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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5301

    권벌 종가 전적-14.심경(權橃 宗家 典籍 - 心經) / 조선 성종 23년(1492) / 4권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선장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사망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이 책은 중국 송(宋)나라 영종 때의 문신 진덕수(眞德秀)가 심(心)에 대해 논한 성현들의 격언을 모으고, 또 여러 선비들의 섬세하면서도 주요한 의논을 모아 주석으로 삼은 것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정조(正祖)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수정한 《수진심경(袖珍心經)》을 본 바가 있었다. 정조는《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은 의례(依例)가 서로 반대되는 책이고, 권벌과 이황의 수진사적(袖珍事蹟) 또한 서로 비슷하다 하여 특별히 《심경(心經)》도 아울러 충재(沖齋)가 예전에 살던 집에 내린다고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初雕本 瑜伽師地論 卷三十二) / 고려시대(11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
    이 책은 11세기 고려 현종(1011~1031)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부처님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두루마리로 제본한 것 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찍어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화함(禍函)에 수록되어 있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역(玄장譯)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 중 제 32권이다. 이 판본(版本)은 해인사(海印寺) 소장의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판수제(板首題)와 권(卷)ㆍ장(張)ㆍ함차(函次)표시의 위치가 다르다. 초조본은 판(板)의 앞에 새겨졌는데, 재조본에는 판(板)의 끝에 새겨지고 있다. 장차(張次)표시가 초조본에는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장(張)'으로 되어 있고, 또한 초조본에는 권말의 간기(刊記)가 생략되어 있으나, 재조본에는 " 임인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로 되어 있다. 그리고 초조본의 본문에는 송태조(宋太祖)의 조부휘(祖父諱)인 '경(敬)'자와 겸피휘자(兼避諱字)인 '경(竟), 경(鏡)'자가 결획(缺劃)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그 결획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초조본(初雕本)은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印刷狀態)등으로 미루어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권12와 같은 시기인 11세기에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3

    권벌 종가 전적-15.근사록(權橃 宗家 典籍 - 近思錄) / 조선 중종 14년(1519) / 14권 4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선장
    근사록(近思錄)은 1175년 주희와 여조겸이 북송의 유학자 주자(周子), 양정자(兩程子), 장자(張子)의 어록과 문집에서 정수가 되는 것을 가려 엮은 성리학 입문서이다. 주희가 한천정사(寒泉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 여조겸(呂祖謙)이 찾아와 10여 일을 머물면서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의 글을 읽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일상생활에 절실한 622항을 뽑아 14권으로 엮은 것이 바로 《근사록(近思錄)》이다. 이후에 《근사록》에 대한 여러 주석서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는 1248년 엽채(葉采)가 체제와 내용에 수정과 보완을 가하면서 새로 엮은 것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바로 《근사록집해》에 해당한다. 충재 종손가에는 모두 3종의 《근사록》이 소장되어 있는데, 공민왕 19년(1370)에 진주에서 간행된 14권 4책의 원판 번각본, 중종 14년(1519)에 내사된 9권 3책(영본)의 후기 초주갑인자인본, 영조 연간에 간인되어 내사된 14권 4책의 무신자본이 그것이다. 이 책은 충재(冲齋)의 6대손인 권만(權萬)이 집안에 내려오던 고려본(보물 제262호) 《근사록》을 영조에게 보인 것을 계기로 영조(英祖)가 충재고택(冲齋故宅)에 하사한 14권 4책의 무신자본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4

    조흡 고신왕지(曺恰 告身王旨) / 조선 세종 7년(1425)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
    왕지(王旨)는 왕명서의 일종으로 고신(告身) 사패(賜牌) 봉작(封爵) 등에 썼다. 왕의 뜻과 명을 적어 보낸 문서로, 세종 8년(1426) 이후부터는 교지(敎旨)라고 불리었다. 이 문서는 세종 7년(1425) 조흡(曺恰)을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부총제(府摠制)에 임명하는 사령서이다. 조흡(曺恰)은 정종 2년(1400) 소위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태종 11년(1411) 11월에 좌명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토지 15결을 받았다. 한편 무관 요직에 발탁되어 재상을 지냈다. 조선 전기의 문서양식 연구 및 인사행정제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5

    조흡 고신왕지(曺恰 告身王旨) / 조선 태종 9년(1409)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동국대학교 / 서울 중구 / 낱장
    태종 9년(1409) 8월 10일에 무신 조흡에게 가정대부(嘉靖大夫)의 품계와 중군도총제부총제 겸판군기감사(中軍都摠制府摠制 兼判軍器監事)의 벼슬을 임명하는 사령왕지(辭令王旨)이다. 1장. 40.3cm× 80cm. 보물 제898호. 양질 저지에 초서(草書)로 5줄에 걸쳐 쓰여져 있고 발급 연원일 위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이란 새보(璽寶)가 찍혀 있다. 조흡의 사령왕지는 이 왕지 이외에 보물 제897호, 제1226호로 각각 지정되었고, 사패교지(賜牌敎旨)는 조흡이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안산군사(知案山郡事)로 재직하던 정종 2년(1400) 2월에 발급된 것으로 보물 제899호로 지정되었다. 조흡(曺恰) 은 본관이 창령으로 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盛府院君)에 봉해진 조민수(曺敏修)의 손자이며 조선 정종~세종 때에 활약한 무신이다. 지정된 왕지에 의하면 지안산군사(知案山郡事)ㆍ좌군도총부총제(左軍都摠制府摠制)ㆍ우군도총부총제(右軍都摠制府摠制)ㆍ중군도총부총제겸판군기사(中軍都摠制府摠制兼判軍器事)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왕지가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는 태조 때에 도응(都膺)에게 발급된 것(보물 제724호)을 비롯하여, 김회련(金懷鍊, 보물 제438호), 양이시(楊以時, 보물 제725호), 전흥(田興 보물 제727호), 성석린(成石燐, 보물 제746호), 조숭(趙崇, 보물 제953호), 조서경(趙瑞卿, 보물 제954호), 이종주(李從周, 보물 제1006호), 진충귀(陳忠貴, 보물 제1161호) 등에게 발급된 것 등 10여건에 이른다. 왕지는 세종 시기에 와서는 ‘교지(敎旨)’로 바뀌며 사령교지에 찍히는 새보도 ‘시명지보’로 바뀐다. 조선 초기의 성격과 특징을 지닌 왕지로서 고문서 연구 및 조선 초기의 관제(官制)와 새보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며,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6

