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5401
김성일 종가 고문서 - 3.유지(金誠一 宗家 古文書 - 有旨) / 조선 선조 11년(1578)~순조 34년(1834) / 3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지이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손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김진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한다. 유지는 왕이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를 통하여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학봉 종손가에는 선조 11년(1578)과 선조 25년(1592) 김성일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ㆍ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에 각각 임명하면서 내린 유지 및 순조 34년(1834) 아산현감 김진화(金鎭華)에게 내린 유지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2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백지금니묘법연화경 <권 제이 변상도>(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白紙金泥妙法蓮華經 <卷 第二 變相圖>)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건 / 필사본/사경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낱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백지금니묘법연화경 권제2 변상도(白紙金泥妙法蓮華經 卷第二 變相圖)는 법화경 제2권의 권수에 붙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변상도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권수에 등장하는 변상도는 내용보다 설법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변상도는 경문에 부착되지 않고 전래된 것이다. 제작년대는 금강저문(金剛杵文)과 변상도(變相圖)의 필치로 보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3
김성일 종가 고문서 - 4.교첩 및 교지(金誠一 宗家 古文書 - 敎牒 및 敎旨) / 조선 명종 19년(1564)~대한제국(1903) / 59건 / 국왕문서/교령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지, 교첩 및 교지들이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손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교지와 교첩은 모두 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사령서 내지 명령서인데, 학봉 종손가에는 명종 19년(1564)에 김성일이 받은 백패ㆍ홍패ㆍ증직교지 등과 그 후손들이 받은 교지, 교첩들이다. 교지와 교첩은 학봉을 비롯하여 그 후손들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조선조 관제와 인사행정제도를 연구하는데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4
김성일 종가 고문서 - 5.첩(착정)(金誠一 宗家 古文書 - 帖(差定)) / 조선 인조 8년(1630)~숙종 4년(1678) / 4건 / 관부문서/첩관통보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첩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첩 4점을 살펴보면, 3점은 김성일의 손자 김시추(金是樞, 1580~1640)에게 발급된 것이고 나머지 1점은 김성일의 증손 자 김규(金煃, 1602~1684)에게 발급된 것이다. 첩은 중앙 관아와 지방 감영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을 임명할 때 그리고 수령이 속관(屬官) 즉 품관(品官)이나 향리(鄕吏) 등을 임명하거나 또 그 고을 유림들을 제관(祭官)으로 임명할 때 발급하였던 문서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5
김성일 종가 고문서 - 6.시권(金誠一 宗家 古文書 - 試卷) / 조선 명종 19년(1564)~헌종 10년(1844) / 7건 / 관부문서/시권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시권(試券)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시권 7점을 살펴보면, 명종 19년(1564) 학봉 김성일이 진사시에 입격한 시권을 비롯하여 후손 김규(金煃, 1602~1684)ㆍ김주국(金柱國, 1710~1782)ㆍ김진화(金鎭華, 1793~1850) 등의 대소과(大小科)ㆍ향시(鄕試)의 시권이 있다. 시권이란 과거 시험에서 응시자가 작성해 제출하는 답안지를 말한다. 과거 응시자는 과지를 시전(市廛)에서 구입하여 오른쪽 상단에 본인의 이름, 나이, 본관, 거주지 및 그의 사조(四祖)의 직함과 이름을 써서 예조나 성균관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후에 채점자들이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 볼 수 없도록 봉하여 응시자에게 돌려주었다. 채점은 성적에 따라 일(一)ㆍ이(二)ㆍ삼(三)ㆍ차(次)ㆍ경(更)ㆍ외(外) 등으로 매기되 ‘일’에서 ‘차’까지는 다시 그 안에서 상ㆍ중ㆍ하로 세분하였다. 학봉 종손가에는 시권이 학봉의 것에서부터 후손들까지 대대로 이어져 있어서 과거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6
김성일 종가 고문서 - 7.시호서경(金誠一 宗家 古文書 - 諡號署經) / 조선 숙종 17년(1691) / 2건 / 관부문서/증빙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시호서경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먼저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전래되고 있는 시호서경은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 17년(1691) 윤7월 26일에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 김성일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개정하는데 대한 사헌부(司憲府)의 서경문서(署經文書)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8월 27일에 사헌부관원의 서경완의문서(署經完議文書)이다. 시호서경이란 국왕으로부터 낙점(落點)된 시호를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서경하는 문서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7
