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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5001

    권주 종가 고문서 - 2.가대문기(權柱 宗家 古文書 - 家垈文記) / 조선 연산군 4년(1498) / 1건 / 민간문서/명문류 / 국학진흥원 / 경북 안동시 / 낱장
    이 문서는 조선시대 문신인 권주(權柱, 1457~1505) 종손가에 소장된 권심처손씨분깃문기(權深妻孫氏分衿文記),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漢城府皇華坊所在家垈賣買文書)이다. 권주는 본관은 안동,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으로,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하였다고 한다.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하여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교살(絞殺)되었다. 저서로는 『화산선생일고(花山先生逸稿)』가 있다. 권심처손씨분깃문기는 조선 중종 4년(1509)경에 작성된 것으로, 권심의 처 손씨가 2남 2녀와 첩소생녀 및 장손에세 노비를 분깃한 문서이다.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기는, 1498년(연산군 4) 8월에 류자분(柳自汾)의 처 류씨가 권주에게 집과 산을 5승(升)목면 무명(無名)35동을 받고 매도하는 문기이다. 가사매매문기은 가사(家舍)를 매매하고서 이를 증빙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권주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두 문서는 조선전기 가사매매의 사정과 그 가격, 노비의 허여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서, 조선시대 매매 관행 또는 재산상속에 대한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장) 가산을 분급하고 그 사실을 증빙하는 문서로서, 자손 대대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가족 간에 목면 35동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가산을 매매하는 것이나, 형제들이 서로 증인이 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 작성자 : 권경렬 )
    출처 : 문화재청
  • 475002

    상지은니묘법연화경(橡紙銀泥妙法蓮華經) / 고려 공민왕 22년(1373) / 7권 7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고려말 공민왕 22년(1373)에 허칠정(許七靖)등의 발원으로 상지(橡紙)에 은니(銀泥)로 쓴 고려사경 7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85호. 영암 도갑사 전래본. 일반적으로 법화경은 화엄경ㆍ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를 흔히는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saddharma-pundarika-sutra”로 이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법화경은 인도에서 결집된 이후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여러 구법승에 의해서 인도의 서북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전래의 초기 단계에는 현재와 같은 27품 내지 28품의 완전한 경전이 동시에 입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서역의 도래승이나 중국의 구법승에 의해 구득이 가능했던 소수품 단위로 전입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한역의 초기단계에는 소품 단위로 역경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를 지나 불교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초기의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과 같은 서역 귀화인에 의한 역경에서 5세기 이후로 법현(法顯) 등 중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역경작업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법화경 또한 이러한 전래 및 역경과정을 거쳐서 동아시아에 널리 유통되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3종의 법화경 역본 가운데 406년에 구마라집에 의해서 번역된 한역본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다. 구마라집은 기원후 350년에 중앙아시아의 구차(庫車=龜玆)에서 태어나 409년에 중국의 장안(長安)에서 열반하였다. 그의 부친은 본래 인도사람인 구마라염(鳩摩羅炎)으로 명문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출가후 구도차 구차에 와서 왕의 누이와 결혼하여 구마라집을 낳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구마라(鳩摩羅, 夫)+집(什, 母)’이라 이름하였으며, 이를 약칭하여 ‘나집(羅什)’이라 하고 의역하여 ‘동수(童壽)’로 이름하기도 한다. 그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한 이후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아서 어엿한 비구(比丘)가 되었다. 그후 전진(前秦)을 이은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초빙하여 홍시 3년(401)에 구차를 떠난지 10여년만에 비로소 중국 장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에 요흥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나집(羅什)은 장안의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불교경전의 번역에 몰두하여 35부 294권을 완역했다. 그의 많은 역경 중에는 406년에 번역된 법화경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의 고려사경은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6년에 번역한 28품본을 저본으로 사성하였다. 현존하는 수(隋)ㆍ당대(唐代)의 돈황본 (敦煌本) 사경(寫經)은 거의 대부분이 이 역본을 저본으로 사경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경 또한 구마라집 역본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류에는 대장경에 편입된 2종의 역본(譯本)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이 28품(品) 7권본(卷本)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역본(譯本)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존본은 대부분 전 7권본(全 7卷本)으로 순천 송광사에 남아 있는 경패(經牌)와 같은 형식이며 그 안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란 서명이 쓰여져 있다. 제1첩의 권두(卷頭)에는 흔히 보이는 변상화는 없으며, 바로 도선(道宣)이 찬한 홍전서(弘傳序)가 수록되어 있고, 서문 다음에 비로소 표제와 동일한 권두서명과 구마라집의 역자표시가 보이고, 다음 행에 제1품인 서품(序品)의 품제(品題)가 기입되어 있다. 변란은 상하에 금니로 쌍선을 굵게 긋고, 계선은 가늘게 그었으며, 그 사이에 경문을 은니로 사성하였다. 경문은 한 행에 17자씩 배자하여 쓰여져 있으며, 서체는 고려의 전형적인 사경체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31.0cm~31.5cm×11.5cm이며, 사경면(寫經面)의 상하 변고는 19.2cm~20.0cm이다. 그리고 7첩의 말미에는 허칠정(許七靖)이 쓴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끝에는 “홍무계축(洪武癸丑, 1373) 사월사일경지(四月四日敬誌)”라는 연기(年紀)가 있어 이 사경이 고려 공민왕 22년(1373)에 사성(寫成)되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첩(帖)1, 4, 7의 사경면 이면에는 “당사유전(堂司留傳)” 또는 “영암 월출산 도갑사(靈巖 月出山 道岬寺)”라는 기록이 기재되어 있어, 이 사경이 제작된 이후 영암 도갑사에 유전되었던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고려상지은니법화사경(高麗橡紙銀泥法華寫經)’은 28품이 7첩으로 온전히 갖추어 있어, 비록 각 첩의 권두에 변상화가 빠져 있어 아쉬움이 있으나 고려사경 전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전적문화재로 평가되어 국보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3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 / 조선 세종 15년(1433) 추정 / 3책 / 목판본/관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저명한 유학자인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의 『오경천견록』 중의 일부로 세종 15년(1433) 무렵에 간행된 목판본(木板本)이다. 권근은 공민왕 17(1368)년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고 조선의 개국에 공이 커서 개국공신에 봉해진 조선 초기의 유학대자(儒學大者)다. 그는 문집(文集)인 『양촌집(陽村集)』과 『입학도설(入學圖說)』 외에도 특히 일찍부터 오경(五經)을 깊이 연구하고 경(經)의 요의(要義)와 의난점(疑難點)을 해설(解說)․분석(分析)하여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한 바 있었는데, 『주역천견록』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세종 15(1433)년 2월 계사조(癸巳條)에 성균사예(成均司藝) 김반(金泮)이 『역(易)』․『시(詩)』․『서(書)』․『춘추(春秋)』 등의 천견록을 개간(開刊)할 것을 건의(建議)하자 왕이 예조(禮曹)에 회부하여 검토하게 하였던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세종 때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본서는 도합 3책으로 제1책(28장)의 내용은 ‘역설계사(易說繫辭)’이고 제2책(19장)의 내용은 ‘역설상경(易說上經)’이며, 제3책(19장)의 내용은 ‘역설하경(易說下經)’이다. 원래 1책이었던 것을 소장자가 3책으로 나눈 듯하다. 『주역천견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 경전(經典) 해설서의 하나로 한국 유학사(儒學史)에 경전을 해석한 전문서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며, 권근의 성리학(性理學) 사상의 연구에는 물론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성리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4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 조선 성종년간(1470~1494) / 1책 / 목판본/사간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는 고가요(古歌謠)와 악보(樂譜)가 함께 수록된 향악보(鄕樂譜)이다. 향악(鄕樂)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궁중 음악의 한 갈래로 삼국시대에 들어온 당나라 음악인 당악(唐樂)과 구별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종 14년(1519) 2월 병인조(丙寅朝)에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 이장곤(李長坤)이 “세종조에 박연(朴堧)이 악률(樂律)에 정(精)하였으며 성종조에 성현(成俔)이 악률에 아주 정하여 악보(樂譜)가 약간 이루어졌다”고 진언(進言)한 것으로 미루어 본서는 성종조(成宗朝)를 전후하여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간행은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실현된 듯하다. 악보의 격식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있는 아악보(雅樂譜)와 같으며, 악장을 비롯한 민요, 창작가사 등의 악보(樂譜)와 함께 가사(歌詞) 26장(章)이 수록되어 있다. 맨 처음의 악곡(樂曲)인 <납씨가(納氏歌)>의 제목 아래에 “가사 지록제일장 기여현가사책 타악방차(歌詞’ 只錄第一章’ 其餘見歌詞冊’ 他樂倣此’ )”라 하여 제1장의 가사만 수록하고 있는데 전편(全篇)의 가사가 수록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로 본다면 당시 <가사책(歌詞冊)>이 따로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오늘날 전해지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합 26편 가운데서 <상저가>, <유구곡> 등 17편은 다른 기록에서 제목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의 가요들이다. 새로이 발견된 17편 중 <군마대왕>과 <구천> 및 <별대왕>은 ‘리로노런나 로리라 리로런나’와 같이 가사가 아닌 여음(餘音)만이 기록된 것도 있다. 이들을 통해 오늘날 국악계(國樂界)에서 거의 잊고 있었던 고악(古樂)들에 관하여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그 전문(全文)이 수록되지는 못했으나 가사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어 국문학, 민속학, 국악 등의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5