    조흡 사패왕지(曺恰 賜牌王旨) / 조선 태종 1년(1401)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동국대학교 / 서울 중구 / 낱장
    태종 1년(1401) 3월에 제 2차 왕자의 난 때 공로를 세운 당시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안산군사(知案山郡事)로 있던 조흡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는 사패왕지(賜牌王旨)이다. 조흡은 태종 11년(1411)에 좌명원종공신(佐命原?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장이며 크기는 80.0cm×71.7cm, 보물 제899호 이다. 장지(壯紙)에 초서로 10줄에 걸쳐 쓰여져 있으며 작성한 체재를 살펴보면, ‘사(賜)’자를 한자 높여 쓰고, 줄을 바꾸어 수취자(受取者)인 조흡의 관등 성명, 또 줄을 바꾸어 5줄에 걸쳐 사급 내용을 적고 있는데, 이두(吏讀)를 섞어 쓰고 있다. 다음 줄을 바꾸어 ‘왕지안인(王旨安印)’ 4자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문서의 작성 담당관 박석명(朴錫命)의 관직, 성(姓)과 수결(手決)이 있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이란 새보(璽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왕지는 사령왕지 이외에 사패(賜牌)ㆍ면역(免役)ㆍ합격(合格) 등의 왕지도 있다. 사령왕지로는 태조 2~6년 사이에 도응(都膺)에게 발급된 것(보물 제724호)을 비롯하여, 김회련(金懷鍊, 보물 제438호), 양이시(楊以時, 보물 제725호), 조흡(曺恰, 보물 제1226호) 등에게 발급된 것 등 10여종이 발견되었다. 사패왕지로는 이 문서가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너는 경진년(정조 2, 1400)에 과인의 몸을 방어하여 오늘날에 이른 공로로 상을 줄 만하다. 수원 관내 유제지(楡梯地) 천자정(天字丁) 5결(結), 정송지(貞松地) 현자정(玄字丁) 5결(結), 천령지(川寧地) 5결(結), 광주지(廣州地) 거자정(鋸字丁) 5결(結), 봉산시 소속 여종 우근이, 완산부 관비 복비 모두 함께 사급(賜給) 하는 일이니, 자손 대대로 전지(傳持) 할 것’ 이라 하였는데, 토지 20결(結), 여종 2명을 사급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성격과 특징을 지닌 왕지로서 고문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 일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관제와 새보 사용의 변천을 살피는 데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본문에 쓰여진 이두 문은 국어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되며,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7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1.유지(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有旨) / 조선 선조 33년(1600)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낱장
    보물 제900-1호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우반동에 살고 있는 부안 김씨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서이다. 이 부안 김씨는 세칭 “우반동 김씨(愚磻洞 金氏)”라고도 불리운다. 이들은 이들의 선조(先祖)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에게서 우반동 일대를 사들인 이후에 이곳에 세거하였다. 부안 김씨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지는 만력 28년(1600)에 선조가 당시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있는 김홍원에게 보낸 유지이다. 선조는 김홍원이 금산군수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암행어사의 보고서[서계(書啓)]를 받아보고 김홍원을 격려하기 위해 유지를 내린 것이다. 이 때 선조는 유지와 함께 격려품으로 표리(表裏) 1습(襲), 즉 겉옷과 속옷 1벌을 보내었다. 이 문서의 크기는 세로 54.5cm, 가로 52.0cm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8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2.교지 및 교첩(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敎旨 및 敎牒) / 조선 연산군 8년(1502)~광해군 9년(1617) / 50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낱장
    보물 제900-2호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우반동에 살고 있는 부안 김씨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서이다. 이 부안 김씨는 세칭 “우반동 김씨(愚磻洞 金氏)”라고도 불리운다. 이들은 이들의 선조(先祖)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에게서 우반동 일대를 사들인 이후에 이곳에 세거하였다. 우반동 김씨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홍패(紅牌), 백패(白牌), 교지(敎旨), 교첩(敎牒) 50점으로 되어 있다. 보물 제900-2호에 딸린 문서들은 주로 우반동 김씨의 현조(顯祖)인 김석필(金錫弼)과 김홍원(金弘遠)에 관한 문서들이다. 여기에는 홍패와 백패가 각각 1장, 교지가 39장, 그리고 교첩이 9장이 있다. 또 이 문서들은 홍치 15년이 1502년에 성균관 생원인 김석필이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로부터 만력 45년(1617)에 김홍원이 통정대부 행담양도호부사(通政大夫 行潭陽都護府使)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에 이르기까지 약 120년에 걸친 것들이다. 이 문서들은 주로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문서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 한 인물의 관직 이동 사항이나 관직 이동에 따른 교지류의 발급 형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09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3.소지(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所志) / 조선 선조 2년(1569)~광해군 5년(1613) / 3건 / 관부문서/소지류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낱장
    보물 제900-3호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우반동에 살고 있는 부안 김씨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서이다. 이 부안 김씨는 세칭 “우반동 김씨(愚磻洞 金氏)”라고도 불리운다. 이들은 이들의 선조(先祖)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에게서 우반동 일대를 사들인 이후에 이곳에 세거하였다. 소지는 백성들이 관에 청원이나 진정 및 소송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일종의 민원서이다. 이 소지 3장은 각기 융경 3년(1569), 만력 8년(1580), 만력 41년(1613)에 작성된 것들로, 우반동 김씨가에 전하는 소지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선 것들이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문서는 융경 3년(1570, 선조3) 11월에 양산(陽山)에 사는 참봉(參奉) 강주신(姜周臣)이 군수(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소지는 민(民)이 관(官)에 청원할 일이 있을 때 올리는 문서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특정한 문서식이나 문서명이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소지를 올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문서명이나 문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주로 소지(所志)ㆍ상서(上書)ㆍ발괄[白活]ㆍ단자(單子)ㆍ원정(原情) 등이 쓰이며 여럿이 연명하여 올릴 경우는 등장(等狀)이라고 한다. 지방관이 성주(城主)에게 올려 낙과하면 다시 2심인 관찰사(觀察使)에게 올리는데 이를 의송(議送)이라고 한다. 강주신이 올린 소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점이 많다. 우선 문서의 시면(始面)에 거주지와 직역ㆍ성명을 쓰고 착명ㆍ서압을 하는 경우는 오래된 전통이다. 이는 주로 중국의 당송 법률문서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전래 시기는 현재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소지는 강주신이 소유하고 있던 명주[綿紬]ㆍ무명[木綿]ㆍ동이[鍮東海]ㆍ모시[苧布] 등과 이 물건들의 전래 내력을 적은 문기(文記)를 노(奴)들이 훔쳐 달아났기 때문에 후일에 이를 공험(公驗)할 수 있도록 입지(立旨)를 만들어 달라고 올린 것이다. 이런 경우, 조선 전기에는 보통 관에 신고하여 서실입안(?失立案)을 발급받는 것이 관례였지만, 강주신은 입안 대신에 입지를 성급해 달라고 관에 요청한 것이다. 이 문서의 작성 연도가 1570년(선조3)이므로 이미 16세기 중후반이 되면 입안 대신에 입지를 신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소지의 처분인 관의 제사(題辭) 부분이다. 관의 제사는 17세기 이후에는 주로 소지의 좌하단에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소지에서는 문서의 거의 상단부터 작성해 내려오고 있다. 또 월일을 먼저 작성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15~16세기 소지 제사(題辭) 작성의 전통적인 관례를 이 문서가 아직도 나타내고 있음을 나타낸다. ( 작성자 : 심영환 ) (2장) 이 문서는 1600년(선조33)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금산군수(行錦山郡守) 김홍원(金弘遠)이 관찰사겸순찰사에게 휴가를 청하면서 올린 정사소지(呈辭所志)이다. 김홍원(1571~1645)은 자가 이중(而重)이며 호는 해옹(海翁)이고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1588년(선조21)에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졸과 병량을 모아 직접 싸움터에 나가려 하였는데, 마침 조부상을 다하여 이 계획을 포기하고 모은 곡식 1백 여석을 선유사(宣諭使) 윤승훈(尹承勳)에게 보내어 선조의 행재소인 용만(龍灣)으로 보내게 하였다. 그 후 1597년(선조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변산으로 피난하여 모여든 사람들에게 의병으로 나갈 것을 설득하고, 또 격문을 도에 뿌려 의병을 모아 추포(秋浦) 황신(黃愼)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황신이 함께 적을 치자고 하였다. 이때에 적이 재를 넘어 남으로 내려오니, 그는 정병 수천을 거느리고 순창(淳昌)까지 추격하여 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선문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1624년(인조2)에는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옮겨졌고 1627년(인조5)에는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어 금성산성(金城山城)을 지켰다.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에는 그의 나이 66세에 현감 이홍발 등과 여산(礪山)에서 만나 창의를 도모하였는데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부안의 변산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해옹(海翁)이라 칭하며 시문을 즐기다가 1645년(인조23)에 졸하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유고로『해옹집(海翁集)』6권 1책이 전한다. 이 문서는 정사소지(呈辭所志)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에 관인이 휴가를 청할 때 중앙관은 정사식(呈辭式)이라는 단자식을 올리고 지방관은 소지의 형식으로 올렸는데, 이 문서가 바로 지방관이 소지의 형식으로 올린 정사소지이다. 제사(題辭)에 관찰사(觀察使)와 도사(都事)가 나란히 등장하는 점도 이 문서가 관찰사가 발급한 문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작성자 : 심영환 ) (3장) 1614년(광해군5)에 김홍원(金弘遠)의 호노(戶奴)인 군석(君石)이 관에 올린 소지이다. 김홍원(1571~1645)은 자가 이중(而重)이며 호는 해옹(海翁)이고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문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어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를 부흥한 인물이다. 이 소지는 내용이 전답(田畓)과 관계된 것이므로, 김홍원 자신이 직접 관에 청원하지 않고 노(奴)인 군석의 이름으로 청원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재산에 관한 일은 노를 대행시키는 일반적인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때의 소지의 문체는 본문과 같이 이두문(吏讀文)을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물론 양반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올릴 때는 한문투(漢文套)로 작성하여 올린다. 문서의 내용은 부안김씨가의 장원(莊園)이 조림평(照林坪)에 있는데 임진왜란을 만나 관리가 어렵게 되었다. 이때 이웃에 사는 신중부(申仲夫) 등 4인이 빌려서 경작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의 양안(量案)에 빌려주어 경작한 사람의 이름으로 현록이 되어 있으니 김홍원 자신의 노(奴)의 이름으로 현록하게 해 달라는 것이 요지이다. 관에서는 추문(推問)하기 위하여 소지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김홍원 선대의 재산의 축재 과정이 있어 흥미롭다. 곧 보(洑)를 쌓아 논을 만든 것과 값을 주고 밭을 사들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축적된 재산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와중에서 관리가 어렵게 되자 현지인에게 빌려 주어 경작하게 하였고, 난리가 끝나자 다시 노(奴)를 대리인으로 삼아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부안김씨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나타났으리란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고 하겠다. ( 작성자 : 심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310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4.분재기(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分財記) / 조선 중종 1년(1506)~광해군 1년(1609) / 13건 / 민간문서/분재기류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낱장
    보물 제900-4호는 우반동 김씨가에 전해오는 분재기 13장이다. 이 13장의 문서에는 분급(分給)ㆍ화회(和會)ㆍ허여(許與)ㆍ별급(別給) 문서 등이 있다. 이 문서들은 1506년(홍치 19년은 정덕 1년 해당한다)부터 1609년(만력 37) 사이에 작성되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재산 분배 방식이나 제사 봉행 방식에 있어서 조선후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반동 김씨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분재기들, 특히 보물 제900-4호에 있는 문서들은 이 시기의 재산 분배 방식과 제사 봉행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1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5.명문(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明文) / 조선 선조 6년(1573)~광해군 11년(1619) / 12건 / 민간문서/명문류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낱장
    보물 제900-5호는 우반동 김씨가에 전해오는 매매문기(買賣文記) 11장과 입안 1장이다. 매매문기는 토지에 관련된 문서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노비에 관한 문서는 1장이 있다. 특히 노비에 관한 문서는 노비매매에 관한 일괄문서로써 입안을 청구하는 소지, 매매문기, 증인의 진술서인 초사(招辭), 그리고 관의 입안이 점연(粘連)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만력 1년(1573)부터 만력 47년(天命 4년, 1619)사이에 작성된 문서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물가, 매매관행, 우반동 김씨가의 경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2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6.공신녹권(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功臣錄券) / 조선 중종 2년(1507)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종덕 / 전북 부안군 / 선장
    보물 제900-6호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살고 있는 부안 김씨가(扶安金氏家)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서 중 정국원종공신녹권(靖國原從功臣錄券)이다. 공신녹권은 공신으로 녹훈(錄勳)된 사람들에게 공신으로 책봉된 사유와 공신의 등급을 기록하여 내려주는 문서이다. 부안김씨는 대대로 혁혁한 가문이었다.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의 선조들은 계속해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김홍원의 고조(高祖)인 김차손(金次孫)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천거되기도 하였고 증조(曾祖)인 김석필(金錫弼)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지내었다. 특히 김석필은 형 석현(錫賢)ㆍ 동생 석충(錫忠)과 더불어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이 삼형제는 정국원종 공신1등에 녹훈되었다. 우반동 김씨가에 전해오는 공신녹권은 이 삼형제 가운데 김석필이 원종공신에 책봉되면서 받은 것이다. 부안김씨는 김석필 이후로는 높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따라서 부안김씨 가문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중앙의 사족이 어떠한 이유로 지방에 낙향하여 생활하게 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3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初雕本 瑜伽師地論 卷十五) / 고려시대(11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
    이 책은 11세기 고려 현종(1011~1031)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부처님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두루마리로 제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찍어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습함(習函)에 수록되어 있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역(玄奘譯)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 중 제 15권이다. 이 판본(版本)은 해인사(海印寺)소장의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판수제(版首題)와 권(卷), 장(張), 함차(函次)표시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초조본은 판(板)의 앞에 새겨지고 있는데, 재조본에는 판(板) 끝에 새겨지고 있다. 장차(張次)표시가 초조본에는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장(張)'으로 되어 있고, 또한 초조본에는 권말의 간기(刊記)가 생략되어 있으나, 재조본에는 "임인세고려국대장도익봉칙조조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로 되어 있다. 그리고 초조본 본문에 "송태조(宋太祖)의 조부휘(祖父諱)인 '경(敬)'자와 겸피휘자(兼避諱字)인 '경(竟)'자가 결획(缺劃)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초조본(初雕本)은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印刷狀態)등으로 미루어 국보 제271호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권제십이(卷第十二), 국보 제272호인 권제삼십이(卷第三十二)와 같은 시기인 11세기에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4

    권벌 종가 고문서-교서(權橃 宗家 古文書 - 敎書) / 조선 중종 33년(1538)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중종 33년(1538) 3월 3일에 국왕이 권벌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하고 그 직무에 진력(盡力)할 것을 당부하는 훈유교서(訓諭敎書)이다. 먼저 임금과 백성이 서로 의뢰하고 있음에 대하여 논하고, 관찰사의 소임, 권벌의 행의(行誼) 등을 적고, 끝에 가서 사형에 관계되는 죄인은 계문(啓聞)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의 처리는 관찰사에게 위임하고 있다. 교서와 유서는 중종 33년(1538) 3월 3일 동시에 권벌에게 내려진 것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문서는 1538(중종33) 3월 초3일에 임금이 권벌(權橃)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서(敎書)이다. 교서는 국왕이 신하에게 발하는 문서로 명령이나 훈유, 그리고 선포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시대 충렬왕 이전에는 의제황제(擬制皇帝) 체제였기 때문에 조서(詔書)라고 하였는데, 원의 간섭기에 들어와서 교서(敎書)로 고쳤다. 교서의 내용으로는 즉위(卽位)ㆍ구언(求言)ㆍ공신녹훈(功臣錄勳)ㆍ배향(配享)ㆍ문묘종사(文廟從祀)ㆍ반사(頒赦)ㆍ권농(勸農)ㆍ사명훈유(使命訓諭)ㆍ봉작(封爵)ㆍ책봉(冊封)ㆍ가례(嘉禮)ㆍ포장(襃獎) 등 다양하다. 이 문서는 권벌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하면서 내린 문서이므로 사명훈유에 속한다. 사명훈유일 경우의 교서식은 ‘敎 具銜姓名 書, 王若曰云云, 故玆教示 想冝知悉. 年號月日.’이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교서식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실려 있지 않고 또 고려시대의 교서와도 성격이 다르다. 고려시대의 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체적으로 교서식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의 주인공인 권벌(1478~154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중허(仲虛)이고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이다. 저서로는 『충재선생문집(冲齋先生文集)』 9권 5책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 작성자 : 심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315

    권벌 종가 고문서-유서(權橃 宗家 古文書 - 諭書) / 조선 중종 33년(1538)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중종 33년(1538) 3월 3일에 국왕이 권벌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하고 그 직무에 진력(盡力)할 것을 당부하는 훈유교서(訓諭敎書)이다. 먼저 임금과 백성이 서로 의뢰하고 있음에 대하여 논하고, 관찰사의 소임, 권벌의 행의(行誼) 등을 적고, 끝에 가서 사형에 관계되는 죄인은 계문(啓聞)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의 처리는 관찰사에게 위임하고 있다. 교서와 유서는 중종 33년(1538) 3월 3일 동시에 권벌에게 내려진 것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6

