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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2.오조명신언행록(金誠一 宗家 典籍 - 五朝名臣言行錄) / 조선 명종년간(1546~1567)∼선조 초기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은 송대(宋代)의 학자 주희(朱熹)가 북송(北宋)의 태조(太祖)에서부터 태종(太宗)ㆍ진종(眞宗)ㆍ인종(仁宗)ㆍ영종대(英宗代)까지 오조(五朝) 명신들의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원래 주희가 북송의 태조에서 휘종(徽宗)까지 팔조(八朝) 명신들의 언행을 편찬하여 이 책인 오조명신언행록을 전집(前集), 뒤의 삼조(三朝)의 언행록을 후집(後集)으로 나누었다. 그것을 주희 이후에 다시 송나라의 이유무(李幼武)가 명신언행록속집(名臣言行錄續集)ㆍ별집(別集)ㆍ외집(外集)을 편찬하였다. 이를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이라 하는데,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4권, 속집(續集) 8권, 별집(別集) 26권, 외집(外集) 17권으로 명신언행록은 모두 75권으로 명나라 때 합쳐져 간행되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전집(前集)으로 전체 10권 가운데 ‘권4~7’의 1책만이 보관되어 있다. 세조 1년(1455)에 주조된 을해자(乙亥字)로 찍은 것인데, 활자(活字)가 마모된 정도와 목활자(木活字)를 섞어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후기의 을해자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내용상 국왕에 대한 신하의 ‘충(忠)’을 강조하면서 신하가 갖추어야 할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어 왕권을 수립ㆍ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로 많이 간행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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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3.삼조명신언행록(金誠一 宗家 典籍 - 三朝名臣言行錄) / 조선 명종년간(1546~1567)∼선조 초기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은 송대(宋代)의 학자 주희(朱熹)가 북송(北宋)의 신종(神宗)ㆍ철종(哲宗)ㆍ휘종(徽宗)의 삼조(三朝) 명신들의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원래는 주희가 1172년에 북송의 태조에서 휘종(徽宗)까지 팔조(八朝) 명신 108명의 언행을 편찬하여 이 책인 《오조명신언행록》을 전집(前集), 뒤의 삼조(三朝)의 언행록을 후집(後集)으로 나누었다. 그것을 주희 이후에 다시 송나라의 이유무(李幼武)가 《명신언행록속집(名臣言行錄續集)》ㆍ《별집(別集)》ㆍ《외집(外集)》을 편찬하였다. 이를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이라 하는데,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4권, 속집(續集) 8권, 별집(別集) 26권, 외집(外集) 17권으로 명신언행록은 명나라 때에 모두 75권으로 합쳐져 간행 되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후집(後集)의 《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으로 전체 14권 가운데 ‘권10~14’의 1책만이 보관되어 있으나 앞뒤의 몇 장이 결락(缺落)되어 있다. 세조 1년(1455)에 주조된 을해자(乙亥字)로 찍은 것인데, 활자(活字)가 마모되어 가늘어진 정도와 목활자(木活字)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종(明宗)조에서 선조 초(宣祖初) 사이에 이전부터 사용되던 을해자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내용상 국왕에 대한 신하의 ‘충(忠)’을 강조하면서 신하가 갖추어야 할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어 왕권을 수립ㆍ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로 많이 간행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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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4.독서속록(金誠一 宗家 典籍 - 讀書續錄) / 조선 명종년간(1546~1567)∼선조 초기 / 5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명(明)나라의 학자이자 문신인 설선(薛瑄)이 독서를 하면서 성찰(省察)에 필요한 글을 기록한 책이다. 그의 모친(母親)이 꿈에 한 자의(紫衣) 입은 사람을 만나고 그를 낳으니 재주가 비상하여 매일 글을 읽고 기록하였다. 정주(程朱)의 책을 읽고 나서 그가 지은 글을 모두 태워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다. 32세에 진사(進士)를 하고 후에 어사(御史)가 되었으나 중관(中官) 왕진(王振)에 거슬리어 사형(死刑)까지 당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면하여 제학첨사(提學僉事)가 되어 강의(講義)를 하였다. 영종(英宗)이 즉위 후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했는데, 황제(皇帝)가 그를 불러 물으니 그의 대답은 모두 군덕(君德)을 돕는 것이었다. 현재 학봉종가(鶴峯宗家)에는 《독서록(讀書錄)》 6~8권 1책과 《독서속록(讀書續錄)》 1~2권, 3~4권, 5~7권, 8~12권 4책을 소장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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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5.국조오례의(金誠一 宗家 典籍 - 國朝五禮儀) / 조선 선조 4년(1571) / 6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에 관하여 조선 전기 신숙주(申叔舟)ㆍ정척(鄭陟) 등이 왕명을 받아 그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처음 세종이 허조(許稠) 등에게 오례에 관한 것을 저작하도록 명했는데, 허조 등은 고금의 《예서(禮書)》와 《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작하고 《두씨통전(杜氏通典)》을 모방하여 편찬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후에 다시 세조가 강희맹(姜希孟) 등에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또 그림을 붙여 편찬하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다가 성종 5년(1474)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8권 6책으로서 책의 구성은 예종별(禮種別)로 되어 있는데, 길례는 권1에 30개조, 권2에 26개조로 되어 있고, 가례는 권3에 21개조, 권4에 29개조로 되어 있으며, 빈례는 권5에 6개조로 구성되었고, 군례는 권6에 7개조로, 흉례는 권7에 59개조, 권8에 32개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권수에 강희맹의 서문과 신숙주의 〈진국조오례의전(進國朝五禮儀箋)〉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왕실을 중심으로 한 기본예식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더불어 의례의 기본 예전으로 여러차례 중간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정치문화, 특히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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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6.주자대전(金誠一 宗家 典籍 - 朱子大全) / 조선 선조 8년(1575) / 59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의 시문집(詩文集)으로 원집(原集) 100권 87책, 속집(續集) 11권 4책, 별집(別集) 10권 4책으로 모두 121권 95책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38년(1543)에 을해자로 간행된 것이 가장 오래된 책인데, 그것의 내사본이 현재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와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종손가(宗孫家) 등에 전하고 있다. 을해자는 세조 1년(1455)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자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주조된 동활자(銅活字)로 선조 초에 대량으로 을해자를 닮은 동활자를 주조할 때까지 사용되면서 많은 서적을 간행한 활자이다. 임진왜란 때 활자가 유출되거나 훼손되었고 임란 이후 무렵에는 이를 닮은 목활자(훈련도감자)를 만들어 계속적으로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을해자로 처음 간행한 1543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시기인 선조 8년(1575)에 류희춘(柳希春)과 조헌(曺憲)이 교정을 보아 간행된 중간본(重刊本)이다. 같은 을해자본(乙亥字本)임에도 중종 때 간행된 책보다 글씨가 더욱 선명한 것은 그 시기 을해자가 많이 마모되어 다시 비슷한 모양의 활자를 대량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이와 같은 판본은 도산서원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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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7.회재선생집(金誠一 宗家 典籍 - 晦齋先生集) / 조선 선조 7년(1574) / 2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회재선생집(晦齋先生集)》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시문집이다. 저자(著者)인 회재 이언적은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초명(初名)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전기의 성리학자로서 퇴계 이황(李滉)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주요 저작으로는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ㆍ《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ㆍ《구인록(求仁錄)》ㆍ《봉선잡의(奉先雜儀)》등이 있다. 《회재선생집(晦齋先生集)》은 완질인 경우 13권과 부록을 포함한 5책이나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현재 권 1~4, 권 5~6만이 있는 영본 2책이다. 책의 권수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서문이 있으며,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내사인(內賜印)이 찍혀 있다. 이 책은 목판본이기는 하지만 《회재집(晦齋集)》의 초간본(初刊本)으로 책의 간행 연대는 선조 7년(1574)이며 권수에 찍힌 내사인(內賜印)으로 보아 김학봉(金鶴峰)이 내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의 저자인 이언적의 성리설(性理說)은 누구에게 배워서 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정립한 독창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이 뒤에 이황(李滉)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 성리학사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문집인 《회재선생집(晦齋先生集)》은 가치가 큰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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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아미타삼존 복장기(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阿彌陀三尊 腹藏記) / 조선 세조 4년(1458) / 1축 / 사찰문서/기문류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권자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아미타삼존복장기(阿彌陀三尊腹藏記)는 조선 세조 4년(1458)에 목조아미타불 삼존상(三尊像)을 조성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성철(性哲)ㆍ성수(性修)의 화주(化主)로 태종의 후궁(後宮)인 의빈 권씨(懿嬪 權氏), 명빈 김씨(明嬪 金氏)와 효령대군(孝寧大君) 등 왕실과 종친(宗親)들의 시주(施主)와 이소세(李小世), 이화(李華) 등 275인(人)의 시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을 조성하는데 화원(畵員)에 이중선(李重善), 이흥손(李興孫), 금박(金朴)에 이송산(李松山), 각수(刻手)에 황소봉(黃小奉), 소목(小木)에 양일봉(梁日峯) 등이 참여하여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복장기는 불상제작 연도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 나열되어 있어 조선초기의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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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8.봉선잡의(金誠一 宗家 典籍 - 奉先雜儀) / 조선 선조 11년(1578) / 1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소장되어 있던 전적(典籍)중 보물 제501호로 일괄 지정된 것이다. 봉선(奉先)에 관한 시속(時俗)의 잡다한 예절에 대하여 적은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조선 중종(中宗) ㆍ 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이며 학자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편(編)하였다. 이 책의 편자(編者)인 회재 이언적은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조선전기의 성리학자로서 퇴계 이황(李滉)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시호는 문원(文元)이 된 인물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전체 상하권(上ㆍ下卷)의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에는 사당(祠堂)에 선대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천신(薦新), 시제(時祭), 기제(忌祭), 묘제(墓祭)를 지내는 절차를 설명하고, 하권에는 제의(祭儀), 제통(祭統) 등과 선유의 예설을 발췌 수록하고 끝에 주석을 덧붙인 구성을 취하였다. 이 책의 간행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표제지(表題紙)의 이면에 김학봉(金鶴峰)에게 내린 내사기(內賜記)에 의거 선조 11년(1578)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간행된 후대에 와서도 이 책의 예법에 따라서 많은 예식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예법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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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19.자치통감강목(金誠一 宗家 典籍 - 資治通鑑綱目) / 조선 선조 11년(1578) / 24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남송(南宋)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거하여 편(編)을 시작하고 후학(後學)인 조사연(趙師淵)이 이어서 완성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자치통감강목》은 방대한 《자치통감》의 내용을 사건별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유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주자학(朱子學)을 국교(國敎)로 정한 조선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자치통감》보다 많이 읽히고 유포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주해(註解)를 달아 열람하기 편하도록 《자치통감강목》의 훈의(訓義)를 만들게 하여 강(綱)을 대형 활자인 병진자(丙辰字)로 하고, 목(目)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의 중ㆍ소자(中ㆍ小字)로 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 139권을 간행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초주갑인자 만을 사용하여 간행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의 목판번각본(木板飜刻本)이 바로 학봉 선생의 종가에 소장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선조 11년(1578) 4월에 당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었던 학봉 선생에게 내사된 것으로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내사기가 찍혀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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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0.이륜행실도(金誠一 宗家 典籍 - 二倫行實圖) / 조선 선조 12년(1579) / 1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는 전통윤리인 장유(長幼)와 붕우(朋友)를 진작하기 위하여 중종 13년(1518)에 조신(曺伸)이 왕명에 의해 만든 책이다. 이 책은 본래 중종(中宗) 때의 학자인 김안국(金安國)이 정원(政院)에 재직할 때 경연(經筵)에서 중종에게 필요성과 중요성을 아뢰어 왕명으로 편찬하게 된 것이지만 왕명이 이행되기 전에 김안국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가게 되자, 전 사역원정(前司譯院正) 조신이 찬집(撰集)에 대한 책임을 맡아 다른 여러 학자들과 함께 간행을 보게 되었던 것으로 본래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과 함께 설명이 되어있는 형태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도 마찬가지로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도리(道里)에 관한 일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한문으로 설명하고 란상(欄上)에 언해(諺解)가 되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사기(內賜記)에 의거 선조 12년(1579)에 김성일(金誠一)에 내려 준 것을 알 수 있다.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에 실려 있는 도판 및 언해는 조선시대 판화(版畵)의 변천 및 국어사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유학사상 및 윤리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데 그 가치를 둔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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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1.