    자치통감강목 권19의하(資治通鑑綱目 卷十九之下) / 조선 세종 20년(1438)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 주희가 사마광이 지은『자치통감』에 대해, 춘추(春秋)체재에 따라 사실(史實)에 관하여 큰 제목으로 강(綱)을 세우고 그 사실의 기록을 목(目)으로 구별하여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집현전 문신들에게 명하여 훈의를 만들게 하는 한편, 훈의가 완성되자 총 권수 139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세종 20년(1438)에 간인(刊印)해 냈다. 이 때에 강(綱)에 사용한 큰 글자는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글씨를 써서 주조한 병진자(丙辰字)이며, 중간글자와 작은글자는 갑인자(甲寅字)로 찍어 인출하였다. 본서는 총 139권 가운데 권 19하(下)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뒤에 간행된 책들은 병진자의 원래 활자를 쓴 것이 없고 거의 목판본으로 바뀌었는데, 이 책만이 유일한 활자본이다. 책 첫장에는 ‘교정(校正)’, 인(印)이 있으며, 첫 장 아래와 맨 끝장에 ‘옥연묵장(玉淵墨藏)‘이라는 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 안동에 있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서재인 옥연재에 소장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제(表題)는 뒷장은 없어진 것을 개장(改裝)하였고, 앞장은 원형대로 보존되었는데, 표제는 따로 인쇄한 종이를 붙여서 4주(周)의 쌍선(雙線)을 긋고「통감강목(通鑑綱目)」이라고 쓴 권수(卷數)의 표시는 묵서(墨書)로 되어 있다. 조선의 인쇄문화와 유교문화를 살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6

    윤봉길의사유품-1.선서문(尹奉吉義士 遺品 宣誓文) / 일제강점기(1932) / 1건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보물 제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2점 중 하나이다. 윤봉길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에는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22세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23세 되던 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29일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는 상해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 24세에 사형을 당하였다. 윤봉길의사선서문(尹奉吉義士宣誓文)은 대한민국 14년(1932) 4월 26일에 김구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하면서 윤봉길의사가 직접 쓴 것이다.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宣誓文 나는 赤誠으로서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여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어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大韓民國 14年 4月 26日 宣誓人 尹奉吉 韓人愛國團 앞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선서문은 윤봉길의 거사 직전에 거사를 준비하며 쓰여진 유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주도로 이루어진 독립운동의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7

    윤봉길의사 유품-2.윤봉길의사 이력서 및 유서(尹奉吉義士 遺品 尹奉吉義士 履歷書 및 遺書) / 일제강점기(1932) / 1책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이 유물은 보물 제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윤봉길의사 선언서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이력서와 유서를 쓰게 된 것은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윤봉길에게 거사를 앞두고 자필로 된 경력을 써 달라 요구하여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봉길은 여기에 가족사항과 약력뿐만 아니라 거사 후에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유서도 함께 남겼다. 이력서는 먼저 본적과 부모의 이름을 적은 것부터 시작된다. 본적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번이고, 다음으로 본관 파평, 부 윤황(尹璜), 모 김원상(金元祥), 애국단원 봉길 무신년 5월 22일생(서기 1901년)의 순으로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 그리고 7세 이후의 자신의 일생에 대하여 써 내려갔다. 여기에는 자신이 성장하며 농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과정과 민족의 고통에 대하여 눈뜨게 되는 과정,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면서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심정을 적었으며 상해에 이르러 조국의 광복을 위해 결심을 다지며 이 글을 통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유물은 윤봉길이 직접 쓴 자필 이력서란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며, 거사 직전에 작성된 유품이라는 점, 또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거사직전에 맹세를 적은 윤봉길의 선서문에 비해 윤봉길 개인의 감정과 의식 등이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윤봉길 이란 한 인물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8

    윤봉길의사유품-6.일기(尹奉吉義士 遺品 日記) / 일제강점기(1929) / 1책 / 필사본/일기류 / 윤주웅 / 충남 예산군 / 선장
    보물 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현재 충의사에 보관중인 윤봉길 의사의 친필 일기이다. 이 문서는 1929년 1월1일(음)부터 1930년 1월 19일까지 1년여간의 일기로, 윤봉길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자필묵서(自筆墨書)한 것이다. 각각의 날짜 위에는 요일을 표시하고, 그날의 일상을 적었다. 여기에는 아픈 자식을 걱정하는 개인사도 있으며, 야학을 시작하고 월진회를 창립하는 등의 기록이 있고, 충무공 이순신의 일생사를 요약하거나 당시에 벌어진 국내외 주요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1월 1일의 첫 일기에서 토정비결을 봤다는 내용이 있는데, '입산금호사생난신겸'(入山檎虎死生難辛兼:호랑이를 사로잡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니 죽고 삶이 어렵고 어렵구나)라는 괘가 나왔다는 글이 의미심장하다. 또한 활발한 농촌운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답답한 심정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일본인에게 대항하는 조선인의 활동과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조선인에 대한 소식을 적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일기는 윤봉길의 자필 기록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고, 농촌계몽운동기의 활동상 및 윤봉길의 의식적 성장과정이 드러나고 있어 주목된다. 윤봉길은 1930년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09

    윤봉길의사유품-7.월진회창립취지서(尹奉吉義士 遺品 月進會創立趣旨書) / 일제강점기 (1929) / 1책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윤주웅 / 충남 예산군 / 선장
    보물 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현재 충의사에 보관중인 윤봉길의사 친필 월진회창립취지서(月進會創立趣旨書)이다. 이 자료는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창립하면서 쓴 자필묵서(自筆墨書)이다. 이 취지서는 윤봉길에 의해 1930년 3월 28일에 월진회(月進會)를 창립하면서 낭독했던 귀중한 유물이다. 윤봉길은 3년간 예산에서 목바리 농민야학을 이끌었고, 1929년 4월 29일에 농민운동을 총정리하는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때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지부나 지사와 같은 소모임이 아닌, 주체적인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월진회 창립에 동의하였다. ‘월진회’란 명칭은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월진회 창립과 함께 이 취지서가 낭독되었다고 한다. 창립 초기에는 회원이 40명이었으나 점차 마을 주민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회원은 자신이 직접 벌어들인 돈을 매달 10전씩을 납부했다. 취지서의 주요 내용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자는 것으로 즉, 생존경쟁의 시대에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근검절약하고, 의지를 모아 끝까지 해내자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취지서에 이어 월진회 회칙(會則)과 월진회원의 실천요강(實踐要綱), 월진회 금언(金言), 월진회가(月進會歌)를 수록하였다. 월진회 관련 문서는 윤봉길이 거사를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섰던 시기의 주요 자료로 윤봉길의 입장과 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0

    윤봉길의사유품-8.농민독본(尹奉吉義士 遺品 農民讀本) / 일제강점기(1927) / 2책 / 필사본/사본류 / 윤주웅 / 충남 예산군 / 선장
    이 자료는 보물 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충남 예산 충의사에 보관중이다. 이 자료는 윤봉길이 1927년 스무살 때 야학 교재용으로 편찬한 농민독본 3권중 2권과 3권의 일부이다. 윤봉길은 스무세살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길에 오를 때까지 고향 충남 예산에서 4년여 동안 농촌개혁 및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야학 교재용으로 《농민독본》을 직접 쓰고, 면사무소 등사기로 프린트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제2권은 <계몽편>으로 현재 8과까지만 보존되어 있다. 제3권은 <농민의 앞길>이란 제목으로, 농촌 개혁의 방향과 농민의 당면 과제가 제시되어 있으며, 7과까지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농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 벅찬 꿈, 농민과 근로자 중심의 이상국가 건설, 농민 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등 농민의 나아갈 길이 제시되어 있다. 윤봉길은 이 《농민독본》을 통하여 농촌의 부흥을 한차원 높은 계몽운동과 민족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 자료는 윤봉길이 중국 망명길에 오르기 전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특히 1929년의 일기 및 월진회 관련 문서들과 함께 윤봉길의 농촌부흥운동기의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1

    윤봉길의사유품-10.편지(尹奉吉義士 遺品 便紙) / 일제강점기(1931∼1932) / 6건 / 간독류/간독 / 윤주웅 / 충남 예산군 / 낱장
    보물 제568호로 일괄 지정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유품 13종 68점 중 하나로, 예산 충의사에 보관 중이다. 이 편지는 윤봉길이 중국 청도에서 고향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로, ① 어린 아들 모순에게. ② 사랑스러운 영석(永錫)아, ③ 어머님전상서, ④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올림, ⑤ 자식사랑하시는 어머니에게, ⑥ 사랑에 넘치는 남의(南義, 동생]에게 등이다. 편지의 내용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투 상황을 알리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어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특히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의 뜻을 알리며 부디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자신의 신념은 변하지 않음을, 그리고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이 편지들은 당시의 윤봉길의 굳은 신념을 알 수 있고, 중국으로 떠나기까지의 과정이 나타나며, 또한 인간 윤봉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2