    권벌 종가 고문서-유지(權橃 宗家 古文書 - 有旨) / 조선 중종 12년(1517)~중종 34년(1539) / 2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보물 901-3호는 중종이 권벌에게 보내는 유지로 2점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사헌부 장령 권벌 개탁(司憲府掌令權橃開拆) 중종 12년(1517) 10월 21일에 국왕이 권벌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고 좌승지 이모(李某)를 통하여 그를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고 명하는 유지이다. 작성 년월일 위에 『승정원인(承政院印)』이 찍혀 있다. 유지는 승정원의 담당 승지가 왕명을 받아 그 내용을 직접 서사(書寫)하여 피명자(被命者)에게 전달하는 문서이다. ②주청사 권벌 개탁(奏請使權橃開拆) 중종 33년(1539) 8월 16일에 국왕이 우승지 송모(宋某)를 통하여 주청사 권벌에게 보내는 유지이다. 내용은 5항(行)에 걸쳐 세로로 쓰고 작성 년월일 위에 『승정원인(承政院印)』이 찍혔으며, 오른쪽에 서사(書寫)한 '우승지 송[수결]'이 있다. 내용에 동행하는 동지사(冬至使)에게 질병이 있을 경우, 대임(代任)할 것을 특별히 명령하고 있다. 문서가 몇 군데 좀이 먹어 판독되지 않는 곳이 있다. 권벌은 이때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갔었는데, 사신으로 가서 공이 있었다 하여 상으로 이듬해(1540) 7월 24일에 노비 5구(口)를 내리는 사패교지(賜牌敎旨)를 받았다. 이 유지들은 중종 12년(1517)과 중종 34년(1539)에 각각 발급된 것으로 특히 중종 34년(1539) 종계변무주청사의 임부를 띠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문서는 내용도 특이하거니와, 이두문(吏讀文)도 섞여 있으며, 귀국한 뒤에는 상으로 노비를 하사받은 사패교지(賜牌敎旨) 가 남아 있어 고문서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7

    권벌 종가 고문서-시권(權橃 宗家 古文書 - 試券) / 조선 중종 2년(1507)~고종 12년(1875) / 20건 / 관부문서/시권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중종 2년(1507) 4월 권벌의 문과시권(文科試券)을 비롯하여 권벌의 아들 권동보(權東輔) 4건, 손자 권내(權來) 4건, 권상충(權尙忠) 1건, 권두인(權斗寅) 2건, 권정륜(權正倫) 1건, 권계하(權啓夏) 3건, 권대연(權大淵) 2건, 권상직(權相稷)ㆍ권인섭(權仁燮) 각 1건 등 자손들의 시권으로 총 21건이다. 특히 권벌의 시권은 중종 2년(1507)에 그가 문과 병과(丙科) 제 2인으로 급제할 때의 시권으로 연대도 올라가고 과지의 형태도 살필 수 있으며, 특히 권벌의 유창한 문장과 능란한 필치(筆致)를 아울러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문서는 조선 명종조의 저명한 문신인 충재(沖齋) 권벌(權橃,1478~1548)이 지은 것이다. 문집에도 <선시선종책(善始善終策)>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사에 의하면 명종(明宗) 11년 병진년(1556)에 독서당(讀書堂) 관원들에게 ‘선시선종(善始善終)’을 글제로 삼아 책문(策問)을 시험하였던 일이 있는데, 이 때 제출한 시권(試券)으로 보인다. 명종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이나 현종(玄宗)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들이 비록 재위 중에 훌륭한 치적을 남겼지만, 마지막이 좋지 못하여 오점을 남기게 되었던 전례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도록 시작과 끝이 모두 훌륭한 정사를 할 수 있는 방도를 듣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충재의 답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시작과 끝을 잘 하려면 마음을 잘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선악(善惡)의 구분이 결정되는 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고 보았다. ② 중국의 고대 국가인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이 처음과 끝을 잘 한 실례를 들고, 결론적으로 시종일관 실천하는 것에 힘을 써서 천심과 민심에 부합하였던 데서 성공의 원인을 찾고 있다. ③ 당나라 태종이나 현종이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한 원인은 굳은 심지와 한결같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④ 지금 명종의 자질이나 마음가짐이라면 충분히 성인의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방도로, 임금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항상 성찰하여 외물에 부림을 받지 않도록 하며, 깊은 생각을 통하여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을 제시하였다. ⑤ 마음을 보존하는 요체는 경(敬)이며, 그 경의 요체는 단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에 있으므로,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마음을 밝히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작성자 : 권경렬)
    출처 : 문화재청
  • 475318

    권벌 종가 고문서-교지 및 교첩(權橃 宗家 古文書 - 敎牒및 敎旨) / 조선 중종 2년(1507)~고종 31년(1894) / 139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이 문서는 경상도 봉화 유곡(酉谷, 일명 닭실)에 소재해 있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교지와 교첩으로, 모두 139점이다. 충재 종손가에는 500여 년간 교지(敎旨)ㆍ교첩(敎牒)을 비롯한 분재기(分財記)ㆍ문기(文記)ㆍ소지(所志)ㆍ호구단자(戶口單子)ㆍ준호구(准戶口)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정치ㆍ관제ㆍ경제ㆍ사회ㆍ가족제도 등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 권벌과 그 후예들에 관련된 고문서들이다. 권벌은 유곡 권씨의 입향조로서, 그 일족은 유곡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食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이다. 그는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고, 재직기간 동안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ㆍ참찬관(參贊官)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조에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저서로는 『충재선생문집(冲齋先生文集)』이 있다. 충재 종손가에 전해내려 오는 고문서 가운데 교서 및 교첩은 139점이다. 교지와 교첩은 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사령서 내지 명령서로써 구체적 내용을 보면, 중종 2년(1507)에 발급된 권벌의 홍패교지, 중종 38년(1543)에 발급된 권동보(權東輔)의 백패교지, 중종 35년(1540)에 내려진 사패교지를 비롯하여 조부 권곤(權琨)과 조모 서원정씨(西原鄭氏), 모친 파평윤씨(坡平尹氏), 처 화순최씨(和順崔氏)에게 내려진 추증교지(追贈敎旨), 아들 동보(東輔)와 손자 래(來)에게 내려진 교지와 교첩들이다. 충재 종손가에 전래되고 있는 교지류와 교첩류는 조선조 관제와 인사행정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특히 충재의 관력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19

    권벌 종가 고문서-녹패(權橃 宗家 古文書 - 祿牌) / 조선 현종 11년(1670)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현종 11년(1670) 정월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당시 종사랑(從仕郞) 영릉참봉(英陵參奉) 권목(權霂)에게 내려주는 녹과증서(祿科證書)이다. 사본 41.0cm×11.0cm. 녹패는 이조ㆍ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종친ㆍ문무관원에게 녹과(祿科:녹봉 등급)를 정하여 당사자에세 내려주는 증서이다. 녹과는 제1과에서 제18과로 정해져 있다.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 있고, 참의(參議)ㆍ정랑(正郞)의 수결(手決)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0

    권벌 종가 고문서-방목(權橃 宗家 古文書 - 榜目) / 조선 태종 14년(1414) / 1건 / 관부문서/첩관통보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태종 14년(1414)에 실시한 친시문과방목(親試文科榜目)으로 권도(權蹈)의 방(榜) 아래에 을과(乙科) 2등 제4인에 합격한 황보인(皇甫仁)에게 발급된 문과방목이다. 조선조 방목으로는 현재 발견된 것 중에는 가장 오랜 것으로 특히 방목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만, 상당한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마멸되어 식별이 어려운 점이 유감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1

    권벌 종가 고문서-입안(權橃 宗家 古文書 - 立案) / 조선 선조 16년(1583)~순조 4년(1804) / 2건 / 관부문서/증빙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선조 16년(1583)과 순조 4년(1804) 입후(立後)를 인정하는 예조입안(禮曹立案) 2건이다. 입안이란 관에서 발급하는 문서로서, 개인의 청원에 따라 어떤 사실ㆍ입후ㆍ매매ㆍ결송(決訟)ㆍ양도 등을 확인하여 이를 인증(공증)해 주는 문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만력(萬曆)11년 5월 25일 예조입안. 선조 16년(1583) 5월 25일에 예조에서, 계후(繼後)를 위하여 권씨 가문에 공증해 준 입안이다. 당시 권벌의 맏아들인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동미(東美)의 둘째아들 내(來)를 계후하는 문서이다. 당시 결재한 예조의 당성과 낭청 2인의 수결이 있고, 예조의 관인이 세 군데 적혀 있다. ②가경(嘉慶)9년 3월 일 예조입안. 순조 4년(1804) 2월에 예조에서 계후를 위하여 권씨가문에 내린 입안이다. 충재(?齋) 권벌(權?)의 10세손 권재운(權載運, 1775~1794)이 후사가 없이 죽자, 권재운의 10촌 아우 권재덕(權載德)의 둘째아들 성갑(聖甲)으로 계후하는 문서이다. 이들 문서 중에 선조 11년(1583)의 계후 입안은 입후 문서로는 연대가 오랜 것이며, 특히 태종 14년(1414)의 친시문과방목은 현재 발견된 것 중에 최초의 방목으로 보존상태가 불량하기는 하나 방목 연구에 매우 귀중한 문서이다. 【 번역 해제 】 (1장) 선조 16년 5월 25일 예조에서 계후(繼後)를 위하여 권씨 가문에 내려 준 입안(立案)으로 당시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권동보(權東輔)가 적식(嫡室)과 첩 사이에 모두 자식이 없어 동복(同腹) 아우 동미(東美)의 둘째 아들 내(來)를 후사로 삼는 문서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권동보의 아우 동미, 이성(異姓) 7촌 조카 참판 구봉령(具鳳齡), 이성 3촌 조카인 진사 홍사려(洪思礪)가 각각 예조에 올린 답통(答通)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이 입안의 담당 승지는 권극례(權克禮)이고, 예조에서는 판서ㆍ참판ㆍ좌랑 2인 등 4인이 서명하였다. 권동보는 충재(?齋) 권벌(權?)의 맏아들이다. 계후 문서로서는 연대가 오랜 편이며, 문서의 형식도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어 임진란 이전의 계회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아울러 문서에 쓰인 이두는 이두 연구에도 소중한 참고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 (2장) 순조 4년(1804) 2월에 예조에서 계후(繼後)를 위하여 권씨 가문에 내려 준 입안(立案)이다. 충재(?齋) 권벌(權?)의 10세손 권재운(權載運)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권재운의 동성 10촌 아우 권재덕(權載德)의 둘째 아들 성갑[聖甲:뒤에 계하(啓夏)로 개명]으로 계후하는 문서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권재덕과 권씨 가문의 문장(門長) 첨지(僉知) 권정응(權正凝)의 소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대신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대로 정식(定式)에 의하여 입안을 내려 준 것이다. 예조에서는 판서만 수결하였다. 계후에 관한 입안(立案)을 살피는 데에 참고자료가 되며, 위의 만력(萬曆) 11년(1583) 예조의 입안과 함께 충재 권벌의 종손가의 계보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
    출처 : 문화재청
  • 475322

    권벌 종가 고문서-분재기(權橃 宗家 古文書 - 分財記) / 조선 성종 1년(1470)~영조 28년(1752) / 15건 / 민간문서/분재기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이 문서는 경상도 봉화 유곡(酉谷, 일명 닭실)에 소재해 있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분재기류로, 모두 15점이다. 충재 종손가에는 500여 년간 분재기를 비롯하여 교지(敎旨)ㆍ교첩(敎牒)ㆍ문기(文記)ㆍ소지(所志)ㆍ호구단자(戶구單子)ㆍ준호구(准戶口)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정치ㆍ관제ㆍ경제ㆍ사회ㆍ가족제도 등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 권벌과 그 후예들에 관련된 고문서들이다. 충재 종손가에 전해내려 온 분재기류에는 권벌의 어머니가 오빠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받으면서 작성된 허여문기(許與文記), 권벌의 처 최씨(崔氏)가 남매와 함께 노비와 토지를 분재 받던 때에 작성된 화회문기(和會文記), 권벌이 숙부에게서 과거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로 받은 별급문기(別給文記) 등 다양하게 남아있다. 분재기는 양반가문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권벌 종손가에 남아있는 분재기 역시 권씨 가문의 경제력을 비롯한 조선조 가족제도ㆍ사회제도 등을 연구하는데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3