김성일 종가 고문서 - 9.입안문(金誠一 宗家 古文書 - 立案文) / 조선 선조 6년(1573)~경종 2년(1722) / 5축 / 관부문서/증빙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권자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입안(立案)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입안은 5점이 전래되고 있는데, 16세기 후반 이후 가옥ㆍ노비ㆍ전답 등에 관한 안동부의 입안이다. 입안은 관에서 발급한 일종의 공증서(公證書)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8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0.등장(金誠一 宗家 古文書 - 等狀) / 조선 영조 41년(1765)~대한제국(1901) / 6건 / 관부문서/소지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등장(等狀)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 승문원교리를 지낸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등장 6점은 도내 유생 또는 학봉의 후손들이 연명으로 고을 수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등장이란 여러 사람의 연명(連名)으로 관에 제출하는 진정서나 청원서를 말한다. 학봉 종손가에 전래되고 있는 등장은 주로 선조들의 충열에 대한 표창이나 산송과 관련한 문제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출처 : 문화재청 -
475409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1.호적단자(金誠一 宗家 古文書 - 戶籍單子) / 고려 공양왕 2년(1390)∼대한제국(1908) / 일괄(1축,49건) / 관부문서/호적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호구단자(戶口單子)와 준호구(准戶口)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학봉의 부친인 김진은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면서 가세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의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개인이 소장한 호적류에는 호구단자와 준호구(准戶口)가 있다. 호구단자는 호주신고서에 해당하는 것이며, 준호구는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호적류 50점에는 백문(白文)이기는 하나 고려 공양왕 2년에 작성된 김천(金洊)의 호구단자를 비롯하여 현종 11년(1670) 김규(金煃)가 68세 때 작성된 준호구, 이어 후손 김이옥(金以鈺)ㆍ김주국(金柱國)ㆍ김종수(金宗壽)ㆍ김진화(金鎭華)ㆍ김흥락(金興洛) 등의 호구단자와 준호구가 있다. 이 가문에 소장되어 있는 호구단자ㆍ준호구를 통하여 학봉 김성일 일족의 통혼관계, 가족구성의 실태 및 노비분포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것과 현종 연간에서 조선후기까지 주손(冑孫)들의 것이 대대로 이어져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가족제도ㆍ신분제도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0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2.분재기(金誠一 宗家 古文書 - 分財記) / 조선 중종 30년(1535)~철종 13년(1862) / 4건 / 민간문서/분재기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분재기류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학봉의 부친인 김진은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면서 가세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의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 제906호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분재기류에는 선조 25년(1592)에 작성된 화회문기와 명종 20년(1565) 2월에 김진이 김성일에게 과거합격 기념으로 노비를 별급해 중 별급문기와 이 별급 사실을 안동부에서 공증해 준 입안, 철종 13년(1862) 6월에 김흥락(金興洛)이 안동 봉정사 영산암(靈山菴)에 불전에 보시하기 위해 논을 허급하는 문서 등이 있다. 화회문기는 양친이 사망한 후 작성되는 재산상속 문서로 통상 삼년상이 끝난 후 상속인이 한곳에 모여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 분재기류는 양반가문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학봉 종손가에 남아있는 분재기는 양은 많지 않으므로 다소 이러한 점을 살피기에는 미흡하지만, 당시 학봉 일족의 경제력뿐만 아니라 조선조 가족제도ㆍ사회제도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1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3.명문(金誠一 宗家 古文書 - 明文) / 조선 인조 6년(1628)~일제강점기(1924) / 34건 / 민간문서/명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문기류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학봉의 부친인 김진은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면서 가세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의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전해지고 있는 고문서 가운데 문기류는 34점이다. 문기는 주로 토지나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면 이를 증빙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학봉 종손가에 소장된 문기들은 인조 6년(1628) 유학 모씨가 김집(金潗, 1558~1631)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문기에서 한말까지 작성된 것이 있는데, 토지매매문기와 노비매매문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시대에는 노비나 토지 등을 매매하면 관에 신고하여 공증(立案)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관의 공증을 거치지 않고 매매 당사자간에문기를 작성하고 신ㆍ구문기를 넘겨주는것으로 매매가 이루어졌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2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4.완의(金誠一 宗家 古文書 - 完議) / 조선 숙종 18년(1692)~철종 1년(1850) / 일괄 / 민간문서/서간통고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첩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완의(完議)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학봉의 부친인 김진은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면서 가세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의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 제906호로 지정된 이 문서는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완의는 3점이 있다. 완의는 종중(宗中)ㆍ가문(家門)ㆍ계(契)ㆍ동중(洞中) 등에서 제사(祭祀)ㆍ묘위(墓位)ㆍ계사(稧事)ㆍ동중사(洞中事) 등에 관하여 의논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적어 그것을 서로 지키도록 약속하는 문서를 말한다. 