    윤봉길의사유품-1.월진회통장(尹奉吉義士 遺品 - 月進會通帳) / 일제강점기(1929) / 1건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낱장
    월진회통장(月進會通帳)은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義士)의 유품(遺品) 중 하나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창립하고 회(會)에서 발급한 그의 통장(通帳)이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월진회는 1929년 음력 2월 18일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윤봉길의 주도로 창립된 구국계몽단체(救國啓蒙團體)로 본 통장은 윤봉길 명의의 원본이다. 통장의 내용은 ‘월진회원지장(月進會員之章)’이라는 기록과 더불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5년간 연도별ㆍ월별로 확인의 인장(印章)을 찍을 수 있도록 격자안(格子眼)이 마련되어 있다. 주요 세부항목으로는 ‘진합태산(塵合泰山, 티끌 모아 태산) 수적성해(水滴成海, 물방울 모여 바다)’라는 저축구호와 ‘저축금액(貯蓄金額) 십전(拾錢)’ 및 ‘월진회금언(月進會金言)’ 등이 있다. 격자안에 ‘영(領)’이라는 영수(領收) 인장이 1929년 6월부터 12월까지 7개월에 걸쳐 날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윤봉길의 저축액은 70전이었던 듯하다. 본 통장은 1매에 지나지 않으나 월진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역사 및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3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新羅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一~十, 四十四~五十) / 통일신라 경덕왕 13년(754)~경덕왕 14년(755) / 1축 / 필사본/사경 / 리움미술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신라 경덕왕 14년(755)에 백지에 먹으로 쓴 사경이다. 이 사경은 당의 보차난다(寶叉難陀)가 699년에 한역한 주본 화엄경 권1∼10과 권 44∼50, 그리고 변상도 2장이 함께 전래되어, 국보 196호로 지정되었고 호암미술관 소장이다. 이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당나라 보차난타가 695∼699년에 번역한 『80화엄경』의 내용이다. 80화엄은 60화엄에 비해서 문장이 아름답고 그 내용 또한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다. 화엄경은 범어로 “Buddha-avatamsaka-mahvaipuly-sutra”인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부처님의 진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경전은 부처님의 정각(正覺)내용을 표현한 경정인데, 경명(經名)인 ‘대방광불화엄경’의 ‘대(大)’란 드넓어 그 끝이 없음을 뜻하고, ‘방(方)’ 이란 스스로 정법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며, ‘광(廣)’은 곧 본체를 드러내 두루 함을 일컬음이고, ‘불(佛)’은 현묘(玄妙) 화엄법계(華嚴法界)의 이치를 깨달은 이를 가리킴이며, ‘화(華)’란 공덕을 닦는 만행에 비유함이요, ‘엄(嚴)’은 법으로 장엄하여 인격을 완성함을 뜻하며, ‘경(經)’이란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이니, 그윽하고 응결된 오묘한 뜻을 꿰었으며, 한량없는 바다같은 대중을 포섭하여 영원한 법규를 지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축(권 1~10)은 상하단변(上下單變)에 상하간(上下間) 20.3cm이고, 전체길이는 1982.2cm이다. 2축(숸44~50)은 1축과 모든 조건이 대체로 동일하다. 이 사경은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신역(新譯) 화엄경(華嚴經)으로 불교 학(佛敎學)과 불교문화 연구에 귀중한 경전이며, 한역(漢譯)했던 당시에 유행했던 측천무후자(測天無後字)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 측천무후자 연구에도 획기적인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4

    윤봉길의사유품-2.월진회기(尹奉吉義士 遺品 - 月進會旗) / 일제강점기(1929) / 1매 / 기타/기타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낱장
    월진회기(月進會旗)는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義士)의 유품(遺品) 중 하나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창립하고 회(會)의 상징으로 사용하던 회기(會旗)이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월진회는 1929년 음력 2월 18일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윤봉길의 주도로 창립된 구국계몽단체(救國啓蒙團體)로 당시 월진회에서는 회를 상징하는 회기(會旗)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듯하다. 본 월진회기의 바탕색인 흰색은 백의민족의 표상이고 가로로 이어지는 청색의 세 줄은 삼천리 금수강산(三千里 錦繡江山)을 의미하며 중앙의 무궁화(無窮花)는 이름 그대로 영원히 번영하며 무궁(無窮)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본 월진회기는 1매에 지나지 않으나 월진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역사 및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5

    윤봉길의사유품-3.편지(尹奉吉義士 遺品 - 便紙) / 일제강점기(1931) / 1건 / 간독류/간독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낱장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편지(便紙)는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義士)의 유품(遺品) 중 하나로 1931년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고향에 있는 맏아들 모순(模淳)에게 보낸 편지이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편지(便紙)의 봉투에 나타나는 발신자의 주소는 ‘상해(上海)’로 기록되어 있고 발신자의 성명은 ‘윤봉길(尹奉吉) 후서(候書)’로 기록되어 있으며, 수신자의 주소는 ‘조선(朝鮮) 충남(忠南)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梁里) 일삼구번(一三九番)’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신자는 ‘윤영석(尹永錫) 앞’으로 기록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아들 ‘모순(模淳)에게’로 시작하여 "모순아! 재롱 많이 하고 사랑 많이 받아라•••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잠시적 역행(逆行)이지 하년(何年) 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 그리고도 모순이는 눈물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불변성의 의지력으로 훈련과 교양을 시킬 어머니가 있지 아니하냐? 어머니 교양으로 성공자를 보건대 서양으로 만고영웅 나폴레웅과 고명(高名)의 발명가 에디슨,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다. 훗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고 기록하고 있다. 본 편지는 1매에 지나지 않으나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6

    윤봉길의사유품-10-1.옥타(시집)(尹奉吉義士 遺品 - 玉唾(詩集))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7

    윤봉길의사유품-10-2.한시집(尹奉吉義士 遺品 - 漢詩集)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8

    윤봉길의사유품-10-3.순운대편(서간문)(尹奉吉義士 遺品 - 郇雲大篇)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19

    윤봉길의사유품-10-4. 염락(시집)(尹奉吉義士 遺品 - 濂洛) / 일제강점기(1922)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0

    윤봉길의사유품-10-5. 임추(시집)(尹奉吉義士 遺品 - 壬椎)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1

    윤봉길의사유품-10-6.홀기(예문집)(尹奉吉義士 遺品 - 笏記) / 일제강점기 / 1책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2

    윤봉길의사유품-10-7.명추(시집)(尹奉吉義士 遺品 - 鳴椎)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3

    윤봉길의사유품-10-8.명심보감(尹奉吉義士 遺品 - 明心寶鑑) / 일제강점기 / 1책 / 필사본/사본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선장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유품(遺品)으로는 《옥타(玉唾)》 필사본 1책(25장), 《한시집(漢詩集)》 필사본 1책(29장), 《순운대편(郇雲大篇)》 필사본 1책(24장), 《염락(濂洛)》 필사본 1책(24장), 《임추(壬椎)》 필사본 1책(16장), 《홀기(笏記)》 필사본 1책(36장), 《명추(鳴椎)》 필사본 1책(2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필사본 1책(33장) 등 8책이 있다. 본 유물들은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4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大方廣佛華嚴經 晋本 卷三十七) / 고려 숙종 3년(1098) / 1권 1축 / 목판본/사찰본 / 아단문고 / 서울 중구 / 권자장
    동진의 안제(安帝, 418~420) 때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가 전체 34품을 60권으로 번역한 진본(晉本) 화엄경을 저본으로 고려 초기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며 목판본(고려본)이다. 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 중에 하나이며,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국보 제202호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37 (大方廣佛華嚴經 晋本 卷 三十七)은 권자본으로 되어 있으나, 권수에 별도의 표지는 떨어져 나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권수의 변상도 역시 보이지 않고 바로 권두제(卷頭題)가 보인다. 권두서명은 약간의 결실이 있으나, 권말제에 의해 <대방광불화엄경권제삼십칠(大方廣佛華嚴經卷第三十七)>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권두제 아래의 함차(函次) 위치에 ‘황(黃)’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되고 있다. 다음 행에 ‘동진천축삼장불타발타라 역(東晋天竺三藏佛馱跋陀羅 譯)’으로 기재되어 있어, 이 판본이 바로 진본(晉本)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다음 행에 ‘이세간품제삼십삼지이(離世間品第三十三之二)’이란 품제(品題)가 기재되어 있어, 또한 <이세간품>의 두 번째 권에 해당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권두사항은 가장 전형적인 서명기재 방식을 보이고 있다.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권자나 접장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상하단변(上下單邊)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간(上下間)의 높이는 23.7cm이다. 전체의 크기 29.5cm×768.3cm에 이르며, 한 장은 24행으로 매 행은 17자로 배자되어 있다. 판수제(板首題)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책의 권말(卷末)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간행연대와 간행연기(刊行緣記)가 밝혀져 있다. 발원문은 ‘고려합천호장동정이필선(高麗陜川戶長同正李必先) 상보사은하자삼유지원시재조판화엄경제삼십칠권(上報四恩下滋三有之願施財雕板花嚴經第三十七卷) 시수창사년오월일기( 時壽昌四年五月日記)’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의해 이 책은 고려 숙종 3(1098)년에 합천(陜川) 이필선(李必先)의 시재(施財)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단목(栴檀木)으로 만든 권축(卷軸) 양끝에는 홍칠(紅漆)이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자체는 예리하게 새겨져 있는데,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석가된 화엄사의 화엄석경의 서체를 방불케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필선의 개인적인 시재에 의해 간행된 사간본(私刊本)임에도 불구하고 권두제 아래의 함차 위치에 ‘황(黃)’자가 보이고 있어 의견이 분분한 판본이다. 더욱이 같은 해에 해인사에서 성헌(成軒)이 시주하여 판각한 목판이 해인사의 사간잡판(寺刊雜板)에 들어 있고, 또한 숙종연간에 지리산 증륜사(拯倫寺)에서 주지 양춘(輰春)이 주관하여 간행한 판본도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초조본 대장경의 간행사업도 완료된 시점으로 불서간행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책의 권두에 나타난 ‘황(黃)’자가 지닌 의미는 보다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나, 잠정적으로 각수(刻手)의 성명 중에 한 글자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사간잡판이랑 여러 사찰의 판목을 후에 수한한 것이므로 황(黃)자 함차가 있다 하여도 큰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202호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37 (大方廣佛華嚴經 晋本 卷 三十七)은 권말의 간기(刊記)로 연대가 확인됨에 따라, 여타의 화엄경 판본을 감정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판본으로, 고려시대 사간본(私刊本)과 대장경에 수록된 판본류와의 비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5

    윤봉길의사유품-11.위친계취지서(尹奉吉義士 遺品 - 爲親契趣旨書) / 일제강점기(1929) / 1건 / 근대문서류/근대문서류 / 충의사 / 충남 예산군 / 낱장
    「위친계취지서(爲親稧趣旨書)」는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義士)의 유품(遺品) 중 하나로 1929년에 위친계(爲親稧)를 조직할 때에 작성된 취지서(趣旨書)이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 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겸하여 상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2월 18일 오오사까(大阪)의 위수형무소에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위친계는 1929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윤봉길의 주도로 창립된 계조직(稧組織)으로 연로한 부모를 둔 사람들이 모여 매달 또는 철마다 돈이나 곡식을 모았다가 상을 당하거나 경사가 있을 때 서로 도우며 친목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위친계의 장소는 덕산면 시량리 이태경(李泰敬) 방(方)이고 시일은 음력 10월 10일 오전 10시이며, 출자금 5원(五圓)과 인장(印章)을 지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정종갑(鄭鍾甲), 윤순의(尹舜儀), 이태경(李泰敬), 윤봉길(尹奉吉), 황복성(黃卜成), 이산옥(李山玉) 등이 발기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계원으로는 이정룡(李定龍), 최일성(崔一聲), 이성복(李成福), 서준석(徐畯錫)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위친계취지서(爲親稧趣旨書)」는 1매에 지나지 않으나 위친계를 비롯하여 윤봉길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6