    권벌 종가 고문서-명문(權橃 宗家 古文書 - 明文) / 조선 광해군 10년(1618)~순조 31년(1831) / 25건 / 민간문서/명문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이 문서는 경상도 봉화 유곡(酉谷, 일명 닭실)에 소재해 있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문기(文記)류 25점이다. 충재 종손가에는 500여 년간 문기뿐만 아니라 교지(敎旨)ㆍ교첩(敎牒)ㆍ분재기(分財記)ㆍ소지(所志)ㆍ호구단자(戶口單子)ㆍ준호구(准戶口)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정치ㆍ관제ㆍ경제ㆍ사회ㆍ가족제도 등에 관한 것으로 권벌을 비롯한 선조와 후예들에 관련된 고문서들이다. 권벌은 유곡 권씨의 입향조로서, 그 일족은 유곡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다. 충재 종손가에 전해지고 있는 고문서 가운데 문기류는 25점으로 조선시대 문기는 주로 토지나 노비 등을 매매할 때 작성한 문서들이다. 충재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문기류는 광해군 10년(1618)에서 순조 31년(1831)까지의 것이 40여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25점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토지매매문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매매문기의 내용을 통해서 권벌 일족이 유곡에 세거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경제적 기반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4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初雕本 瑜伽師地論 卷五十三) / 고려시대(11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권자장
    이 책은 11세기 고려 현종(1011~1031)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부처님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두루마리로 제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찍어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인도의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의 현장(602~664)이 100권으로 번역한 유가사지론 제 53이다. 악함(惡函)에 수록되어 있다. 이 판본(版本)은 해인사(海印寺) 소장의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판수제(板首題)와 권(卷)ㆍ장(張)ㆍ함차(函次)표시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초조본은 판(板)의 앞에 새겨지고 있는데, 재조본에는 판(板)의 끝에 새겨지고 있다. 장차(張次)표시가 초조본에는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장(張)'으로 되어 있고, 또한 초조본에는 권말의 간기가 생략되어 있는데 비해 대장도감본에는 "정미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피휘결획자(避諱缺劃字)가 다같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초조본(初雕本)은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印刷狀態)등으로 미루어 11세기에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5

    권벌 종가 고문서-소지(權橃 宗家 古文書 - 所志) / 조선 선조 17년(1584)~헌종 11년(1845) / 27건 / 관부문서/소지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이 문서는 경상도 봉화 유곡(酉谷, 일명 닭실)에 소재해 있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소지(所志)류로서, 모두 27점이다. 충재 종손가에는 500여 년간 소지 뿐만 아니라 교지(敎旨)ㆍ교첩(敎牒)ㆍ분재기(分財記)ㆍ문기(文記)ㆍ호구단자(戶口單子)ㆍ준호구(准戶口) 등 다양한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정치ㆍ관제ㆍ경제ㆍ사회ㆍ가족제도 등에 관한 것으로 권벌을 비롯한 선조와 후예들에 관련된 고문서들이다. 권벌은 유곡 권씨의 입향조로서, 그 일족은 유곡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다. 소지는 백성들이 관에 청원이나 진정 및 소송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문서이다. 일반적으로 소지는 수령이나 관청에 올리면, 해당 관원은 그 소지에 대한 처분(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제음(題音, 뎨김)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제음을 내린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게 된다. 내용면에서는 산송(山訟) 등 다양하다. 충재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소지는 선조 17년(1584)에서 조선말까지 오랜 시기에 걸쳐있다. 그 가운데 진정(陳情)을 다룬 소지가 대부분이다. 충재 종손가에 전해지고 있는 소지류에는 조선시대 양반과 서민들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자료가 많다. 따라서 소지는 조선시대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6

    권벌 종가 고문서-호적단자(權橃 宗家 古文書 - 戶籍單子) / 조선 숙종 16년(1690)~고종 10년(1873) / 30건 / 관부문서/호적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이 문서는 경상도 봉화 유곡(酉谷, 일명 닭실)에 소재해 있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호구단자(戶口單子)ㆍ준호구(准戶口)로서, 모두 30점이다. 충재 종손가에는 500여 년간 호구단자(戶口單子)ㆍ준호구(准戶口)뿐만 아니라 교지(敎旨)ㆍ교첩(敎牒)ㆍ분재기(分財記)ㆍ문기(文記)ㆍ소지(所志) 등 다양한 고문서가 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정치ㆍ관제ㆍ경제ㆍ사회ㆍ가족제도 등에 관한 것으로 권벌을 비롯한 선조와 후예들에 관련된 고문서들이다. 권벌은 유곡 권씨의 입향조로서, 그 일족은 유곡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다. 호구단자는 3년마다 제출하는 호구신고서이고, 준호구는 호적대장에서 등급해주는 것으로 호적등본에 해당한다. 충재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호적류는 숙종 16년(1690) 권두인(權斗寅)의 준호구를 비롯하여 조선후기까지 준호구와 호구단자 등 30점이다. 또한 충재 종손가에 전해지고 있는 호적류는 숙종 연간에서 조선후기까지 이어져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가족제도ㆍ신분제도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7

    권벌 종가 고문서-연산군일기세초지도(權橃 宗家 古文書 - 燕山君日記洗草之圖) / 조선 중종 4년(1509)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중종 4년(1509) 9월에 제작된 것으로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승정원 주서로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고 있을 때에 받아 안동권씨가문에 둔 것이다. 상단에 그림을 그리고, 또 그 아래 2단으로 나누어 주색으로 계선(界線)을 긋고 67명의 좌목(座目)을 68항(行)에 걸쳐 썼다. 좌목의 오른쪽 윗단 첫줄은 <정덕사년구월십구일 연산군일기 수찬전후관(正德四年九月十九日 燕山君日記 修撰前後官)>이란 제목이 있고, 그 아래 행사에 참가한 관원의 직위ㆍ성명 등을 적고 있다. 회화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나, 그림이 보이지 않고 사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서에 포함시켰다. 실록편찬 및 계회(契會)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이다. 〈연산군일기세초도(燕山君日記洗草圖)〉는 그림만 선명하게 보이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희귀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8

    권벌 종가 고문서-산릉도감제명록(權橃 宗家 古文書 - 山陵都監題名錄) / 조선 선조 7년(1573)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선조 8년(1575)에 제작된 견본담채(絹本淡彩)의 족자로서,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장례 때의 산릉도감(山陵都監) 관원의 계회도(契會圖)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전서체로 <山陵都監題名錄>이란 그림의 제목 7자를 썼고, 중단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안견(安堅, ?~?)의 산수화풍(山水畵風)으로 그린 계회도 형식의 산수인물화가 있고, 하단에는 도제조(都提調) 박순(朴淳, 1523~1589), 상서원 판관(尙書院判官) 권동보(權東輔, 1518~1592) 등 22명의 관직ㆍ성명ㆍ본관 등을 밝힌 좌목이 있다. 또 그림 왼쪽의 여백에는 권동보의 매부(妹夫)였으며 뒤에 판서를 지낸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의 자작자필(自作自筆)인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조선전기 계회도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만 상태가 불량하여 그림과 글씨의 판독이 어려우나,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하여 문서로 취급한 것이다. 이는 권벌의 맏아들 권동보가 당시 도감계원으로 받아서 그 자손에게 전래한 것이다. 계회 연구의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29

    권벌 종가 고문서-왕세자책예도감계병(權橃 宗家 古文書 - 王世子冊禮都監稧屛) / 조선 숙종 14년(1690) / 1점 / 국왕문서/책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숙종 14년(1690)에 제작된 지본설채(紙本設彩)의 장방형 그림 6폭과 계병서(契屛序) 1폭, 좌목 1폭 등 8폭을 표구하여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제1폭은 왕세자(뒤의 경종)의 책례도감계병을 그리게 된 내용을 밝힌 서문이고, 제2폭~7폭은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인물화이며, 제8폭은 도제조(都提調)이며 세자사(世子師)였던 권대운(權大運, 1612~1699) 등 19명의 관직ㆍ성명ㆍ본관 등을 밝힌 좌목이다. 그림은 치졸(稚拙)하여 문화재로 지정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나 서문과 좌목은 인물ㆍ연기(年紀) 등이 확실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커서 문서로 취급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0

    권벌 종가 유묵-1.김구진묵(權橃 宗家 遺墨-金絿眞墨) / 조선 중종 14년(1519) / 1건 / 서예/서예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조선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자암 김구가 중종 14년(1519) 6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예조 참판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어 나가는 충재(冲齋) 권벌(權橃)에게 증별(贈別)로 써서 준 족자이다. 사본 세로 98.7cm, 가로 47.6cm 크기의 종이에 초당(初唐)의 시인 왕발(王勃)의 〈별설화시(別薛辥華詩)〉 오언율시(五言律詩) 1수를 초서체로 세로 3항(行)에 걸쳐 쓰고 좌측 하단에 '대유서증(大柔書贈)'이라 적었다. 대유는 김구의 자(字)이다. 조선전기의 4대 명필의 한 사람이며 기묘사현(己卯四賢)의 한 분인 자암 김구의 이 족자는 서예 특히 초서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됨은 물론이려니와, 권벌의 교유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 번역 해제 】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김구(金絿, 1488∼1534)가 왕발(王勃, 650~676)이 지은 「설화와 헤어지며[別薛華]」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초서(草書)로 적은 작품이다. 이 유묵(遺墨)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서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좌천(左遷)되어 나가는 충재(冲齋) 권벌에게 증별(贈別)로 써서 준 것이라고 전한다. 왕발(王勃)은 당(唐)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자안(字安)이다. 수(隋)나라 왕통(王通)의 후손이다. 고종(高宗) 때 궁정(宮廷)에 들어가 조산랑(朝散郞)이 되었다. 검남(劒南)으로 가서 도독(都督) 염백서(閻伯嶼)를 위하여 쓴 「등왕각서(藤王閣序)」와 시는 특히 유명하다. 노조린(盧照鄰)ㆍ낙빈왕(駱賓王)ㆍ양형(陽炯)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진다. 김구(金絿, 1488∼1534)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503년(연산군9)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일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2) 생원ㆍ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臺諫)의 현실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저서로는『자암집(自庵集)』, 유품으로는『자암필첩(自庵筆帖)』『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 「이겸인묘지(李謙仁墓誌)」 등이 있고, 단가 3수와 「화전별곡(花田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이 유묵(遺墨)은 현존(現存)하는 자암(自庵)의 대자(大字) 초서(草書)로는 가장 우수하여 초서(草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좌천(左遷)되어 가는 충재(冲齋)에게 써서 준 것으로, 이 시의 내용이 너무나 애절하여 나중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뒤의 상황을 미리 맞추어 놓은 듯하다. 이는 충재(冲齋)의 교우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 작성자 : 주정순 )
    출처 : 문화재청
  • 475331

    권벌 종가 유묵-2.허목청암정편액제자(權橃 宗家 遺墨-許穆靑巖亭扁額題字) / 조선 숙종 8년(1682) / 1건 / 서예/서예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낱장
    숙종 8년(1682) 문신이며 학자로서 또 전서의 대가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충재 권벌의 정자였던 청암정(靑巖亭)의 편액을 써서 준 것이다. 세로 54.2cm, 가로 187.0cm 크기의 종이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4대자(大字)를 전서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가로 쓰고, 다음에 중자(中字) 해서체로 소지(小識)를 세로로 썼다. 이 편액은 판각하여 청암정에 걸려있고, 원본은 권벌의 종손가에 보관하고 있다. 이 편액이 허목의 절필(絶筆)이라 한다. 조선 중기 학자ㆍ문신이며 전서의 대가인 미수 허목의 절필(絶筆))이란 점에서 예술적 가치는 물론이려니와 충재 권벌의 지절(志節)과 덕행을 존모(尊慕)하는 허목의 은미(隱微)한 뜻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 번역 해제 】 1682년(숙종8) 여름에 허목(許穆, 1595∼1682)이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청암정(靑巖亭)에 쓴 편액(扁額) 제자(題字)이다. 이 유묵(遺墨)은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대자(大字) 네 자를 전서체(篆書體)로 우측(右側)에서 좌측(左側)으로 가로 쓰고, 다음에 중소자(中小字) 해서(楷書)로 소식(小識)을 종서(縱書)하였다. 이 편액액자(扁額額字) 및 소식(小識)은 봉화(奉化) 유곡읍(酉谷邑) 유곡리(酉谷里) 소재 청암정(靑巖亭)에 판각(板刻)하여 게판(揭板)되어 있고 그 원본(原本)은 충재종손가(冲齋宗孫家)에 보관(保管)되어 있다. 게판(揭板)된 청암정편액(靑巖亭扁額)에는 소식(小識) 다음에 권씨가문(權氏家門)에서 쓴 3행(行)의 후식(後識)이 추록(追錄)되었다. 청암정(靑巖亭)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 닭실마을)에 있는 정자로 권벌(權橃)이 1526년(중종21)에 조성하였다. 편액(扁額)은 바로 이 정자 안에 걸려 있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냇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고 조촐한 장대석 돌다리를 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모습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 길이로 조정하여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다. 이 건물을 지은 권벌(權橃, 1478~1548)은 조선 중기 중종ㆍ인종ㆍ명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다. 1496년(연산군2)에 진사(進士)가 되고, 1507년(중종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ㆍ사성(司成)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1519년 예조 참판이 되었다. 1545년(인종1) 우찬성으로 의금부 판사를 겸하였고, 이 해 7월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올랐으나 정순붕(鄭順朋)의 반대로 삭훈(削勳)되고, 1547년(명종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된 죄로 구례(求禮)에 유배된 후,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문집에『충재집(冲齋集)』이 있다. 이 글을 쓴 허목(許穆, 1595∼1682)은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ㆍ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ㆍ태령노인(台嶺老人),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ㆍ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그림ㆍ글씨ㆍ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서로는『동사(東事)』『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경설(經說)』『경례유찬(經禮類纂)』『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미수(眉叟)는 청암정(靑巖亭)의 내력과 수석(水石)이 절경(絶景)임을 말하고, 자신이 평소 한 번 노닐고 싶었지만 나이가 많고 길이 멀어서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말했다. 현인(賢人)을 사모(思慕)하는 마음으로 특별히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적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다. 충재종손가(冲齋宗孫家)에는 1681년(숙종7) 가을에 충재(冲齋)의 현손(玄孫) 권두인(權斗寅)에게 써서 준 미수전(眉叟篆)도 있다. 그리고 보물 제592호로 지정된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은 허목(許穆)의 자필고본(自筆稿本)으로 3종 12책인데, 미수(眉叟)의 전서(篆書)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 작성자 : 주정순 )
    출처 : 문화재청
  • 475332