이 가문의 완의(完議)의 내용을 살펴보면, 숙종 18년(1692) 문중에서 김수(金燧) 등 13명이 선조 대대로 전래되어 오던 신곡전장(申谷田庄)을 지키기 위해 작성한 완의, 김성일의 평소 유의(遺意)에 따라 설치한 가수천(佳樹川) 별묘(別廟)를 이안(移安 )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작성한 완의, 경술년 김시추(金是樞, 1580~1640)의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문제로 작성한 완의이다. 김시추는 김성일의 손자로서 자는 자섬(子贍), 호는 단곡공(端谷公)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완의가 수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서 내앞김씨 일족의 공동 관심사를 살펴볼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3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 2, 3, 5>(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紺紙銀泥 妙法蓮華經 <卷 二, 三, 五>)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3첩 / 필사본/사경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절첩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사경은 감색(紺色)의 종이에 은니(銀泥)로 쓴 법화경 7권(法華經 七卷) 가운데 2, 3, 5이다. 권수(卷首)에 변상도(變相圖)는 생략되고, 사성기(寫成記)도 없으나 경문(經文)과 앞뒤 표지는 권(卷) 5를 제외하고는 완전하다. 사성기(寫成記)가 없어 정확한 사성연도(寫成年度)는 알 수 없으나 표지(表紙)의 장식 및 본문 글씨 등 사경 전체의 품격으로 보아 고려말기 사경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4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5.통문(金誠一 宗家 古文書 - 通文) / 조선 숙종 2년(1676)~일제강점기(1937) / 55건 / 민간문서/서간통고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통문(通文)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학봉의 부친인 김진은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면서 가세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의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통문은 56점으로,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역의 서원과 향교 등에서 작성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외 재사(齋舍)ㆍ사우(祠宇)ㆍ하회문중(河回門中)에서 작성하였다. 통문이란 서원(書院)ㆍ향교(鄕校)ㆍ문중(門中)ㆍ동중(洞中) 등에서 동류(同類)의 기관이나 단체 혹은 개인에게 보내는 통지문으로 공동의 관심사를 통고하거나 촉구하는 내용이다. 돌려 본다는 뜻에서 회문(回文)이라고도 하였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전래되고 있는 통문에는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많다. 특히 상당수가 서원에서 작성하여 발송한 것이므로 서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5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6.치제문(金誠一 宗家 古文書 - 致祭文) / 조선 광해군 1년(1609) / 1건 / 국왕문서/전문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치제문(致祭文)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김한계(金漢啓)가 세종 때 집현전교리를 지냈고 그 뒤 그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손자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내앞김씨가문은 문과급제자를 비롯하여 많은 생원ㆍ진사시에 입격자를 배출하였으며, 김진의 다섯 아들들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김성일은 퇴계학통을 전승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소장된 치제문은 광해군 1년(1609) 8월 23일에 국왕이 예조좌랑 이천추(李天樞)를 보내어 김성일을 제사할 때의 제문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6
김성일 종가 고문서 - 17.설계도(金誠一 宗家 古文書 - 設計圖) / 시대 미상 / 2건 / 민간문서/기타류 / 김시인 / 경북 안동시 / 낱장이 문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설계도(設計圖)이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자손을 말하는데 일명 문충공파(文忠公派)로도 부른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의성군 석(義城君 錫)을 시조로 하여 그 뒤 고려시대 벌열로 일컬어졌다. 조선조에 와서 김한계(金漢啓)가 세종 때 집현전교리를 지냈고 그 뒤 그의 장자 김만근(金萬謹)이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살았으며 손자 김진이 가세를 확장하여 사족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ㆍ복일(復一) 등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문인과 학자가 배출됨으로써 세칭 내앞김씨(川前金氏)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내앞김씨가문은 문과급제자를 비롯하여 많은 생원ㆍ진사시에 입격자를 배출하였으며, 김진의 다섯 아들들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김성일은 퇴계학통을 전승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이 문서는 대부분이 학봉과 그 후손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설계도에는 가옥 설계도와 향회 모임과 같은 성격을 지닌 위차도(位次圖), 그리고 가옥을 지을 때 필요한 자재 목록이 기술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7