매월당시집(金誠一 宗家 典籍 - 梅月堂詩集) / 조선 선조 16년(1583) / 3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문집으로 이자(李耔)에 의해 처음으로 수집작업이 시작되었으나 그 뒤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등이 수집을 계속하여 마침내 윤춘년에 의하여 그 간행을 보았다. 저자인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 등이 있다. 그는 이미 신동(神童)이라는 이름으로 어릴적 세상에 알려졌고 특히 시재(詩材)에 뛰어나 이미 그의 재주가 널이 세상에 알려져 그 미래가 약속된 인물인 듯 하였으나 그의 일생은 인생 태반이 방랑에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나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였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선조(宣祖)의 명에 의해 율곡(栗谷)이 제진(製進)한 〈김시습전(金時習傳)〉을 붙여 선조 16년(1583)에 예문관(藝文館)에서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로 간행한 그 인본으로 봉좌문고에 있는 완질의 책과 비교해 볼때 전 23권 9책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목록, 권 7~9, 권 13~14 3책만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남긴 저작중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은 거의 산실(散失)되어 그의 진수를 접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는 시를 지어서 나뭇잎이나 바위에 적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불태워 버리거나 물에 띄워 보내기도 하여 오늘날 남은 시들이 그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완질본이 아니라 할지라도 선조 16년(1583)에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로 간행된 김시습의 남은 몇 안되는 작품인 것 만으로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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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2.학봉호당삭제(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峯湖堂朔製) / [조선 선조 9년(1576)~선조 10년(1577)] / 3첩 / 시고류/시고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자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소장되어온 전적 55종 261책 중 1종 3책이다. 3책의 첩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김성일이 호당(湖當)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지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표지에는 ‘선조문충공유묵(先祖文忠公遺墨)’이라 필사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후대에 씌여진 것으로 보인다. 매 제술의 아랫부분에는 작품에 대한 품평을 적은 ‘차상(次上)’, ‘이상(二上)’, ‘위(違)’ 등의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당시 대제학이었던 김귀영(金貴榮)의 필적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독서당 제도는 세종 12년(1426)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성종 23년(1492)에 공식적으로 개설되어 국가의 전문인력을 길러내는 학문연구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왕의 특별 배려를 받았으며 문신으로서 독서당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명예롭게 여겼다. 학봉이 사가독서한 시기는 선조 8년(1575)으로 이 때의 독서당은 중종(中宗)이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에 정자를 고쳐지어 설치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었다. 보물로 지정된 김성일 종손가 소장 전적 중 필사본은 이 밖에도 《문충공서고(文忠公書稿)》ㆍ《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 등이 있는데 대부분 김성일의 자필본과 김성일에 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김성일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조선시대 독서당 운영에 관한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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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3.문충공서고(金誠一 宗家 典籍 - 文忠公書稿) / 조선 선조 19년(1586)~선조 25년(1592)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그 큰아들 김집(金潗:, 1558~?)에게 보낸 서찰을 모은 첩(帖)이다. 맨 앞쪽에 실린 <여장아집(與長兒潗)>은 1586년 8월 나주목사 재직 시 큰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써 보낸 오언(五言) 시찰(詩札)이다. 형식은 시이지만 어투가 쉽고 내용도 교훈적이다. 말미에 “병술 8월 12일 두 여자 종을 큰아이에게 나눠주었는데, 아이가 가난한 형제에게 나눠주기를 청하며 굳이 사양한다. 술에 취해 붓을 찾아 이를 쓴다”고 적혀있다. 취중 글씨이기 때문에 좀 거칠지만 운필은 자연스럽다. 그 뒤에 서간 7통이 실려 있다. 앞쪽 3통은 1583년 6월 5일, 6월 19일, 7월 7일의 것이다. 첫째는 황해도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 때 집안 안부를 물은 것이고, 둘째는 작은형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찰방 직을 제수받자 병중의 몸으로 상경하여 사직한 뒤 치료받다 죽자 자신을 대신하여 큰아들에게 호상(護喪)을 준비시킨 것이며, 셋째는 황해도 백주(白州)에서 작은형의 상을 치룬 결과를 물어본 것이다. 다음 4통은 나주목사 재직 시 1584년 11월 29일, 1585년 정월 12일, 정월 27일, 2월 22일에 보낸 것이다. 넷째는 큰형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의 병환이 심해지자 몇 가지 처방을 보낸 것이고, 다섯째는 이듬해 정월 큰형의 병환이 심해지자 걱정하는 심정을 전한 것이다. 여섯째는 큰형 상을 치른 뒤 형수와 조카 등의 안부를 물은 것이며, 일곱째는 장례를 치른 뒤의 여러 처리에 관한 것이다. 【 번역 해제 】 (1첩) 명종~선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학봉(學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그의 맏아들 김집(金潗)에게 보낸 시 1편, 편지 7건을 한데 묶어 후손이 첩장(帖粧)한 것이다.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문충공(文忠公)이란 김성일의 시호이며, 서고(書稿)란 편지 글이란 뜻이다. 시는 19구(句)의 오언장편서사시(五言長篇敍事詩)로 당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있던 김성일이 여종 2명을 맏아들에게 주었는데, 김집은 ‘가난한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시라’고 청하면서 굳이 사양하므로 선조 19년(1586) 8월 13일에 이 시를 지어 보낸 것이다. 김성일은 ‘문호의 흥망은 자손의 현불초(賢不肖)에 달려 있는데, 네 착한 말을 듣게 되어서는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로 시작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재산보다 더 소중함을 서술하고, ‘네가 성인의 훈계 체득하려면 마음속의 저울로 헤아려 보라’고 끝맺고 있다. 편지 7건은 계미년(1583, 선조16) 6월 5일ㆍ6월 19일ㆍ7월 7일ㆍ11월 그믐날, 을유년(1585, 선조18) 1월 12일ㆍ1월 27일ㆍ2월 22일에 쓴 것으로, 당시 김성일이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로 나갔을 때에 고향에 있는 맏아들 김집에게 보낸 것이다. ‘계미년 6월 5일, 6월 19일의 편지에는, 중형(仲兄)인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어 사은숙배(謝恩肅拜)하러 서울에 왔다가 병으로 별세하자, 김성일은 사명을 띠고 황해도에 있는 처지여서 분곡(奔哭)하지 못하는 애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서울에서 운구(運柩)하여 고향으로 반장(返葬)하는 일련의 일들을 소상히 적어 지시하고 있다. 7월 7일의 편지에는, 황해도 순무어사에서 미처 복명하기도 전에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어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8월 초에 부임해야 함을 알리고, 9월 초에 자신의 부인 권씨(權氏)를 임지로 맞이해 와야 하는데, 그때 당신의 부인과 서모도 함께 모시고 오라고 김집에게 당부하고 있다. 딸의 혼례에 관한 말도 있으나 글씨가 희미하여 판독이 되지 않는 곳이 있다. 계미년(1583) 11월 그믐날, 을유년(1585, 선조18) 1월 12일ㆍ1월 17일ㆍ2월 22일의 편지에는, 주로 백형(伯兄)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의 병환과 상장(喪葬)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병환 중에는 처방과 대증(對證)의 약을 지어 보내고, 초상ㆍ장사 때에는 상장(喪葬)의 제구(諸具)를 임지에서 장만하여 보내고, 장지(葬地)에 관한 관심을 특히 표명할 뿐만 아니라, 성주(城主)인 안동부사에게 조묘군(造墓軍) 등의 협조 편지도 보낸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자신은 “병환에도 병시중을 못하고 별세해도 직접 영결(永訣)하지 못하니, 망극(罔極)한 슬픔을 호소할 데가 없다. … 네가 슬픔과 정성을 극진히 하여 네 아비의 그지없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도록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편지 내용 중에 한식ㆍ단오제에 제수(祭需)를 챙겨 보내고 백형수ㆍ아우ㆍ조카들의 우환에 관한 걱정도 하고 있다. 위의 시 1편은 『학봉집』에 실려 있으나, 편지 7편은 문집에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이 7편의 편지에서 학봉 김성일의 성실하고 간측(懇側)한 품성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특히 바쁜 공무, 비통한 상중에 아들에게 급히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의 능란한 문필(文筆)은 더욱 돋보인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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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4.문충공수간(金誠一 宗家 典籍 - 文忠公手柬) / 조선 선조 18년(1585)~선조 19년(1586)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그의 큰아들 김집(金潗, 1558~?)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2책의 서간첩(書簡帖)이다. 먼저 《문충공수간(文忠公手柬)》에는 1583년 1통, 1585년 6통, 1586년 1통 도합 8통이 실려 있다. 뒷표지 안쪽에는 “정주 금이옥 경고(亭主 金以鈺 敬稿)”라 하여 후손 김이옥이 조상이 아꼈던 정자(亭子) 대한 칠언율시 시고(詩稿)가 붙여있다. 다음 《문충고유간(文忠公遺柬)》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재직하던 1586년의 서간 7통이 실려 있으며, 말미에 봉투와 내용 일부만 남은 1통이 있다. 맨 앞 편지에서 “장모님 기체 또한 평안하신지 걱정된다(聘母氣體亦平安否慮之)”, “혁아의 초례도 거행했느냐(?奕兒醮禮初亦行之乎)” 등의 구절로 보면 《문충공수간》의 마지막 서간(1586. 1. 22)에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하 장모님 병환과 장사, 노비 처리, 손자 걱정, 필묵(筆墨) 송부 등 잡사에 관한 내용이다. 이들 서간첩은 보물 제905-23호 《문충공서고(文忠公書稿)》에 실린 편지들과 함께 김성일의 황해도순무어사(1583. 3~7), 나주목사(1583. 7~1586. 12) 시절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학봉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재임하던 갑신년(1584, 선조17)에서 병술년(1586, 선조19) 사이에 고향에 있는 맏아들 김집에게 보낸 편지 14건을 후손이 한데 묶어 첩장(帖粧)한 것이다. 그 편지 첩 안에 김성일의 5세손 김이옥(金以鈺)의 칠언율시(七言律詩) 1편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 90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문충공이란 김성일의 시호이고, 수간(手柬)이란 손수 쓴 편지라는 뜻이다. 14건의 편지는 9월 11일ㆍ연월이 빠진 것ㆍ을유년(1585, 선조18) 3월 3일ㆍ3월 21일ㆍ4월 13일ㆍ4월 21일ㆍ1월 22일ㆍ병술년(1586) 2월 9일ㆍ4월 13일ㆍ4월 22일ㆍ5월 8일ㆍ6월 9일ㆍ7월 9일ㆍ12일에 보낸 것이다. 9월 11일의 편지에는, 이직장(李直長)의 부음(訃音), 목화를 보내라는 일, 사옥(四玉) 등 여종의 공물을 받아 보내라는 등의 내용인데, 연도는 빠져 있으나 이직장 곧 이안도(李安道)의 사망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갑신년(1584)이 분명하다. 이안도는 퇴계 이황의 손자다. 학봉은, 형제와 다름없는 벗인 이안도의 부음을 듣고도 조문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치전(致奠)은 신병으로 제문을 짓지 못하여 다음으로 미룬다는 내용이다. 다음 연월이 빠진 편지는,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의 상장(喪葬)에 관한 일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을유년(1585) 1~2월경에 보낸 것인 듯하다. 을유년 3월 3일ㆍ3월 21일ㆍ4월 13일의 편지에는 주로 백형의 장례에 관한 내용인데, 장삿날ㆍ묘지ㆍ상여(喪輿)ㆍ석물(石物) 등의 문제가 언급되어 있고, 자신은 동복(同福)의 시관으로 시소(試所)에 있다는 내용이다. 4월 21일의 편지에는, 백씨의 장사는 지냈는지, 장구(葬具)는 미진한 점이 없었는지를 묻고, 기제(忌祭)와 단오제(端午祭)에 제물(祭物)을 보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1월 22일, 병술년(1586) 2월 9일의 편지에는, 작은 아들 혁의 혼사에 관한 일과 생질 류복기(柳復起)의 조모를 영천(榮川)에 귀장(歸葬)하는 문제로 감사와 영천군수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월 22일, 편지와 병술년(1586) 2월 9일 사이에 적혀 있는 학봉의 5세손 김이옥(金以鈺)의 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학봉이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에게 지어 보낸 시운(詩韻)에 따라 지은 것인데, 안동 금계(金溪)에 있는 교암대(橋巖臺)를 소재로 읊은 시이다. 4월 13일ㆍ4월 22일ㆍ5월 8일ㆍ6월 9일ㆍ7월 19일의 편지는 비교적 간단한 편인데, 손자 봉(鳳)의 방종, 기일과 단오 때의 제물을 보낸다는 것, 사옥(四玉) 등의 공물 징수에 관한 내용이고, 종이ㆍ부채ㆍ건어물 등 선물을 보내는 것은 연월일 다음에 추록(追錄)으로 적고 있다. 12일의 편지에는 딸의 혼사에 관한 내용인데, 연월이 빠져 무슨 해인지 알 수 없으나, 같은 해 8~9월의 12일로 추정된다. 위의 문충공 서고와 함께 학봉의 친필로서 학봉 김성일의 거관생활(居官生活)과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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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5.학봉수적첩(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峯手績帖) / 조선 명종 20년(1565)~광해군 12년(1620) / 1첩 / 간독류/간독 / 김승태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 선조연간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서첩을 보고 임회(林檜, 1562~1624)ㆍ김시양(金時讓, 1581~1643)ㆍ서성(徐?, 1558~1631)ㆍ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짓고 쓴 발문을 모아 놓은 첩이다. 발문에 따르면, 김성일의 필적은 영해(寧海)에 사는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 1543~1622)이 김성일에게 받은 필적을 모아 축으로 간직하다 뒤에 서첩으로 표구했다고 한다. 백현룡은 이황의 제자로 김성일 등과 교유하였다. 서첩의 맨 앞에 김성일이 1565년 12월에 보낸 편지 1통이 실려 있는데, 수신인은 “영해백생원댁(寧海白生員宅)”이라 쓰여 있다. 이어 나주(羅州) 사람 임회가 백현룡에게 김성일의 필적을 보고 짓고 쓴 <학봉선생수첩축서(鶴峯先生手帖軸序)>가 있고, 다음에는 김시양이 1590년 김성일이 통신부사로 갔을 때 국서를 받는 의례를 바르게 한 것을 찬미한 1619년의 발문이 있다. 그 다음 영해에서 귀양살던 서성이 1620년에 짓고 쓴 <서백상사학봉첩후(書白上舍鶴峯帖後)>가 실려 있다. 마지막에는 황여일이 모든 일에 돈독하게 힘쓰는 김성일의 태도와 사우(師友)를 존경하는 백현룡의 마음씨를 찬미한 발문이 실려있다. 【 번역 해제 】 (1첩) 『학봉수적첩(鶴峯手迹帖)』에는 모두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 번째 글은 누가 지었는지 미상이다. 더구나 원본이 흐려 중간에 보이지 않고 끝까지 없으므로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대략적인 내용은, 예조가 초7일에 행할 종묘동향대제(宗廟冬享大祭)때 대가(大駕)와 대가를 인도할 시신(侍臣)의 절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무슨 일로 특별히 내린 전교(傳敎)대로 경조 당랑(京兆堂郞)이 직접 살펴서 성상을 덕을 널리 알릴 것을 당부한 글이다. 그 아래 문서는 배접할 때 붙인 것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 글은 영해(領海) 백생원댁(白生員宅)에 보내는 답장 편지로 학봉(鶴峯)의 형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이 을축년(1565, 명종20)에 보낸 편지이다. 이 서찰은 문충공(文忠公)의 유묵은 아니므로 참고로 첨부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해 궁금하던 차에 편지와 각종 과일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말과 조정의 서용(敍用)을 입어 첨정(僉正)의 망(望)에 참석했지만 불화가 생긴데 대해 한탄을 표했다. 그리고 자신의 중간 딸을 선산 최씨 집안과 혼인을 성사시켰으면 하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세 번째 글은 팽성인(彭城人) 임회(林檜)가 학봉의 수첩축(手帖軸)에 지은 서문(序文)이다. 어려서부터 공의 이름을 들어 흠앙하였던 점과 공의 방을 찾아가 충고를 들었던 사연을 말하였다. 우연히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을 만나 학봉공이 성헌에게 보낸 서첩을 보고 병화(兵火)로 인해 경황이 없는 중에도 축으로 만들어 먼 후대에까지 전한 신의를 더욱 격찬하였다. 네 번째 글은 기미년(1619, 광해11) 6월 안동 김시언(金時言)이 영해(寧海)의 비곡(飛谷)에서 지은 글이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나라에서 일본에 통신(通信)할 일이 있어 사신 행차가 있는 것을 어릴 적에 보았는데, 지개와 절조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학봉이라는 것을 물어 알게 되었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변방에서 영해(寧海)로 부임하여 옛 친구인 백상사(白上舍:惺軒 白見龍)가 학봉과 평소 주고받았던 시장(詩章)과 간독(簡牘)이 들어 있는 첩(帖)을 보고 감회를 적었다. 