    권벌 종가 유묵-3.장필진묵(權橃 宗家 遺墨-張弼眞墨) / 조선 세조 11년(1465) ~ 연산 10년(1504) / 1점 / 서예/서예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명(明)나라 성화(成化)~홍치(弘治) 연간의 문장가이며 초서의 대가인 동해(東海) 장필(張弼)의 초서 족자 2폭. 권벌의 5대손 권두인(權斗寅)ㆍ권두경(權斗經)의 지기(識記) 1폭이 첨가되어 총 3폭이다. 권두인ㆍ권두경 지기 1폭과 함께 3폭이 권벌의 종손가에 보관되어 있다. 건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폭에는 송(宋)나라 학자 정호(程顥)의 〈추일(秋日)〉이라는 칠언율시(七言律詩) 1수를, 제2폭에는 당(唐)나라 시인 양거원(楊巨源)의 〈수우부마(酬于附馬)〉라는 칠언율시 1수를 초서체의 대자(大字)로 쓰고 좌측 하단에 '동해옹(東海翁)'이란 자호를 적었다. 제3폭은 권두인ㆍ권두경의 자작자필의 후지로 이 족자의 입수 경위와 장필의 이력을 적고 있다. 장필의 초서는 서예적 가치가 높거니와 우리 서예 특히 초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만큼 초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장필의 초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극히 드물다고 한다. 중국인의 글씨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쳤고 글씨 또한 권벌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구입한 사실이 분명하며, 제3폭의 자작자필의 권두인ㆍ권두경의 후지 또한 필체가 아담하므로 일괄로 지정에 포함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3

    권벌 종가 유묵-4.이황서첩(權橃 宗家 遺墨-李滉書帖) / 조선 중종 1년(1506)~명종 1년(1546) / 1첩 / 간독류/간독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이황서첩(李滉書帖)》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글씨가 쓰여진 첩으로, 이면에는 <관안(官案)〉이란 제목의 각 관아와 병영의 수령을 기재해 놓고 있다. 형태(形態)를 살펴보면, 퇴계(退溪)의 필적(筆蹟)인 5절(折) 10면(面)은 명주(明紬) 바탕에 선지(鮮紙)로 배접(褙接)한 절첩본(折貼本)으로 표지(表紙)는 양질(良質)의 저지(楮紙)로 여러 겹 첩합(貼合)한 것이다. 퇴계의 글씨 다음에는 충재 선생의 글이 있고, 뒷면에는 경상도 각 관아와 병영의 수령을 기록한 <관안》이 있는데, 아쉽게도 감포의 만호로 이희영이 부임하였다는 ‘감포만호 이희영 병신팔월 초이일임(甘浦萬戶 李希英 丙申八月 初二日任)’이란 기록 외에는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다. 필자인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경상북도 예안(禮安) 출생으로 5세 이후에 은거를 결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거듭되는 왕의 징소(徵召)에 진퇴(進退) 거듭하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기도 하였다. 서첩에는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서(序)ㆍ발(跋)ㆍ지기(識記) 등이 없어 정확한 필사연대(筆寫年代)는 알 수는 없으나 퇴계 선생의 친필(親筆)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이 서첩(書帖)은 조선(朝鮮) 중종(中宗)∼선조초(宣祖初) 때의 대학자(大學者)이자 문신(文臣)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친필(親筆)이다. 필서(筆書)한 연대(年代)나 그 수증(受贈)에 대한 배경을 살필 수 있는 서(序)ㆍ발(跋) 등은 없으나, 명주(明紬)에 쓴 점으로 보아 법첩용(法帖用)으로 쓴 듯하다. 이 서첩(書帖)의 구성 형태를 살펴보면, 퇴계(退溪)의 필적(筆跡)인 5절(折) 10면(面)은 명주(明紬) 바탕에 저지(楮紙)로 배접(褙接)하였으며, 표지(表紙)는 양질저지(良質楮紙)로 여러 겹 배접한 것이다. 표지(表\紙) 좌측상단부분(左側上端部分)에 있는 「퇴도선생서(退陶先生書)」와 표제(表題), 끝에 있는 “이상은 퇴도 이 선생의 글씨이다.[右 退陶李先生書]”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후인(後人)의 글씨이다. 퇴계(退溪)의 필적(筆跡)은 매면(每面)에 2행(行), 매행(每行)에 5∼7자(字)씩 일정(一定)하지 않게 초서체(草書體)로 써졌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唐)나라 어현기(魚玄機)가 지은 「강릉수망기자안(江陵愁望寄子安)」과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하일서재서사(夏日西齋書事)」, 그리고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지은 「유양 이씨의 유경각에 제목을 붙임. 2수.[寄題瀏陽李氏遺經閣 二首]」에 나오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세 수(首)이다. 특히 마지막 시는 ?주자대전(朱子大全)』권2에 수록되어 있다. 원문은 “이것은 우리 집안의 참된 보물이니, 바구니에 가득 찬 황금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네.[箇是儂家眞寶藏 不應猶羨滿籝金]”인데, 원본에는 ‘장(藏)’과 ‘금(金)’ 두 글자가 누락되었다. 이 글을 쓴 이황(李滉, 1501∼1570)의 자(字)는 경호(景浩), 호(號)는 퇴계(退溪)ㆍ퇴도(退陶)ㆍ도옹(陶翁)ㆍ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본관(本貫)은 진보(眞寶)이다. 문과(文科)에 급제, 우찬성(右贊成)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集大成)한 대유학자(大儒學者)로 중종ㆍ명종ㆍ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도학(道學)은 물론(勿論) 시문(詩文)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서법(書法)이 매우 준경(遵勁)하여 당시에는 물론 후대에도 존경을 받았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이두문장왕조필(李杜文章王趙筆)”이라 격찬하였다. 이온계묘비(李溫溪墓碑)ㆍ성청송묘비(成聽松墓碑)ㆍ정령상묘비(鄭領相墓碑) 등 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고 법첩(法帖)도 많이 전한다. 이 서첩(書帖)은 퇴계(退溪)의 서체(書體) 특히 초서체(草書體) 연구硏究)의 자료가 된다. 그 아래는 충재가 이현보(李賢輔, 1467∼1555) 등과 지은 시 8수(首)를 후손이 해서(楷書)로 초록한 것인데,『충재집(冲齋集)』권1과 차운(次韻)한 사람의 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끝에 “이상은 모두 충재(冲齋) 부군(府君)의 시이다.[右幷 冲齋府君詩]”라는 글이 있는데, 문집에 있는 내용을 후대에 그대로 필사(筆寫)한 것이므로 그다지 중요한 자료는 아니다. 이 또한 문서의 성격이 위의 필첩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분류해야 한다. 그 다음에 부가된 관안(官案)은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의 관등(官等) 성명(姓名)을 적었던 필사본이다. 이 책은 당시 경상도 각 지방의 수령들의 임체(任遞)를 자세하게 전해준다. 이 책에는 현직에 종사하는 관리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관리들의 현황과 지방 관직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또한 문서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분류해야 한다. ( 작성자 : 주정순 )
    출처 : 문화재청
  • 475334

    권벌 종가 유묵-5.허목전서(權橃 宗家 遺墨-許穆篆書) / 조선 숙종 7년(1681) / 1책 / 간독류/간독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선장
    《미수전(尾叟篆)》은 숙종 7년(1681) 가을에 미수(尾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연천(連川)을 방문한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에게 써준 서첩이다. 체제는 《단서지계(丹書之戒)》, 《장명(杖銘)》, 《반명(盤銘)》, 《감명(鑑銘)》 등을 허목이 전서체로 쓰고, 뒤에 그의 조카 허호(許■)를 시켜 쓰게 하여, 앞에는 전서(篆書)가 있고, 뒤에는 예서(隸書)가 있다. 다음으로는 1682년에 작성한 권두인의 후지(後識)가 있다. 허목은(許穆)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ㆍ화보(和甫)이며 호는 미수(眉叟)이다. 광해군 7년(1615) 정언눌(鄭彦竊)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인조 2년(1624)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이 전서는 허목이 작고(作故)하기 1년 전인 87세에 작성한 것으로 이는 미수의 전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初雕本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三十六) / 고려시대(11~12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권자장
    이 책은 11세기 고려 현종(1011~1031)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부처님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두루마리로 제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찍어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장함(章函)에 수록되어 있는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화엄경』주본 80권 중 제 36권이다. 즉 39품(品) 가운데 십지품(十地品)의 일부에 속한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미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초조본은 해인사 소장의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해 보니 장차(張次)표시가 초조본에는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재조본에는 ‘장(張)’으로 되어 있고, 재조대장경은 24항(行), 매항(行) 17자인데 초조본이 23항(行) 14자임이 크다란 차이다. 또한 초조본에는 권말의 간기가 생략되어 있는데 비해 대장도감본에는 ‘을사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경(敬)’ 자(字)가 다섯 군데 나오는데 한곳이 결획되어 있으며 '이(爾), 무(無), 애(애)'자가 약자(略字)(이, 无, 애)로 처리되어 있다. 이 초조본은 인쇄상태와 지질등으로 미루어 보아 11세기 고려 현종 때 간행한 판본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6