묘법연화경 권7(妙法蓮華經 卷七) / 고려 충렬왕 14년(1288) / 1첩 / 목판본/사찰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첩장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저본으로 중요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상단에 과주(科註)한 판본을 저본으로 1288년(지원 25)에 승재색(僧齋色)에서 복각 간행한 불경. 목판본 권7의 1책(결본). 강태영 소장. 보물 제918호. 일반적으로 화엄경 ‧ 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saddharma-pundarika-sutra”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는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법화경은 인도에서 결집된 이후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여러 구법승에 의해서 인도의 서북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래의 초기 단계에는 현재와 같은 27품 내지 28품의 완전한 경전이 동시에 입수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며, 서역의 귀화스님이나 중국의 구법스님에 의해 수집이 가능했던 소품 단위로 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한역의 초기단계에는 소품 단위로 역경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 시기를 지나 불교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초기의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과 같은 서역 귀화인에 의한 역경에서 5세기 이후로 법현(法顯) 등 중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역경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처럼 법화경 또한 이러한 전래 및 역경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한역본으로는 3종이 남아 있는데, 그 중 406년에 구마라집에 의해서 번역된 한역본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다. 역자 구마라집(鳩摩羅什)은 기원후 350년에 중앙아시아의 구차(庫車=龜玆)에서 태어나 409년에 중국의 장안에서 열반하였다. 그의 부친은 본래 인도사람인 구마라염(鳩摩羅炎)으로 명문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출가 후 구도차 구차에 와서 왕의 누이와 결혼하여 구마라집을 낳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鳩摩羅(夫)+什(母)’이라 이름하였으며, 이를 약칭하여 ‘라집(羅什)’이라 하고 중국명으로는 ‘동수(童壽)’로 이름하기도 한다. 그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한 이후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아서 어엿한 비구가 되었다. 그 후 전진을 이은 후진의 요흥(姚興)이 사신을 보내 그를 초빙하여 홍시 3년(401)에 구차를 떠난지 10여년 만에 비로소 중국 장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에 요흥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구마라집은 장안의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불교경전의 번역에 몰두하여 35부 294권을 완역했다. 그의 많은 역경 중에는 406년에 번역된 법화경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 3종의 법화경 한역본 가운데 유상옥 소장본은 구마라집이 406년에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된 판본으로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수 ‧ 당대의 돈황본(敦煌本) 사경은 물론 송대의 판본은 대부분이 이 역본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경 및 판경 또한 구마라집 역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류에는 대장경에 편입된 2종의 역본을 제외하고 모두가 이 28품 7권본인 구마라집의 한역본(漢譯本)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의 우리나라 유통본은 대개 모두 7권본으로 장축(裝軸) 또는 제책(製冊)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간혹 본문에 과주를 부쳐 휴대의 편리를 도모할 목적으로 소자본으로 만든 판본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50여종이 간행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중 강태영 소장본은 고려 중기 충렬왕 14년(1288)에 본문에 과주(科註)를 부친 소자본 권7의 1책으로 결본 상태이며, 전후의 표지는 근래에 감지로 새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표지에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접은 상태의 크기는 28.0cm×9.1cm이다. 권수에는 특별한 사항들이 없이 바로 권두제가 보이고, 이어 다음 행에 ‘구마라집 봉조역(鳩摩羅什 奉詔譯)’이란 노작표시가 기재되어 있다. 이어 제3행에는 품제(品題)가 보이고 제4행으로부터 경문이 시작되고 있으며, 상단에는 과주한 요어를 해당 내용에 선으로 연결 표시가 되어 있다. 권7은 제24품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부터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 모두 5품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원나라 황제 및 국왕의 수복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 ‘지원25년무자7월일(至元25年戊子7月日)’이란 연대표시가 보이고, 끝 행에 ‘승재색 각판(僧齋色 刻板)’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1288년에 승재색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판식의 특징을 보면, 변란은 접장본의 형식에 적합한 상하단변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간의 크기는 19.8cm인데 상단의 4cm 부분에 과주가 되어 있다. 1절은 전체 7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6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접장본으로 특별한 판식의 특징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매 장마다 각수로 보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체는 원판을 번각한 것으로 매우 작은 해서체로 소자로 쓰여져 있으며, 지질은 약간 두텁게 뜬 저지로 발문은 잘 보이지 않는 고려 중기에 불경에서 주로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중요한 사항에 과주하여 본문의 상단에 연결하여 표시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근래 이와 유사한 판본이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복장에서 발견된 바 있으나, 매우 희귀한 판본으로 법화경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여 불교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8