다섯 번째 글은 약봉(藥峯) 서성(徐?)이 경신년(1620, 광해12)에 백상사(白上舍)의 학봉첩(鶴峯帖) 뒤에 쓴 글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8) 겨울에 이조 참의로 영해(寧海)에 이배(移配)되어 향인(鄕人) 백상사와 알게 된 인연을 말하였다. 어느 날 학봉과 생전에 주고받았던 시장(詩章)과 간찰(簡札)이 들어 있는 하나의 첩을 보고 백상사의 뜻과 숭상하는 바를 알 수 있어 그가 만든 첩 뒤에 발문을 적은 것이다. 여섯 번째 글은 성옹(惺翁)이 만든 학봉수적첩(鶴峯手迹帖)에 황여일(黃汝一)이 발문을 적은 글이다. 성옹이 학봉과 교제하면서 주고받았던 편언척자(片言隻字)들을 경황이 없는 난리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첩을 만들어 추상(追想)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봉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이 첩만 열만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 하고 아침저녁으로 모습을 뵙는 듯 하다고 격찬한 발문이다. 이 첩을 통하여 우리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비롯한 선현(先賢)들의 필적(筆跡)을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평소 주고받았던 아름다운 시문(詩文)과 그에 담긴 사연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작성자 : 주정순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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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6.진주수성절차(金誠一 宗家 典籍 - 晋州守城節次) / 조선 선조 25년(1592) / 1건 / 시고류/시고 / 김승태 / 경북 안동시 / 낱장선조 25년(1592) 10월에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진주성(晉州城)을 수비한 전말을 적어 국왕에게 치계(馳啓)한 초고(草稿)이다. 치계란 감사와 병사가 급하게 임금에게 아뢰는 장계이다. 보물 제905호로 지정된 <학봉 김성일 종손가소장전적(鶴峯金誠一宗孫家所藏典籍)> 에 포함되어 있다. 1책ㆍ필사본ㆍ표지 서명은 “학봉선조 진주수성절차(鶴峯宣祖 晋州守城節次)”로 되었고, 《학봉집(鶴峯集)』에는 〈치계진주수성승첩장(馳啓晉州守城勝捷狀)〉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 책은 원래 한 장으로 작성된 것을 후손이 한 면에 10-11줄씩 도합 9면으로 잘라 첩장(帖裝)으로 만들었는데, 제목까지 합쳐 총95줄이다. 임진왜란 때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인 진주싸움의 전황(戰況)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겪은 것처럼 자세히 기술한 이 치계초고(馳啓草稿)는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임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임은 물론이려니와, 김성일의 유려한 문장과 호건(豪健)한 필체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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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7.영모첩(金誠一 宗家 典籍 - 永慕帖) / 조선 선조 15년(1582)~헌종 15년(1849)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비롯한 의성김씨 후손의 필적을 모아놓은 첩(帖)이다. 맨 앞에 실린 김성일의 <봉황산(鳳凰山) 2수> 필적은 1576년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제술(製述)한 칠언율시이다. 각 말미에 쓴 '삼상(三上)' '위률(違律)'은 당시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의 품평 필적이라 한다. 다음은 1582년(임오) 5월 숙부의 상을 당했을 때 조문 서한을 보내준 조도사(趙都事)에게 김극일(金克一)ㆍ수일(守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형제가 공동명의로 그 달 26일에 올린 답서이다. 당시 4형제는 1580년 윤4월 23일 작고한 부친 김진(金璡, 1500~1580)의 삼년상을 막 마쳤을 때였다. 다음은 여러 대에 걸친 김성일 후손들로 아들 세마부군(洗馬府君), 손자 경력부군(經歷府君), 증손 호군부군(護軍府君), 현손 여사헌(如斯軒) 김세기(金世基), 5대손 장사랑부군(將仕郞府君), 6대손 처사부군(處士府君) 김부렴(金復濂), 7대손 철토재부군(撤土齋府君) 김주국(金柱國), 8대손 처사부군(處士府君) 김광찬(金光燦)과 인찬(寅燦) 형제, 9대손 좌랑부군(佐郞府君) 청송(聽松) 김종수(金宗壽), 10대손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 그리고 11대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시문 필적이 실려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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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백지묵서 법천사 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白紙墨書 法泉寺 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 / 조선 세조 3년(1457) / 1첩 / 사찰문서/기문류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절첩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백지묵서 법천사 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白紙墨書 法泉寺 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은 필사본으로 세조 3년(1457)에 화남(和南)이 작성한 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 조성을 위한 보권문(普勸文)과 이때 동참한 시주자들의 시주질(施主秩)이다. 이때의 불상조성 권선(勸善)에는 태종(太宗)의 후궁(後宮)인 의빈 권씨(懿嬪 權氏), 명빈 김씨(明嬪 金氏)가 동참하고 유인 신씨(儒人 辛氏)와 효녕대군(孝寧大君) 등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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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8.학계첩(金誠一 宗家 典籍 - 學契帖) / 조선 선조 10년(1577)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문사 청계(淸溪) 김진(金璡, 1500~1580)이 1578년 7월 손자 10여 명의 학업을 위해 아들ㆍ사위와 맺은 학계(學契)와 그리고 1577년 9월 김진을 비롯한 청기(靑杞)와 영양(英陽) 두 고을의 품관(品官)이 모여 결성한 향사(鄕社) 관련 기록이다. 학계문에는 김진이 서당(書堂)을 짓고자 15석을 헌납하고 계원이 각각 2석을 내어 모두 43석으로 기금을 삼고 그 이식으로 봄가을의 회비로 쓴다는 내용이다. 계원은 김진을 비롯하여 극일(克一, 1522~1585)ㆍ수일(守一, 1528~1583)ㆍ명일(明一, 1534~1570)ㆍ성일(誠一, 1538~1593)ㆍ복일(復一, 1541~1591) 다섯 아들과 사위 이달춘(李達春) 등이다. 향사문에는 <양현품관좌목(兩縣品官坐目)>이라 하여 노선(老仙)의 유람을 위해 향사 모임을 결성하니 소홀하지 말라는 김수일(金守一)의 서문이 있다. 이어 <정축추입의(丁丑秋立議)>라 하여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와 불화하면” 영원히 몰아내고, “친우를 불신하고” “윗사람을 능멸하면” 무리에서 덜어내며, “땅주인을 비방하고” “기금을 사사로이 속이면” 벌을 준다는 규약이 있다. 그 다음 유학(幼學) 김호(金虎), 생원 김진(金璡) 등 22명과 갑신년(1584)에 들어온 김극일 등 4명의 계원 명단이 적혀 있다. 【 번역 해제 】 (1첩)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선조 10년(1577)에 청기현(靑杞縣) 초동(椒洞)에 우거(寓居)하면서 자손의 교육을 위해 청기(靑杞)ㆍ영양(英陽) 두 현의 사부(士夫)들과 결성한 학계첩(學契帖)이다.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표지(表紙) 서명은 ‘청계선조유묵(靑溪先祖遺墨)’이라 쓰여 있는데, 자손의 글씨이다. 이 학계첩은 모두 6면으로 구성되었다. (1) 제1~2면:생원(生員) 김진(金璡)이 선조 11년(1578) 7월에 자필로 “서당(書堂)을 짓는 데에 쌀 15석을 바쳤으므로 내 자손이 수학(受學)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적고, 줄을 갈아 연월일 성(姓), 그 다음에 수결(手決)을 치고 있다. 다음 줄에 학계의 양곡을 관리 운영하는 규칙을 적고, 다시 줄을 갈아 자신의 아들 5형제의 경력을 적고 있다. 특히 아들 5형제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아들 셋과 사위 하나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초동이 길지(吉地)라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적고 있다. 끝에 ‘김진(金璡)은 79세에 쓴다’라고 적고 있다. (2) 제3면:선조 10년(1577) 가을에 생원(生員) 김수일(金守一)이 쓴 청기ㆍ영양 두 현의 좌목(座目) 서문이 있고, 이어 줄을 갈아서 ‘정축추입의(丁丑秋立議)’라는 제목 아래에 계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약 6조가 열록(列錄)되었다. 정축년은 곧 선조 10년(1577)이다. (3) 제4~6면:선조 10년에 결성한 청기ㆍ영양 두 현의 계원인 유학(幼學) 김희(金熙) 등 22인의 좌목이다. 좌목은 본인의 관직ㆍ성명ㆍ자(字)를 적고, 특기할 행적이나 경력이 있으면 해당 자(字) 아래에 적고 있다. 다음 줄을 갈아 ‘갑신년 추입[甲申追入]’이란 제목 아래에, 내자시 정(內資寺正) 김극일(金克一) 등 4인의 좌목이 있다. 갑신년은 선조 17년(1584)이며, 김극일은 김진의 맏아들이다. 끝에 ‘서당(書堂)의 두 담당에게 올린다’로 적고 있다. 선조 10년(1577)에 결성된 이 학계첩은 결성의 동기, 학계의 관리 운영 규칙, 상호 지켜야 할 도리인 규약[立議]ㆍ좌목 등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 학계첩이 최종적으로 서당에 올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계회 특히 학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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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29.선현유묵(金誠一 宗家 典籍 - 先賢遺墨) / 조선 선조 16년(1583)~선조 25년(1592)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덕형(李德馨), 박성(朴惺), 그리고 일본 사신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에게 받은 편지를 모은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의주의 피난처에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1592년 12월 9일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에게 올린 답장이다. 당시 명나라 지원군이 요동의 국경 가까이 주둔했지만 평양을 탈환하는 공격이 지체되어 고민된다는 심정을 전한 것이다. 또 진주성대첩을 찬미하고, 진주사(陳奏使)로 명에 급파된 정곤수(鄭?壽)로부터 명이 우리나라를 지원해 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를 전하였다. 둘째는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이 1592년 10월 11일 순찰사 김성일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단성(丹城)의 왜구를 몰아낸 소식에 기뻤다는 것과 어떤 성밖의 적이 모두 섬멸되었다는데 과연 사실인지 여부는 모른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전라도에 가서 의병장의 출동에 관해 상세히 살피고 처리하라는 왕명을 김성일에게 위임한 내용이다. 마지막은 일본 사신으로 1583년 5월에 왔던 타치바나가 당시 접위관(接慰官)이던 김성일에게 보낸 서한으로 말미에 예물목록이 쓰여 있다. 【 번역 해제 】 (1첩) 1) 이덕형의 편지 연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2월 9일에 이덕형이 경상우도감사(慶尙右道監司) 김성일에게 보낸 답장 편지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이 의주로 몽진(蒙塵)해 있던 난리 중에, 당시 대사헌으로서 임금을 모시고 있던 이덕형이 저간의 돌아가는 상황을 전하며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답답한 심정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진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과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곧 보내어 반드시 적을 물리치겠노라고 약속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기쁜 마음과 기대를 내보였다. 또한 진주 목사를 하던 이가 병사(兵使)로 옮겨갔으므로 그 후임에 대해서 걱정을 하며, 일이 급하니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간결한 문체로 짧은 글 속에 임금과 조정 및 당시의 정세를 빠짐없이 전달하고 있는 편지로, 구성과 내용면에서 매우 아름답고 빼어난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한 글이다. 2) 대암 박성의 편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招討使) 김성일의 참모로 종사하였던 박성(1549∼1606)이 1592년 10월 11일 운봉(雲峰)에 있으면서 김성일에게 답장으로 쓴 편지로 보인다. 단성(丹城)의 적을 몰아내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성 밖의 적도 다 섬멸하였다는 소식이 있는데 사실인지 물었다. 그리고 임씨 성을 가진 의병장의 이후 할 일에 대해 지시를 바라면서 자세한 것은 별지에 적었음을 밝혔다. 또 자신의 집에 먹을 것을 보내주어 가족들이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고 사례하였다. 전장에 있는 상하간의 의리와 따뜻함이 배어 있는 편지인데, 아랫부분이 약간 손상되어 있다. 3) 귤사사의 편지 왜국의 사신으로 왔던 귤 아무개가 접위관(接慰官)으로 만났던 조선의 관리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동안 친밀했던 듯이 인사를 하고, 자신은 날이 맑으면 돌아가려 하는데, 작별인사를 직접 할 길이 없어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을 보낸다고 하였다. 편지 마지막에 그 물건의 명칭과 수량을 적어 놓았다. ( 작성자 : 오덕훈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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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0.선현유묵(金誠一 宗家 典籍 - 先賢遺墨) / 조선 선조 26년(1593)~선조 38년(1605)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경상우도초유사(招諭使)로 있던 1593년 2월 21일과 4월 15일에 휘하의 종사관(從事官) 이로(李魯, 1544~1598)로부터 받은 편지 2통과 그리고 1605년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이 짓고 쓴 김성일 제문이다. 첫째 편지는 이로가 1593년 2월 김성일의 명에 따라 서로(西路)에 파견되어 여산(礪山)에서 명(明)나라 지원군의 상황을 써보낸 것이다. 둘째는 이로가 김성일의 4월 11일자 편지를 받은 뒤 4월 15일에 보낸 답장으로 전라도의 군사ㆍ군량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서찰을 받았을 즈음 김성일은 4월 19일 발병하여 그 달 29일 진주공관(晉州公館)에서 사망했다. 제문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유영순이 관내순찰 중 1605년 10월 2일 김성일의 묘에 가서 제사지낸 글로서,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집(鶴峯集)》속집에도 실려 있다. 유영순은 본관은 전주이고, 1579년 식년문과 급제 후 동지사 서장관ㆍ황해도관찰사ㆍ병조참지 등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부친과 형을 잃은 뒤 김시헌(金時獻)ㆍ송순(宋詢)과 함께 병력을 모으기도 했다. 이후 황해도관찰사ㆍ성주목사ㆍ좌승지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ㆍ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 번역 해제 】 (1첩)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중에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명을 받고 양곡을 구하러 전라도 순천(順天), 경상도 진주(晋州) 등지에 갔던 송암(松巖) 이로(李魯)가 도로에서 들은 소식과 저간에 있었던 상황을 김성일에게 보고한 편지 2건과 선조 38년(1605) 10월 2일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柳永詢)이 학봉 김성일의 묘소에서 드린 제문 1건 등 3건을 한데 묶어 책으로 엮은 것이다.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된 것이다. 표지 서명에 의해 제목을 정하였다. 2월 11일 이로의 편지에는, 비로 인해 도로가 불통하여 어렵사리 여산(礪山)에 도착했다는 것과 도로에서 들은 명군(明軍)의 동태에 대해 여산의 유향소(留鄕所), 창평(昌平)의 자모군(自募軍) 양산(梁山), 전라감영의 아전 등에게서 들은 말을 적어 보고했는데, 이는 여산에서 쓴 것이다. 4월 15일의 이로의 편지에는, 전라도 순천(順天)과 경상도 진주(晋州)에 가서 양곡의 원조를 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저간의 사정을 보고하고, 자신의 거취가 난감함을 호소하고 있다. 류영순의 제문에는, 김성일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과감한 직언, 경연(經筵)에서의 학문과 정책에 대해 토론한 것을 극찬하고, 경상도 병사로 나가 적을 물리친 일, 초유사(招諭使)가 되어서는 명문의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관내에 돌림으로써 그 충의에 감동되어 의병이 봉기(蜂起)한 것, 하늘이 몇 년의 수명만 빌려 주었더라면 진주성도 보전하였을 것이고 호남으로 향하는 왜적들도 막았을 것이라고 하며, 김성일이 왜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중도에 서거한 것을 지사(志士)와 영웅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다고 적는 한편, 평소 김성일의 덕과 의리를 흠앙(欽仰)하던 자신은 마침 감사로 부임하는 길에 묘소에 들러 치전(致奠)한다는 내용이다. 계사년(1593) 전란 중에 전라도 등지에서 감사 김성일에게 올린 이로의 편지 2건은 임진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고, 류영순의 제문은 학봉 김성일의 전기 자료인 동시에 임란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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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1.선현유묵(金誠一 宗家 典籍 - 先賢遺墨) / 조선 광해군 1년(1609)~인조 27년(1649)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 관하여 타인이 짓고 쓴 4가지 필적이다. 첫째, 나주 출신의 임회(林檜, 1562~1624)가 학봉의 필적을 보고 쓴 발문이다. 임회는 뒤에 영해(寧海)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곳의 선비 백현룡(白見龍, 1543-1622)이 학봉의 서첩을 보여주며 서문을 청하자, 이에 발문을 쓴 것이다. 둘째, 이식(李植, 1584~1647)이 1642년 7월에 짓고 쓴 <해사록발문(海槎錄跋文)>이다. 