    권벌 종가 유묵-6.권벌수적일선현수적(權橃 宗家 遺墨-權橃手蹟一先賢手蹟) / 조선 중종 1년(1506)~명종 22년(1567) / 1첩 / 간독류/간독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권벌수적(權?手蹟)》 또는 《선조수적(先祖手蹟)》은 충재(?齋) 권벌(權?)이 자제(子弟)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그가 관리(官吏)로 부임(赴任)하면서 공(功)을 세워 받은 사패(賜牌) 교지(敎旨)의 내용,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자구(字句) 수정 등을 초록(抄錄)한 것이고, 《선현수적(先賢手蹟)》은 세종(世宗)에서 단종(端宗)의 시기에 7인의 수적을 점부작첩(粘付作帖)한 것이다. 책의 전면(前面)은 ‘선조수적(先祖手蹟)’이고 후면(後面)은 ‘선현수적(先賢手蹟)’이다. 절첩에 글씨들이 붙어 있는 형태이며, 후자의 경우 작성자 표시가 좌측 하단에 있다. 이 책은 권벌 및 그의 자제들의 교류와 조선 중기 사대부(士大夫)들의 시문과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번역 해제 】 (1첩) 이 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첩의 전면(前面)은 『선조수적(先祖手蹟)』이고, 후면(後面)은 『선현수적(先賢手蹟)』이다. 절첩에 글씨들이 붙어 있는 형태이며, 후자의 경우 작성자 표시가 좌측 하단에 있다. 전면은 충재(?齋) 권벌(權?)이 자제(子弟)에게 보내는 간찰(簡札)과 그가 관리(官吏)로 부임(赴任)하면서 공(功)을 세워 받은 사패(賜牌) 교지(敎旨)의 내용,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자구(字句) 수정 등을 초록(抄錄)한 『권벌수적(權?手蹟)』이고, 후면은 권춘란(權春蘭)과 황보인(皇甫仁) 등의 간찰과 이수광(李?光)의 시고(詩稿)를 적은 『선현수적(先賢手蹟)』이다. 『권벌수적』은 후손들이 성함을 바로 적지 않고 『선조수적(先祖手蹟)』이라 하였다. 다음은 각 첩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선조수적(先祖手蹟)』 (1) 충재(?齋)가 서원(書院)에서 둘째 아들 동미(東美)에게 답한 서간(書簡)이다. 백씨(伯氏) 권의(權?)가 지촌(只村)으로 오려고 하므로 그 시기에 맞추어 돌아올 계획을 알리고, 전에 잃었던 작은 송골매가 돌아온 소식을 전하였다. 피봉(皮封)이 함께 전한다. (2) 이 또한 충재가 내성(乃城) 본가(本家)의 둘째 아들 동미(東美)에게 답한 서간이다. 선산(善山) 배언충(裵彦忠)에게 행로에서 먹을 양식과 반찬을 찾아 주라 하고, 은어를 잡을 계획을 알려 주었다. 기타 시세(時勢)를 보아 홍랑(洪郞)과 의논하라 하고, 양식과 반찬은 중촌(仲村) 금기(琴椅, 1489~1552)에게 구하라고 당부하였다. 피봉이 함께 전한다. (3) 충재가 관아(官衙)에서 동미(東美)에게 답한 서간이다. 피봉이 함께 전한다. 서원(書院)에 기거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 듯하여 염려가 된다하고 중촌공(仲村公:琴椅)과 의논하여 처신하라고 당부했다. (4)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 권벌(權?)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초록한 것이다. 기해년(1539, 중종34)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할 때, 주청사(奏請使)로 가서 칙서(勅書)를 받아 돌아온 공적이 가상하므로 부평(富平)에 있는 밭 30결(結)과 관노비(官奴婢)를 특별히 상으로 내린다는 내용이다. 그 아래는 이조(吏曹)에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여 지명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내용을 적었다. (5) 충재가 스님에게 준 시고와 귀양 갈 때, 눈 덮인 고개에 도착하여 측실(側室)의 작은 아이에게 일어나 춤을 추라고 하고, 인하여 읊은 절구(絶句) 한 구를 적었다. (6) 『속동문선(續東文選)』과 『진서산집(眞西山集)』 등을 이웃에서 빌려간 내역을 적었다. 이를 통하여 당시 서적의 간행과 유통, 독서 경향 등을 살필 수 있다. 『퇴계집(退溪集)』 5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98년 이후의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현수적(先賢手蹟)』 (1) 1603년(선조36) 4월 22일에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등이 보낸 서간이다. 부모의 상을 당한 뒤에 상대가 보낸 위안 편지를 받고 이에 답장한 것이다. (2) 황보인(皇甫仁)이 보낸 서간이다. 조정에서 얼굴을 대했다가 문안 서찰을 받고 기쁜 마음을 전한 뒤에 안부를 묻고, 내일 아침에 작별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는 사연이다. (3) 1600년(선조33) 10월에 쓴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시고(詩稿)인데, 『지봉집(芝峯集)』1권에 「대언(大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4)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조선 초기 함경도의 정세에 관하여 적은 초고이다. (5) 1662년(현종3) 9월 18일에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보낸 서간이다. 선현(先賢)의 향기가 가득한 곳에서 훌륭한 벗들과 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노닐었던 시절을 회상하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적었다. (6) 어느 해 초겨울 17일에 휴암(休庵) 여대로(呂大老, 1552∼1619)가 아들 희필(姬弼)에게 보낸 서간이다. 감시(監試)도 몇 달 남지 않았는데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학문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묻고, 뜻을 세워 변함없기를 당부하였다. (7) 1602년(선조35) 12월 14일에 여대로(呂大老)가 아들 희좌(姬佐) 등에게 보낸 서간이다. 세월이 자신을 위하여 지연되지 않음을 알고 학문에 전념하기를 당부하였다. (8) 여대로(呂大老)가 아들 희좌(姬佐)에게 보낸 서간이다. 감시(監試)를 앞두고 면학(勉學)을 당부하며 부제(賦題) 5수(首)를 보내니 힘을 다하여 지어 보내라는 사연이다. (9) 1612년(광해4) 2월 8일에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이 보낸 서간이다. 안부를 여쭌 뒤에 숙부상을 당한 애통한 심정을 전했다. 그리운 정을 표하고 부채와 먹을 선물로 보냈다. 이상은 충재(?齋) 권벌(權?, 1478∼1548)을 비롯한 조선시대 문인이 그의 자제나 벗들과 주고받은 서간(書簡)과 시고(詩稿), 기타 문기(文記)들로 그들의 교류와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부자간에 안부를 전하고 과거(科擧)를 맞아 면학을 당부하는 서간에서 부자간의 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 작성자 : 김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337