범망경 및 금강반야바라밀경(梵網經 및 金剛般若波羅蜜經) / 고려 우왕 13년(1387) / 1책 / 목판본/사찰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보살이 지녀야하는 무거운 계(戒)와 48종의 경범죄(輕犯罪)에 해당하는 계를 설명한 율서를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범망경(梵網經)과 벼락을 자르는 무궁한 지혜를 담고있는 금강경의 구마라집 번역본을 바탕으로 송나라 야보천노(冶父川老)가 주해한 것을 저본으로 고려말에 류구(柳玽)와 강인부(姜仁富) 등의 계청으로 우왕비(禑王妃)가 왕과 원자를 위해 시재하여 1387년에 간행한 소자본을 합철한 불경. 목판본 1책. 강태영 소장. 보물 제919호. 이 경전은 대승불교(大乘佛敎) 교단의 기본적인 계율서(戒律書)로 널리 준용되어 왔으며, 범망경보살계본(梵網經菩薩戒本)은 흔히 ‘범망경(梵網經)’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이 경전은 본래 범본(梵本)이 120권 61품이 있었다는 구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역본(漢譯本)에 대해서도 예로부터 후진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져 왔으나, 현재는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내용은 상하 2권 중 상권은 석가모니불이 제4선천(禪天)에서 대중에게 보살의 근본 심지(心地)를 말하다가 지혜의 광명을 놓아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노사나불의 불국토(佛國土)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광명궁(光明宮)에 앉아서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선(十禪) ‧ 십지(十地) ‧ 십금강심(十金剛心) ‧ 십인법(十忍法) ‧ 십원(十願) ‧ 심지법문(心地法門) 등을 차례로 설한다. 이는 화엄경의 수행 계위(階位)와 함께 불교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상권보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전승된 것은 하권의 계율이었다. 하권에서는 대승의 보살이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율인 십중금계(十重禁戒)와 가벼운 허물을 다스리는 48가지 계율인 48경계(輕戒), 재가신도를 위하여 육중계(六重戒)와 28경계를 따로 설하고 있다. 계를 지키는 것은 부모와 스승과 삼보(三寶)에 효순하는 것이며, 나쁜 데로 흐르는 본능을 제지하는 것이므로 보살로서 마땅히 배워 익혀야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하권만을 따로 뽑아 『보살계본(菩薩戒本)』이라 부르고 있다. 이 경은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이래로 대단히 중요시되어 한국불교 승단(僧團)의 조직 및 유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보살이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이자 실천덕목인 대승계율(大乘戒律)을 담고 있어서 화엄종(華嚴宗)ㆍ천태종(天台宗)ㆍ정토종(淨土宗) 등을 비롯한 대승불교 여러 종파의 소의율전(所依律典)이 되어 왔다. 이 율서는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의 구족계(具足戒)를 수록하고 있는 사분율(四分律) 등이 출가 승려에게만 적용되는 데 반해, 이 경의 대승계는 출가와 재가인에게 두루 통용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을 근거로 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과 수계법회(受戒法會)가 많이 개설되었다. 이 경은 불교도의 신행 규범으로 또 신앙의 근본 경전으로 널리 받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뒤에 합철된 금강경은 벼락을 자르는 무궁한 지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공(空)의 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경전 중에서 공이라는 문자가 한마디도 쓰여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대승과 소승이라는 두 관념의 대립이 성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우리에게 집착 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완성을 이루어 석가가 행한 보시의 정신을 구현하여 일체의 악업을 소멸하는 구제방법을 표방하고 있어, 공덕경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금강경의 한역본은 402년에 요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 외에 6종이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역본으로는 현재까지 6종의 역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대장경에는 달마급다(達摩笈多)의 역본이 입장(入藏)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유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의 해석과 이해를 위해서 인도의 무착(無着)은 18주위(十八住位)로 과판(科判)하였고, 천친(天親)은 37단의(三十七斷疑)로, 중국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는 32분(三十二分)으로 나누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은 일반적으로 소명태자의 분장 형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중국선종의 제5조인 홍인(弘忍) 이래 특히 중요시되었고, 제6조 혜능(慧能)은 이 경문을 듣고 발심(發心)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불교유입 초기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법(立法)을 위해서 반드시 이 경을 읽게 한 뒤부터 널리 유통되었다. 이처럼 강태영 소장의 범망경과 금강경 합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표지는 후대에 선장으로 개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책은 5침법이 아닌 4침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24.3cm×15.2cm이다. 표제는 제첨에 <범망경>과 <금강경> 합본으로 기재되어 있어, 이 책은 2종의 불경이 합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표지를 넘겨보면 권수에 ‘범망경보살계서(梵網經菩薩戒序)’가 보이고, 서문이 끝나는 부분에 바로 범망경의 온전한 이름인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이란 서명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간행된 주해본(보물 제894호)에는 서명이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梵網經盧舍那佛說心地法門品菩薩戒本)’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서명 끝에 ‘제십권하(‘第十卷下)’라는 권차가 보이고 있는데, 이는 본래 범망경의 광본(廣本) 가운데 제10품에 해당되는 <보살심지계품(菩薩心地戒品)>만을 별도의 경전으로 편집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으로 본래는 권자 또는 접장의 형태로 제책되어야 할 것이나, 복장에서 발견된 후대에 선장으로 제본한 것이다. 광곽 상하의 높이는 18.3cm이다. 