    안중근의사유묵 - 연년세세화상사세세연년인부동(安重根義士遺墨 -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3, <당(唐) 유희이(劉希夷) 시구>, 비단바탕 109.8cm×41.0cm, 삼성미술관 소장. 년년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해마다 꽃은 서로 비슷하나,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
    출처 : 문화재청
  • 475027

    안중근의사유묵 - 견리사의견위수명(安重根義士遺墨 - 見利思義見危授命)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동아대학교박물관 / 부산 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6, <「논어」 구절>, 종이바탕 140.8cm×32.5cm, 동아대박물관 소장.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목숨을 준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8

    안중근의사유묵 - 용공난용연포기재(安重根義士遺墨 - 庸工難用連抱奇材)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7, <사언구(四言句)>, 종이바탕 137.4cm×3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용공난용연포기재(庸工難用 連抱奇材). 서투른 솜씨는 쓰기 어려우나, 아름되는 나무는 뛰어난 재목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29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9, <오언절구>, 종이바탕 138.0cm×32.7cm, 홍익대박물관 소장. 오로봉위필(五老峯爲筆) 청천일장지(靑天一丈紙) 삼상작연지(三湘作硯池) 사아복중시(寫我腹中詩). 오로봉을 붓으로 삼고, 푸른 하늘을 한 길 종이로 삼으며, 삼상을 벼룻물로 삼아서, 나의 배속의 시를 쓰리라.
    출처 : 문화재청
  • 475030

    안중근의사유묵 -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安重根義士遺墨 - 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10, <「논어」 구절>, 종이바탕 133.6×30.3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知松柏之不凋). 해가 춥고 난 뒤에야 소나무ㆍ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1

    안중근의사유묵 - 박학어문약지이례(安重根義士遺墨 - 博學於文約之以禮)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13, <「논어」 구절>, 종이바탕 137.9cm×33.0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2

    안중근의사유묵 - 인지당(安重根義士遺墨 - 仁智堂)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17, <인지당 편액>, 종이바탕 32.7cm×65.2cm, 삼성미술관 소장. 인지당(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움의 집.
    출처 : 문화재청
  • 475033

    안중근의사유묵 - 극락(安重根義士遺墨 - 極樂)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19, <극락 편액>, 종이바탕 33.2cm×68.2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극락(極樂). 지극히 즐거운 곳.
    출처 : 문화재청
  • 475034

    안중근의사유묵 -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安重根義士遺墨 -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단국대학교 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21, <사언구(四言句)>, 종이바탕 100.3cm×34.2cm, 단국대박물관 소장. 욕보동양(欲保東洋) 선개정략(先改政畧) 시과실기(時過失機) 추회하급(追悔何及). 동양을 보전하려 한다면 먼저 정략[침략정책]을 고쳐라. 때가 지나서 기회를 잃으면 나중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출처 : 문화재청
  • 47503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 / 고려시대 / 1권 1축 / 목판본/사찰본 / 조병순 / 서울 중구 / 권자장
    이 책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주본(周本) 『화엄경(華嚴經)』의 고려시대 목판본이다. 원래 총 80권 중 권 6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간행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조(再雕)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할 때에 교정(校正)을 맡았던 승(僧) 수기(守其)의 장서인(藏書印)이 「해동사문수기장서(海東沙門守其藏書)」라고 묵인(墨印)되어 있어 승려 수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권말(卷末)에 「담양군호장동정전순미역출모리왕원지성(潭陽郡戶長同正田洵美亦出母利往願之成)」이라고 쓴 지기(識記)가 있으므로 담양에 사는 전순미(田洵美)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찍어낸 것이다. 불상 안에 보존되기도 하다가 다시 나온 것이며,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크기는 세로 30.8㎝, 가로 649.2㎝이다. 또 해인사 대장경본과 글씨체와 새김이 일치하는데, 해인사대장경에 포함된 주본 『화엄경』을 보고 다시 새겨 12세기경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6

    안중근의사유묵 - 국가안위노심초사(安重根義士遺墨 - 國家安危勞心焦思)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22, <사언구(四言句)>, 비단바탕 149.3cm×38.3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에 마음을 쓰고 애를 태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7

    안중근의사유묵 - 위국헌신군인본분(安重根義士遺墨 - 爲國獻身軍人本分)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23, <사언구(四言句)>, 비단바탕 136.7cm×33.2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이 지켜야 할 본분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8

    안중근의사유묵 - 천여불수반수기앙이(安重根義士遺墨 - 天與不受反受其殃耳)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강윤호 / 제주 제주시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24, <「사기(史記)」 구절>, 종이바탕 135.0cm×32.1cm, 강윤호 소장. 천여불수 반수기앙이(天與不受 反受其殃耳).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39

    안중근의사유묵 -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安重根義士遺墨 - 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 / 일제강점기(1910) / 1점 / 서예/서예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910년 2월과 3월에 옥중에서 쓴 유묵이다. 글씨 왼쪽에 “경술년 이월(또는 삼월)에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이라 적은 뒤 손바닥을 찍었다.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의 교훈적인 것과 일본에 대해 경계한 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글자 수가 적으면서도 의미가 명쾌하고 교훈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의사를 공소했던 검찰관이나 여순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 569-25, <「논어」 구절>, 종이바탕 137.1cm×34.2cm,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 만방가행(蠻邦可行). 말이 충성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독실하고 공경되면, 오랑캐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40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順天 松廣寺 高麗古文書) / 고려 희종 6년(1210)~고려 충렬왕 7년(1281) / 일괄(1축,1건) / 사찰문서/기문류 / 송광사성보박물관 / 전남 순천시 / 권자장
    송광사에 보관되고 있는 고려시대 문서로 보물 제572호로 지정된 것은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와 수선사에 노비를 기탁한 사실을 공증한 문서이다. 수선사(修禪社)는 송광사의 옛 이름이다. 송광사가 신라말기 혜린(慧隣)에 의하여 처음 창건되었을 때에는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이때에는 승려수가 30~40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고,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에 의한 중창의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것을 50여 년이 지난 후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옴으로써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 희종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리면서 이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수선사로 불리며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 왔다. 그 후 180여 년동안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려지게 되었다. ①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58.3cm×59.5cm 형지기란 사실의 전말을 기록하는 문서를 뜻한다. 수선사형지기는 고종 8년(1221)부터 1226년 사이의 사천대(司天臺)의 관리가 수선사의 연혁과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그대로 기록한 문서이다. 내용은 수선사(修禪社)의 창건연혁(創建沿革) 및 가람(伽藍)의 배치 상황,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비명, 마지막에 승려수(僧侶數) 및 법석(法席)의 종류 및 수조(收租) 석수(石數), 시납(施納)한 전답의 결부 수, 염전의 곳 수, 노비 수효 등 사찰의 재정규모를 기재하고 끝에는 문서를 대조ㆍ확인한 관원의 관직(官職)ㆍ성(姓)을 쓰고 수결(手決)을 하였다. 이두가 쓰여 국문학사 연구에 주요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사서에서 보기 어려운 촌(村)과 부곡(部曲) 등이 명시되어 있어 당시 지방 사회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건물의 각 부분에 대한 용어라든가 송광사의 건물배치, 사찰운영 등 매우 다양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학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문서이다. ② 노비첩(奴婢帖) 58.5cm×66.0cm 수선사주(修禪社主)인 원오국사(圓悟國師, 1215~1286, 한천영(韓天英), 자 내노(乃老))가 충렬왕 18년(지원 18, 1281) 노(奴)를 수선사에 기탁한 사실을 공증한 문서이다. 내용은 원오국사가 생부인 양택춘(梁宅椿, 1172~1254년)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를 수선사에 봉안한 거란본 대장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절에 기탁한 사실을 관에서 공증한 문서이다. 「양택춘 노비상속문서」 또는 「송광사 고려노비문서」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세속의 아버지가 출가한 자식에게 노비를 상속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문서이다. 송광사 고려문서는 고려시대에 묵서로 매우 희귀하며 사찰에 관한 중요자료일 뿐 아니라 문서의 양식과 필법(筆法)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축) 1) 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曺溪山 修禪社 佛日普照國師碑銘) 고려 고종(高宗, 1214-1259) 때의 문신이며 김부식의 손자로서, 시문에 능한 김군수(金君綏)가 찬하고 무신으로서 글씨에 능한 유신(柳伸, ?-1104)이 썼다. 선종의 기풍이 시들어가는 당시의 불교계를 비판하는 말로 시작, 선풍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힘을 쏟은 부조국사 지눌에 대한 찬사(讚辭)로써 비석 머리를 장식했다. 보조국사의 출가 동기와 승과(僧科)에 합격한 뒤 어느 날 우연히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쁨을 느꼈고, 이 뒤로부터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실증을 내고 산사에 들어가 조용히 불도를 닦는 것을 서원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훗날 보조 지눌의 지혜가 더욱 높아지자 이 결사(結社)에 입사(入社)하기 위하여 승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속인들도 수백 명씩 몰려들므로 넓은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게 되었고, 퇴락한 길상사를 증축하여 조계산 수선사로 중창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지눌 스님은 56세로 입적하지만 입적할 날을 미리 알고 사내 대중을 모은 뒤 마지막 법문을 마치고 조용하게 입적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2) 조계산 수선사 중창기(曺溪山修禪社重創記) 수선사는 지금 한국 삼보(三寶)사찰의 하나이자 승보사찰(僧寶寺刹)인,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다. 중창기는 고려조 문신(文臣) 최선(崔詵, ?-1209)이 왕명을 받아 짓고, 글씨는 권신(權臣)인 최우(崔瑀, ?-1249)가 역시 왕명으로 중국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도합 3장으로, 주요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두에 중창기를 지은 사람과 기문 글씨를 집자한 사람, 수선사의 소재지(승평군 부유현), 조계산 수선사의 옛 이름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라는 점, 수선사의 창건자는 신라 승려 혜린(慧隣)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지눌 스님이 몰려든 대중에 비해 장소가 협소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기의 문도(門徒)인 수우(守愚)를 시켜 마땅한 장소를 사방으로 물색하던 중에, 퇴락한 이 절(길상사)을 발견하고 대중이 수선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량으로 판단한 뒤, 도반(道伴)인 천진(天眞)ㆍ낭조(廊照) 두 스님과 합심하여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9년(1197~1205)만에 무려 80여 채를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수선사 중창불사에 도목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은 장성(長城) 백암사(白岩寺) 승려 성부(性富)라는 사람인데, 중이 되기 전에 반생을 목수로 산 사람으로 지눌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염불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중창 불사를 해냈다는 내용도 적고 있다. 금성(錦城, 나주) 사람 진직승(陳直升) 내외가 백금(白金, 은) 10근을 맨 먼저 보시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좋은 반응을 일으켜 재력이 있는 자는 재물을 보시하고 체력이 있는 자는 노력을 보시하여 거창한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점과, 준공이 되자 국왕(고려 희종)이 왕명으로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조계산(曺溪山) 수선사(修禪社)’로 바꾸고 그 액자를 어필로 하사하여 포상한 내용을 밝힌 뒤, 지눌 선사의 출가 동기와 간단한 이력을 소개하는 순서로 기록하였다. 끝으로, 지눌 스님의 빛나는 공덕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뿐 아니라 왕명을 사양할 수 없어서 기록하게 되었다는 집필 경위와 자신이 연로하여 조계산을 직접 가보지 못한 때문에 그 좋은 경치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아울러, 복전수(福田數, 스님 수)와 법회 때 독경한 스님 숫자와 참석한 신도 수 및 삼보당(三寶堂) 대중 수효까지 상세히 기록되었다. 또한, 당시에 경향 각지에서 시납(施納)된 재산이 구체적인 숫자로 명시하고 시주(施主)의 이름도 함께 명기하였다. 이 문서를 통해 수선사의 재산 현황과 시주한 부류를 아울러 살필 수 있으며, 고려시대 사찰들이 시주로부터 노비도 시납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등 고려 중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연구하는데 보기 드문 좋은 자료이다. ( 작성자 : 권영대 ) (2장) 이 문서는 1281년(충렬왕7) 윤8월에 좌승지 조인규(趙仁規)가 수선사(修禪社) 사주(社主) 내노(乃老)에게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의 명칭에 관하여 원오국사(圓悟國師) 노비문서(奴婢文書), 노비첩(奴婢帖) 등으로 불리어졌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문서의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국왕문서를 담당하는 밀직사(密直司)의 좌승지가 국왕의 뜻을 받들어 작성한 선전소식(宣傳消息)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내노는 수선사 제5세 원오국사 천영(天英)의 자(字)이다. 그는 생부(生父) 예빈경(禮賓卿) 양택춘(梁宅椿)에게 상속받는 노(奴)인 건삼(巾三)과 그 소생을 수선사에 예속시킬 수 있도록 소지(所志) 즉 일종의 청원서를 올렸다. 대상노비는 1254년(고종41) 죄를 짓고 주살되거나 유배된 관원의 노비들로서 조정에서 그들을 관아와 개인에게 나누어 예속시켰는데 당시 양택춘에게 하사한 노비가 바로 사내종 건삼이다. 국가로부터 받은 노비를 수선사에 예속시킬 수 있도록 요청한 내노의 청원서에 대해 당시 좌승지 조인규가 왕의 허락을 받들어 인증해 주었다. 이 문서는 관인(官印)이 5과(顆)가 찍혀 있고 하단 부분에 몇 자가 결손 되어 있으며, 문서 끝부분 한 줄은 후대에 첨가한 것이다. (작성자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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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5041