    권벌 종가 유묵-7.암장고적(權橃 宗家 遺墨-巖藏古蹟) / 조선 연산군 1년(1495)~인조년간(1623~1649) / 5첩 / 시고류/시고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조선중기의 명신 권벌(權橃, 1478~1548)과 아들 권동보(權東輔, 1517~1592) 등이 당대의 명사에게 받은 필적을 첩으로 꾸민 것이다. 권벌 부자를 비롯한 관련 인사의 교류와 시문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모두 5첩에 34명의 시고(詩稿)와 서간(書簡)이 실려있다. 대개 한 사람 당 한 두 점 실렸으나 이황은 9점, 정윤목은 4점, 구봉령은 3점이다. 또 제5첩 〈청암선조수적(靑巖先祖手蹟)〉에는 권동보의 시고 8점을 실었다. 제1첩: 유순(柳洵)ㆍ성수침(成守琛)ㆍ이해(李瀣)ㆍ이황(李滉)ㆍ정유일(鄭惟一)ㆍ김성일(金誠一)ㆍ유성룡(柳成龍)ㆍ유근(柳根)ㆍ이성중(李誠中)ㆍ김부륜(金富倫)ㆍ김현성(金玄成)ㆍ정온(鄭蘊). 제2첩: 이현보(李賢輔)ㆍ박영(朴英)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이담(李湛)ㆍ노수신(盧守愼). 제3첩: 구봉령(具鳳齡)ㆍ정탁(鄭琢)ㆍ김륵(金玏)ㆍ오건(吳健)ㆍ박성(朴惺)ㆍ조종도(趙宗道)ㆍ김팔원(金八元)ㆍ우성전(禹性傳)ㆍ정구(鄭逑)ㆍ심희수(沈喜壽)ㆍ권호문(權好文)ㆍ이호민(李好閔)ㆍ황신(黃愼). 제4첩: 유성룡(柳成龍)ㆍ정윤목(鄭允穆)ㆍ조찬한(趙纘韓)ㆍ신익성(申翊聖). 제5첩: 권동보(權東輔). [ 번역 해제 ] 『암장고적(巖藏古蹟)』 1. 관련 인물 및 편집 배경 1) 관련 인물 이 문서는 경상북도 봉화군 유곡리(酉谷里)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의 종택에 소장된 5건의 서첩(書帖)으로, 주로 16세기 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활동한 경향의 학자, 문인, 관료들의 시고(詩稿)와 서간(書簡)을 장첩한 것이다. 당시 그 가문에서 활동한 인물은 권벌과 그의 두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7~1592)와 석정(石亭) 권동미(權東美, 1525~1585), 권동보의 아들 권래(權來, 1562~1617) 등이다. 권벌(權橃)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생원 사빈(士彬)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수찬ㆍ부교리ㆍ정언ㆍ장령ㆍ이조정랑ㆍ영천 군수ㆍ도승지ㆍ예문관 직제학ㆍ예조 판서ㆍ밀양 부사ㆍ경상도 관찰사ㆍ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39년에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의 개정을 청하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 유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159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충재집》이 있다. 권벌의 장자 권동보(權東輔, 1518~1592)의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이다. 음사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54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부친이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求禮)로 유배되었다가 삭주(朔州)로 이배되어 얼마 되지 않아 배소에서 죽자,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로부터 20여년 뒤 선조가 즉위하고 나서 부친이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자,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직장(直長)·주부(主簿)·정랑(正郞)을 거쳐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냈다. 저서 《청암일고(靑巖逸稿)》가 《암천세고(巖泉世稿)》 권1, 2에 수록되어 있다. 권벌의 차자 권동미(權東美, 1525~1585)의 자는 자휴(子休), 호는 석정(石亭)이다. 1568년(선조 1)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여,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저서로 《석정일고(石亭逸稿)》가 《암천세고(巖泉世稿)》3,4권에 수록되어 있다. 권동보의 아들 권래(權來, 1562~1617)의 자는 낙이(樂而), 호는 석천거사(石泉居士)이다. 권동미의 아들로서 백부에게 출계하였다. 군자감 정을 지냈고, 당시 문필과 인품으로 저명하였던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 오지(五芝) 안숭검(安崇儉)과 금석의 교제를 하였다. 2) 편집 배경 서첩을 만든 경위와 언제 누가 장첩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발문이나 주기(注記)가 없어 알 수 없다. 작성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제1첩에 들어있는 이성중(李誠中, 1530~1593)의 칠언율시 시고이다. 이는 1570년(선조3) 정월 입춘날에 홍문관의 관료들에게 주어 화답을 구한 것으로, 이해 4월에 권벌이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을 때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이 1514년 권벌이 영천 군수로 부임할 때 유순(柳洵, 1441~1517)이 전송하며 준 오언율시 2수 시고이다. 가장 늦은 것은 1617년에 쓴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의 시고가 제4첩에 들어있다. 제1첩의 정온(鄭蘊, 1569~1641)의 시고는 권번의 6대손 권보(權莆, 1681~1715)가 1700년 겨울에 정온의 후손 정중원(鄭重元, 1659~1726)에게 부탁하여 소장한 것이다. 이런 정황과 장첩된 문건의 작성연대의 순서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권벌이 관료생활을 하면서 입수한 시고와 간찰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입수한 것을 수시로 장첩하고, 가장 많은 권동보의 시고는 일괄 한 첩에 장첩한 것으로 보인다. 2. 서지 가. 암장고적(巖漿古蹟) 1첩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9.2cm×24.6cm 나. 암장고적(巖漿古蹟) 2첩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9.3cm×24.9cm 다. 암장고적(巖漿古蹟) 3첩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9.2cm×26.7cm 라. 암장고적(巖漿古蹟) 4첩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9.4cm×24.8cm 마. 암장고적(巖漿古蹟) 5첩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9.3cm×24.6cm 3. 구성과 내용 가. 각 첩의 구성 전체 5첩으로 되어 있고, 각 첩마다 ‘巖藏古蹟’이라는 표제가 있으며 연번(連番) 표기는 없다. 제5첩에만 전체 권동보의 시고로 이루어져 있어 ‘靑巖先祖手蹟’이라는 부제(副題)가 있다. 장첩은 크게 시고와 서간으로 분류하였고, 배접지 위에 원본을 장첩하였다. 배접지 상단에 주묵(朱墨) 소자(小字)로 작자를 밝혔고, 일부는 문서의 입수 경위를 밝히기도 하였다. 간간이 낙장이 있는 부분은 원본이 낙장되었다는 의미로 ‘原落’이라 묵서하고 날인하였는데, 글씨와 인장의 형태로 볼 때 근대에 소장가에서 기록 날인한 것으로 보인다. 제5첩 권동보의 시고에는 대부분 원고 수미에 ‘일송거사(一松居士)’라는 장병형 별호인(別號印)과 ‘영가후인 권동보 진경(永嘉後人 權東輔 震卿)’이란 방형 인장 그리고 ‘청암(靑岩)’이라 새긴 종형(鐘形)의 인장이 찍혀 있다. 소장 가문에서 직접 수증한 것으로는 제1첩 중에서 권벌이 영천 군수로 부임할 때 유순(柳洵)이 전송하며 준 오언율시 2수 시고, 이성중(李誠中, 1530~1593)이 1570년(선조3) 정월 입춘날에 홍문관의 관료들에게 주어 화답을 구한 칠언율시 시고, 이황(李滉)이 권벌을 모시고 서울 동호(東湖)에서 뱃놀이를 한 뒤에 지은 칠언절구 1수 시고, 정유일(鄭惟一)이 권동보가 파직되어 돌아올 때 전송하며 준 칠언율시 5수 시고, 김성일(金誠一)이 권동미에게 준 것으로 보이는 칠언절구 1수 시고이다. 각 첩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나. 각 첩의 내용 【제1첩】 1) 유순(柳洵, 1441~1517) 시고 1514년(중종 9) 9월에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할 때 전송하며 지어준 오언율시 2수이다. 2)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시고 칠언절구 1수 <莫擠陷人>과 , 칠언율시 1수 <安貧>이다. 3) 이해(李瀣, 1496~1550)의 시고 칠언장편 1수이고, 제목은 <次>이다. 《온계일고(溫溪逸稿)》권1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은 〈白馬江 次稼亭韻〉이다. 4) 이황(李滉, 1501~1570)의 시고 2건 - 권벌(權橃), 임형수(林亨秀), 홍춘년(洪春年)과 지금의 옥수동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독서당으로 돌아와 지은 시이다. 칠언절구 1수이다. - 저작 연도가 미상인 칠언장편 1수이다. 가을밤 산중에서 감회를 적은 내용이다. 5) 이황(李滉, 1501~1570) 시고 제목과 서명이 없는 칠언율시 2수이다. 6) 정유일(鄭惟一, 1533~1576) 시고 1564년(명종 19) 12월 입춘날에 정유일이 스승 이황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칠언율시 2수이다. 제목은 <伏讀高韻 不勝感銘 謹依韻寫呈二絶>이다. 7) 정유일(鄭惟一) 시고 정유일이 권벌의 아들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파직되어 귀향할 때 지어준 칠언율시 5수로, 제목은 <奉送靑巖公罷官還鄕>이다. 8)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시고 1575년 동짓날 아침에 지은 칠언절구 1수이다. 제목은 <權子述兄遠來相訪 感其繼綣 聊賦一絶>인데, 권자술이 누구인지는 미상이다. 9)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시고 원본은 낙장이다. 배접지에 ‘原落’이라 주기하고 확인한 날인이 있다. 상단 배접지에 ‘西厓’라고 주기된 것으로 볼 때 류성룡의 시고가 장첩되었다가 어떤 연유로 낙장된 것으로 보인다. 10) 류근(柳根, 1549~1627) 시고 1579년(선조 12) 6월에 지은 칠언율시 1수로 제목은 없다. 《서경시집(西坰詩集)》권2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은 <贈堂僚金誠一>이다. 11) 이성중(李誠中, 1530~1593) 시고 칠언율시 1수로, 1570년(선조3) 정월 입춘날에 홍문관의 관료들에게 주어 화답을 구한 것이다. 12) 김부륜(金富倫, 1531~1598) 시고 1582년(선조 15) 초가을에 지은 칠언율시 1수이다. 제목은 <送李繼叔出宰夏山>인데, 계숙은 이효남(李孝南)의 자이고, 하산은 창녕(昌寧)의 별칭이다. 13) 김현성(金玄成, 1542~1621) 시고 김현성이 풍고(楓皐) 양사준(楊士俊)의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 2수와 양사준의 원운 시를 적은 시고이다. 14) 정온(鄭蘊, 1569~1641) 시고 정온이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가 1614년(광해군 6) 8월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어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지은 칠언율시 <病脚> 1수와 오언율시 <曉起> 1수를 쓴 시고이다. 【제2첩】 1)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서간(書簡) : 이현보가 이황에게 보낸 편지이다. 2) 박영(朴英, 1471~1540) 서간 : 제자 용암(龍巖) 박운(朴雲, 1493~1562)에게 답한 편지이다. 3)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소장(疏章) 초고 4) 이황(李滉, 1501~1570) 서간 7건 5) 정구(鄭逑, 1543~1620) 서간 : 스승 이황의 답서를 받고 1568년(명종 23) 7월 초4일에 보낸 편지이다. 6) 이담(李湛, 1510~1557) 서간 : 스승 이황에게 1570년(선조3) 3월 15일에 보낸 편지이다. 7)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서간 【제3첩】 1) 구봉령(具鳳齡, 1526~1586) 서간 3건 - 1576년(선조 9) 정월 2일 서울에서 안동에 있는 권춘란(權春蘭, 1539~1617)에게 보낸 답서이다. - 1582년(선조 15) 단양월(端陽月) 14일에 안제(安霽, 1538~1602)와 권춘란(權春蘭 1539~1617)에게 보낸 답서이다. - 영천(永川) 군수로 있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뒷부분에 낙장이 있다. 《백담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2) 정탁(鄭琢, 1526~1605) 서간 서울에 올라와 편지를 보낸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보낸 답서이다. 3) 김늑(金玏, 1540~1616) 서간 1580년(선조8) 9월 19일 인척 아저씨인 권호문(權好文, 1532~1587)에게 보낸 편지이다. 4) 오건(吳健, 1521~1574) 서간 조목(趙穆 1524~1606)에게 보낸 편지이다. 5) 박성(朴惺, 1549~1606) 서간 부모 상중에 있는 김 수재(金秀才)라는 이에게 보낸 위문편지이다. 6) 조종도(趙宗道, 1537~1597) 서간 정축년(1577년) 동짓달 초3일에 권호문(權好文, 1532~1587)에게 보낸 편지이다. 7) 김팔원(金八元, 1524~1569) 서간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보낸 편지로, 일상의 안부와 함께 김부륜이 전관(殿官)이 된 것을 알게 된 사연을 적고 있다. 8) 우성전(禹性傳, 1542~1594) 서간 1584년(선조17) 10월 2일 인척 아저씨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보낸 편지이다. 9) 鄭逑(1543~1620) 서간 1608년(선조41) 양월(陽月) 8일 문인 임흘(任屹 1557~1620)에게 보낸 답서이다. 10) 심희수(沈喜壽, 1548~1622) 서간 1605년(선조38) 정월 보름에 창락 찰방(昌樂察訪)으로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11)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서간 1586년(선조19) 동지 뒤 1일에 권대기(權大器 1523~1587)와 자가 응장(應長)인 두 사람에게 보낸 편지이다. 12) 이호민(李好閔, 1553~1634) 서간 2건 - 1603년(선조 36) 상원(上元) 전 4일에 찰방(察訪) 벼슬로 있는 정윤목(鄭允穆, 1571~1629)에게 보낸 편지이다. - 1605년(선조 38) 12월 초2일에 창락 찰방(昌樂察訪)으로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13) 황신(黃愼, 1560~1617) 서간 이인 찰방(利仁察訪)으로 있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제4첩】 1)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시고 2) 정윤목(鄭允穆, 1571~1629) 시고 4건 3) 조찬한(趙纘韓, 1572~1631) 시고 4) 신익성(申翊聖, 1588~1644) 시고 【제5첩】 1) 권동보(權東輔, 1517~1592) 시고 8건 - 1576년(선조 9) 정월 16일에 학봉 김성일에게 올린 오언율시 1수이다. - 1583년(선조 16) 동짓달 하순에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지어주어 화답을 구한 칠언절구 1수이다. - 1583년(선조16) 섣달 입춘날에 김부륜(金富倫)이 준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 1수이다. - 권응하(權應夏, 1533~1612)에게 준 오언율시 1수이다. - 초계군수(草溪郡守)로 재임하던 1585년(선조18) 중춘 하순에 남몽오(南夢鰲, 1528~?)가 편지와 함께 해물을 보내온 데 대하여 사례하며 지은 오언율시 1수이다. - 1585년(선조 18) 중동 동지 뒤 3일에 지은 칠언율시 1수이다. - 1588년(선조 21) 칠언절구 2수이다. - 1590년(선조 23) 청화절 16일에 군(君)이라 호칭한 어떤 이에게 지어준 오언율시 1수이다. 4. 자료의 가치 가. 서지적 가치 이 서첩의 시고와 서간은 대부분 4, 5백년이 넘은 것으로 그 희소성의 가치는 재론한 것이 없다. 특히 유순(柳洵), 성수침(成守琛), 이현보(李賢輔), 이황(李滉), 정탁(鄭琢) 심희수(沈喜壽), 이호민(李好閔) 등 당대 정치, 학문, 문학 분야에서 저명한 분들의 친필이란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나. 내용적 가치 이 서첩의 시와 편지는 작자의 문집이 전해지지 않거나 문집이 있더라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해당 인물의 문학과 교유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문집에 수록되었더라도 친필 원본이란 점에서 문집의 내용을 교감하거나 복원하는 데 직접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8

    권벌 종가 유묵-8.원장고적(權橃 宗家 遺墨-院藏古蹟) / 조선 선조 25년(1592)~현종 1년(1660) / 1첩 / 간독류/간독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첩장
    《원장고적첩》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 1478~1548)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과 관련된 필적 4종을 모은 것이다. 뒷표지 안쪽에 '1692년 표구하여 삼계서원에 보관했다고 적혀있다[壬申秋粧成 三溪書院藏]'. 삼계서원은 경북 봉화 삼계리에 위치하며 1588년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 권벌의 학행을 추모하고자 창건되었다. 먼저 첩의 앞표지 안쪽에 1660년 2월 28일 현종 임금이 예조정랑을 보내 충정공의 영전에 올리게 한 제문(祭文)이 붙어있다. 다음 첩면에는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92년 3월 17일 서원의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신축한 사당에서 치를 첫 제사 때의 제문은 자신의 고향에 있는 사림(士林)의 영수가 짓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다음은 정구(鄭逑, 1543~1620)가 보낸 편지로 금번 서원에서 베풀어준 후의를 받기는 받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판중추부사 정탁(鄭琢, 1526~1605)이 1602년 9월 5일 충정공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39

    김성일 종가 전적 - 1.예기천견록(金誠一 宗家 典籍 - 禮記淺見錄) / 조선 태종 18년(1418) / 2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조선초 학자인 권근(權近, 1352~1409)이 지은 《예기(禮記)》의 주석서이다. 태종 5년(1405)에 왕명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고, 또 태종 18년(1418)에 권근의 아들 권도(權蹈)가 제주안무사 이간(李暕)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으나 그 후 각판(刻板)이 불에 타 책을 얻기 어렵게 되어 숙종 31년(1705)에 제주목사 송정규(宋廷煃)가 다시 간행하였다. 학봉종가(鶴峯宗家)에는 10~13권, 24~26권의 6권 2책이 소장되어 있다. 간행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26권의 끝 부분에 있는 영락십육년(永樂十六年, 태종 18, 1418)에 쓴 하담(河澹)의 발문(跋文)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쇄본(後刷本)으로 여겨진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0

    김성일 종가 전적 - 2.사기(金誠一 宗家 典籍 - 史記) / 조선 세종 7년(1425) / 14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사기》는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황제(黃帝)에서 한(漢) 무제(武帝)에 이르기까지 역대왕조의 사적을 기전체(紀傳體)로 적은 역사서이다. BC 108년 사마천이 태사령(太史令)이 되면서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淡)이 준비하던 《사기》 편찬 작업을 이어받아 한 무제 정화 2년(BC.91) 에 기본적인 내용을 완성하였다. 《사기》는 총 130편으로 이루어진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통사이며, 이는 역대 중국 정사(正史)들의 기본적인 구성이 되었다. 제왕들의 행적을 연월의 차례로 기술한 본기(本紀)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사적 기술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각종 제도의 연혁을 서술한 서(書) 8편, 제후와 재상의 세계와 작위 등을 시대순으로 열거한 표(表) 10편, 제왕과 제후 이외의 인물의 활동을 다룬 열전(列傳) 70편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현전본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세종 7년(1425)의 경자자(庚子字)본 이다. 그 뒤 성종, 중종, 영조년간에 갑인자(甲寅字)계열의 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목판본으로 여러 차례 번각하기도 하였다. 학봉종가소장(學峯宗家所藏)의 《사기》가 바로 세종 7년(1425)의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로 간행한 것으로 국내에 몇 종 남아 있지 않은 희귀본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1

    김성일 종가 전적 - 3.증수부주자치통감절요속편(金誠一 宗家 典籍 - 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 / 조선 세종 20년(1438)~세조 7년(1461) / 5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이자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소장되어온 전적 55종 261책 중 2종이다. 그 내용은 중국 송(宋), 원(元) 양조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서술한 것으로 명나라때 유염(劉剡)이 편찬하였다. 본래 이 책은 중국에서 역대 사서(史書)의 권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므로 사서(史書)를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책의 내용은 주로 나라의 흥망, 세상의 치란(治亂), 제왕(帝王)ㆍ장상(將相)들의 언정(言政) 등 민폐(民弊)와 세교(世敎)에 관련된 것들로 이를 읽고 다음에 상고(詳考)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학봉가에 소장되어온 《증수부주자치통감절요속편(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은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으로 함께 소장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간행된 희귀본으로서의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2