《해사록》은 김성일이 1590년 통신사(通信使)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 기록한 것이다. 셋째, 안동 사람 권태시(權泰時)가 1680년 5월 하순에 짓고 쓴 <학봉선생연시제명첩후(鶴峯先生延諡題名帖後)>이다. 학봉은 사후 1679년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당시의 시장(諡狀)을 보고 권태시가 쓴 발문이다. 넷째, 학봉의 방손(傍孫) 김굉(金㙆, 1739~1816)이 1813년 여름에 지은 <김성일묘갈명(金誠一墓碣銘)>이다. 학봉의 묘갈은 1619년 세워졌으나 1679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3년 뒤 문충이란 시호를 받게 되어 다시 묘갈을 세우게 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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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2.학봉시장(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峯諡狀) / 조선 숙종 2년(1676)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의 종가(宗家)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典籍) 중 보물 905호로 일괄(一括) 지정된 것 중의 하나로 민점(閔點)이 찬(撰)한 학봉의 시장(諡狀)이다. 시장(諡狀)이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생존 시 행적을 적은 글이다. 표지에는 ‘문충공시장(文忠公諡狀)’이라 제첨(題簽)되어 있으며 ‘시장(諡狀)’ 의 제목 아래 김성일의 휘(諱)ㆍ자(子)ㆍ호(號)ㆍ본관(本貫) 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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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3.퇴계사전초(金誠一 宗家 典籍 - 退溪史傳草)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책 / 필사본/고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글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선조 초에 스승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전기(傳記)를 지은 친필초고본으로 1책(25장), 가철(假綴)이며 항자수(行字數)는 부정(不定)이다. 표지(表紙)에〈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라 쓰여 있고, 권수(卷首)에 〈판중추부사 이모 졸(判中樞府事李某卒)〉로 시작하여 이황의 세계(世系)ㆍ이력ㆍ행덕을 기술하고 있는데, 초서이다. 《학봉집(鶴峰集)》 〈속집(續集)〉에는 '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史傳)'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작성한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단, 이 초고본 말미에 '이때 조정 의논이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등 유현(儒賢)들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시킬 것을 의논하고 있으니, 그 뜻은 다시 모(某, 이황)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지기(識記)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초고는 이황을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한 그의 전기자료로 삼을 목적인 듯하다. 김성일은 이황의 고제(高弟)로 이황의 문집 편집ㆍ간행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부 저술의 간행도 시도했으며, 언행록도 1백80여 조나 기록하였다. 퇴계사전초는 이황의 행덕과 김성일의 학문관 등이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이황과 김성일 사제간의 깊은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거니와, 특히 김성일의 유창한 문장과 호탕한 필체는 문화재적 가치를 더해 준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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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4.조천일기(金誠一 宗家 典籍 - 朝天日記) / 조선 선조 10년(1577) / 1책 / 필사본/일기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 가운데 한 책이다. 학봉 김성일의 자(字)는 사순(士純), 호(號)가 학봉(鶴峰),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명종(明宗) 19년(156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선조 1년(156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서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을 거쳐 선조 9년(1576)에는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 해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선조 12년(1572)에 함경도 순무어사(咸鏡道 巡撫御史)로 나가 6진(鎭) 등 국경지대까지 관할하였고, 선조 16년(1583)에는 다시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 巡撫御史)로 나가 민정(民情)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하(管下) 각지(各地)를 순행(巡行)하며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독전(督戰)하다가 선조 26년(1593) 진주공관(晋州公館)에서 순직(殉職)하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하였다. 또한 정치적(政治的)으로도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아 전상호(殿上虎)란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소차(疏箚)를 통하여 끊임없이 정책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민생고(民生苦)의 해결을 위한 의견개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서는 오만무례한 일본인의 태도에 동하지 않고 예법(禮法)에 맞게 처신하여 사신의 체통을 지킨 일화로 후대의 사신들에게도 귀감으로 삼았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 앞장서 진주성(晋州城)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를 방어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지만 끝내 과로(過勞)를 이기지 못하고 선조 26년(1593) 순국(殉國)한 16세기의 충신(忠臣)이면서 학자이자 애국자였다. 순국 뒤에는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안동(安東)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역시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나주(羅州)의 대곡서원(大谷書院), 영양(英陽)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진주(晋州)의 경림서원(慶林書院) 외 많은 서원(書院)에 종향(從享)되기도 하였다. 이 일기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선조 10년(1517)에 명(明)나라에 사은겸개종계주청서장관(謝恩兼改宗系奏請書狀官)으로 파견 임무를 맡게 되어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직접 쓴 일기이다. 하지만 현전 상태가 파손이 심하고 일기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곳이 많아 판독에는 어려움이 많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로 ≪학봉집일고(鶴峰集逸稿)≫ 권3에 <조천일기(朝天日記)>라는 동일한 제목의 일기가 있으며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선조 10년(1577) 즉 ‘정축이월이십이일(丁丑二月二十二日)’에서 ‘육월초사일(六月初四日)’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일고(逸稿)에는 원본 ≪조천일기(朝天日記)≫와 일치하는 날짜는 없으며 그 형식이 원본에서는 일자만을 적었던 반면 일고(逸稿)에서는 아래에 간지를 추가하고 있는 차이를 보인다. ≪조천일기(朝天日記)≫는 중국 기행자료로서 학봉 김성일이 사신으로 있을 때의 일을 낱낱이 기록한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학봉 자신의 생활 및 내면세계도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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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5.기묘일기부북정일기(金誠一 宗家 典籍 - 己卯日記附北征日記) / 조선 선조 12년(1579) / 1책 / 필사본/일기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선조 12년(1579)에 쓴 귀향일기인 〈기묘일기(己卯日記)〉 그리고 같은 해에 써서 합철(合綴)로 덧붙여진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 때의 일기인 〈북정일기(北征日記)〉이다. 자필초고본(초서). 1책(55장). 사주쌍변. 반곽 23.5cm×16.5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항 자수부정(字數不定)이며 책크기는 33.0cm×22.5cm이다. ①〈만력칠년기묘세일기(萬曆七年己卯歳日記)〉 이 일기는 16장으로 '만력칠년기묘세일기(萬曆七年己卯歲日記)'란 제목 아래에 1월 1일부터 4월 12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자신이 듣고 보고 행한 일들을 날마다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성일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으로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고 있다가 휴가를 내어 경북 영양현(英陽縣) 청기(靑杞) 별장에 있는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을 근친(覲親)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의 일기이다. ②〈북정일기(北征日記)〉 이 일기는 총39장으로 '북정일록(北征日錄)'이라는 제목 아래에,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의 일기이다. 김성일이 선조 12년(1579) 9월에 함경도 순무어사로 차임(差任)되어 함경도 전역을 순무(巡撫)하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일들을 적은 기록이다. 선조 12년(1579) 9월, 당시 김성일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있을 적에 순무어사에 차임되었는데, 변방 각 진보(鎭堡)의 군기와 창곡(倉穀)을 점열(點閱)하고 방수(防戍)하는 병사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고, 민심을 다독거리는 등 자신의 행한 일들과 산천 도리의 원근ㆍ험이(險夷) 그리고 그 지방의 풍속ㆍ인심ㆍ전설 등을 듣고 본 대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로에서 감회를 읊은 시가 상당수 있는데, 본문보다 한 자 낮추어 적고 있다. 이 일기가 《학봉집(鶴峰集)》 〈일기〉 제3권에 수록되었는데, 김성일 종가소장의 정고본(定稿本)에 의해 등사(謄寫)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묘일기 등 이 2건의 일기는 임란 이전에 관료가 쓴 자필일기로서, 병화로 소실된 임란 이전의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북정일기〉는 북도의 각 진보와 역참ㆍ창고 등의 실태와 산천도리의 원근과 험이(險夷)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16세기 북도의 국방ㆍ경제ㆍ지리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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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6.학봉선생해사록(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峯先生海槎錄) / 조선 선조 23년(1590) / 1첩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학봉선생해사록(鶴峰先生海槎錄)≫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 가운데 한 책이다. 이 책은 학봉의 말년 저작으로 그가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때의 저술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선조 23년(1590) 3월에 일본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로 명을 받아 조정을 떠나면서부터 시작하여 그 이듬해(1591) 2월까지의 기간에 지은 것이며 그 내용은 자필로 쓴 시문(詩文)이다. 책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본문의 내용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원문을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제본 상태는 후대에 원본을 해체하여 종이를 다시 덧대고 배접하여 보강한 채로 남아 있다. 책의 내용은 책머리에 정확한 인명은 알 수 없으나 완산후인(完山後人) 모씨(某氏)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고 이어서 해사록(海槎錄)의 본문에 해당하는 학봉(鶴峰)이 지은 시문들이 있으며 이 밖에도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의 <서해사록후(書海槎錄後)> 한 수를 비롯하여 선조 년(1605)에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1540~1622)이 지은 <차최립지운병서(次崔立之韻幷序)> 1편이 부가되어 있으며 권말에는 정조 21년(1797)에 학봉의 9대손 김종수(金宗壽)의 후지(後識)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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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7.상례고증(金誠一 宗家 典籍 - 喪禮考證) / 조선 선조 14년(1581) / 2첩 / 필사본/고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상례고증(喪禮考證)》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전적(典籍)으로 학봉(鶴峰) 김성일(金成一)의 친필본이며 1987년 3월 7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같은 서명으로 조선중기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상례고증(喪禮考證)》도 있으며 주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서 상례를 《예기(禮記)》와 결부시켜 상제(喪制) 3편과 상제에 따른 상복을 도식화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학봉의 친필로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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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불설대보부모은중경 합각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佛說大報父母恩重經 合刻 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 조선 세종 14년(1432) / 2책 / 목판본/사찰본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선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합각 장수멸죄호제동자타라니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合刻 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은 부모에게 보은(報恩)을 설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죄(罪)를 멸하고, 수명(壽命)을 연장하는 도리를 설한 장수멸죄경(長壽滅罪經)이다. 이 판본은 부모은중경 말(末)에 있는 정암(定菴)의 발(跋)에 의하면 세종 14년(1432)에 태종의 후궁(後宮)인 명빈 김씨(明嬪 金氏)의 발원으로 장수경과 함께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솔진과 옥매가 영가 천도를 위해 찍어낸 것임이 권말의 묵서지기에 나타나 있다. 이 판본은 보물 959호, 1125호와 동일한 판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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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8.학봉일기초(경연일기)(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峯日記草(經筵日記)) / 조선 선조 3년(1570)~선조 6년(1573) / 35책 / 필사본/일기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사본(초고본). 54철(綴). 규격 24.4cm×19cm~25.4cm×18cm(규격이 일정하지 않음). 《경연일기(經筵日記)》라고도 부른다. 이 일기초는 선조 3년(1570)~선조7 년(1573)까지의 기사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ㆍ대교(待敎)ㆍ봉교(奉敎) 등의 벼슬을 지내며 사관을 예겸(例兼)하고 있을 때에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당일 토론, 결정한 일을 적은 사초이다. 책의 형태로 장정(裝訂)되어 있지 않고 날짜별로 가철(假綴)된 이 일기초(사초)는 4년 동안 총 31일의 기사만 현존하고 있다. 날짜 미상의 기사가 나오는 묶음도 약20철이 되는데, 어느 날짜에 소속되는 기사인지 미상하여 별도로 두었다. 이 일기는 대체로 경연에서 군신간에 경서(經書) 및 정사 등의 강론이 주된 내용이며, 더러 정전(正殿)에서 행산 승지 및 조신(朝臣)의 입계(入啓) 또는 관리의 임면(任免), 형옥(刑獄)의 처결에 관한 기사들도 있다. 이 일기초는 4년 동안에 31일의 기사에 불과하며, 해당 년월일이 확인되지 않는 묶음도 있는 사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사관으로 재직할 때 왕의 측근에서 시정(時政)을 기록한 사초로서, 당시 경연 운용의 실상(實相)과 정치ㆍ경제ㆍ사회 및 관리의 임면(任免), 형옥(刑獄)의 처결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선조실록(宣祖實錄)》기사에는 상당일이 빠져 있는데, 이 사초에는 중요국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병화로 소실된 임란 이전의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이며, 활달한 김성일의 필체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높여준다. 【 번역 해제 】 (1책) 경오년(1572, 선조3) 11월 24일의 일기로서 그날은 날씨가 맑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언 이정암(李廷馣)의 차자는 이모씨(李某氏)의 파직에 관한 일이었는데, 왕의 비답은 이미 윤허한 일이라 하여 청허하지 않았다. 이복남(李伏男)에 대한 계사(啓辭)에 왕의 비답은, “이복남이 비록 잘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 그 사람을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 이 때문에 그를 영구히 폐하고 쓰지 않는다면 선행(善行)을 하는 사람을 끊어버리는 것이니, 그것은 옳지 못하다.