    시천견록 및 서천견록(詩淺見錄 및 書淺見錄) / 조선 세종 11년(1429)~ 조선 세종 12년(1430) / 1책 / 목판본/관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시천견록(詩淺見錄)』과 『서천견록(書淺見錄)』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저명한 유학자인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의 『오경천견록』 중의 일부로 세종 14년(1432) 무렵에 간행된 목판본(木板本)의 후쇄본(後刷本)이다. 권근은 공민왕 17(1368)년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고 조선의 개국에 공이 커서 개국공신에 봉해진 조선 초기의 유학대가(儒學大家)이다. 그는 문집(文集)인 『양촌집(陽村集)』과 『입학도설(入學圖說)』 외에도 특히 일찍부터 오경(五經)을 깊이 연구하고 경(經)의 요의(要義)와 의난점(疑難點)을 해설(解說) · 분석(分析)하여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한 바 있었는데, 『시천견록』과 『서천견록』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1433) 2월 계사조(癸巳條)에 성균사예(成均司藝) 김반(金泮)이 『역(易)』 · 『시(詩)』 · 『서(書)』 · 『춘추(春秋)』 등의 천견록을 개간(開刊)할 것을 건의(建議)하자 왕이 예조(禮曹)에 회부하여 검토하게 하였던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세종 때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시천견록』과 『서천견록』은 합본 1책으로 『시천견록』(12장)의 내용은 ‘시설(詩說)’이며, 『서천견록』(25장)의 내용은 ‘서설(書說)’이다. 권말의 ‘[십]사년시월일 충청도 보은 개판([十]四年十月日 忠淸道 報恩 開板)’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원래의 판본은 세종 14년(1432)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본 판본은 인쇄가 그리 깨끗하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 후쇄(後刷)인 듯하다. 『시천견록』과 『서천견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 경전(經典) 해설서의 하나로 『예기』나 『주역』의 천견록에 비하여 내용도 엉성하고 양도 많지 않으나 한국 유학사(儒學史)에 경전(經典)을 해석한 전문서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며, 권근의 성리학(性理學) 사상의 연구에는 물론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성리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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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5042

