡족해 하였다. 묘 터를 정하고 이장을 하는 데도 특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호성(扈聖)ㆍ선무(宣武)ㆍ청난(淸難)의 3공신 회맹제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석하러 갈 아들에게 명나라 사람 두사충(杜師忠)을 데리고 가서 묘 터를 잡도록 지시하였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왔는데,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좀 더 나은 터를 잡기 위해 명나라 지관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그 정성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장을 할 때에도 정성을 다했는데, 두 아들에게 때를 놓치지 말며 외판(外板)과 의습(衣襲) 등의 물건을 빠뜨리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4. 맺는말 이상 약포 정탁의 생애와 학문, 『약포선조간첩』의 내용과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약포는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쇠망의 기로에 선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의 문학적 특징이나 정치적 업적은 『약포집』이나 『용사일기』를 비롯한 저작과 선행 연구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약포선조간첩』은 둘째 아들에게 보낸 27편의 간찰첩으로 그 내용의 일부는 『약포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문집에 실리지 않은 사소한 가사(家事), 손녀들의 혼사, 노비에 관한 내용 등은 꾸며지지 않는 일상의 진솔한 진면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단편적이나마 당시 지방관들의 생활과 혼례와 제례의 관행을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작성자: 정재구) 【 번역 해제 】 (2첩) 조선 중기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아들 윤위에게 보낸 서간을 첩으로 만든 것이다. 정탁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3대 명종(明宗) 13년(155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선조(宣祖) 27년(1594)에 우의정(右議政), 33년(1600)에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의주(義州)까지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天文)·지리(地理)·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精通)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도 하였다. 저서(著書)는 『약포집(藥圃集)』과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이 있고,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윤위(允偉)는 정탁의 둘째 아들로 정윤위(鄭允偉)이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3세 무렵에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외우고 16세에 급제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고 했다. 장수 찰방(長水察訪)을 거쳐 만년에 주부(主簿) 벼슬에 잠시 나갔으며, 이후 고향에서 심성 수양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이상정(李象靖)이 그의 「주부정공묘갈명 병서(主簿鄭公墓碣銘 幷序)」를 지었다. 이 서간을 주고받은 계묘년(1603, 선조36)과 갑진년(1604) 당시 약포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었고, 둘째 아들 윤위는 장수 찰방(長水察訪)을 재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약포집(藥圃集)』 2권과 『약포집 속집(藥圃集 續集)』 3권에 「아들 윤위에게 보냄[答子允偉]」이라는 제목으로 11편이 실려 있다. 문집을 간행할 때 전후로 생략된 문장도 있고, 원본을 정서하여 문집을 간행할 때 잘못 판독한 글자도 있다. 이들은 주로 우리(郵吏), 즉 찰방에 소속된 아전과 종들이 주로 전달하였는데, 혼인과 장례, 손자의 면학(勉學) 등 가족의 안부와 집안 소식, 객지에 있는 아들 걱정, 기타 먹[墨]이나 종이, 초[燭] 등 문방구와 생활용품 및 약재(藥材)와 어물(魚物) 등을 서찰과 함께 주고받기도 했다. 서간에서 부자간의 따스한 인정을 담뿍 느낄 수 있으며, 아울러 약포의 특이한 서체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원문이 훼손되어 판독할 수 없는 곳도 있다. (작성자 : 김상환)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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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10.기로연시화첩(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耆老宴詩畵帖) / 조선 선조 31년(1598) / 1첩 / 시고류/시고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첩장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등이 선조 32년(1599) 국가에서 베풀었던 기로연(耆老宴)에 참석하고 지은 시문 및 그림 등을 수록한 첩이다. 정탁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栢谷), 시호는 정간(貞簡)이충(以忠)의 아들로 예천(醴泉)사람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5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로서 향실(香室)에 당직(當直)할 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명으로 불공으로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전적에 승진되고 정언으로서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했으며 선조 초에 옥당(玉堂: 校書館)에 들어갔고 여러 청직(淸職)을 역임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때 일본사신이 오는 것을 보고 선생이 난(亂)이 있을 것을 짐작하였다. 난을 당해 왕이 몽진(蒙塵)할 때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호종(扈從)했는데 평양에서 광해군의 분조(分朝)에 왕세자를 호종(扈從)하게 되었다. 벼슬은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동서색당(東西色黨)에 흔들리지 않고 인물을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이충무공 순신(舜臣)이 무고(誣告)를 당해 사경에 이르렀을 때 이를 신구(伸救)하였다. 호종공(扈從功)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정간(貞簡)으로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하였다. 기로연(耆老宴)은 조선시대에 70세 이상의 원로 문신들을 위로하고 예우하기 위해 봄ㆍ가을에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베푼 잔치이다. 정탁은 73세인 선조 31년(1598)년 12월 기로소에 들어가서 약간의 시와 서 등의 글을 지었다. 본 첩은 선조 32년(1599) 연로한 신료(臣僚)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에 관한 시 와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으로는 이희득의 시로부터 시작하여 이수광ㆍ차천로(車天輅) 등 명인(名人)의 시문과 정탁의 시(時), 가(歌) 등이 같은 운을 이어서, 혹은 별운으로 지어져 수록되어 있다. 본문의 뒷부분에는 임진왜란을 문학화한 최초의 창작소설로 평가받는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을 1600년에 저술한 윤계선(尹繼善)이 쓴 <정태야기로편집후(鄭台爺耆老篇集後)>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글들이 지어진 기간은 선조 31년(1598)년 12월부터 이듬 해 7월까지이다. 이어서 연회의 모습을 그린 6장의 그림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나 마지막 장의 그림 반쪽은 망실되었다. 여기에 실린 정탁의 시 및 기로연을 회상하며 지은 <기로소의설회연가(耆老所擬設會筵歌)> 등은 《약포집(藥圃集)》의 권1에 수록되어 있다. 【 번역 해제 】 (1첩)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과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1516~1599), 서교(西郊) 송찬(宋贊, 1510~1601) 등이 선조 32년(1599) 국가에서 베풀었던 기로연(耆老宴)에 참석하고 여러 문사들과 지은 시문(詩文) 및 그림 등을 수록한 첩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공을 세웠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먼저 세 분의 약력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정탁(鄭琢)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栢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니, 이충(以忠)의 아들로 예천(醴泉) 사람이다. 1552년(명종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1568년(선조1) 교리 겸 춘추관기주관(校理兼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ㆍ지리ㆍ상수(象數)ㆍ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ㆍ곽재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발탁하였다. 문집에 『약포집(藥圃集)』, 저서에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심수경(沈守慶)의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聽天),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546년(명종1)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호당(湖堂)을 거쳐 1550년(명종5) 이조좌랑 겸 춘추기사관으로 있을 때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그리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의병모집에 힘썼고, 좌의정을 거쳐 1598년 나이가 80이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금천에서 생을 마쳤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과 『견한잡록(遣閑雜錄)』이 있다. 송찬(宋贊)의 자는 치숙(治叔), 호는 서교(西郊),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1537년(중종32) 사마시에 입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정자를 거쳐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로『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7년에 도승지·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이해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0년(선조3) 호조참판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관여하였고, 1594년 첨지중추부사·우참찬을 거쳐, 판돈녕부사ㆍ판중추부사 등의 직에 올랐다. 