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간(臺諫)의 차자(箚子)에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근래 괴변(怪變)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는 오로지 변변치 못한 내가 왕통을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논한 바는 내가 깊이 유념(留念)해야겠다.” 동부승지가 형조의 말을 빌어 아뢰기를, “관원을 제관(祭官)에 차출하지 마시라는 일은 초기(草記)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알았다.’라고 전교하였다. 이날 일기에는 3가지 일 뿐이었다. ( 작성자 : 이정섭 ) (2책) 경오년(1572, 선조3) 11월 26일의 일기로서 아침에는 흐리고 낮에는 맑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날 ‘상참(常參)과 경연을 정지하였다.’라고 적혀 있는데, 경연관을 비현합(丕顯閤)에 소대(召對)하였다. 소대에 나아온 경연관은 이제민(李齊閔)ㆍ이해수(李海壽)ㆍ정탁(鄭琢)ㆍ기령(奇苓)ㆍ김찬(金瓚)ㆍ김성일(金誠一) 등 6명이었다. 우의정이 올린 계사(啓辭)는 위사공훈 삭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자기도 위사공신에 들어있으니 파면해 달라고 재삼 간청하고 있다. 정사(政事)가 있었는데, 이조판서 정대연(鄭大年)은 병들어 출사하지 못하였고, 이조참판 윤의중(尹毅中), 참의 허엽(許曄), 도승지 이후백(李後白), 병조판서 오상(吳祥), 병조참판 박계현(朴啓賢), 병조참의 박승임(朴承任), 병조참지 윤두수(尹斗壽)가 정청(政廳) 들어갔다. 정언 이정암이, ‘연암부사 윤승경은 병으로 오랫동안 출사하지 못하여 연안 부민(府民)들이 폐해를 받고 있으니 파직하시라.’고 계청하였다. 경연관 이해수, 이제민, 정탁 등이 인성(人性)에 관련된, 『맹자』의 ‘고기를 좋아하듯 의리를 좋아하는’ 본성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특히 정자(程子)가 말한 추환장(芻豢章)의 주설(註說)을 인용하여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어 경연관은 인성에 대해 논한 이외에 위사공신(衛社功臣)의 삭훈(削勳)에 관한 것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인사에, 박근원(朴謹元)이 부제학으로, 정지연(鄭芝衍)이 부수찬으로, 문익성(文益成)이 영암 군수로, 노직(盧稷)이 예조 좌랑으로, 남의(南寲)가 공주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부제학에 임명된 박근원을 평론하기를, “박근원은 지키는 바가 있어 세상에 영합하여 부침(浮沈)하는 태도를 짓지 않고, 특히 천성이 방엄(方嚴)하고 의지가 굳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중(推重)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명종시대에 외척의 권력이 성대하고 환관이 ‘멋대로 횡행한 폐해를 왕은 오늘날에도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이날은 위사공신 삭훈(削勳)에 관한 일과 이(理)와 의(義)를 좋아하는 인성(人性)에 대한 군신간의 진지한 토론은 매우 희귀한 자료라 할 것이다. 백인걸(白仁傑)의 계사(啓辭)에 연유하여 박근원이 사직하고 떠나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날 해무리가 졌는데 모두 안은 붉고 바깥은 푸르렀다 하고, 미시(未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해무리가 졌다고 하고 있다. ( 작성자 : 이정섭 ) (3책) 경오년(1572, 선조3) 11월 27일의 일기로서 맑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참과 경연을 정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날은 예종대왕의 기일이어서 임금과 신하가 재계하였다. 부제학 박근원이, ‘예조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자기의 동성 4촌 형으로서 춘추관 지사(春秋館知事)를 예겸하고 있으므로, 피혐해야 하니 고쳐 차임(差任)해 달라.’고 아뢰자, 고쳐 차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비답 하였다. 이날 사시ㆍ오시에 해무리가 지고, 신시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안쪽은 붉고 바깥은 붉은 이변이 있었고, 밤 1경(更)에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 나와서 곤방(坤方)의 하늘 어울림에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발과 같고 꼬리가 길었다고 한다. 이날은 예종의 기일이어서 경연과 상참을 정지하였고, 박근원이 사직한 일, 해무리가 진 일, 해에 양이(兩珥)가 지면서 색깔이 분명한 일, 유성이 나온 일 등 네댓 가지 일이 있었으나 기사가 많지 않았다. ( 작성자 : 이정섭 ) (4책) 경오년(1572, 선조3) 11월 29일의 기사로서 날씨는 아침에 눈이 조금 내렸다고 적고 있다. 상참과 경연을 정지하였다. 인사행정이 있었다. 순회궁(順懷宮)에 번 드는 종친(宗親)의 의사로 승지가 아뢰기를, “아침 수라 때에 소속 하인이 실수로 제기를 떨어뜨려 경동(驚動)하였으니 미안하여 아룁니다.”하니, ‘살펴보라.’고 전교하였다. 도승지가 아뢰기를, “문소전 참봉이 와서 아뢰기를 ‘초2일 2경에 문소전의 별감(別監) 수복(守僕)이 등불을 잘못 떨어뜨려 자리의 면을 태우고 즉시 불을 껐는데, 죄받을까 두려워서 고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들어서 알고 즉시 가보았는데 과연 자리에 불탄 흔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미안하므로 감히 아룁니다.’하였습니다.”하니, 왕은, “극히 놀랍다. 불을 낸 사람을 살피라.”라고 전교하였다. 우부승지가 정원의 뜻으로 아뢰기를, “문소전에서 불을 낸 사람은 죄가 중하니 조옥(詔獄) 곧 의금부(義禁府)가 조사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번 든 종친 설리(薛里)는 평상시 검거하지 못하였으니, 아울러 조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순회궁의 하인이 실수로 등불을 떨어뜨려 자리 외면을 태운 일로 의금부에서 조사하도록 명한 일이 주된 내용이고, 상참과 경연을 중지한 일, 인사행정이 있었던 일, 아침에 눈이 조금 내린 일 등 3~4건이나 기사가 극히 간단하다. ( 작성자 : 이정섭 ) (5책) 사관(史官)이 쓴 선조 3년(1570) 12월 7일의 일기이다. 이날 날씨는 아침에 눈이 잠깐 내리고 낮에는 흐렸다 한다.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정지하였고, 인사행정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문ㆍ무관의 인사를 담당한 사람은, 이조에서는 판서 정대년(鄭大年), 참의 허엽(許曄), 좌랑 이증(李增)ㆍ오건(吳健), 우부승지 이제민(李齊閔)이, 병조에서는, 판서 오상(吳祥), 참판 박계현(朴啓賢), 참지(參知) 박승임(朴承任), 좌승지 이충작(李忠綽)이 정청(政廳)에 들어왔다. 백인걸(白仁傑)이 추천하여 6품직에 서용된 박점(朴漸)에 대한 문제점을 주상(선조)이 힐문(詰問)하자, 백인걸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과하고 있다. 경상도 도사(都事) 권덕린(權德獜)은 청도군수 모씨(某氏)의 첩 사위라 하여, 이조에서 개차(改差)할 것을 아뢰자, “도사를 개차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전교하였다. 이조 판서 정대년이 측근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전형(銓衡)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인재 임용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와는 품계와 권한이 다른 역승(驛丞)의 임용문제에 대해, 참의 허엽이 아뢰자, 판서 정대년은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날 인사행정에서, 노진(盧禛)을 부제학으로, 손여성(孫汝誠)을 진산(珍山) 군수로, 백인걸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용하는 등 10여 명이 넘는 인사 조치가 있었다. 대사헌 류경심(柳景深)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을 적에 노비신공(奴婢身貢)을 마련하면서 종 1명의 나이를 잘못 써서 보고하였다 하여 사직서를 제출하자, 주상은 “출사하도록 하라.”고 비답(批答)하였다. 이날 미시(未時 : 오후 2~4시)에 태백성(太白星)이 오지(午地 : 남쪽 지방)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갔다고 한다. 정언(正言) 이정암(李廷馣)의 논계(論啓)와 사헌부의 논계는, 고명(高明)에 관한 일이었는데, 주상은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에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전교하였다. 동부승지가 홍문관 관원의 뜻으로 “함양(咸陽)에 있는 부제학 노진에게 역말[驛馬]을 타고 올라오도록 유지(有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자,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작성자 : 이정섭 ) (6책) 선조 3년(1570) 12월 14일의 일기이다. 날씨에 관한 기록은 찢겨 나갔다.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정지한다.’는 것과, 이날이 ‘납향(臘享)’이라는 기사는 표지(表紙)에 쓰여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啓)는 고명(高明)에 관한 일이었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이 내려지자, 고명을 승서(陞敍)하였다. 영광(靈光) 군수 이사영(李士英)과 정읍(井邑) 현감 등의 남형(濫刑)에 관한 일로 비망기(備忘記)가 있었다. 이날 모시(某時)에 태백성이 오지(午地)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갔다 한다. “강원 감사가 현감의 이설(移設)에 관한 일을 범한 계본(啓本)이 당초 이조에 내려져서 회계(回啓)가 있었으니, 다른 관사(官司)로 보내어 부표(付標)하게 해야 합니다.”라는 동부승지의 계(啓)가 있었다.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의 유학(幼學) 황억(黃億)이 15조의 소를 올렸다 한다. 박점(朴漸)이 수령에서 파면될 적에, 대사간 김난상(金鸞祥)과 헌납(獻納) 정탁(鄭琢)에게 논핵(論劾)하도록 부탁했는데, 김난상은 부탁대로 하였고, 정탁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다. 박점을 파면할 적에, 박점이 과연 불선(不善)한 사람이라면 공언(公言)으로 배척할 일이지, 이조 참의 허엽은 어찌 몰래 언관(言官)에게 사주(使嗾)하여 논핵(論劾)한 일이 마치 소인이 군자를 해친 것처럼 했느냐고 사관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전관인 박점을 무함(誣陷)한 정충방(鄭忠邦)은 마침내 자신도 무함죄를 받은 형편없는 소인이라고 비평하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천거해 임용한 당시 이조 참의의 삿된 마음을 지적하고 있다. ( 작성자 : 이정섭 ) (7책) 선조 3년(1570) 12월 15일의 경연일기(經筵日記)이다. 이날 날씨는 맑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정지하였다. 주상은 “곡연(曲宴)으로 재앙을 물리칠 적에 처용(處容)을 배설(排設)하는 문제를 담당 내관(內官)의 말을 들어 하라는 일로 각 해조(該曹)에 말하였다.”라고 동부승지에게 전교하였다. “전 황해 감사 김계(金啓)는 파직되지 않고 여론만 지레 짐작하고 교대자가 오기도 전에 서울로 올라온 것은 사죄(私罪)인데, 승정원에서 전최(殿最)가 기일 안에 도착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행공(行公)하였으니, 담당 승지를 추고(推考)하소서.”라고 장령 류도(柳濤)가 논계(論啓)하자, 주상은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밤 1경(更)에 백운(白雲)이 곤방(坤方)에서 일어났고, 미시(未時)에 태백성이 오지(午地)에서 보이다가 하늘을 지나갔으며, 5경(更)에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위에 나타나서 항성(亢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그 모양은 주먹만 하고 꼬리는 2, 3척 가량 되며, 색깔은 붉었다 한다. “연은전(延恩殿)의 각 색장(色掌)인 희광(希光)의 죄범(罪犯)은 무슨 율(律)에 해당하느냐?”고 주상이 우부승지에게 묻자, 우부승지는, “제향(祭享)하는 제물을 훔치면 일죄(一罪) 곧 사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회계(回啓)하였다. 사관(史官)은, 제물(祭物)을 훔친 자의 죄와 문소전(文昭殿)ㆍ연은전의 제례(祭禮) 등을 논하고 삭망제(朔望祭)에 대해서도 종묘(宗廟)와 제릉(諸陵)에서 치르고 있음을 말하고, 능침(陵寢)의 절사(節祀)와 종묘의 제향(祭享)에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세히 논하고 있다. 누구인지 명시(明示)하지는 않았으나, 봉사자(奉祀者)도 정하기 전에 그 유산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아주 불가하다고 우부승지에게 전교하고 있다. 이는 아마 이름 있는 조정 관료인 듯하다. ( 작성자 : 이정섭 ) (8책) 선조 3년(1570) 12월 16일의 경연일기(經筵日記)이다. 이날 날씨는 맑았고, 상참(常參)과 경연은 정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장령 류도(柳濤)가 조정 관리들의 비행을 논계(論啓)하였는데, 4건이다. 1. 단천(端川) 군수 김경(金瓊)은 본디 탐학(貪虐)한 사람으로 부임 이후 부세(賦稅)를 지나치게 징수하여,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는 자가 잇따라 단천고을은 공허(空虛)하게 되었으니, 파면함은 물론 새로 임명되는 수령은 엄선(嚴選)하여 보내시라는 것이다. 2. 장연(長淵) 현감 김우상(金禹祥)은 본디 어리석어 문자를 알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여 녹봉만 받아먹고 지내면서, 한 고을의 공사(公事) 및 조세(租稅)와 공물(貢物)들을 아전에게 맡겨, 아전이 간사한 짓을 기탄없이 함으로써 백성들을 박할(剝割)하고 있으니, 파직하시라는 것이다. 3. 영광 군수 이사영(李思英)은 유생(儒生)에게 형을 과도하게 집행하여 죽기에 이르렀으니, 그를 의금부에 잡아와서 추국(推鞫)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라도 감사 이우민(李友閔)은 영광 군수 같은 중죄인(重罪人)을 먼저 계문(啓聞)하여 추국해야 하는데, 파직만 한 뒤에 추고(推考)하였으니, 그를 파직하시라는 것이다. 4. 나주(羅州) 목사 조유성(趙惟誠)은 검시차원(檢屍差員)에 임명되었으니, 공정하게 검핵(檢核)해야 하는데, 사정에 따라 죄를 덮어주려는 뜻이 있어 복검사(覆檢使)와 의견이 저촉되었으니, 파직하시라는 것이다. 류도의 이 4건의 논계(論啓)는, 주상이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으나, 감사 이우민의 파직에 관한 일은 추고할 필요가 없다고 비답을 하였다. 진시(辰時)부터 사시(巳時)까지 사방에 탁(濁)한 기운이 있었고, 미시에 태백성이 오지(午地)에 보이다가 하늘을 지나갔다 한다. 끝에 사관이 인물평을 한 것이 있는데, 주인공의 이름은 파손되어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그 사람은 계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기로 소문이 났다 한다. 천성이 성실하고 삼가며 남과 부드럽게 지내면서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아 청현(淸顯)한 관직에 있었으며, 경상도 감사로 있을 적에 호강(豪强)한 사람을 억제하고 빈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는 것을 주로 하여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고 칭찬한다. 다만, 폐첩(嬖妾)에 고혹(蠱惑)되어 첩의 아버지 사당에 친히 제사 지냈으며, 첩의 집 사당에 서열 해 서는 등 지탄받을 처신과 방백의 도리를 제대로 못하여 남에게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 작성자 : 이정섭 ) (9책) 선조 3년(1570) 12월 17일 일기이다. 날씨에 대한 기록이 없고, 상참(常參)과 경연을 정지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이날 사시(巳時 : 오전 9시~11시)에 주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었는데, 공의왕대비전(恭懿王大妃殿)의 각 색장(色掌) 내섬시(內贍寺)의 종 완이(完伊), 대전(大殿)의 각 색장(色掌) 내자시(內資寺)의 종 연이(連伊) 등의 계복(啓覆) 때문이었다. 영경연사(領經筵事) 권철(權轍), 우참찬(右參贊) 박순(朴淳), 이조 참판 윤의중(尹毅中) 등 9명이 동쪽 섬돌을 거쳐 들어오고,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탁(李鐸), 종친부(宗親府)의 달성 도정(達城都正) 제(禔),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등 10명은 서쪽 섬돌을 거쳐 입시(入侍)하였다. 그리고 좌승지 송하(宋賀), 우승지 유홍(兪泓) 등 9명도 서쪽 섬돌을 거쳐 입시하였다 한다. 주상이 우승지에게, “사관(史官) 1명, 선전관(宣傳官) 2명을 대령하도록 하라.”고 전교하고, 이어 좌부승지에게 “기마(騎馬) 9필을 대령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내탕고(內帑庫)의 백목면(白木綿)ㆍ면주(綿紬) 등을 훔쳐내어 나누어 가진 종 왕이ㆍ연이 등의 계복(啓覆), 삼복(三覆)을 거친 결과, 참부대시(斬不待時)에 처하도록 형이 확정되었다. 우상(右相)과 형조 판서 정종영(鄭宗榮)이 주상에게 “이 죄인들의 죄상이 너무나 중하기 때문에 살려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주상은 “율문(律文)대로 처형하라.”고 말하였다. 실록청 낭청(實錄廳郎廳)이 총재관(總裁官)의 뜻으로 주상에게, “명종대왕의 실록초초(實錄初草)를 다 수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라도의 진사(進士) 최덕업(崔德業) 등의 실봉상소(實封上疏)가 승정원에 도착하고, 경상도 현풍(玄風)의 곽일(郭馹) 등이 을사공훈(乙巳功勳)의 삭제에 관해 상소하였다. 진시(辰時)에서부터 사시(巳時)까지 탁한 기운이 있었고, 미시(未時)에 태백성이 오지(午地)에 나타나 하늘을 지나갔다고 한다. 정승 이탁(李鐸)과 우참찬 박순(朴淳), 심의겸(沈義謙)에 대한 인물평도 사관(史官)이 썼다. 특히 심의겸에 대해서는 권간(權奸) 윤원형이 국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사류(士類)를 구출한 공은 인정하면서 학력(學力)이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고 정종영(鄭宗榮)은 윤원형의 아내 난정(蘭貞)의 친정 조카로서 윤원형 부처는 관곡하게 대하였으나, 일체 권력에 빌붙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날 일기에는 이탁ㆍ박순ㆍ심의겸ㆍ정종영 외에도 박계현(朴啓賢)ㆍ강사상(姜士尙)ㆍ이양(李樑) 등에 대한 인물평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는데 이양(李樑)이 사화(士禍)를 일으키려는 음모를 심의겸이 미리 알고 막은 공로를 특히 이황(李滉)의 논평한 말을 인용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작성자 : 이정섭 ) (10책) 선조 3년(1570) 12월 20일의 경연일기(經筵日記)이다. 이날 날씨는 눈이 내리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정지하였고,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있었다고 표지에 적고 있다. 문ㆍ무 인사담당 관원인 이비(吏批)와 병비(兵批)가 나오는데, 이조에는 판서 정대년(鄭大年), 참판 윤의중(尹毅中), 참의 허엽(許曄), 좌부승지 이후백(李後白)이고, 병조에는 판서 오상(吳祥), 참판 박계현(朴啓賢), 참의 홍성민(洪聖民), 참지 박승임(朴承任), 좌부승지 이충작(李忠綽)이었다. 도승지 영공(都承旨令公)이, “일식(日蝕)이 드는 요즘 같은 재년(災年)에 두 대비전(大妃殿)에 곡연(曲宴)을 베푸는 일은 부당하다.”고 아뢰고 있다. 창덕궁 가위장(昌德宮假衛將) 원호변(元虎變)을 비롯하여, 봉화(奉化) 현감 이신(李紳), 전적(典籍) 홍혼(洪渾), 위원(渭原) 군수 박선(朴宣), 공조 좌랑 정이주(鄭以周) 등 20여 명의 인사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 작성자 : 이정섭 ) (11책) 선조 4년(1571) 12월 23일의 경연일기이다. 