    박만정 해서암행일기(朴萬鼎 海西暗行日記) / 조선 숙종 22년(1696) / 1책 / 필사본/일기류 / 박성철 / 서울 서대문구 / 선장
    이 책은 조선조 문신인 박만정(朴萬鼎, 1648~1717)이 숙종 22년(1696) 황해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임명되어 활동한 내용을 적은 초고본(草藁本)이다. 숙종 22년(1696) 3월 7일부터 5월 12일까지 65일 동안의 암행활동을 적고 있는 이 책은 전체 61장 가운데 일기부분 32장,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서계원단자(書啓元單子)와 별단자(別單子) 19장, 저자의 복명에 대한 비변사의 의견서 4장, 정축피적시(丁丑被謫時)의 전말과 면성일기(綿城日記) 등 잡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박만중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동계(東溪) 또는 설정(雪汀)이며, 윤휴(尹鑴)에게 수학하였다. 숙종 9년(168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 학유가 되었고, 그 뒤 학록ㆍ사헌부정언ㆍ사헌부정언ㆍ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사간원사간ㆍ사헌부집의ㆍ시강원보덕ㆍ제용감정ㆍ군자감정 등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암행어사의 활동기록을 적은 것은 수종에 불과하다. 특히 실록에도 당시 박만정이 암행어사로 파견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어 실증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또한 당시 해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의 빈곤, 관료의 일선행정 등을 서술한 것이므로 조선 후기의 사회와 행정사료로 귀중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특수제도인 암행어사의 활동실태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43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關係文書) / 조선 고종 6년(1869)∼고종 13년(1876) / 4건 / 사찰문서/소지류 / 대승사 / 경북 문경시 / 낱장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9년(587)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하고 있다.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었던 것으로, 철종 13년(1862) 대승사의 화재로 법당이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짓고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목각탱화를 옮겨놓았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여 시비가 일게 되자 등장을 올리게 되었고, 고종 13년(1876) 대승사에서 부석사의 조사전(祖師殿)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합의를 보게 되어〈완의(完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유로 대승사의 목각탱과 관련되어 작성된 문서 4점이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서는〈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尙州大乘寺外四寺僧徒等狀〉·〈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尙州四佛山大乘寺僧徒等狀〉·〈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道內尙州四佛山大乘寺諸僧等狀〉등의 등장류와〈완의 完議〉등이 있다. 등장은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여러 사람이 연서하여 관에 올려 인증을 받는 문서로서, 이 목각탱에 관계되는 문서는 고종 6년(1869)의 상서(上書) 자료를 비롯해서 1875년과 1876년의 등장과 완의로 작성되었다. 이 고문서는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에 소장되어 있는 사찰 소유의 목각탱의 이전과 관련된 자료이다. 따라서 이들 문서는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에 얽힌 유래와 조선 후기의 부석사와 대승사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찰문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문서는 1869년(고종6) 2월 대승사(大乘寺)가 주축이 되어 경상우도 각 사찰의 승려들이 순흥대도호부(順興大都護府) 사또에게 부석사(浮石寺)에 있는 불상을 봉안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청원서이다. 이 문서는 승려 여러 명이 연명하여 청원하였는데 이러한 문서를 조선시대에 등장(等狀)이라고 한다. 대승사는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위치하고, 영조(英祖)의 어필(御筆)이 봉안되어 있는 사찰이었다. 그런데 1862년(철종13)에 법당과 승방이 모두 화재에 불타서 그 후 어렵게 중건했지만 봉안할 불상이 없었다. 이에 대승사에서는 부석사(浮石寺)에 40여 년 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불상을 봉안하기를 요청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서를 관아에 올리기 한 달 전에 불상을 옮기기 위해 대승사 승려들은 부석사에 갔다가 관아에서 장교(將校)를 보내 금지시켜 즉시 나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청원문서를 제출하면서 여러 사찰에서 피폐해진 절에서 불상을 옮겨 모신 사례들을 열거하며 부석사에 있는 불상을 옮길 수 있도록 순흥대도호부 사또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1869년 2월 8일 순흥대도호부 사또는 지난번에는 감영에서 공문서가 내려오지 않아 물러가라는 처분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경상우도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대규모로 와서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고심과 정성을 알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피폐해진 부석사보다는 차라리 새로 중창된 대승사에 불상을 봉안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승사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참고로, 본 문서와 관련된 기타 문서를 보면, 훗날 부석사에서 불상을 반환하라는 요구가 발생하여 서로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결국 대승사와 부석사가 일종의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작성자 : 김건우) (2장) 목각탱[刻佛畵幀]은 일반적으로 후불탱화를 나무로 깎아 돋을새김, 또는 뚫을새김으로 표현한다. 또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화의 일종이다. 대개 법당의 본존불(本尊佛) 뒤에 후불탱화로 걸린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목각탱이 상당히 유행하였다. 이것은 아미타후불탱화를 조각한 것으로 가운데에 광배(光背)와 연꽃을 새긴 대좌(臺座)를 새긴 후, 따로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상을 안치하였다. 또 좌우에 5단에 걸쳐 협시불(挾侍佛)들을 안치하였다.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었던 것으로, 철종 13년(1862) 대승사의 화재로 법당이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짓고 폐찰 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목각탱화를 옮겨놓았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여 시비가 일게 되자 등장을 올리게 되었고, 1876년(고종13) 대승사에서 부석사의 조사전(祖師殿)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합의를 보게 되어「완의(完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유로 대승사의 목각탱과 관련되어 작성된 문서 4점이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서는「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尙州大乘寺外四寺僧徒等狀)」「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尙州四佛山大乘寺僧徒等狀)」「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道內尙州四佛山大乘寺諸僧等狀)」등의 등장(等狀)과「완의(完議)」가 있다. 등장(等狀)은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관(官)에 올려 인증을 받는 문서로, 이 목각탱에 관계되는 문서는 고종 6년(1869)의 상서(上書) 자료를 비롯해서 1875년과 1876년의 등장과 완의로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에 소장되어 있는 사찰 소유의 목각탱의 이전과 관련된 자료이다. 따라서 이들 문서는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에 얽힌 유래와 조선 후기의 부석사와 대승사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찰문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작성자 : 박상수 ) (3장) 부석사(浮石寺)와 대승사(大乘寺)간의 목각탱[刻佛畵幀]의 분쟁에 관련된 문서는 고종 6년(1869)의 상서(上書) 자료를 비롯해서 1875년에 작성된 문서를 비롯하여 1876년에 작성된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道内尙州四佛山大乗寺諸僧等狀)」와 「완의(完議)」등이 있다. 이 문서 역시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들 문서를 통하여 대승사와 부석사 사이에 목각탱화에 얽힌 분쟁의 내막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작성자 : 박상수) (4장) 병자년 정월에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대승사(大乘寺)의 스님들이 가산장수주(架山將帥主)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대승사는 오래된 고찰이고 영조(英祖)의 어필(御筆)을 봉안할 정도로 유명한 절인데, 임술년에 불이 나서 건물과 불상이 불에 타 버렸다. 건물은 지었지만 불상이 없던 차에 마침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에 스님은 없고 불상만 있자 순흥 관가에 소지를 올려 불상을 옮겨 모셨다. 그런데 상기(尙基)라는 부석사에 의탁하고 있던 스님이 여러 중들과 모의하여 불상 대신 돈 수백 냥을 달라고 하자 이에 억울함을 가산장수에게 호소하였다. 그러자 제사(題辭)를 내리기를, 사용하지 않는 불상은 스님이 있는 절로 옮겨 안치하는 것은 승가의 내려오는 전례이고 이미 순흥관의 제사(題辭)가 있으므로 불상을 도둑질 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감영(監營)에 보고한 후에 처결하겠다고 하였다. 이 소지에 처결자로 나오는 세영(細營)은 세류영(細柳營)의 줄임말이다. 세류영이란 한(漢) 나라 주아보(周亞夫)가 장군이 되어 세류(細柳)에 진을 쳤을 때 그 규율이 다른 어느 장군의 진보다 엄정하여 문제(文帝)가 순시하고 크게 감동하여 마침내 세류영의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곧 이 소지의 처결자가 가산(架山)에 주둔하고 있는 병영(兵營)의 장수이므로 주아보의 세류영 고사를 따서 세영이라고 하였다. (작성자 : 심영환)
    출처 : 문화재청
  • 475044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 / 조선시대 / 1첩 / 서예/서예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짓고 쓴 「회암서절요서(晦庵書節要序)」초본과 이를 보고 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발문,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과 후대인의 발문을 모은 서화첩이다. ‘퇴우이선생(退尤二先生)’은 대유학자 이황과 송시열의 아호 ‘퇴계’와 ‘우암’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정선의 둘째아들 정만수(鄭萬遂)의 영조 22년(1746) 발문에는 이황의 「회암서절요서」초본이 이황 외손에게 전해지다가 자신의 집안에서 수장하게 된 내력을 적어놓았다. 첩 앞쪽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이황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짓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정선의 〈계상정거(溪上靜居)〉가 실려 있다. 그 다음 「회암서절요서」초본과 송시열과 정만수의 발문이 실려 있다. 다음에는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 1625~1694)이 「회암서절요서」초본을 가지고 수원 만의촌(萬義村) 무봉산(舞鳳山)에 퇴거해 있는 스승 송시열을 찾아가 보여주는 장면을 그린 〈무봉산중(舞鳳山中)〉, 박자진이 살던 집을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그리고 정선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가 차례로 실려 있다. 그 뒤 정선의 평생지기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쓴 칠언절구 제시(題詩)가 있다. 맨 끝에는 고종 9년(1872)에 쓴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제발과 김용진(金容鎭, 1883~1968)의 관기(觀記)가 실려 있다. 【 번역 해제 】 (1첩)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하고 쓴 「회암서절요서(晦庵書節要序)」(당초에는 ‘주자서’라 하지 않고 ‘회암서’라 했음)의 초고본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 서문 초고를 경완(敬玩)하고 쓴 제발(題跋)을 중심으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 등 여타인의 지어(識語)를 장첩한 것이다. 이황이 명종 13년(1558)에 쓴 「회암서절요서」와 그 목록 초본이 외현손 홍유형(洪有炯)에게 입수되어, 뒤에 홍유형의 사위 박자진(朴自振)에게로 전존(傳存)되자 자진은 현종 15년(1674) 예송(禮訟) 문제로 수원의 무봉산(舞鳳山)에 은복(隱伏)하고 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제발을 받고, 그 뒤 숙종 8년(1682)에 또 무봉산에서 우암의 제발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그의 자손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박자진의 외손 정만수(鄭萬遂)가 입수하여 영조 22년(1746)에 아버지 정선으로부터, 이황이 계상(溪上)의 서당에서 조용히 학구에 열중하고 있는 장면을 중심으로 도산서당 일대를 그린 「계상정거(溪上靜居)」, 무봉산 일대를 배경으로 초정(草亭)에서 대좌한 송시열과 박자진을 소재로 그린 「무봉산중(舞鳳山中)」, 박자진의 제택(第宅)을 소재로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정선 자신의 제택을 소재로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등 모두 네 폭의 그림을 받고, 정만수 자신의 지어(識語)를 쓴 뒤에 아버지 정선의 친우인 시인 이병연(李秉淵)의 시를 받았다. 그 뒤 고종 9년(1872)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가 입수하여 자신의 지어를 첨가하고, 다시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의 제서(題書)가 첨가되어 현재의 첩이 이루어졌다. 이 첩은 조선시대를 지탱한 지주(支柱)인 도학(道學)의 연원으로써의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48권에 이르는 서한(書翰)에서 14권으로 선취(選取)한 의도를 서술한 이황의 자필 서(序)에 대한 후인들의 향념의 일단을 전해 준다. 그 향념은 주희와 이황의 만남으로 형성된 우리나라 도학의 한 극점의 상징으로써의 사건에 대한 향념이다.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045

    이언적 수고본 - 속대학혹문(李彦迪 手稿本 - 續大學或問) / 조선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 / 1책 / 필사본/사본류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 선장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송(宋)의 주희(朱熹)가 지은《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미처 제론(提論)하지 못한 항목을 추가하였다. 정조(正祖) 때 경연에서 진강(進講)되었고, 정조는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題先正晦齋續大學或問卷首)」라는 제목의 서문을 친히 써서 내려보냈다. 이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포함한 수필고본들은 모두 5종 13책으로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오던 것이다.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 어서각(御書閣)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경학ㆍ정치ㆍ예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저자인 이언적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며 이조정랑ㆍ사헌부장령ㆍ밀양부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 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ㆍ응교ㆍ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조ㆍ예조ㆍ형조의 판서를 거쳐 명종 즉위년(1545)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등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도 이 때에 저술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46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三十六) / 고려시대 초중기 / 1권1축 / 목판본/사찰본 / 성암고서박물관 / 서울 중구 / 권자장
    우전국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당나라 측천무후 재위시기에 전체 39품 80권으로 한역한 주본(周本) 화엄경을 고려 11세기에 판각한 고려판 불경. 목판본 1권 1축. 성암고서박물관(조병순) 소장. 국보 제204호. 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 중의 하나이며,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를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 부른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화엄경은 이처럼 결집과정을 거쳐 편찬된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이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번역된 한역본(漢譯本)은 현재 진본(晉本)‧주본(周本)‧정원본(貞元本)의 삼본(三本)이 전하고 있다.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상본은 바로 실차난타가 번역한 주본 화엄경으로 권36의 1축이다. 이 책은 권자본으로 장책되어 있으나, 근래에 표지(裱紙)와 표죽(裱竹)부분만은 새로 보수하였다. 권수에는 변상도 1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교하게 판각되어 있으나 습기의 피해가 있었는지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변상도는 사경 변상과 흡사하게 우측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대방광불화엄경권제삼십육변상(大方廣佛華嚴經卷第三十六變相)’ 제목이 보이며, 그 아래에 ‘주(周)’라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다. 변상의 테두리는 금강저(金剛杵)로 장엄이 되어 있고, 우측상단에는 ‘십지품이십육지삼(十地品二十六之三)’이란 품명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화면의 앞에서부터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과 ‘해탈월보살(解脫月菩薩)’이란 보살 이름이 보이고, 차례로 ‘제사염혜지(第四燄慧地)’와 ‘제오난승지(第五難勝地)’라는 공간표시가 보이고 있다. 이 권자본은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 사실을 알 수는 없으나, 자체 및 지질의 특징이 거의 같은 시기에 간행된 이필선 시재본과 흡사하여 대략 11세기 후반에 개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욱이 같은 해에 해인사에서 성헌(成軒)이 시주하여 판각한 목판이 해인사의 사간잡판(寺刊雜板)에 들어 있고, 또한 숙종연간에 지리산 증륜사(拯倫寺)에서 주지 양춘(輰春)이 주관하여 간행한 판본도 현존하고 있는데, 이들 판본과도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성암본은 이러한 판본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성암본은 현존하는 많은 화엄경 중의 유일하게 권수에 정교하게 새겨진 변상도가 수록되어 있어 초조본「어제비장전」과 더불어 불교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간행시점이 대략 교장이 판각되었던 시기인 고려초기의 판본으로, 고려시대 사간본(私刊本)과 대장경에 수록된 판본류의 불교판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47