    김성일 종가 전적 - 4.증수부주자치통감절요속편(金誠一 宗家 典籍 - 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 / 조선 명종년간(1546~1567)~선조년간 초 / 3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이자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소장되어온 전적 55종 261책 중 2종이다. 그 내용은 중국 송(宋), 원(元) 양조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서술한 것으로 명나라때 유염(劉剡)이 편찬하였다. 본래 이 책은 중국에서 역대 사서(史書)의 권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므로 사서(史書)를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책의 내용은 주로 나라의 흥망, 세상의 치란(治亂), 제왕(帝王)ㆍ장상(將相)들의 언정(言政) 등 민폐(民弊)와 세교(世敎)에 관련된 것들로 이를 읽고 다음에 상고(詳考)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학봉가에 소장되어온 《증수부주자치통감절요속편(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은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으로 함께 소장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간행된 희귀본으로서의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3

    김성일 종가 전적 - 5.당유선생집(金誠一 宗家 典籍 - 唐柳先生集) / 조선 세종 22년(1440) /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당대(唐代)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유종원(柳宗元)의 시문집이다. 이 책은 유종원의 시문을 모아서 편한 것으로 조선 전기 세종 때에 인출된 초주갑인자본이다. 권질(卷帙)이 낙질되어 서문(序文) 및 관계 기록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권말 발(跋)의 기록에 따르면 ‘정통사년 동십일월 일 조산대부집현전응교...신 남수문 배수계수경발 / 선덕 구년 구월 일 중훈대부시집현전직제학 신 김빈 배수계수경발(正統四年 冬十一月 日 朝散大夫集賢殿應敎...臣 南秀文 拜手稽首敬跋 / 宣德 九年 九月 日 中訓大夫試集賢殿直提學 臣 金繽 拜手稽首敬跋)’이라 하여 당시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저술하였으며 세종 19년(1437)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 (將鑑博義)≫의 등의 발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던 남수문(南秀文)의 발문과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김빈(金繽)의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책의 실제 간행은 뒤를 이은 ‘정통오년 육월 일 인출(正統五年 六月 日 印出)’이라는 권말 간기를 통해 세종 2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4

    김성일 종가 전적 - 6.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전집(金誠一 宗家 典籍 - 新編陰點性理群書句解前集) / 조선 세종 26년(1444)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는 주돈이(周敦頣), 정호(程顥), 정이(程頣) 등 송대(宋代) 18인의 유학자들의 시문(詩文)을 유형별로 분류(分類)하여 편찬한 ≪성리군서구해(性理羣書句解)≫에 주요 글자에 대한 발음(音點)을 음각(陰刻)으로 표기하여 재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세종 16년(1434)에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된 것이다. 이 활자는 선조 13년(1580)에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가 간행되기 전까지 150여 년간 사용되어 그 인본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이 활자를 닮게 하여 정조 1년(1777)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주조되는 등 조선시대에 유행한 글자체이다. 본문 변란 상단에는 묵서의 주기가 있다. 본문의 마지막에는 ‘주풍뢰헌(主風雷軒)’라는 장서기(藏書記)가 있는데 이는 책의 주인이 ‘풍뢰헌’, 즉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손자 김시추(金是樞, 1580~1640)이고 그의 생존시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비록 영본 1책이지만 손상 없이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 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5

    김성일 종가 전적 - 7.고려사절요(金誠一 宗家 典籍 - 高麗史節要) / 조선 단종 1년(1453) / 7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역사를 연월(年月)에 따라 정리한 역사책이다. 김종서(金宗瑞) 등이 문종(文宗)의 명(命)을 받아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高麗史)》를 편년체(編年體)로 다시 정리한 것으로, 고려 태조 1년(918)에서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내용이 수록되었다. 문종 1년(1451) 8월에 착수하여 이듬해 2월 완성하고 단종 1년(1453) 4월에 간행되었다. 《고려사》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도 많이 실려 있고, 내용에 있어서도 《고려사》에는 그 연대가 확실치 않은 것이 이 책에 밝혀져 있는 것도 상당수 있어, 《고려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현재 학봉종가(鶴峯宗家)에는 전체 35권 35책 중 5~6권, 11~12권, 15~16권, 17~18권, 21~22권, 27~28권, 34권으로 13권 7책이 소장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初雕本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七十四) / 고려시대(11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대한불교천태종 구인사 / 충북 단양군 / 권자장
    이 책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華嚴經)』80권 중 권 제74이다. 고려 현종 때(1011~1031)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며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두루마리로 제본되어 있으며 한 장의 크기는 세로 28.7㎝, 가로 46.0㎝이다. 초조대장경은 이후에 만들어진 해인사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해인사대장경보다 글자수가 적고 새김이 정교한 반면에 간행기록이 없다. ‘경(敬)’,‘경(竟)’,‘경(鏡)’자에 피휘(避諱: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가 되어있다, 또 초조대장경은 책의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서 대체로 ‘장(丈)’자나 ‘폭(幅)’자를 쓰는데 비해 해인사대장경은 ‘장(張)’자로 통일되어 있다. 본문의 글자수도 한 항(行)에 14자로 해인사대장경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쇄상태나 종이의 질로 보아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7

    김성일 종가 전적 - 8.삼국사절요(金誠一 宗家 典籍 - 三國史節要) / 조선 성종 7년(1476) / 3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성종(成宗)이 성종 7년(1476)에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居正), 이파(李坡), 이계창(金季昌), 최숙정(崔淑精)등에게 명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삼국(三國)의 멸망까지를 다룬 편년체(編年體)의 역사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영본 3책으로 권 1~2, 권 9~11, 권 12~14로 4책이 빠져있다. 삼국 이전의 상고사는 외기(外紀)로서 권수 안에 넣지 않고 별도로 쓰였다. 그러므로 서문이나 표문에는 14권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15권으로 편찬되어 있으며 구성에는 권수에 노사신(盧思愼)이 찬(撰)한 진전문(進箋文)과 서거정(徐居正)이 찬(撰)한 서(序)와 총목록(總目錄)이 있고 이어 〈삼국사절요외기(三國史節要外紀)〉라 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ㆍ기자조선(箕子朝鮮)ㆍ위만조선(衛滿朝鮮)ㆍ사군이부(四郡二府)ㆍ삼한(三韓)의 순으로 간략한 기사가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의 간행연대는 책의 권수(卷首)부분에 있는 ‘성화십이년병신십이월 일.....이파 등 근상전(成化十二年丙申十二月 日........李坡 等 謹上箋)’의 기록과 서문(序文)에 있는 ‘성화십이년 창룡병신십이월 일.....서거정 배수 담수 근서(成化十二年蒼龍丙申十二月 日 徐居正 拜手 槍首 謹序)’의 기록에서 성화십이년 즉, 성종 7년(1476)에 간행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당시 종래의 사서(史書)들이 갖는 신라중심의 역사서술 방식을 수정하여 삼국을 무정통으로 하되 문무왕 9년(669년)에 삼국이 통일된 다음부터 신라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삼국사 서술의 정형이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8

    김성일 종가 전적 - 9.전한서(金誠一 宗家 典籍 - 前漢書) / 조선 세종 후기~세조년간(1455~1468) / 6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중국(中國) 전한(前漢) 즉 한 고조(高祖)에서 왕망(王莽)까지 229년간의 역사를 반고(班固)가 저술한 역사서이다. 일명 《전한서(前漢書)》, 《서한서(西漢書)》, 《반서(班書)》라고도 한다. 반고의 부친인 반표(班彪)는 《사기(史記)》의 서술이 전한(前漢) 무제(武帝)까지로 끝나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고, 또한 무제 이후의 일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기에, 후전(後傳) 65편을 저술하여 《사기(史記)》를 보충하였다. 그리고 반고는 부친의 뜻을 받아 많은 기록과 서적을 참고하여 본서를 편찬하였다. 한(漢) 건국으로부터 왕망(王莽) 정권 멸망에 이르기까지 229년간의 역사를 20년의 작업 끝에 건초(建初) 8년에 완성하였는데 고조(高祖) 원년부터 무제이전의 역사는 사기의 서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가 미완성인 채 반고가 죽자 그의 누이동생 소(昭)가 보완하였다. 체제는 사기와 같이 기전체(紀傳體)이며 제기(帝紀)는 12편, 표(表)는 8편, 지(志)는 10편, 열전(列傳)은 7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행본은 전체 120권이다. 학봉종가소장(學峯宗家所藏)의 《전한서》는 세종 후기~세조년간의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것으로 권13~15, 18~20, 21~지(志)1 상(上)~2, 전(傳)27~29, 전(傳)63~64하(下), 전67상~68의 6책이 남아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49

    김성일 종가 전적 - 10.속자치통감강목(金誠一 宗家 典籍 - 續資治通鑑綱目) / 조선 연산군 9년(1503) / 9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이 책은 명나라 헌종(憲宗)때의 문신 상로(商輅) 등이 칙명을 받아서 찬한 것으로 남송(南宋)의 주희 소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이어서 지은 것이다. 책의 원래 편자인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이며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다양하게 불렸다. 그는 남송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철학, 문학, 사학에서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은 체제 수호를 위한 교학(敎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책수와 내용이 방대하고 읽기 어려워 간명하고 핵심적인 사서(史書)의 편찬 필요성으로 편찬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강(綱)의 설정은 ≪춘추(春秋)≫를 본떴으며 목(目)의 서술은 ≪좌전(左傳)≫을 모범삼아 사실 위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통감의 기초위에 부분적으로 증보, 산절(刪節) 및 개정을 가한 것이다.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은 이러한 바탕으로 편찬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다시 성화 12년(1476)에 상로(商輅), 만안(萬安) 등이 재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간년(刊年)은 활자(活字)의 주조연대(鑄造年代)와 책의 면지에 쓰여진 내사기(內賜記)에 의하여 홍치 16년(1503)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연산군 9년(1503)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수동(金壽童)에게 내렸졌으며,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것으로 책의 제 1면에는 다른 내사본과 마찬가지로 우측 상단에 “선사지기(宣賜之寶)”의 인(印)이 날인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350

    김성일 종가 전적 - 11.주문공교창려선생집(金誠一 宗家 典籍 - 朱文公校昌黎先生集) / 조선 중종년간(1506~1544) /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라는 서명은 당대(唐代)의 문장가 한유(韓愈) 즉 그의 호 창려(昌黎)에서 비롯되었다.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은 한유(韓愈)의 시문집(詩文集)을 주희(朱熹)가 고이(考異)한 책으로 원래 이한(李漢)이 편집하였으나, 외집(外集)과 실록(實錄) 이외에는 모두 위망(僞妄)이라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송(宋)의 방숭경(方崧卿)이 ≪韓集擧正(한집거정)≫을 지어 그 의오이동(疑誤同異)를 교정하면서 문집(文集), 외집(外集), 부록(附錄), 년보(年譜) 등을 각판하였다. 그 뒤 주희(朱熹)도 또한 고이(考異)를 지어 그 위망(僞妄)을 밝혔고 이리하여 이한(李漢)의 편집본(編輯本)이 원본(原本)의 위치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주자(朱子)의 고이본(考異本)을 중심으로 명대(明代)에 간행되면서 이후 이것이 한유(韓愈)의 전집(全集)으로 자리잡았다. 책의 전체 내용은 ≪한문(韓文)≫이 본문 40권, 외집(外集) 10권으로 편차(編次)되었는데 권수(卷首)에는 목록(目錄)과 이한(李漢)의 서(序) 등이 있고 《권1》에는 부(賦)ㆍ고시(古詩), 《권2∼7》에는 고시古詩), 《권8》에는 연구(聯句), 《권9∼10》에는 율시(律詩), 《권11∼14》에는 잡저(雜著), 《권15∼19》에는 계(啓)ㆍ서(書)ㆍ서(序), 《권20∼21》에는 서, 《권22》 에는 애사(哀辭)ㆍ제문(祭文), 《권23》에는 제문(祭文), 《권24∼35》에는 비지(碑誌), 《권36》에는 잡문(雜文), 《권37》에는 상(狀), 《권38∼40》에는 표상(表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외집(外集)에는 부(賦), 시(詩), 의(議), 서(書), 서(序) 등과 순종실록(順宗實錄)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학봉종손가에 소장된 책은 영본 1책으로 3엽 화문어미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기상 중종연간의 재주갑인자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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