날씨에 대한 기록은 없다.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정지하였고, 석강(夕講)이 있었다. 강관(講官)은 6명인데, 특진관(特進官)에는 원혼(元混), 이영현(李英賢) 등 2명이고, 참찬관(參贊官)에는 이제민(李齊閔), 시강관(侍講官)에는 이증(李增), 시독관(試讀官)에는 이우직(李友直), 기사관(記事官)에는 기령(奇苓), 기사관이 원래 2인이었는데, 1인은 임명되지 않은 모양이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는데,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괘효(卦爻), 단상(彖象)의 뜻과 음양길흉(陰陽吉凶)의 용례(用例) 등을 들어 군신(君臣) 간에 문답(問答)하고 있다. 천자(天子)는 특별히 남아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강건(剛健)한 도로써 천하를 교화하여 아버지의 도가 있으므로 천자가 붕어(崩御)하면 참최(斬衰) 3년복을 입고, 후비(后妃)는 유순(柔順)한 도로써 천하를 교화하여 어머니의 도가 있으므로 자최(齊衰) 3년복을 입는다고 정의(定義)를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유생(儒生)들이 『주역(周易)』을 익히지 않고 춘추(春秋)를 읽는 문제점은 배강(背講)할 적에 외는 것에만 착안점을 두고 뜻은 문제 삼지 않은 데에 있다고 지적하고, 뜻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이 될 뿐이라고 왕은 강조하고 있다. 진강(進講)하는 것은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목적이 있고, 이 수신제가하는 도리는 『대학(大學)』에 자세히 적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특별히 석강(夕講)의 교재로 삼은 듯하다. 이 당시 흉년이 들어 진황(賑荒)하는 방법에 대하여 임금과 강관(講官), 특히 원혼(元渾)이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는데, 전라도 남원(南原)․전주 등지의 곡식을 충청도․경기도에 실어 오는 문제에서부터 조운선(漕運船)으로 하느냐, 사선(私船)으로 하느냐, 그리고 그 선세(船稅)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진황미(賑荒米)도 겉곡[皮穀] 1말을 찧으면 겨우 쌀 1되 정도 나오니, 이로서는 진구(賑救)하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당시 호조 판서였던 원혼이 나이 75세였는데, 자신은 늙고 아득하여 이 중임을 감당할 수 없음을 들어 사직하고 있다. 그리고 충청도․경기도는 전라도 곡식 1만 섬을 실어왔으나, 황해도․평안도 등은 곡식을 옮겨 와서 구황(救荒)한다 하더라도 모두 굶어 죽게 되었다고 딱한 상황을 아뢰고 있다. 이날 석강(夕講)에서는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이(離)와 손(巽)의 괘의(卦意), 효의(爻義)에서부터 『대학(大學)』의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도리, 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가 논한 단상(彖象)의 뜻, 흉년에 곡식을 옮겨 와서 기민을 진구(賑救)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한 것 같다. ( 작성자 : 이정섭 ) [ 번역 해제 ] 『학봉일기초(鶴峯日記草)』 1. 개관 이 문서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의성김씨 학봉 종택(鶴峰宗宅)에 소장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70년 11월~1573년 1월 사이에 예문관에 재임하면서 사관(史官)으로서 승정원에 입직하여 쓴 사초(史草)이다. 4백여 년 동안 가철(假綴) 상태로 전해오면서 일실된 것이 상당할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년에 걸쳐 31일 분이다. 1987년 3월 7일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보물 905호 김성일종가전적(金誠一宗家典籍)’ 56종 261책 중 38호로 등록되었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학봉일기초(鶴峰日記草)’이고 ‘경연일기(經筵日記)’를 부기(附記)하였다. 기왕에 이 문서를 다룬 사례는, 조선사편수회가 1923년 5월에 안동시 서후면 김용환(金龍煥)으로부터 자료를 대여하여 1937년 10월에 조승호(趙承祜) · 홍원표(洪元杓)가 탈초하였다. 1938년 2월에 조승호가 교정하고 편수관 중촌영효(中村榮孝)가 교열하여 《김성일일기초(金誠一日記草)》1책을 만들었다. 2010년에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한국학자료총서 42’로 탈초와 함께 영인 원본을 첨부하여 《학봉 김성일 경연일기》 1책을 간행한 것이 있다. 2. 기록자 가. 생애와 관력 이 문서의 기록자는 선조 때의 명신 학자 김성일(金誠一: 1538[중종 33]∼1593[선조 26])이다. 그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과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 사이에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 내앞[川前]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부친 김진이 내앞 남쪽의 부암(傅巖) 옆에 서당을 지어 놓고 자제들과 향중의 유생들을 가르쳤으므로 그 속에서 형제들과 공부를 하였다. 19세 때인 1556년(명종 11)에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가 수학하기 시작하여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고, 23세 때인 1560년에 소수서원에 가서 공부하였다. 1564년 형 명일(明一),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동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낙향하여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1570년경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었고, 1573년에 부수찬, 정언이 되었다. 1576년에 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해 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가 되었고, 1583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을 향사하였다. 1589년 12월에 통신사 부사(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1591년 2월에 복명하여,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어서 부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를 거쳐 159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서울로 소환 중 다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어 진주성을 지키다가 1593년 4월 29일 공관(公館)에서 병으로 죽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나. 사관으로서의 면모 이 문서와 관련하여 김성일의 사관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의 직설적이고 강직한 면모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우선 25세 때인 1562년에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한 것에 분개하여 반대 상소문을 지어 올리려 하였다가 부형들의 만류로 중지하였다고 한다. 본 문서의 연원일 미상의 유생 전강(殿講) 기사에서 임금의 모습을 논평하면서 “유생이 강독할 때 겁을 먹고 말을 더듬자 웃음을 지었다. 상께서는 용안이 빼어나고 추수(秋水)처럼 해맑았으나 응집된 기상이 아닌 듯하다. 또 좌우를 돌아보면서 남의 실례를 보고서는 문득 웃으니 이른바 ‘엄숙한 모습[穆穆之容]’이 아니다.”라고 하여, 악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임금을 비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의 정사 행태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판서 정대년이 관례의 장부를 가지고 주의(注擬)하였다. 마땅히 좌우의 사람들과 인물의 가부(可否)를 논한 뒤에 해야 하는데, 지금은 판서가 전형(銓衡)을 독단하여 올리고 내리고 나오게 하고 물러나게 하는 것을 자기 뜻대로 하고 참판 이하는 자리를 채울 뿐이다. 인재를 임용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한 것이 대개 이로 말미암았다.”라고 하여, 극단적인 평가를 서슴없이 기록하고 있다. 본 문서 2책 30면의 박근원(朴謹元)에 대한 인물 논평, 9책 4면의 이탁(李鐸)에 대한 인물 논평, 9책 15~21면의 박순(朴淳), 정종영(鄭宗榮), 박계현(朴啓賢), 강사상(姜士尙), 심의겸(沈義謙)에 대한 인물 논평 등에서도 개개인의 품성과 행위에 대하여 선악(善惡)을 단정하여 논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15책 16~20면의 연산군 봉사(奉祀)에 대한 논평은 당시 대신 홍섬(洪暹)의 견해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지를 펴고 있고, 22책 29~31면의 기사에서는 위훈(僞勳)을 삭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지로 장문의 시사 논평을 기록하고 있다. 위의 사례를 통하여 보면 김성일은 전상호(殿上虎), 철면어사(鐵面御史), 피리춘추(皮裏春秋) 등의 호칭에 걸맞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직언을 하는 천성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기록된 사론에도 그러한 사관의 진면목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3. 문서의 명칭과 성격 이 문서는 문화재청의 지정문화재 등록 명칭은 ‘학봉일기초(鶴峰日記草)’라고 하고 ‘경연일기(經筵日記)’를 부기(附記)하고 있다. 애당초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가철(假綴) 상태로 전해왔고 《학봉집》의 원집과 부록에서도 언급된 것을 찾을 수 없어, 역대에 통상 어떤 명칭을 사용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에도 표지를 덧붙여 35책으로 결책하였으나 표지에 문서 명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본 문서 9책 22면에 큰 글씨로 ‘翰院史草’라고 쓴 것이 있는데, 김성일이 직접 쓴 것인지 후대에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서의 성격과 명칭을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서를 인용한 것으로는,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문봉집(文峯集)》 권3 <경연강의(經筵講義)>에 1571년 12월 6일 기사 1건, 날짜 미상 기사 1건을 수록하고 말미에 각각 “학봉선생 수록에 나온다.[出鶴峯先生手錄]”라고 하여 출전을 밝힌 것이 있다. 이 ‘학봉선생 수록(鶴峯先生手錄)’이 이 문서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인용 내용이 이 문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문서를 최초로 다룬 곳은 조선사편수회로, 1923년 5월에 안동시 서후면 김용환(金龍煥)으로부터 자료를 대여하여 1937년 10월에 조승호(趙承祜) · 홍원표(洪元杓)가 탈초하고 1938년 2월에 조승호가 교정하고 편수관 중촌영효(中村榮孝)가 교열하여 1책의 탈초본을 만들었다. 이때의 명칭이 《김성일일기초(金誠一日記草)》이다. 그러나 이때의 일은 단순한 탈초 작업이었을 뿐이고 문서의 성격에 대한 연구나 해제가 없고, 명칭 또한 편의상 붙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연일기’라는 명칭은 내용에 걸맞지 않고, 또 ‘학봉일기초’라고 하는 것도 범범하여 문서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고 본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한원사초(翰院史草)’에 근거하여 ‘김성일 한원사초(翰院史草)’ 또는 ‘김성일사초(金誠一史草)’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서는 형태와 내용, 기록시기와 정황으로 볼 때 김성일이 사관(史官)으로서 승정원에서 입직하여 쓴 사초(史草)임이 분명하다. 기본 골격이 승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사무로서 임금의 하루 행사, 승지의 계사(啓事), 대간(臺諫)의 소차(疏箚), 기후 기사 등이 갖추어져 있고, 경연이 있을 때에는 당연히 경연 기사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경연의 기록으로만 국한하여 볼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문서 9책 22면에서 ‘한원사초(翰院史草)’라고 한 것이 이 문서의 성격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한원(翰院)’은 곧 예문관(藝文館)을 가리키니, 바로 예문관 관원이 승정원에 입직하여 기록한 사초인 것이다. 예문관은 왕의 칙령(勅令)과 교명(敎命)을 관장하였으며 별명으로 한원(翰院), 한원(翰苑), 문원(文苑)이라 하였다. 제학(提學) 이상은 겸직(兼職)이었고, 부제학(副提學)이 정3품 당상관으로 실직이었고, 직제학(直提學)은 도승지(都承旨)가 겸임하였다. 실무자로 정7품 봉교(奉敎) 2명, 정8품 대교(待敎) 2명, 정9품 검열(檢閱) 4명을 두었고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했으며, 춘추관 수찬관이나 기사관을 겸임하였다. 춘추관은 거의 겸직으로 구성되었는데, 수찬관 이하의 관원은 승정원의 관원,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의 관원, 의정부의 사인(舍人)·검상(檢詳), 예문관의 봉교 이하의 관원, 시강원(侍講院)의 당하관 2인, 사헌부의 집의(執義) 이하의 관원, 사간원·승문원·종부시·육조(六曹)의 당하관 각 1인이 겸하였고, 이들을 통틀어 사관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도 예문관의 한림 8명은 전임 사관으로서 번을 갈라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며 조회, 조참, 상참, 경연 등에 참석하여 회의록을 기록,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의 자료를 만들었다. 이들이 실질적인 사관이었고, 이들은 대개 새로 문과에 급제한 유망한 청년들이 임명되는 벼슬이었다. 그 직위는 낮았지만 항상 왕 곁을 떠나지 않고 국가의 중대회의에 모두 참석했기 때문에 그 직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김성일이 1573년 4월 25일 정언이 되기 이전의 제수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고, <연보>에 의하면 1568년 6월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 權知副正字)가 되었고, 1569년에 정자가 되었다. 1570년에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였고, 1571년에 대교(待敎)를 하였고, 1572년에 봉교(奉敎)를 하였다고 하였다. 4. 사료 가치 가. 고문서로서의 가치 이 문서는 사관이 승정원에 입직하여 직접 보고 듣고 판단하면서 쓴 1차 사초로서, 원본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조선조 전반을 통틀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흡사한 자료로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기록한 《기재사초(寄齋史草)》가 있으나 1차 채록 이후 정리된 것으로 보이고 또한 내용만 전해올 뿐이다. 사초는 일반적으로 실록을 편수한 뒤에는 세초(洗草)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원본으로 남아있기가 어려웠고, 특히 선조 시대는 임진왜란 등을 통하여 거의 유실되었다. 더욱이 현장에서 기록한 원본은 당시 사관이 현장에서 사료를 채록하는 방식과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나. 사료로서의 가치 실록을 편찬할 때의 사료는 승정원의 일기, 예문관의 사초, 기타 각사의 등록을 바탕으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관이 입직하여 기록한 초본을 가지고 다시 개인적으로 정서하여 관사에 올리면 관사에서 취합하여 실록 편찬에 대비하는 공식 사초를 만들게 된다. 이 문서는 바로 관사에 제출하기 전의 현장 속기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당연히 예문관에서 취합하여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쓰였어야 한다. 현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가지고 대조해보면, 겹치는 날이 있기는 하나 이 문서의 내용이 쓰인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김성일이 이 초고를 가지고 정리하여 관사에 제출한 뒤에 유실되었는지, 아니면 아예 제출되지 않은 채 사가에 남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선조실록》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221권 116책이며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편찬할 때의 기록을 보면 “불행하게도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26년 동안의 훌륭한 치적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타버려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의 가장 일기(家藏日記)에 의하여 약간의 사적을 수습해서 겨우 편찬하였다. 그러나 10에 8∼9는 없어졌으니 참으로 비통하고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1609년 7월 12일 춘추관이 교지를 받들어 편찬을 시작하여 1616년 11월에 편찬을 마쳤는데, 류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 등 주로 개인의 일기류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 문서의 내용으로서 현재 실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1572년 9월 14일 시행된 이문한어(吏文漢語) 전강(殿講)과 제술(製述) 기사와, 1571년 11월 29일 시행된 경연 기사 2건일 뿐인데, 이 또한 류희춘(柳希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 나오는 것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사초의 내용은 《선조실록》에 반영되지 못한 채 사장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김성일의 조카 운천(雲川) 김용(金涌)이 1613년에 봉상시 정 지제교(奉常寺正知製敎)로서 《선조실록》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한 것을 편수관 명단에서 알 수 있다. 당시 편찬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충분히 제출하여 실록에 반영되었을 법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문서의 내용은 기록 일수나 기사의 중요도를 떠나서 미흡한 《선조실록》을 보완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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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39.학봉용사사적(金誠一 宗家 典籍 - 鶴峰龍蛇事蹟) / 조선 선조 30년(1597)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용사사적(龍蛇事蹟)》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전적(典籍)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시 함께 활동한 이로(李魯, 1544~1598)가 학봉(鶴峰)의 구국활동상을 기록한 사료이다. 