본문에는 계선(界線)이 없이 접은 한 면을 기준으로 6~7행 16자씩 배자되어 있으며, 본문의 가운데는 ‘계경(戒經)’이란 판심제(板心題)와 아래로 장차(張次)가 새겨져 있다. 범망경의 서체는 서사자(書寫者)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원나라의 능서자인 조맹부의 서체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뒤에 합철된 금강경은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본을 바탕으로 천로(川老)가 협주한 송판을 저본으로 1387년에 고려에서 복각 간행한 것이다. 불복에서 나온 이후 범망경과 합철하여 표지를 새로 보수한 상태이다. 권수에는 1179년[淳熙 己亥]에 송나라 혜장 무진(慧藏 無盡)이 쓴 서문이 실려 있고, 서문이 끝나는 다음 행으로부터 개경게(開經偈)가 시작된다. 게송이 끝나고 이어서 다음 행에 비로소 서명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서명 아래로 ‘○’이 표시되어 있을 뿐 역자나 주해자에 관한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음 행에 서명에 보이는 ‘금강(金剛)’에 대한 협주로부터 천로의 주해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본문의 ‘여시(如是)’에 대한 주해가 시작되어 ‘신수봉행(信受奉行)’에 까지 이르고 있다. 본문의 주해가 끝난 다음 장에는 1161년[紹興 辛巳]에 태주 숭도관(崇道觀)인 정진(鄭震)이 쓴 후기가 수록되어 있고, 이어 선월암(禪月庵) 산인 천연(天演)이 쓴 발문이 보이고 있다. 발문의 다음 행 아래로 ‘동량도인 유천지(棟梁道人 惟遷誌)’와 ‘도인 정안각(道人 正安刻)’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저본이 된 송판은 1161년에 천로의 주해본이 완성되자 1179년에 혜장 무진의 서문을 수록하여 유천의 주관으로 정안이 판각하여 송나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원간본의 간행사실에 이어 고려에서 복각 간행된 사실을 담고 있는 이색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고, 발문의 다음 행으로부터 이 책의 간행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차례로 기입되어 있다. 이를 보면 화주(化主)에는 지성(志成)과 각호(覺毫)가 참여하였으며, 발원자로는 유구, 강인부, 묘정(妙淨), 자연(子珚)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고, 다음에 ‘산인지담 중간(山人志淡 重刊)’과 ‘각지 서발(角之 書跋)’이 기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책은 남송때 간행된 판본을 지담에 의해 그대로 복각되었는데, 다만 복각본인 까닭에 ‘발문만은 각지가 쓴[書跋]’ 것을 한 판에 새겨서 맨 뒤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과 발문의 자체는 서로 확연히 다르게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경문의 사이사이에는 현토를 묵서로 구결한 표시가 전체에 일관되게 기입되어 있다. 판식(板式)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좌우쌍변(左右單邊)으로 반엽은 10행으로 한 행은 21자씩 새겨져 있다. 판면에는 계선은 없고, 반곽의 크기는 19.0cm×12.5cm이다. 중앙에는 판심이 있으나, 상어미는 마치 초승달처럼 가늘게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로 ‘천로(川老)’라는 약서명이 보인다. 지질(紙質)은 가느다란 발문이 보이는 매우 얇게 뜬 저지로 보아 고려후기로부터 조선초기 간인본에서 종종 사용된 종이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과 같은 해에 간행된 <화엄경행원품별행소>(보물 제1126호)의 간행사실에 의하면, 동일한 공덕의 목적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말미의 ‘판유경도금사사(板留京都金沙寺)’란 기록으로 보아 경판은 개성의 금사사(金沙寺)에 보관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천로해금강경> 경판 또한 금사사에 함께 보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수행자가 지켜야할 계율을 명시한 범망경과 송나라 천로가 금강경에 대해 주해하고 송(頌)을 부친 송판을 저본으로 유구와 강인부가 우왕 비(妃)에게 계청하여 1387년에 왕실에서 간행한 소자본 금강경이 합철된 상태이다. 그러나 두 책을 합철할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이를 분리하여 따로 분책하는 편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미 이와 유사한 판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판본으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19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 조선 단종 2년(1454) / 1축 / 목판본/사찰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권자장부모의 한없이 크나 큰 은혜를 중히 여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위경의 일종으로 본문에 판화를 수록하여 조선시대 1454년에 평양의 광법사(廣法寺)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 목판본(판화수록) 1권. 강태영 소장. 보물 제920호. 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이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이 경은 유교의 효경(孝經)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경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첫째는 부모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십대은(十大恩)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십대은은 ①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 주는 은혜〔懷耽守護恩〕, ② 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어머니 은혜〔臨産受苦恩〕, ③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生子忘憂恩〕, ④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咽苦甘恩〕, 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廻乾就濕恩〕, ⑥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乳哺養育恩〕, ⑦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洗濁不淨恩〕, ⑧ 먼 길을 떠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遠行憶念恩〕, ⑨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爲造惡業恩〕, 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은혜〔究意憐愍恩〕 등이다. 