기로연(耆老宴)은 조선시대에 70세 이상의 원로 문신들을 위로하고 예우하기 위해 봄ㆍ가을에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베푼 잔치이다. 정탁은 당시 73세였고 심수경은 이보다 10세 위였으며, 송찬은 이보다 6세 위였다. 본 첩은 선조 32년(1599) 연로한 신료(臣僚)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에 관한 시와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내용은 주로 기로소(耆老所)의 역사적 내력과 의미를 적고, 이에 참여한 세 분에게 공적과 덕행을 칭송하고 장수를 기원하였다. 특히 중국 기영회와 송(宋)나라 문언박(文彦博)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의 고사를 빌어 설명하였다. 시문을 지은 사람은 이희득(李希得)으로부터 시작하여 김륵(金?)ㆍ이수광(李?光)ㆍ차천로(車天輅) 등 모두 28명의 문사(文士)가 정탁의 원운(元韻)에 차운(次韻)하고, 이어서 혹은 별운(別韻)으로 짓거나 혹자는 소감을 산문으로 기술한 서문을 짓기도 했다. 본문의 끝부분에는 윤계선(尹繼善)이 쓴 ‘정태야기로편집후(鄭台爺耆老篇集後)’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시문을 지은 문사들의 친필(親筆)은 아니고 후대에 몇 사람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서체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몇 가지 유형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본문도 이희득의 시 앞 장과 정장(鄭樟)의 후반부, 권임(權任)의 전반부 등이 훼손되었다. 수록된 시문이 지어진 기간은 선조 31년(1598)년 12월부터 이듬 해 7월까지이다. 이어서 물가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은 사람마다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과, 장수를 축원하며 동자가 선인(仙人)에게 천도(天桃)를 올리는 장면, 혹은 노인이 시냇물에 탁족(濯足)하거나 달을 완상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6장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장의 그림 반쪽은 망실되었다. 이 첩에 실린 김륵(金?)ㆍ이수광(李?光)ㆍ이춘영(李春英)ㆍ차천로(車天輅)ㆍ윤두수(尹斗壽)ㆍ구사맹(具思孟)ㆍ정탁(鄭琢)의 시문은 간혹 빠진 시나 수정된 구절 또는 글자의 출입이 있지만, 그들의 문집에 각기 수록되어 있다. 특히 세 분 가운데 가장 연배가 적었던 정탁이 다른 어른에게 올린 ‘기로편봉정본소제선생(耆老篇奉呈本所諸先生)’과 기로연을 회상하며 지은 ‘기로소의설회연가(耆老所擬設會筵歌)’ 등은 『약포집(藥圃集)』의 권1에 각기 수록되어 있다.( 작성자 : 김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4976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11.선조초고유묵(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先祖草稿遺墨) / 조선 선조 32년(1599) / 1첩 / 시고류/시고 / 정완진 / 경북 예천군 / 첩장
    조선 중기 16세기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짓고 쓴 시고(詩稿) 필적이다. 내용은 고향 친구인 화남(華南) 김농중(金農中)의 아들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의 부탁에 따라 김농중의 시첩(詩帖)을 보고서 그 시운(詩韻)을 빌어 지은 칠언율시 10수이다. 제목은 <봉차화남공시첩수운명성일작 기시직장아계(奉次華南公詩帖首韻明成一作 寄示直長雅契)>이다. 뒤쪽에 긴 시주(詩註)가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1599년 6월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김대현이 정탁을 방문하여 선친 화남공의 시첩을 보이며 화답을 청하자, 정탁은 세상을 버린 동향 친구에 대한 생각으로 모두 10수를 지었는데, 그중 앞의 4수는 화남공에 대한 구감(舊感)의 뜻을 담았고, 다음의 2수는 김대현의 면학(勉學)ㆍ진덕(進德)을 위한 뜻을 담았으며, 뒤의 4장은 자신의 퇴휴(退休)하려는 뜻을 서술하였다고 한다. 【 번역 해제 】 (1첩) 약포 정탁이 동향 출신인 친구 화남공의 시를 차운하고, 그 아들인 김대현에게 준 것이다. 모두 10수로 되어 있는데, 앞의 4수는 화남공과 함께 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감회를 서술하였고, 다음 2수는 그 아들인 김대현에게 학문에 힘쓰고 덕을 닦으라고 충고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4수는 본인이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안분자족하며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일조한 노정승의 말년 심사가 잘 드러나 있으며, 문집에 실린 시문과 비교하여 선인들의 퇴고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작성자 : 권경렬 )
    출처 : 문화재청
  • 474977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ㆍ홍패-1.대덕구년장계홍패(張桂 紅牌 및 張末孫 白牌ㆍ紅牌 - 大德九年張桂紅牌) / 고려 충렬왕 31년(1305)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장덕필 / 경북 영주시 / 낱장
    홍패(紅牌)는 교지의 일종으로 국왕이 과거 합격자에게 내려준 합격증서이다. 문과(文科)ㆍ무과(武科) 시험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는데 홍패와 백패라는 말은 이 합격증서의 색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동장씨(仁同張氏) 선세(先世) 홍ㆍ백패’는 장계의 홍패(紅牌) 1장과 장말손의 백패(白牌)와 홍패 각 1장이다. 장계(張桂)의 홍패는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내린 것인데, 그는 당시 준국학진사권지도평의녹사(准國學進士權知都評議錄事)로서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증서이다. 장계의 홍패는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사료가 된다.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백패는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進士試) 2등 제 7인으로 입격한 증서로서, 진사시 합격자 백 명 가운데 12등에 합격한 것이다. 그의 홍패는 세조 5년(1459)에 문과 병과(丙科) 제 3인에 급제한 증서이다. 조선초기의 과거제도에서는 문과에 을과(乙科)ㆍ병과ㆍ정과(丁科)가 있었는데 세조 14년(1468)부터 갑과ㆍ을과ㆍ병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장말손의 문과 병과는 뒤에 을과에 해당하며, 장말손은 문과 급제자 33인 가운데 6등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장말손의 홍패와 백패 모두 행서체(行書體)로 쓰여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사 연구에 사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78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ㆍ홍패-2.천순삼년장말손홍패(張桂 紅牌 및 張末孫 白牌ㆍ紅牌 - 天順三年張末孫紅牌) / 조선 세조 5년(1459)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장덕필 / 경북 영주시 / 낱장
    홍패(紅牌)는 교지의 일종으로 국왕이 과거 합격자에게 내려준 합격증서이다. 문과(文科)ㆍ무과(武科) 시험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는데 홍패와 백패라는 말은 이 합격증서의 색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동장씨(仁同張氏) 선세(先世) 홍ㆍ백패’는 장계의 홍패(紅牌) 1장과 장말손의 백패(白牌)와 홍패 각 1장이다. 장계(張桂)의 홍패는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내린 것인데, 그는 당시 준국학진사권지도평의녹사(准國學進士權知都評議錄事)로서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증서이다. 장계의 홍패는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사료가 된다.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백패는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進士試) 2등 제 7인으로 입격한 증서로서, 진사시 합격자 백 명 가운데 12등에 합격한 것이다. 그의 홍패는 세조 5년(1459)에 문과 병과(丙科) 제 3인에 급제한 증서이다. 조선초기의 과거제도에서는 문과에 을과(乙科)ㆍ병과ㆍ정과(丁科)가 있었는데 세조 14년(1468)부터 갑과ㆍ을과ㆍ병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장말손의 문과 병과는 뒤에 을과에 해당하며, 장말손은 문과 급제자 33인 가운데 6등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장말손의 홍패와 백패 모두 행서체(行書體)로 쓰여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사 연구에 사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79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ㆍ홍패-3.경태사년장말손백패(張桂 紅牌 및 張末孫 白牌ㆍ紅牌 - 景泰四年張末孫白牌) / 조선 단종 1년(1453)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장덕필 / 경북 영주시 / 낱장
    홍패(紅牌)는 교지의 일종으로 국왕이 과거 합격자에게 내려준 합격증서이다. 문과(文科)ㆍ무과(武科) 시험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는데 홍패와 백패라는 말은 이 합격증서의 색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동장씨(仁同張氏) 선세(先世) 홍ㆍ백패’는 장계의 홍패(紅牌) 1장과 장말손의 백패(白牌)와 홍패 각 1장이다. 장계(張桂)의 홍패는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내린 것인데, 그는 당시 준국학진사권지도평의녹사(准國學進士權知都評議錄事)로서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증서이다. 장계의 홍패는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사료가 된다.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백패는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進士試) 2등 제 7인으로 입격한 증서로서, 진사시 합격자 백 명 가운데 12등에 합격한 것이다. 그의 홍패는 세조 5년(1459)에 문과 병과(丙科) 제 3인에 급제한 증서이다. 조선초기의 과거제도에서는 문과에 을과(乙科)ㆍ병과ㆍ정과(丁科)가 있었는데 세조 14년(1468)부터 갑과ㆍ을과ㆍ병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장말손의 문과 병과는 뒤에 을과에 해당하며, 장말손은 문과 급제자 33인 가운데 6등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장말손의 홍패와 백패 모두 행서체(行書體)로 쓰여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사 연구에 사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80