이로(李魯, 1544~1598)는 고성(固城)이 본관으로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으로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19년(1564) 진사시에 합격하고,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상소하여 왜사(倭事)를 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동생 지(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인근 여러 고을에 창의통문을 내어 민중의 의분심을 환기시키는 한편,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의 종사관(從事官)ㆍ소모관(召募官)ㆍ사저관(私儲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 1593년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 사이에 형조좌랑 겸 기주관ㆍ비안현감ㆍ정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낙천서원(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학봉의 임진왜란시의 구국활동을 적은 자료로서, 당시 학봉과 여러 의병 등의 구국활동의 자세한 상황을 볼 수 있는 기록이며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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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0.용사사적(金誠一 宗家 典籍 - 龍蛇事蹟)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용사사적:문수지(龍蛇事蹟:文殊誌)》는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전적(典籍)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시 함께 활동한 이로(李魯, 1544~1598)가 학봉의 구국활동상을 기록한 사료이다. 《용사사적(龍蛇事蹟)》의 내용에 문수지(文殊誌)라는 표지제목이 붙어 있어서 《용사사적:문수지(龍蛇事蹟:文殊誌)》가 되었고 내표지에는 ‘경상도안동 전찰방 김집가장(慶尙道安東 前察訪 金潗家藏)’이라는 장서기가 있다. 이로(李魯)는 고성(固城)이 본관으로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으로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19년(1564) 진사시에 합격하고,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상소하여 왜사(倭事)를 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동생 지(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인근 여러 고을에 창의통문을 내어 민중의 의분심을 환기시키는 한편,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의 종사관(從事官)ㆍ소모관(召募官)ㆍ사저관(私儲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용사사적》은 이 때 작성되었다. 1593년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형조좌랑 겸 기주관ㆍ비안현감ㆍ정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낙천서원(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학봉의 임진왜란시의 구국활동을 적은 자료로서, 당시 학봉과 여러 의병 등의 구국 활동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말(顚末)을 볼 수 있는 기록으로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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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1.석문정사중수일기(金誠一 宗家 典籍 - 石門精舍重修日記) / 조선 경종 4년(1724) / 1책 / 필사본/일기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두 책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던 전적 가운데 한 책이다. 학봉 김성일은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한 인물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도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도 앞장선 16세기의 충신(忠臣)이면서 대학자이자 애국자였다. 《석문정사중수일기(石門精舍重修日記)》는 학봉(鶴峰)의 정자(亭子)인 석문정사의 중수사실(重修事實)을 적은 일기로 그의 5세손(世孫)인 김성월(金成鉞)이 초서(草書)로 기록한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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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2.원규(金誠一 宗家 典籍 - 宗孫家所藏典籍-院規) / 조선 철종~고종년간(1850~1895)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던 전적 가운데 한 책이다. 학봉 김성일은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한 인물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도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도 앞장선 16세기의 충신(忠臣)이면서 대학자이자 애국자였다. 《원규(院規)》는 학봉을 제향(祭享)하는 임천서원(臨川書院)의 제향 원규(院規)와 사례를 필사(筆寫)로 기록한 것으로 작성년대는 조선말기이며 작자는 미상(未詳)이다. 원규는 서원운영을 위하여 제정된 규칙인데 여기에는 원임ㆍ원생의 자격과 선출절차ㆍ교육목표ㆍ교육내용ㆍ서원운영에 관한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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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3.사마회첩(金誠一 宗家 典籍 - 宗孫家所藏典籍-司馬會帖) / 조선 선조 34년(1601) / 1첩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으로, 학봉 김성일은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한 인물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도 앞장선 16세기의 충신이면서 대학자이자 애국자였다. 《사마회첩(司馬會帖)》은 선조 34년(1601) 신축(辛丑)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함께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같이 적힌 사람들이 모여 결성(結成)한 사마계회첩(司馬?會帖)이다. 첫 장(張)는 계회도(?會圖)가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그려져 있으며 다음 장에 나오는 계원(契員)의 좌목(座目)에는 생원 10인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는 계회첩(?會帖)의 작성 경위등을 적은 발문(跋文)이 있다. 【 번역 해제 】 (1첩) 선조 34년(1601) 사마시(司馬試)에 동방(同榜)으로 합격한 김시추(金是樞) 등 안동ㆍ예안ㆍ(禮安)ㆍ영천(榮川)ㆍ예천(醴泉) 등지에 거주하는 사람 8인과 서울에 거주하는 2인이 모여 결성한 사마계회첩(司馬?會帖)이다.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이 계회첩은 참판 홍이상(洪履祥)이 당시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안동부사로 있을 적에 그의 아들 홍립(洪?)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홍이상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안동 및 인근 속읍(屬邑)에 있는 동방 입격자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경축했는데, 모두 10인이다. 입격한 제인(諸人)들이 그 일을 경하하는 한편, 친목을 위해 이 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뒤에 회첩의 계원인 김숙(金琡)이 모도(某道)의 도사(都事)로 있던 아버지 김용택(金龍澤)을 뵈러 갔다가 간이(簡易) 최립(崔?)에게 발문을 받아 계첩(契帖)에 덧붙인 것이다. 김용택은 홍이상이 잔치를 베풀 적에는 안동 훈도(安東訓導)로 잔치에 참여하였다. 이 계회첩은 학봉 김성일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것이다. 이 계회첩은 6면으로 구성되었다. (1) 제1면:계회도(?會圖)인데,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계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2) 제2~4면:사마계회원(司馬?會員)의 좌목(座目)인데, 생원(生員) 김시추(金是樞) 등 10인이 열록되었는데, 당사자의 자(字)ㆍ생년ㆍ본관ㆍ거주 등을 적고, 한 자 높여서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고 있다. 김시추는 학봉 김성일의 손자이다. (3) 제5~6면:신축년(1601, 선조34) 사마회계첩(司馬會契帖)의 발문인데, 간이(簡易) 최립(崔?)이 쓴 것이다. 이 발문에서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면 성균관 상사생(上舍生)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이외에, 영광스럽게 되는 일 세 가지와 즐거운 일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이 계첩을 만들게 된 동기와 계원 김숙(金琡)의 요청으로 발문을 짓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계회의 연구 자료이며 또한 계원 10人의 계보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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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4.만력43년2월일향록초안(金誠一 宗家 典籍 - 萬曆四十三年十二月日鄕錄草案) / 조선 광해군 7년(1615)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으로, 학봉 김성일은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한 인물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도 앞장선 16세기의 충신이면서 대학자이자 애국자였다. 《만력사십삼년이월일(萬曆四十三年二月日) 향록초안(鄕錄草案)》은 만력 43년, 즉 광해군 7년(1615)에 작성된 안동향반(安東鄕班)의 명부(名簿)이며, 17세기 초 안동지방의 향안(鄕案)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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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5.정해6월일향록(金誠一 宗家 典籍 - 丁亥六月日鄕錄) / 조선 인조 25년(1647)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으로, 학봉 김성일은 학문적으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계승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正脈)을 전승한 인물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활약하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초유사(招諭使) 및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구국(救國)에도 앞장선 16세기의 충신이면서 대학자이자 애국자였다. 《정해유월일(丁亥六月日) 향록(鄕錄)》은 인조 25년(1647)의 안동향반(安東鄕班) 324인의 좌목(座目)이 1인(人) 1항(行)씩 성명(姓名)과 관직(官職)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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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6.천하총도(金誠一 宗家 典籍 - 天下總圖) / 조선 영조 1년(1725) 이전 / 1책 / 필사본/사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영조(英祖)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지도첩이다. 《사마회첩(司馬會帖)》ㆍ《만력사십삼년이월일향록초안(萬曆四十三年二月日鄕錄草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연간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다. 이 지도는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각 나라들을 열록(列錄)하였는데 그 배치 순서를 살펴보면 제1면에는 천하총도(天下總圖)가, 제2면에는 중국도(中國圖), 제3면에는 동국총도(東國總圖)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4면부터는 도별(道別)로 각 한 장 씩 그렸다. 곧 경기도(京畿道)ㆍ충청도(忠淸圖)ㆍ경상도(慶尙道)ㆍ전라도(全羅道)ㆍ강원도(江原道)ㆍ황해도(黃海道)ㆍ평안도(平安道)ㆍ함경도(咸鏡道)의 순이며 마지막 제12면은 왜국도(倭國圖) 이다. 각 도(道)의 지도는 군명(郡名)을 적어 놓았으며 북도(北道)의 경우는 진(鎭)ㆍ보(堡)의 이름까지 밝히고 있다. 천하총도(天下總圖)라는 서명은 제1면에 나타나는 제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도첩의 원서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 중기의 세계관 및 지리관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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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7.예기대문(金誠一 宗家 典籍 - 禮記大文) / 조선 초기 / 4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예기대문》은 《예기(禮記)》의 대문(大文)만 모아 편집한 것이다. “대문(大文)”은 “주해(注解)가 있는 글의 본문”이라는 뜻으로 예기의 본문만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본문에 구결(口訣)이 필사되어 있다. 조선전기 세종(世宗)년간에 간행된 것으로 수입된 명나라 판본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두점(句讀點)이 있으며,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 글자에는 사성(四聲)을 표시하여 뜻을 분명히 하였다. 권 1~3, 8~11, 12~14, 15~16의 4책이 남아있고, 조선전기 중국과의 서적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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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佛國寺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無垢淨光大陀羅尼經) /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 / 1축 / 목판본/사찰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신라 경덕왕 10년(751) 무렵에 간행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이다.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이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1966년 10월 13일에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할 때, 제2층 탑신부에 봉안되어 있던 금동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 보강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이 751년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불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도화라국(都貨邏國)의 승려인 미타산(彌陀山)이 법장(法藏)과 함께 704년경에 한역한 것이다. 죄를 없애고 수명을 늘리기 위한 법을 구하기 위해 옛탑을 수리하거나 조그마한 탑을 만들어 그 속에 공양하며, 법에 의하여 신주(神呪)를 염송하면 수복을 얻고, 성불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목판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라는 점에서 세계 인쇄사에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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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백지묵서 불조삼경합부(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白紙墨書 佛祖三經合部)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절첩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백지묵서 불조삼경합부(白紙墨書 佛祖三經合部)는 최초로 한역(漢譯)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부처님이 마지막 설(說)했다는 불교유경(佛敎遺經) 그리고 위산 영우(僞山 靈祐)의 법어(法語)를 필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십이장경과 불교유경은 위경(僞經)이라는 설(說)도 있지만 이미 송ㆍ원대(宋ㆍ元代)부터 합편(合編)되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우리나라는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널리 유통되어 왔고 위산경책(僞山警策)은 치문(緇門)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초심자(初心者)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모두 송나라 수수(守遂)의 주(註)가 붙어 있는데 반해 여기에는 원문(原文)만 필사되어 있다. 권말(卷末)에 원(元)나라 고승(高僧)인 몽산화상 덕이(蒙山和尙 德異)의 서(敍)가 서 붙어 있는데, 이를 보면 덕이(德異)나라에 늦어도 14세기 초기경에는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경은 원판(元版)인 휴휴암본(休休庵本)의 번각본을 저본으로 하여 주(註)를 생략하고 원문만 필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사년대는 사경의 품격으로 보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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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49.대명율강해(金誠一 宗家 典籍 - 大明律講解) / 조선 중종 31년(1536) / 1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대명율강해》는 중국 명대(明代)의 기본적인 형법전(刑法典)인 《대명율(大明律)》의 조문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대명율》은 당율을 저본으로 하여 모두 12편 606조로 제정되었다가, 460조로 수정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형법의 일반법(보통법)으로, 모든 범죄 판결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은 것은 바꾸어 썼다. 또한 실제적인 활용을 위해 이두(吏讀)로 자구(字句)를 직해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간행하고 해설서로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를 들여와 익혔다. 《대명율강해》는 명율(明律)을 해석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전체 30권 4책으로 구성되었다. 