둘째는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아 매우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하여 10개월이 될 때까지를 1개월 단위로 나누어서 출산의 과정을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셋째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어 유교의 효경이 아버지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점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넷째는 효경이 효도를 강조한 것인 데 비하여 이 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에서도 그와 같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방법의 제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보은의 방법은 부수적인 것이고, 근원은 은혜의 강조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은혜를 갚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부모를 위해서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이 경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서 이 경의 한 구절 한 게송을 잘 익혀 마음에 새기면 오역(五逆)의 중한 죄라도 소멸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은중경은 불교경전의 ‘효경(孝經)’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중국에서 찬술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에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이래로, 여말선초 이후로 급격히 간행되었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무렵에 우리나라는 원나라로부터 송대에 확립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지식층을 중심으로 일대 사상적 변화과정이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처럼 성리학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신진사류의 등장과 더불어 불교세력이 점차 몰락되는 미묘한 시점에 『은중경』의 비약적인 출판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 이후로 불교의 교학적 기풍이 점차 퇴조하면서 선학 중심으로 흘러 성리학에 대응할 만한 새로운 이념체계를 세우지 못한 채, 급기야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하고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조선사회에 불교계가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으로 조선의 건국기반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던 세종대에 이르러 치자 중심의 효도 교육를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국가적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수천부에 달하는 ‘행실도(行實圖)’의 간행이 본격 추진된 바 있다. 이에 불교계는 민간 및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은중경』의 간행이 병행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효행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이 전개되는 양상을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은중경』은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특정 사찰에 편중되지 않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조선시대 전시기 동안에 걸쳐 계속적으로 간행되었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전국의 주요 사찰과 민간을 중심으로 무려 80여종 이상에 달하는 많은 종수가 간행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나, 한편 한국불교의 민중성과 기복적 성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이러한 책을 간행하는데는 비록 사찰에서 주관은 하고 있으나, 그에 소용되는 경비는 대부분 민간 시주자들의 헌금에 의해서 충당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헌금의 기본적인 목적은 가문의 번영과 안위를 기원하는데 있으므로, 기복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 비록 간행동기가 기복적인 목적이 보이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효행심을 널리 전파하였던 긍정적인 측면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간행된 판본으로는 현재 경주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덕 4년(1300) 간본과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오본(戊午本) 2종이 알려져 있다. 호암본은 고려 우왕 4년(1378)인 무오년에 간행된 판본이다. 이 무오본은 앞서 간행된 대덕본(大德本)과 비교하여 권수의 구분이 없으며, 또한 본문에 판화(板畵)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가장 주목되는 특징이다. 그리고 대덕본과는 본문의 내용에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무렵에 『은중경』의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이 적극 수용되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이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본문 가운데 판화라는 특수한 편집방식을 가미하여 일반 독자의 이해에 편의를 도모케 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단권본(單卷本)으로 본문에 판화가 들어가 있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 판본으로는 현재까지 가장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판화에 나타난 모습은 우리 모습이 아닌 중국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어 있어 자못 의문을 갖게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중국본을 단순히 복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중국적 요소를 판화의 소재로 채택하여 판각한 것인지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요하고 있다. 그리고 서명에서도 ‘대보(大報)’라는 2자가 더 첨가되어 있어, 새로 재편하면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은중경은 많은 종수의 판본이 간행되었는데, 강태영 소장본은 1454년에 평양의 광법사에서 간행된 판본이다. 