    일성록(日省綠) / 조선시대 / 2,329책 / 필사본/등록류 / 서울대학교규장각 / 서울 / 선장
    타기관 서비스 자료입니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81

    숙신옹주 가옥허여문기(淑愼翁主 家屋許與文記) / 조선 태조년간(1392~ 1398) / 1건 / 국왕문서/궁방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태종 원년(1401) 9월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의 퇴위 후 존칭)이 그의 후궁(後宮) 소생인 며치(?致)에게 24칸의 와가와 초가를 내려주면서 발급해준 문서이다. 며치는 후에 숙신옹주(肅愼翁主)로 봉(封)해졌으며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 문서는 남양홍씨가에 세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문서는 태상왕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태상왕의 나이가 67세의 노령이고, 태상왕이 그러한 문서를 친필로 작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 글자도 흐트러짐 없고 정확하게 이두를 쓴 것으로 보아 사자관(寫字官)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수결은 태상왕이 직접 한 것으로 보겠고, 보인(?印)은 태사왕의 것으로 보인다. 숙종 연간에 편찬된 『열성어제(列聖御製)』에 이 문서가 수록되어 있으나 이는 어필(御筆)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태조가 며치에게 하사한 가옥은 서울 동부 향방동(香房洞)에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 재상이었던 허금(許錦) 소유였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를 구입한 후 노자들을 시켜서 가옥을 짓도록 하였다. 태조가 마침 70세가 넘어 여생이 얼마 남아있지 않음을 깨닫고 이 가옥을 며치에게 하사하였다.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일반화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위 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는 몸채와 곁채 및 부엌채의 크기가 비교적 작았으며 안사랑과 주방 및 고방 등이 상대적으로 컸음을 알 수 있다. 누상고(樓上庫)가 2채나 있었던 점도 주목이 되며 몸채, 곁채, 부엌채 및 누상고(樓上庫) 등은 와가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초가였던 점도 새롭다. 【 번역 해제 】 (1장)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가 후궁(後宮)의 몸에서 난 딸인 며치(?致)에게 고(故) 재신(宰臣) 허금(許錦)에게서 사들인 집터와 그 집터에 새로 지은 24칸의 집을 허여(許與)하는 문기(文記)이다. 여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나이 든 아버지가 딸을 염려하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 있으며, 건물의 칸 수 등을 자세히 적은 것에서 훗날에 있을지도 모를 송사(訟事)에 대비하는 꼼꼼함도 엿볼 수 있다. 며치(?致)는 후에 숙신옹주(淑愼翁主)로 봉해진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4982

    석보상절 권23, 24(釋譜詳節 卷二十三, 二十四) / 조선 세종 31년(1449) / 2책 / 목판본/사찰본 / 동국대학교 / 서울 중구 / 선장
    『석보상절』은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서명의 ‘석보’는 석가의 연보로서 일대기를 가리키며, ‘상절’은 긴요한 것은 자세하게, 긴요하기 않은 것은 간략하게 썼다는 뜻이다. 간행은 세종 29년(1447)에 수양대군이 편찬한 것으로 「석보상절서(序)」에 기록되어 있다. 본서는 권 23ㆍ24의 초간본이며, 갑인자 활자로 찍은 것이다. 크기는 가로 21.0cm, 세로 31.7cm이다. 이 책의 총분량은 권 24의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24권으로 추정된다. 현재 초간본 6권 6책과 중간본 2권 2책이 전하는데,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최초의 국문활자본으로 불교사나 국문학, 서지학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83