형식은 대명율(大明律)의 법조문을 적은 후에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 작은 글씨로 ‘강왈(講曰)’ ‘해왈(解曰)’ 이라 하여 해당 법조문에 대한 보충 설명을 싣는 방식이다 본문의 편차는 제1책은 명례율(名例律), 이율(吏律), 제2책은 호율(戶律), 예율(禮律), 제3책은 병율(兵律), 형율(刑律). 제4책은 형율(刑律), 공율(工律)로 되어 있다. 본문에 있어서 대명율직해는 조문과 강해 아래 이두(吏讀)로 설명을 가했으나 《대명율강해》에는 조문과 강해만을 수록하였다. 이것은 명대 법률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본서는 권4~17이 수록되어 있는 제2책으로 내용은 호율(戶律)과 예율(禮律)이다. 표지 이면의 기록으로 보아 1536년 가정십오년(嘉靖十五年) 유월(六月)에 수교(受敎)하여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한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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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0.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독직해(金誠一 宗家 典籍 - 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 / 조선 단종 2년(1454) / 5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기 쉽도록 송(宋)나라 때의 학자 임요수(林堯叟)가 편찬한 주석서이다. 임요수는 읽기 어려운 글자에 반절(半切)로 음주(音註)하고, 기사의 시말(始末)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으며, 《춘추좌씨전》의 구두(句讀)를 떼어 내고 그 구절에 알기 쉽게 주석을 달았다. 우리나라에는 세종 13년(1431)에 원나라 목판본을 번각(飜刻)하여 간행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데, 현재 9권 1책(권62~70)이 보물 제1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시기에 간행된 이 책은 단종 2년(1454) 6월에 전라도 관찰사 김연지(金連枝)가 금산군(錦山郡)에서 계미자본(癸未字本)을 번각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계미자는 태종 3년(1403)에 주자소에서 만든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이다. 학봉 종손가에는 이외에도 계미자의 번각본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도 있다. 이 책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계미자본을 번각한 책이긴 하지만 계미자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조선 초기 지방에서 활자본의 번각본과 관련된 서적 발행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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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1.국조오례의서례(金誠一 宗家 典籍 - 國朝五禮儀序例) / 조선 선조 4년(1571) / 1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신숙주(申叔舟), 강희맹(姜希孟)등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는 조선조의 예서(禮書)인 오례(五禮)[길례(吉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중심으로 실행하여야 할 사례(事例)를 뽑고 그림을 붙여서 민ㆍ관의 모든 의식절차를 제정한 책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는 을해자본(乙亥字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융경(隆慶) 5년 즉 선조 4년(1571) 12월에 왕이 김학봉(金鶴峰)에게 내사(內賜)했던 기록이 있는데 이 책도 그 때 같이 내사(內賜)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영본 1책으로 권 2~5만 있는 것으로 본래, 권1은 길례(吉禮) 20편, 권2는 가례(嘉禮) 9편, 권3은 빈례(賓禮) 3편, 권4는 군례(軍禮) 4편, 권5는 흉례(凶禮)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는 세종대(世宗代)와 성종대(成宗代)를 거치면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강희맹(姜希孟)등 여러 유생들과 함께 편한 것으로, 특히 신숙주는 뛰어난 문관으로 세종대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할때도 많은 공적을 세운 인물로서 《동국통감(東國通鑑)》《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개인 저작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보한재집(保閑齋集)》등이 있다. 각 의식을 진술하는데 있어서 간단한 것은 설명하고, 단묘(壇廟)ㆍ제기(祭器)ㆍ관복(冠服)ㆍ배반(排班)ㆍ존작(尊爵) 등처럼 설명하기 복잡한 것은 도시(圖示)하여 시행에 쉽도록 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함께 조선시대의 의례절차를 규정한 대표적인 문헌이라고 하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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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2.당태종이위공문대직해(金誠一 宗家 典籍 - 唐太宗李衛公問對直解)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당태종이 고구려 공격에 대하여 당(唐)의 무장(武將)인 이정(李靖)에게 물었는데 이정(李靖)이 그 물음에 답한 대화를 후인이 기록한 병서(兵書)가 《당태종이위공문대직해(唐太宗李衛公問對直解)》이다. 이 책의 서명은 문답을 한 두사람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당태종이위공문대직해(唐太宗李衛公問對直解)》는 완질(完帙)일 경우 3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보물로 지정된 이 책은 권 상이 빠져있는 영본 1책의 형태이며 명대(明代) 유인(劉寅)이 직해(直解)한 책으로서, 우리나라에서의 정확한 간행연대는 간기가 없어서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명대(明代) 유인(劉寅)은 《삼략직해(三略直解)》,《무경(武經)》의 7서를 모두 직해(直解)하였는데 본서도 역시 직해한 것으로 기술의 체제를 보면, 처음에 당태종(唐太宗)이 묻되 "고구려가 자주 신라(新羅)를 침략하기에 짐(朕)이 사자(使者)를 보내 설유(說諭)해도 조서(詔書)를 받들지 않아 치려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이정(李靖)이 답하되 "탐지해보니 천개소문(泉蓋蘇文)은 자신이 병법을 안다고 자시(自恃)하고 중국은 멀어서 우리를 칠 수는 없다고 해서 조명(詔命)을 어겼으니 신이 군대 3만명만 있으면 포로(捕虜)하겠다" 고 하였다. 또 태종이 "병력은 적고 거리는 먼데 어떻게 임하겠느냐"고 하니 이정은 "정병(正兵)으로 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취지와 기술방식으로 지은 이 책은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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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3.상채선생어록(金誠一 宗家 典籍 - 上蔡先生語錄) / 조선 선조 1년(1568)이전 / 1책 / 목판본/관판본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선장이 책은 북송대(北宋代)에 이정자(二程子) 곧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제자인 사량좌(謝良佐, 1050~1103)의 어록집이다. 사량좌의 자는 현도(顯道)이고 하남성(河南省) 상채현(上蔡縣) 출신이다. 후학들은 그의 고향 이름을 따라 흔히 ‘상채선생’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간행된 것은 중국에서 1514년 무렵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중간본을 모본으로 하여 간행이 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전하는 것으로 중종 때에 갑진자로 간행된 것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이 책은 그 이후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추정된다. 책의 권말에 ‘가정 1년(1522)에 거듭 간행한다[時嘉靖壬午秋九月吉旦知上蔡事解梁史臣重刊]’라는 간행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책의 원래 간기이고, 실제로는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번각하여 간행하였거나 모사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새겨지거나 쓰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 왼쪽 하단에는 묵서로 ‘책주김(冊主金)’, 즉 ‘책 주인이 김씨’라는 소장인의 기록이 있다. 이 책은 두 정자(程子)에서 주자에 이르는 유학사상의 발전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문헌인 동시에 송학(宋學)의 별파(別派)를 형성하는 요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비록 목판본이기는 하나 임진란 이전의 목판본으로 상태가 양호한 희귀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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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5.선현유묵(金誠一 宗家 典籍 - 先賢遺墨)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타인이 보낸 4점의 필적이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의 오언율시 2수, 그리고 이숭고(李崇古)의 오언절구 1수 및 김성일에게 보낸 서찰 1통이다. 첫째,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32~1590)의 오언율시 2수의 시고(詩稿)는 <용년운록□□사학동주인도계(用年韻錄□□似鶴洞主人道契)>로 시 제목으로 보아 ‘학동주인(鶴洞主人)’ 김성일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김효원은 조식ㆍ이황의 문인으로 동인(東人)의 중심인물이었다.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병조좌랑ㆍ정언ㆍ지평ㆍ이조전랑(銓郞) 등을 지냈으며, 심의겸(沈義謙)과의 반목으로 결국 경흥부사ㆍ부령부사ㆍ안악군수 등 외직으로 돌다 영흥부사 재직 중 사망했다. 둘째, 국리(菊籬) 송지순(宋之詢)이 김성일의 시운(詩韻)을 빌어 쓴 차운시(次韻詩) 1수는 <이변국 분여학수(籬邊菊 分與鶴?)... 환보학수(還報鶴?)>라는 긴 제목의 5언장시이다. 시제의 뜻은 “울 옆의 국화를 학수에게 나눠주었더니 학수가 고풍(古風) 14구절을 지어 감사의 뜻을 전했는데, 구절마다 아름다움이 뛰어나 의취(意趣)가 있다. 병을 참고 화답하여 학수에게 되 갚는다”이다. 셋째, 이숭고의 시고는 ‘난(難)’ ‘흔(痕)’이란 운(韻)의 오언절구 원고로 이별의 아쉬움을 읊었다. 마지막 1586년 4월 7일자 편지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며, 떠난다고 아뢰던 날 김성일의 정성스런 후의에 감동했고 그날 과음으로 실례가 많아 황공하고 송구스럽다는 말이다. 【 번역 해제 】 (1첩) 선조 때의 문신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32~1590)의 칠언율시(七言律詩) 2수와, 국리병부(菊籬病夫)의 고풍(古風) 1수, 이숭고(李崇古)의 오언절구(五言絶句) 1수와 편지 1편 등 5건을 한데 묶어 1책으로 엮은 책인데, 모두 학봉 김성일에게 지어준 것이다.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표지 서명에 의해 제목을 정한 것이다. 김효원의 시는, 연(年)자 운으로 칠언율시 2수를 지어 학봉 김성일에게 보낸 것이다. 1수는 서로 그리는 회포를 읊은 것이고, 1수는 인의(仁義)의 본성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인성의 수양에 관해 읊고 있다. 국리병부의 시는 오언고풍(五言古風)인데, 모두 14구(句)의 장편시다. 국리병부가 울타리 가의 국화를 캐어 김성일에게 보냈는데, 김성일은 고맙다고 사례하는 뜻으로 오언고풍 14구를 지어 보내 왔으므로 국리병부는 그 시에 화답한 것이다. 이 시에서 국화처럼 세모(歲暮)에도 우정을 변치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이숭고의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인데 이별을 슬퍼한 것이고, 편지는 선조 14년(1586) 4월 7일에 보낸 것으로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하직하던 날 지성에 감동하여 과음으로 실례가 많았을 것임에 황공하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4편의 시와 1편의 편지가 수록되었는데, 모두 임란 이전에 작성된 것이며 김성일에게 보낸 것이다. 시문학 연구에 필요한 자료임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흔치 않은 김효원의 자필시고(自筆詩稿)는 이 책의 가치를 더해 준다. (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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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전적 - 56.선배유묵부금호필적(金誠一 宗家 典籍 - 先輩遺墨附錦湖筆蹟) / 조선 선조15년(1582) / 1첩 / 간독류/간독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조선중기의 명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곽기수(郭期壽, 1549~ ? )에게 받은 시찰(詩札)과 제자 권위(權暐), 권욱(權旭), 조정(趙靖)이 차운한 시고(詩稿) 3점, 후손 김주국(金柱國, 1710~1771)이 이재(李栽, 1657~1730)에게 받은 필적 1점을 실은 첩이다. 그리고 뒤쪽에는 김주국이 이재와 이상정(李象靖, 1711~1781)에게 받은 서간 등이 〈금호필적(錦湖筆蹟)〉이란 이름으로 부록되어 있다. 첫째는 곽기수가 1584년 학봉에게 보낸<봉별어대주인(奉別魚臺主人)>이란 칠언율시 시찰이다. 곽기수는 본관이 해미(海美)로 전라도 강진(康津)에 세거했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다음 시고 3편은 1582년 7월 고향 영해(寧海)로 돌아가는 백현룡(白見龍, 1556~1622)을 위해 학봉이 지은 송별시를 권위, 권욱(1556~1612)ㆍ조정(1555~1636)이 차운(次韻)한 것이다. 원운시(原韻詩)는 《학봉집》속집 권1에 실려 있다. 다음은 이재가 1729년에 쓴 <증김랑원석(贈金郞元石)>이란 글이다. 이재는 1700년 이후 안동 금수(錦水)에 살면서 학문에 몰두했는데, 외손자 이상정과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이 대표적인 제자이다. ‘원석(元石)’은 학봉의 7대손 김주국의 자(字)로 그 역시 금수에 살면서 이상정과 깊이 교유했다. 한편 《선배유묵(先輩遺墨)》뒤쪽의 〈금호필적(錦湖筆蹟)〉에는 이재와 이상정이 김주국에게 보낸 필적 7점이 실려 있다. 그중 1점은 1729년 이재가 보낸 편지이고, 나머지 5점은 1749, 1750년 이상정이 보낸 편지이며, 나머지 1점은 1773년 김주국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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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고문서 - 1.교서(金誠一 宗家 古文書 - 敎書) / 조선 선조 25년(1592)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선조 25년(1592) 6월1일에 국왕이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왜적을 쳐부수고 국난을 회복(恢復)하는 데에 공을 세울 것을 훈유(訓諭)하는 교서(敎書)이다. 이 교서는 6월 1일에 발급되었으나 전란중 교통 사정으로 김성일이 받은 것은 8월 1일이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4월 11일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4월 26일에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 토벌에 진력하고 있던 터였다. 좌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오는 길에 우도 사민들의 진정으로 8월 7일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국난회복(國難恢復)에 힘쓰다가 과로로 1593년 진주공관에서 순직하였다 위 교서는 임란사 연구의 자료이거니와, 특히 김성일의 충절(忠節)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장) 이 문서는 만력(萬曆) 20년 곧 선조 25년(1592) 6월 1일에, 국왕이 당시 경상도 초유사(慶尙道招諭使)로 재직하던 김성일(金誠一)을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에 임명하고,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왜적을 물리치고 재조(再造)의 공훈을 세울 것을 당부하는 훈유교서(訓諭敎書)이다. 임란 중인 이해 6월 1일에 제수의 명이 내려졌으나 김성일이 이 교서를 받은 것은 8월 11일이었고, 경상우도 유생들의 청원소로 그해 9월 4일에 우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김성일은 그 이듬해(1593) 4월 29일까지 군중에서 운명할 때까지 경상우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은, ‘왜적이 침구하여 2백년 예악문물(禮樂文物)의 우리나라가 피비린내 나는 취락으로 변해 버리고 나의 부덕의 소치로 의주에 파천해 있으니, 부끄러워서 갈 곳을 모르겠다.’고 선조 자신을 탓하고, 김성일의 강직하고 방엄(方嚴)하며 충신(忠信)하고 독경(篤敬)한 언행을 찬양하고 있다. 또 ‘경은 경상도 사람으로서 이미 특이한 공적을 세운 만큼 왜적을 섬멸하고 강토를 회복하려면 경을 버리고 누구에게 책임을 맡기겠는가.’ 하고, 끝에 가서 ‘통훈대부 이하는 경이 마음대로 처단하되, 죄가 사형에 이르면 나에게 품의하여 처결하라. 전진(戰陣)에 임하여 형률을 사용함은 이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하여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 훈유교서는 임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은 물론, 김성일의 전기 자료이기도 하다. (작성자 : 이정섭)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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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종가 고문서 - 2.유서(金誠一 宗家 古文書 - 諭書) / 조선 선조 25년(1592)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선조 25년(1592) 4월11일 곧 왜군의 침략 2일 전에 김성일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밀부(密符) 제26부(符)를 내리는 유서(諭書)이다. 유서란 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ㆍ절도사ㆍ방어사(防禦使)ㆍ유수(留守)들에게 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를 해당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이다. 유서는 서식이 동일하므로 해당 관원의 관직ㆍ성명과 연월일 및 밀부의 번호가 다를뿐이다. 김성일은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귀국복명에 대한 문책인사로 문관이 병사(兵使)의 직임을 맡게 되었으나, 4월 26일에 그 죄를 용서받고 경상도 초유사에 임명되고, 이어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왜군을 격퇴하는데 진심갈력하였다. 위 유서는 임란사 연구의 자료이거니와, 특히 김성일의 충절(忠節)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