    이언적 수고본 - 1.대학장구보유(李彦迪 手稿本 - 大學章句補遺) / 조선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 / 1책 / 필사본/사본류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 선장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는 명종 4년(1549)에 저술한 것으로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가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정자(程子)의 뜻을 따라 경(經)과 전(傳)에 편장(編章)의 서차(序次)를 바꾸고 뜻을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전문(全文)이 이언적의 친필로 되어 있고 권말(卷末)에 노수신(盧守愼)의 발(跋)이 있다. 《대학장구》의 잘못된 점을 보충하였으므로 《대학장구보유》라고 하였다. 이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포함한 수필고본들은 모두 5종 13책으로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오던 것이다.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 어서각(御書閣)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경학ㆍ정치ㆍ예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048

    이언적 수고본 - 2.중용구경연의(李彦迪 手稿本 - 中庸九經衍義) / 조선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 / 9책 / 필사본/사본류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 선장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중용(中庸)》 제20장 〈구경(九經)〉조의 「범위천하국가(凡爲天下國家) 유구경(有九經)」이라 하여 정치의 방도 9개 항목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구경〉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신(修身)ㆍ존현(尊賢), 친친(親親)ㆍ경대신(敬大臣)ㆍ체군신(體群臣)ㆍ 자서민(子庶民)ㆍ내백공(來百工)ㆍ유원인(柔遠人)ㆍ회제후(懷諸侯)의 9조목을 가리킨다. 본래 이언적은 〈구경〉 중 수신ㆍ존현ㆍ친친의 세가지 조목에 대하여 17권에 걸쳐 여러 경전과 선유들의 제설을 인용하여 해의하고 있으나, 그가 집필 도중에 죽었으므로 경대신 이하 6가지 조목은 해의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조목은 그의 손자인 준(浚)이 수신 이하의 조목을 29권으로 완성, 간행하였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求仁錄)》ㆍ《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ㆍ《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ㆍ《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그러한데 이 수필고본은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오던 것을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 어서각(御書閣)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들은 조선시대의 정치, 예학, 경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저자인 이언적은 본관은 여주(驪州),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에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 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ㆍ응교ㆍ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조ㆍ예조ㆍ형조의 판서를 거쳐 명종 즉위년(1545)에 좌찬성이 되었다. 을사사화 때에는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등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2년(1610) 때 문묘에 종사되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 번역 해제 ]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1. 저자 및 저술 배경 1) 저자의 생애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은 여주이다. 초명은 적(迪)이었는데, 1521년 중종(中宗)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낸 이수회(李壽會)이고, 부친은 생원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이번(李蕃)이다. 모친은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이언적은 1491년 11월 25일 경주부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박숭부(朴崇阜)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4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 27세 되던 1517년 정월 초하룻날 의지를 새롭게 다짐하여 외천잠(畏天箴)·양심장(養心箴)·경신잠(敬身箴)·개과잠(改過箴)·독지잠(篤志箴) 등 5편의 잠을 지었고, 1520년 그믐날 입잠(立箴)을 지어 자신을 경책하였다. 1524년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526년 7월 사헌부 지평으로 소환되었고, 1528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가 1530년 소환되어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531년 김안로(金安老)의 기용을 반대하다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고, 얼마 후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경주 자옥산(紫玉山) 밑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약 7년 동안 은거하여 세상사를 사절하고 경학과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47세 때인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 교리, 의정부 검상 등을 지냈다. 1538년 청백리로 품계가 더해져 의정부 좌사인, 군기시 정 등을 지낸 뒤,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1542년 52세 때 이조 판서가 되었고, 154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44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의정부 좌찬성으로 원상(元相)을 맡았으며,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의 논의를 결단하고 「정부서계십조(政府書啓十條)」를 올렸다. 이 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다. 1546년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훈작이 삭탈되었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부(江界府)로 유배되었다.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봉선잡의(奉先雜儀)?·?구인록(求仁錄)? 등을 저술하였으며,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저술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1553년 11월 23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1566년 아들 이전인(李全仁)의 유배지에서 지은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조정에 올렸고, 이어 삭탈되었던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 해 이황이 행장을 지었다. 1567년 이언적의 유문을 수습하라는 왕명이 내렸고, 156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9년 ‘문원(文元)’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573년 서원이 건립되었고, 이 해 12월 옥산서원(玉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문집은 아들 이전인이 수습하여 1565년경 이황의 교정을 받아 정고본(定稿本)이 완성되었다. 이것을 1575년 손자 이준(李浚)이 경상감사 노진(盧禛),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의 도움을 받아 경주에서 간행하였다. 2) 저술 배경 ?중용구경연의?는 이언적이 유배지 강계에서 별세하기 직전까지 저술하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책이다. 이언적이 ?중용구경연의?를 저술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공자가 ?중용?에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조목으로 언급한 구경(九經)의 깊은 뜻을 미루어 밝혀 경세(經世)의 법으로 삼고자 한다. 둘째, 제왕의 존심(存心)·출치(出治)의 도리와 상덕(常德)·배천(配天)의 요지에 대해 도움을 주고자 한다. 셋째, 제왕이 천도를 계승하여 법도를 세운 것을 따라 태평지치를 이룩하길 바란다. 류성룡(柳成龍)은 ?중용구경연의?의 발문에, 이언적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爲萬歲開太平]’ 데에 있다고 논평하였으니, 제왕의 경세학을 밝혀 태평시대를 간절히 희구한 충신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하겠다. 이언적은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에 천하를 다스리는 율령·격식·조례가 구비되어 있지만, 제왕의 경세의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중용구경연의?를 저술하여 ?대학연의보?와 표리가 되게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점이 그가 ?중용구경연의?를 저술하게 된 동기이다. ?중용구경연의?는 이언적의 손자 이준이 이언적의 문집을 간행한 다음 해인 1583년 류성룡의 발문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유통되었다. 2. 서지 사항 이 책은 이언적이 저술한 ?중용구경연의?이다. 본집은 17권 6책, 별집은 12권 3책으로, 도합 29권 9책의 필사본이다. 이 책은 경북 경주시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5년 5월 1일 보물 제586-3호로 지정되었다. 표제(表題)와 내제(內題)는 모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로 되어 있다. 1면은 12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1행은 25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들여 쓴 경우가 있어 자수(字數)가 일정하지 않다. 3. 체제와 내용 1) 체제 ?중용구경연의?는 본집과 별집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집은 구경의 의미를 부연한 것이고, 별집은 구경을 행하는 군주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언급한 것이다. 본집은 저자가 목록을 정해 놓고 서술하다가 일부 항목의 명칭을 고치거나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본집 내백공(來百工) 이하 3조목은 목록에도 세부 항목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본문에도 조목의 명칭만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책은 미완성의 저술로, 10조목 중 4조목만 저술한 것을 알 수 있다. 구경 중 저술한 3조목은 수신 4항목, 존현 5항목, 친친 4항목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한편 장수(章數)는 수신 139장, 존현 88장, 친친 110장으로 수신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항목별 장수를 보면, 수신 조목의 강학명리지공(講學明理之功)은 37장, 성의정심지공(誠意正心之功)은 70장으로 공부에 관한 항목이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친친 조목의 진효제지도(盡孝弟之道)는 57장으로 역시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저자가 이 항목을 특별히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체천도는 4항목 127장, 외천명은 3항목 58장, 계만영은 4항목 107장으로 나타난다. 