    석보상절 권11(釋譜詳節 卷十一) / 조선 연산군 1년(1495)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이건희 / 경기 용인시 / 선장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간행한 것으로,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서술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권11은 전기활자본의 복각본이다. 연산군 1년(1495)에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내탕금(內帑金)으로 여러 불교 서적을 간행했는데, 그 중 《석보상절(釋譜詳節)》20부가 수록되어 있음이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과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의 발문에 나타나므로 이 책이 연산군 1년에 제작된 판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난외(欄外)에 시주자들의 이름이 많이 새겨진 점과 지질(紙質) 등으로 보아 후대에 어느 사찰에서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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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 - 사마방목(驪州李氏 玉山門中 典籍 -司馬榜目) / 조선 중종 8년(1513)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이해철 / 경북 경주시 / 선장
    방목(榜目)은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을 열거한 명부로써 특히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문과(文科)ㆍ무과(武科)ㆍ진사과(進士科)ㆍ잡과(雜科)로 나뉘어 각각 문과방목(文科榜目)ㆍ무과방목(武科榜目)ㆍ사마방목(司馬榜目)ㆍ잡과방목(雜科榜目)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마방목(司馬榜目)≫의 현존부수는 ≪문과방목(文科榜目)≫에 비하여 훨씬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실시된 생원ㆍ진사시가 모두 229회였는데 그 중 170회분에 가까운 방목이 국내외에 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책은 조선 중종(1506~1544) 8년에 되었던 것으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했을 때의 방목(榜目)이다.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또는 자계옹(紫溪翁)이고, 본관은 여주,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사헌부지평ㆍ성균관대사성ㆍ예조판서ㆍ경상도관찰사ㆍ의금부판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의 정립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 방목은 그의 수택본(手澤本)으로서 책머리에 여성이씨(驪城李氏), 회재복고(晦齋復古)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다.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되었으며 책의 본문에는 합격한 생원과 진사의 성명과 자(字)ㆍ본관(本貫)ㆍ주소와 아버지의 이름 등이 기재(記載)되어 있다. [ 번역 해제 ] * 보물524호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 - 사마방목(司馬榜目)』 1. 개설 보물 제524-1호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 -정덕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조선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명단을 수록한 사마방목이다. 이는 해당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가운데 생원시에 합격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수택본(手澤本)이 그의 후손에게 전해지던 것으로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첫 장의 정덕8년 계유 8월 20일, 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 生員進士榜 아래에 여성 이씨(驪城李氏), 회재복고(晦齋復古)의 장서인(藏書印)이 날인되어 있다.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또는 자계옹(紫溪翁)이고 본관은 여주,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는 조선 시대 성리학의 선구적인 인물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언적의 성리설은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사마방목이라는 명칭은 생원⋅진사시를 사마시라고 한 것에서 연유하였다. 조선 시대 생원⋅진사시 230회 중에서 180회에 가까운 방목이 국내외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마방목은 예종 원년(1469)에 실시한 생원ㆍ진사방목을 성종 7년(1476)에 갑인자(甲寅字)로 찍어낸 것인데, 갑인자본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금속활자인 을해자 활자본(乙亥字活字本)으로 찍어낸 이 방목이다. 사마방목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각 100명을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제(等第)하고, 합격자 개인의 신상에 관한 정보와 시험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이 방목의 구성은 권수(卷首)의 은문(恩門)과 생원방(生員傍)과 진사방(進士榜)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은문(恩門) 이라는 제목 아래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시험 장소는 분소법(分所法)에 의해 일소(一所), 이소(二所)로 나누어서 치렀으며 일소는 예조(禮曹), 이소는 성균관에서 시행했다. 각 시소(試所)의 시관(試官)은 종2품 이하 2명, 정3품 이하 3명의 시관과 감찰 1명으로 각각 6명의 감시관을 각각 두었다. 은문에 1소와 2소의 시관명(試官名)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이이서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다. 생원방과 진사방의 순서로 각각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이 등제되었다. 수록 내용은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인 합격자의 시험 당시의 신분인 전력(前歷), 이름 및 자(字), 본관(本貫), 거주지와 합격자 부친의 관직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명단을 살펴보면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 합격한 사람을 양시(兩試)ㆍ쌍중(雙中)ㆍ구중(俱中)이라고 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지 않고 진사시를 먼저 치르고 생원시를 나중에 치렀다. 격일로 치러졌기 때문에 양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양시 합격자는 16세기에는 한 회 평균 15.5명 정도로 많았으나, 17세기에는 8.5명, 18세기에는 5.8명, 19세기에는 1.7명으로 후기로 갈수록 줄었다고 한다. 합격자의 전력(前歷)은 대부분 사대부 집안 출신인 유학(幼學)이며, 간혹 유학이 아닌 사람도 섞여 있다. 이 방목에서 생원시 3등 69위에 합격한 권처중(權處中), 진사시 3등 55위 박황(朴璜)과 59위 김응린(金應麟)은 평민인 공생(貢生)의 신분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부친에 관한 기록은 없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마방목 가운데 금속활자 판본으로 된 방목은 희귀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의의가 크다. 이 방목은 조선 시대 과거제도 및 주요 인물들의 전기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 중요기록물[보물524-1호] 지정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 -정덕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1970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4호 『정덕 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으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4월 28일 이언적의 여주이씨 옥산문중 소장 전적을 일괄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명칭을 변경하고 대한민국의 보물 제524-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 방목과 동일본으로 추정되는『정덕 계유 사마방목』은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경상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데 2004년 3월 1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마방목은 예종 원년(1469)에 실시한 생원ㆍ진사방목을 성종 7년(1476)에 갑인자(甲寅字)로 찍어낸 것인데, 갑인자본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금속활자인 을해자 활자본(乙亥字活字本)으로 찍어낸 이 방목이다. 3. 사마방목 구성과 이해 방목(榜目)은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을 열거한 명부이다. 조선 시대에 시행되었던 과거(科擧)에는 문과⋅무과⋅생원 진사시⋅잡과가 있는데, 방목은 과거의 종류에 따라 문과방목(文科榜目)ㆍ무과방목(武科榜目)ㆍ사마방목(司馬榜目)ㆍ잡과방목(雜科榜目)으로 구분된다. 사마방목은 생원시와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이다. 문과와 무과, 잡과 합격자에게는 등위에 따라 관직 또는 품계가 주어졌다. 그러나 생원 진사시는 관직의 제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시험이며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원 또는 진사라는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 사마방목의 명칭은 바로 생원⋅진사시를 사마시라고 한 것에서 연유하였다. 생원 진사시는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공식 명칭이며, 소과(小科)⋅감시(監試)⋅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불렀다. 소과는 문과(文科)를 대과(大科)라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대과의 예비적 관문을 통과한 것임을 의미한다. 감시는 고려 시대 진사시(進士試)를 국자감시(國子監試)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사마시라 칭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으며, 다만 사마(司馬)가 중국 주나라의 관직명이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최고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 우수한 선비들을 사마에게 추천하였고, 이렇게 추천된 선비들을 진사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의 진사와는 명칭만 같을 뿐 성격이 다르지만, 이로 인해 조선 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을 사마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태종 5년 의정부 찬성사(贊成事) 곽추(郭樞)가 사마시를 관장하였다는 졸기(卒記)의 기록에 근거하여 조선 초부터 사마시라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생원ㆍ진사시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로 구분된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시험이고,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실시하는 비정기적인 시험이다. 생원ㆍ진사시는 태조 2년 처음 시작되어 고종 31년 폐지되기까지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로 모두 230회가 시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180여 회의 사마방목이 전해지고 있다. 시험의 절차는 식년시와 증광시 모두 초시(初試 : 1차 시험)와 복시(覆試 : 2차 시험)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초시는 각 도 별로 실시되었고 복시는 예조(禮曹)에서 주관하였으며 단종 이후에는 성균관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시험 장소는 분소법(分所法)에 의해 일소(一所), 이소(二所)로 나누어서 치렀다. 이는 상피제(相避制)를 두어 시험관의 자제나 친척 또는 부자가 함께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소는 예조(禮曹), 이소는 성균관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다. 과거가 시행되면 시관(試官)들이 답안지인 시권(試券)에 점수를 내어 합격자를 정하고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여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최종 합격자가 정해지고 절차가 끝나면 방목을 작성하였는데, 합격자들은 무리들 중에서 색장(色掌)을 뽑아 사마방목의 간행에 착수한다. 간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합격자들이 분담하여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인쇄하고 합격자와 관련된 기관에 1부씩 나누어 주었다. 사마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며 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가는 벗이므로 합격자에게는 사마방목이 꼭 필요했다. 사마방목의 양식은 『문과방목(文科榜目)』과 같은 형태로 편찬⋅간행되었으며 그 체제나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를 거치면서 초시방목과 복시방목이 작성되지만, 일반적으로 사마방목은 최종 합격자 명단인 복시방목을 말한다. 사마방목에는 복시에서 선발된 100명을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제(等第)하고, 합격자 개인의 신상에 관한 정보와 시험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방목의 구성과 내용은 시대별로 조금씩 다른데 기본적으로 1소와 2소의 시관명(試官名), 입격자의 성명, 생년간지(生年干支), 본관(本貫), 거주(居住), 그 아버지의 관직(官職)⋅성명을 기록하고, 권말(卷末)에 1⋅2소의 시제(試題), 초시(初試)의 시행 년 월일, 시관명, 시제, 장원의 성명 따위를 부기(附記)하였다. 16세기 중엽부터 부모의 구존(俱存) 여부와 안항(雁行)과 자(字)를 열거하기 시작했으며 적서 형제의 이름은 17세기 초부터 기록하였다. 현재 전하는 사마방목의 간행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국가에서 간행한 것으로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방목이 이에 속한다. 교서관(校書館)에서 발간하였는데 간혹 지방 관아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둘째, 합격자 개인 또는 그 후손이 간행한 경우이다. 15세기 방목이 주로 이러한 경우이며 문집(文集)에 수록되었다. 이들은 기존 방목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과 교우록(交友錄)⋅사우록(師友錄)의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 셋째, 중간(重刊)된 경우인데 16세기 전반기의 방목에 많이 보인다. 동일한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간행하여 나누어 가지거나 선대(先代)의 방목이 후손에 의하여 중간(重刊)되는 경우이다. 현재 전해지는 방목의 형태는 초기의 것은 문집이나 중간본(重刊本) 형태가 많고 17세기 말 이후는 교서관에서 간행한 원본이 많다. 방목은 과거 합격자 발표가 난 후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 회분의 합격자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문과방목의 경우는 시험이 행해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단회방목과 여러 차례 발행된 방목을 후대에 집성한『국조방목(國朝榜目)』⋅『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문과방목(文科榜目)』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잡과방목도 『역과방목(譯科榜目)』⋅『의과방목(醫科榜目)』으로 집성된 방목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방목의 경우는 『정덕 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가정삼십칠년 무오추 생원진사방목(嘉靖三十七年戊午秋生員進士榜目)』과 같이 어느 한 시기에 시행된 특정 시험의 합격자만을 단독으로 기록하는 단회방목의 형태로 전해진다. 4. 『정덕 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수록 내용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조선 중종 8년(1513) 식년시인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명단을 수록한 사마방목이다. 이때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가운데 생원시에 합격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수택본(手澤本)이 그의 후손에 전해지던 것으로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첫 장의 『정덕 팔년 계유 팔월 20일, 생원진사방』 아래에 여성 이씨(驪城李氏), 회재복고(晦齋復古)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다. 합격자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또는 자계옹(紫溪翁)이고 본관은 여주,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ㆍ성균관 대사성ㆍ예조판서ㆍ경상도 관찰사ㆍ의금부 판사ㆍ좌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명종 2년(1547)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조선 시대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적인 인물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그의 성리설은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저술로는 『구인록(求仁錄)』⋅『봉선잡의(奉先雜儀)』⋅『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등이 있으며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573년에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 방목의 구성은 권수(卷首)의 은문(恩門)과 생원방(生員傍)과 진사방(進士榜)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은문(恩門) 이라는 제목 아래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은문은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를 뽑아 준 시관(試官)을 높여서 가리키는 말이다. 15세기 말에 보이기 시작해 16세기 초 이후 거의 빠짐없이 기재되었다. 그 해 사마시의 시험장소는 1소(所) 예조(禮曹)와 2소(所) 성균관에서 나누어 치렀다. 각 시소(試所)의 시관(試官)은 종2품 이하 2명, 정3품 이하 3명의 시관과 감찰 1명으로 각각 6명의 감시관을 각각 두었다. 1소 시관 : 윤금손(尹金孫)⋅성몽정(成夢井)⋅유운(柳雲)⋅구지신(具之愼)⋅소세양(蘇世讓)⋅이귀종(李貴宗). 2소 시관 : 강혼(姜渾)⋅심정(沈貞)⋅윤은보(尹殷輔)⋅김안국(金安國)⋅김희수(金希壽)⋅조한필(曹漢弼). 이어서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다. 생원방과 진사방의 순서로 각각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이 등제되었다. 수록 내용은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인 합격자의 시험 당시의 신분인 전력(前歷), 이름 및 자(字), 본관(本貫), 거주지와 합격자 부친의 관직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생원방 1등 : 장원 이약빙(李若冰)과 윤구(尹衢)⋅고응성(高應星)⋅유성춘(柳成春)⋅기준(奇遵)의 5인. 진사방 1등 : 장원 신잠(申潛)과 이인(李認)⋅유성춘(柳成春)⋅강린(姜潾)⋅안처순(安處順)의 5인. 생원시 1등인 유성춘은 진사시에도 1등에 올라 있다. 생원시에 1등으로 이름을 올린 기준은 진사방 2등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으며 생원시 1등의 윤구(尹衢)와 고응성(高應星)은 진사시 3등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처럼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사람을 양시(兩試)⋅쌍중(雙中)⋅구중(俱中)이라고도 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지 않고, 진사시를 먼저 치르고 생원시를 나중에 치렀다. 격일로 치러졌기 때문에 양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양시 합격자는 16세기에는 한 회 평균 15.5명 정도로 많았으나, 17세기에는 8.5명, 18세기에는 5.8명, 19세기에는 1.7명으로 후기로 갈수록 줄었다. 합격자의 전력(前歷)은 대부분 사대부 집안 출신인 유학(幼學)이며, 간혹 유학이 아닌 사람도 섞여 있다. 생원시 3등 69위에 합격한 권처중(權處中), 진사시 3등 55위 박황(朴璜)과 59위 김응린(金應麟)은 평민인 공생(貢生)의 신분이며, 이들의 부친에 관해서는 기재되지 않았다. 방목에 따라 부록이 붙어 있기도 하지만 『정덕 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에는 찾아볼 수 없다. 방목의 구성과 내용이 초기 방목에서부터 모두 갖추어 기재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 시기의 방목 중에는 필사본이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이 경우 가장 기본이 되는 은문⋅전력⋅본관⋅거주지 등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기재 사항이 많아지며 특히 권말 부록이 풍부해졌다. 5. 사마방목의 사료적 가치 사마방목은 합격자의 명단뿐만 아니라 시권(試券)과 함께 기록되어 인재 활용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관청 주도하에 주로 간행되었다. 사마방목에 수록된 내용은 조선 시대의 생원⋅진사시의 시행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시험의 시행과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 세력의 성격과 신분제의 변화, 향촌 사회에서의 사족들의 동향 등 조선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실록 등의 자료나 문집⋅족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방대한 인물의 신상 정보를 담고 있다. 이것은 한 편의 사마방목 보다는 이들을 집성했을 때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성한 자료는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 및 주요 인물들의 전기(傳記)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중요한 점은 시험의 전 과정을 국가에서 주관하고 방목의 간행 또한 국가에서 맡아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그 어떤 자료보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작성 : 박상리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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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驪州李氏 玉山門中 遺墨-海東名蹟) / 조선 세종 7년(1425) / 2첩 / 탁본류/탁본 / 이해철 / 경북 경주시 / 첩장