체천도에서는 수봉천지정(修奉天之政)과 광호생지덕(廣好生之德)이 49장과 52장으로 월등이 많다. 계만영에서는 숭절검지미(崇節儉之美)이 41장으로 가장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언적의 안설은 수신 139장 중 51장, 존현 88장 중 42장, 친친 110장 중 44장으로 나타나며, 전체 337장 중 137장으로 약 40% 정도 안설을 붙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체천도 127장 중 65장, 외천명 58장 중 31장, 계만영 107장 중 51장으로 나타나며, 전체 302장 중 147장으로 약 49% 정도 안설을 붙인 것을 알 수 있다. 본집에 비해 별집의 안설이 많은 것은 구경을 실행하는 군주의 마음가짐에 저자가 관심을 더 기울인 것을 보여준다. 2) 내용 및 특성 본집 권1은 제왕이 정치를 행하는 도리를 총론한 총론위치지도(總論爲治之道)를 기술한 것인데, 총 40장으로 되어 있다. 권2는 수신의 첫 번째 항목인 총론수신지도(總論修身之道)를 기술한 것인데, 총 9장으로 되어 있다. 권3은 수신의 두 번째 항목인 강학명리지공(講學明理之功)을 기술한 것인데, 총 14장으로 되어 있다. 권4도 수신의 두 번째 항목인 강학명리지공을 기술한 것인데, 총 23장으로 되어 있다. 권5는 수신의 세 번째 항목인 성의정심지공(誠意正心之功)을 기술한 것인데, 총 20장으로 되어 있다. 권6은 수신의 세 번째 항목인 성의정심지공(誠意正心之功)을 기술한 것인데, 총 50장으로 되어 있다. 권7은 수신의 네 번째 항목인 언행위의지근(言行威儀之謹)을 기술한 것인데, 총 23장으로 되어 있다. 권8은 존현의 첫 번째 항목인 총론존현지의(總論尊賢之義)를 기술한 것인데, 총 11장으로 되어 있다. 권9는 존현의 두 번째 항목인 존호현지성(存好賢之誠)을 기술한 것인데,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권10은 존현의 세 번째 항목인 변현사지실(辨賢邪之實)을 기술한 것인데,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권11은 존현의 네 번째 항목인 심소장지기(審消長之幾)를 기술한 것인데, 총 12장으로 되어 있다. 권12는 존현의 다섯 번째 항목인 거참사지간(去讒邪之間)을 기술한 것인데, 총 29장으로 되어 있다. 권13은 친친의 첫 번째 항목인 총론친친지의(總論親親之義) 12장과 두 번째 항목인 진효제지도(盡孝弟之道) 23장을 기술하고 있다. 권13 후반부터 권14, 권15에 걸쳐 친친의 두 번째 항목인 진효제지도(盡孝弟之道) 57장을 기술하고 있다. 권14에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한 사례 18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권15에서는 형제·처자식 등과 화합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도리 16장을 기술하고 있다. 권16은 친친의 다섯 번째 항목으로 엄정가지법(嚴正家之法)을 기술하고 있는데, 총 23장으로 되어 있다. 권17은 친친의 여섯 째 항목인 돈구족지서(惇九族之敍)를 기술한 것인데,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별집 권1은 체천도(體天道)의 첫 번째 항목인 법천도지건(法天道之健)을 기술한 것인데, 총 14장을 되어 있다. 권2는 체천도의 두 번째 항목인 체천덕지대(體天德之大)를 기술한 것인데, 총 12장으로 되어 있다. 권3은 체천도의 세 번째 항목인 수봉천지정(修奉天之政)을 기술한 것인데, 총 49장으로 되어 있다. 권5도 체천도의 네 번째 항목인 광호생지덕(廣好生之德)을 기술한 것인데, 총 32장으로 되어 있다. 권6은 외천명(畏天命)의 첫 번째 항목인 총론천명지미상(總論天命之靡常)을 기술한 것인데, 총 12장으로 되어 있다. 권7은 외천명의 두 번째 항목인 진사천지도(盡事天之道)를 기술한 것인데, 총 20장으로 되어 있다. 권8은 외천명의 세 번째 항목인 근재이지경(謹災異之儆)을 기술한 것인데, 총 26장으로 되어 있다. 권9부터 권12까지는 별집의 마지막 조목인 계만영(戒滿盈)을 기술하고 있다. 권9에는 계만영의 첫 번째 항목인 총론지수지도(總論持守之道)를 기술하고 있는데, 총 25장으로 되어 있다. 권10은 계만영의 두 번째 항목인 방일욕지맹(防逸欲之萌)을 기술한 것인데, 총 23장으로 되어 있다. 권11은 계만영의 세 번째 항목인 숭절검지미(崇節儉之美)를 기술한 것인데, 총 41장으로 되어 있다. 권12는 계만영의 네 번째 항목인 계교태지실(戒驕泰之失)을 기술한 것인데,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4. 자료의 가치 1) 서지적 가치 이 책은 보물 제586-3호로 지정된 국가기록유산으로서 저자 이언적의 수고본(手稿本)이라는 점에 서지적 가치가 있다. 2) 내용적 가치 ?중용구경연의?의 내용적 가치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자가 언급한 ?중용?의 구경을 제왕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경세학의 근본으로 천명한 점이다. 둘째, 제왕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조목인 구경을 본집에, 그것을 실행하는 제왕의 마음가짐을 별집에 나누어 거론함으로써 정치교화의 근본 조목은 물론 그 실천적 마음가짐까지 제시하였다. 셋째, 구경의 첫 번째 조목인 수신(修身)을 지(知)·행(行)을 겸한 것으로 보아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고, 구경의 두 번째 조목인 존현(尊賢) 이하 8조목 및 구경을 실행하는 군주의 마음을 논한 별집의 체천도(體天道) 이하를 모두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요령으로 삼았다. 넷째, 구경의 내용을 수신, 존현·친친, 경대신·체군신·자서민·내백공, 유원인·회제후 등 네 단계로 구분하여 정치교화가 근본에서 말단으로 가까운 데에서 먼 곳으로 미쳐나가는 점을 말하였다. 다섯째, ?중용?의 구경은 정치를 행하는 것으로, ?대학?의 팔조목은 진덕·수업을 말한 것으로 보아 표리관계로 파악하고, 구경의 첫 번째 조목인 수신을 논하면서 격물·치지 및 성의·정심·수신을 포괄적으로 거론하였다. 여섯째, 각 조목 밑에 항목을 설정하여 기술함으로써 각 조목의 요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일곱째, 각 항목의 내용은 경전에서 연원한 점을 먼저 제시하여 근원을 밝히고, 그와 연관된 경전 및 역사서 등의 문구를 인용하여 증거를 제시하였으며, 역대 성현들의 설을 인용하여 사례를 제시하였다. 여덟째, 각 장의 맨 뒤에 저자의 안설을 붙여 관련된 내용을 군주에게 진달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었다. 아홉째, 군주에게 성왕의 태평지치를 이룩해 주길 간절히 아룀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충심을 드러내었다. (작성자 : 崔錫起)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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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적 수고본 - 3.진수팔규(李彦迪 手稿本 - 進修八規) / 조선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 / 1책 / 필사본/사본류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 선장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로서 왕에게「진덕수업(進德修業)」에 필요한 8개항의 요의(要義)를 진언한 글이다. 끝 부분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소(疏)가 부기되어 있다. 이 글은 기초(起草)만 해 놓고 미처 올릴 기회가 없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의 사후에 아들 전인(全仁)에 의하여 국왕에게 올린 사실이 그의 문집에 서술되어 있다. 《진수팔규(進修八規)》외에도 그가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저작한 《구인록(求仁錄)》ㆍ《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ㆍ《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ㆍ《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은 모두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오던 것이며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 어서각(御書閣)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들은 조선시대의 경학ㆍ정치ㆍ예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이언적은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 번역 해제 】 (1책)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강계부(江界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인 1550년에 지은 것이다. 서명의 진수(進修)는『주역(周易)』의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업을 닦기에 힘쓴다(君子進德修業)’는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줄인 말이니, 『진수팔규』는 임금이 덕을 쌓기 위하여 지켜야 할 8개의 조목(條目)이라는 뜻이다. 8조목의 내용은 1.명도리(明道理) 2.양덕성(養德性) 3.정심술(正心術) 4.체천덕(體天德) 5.법왕성(法往聖) 6.광총명(廣聰明) 7.시인정(施仁政) 8.순천심(順天心)이다. 이 『진수팔규』는 저자가 집필한 후에 명종(明宗)에게 바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올리지 못하고 유언으로 기회를 보아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저자 사후인 명종 21년(1566) 9월에 상소와 함께 바쳤다. 『명종실록(明宗實錄)』과 『회재집(晦齋集)』『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권4)에는 이전인의 상소와 이 책의 내용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8규의 내용이 양덕성(養德性)은 입대본(立大本)으로 바뀌었고, 정심술(正心術)은 빠지고 치중화(致中和)가 추가되었다. 그 외에 양국본(養國本) 1조목이 추가되어 실제로는 9규로 되어있으며, 조목의 수와 명칭의 변경뿐 아니라 내용도 대폭 첨삭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저자가 60세 때인 1550년에 이 책을 저술한 후,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가 탄생한 것을 전해 듣고 세자 교육의 중요성과 방법을 제9조로 추가하면서 8규의 전문(全文)도 함께 수정하였기 때문이다. 추가 수정본의 작성 시기는 수정의 계기가 된 세자의 탄생이 1551년이고, 저자가 1553년에 서거한 점을 생각하면 1550년에서 1553년 사이일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조정에 올려서 후세에 통행된 책과는 다르지만 저자가 처음에 집필한 『진수팔규』의 초본(草本)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가 인정되며, 『구인록(求仁錄)』『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봉선잡의(奉先雜儀)』와 함께 이언적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작성자 : 신승운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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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적 수고본 - 4.봉선잡의(李彦迪 手稿本 - 奉先雜儀) / 조선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 / 1책 / 필사본/사본류 / 옥산서원 / 경북 경주시 / 선장
    이 책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제례(祭禮)에 관한 그 이론적 학설을 모아 상ㆍ하(上ㆍ下) 2권으로 엮은 것으로 표지에는「봉선잡의합부(奉先雜儀合部)」라고 써 놓았다. 저자인 이언적의 자필 정사본(精寫本)이며, 권말(卷末)의 자발(自跋)에는 경술(1550) 팔월갑자(八月甲子)라는 작성일자까지 명기되어 있다. 이 책에는 홍문관(弘文館)」의 장서인이 있다. 이 《봉선잡의(奉先雜儀)》 는 《구인록(求仁錄)》ㆍ《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ㆍ《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과 함께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중요한 저술 중에 하나로 조선시대의 경학ㆍ정치ㆍ예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독락당(獨樂堂)에 전래되어 오던 것을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 어서각(御書閣)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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