    《해동명적》은 신라 김생(金生)에서 신라ㆍ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필적을 모아서 새긴 법첩(法帖)이다. 돌판에 새긴 이 《해동명적》전ㆍ후집은 경북 안강(安康)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서는 편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중종 때의 문신 신공제(申公濟, 1469~1536)가 편집하였다고 한다. 전집에는 조선의 문종ㆍ성종의 어필(御筆)에 이어 신라의 최치원(崔致遠)ㆍ김생(金生)ㆍ영업(靈業)ㆍ고려의 탄연(坦然)ㆍ이암(李?)ㆍ신덕린(申德?)의 필적이 실려 있다. 후집(後集)에는 고려의 이강(李岡)ㆍ혜근(慧勤), 여말선초의 성석린(成石璘)ㆍ박초(朴礎), 조선의 권근(權近)ㆍ하연(河演)ㆍ신장(申檣)ㆍ무명씨(無名氏)의 필적이 실려 있다. 그중 전집에는 김생과 이암 필적이 여럿이며 후집에는 권근 필적이 많다. 우리나라 명인의 필적만을 모아 새긴 조선시대 법첩으로 가장 이른 예이다. 각법(刻法)이 좀 물러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고대 필적을 두루 열람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필적집이다. 【 번역 해제 】 (1첩) 『해동명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신공제(申公濟, 1469~1536)가 신라 김생(金生)에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필적을 모아서 편집하여 석각(石刻)한 뒤 탁본(拓本)하여 간행한 서첩(書帖)이다. 현재 경주 안강 독락당(獨樂堂)에 있는 본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두 2첩(帖)으로 성책(成冊)되어 있다. 독락당본에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어서 정확한 간행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패관잡기(稗官雜記)』와『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해동명적』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1517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보고서 가운데 형태 서지에서 상권(上卷)과 하권(下卷)으로 분류함으로 인하여 현재도 이를 따르고 있으나, 이는 원본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빗어진 오류이다. 보물로 지정된 독락당본의 제1첩에는 전집(前集)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제2첩에는 후집(後集)이란 표기가 없다. 최근에 공개된 김민영씨 소장본과 이석우씨가 소수박물관에 기탁한 이석우본에는 후집으로 표기된 첩과 경상도관찰사 최세절(崔世節)의 발문이 붙어 있다. 그에 따르면 『해동명적』은 1520년경에 신공제가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뒤, 10년 뒤인 1530년에 최세절이 석각(石刻)하여 증보(增補),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민영본은 현재 3첩이고 이석우본도 2첩이므로, 독락당본과 함께 이들은 모두 일부가 유실된 영본(零本)이다. 이밖에도 경주손씨 서백당(書百堂)에도 권하(卷下)가 전해오고,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臨淸閣)에도 1첩이 전해온다. 이와는 별도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도 양각(陽刻)으로 간행된 1책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을 종합해 볼 때, 『해동명적』은 원래 전집 2첩, 후집 2첩 등 도합 4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소장자에 따라 2첩, 혹은 4첩으로 나누거나 합하여 성첩(成帖)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해동명적』은 후대의 중각(重刻)으로 인하여 수록된 필적의 순서와 종류에 다소 출입이 생겼으나, 고대 서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ㆍ이지정(李志定)의 『대동서법(大東書法)』ㆍ박문회(朴文會)의 『고금역대첩법(古今歷代法帖)』ㆍ백두용(白斗鏞)의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법첩(法帖)으로 손꼽힌다. 다음은 독락당본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상에서 고증한 바와 같이 『해동명적』을 상하로 분류함은 잘못된 것이므로, 본 해제에서는 독락당본을 후집이 유실된 영본으로 보아 현재 2첩을 전집 1첩ㆍ2첩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전집 1첩에는 조선시대의 문종(文宗)ㆍ성종(成宗)의 어필(御筆)을 비롯하여 신라의 최치원(崔致遠)ㆍ김생(金生)ㆍ영업(靈業) 3인과 고려의 탄연(坦然)ㆍ이암(李?)ㆍ신덕린(申德?) 3인 등 모두 8인의 필적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이들의 생애는 생략하고 그들이 쓴 글씨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1) 문종대왕(文宗大王書)의 글씨는 원(元)나라 학자 조맹부(趙孟?)와 당(唐)나라 문인 한유(韓愈)의 칠언절구를 적었다. (2) 성종대왕(成宗大王)의 글씨는 황감(黃柑) 70매를 보내며 함께 보낸 시와 「망원정에 대한 어제시[御製望遠亭]」인데,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畢齋集)』 제19권에 실려 있다. 한편 『열성어제(列聖御製)』 5권에는 이 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대동시림에 말하기를, ‘월산대군 집에 망원정이 비로소 완성되자 임금께서 시 8장을 지으시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하도록 명했다.’ 하였다[大東詩林曰 月山大君家 望遠亭始成 上製詩八章以賜之 仍令?臣次韻]” 월산대군(1454∼1488)은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친형으로 성종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술과 시로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보냈다. (3)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는 자신의 고적(孤寂)한 심경을 읊은 「가을 밤, 비 내리는 가운데[秋夜雨中]」와 한(漢) 고조(高祖)의 호탕한 「대풍가(大風歌)」를 쓴 것이다. 이 글씨는 887년(진성여왕1)에 쓴 것으로 최치원의 나이는 31세였다. (4) 김생(金生) 글씨는 이백(李白)이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고시(古詩)와 「하빈객이 월사로 가는 것을 보내며[送賀賓客歸越寺]」라는 제목으로 지은 칠언절구이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현수품(賢首品), 제12」를 초록(抄錄)한 것인데, 앞에 몇 구절이 생략되었다. (5) 승려 엉업(靈業)의 글씨는 813년(신라 헌덕왕 5)에 한(漢) 고조(高祖)의 「대풍가(大風歌)」와 불교 게송(偈頌)을 쓴 것이다. (6) 승려 탄연(坦然)의 글씨는 여래가 삼승십이교(三乘十二敎)를 베풀게 된 내력을 쓴 것이다. (7) 이암(李?)의 글씨는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의 아들이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했다는 말에 축하한 시를 쓴 것인데, 회산(檜山) 황석기(黃石奇)와 죽강(竹崗) 김보(金普), 완산(完山) 유인우(柳仁雨) 등과 같이 지은 시이다. 또 제기(齊己)가 지은 「여름날 초당에서 지음[夏日草堂作]」과 「가을밤에 청업 스님이 거문고 타는 것을 들으며[秋夜聽業上人彈琴]」라는 제목의 오언율시 및 송(宋)나라 문인 소식(蘇軾)이 지은 「밀주를 지나며 조명숙과 교우공의 시에 차운함[過密州次韻趙明叔喬禹功]」이라는 칠언율시이다. (8) 신덕린(申德?)의 글씨는 당(唐)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가을에 홍부 등왕각에 올라 전별한 서문[秋日登洪府?王閣餞別序]」의 끝에 나오는 시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종과 최치원 ? 이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당송(唐宋)의 유명한 한시(漢詩)와 불경(佛經)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쓴 글씨이다. 서체도 엄정한 해서(楷書)는 물론 활달한 행서(行書)와 호기(豪氣)를 한껏 부린 초서(草書) 등 다양하게 실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동명적』은 신라의 김생(金生)을 위시하여 고려와 조선 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필적을 편집한 대표적인 법첩으로, 현재 비의 원석(原石)이 전하지 않는 필적도 많이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서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 작성자 : 김상환 ) (2첩) 『해동명적』은 신라 김생(金生)에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필적(筆跡)을 모아서 편집하여 석각(石刻)한 뒤 탁본(拓本)하여 간행한 서첩(書帖)이다. 현재 경주 안강 독락당(獨樂堂)에 있는 본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모두 2첩(帖)으로 성책(成冊)되어 있다. 간행 경위와 가치 등에 대해서는 전집 1첩의 해제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독락당본 전집 2첩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여기에는 고려시대의 이강(李岡)을 비롯하여 승려 혜근(慧勤)과 조선의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신장(申檣) 등 모두 11인의 필적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들이 쓴 글씨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1) 이강(李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한시를 적었는데, 자작시로 보인다. 그는 전집 1첩 마지막에 유묵이 실린 이암(李?)의 아들이다. (2) 승려 혜근(慧勤)의 글씨는 무주암(無住菴)을 억정장로(億政長老)를 위하여 지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3) 성석린(成石璘)의 글씨는 당(唐)나라 배적(裴迪)이 「최구를 보내며[送崔九]」라는 오언절구와 자작시 「장참의가 도관찰사로 전라도로 가는 것을 보내며[送張參議都觀登全羅道]」라는 칠언절구이다. (4) 박초(朴礎)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이다. 이하 작자 미상은 대체로 자작시로 추정된다. (5) 죽정(竹亭) 탁신(卓愼)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이다. (6) 권근(權近)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 한 수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지은 「서울로 돌아오며 섬서 십 리에서 지음[還京陜西十里作]」이라는 오언율시, 저광희(儲光羲)가 「왕십삼유와 함께 우연히 지음. 10수[同王十三維偶然作十首]」라는 제목으로 지은 세 번째 수와 첫 번째 시이다. 그리고 양촌(陽村)이 「이대제(李待制)가 이내상(李內相)이 왜선(倭扇)을 하사 받은 것을 축하하였으므로 그 시에 차운(次韻)함[次韻李待制賀李內相受賜倭扇]」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오언율시인데, 『양촌집(陽村集)』 제5권에 실려 있다. (7) 이첨(李詹)의 글씨는 작자 미상이다. (8)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글씨도 작자 미상이다. (9) 정총(鄭摠)의 글씨는 그의 『복재집 상(復齋集上)』에 「일본사신이 매죽 부채를 바치기에 바로 지신사 이중문에게 주었다. 이대제가 시를 지어 그 일을 읊었다. 차운하여 적어서 올림[日本使人 以梅竹?扇進獻 卽賜知申事李仲文 李待制作詩 詠其事 次韻寫呈]」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양촌이 지은 시와 같은 주제이다. (10) 민자복(閔自復)의 글씨도 작자 미상이다. (11) 하연(河演)의 글씨는 그의 『경재집(敬齋集)』 1권에 유묵(遺墨)이 모두 실려 있는데, 판본이 이지러져 약간의 출입이 있다. (12) 신장(申檣)의 글씨도 작자 미상이다. (13) 구정(龜亭) 남재(南在)의 글씨는 그의 『귀정유고 상(龜亭遺藁上)』에 「사람을 전송하며[送人]」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4) 마지막의 글씨는 무명씨(無名氏)가 1425년(세종7)에 쓴 국왕의 교서(敎書)이다. 이들 가운데도 물론 중국 문인의 시를 옮겨 적은 것도 있지만, 전집 1첩에 비하여 자작시를 적은 것이 대체로 많다. 마지막에 실린 무명씨는 세종의 교서를 썼고, 양촌 권근은 분량이 가장 많다. 『해동명적』은 신공제(申公濟, 1469~1536)가 간행한 이래 후대의 중각(重刻)으로 인하여 수록된 필적의 순서와 종류에 다소 출입이 생겼다. 그러므로 현재 보물로 지정된 독락당(獨樂堂)본 이외에도 경상도관찰사 최세절(崔世節)의 발문(跋文)이 실린 김민영씨 소장본과 이석우씨가 소수박물관에 기탁한 이석우본, 이외에도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書百堂)본과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臨淸閣)본 등 여러 첩이 전해온다. 이상은 모두 음각(陰刻)으로 되어 있으나, 이와는 별도로 양각(陽刻)으로 판각된 1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수장되어 있다. ( 작성자 : 김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4986

    김정희 종가 유물일괄 - 1.월성위 김한신 및 화순옹주 관련유물(金正喜 宗家 遺物 一括 - 月城尉 金漢藎 및 和順翁主 관련유물) / 조선 영조 원년(1725)~철종 2년(1851) / 26점 / 서예/서예 / 제주특별자치도 / 제주 제주시 / 선장
    예산의 추사 김정희 종가에 전해오던 서책과 필적 등이다. 그중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 1720∼1758) 관련유물이 11점, 「신해년책력」의 표지 글씨와 그 책에 붙어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1856)의 필적이 15점이다. 김한신은 김정희의 조상으로 1732년 영조의 둘째 따님 화순옹주(和順翁主 : 1720∼1758)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 월성위 김한신 관련유물 1. 「매헌난고(梅軒亂稿)」 김한신의 시집(詩集)으로 13∼34세의 것을 모은 것. 미간본(未刊本)이고 약 68수(首)가 실려 있다. 2. 「교사시말(郊舍始末)」 김한신의 부친 김흥경(金興慶)이 1747년 6월 동쪽 교외에 교사(郊舍)를 지은 것과 관련하여 김한신이 쓴 7월 12∼22일의 일지(日誌). 3. 「선부군행장(先府君家狀)」 월성위의 아들 김이주(金頤柱)가 기술한 김한신의 행장. 4. 영조어필(英祖御筆) 월성위김한신묘표(月城尉金漢藎墓表) 영조가 쓴 김한신묘표의 앞면 제서(題書). 5. 월성위김한신묘표(月城尉金漢藎墓表) 음기(陰記) 유척기(兪拓基 : 1691∼1767)가 기술한 김한신묘표 음기. 6. 영조어제(英祖御製) 화순옹주유제문(和順翁主諭祭文) 1758년 3월에 영조가 이세태(李世泰)를 시켜 화순옹주 영전에 바치게 한 제문. 7. 숙빈최씨시책문(淑嬪崔氏諡冊文) 1756년 영조의 모친 숙빈최씨에게 ‘휘적(徽德)’이란 시호를 올릴 때의 책문(冊文). 8. 영조어필(英祖御筆) 춘축(春祝) - 지본묵서 9. 영조어제어필(英祖御製御筆) 희우(喜雨) - 칠언절구 1수, 지본묵서 10. 영조어제어필(英祖御製御筆) 칠언절구 - 지본묵서 11. 어필첩(御筆帖) 숙종어필 賜領府事南九萬 영조어필 “然則下蕃鄕軍 先爲試取 三中者 當爲唱榜 分付待令” 장헌세자예필(莊獻世子睿筆) “知道 紛競二字 實是過當之言…” □ 「신해년책력(辛亥年冊曆)」의 김정희 필적 김정희가 사용했던 1851년(철종 2)의 「신해년책력」 앞표지에는 “신시칠정(辛豕桼正)”이란 제목과 “길상여의관(吉羊如意館)”이란 소장처가 김정희의 예서로 쓰여 있다.‘시(豕)’는 ‘해(亥)’의 의차이고 ‘칠정(桼正)’은 ‘칠정(七政)’의 음차이다. 길상(吉羊)의‘羊’은 ‘祥’의 원자(原字)이다. 이 책력에는 시고(詩稿)ㆍ서간(書簡)ㆍ제서(題書) 등 김정희의 필적 15점이 붙어 있다. 1. 행서 서간(書簡) 2. 전서 체당화갱(棣堂和羹) - ‘체당’과 관련된 서책(서첩)의 제첨(題籤). 3. 행서 사언찬(四言贊) - 집안에 전해오는 어떤 시초(詩鈔)를 찬미한 것. 4. 행초 오언시고(五言詩稿) - 오언절구 2수. 5. 행서 오언시고 6. 행서 오언시고 7. 해서 칠언시고(七言詩稿) - 칠언절구 1수. 8. 행초 서간 9. 행서 칠언시고 - 칠언절구 1수. 10. 행서 칠언시고 11. 행서 칠언시고 - 칠언절구 2수. 12. 해서 칠언시고(일부) 13. 해행 오언시고 - 오언율시 1수. 14. 행서 칠언시고 - 칠언절구 9수. 15. 초서 서간
    출처 : 문화재청
  • 474987

    김정희 종가 유물 - 2-2.순우장하승비임본(金正喜 宗家 遺物 - 淳于長夏承碑臨本) / 조선시대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88

    김정희 종가 유물 - 2-3.표지「을묘칠정」ㆍ「금칠십재」(金正喜 宗家 遺物 - 表紙「乙卯七正」「金七十齋」) / 조선 철종 6년(1855)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89

    김정희 종가 유물 - 2-4.척독초본(金正喜 宗家 遺物 - 尺牘鈔本) / 조선 헌종 13년(1847) / 1책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0

    김정희 종가 유물 - 2-5.표제「십삼년정미」(金正喜 宗家 遺物 - 表題「十三年丁未」) / 조선 헌종 13년(1847)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1

    장양수 홍패(張良守 紅牌) / 고려 희종 1년(1205)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장세도 / 경북 울진군 / 권자장
    고려 희종 1년(1205)에 진사시 병과(丙科)에 급제한 장량수에게 내린 급제 증서. 1점 필서본(筆書本)으로 누런색 마지(麻紙) 두루마리에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로 쓰여져 있다. 조선조 시대의 대과(大科) 급제자에게 내린 홍패(紅牌)와 같은 성격의 급제를 인정하는 교지(敎旨)이다. 앞 부분이 없어져서 완전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양식의 윤곽에 의하여 간명하게 정리된 조선조의 홍패교지의 서식과 구별 할 수 있다. 고시에 관여하였던 사람의 관직과 성이 열거되어 있는데, 보물 501호로 지정된 장계(張桂)의 진사시 급제 홍패와 서식은 같은 듯하나 서체는 다르다. 급제 홍패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울진(蔚珍) 울진장씨종중(蔚珍張氏宗中)에 소장되어 있다. 【 번역 해제 】 (1축) 고려 희종(熙宗) 1년(1205)에 발급한 장양수의 과거 급제 패지로서, 장양수가 병과(丙科)에 급제했음을 밝힌 본 내용과 말미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태자소부(太子少傅) 왕(王)을 위시한 5명의 관계 관직과 성(姓), 그리고 수결(手決)이 있다. 조선 시대의 급제 교지(敎旨)와는 양식이 다르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4992

    김정희 종가 유물 - 2-6.사공도시평첩(金正喜 宗家 遺物 - 司空圖詩評帖) / 조선 순조 26년(1826)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3

    김정희 종가 유물 - 2-7.표제「상지십년용집협흡」(金正喜 宗家 遺物 - 表題「上之十年龍集協洽」) / 조선 철종 10년(1859) / 1책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4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5

    김정희 종가 유물 - 2-9.소재첩(金正喜 宗家 遺物 - 蘇齋帖) / 조선시대 / 1책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6

    김정희 종가 유물 - 2-10.상지이십삼년계미(金正喜 宗家 遺物 - 上之二十三年癸未) / 조선 순조 23년(1823) / 1책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7

    김정희 종가 유물 - 3.서금반첩(金正喜 宗家 遺物 - 書金槃帖) / 조선시대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8

    김정희 종가 유물 - 6.예서대련(金正喜 宗家 遺物 - 隸書對聯) / 조선시대 / 1첩 / 서예/서예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절첩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종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유묵이다. 대부분 김정희가 쓴 것이지만, 김정희와 교유한 중국 학예계 인사의 필적도 간간이 눈에 띤다. 김정희의 필적은 자작시 초고(草稿)가 가장 많으며, 제발(題跋)ㆍ서문(序文)ㆍ간찰(簡札)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들 필적의 내용은 대부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대(漢代)의 예서(隸書) <하승비(夏承碑)>ㆍ<조전비(曹全碑)>와 당대(唐代)의 해서(楷書)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ㆍ<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임서(臨書)한 필적이 있어 김정희의 학서(學書)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 갔을 때 사귀던 시인 오숭량(吳嵩梁),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翁方綱), 화가 주학년(朱鶴年)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우의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식(劉栻)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품들은 연경(燕京) 학예계 인사와의 교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인사로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ㆍ초의선사(草衣禪師)와의 두터운 교분을 보여주는 작품, 제자 이상적(李尙迪)ㆍ김유근(金逌根) 등이 있어 김정희와 주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4999

    이황필적 -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李滉筆蹟 - 退陶先生筆法 및 退陶先生遺帖) / 조선 명종 9년(1554)∼명종 22년(1567) / 3첩 / 서예/서예 / 권기철 / 경기 안양시 / 첩장
    《퇴도선생필법》1첩은 1555년 6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에게 글씨본으로 써준 서첩이다. 이백(李白)ㆍ두보(杜甫) 등 당나라 시인들의 오언시와 칠언시 여러 수를 크고 작은 글자로 해서ㆍ행서ㆍ초서의 순서로 쓴 것이다. 제자에게 교본(敎本)으로 써준 필적이기 때문인지 필법이 엄정하다. 특히 앞쪽에 대자(大字)로 쓴 정자체 글씨는 당시 유행했던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서풍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필획이 근정하고 짜임이 중후하여 이황의 노년 서풍을 대표할 만하다. 이황의 글씨를 “방정하며 단아 중후하다(方正端重)”하다rh 하듯이 《퇴도선생필법》에서 그러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2첩은 이황이 제자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서간첩(書簡帖)이다. 한 권에 3통, 다른 한 권에 5통이 실려 있다. 연대는 1554~1567년 사이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0

    권주 종가 고문서 - 1.분깃문기(權柱 宗家 古文書 - 分衿文記) / 조선 중종 4년(1509) / 1건 / 민간문서/분재기류 / 국학진흥원 / 경북 안동시 / 낱장
    이 문서는 조선시대 문신인 권주(權柱, 1457~1505) 종손가에 소장된 권심처손씨분깃문기(權深妻孫氏分衿文記),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漢城府皇華坊所在家垈賣買文書)이다. 권주는 본관은 안동,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으로,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하였다고 한다.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하여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교살(絞殺)되었다. 저서로는 『화산선생일고(花山先生逸稿)』가 있다. 권심처손씨분깃문기는 조선 중종 4년(1509)경에 작성된 것으로, 권심의 처 손씨가 2남 2녀와 첩소생녀 및 장손에세 노비를 분깃한 문서이다.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기는, 연산군 4년(1498) 8월에 류자분(柳自汾)의 처 류씨가 권주에게 집과 산을 5승(升)목면 무명(無名)35동을 받고 매도하는 문기이다. 가사매매문기은 가사(家舍)를 매매하고서 이를 증빙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권주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두 문서는 조선전기 가사매매의 사정과 그 가격, 노비의 허여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서, 조선시대 매매 관행 또는 재산상속에 대한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분재기는 권주(權柱, 1457~1505) 종손가에 전하는 고문서로, 권주의 증조부인 권심(權深, ?~?)의 아내인 안인(安人) 손씨가 2남 2녀의 자식들과 첩실의 자식들에게 노비를 나누어 준 분재기(分財記)이다. 서두 부분이 훼손되어 문서의 작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권주의 생몰연대를 참고하면 세조 연간(1455∼1468)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문서에는 승훈랑 강릉 대도호부의 판관이었던 권심의 아내 손씨가 첫째 아들인 권항[통훈대부 영천군사(通訓大夫行知榮川郡事)], 둘째인 큰 딸[예조녹사(禮曹錄事) 배호장(裵孝長)의 처], 셋째 권종[진용부위 행호분위우부부사정(進勇副尉行虎賁衛右部副司正)], 넷째 딸[전예안현감(前禮安縣監) 권경행(權景行)의 처]과 첩실의 딸, 그리고 장손인 권이 등 6명의 몫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재산의 주인인 권심의 처 손씨의 도장을 찍고, 장자ㆍ장녀ㆍ차자ㆍ차녀 등 피상속인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으며, 증인은 승사랑(承事郞) 전영월훈도(前寧越訓導) 손씨이고 문서작성자는 유학(幼學) 손권(孫權)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재산의 주인인 손씨가 남편 쪽에서 전해오는 노비와 자신에게 전해오는 노비들을 각각에게 줄 노비의 이름과 나이를 자세히 기재하여, 첫째 아들 권항에게 노비 13명, 둘째 배효장의 처에게 노비 10명, 셋째 아들 권종에게 노비 11명, 넷째 권경행의 처에게 노비 10명, 첩실의 딸에게 노비 3명, 큰 손자 권이에게 노비 1명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나누어 준 노비들의 숫자를 통해 조선 초기 양반 가문의 분재가 대체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수결을 살펴보면, 노비를 증여한 당사자인 손씨 부인과 상속인의 수결과 도장이 있지만, 넷째인 권경행의 처는 자신이 직접 수결하지 않고 남편인 권경행이 수결하였고, 첩실 소생의 딸과 장손인 권이의 수결도 없다. 그리고 증인과 문서 작성자의 이름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어 조선 초기 재산분배와 상속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 작성자 : 정경훈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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