이 책은 본래 선장으로 제본되었던 것을 복장에서 나온 이후 최근에 권자본 형태로 보수하였다. 이 판본은 고려후기 1378년에 개판된 무오본을 저본으로 1407년 또는 1432년에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간행한 판본을 복각한 것이다. 권두서명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며, 다음 행에 ‘구마라집봉 조역(鳩麻羅什奉 詔譯)’이란 역자표시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은중경은 본래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알려져 있어 역자표시가 있을 수 없을 것이나, 마치 진경으로 보이기 위해 가장 위대한 번역가인 구마라집을 가탁(假託)한 것으로 보인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邊欄)은 상하단변으로 되어 있어, 본래 권자나 첩장에 적합한 형식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변란의 상하간 판고(板高)는 20.2cm이다. 행수(行數)는 접은 한 면을 기준으로 7행으로 구분되고 있으며, 그리고 매 줄마다 15자씩 배자되어 있다. 자경(字徑)은 1.4cm 남짓하다. 판식이 본래 권자 또는 접장의 형태로 만들어져 판심(板心)은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경문 사이에 ‘부모(父母)’라는 간략 서명과 그 밑으로 장수(張數)표시가 보이고 있다. 판심제(板心題)가 다른 계통의 판본에는 일반적으로 ‘은’(恩)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권말에 ‘진언왈(眞言曰)......’ 이하의 진언이 첨가되어 있으며, 이 진언이 끝나는 다음 행으로부터 이본(異本) 은중경으로 짐작되는 ‘불설부모은중태골경(佛說父母恩重胎骨經)’이 합본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합본된 태골경 말미에는 ‘경태5년갑술정월 일 평양부대성산광법사개판(景泰5年甲戌正月 日 平壤府大成山廣法寺開板)’이라는 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다음 행에는 시주자 ‘전만호이사영(前萬戶李思榮)’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각수로는 ‘선사연해(禪師衍海)’, 화주에는 ‘지상(智尙)’, 반두(飯頭)에는 ‘의오(義吾)’가 참여하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선초 1407년, 1432년, 1454년에 간행된 판본과 동일한 판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들 간에 하나의 계통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판본이다. 이 책은 효행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민중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문에 삽화적 성격을 지닌 판화를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독특한 편집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강태영본 은중경은 조선 초기에 평양의 광법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현재 국내 유일본으로 추정되어 불교판본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0
진실주집(眞實珠集) / 조선 세조 8년(1462) /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송나라의 예묘행(倪妙行)이 여러 선사(禪師)의 명(銘) ‧ 가(歌) ‧ 심요(心要) ‧ 법어(法語) ‧ 시(詩) ‧ 문(文) 등에서 선에 관련된 내용을 채록하여 편찬한 선어록을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 목판본(간경도감판) 3권 1책. 강태영 소장. 보물 제921호. 이 책은 선(禪)의 핵심 요체를 수록하여 선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였는데,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이 구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성종 때 후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강태영 소장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표지는 최근에 비단으로 개장한 것으로, 표제는 제첨에 ‘진실주집(眞實珠集)’으로 약간의 예서체로 쓰여져 있으며, 책의 크기는 26.7cm×17.5cm이다. 권수에는 지원 갑술(至元 甲戌, 1274)년에 형산(荊山) 지용(智瑢)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며, 이어 같은 해에 편자 무주거사(無住居士) 예묘행이 쓴 “심법진실주집서(心法眞實珠集序)”가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목록이 보이는데, 이 목록은 3권으로 나누어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목록 다음 장에 비로소 ‘진실주집(眞實珠集)’이란 권수서명이 나타나고 있으며, 다음 행에 ‘고항무주거사예묘행집(古抗無住居士倪妙行集)’이란 저자표시가 보이고 있다. 그리고 <부대사심왕명(傅大士心王銘)>이란 장제(章題)로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그리고 권3의 말미에는 ‘천순6년임오세(세조 8, 1462)조선국간경도감봉 교조조(天順6年壬午歲朝鮮國刊經都監奉 敎雕造)’라는 간행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 행에는 판서자(板書者)인 진의부위 황오신(黃伍信)을 비롯하여 교감자(校勘者)로 참여한 윤필상, 노사신, 한계희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판식의 특징을 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의 크기는 18.5cm×13.5cm이며, 전체 11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8자로 배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에 흑어미(黑魚尾)가 있으며, 판심제는 어미사이에 ‘진실주(眞實珠)’라는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지질은 간경도감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저지에 볏짚 등의 혼합재료가 섞인 고정지(藁精紙)이다. 이 책은 세조 8년(1462)에 진의부위(進義副尉)로 있던 황오신(黃伍信)이 판하본을 썼으며,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ㆍ한계희(韓繼禧) 등이 교감(校勘)에 참여하여 간경도감에서 인출한 것이다. 그 후 성종 3년(1472) 인수대비(仁粹大妃)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인경(印經)이 이루어졌을 때도 재차 인출(印出)되었다. 이 판본은 세조에 의하여 국가적인 차원으로 운영한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으로 판각(板刻)이 정교하고 인쇄가 선명한 선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1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 조선 세종 29년(1447)~세종 32년(1450) / 3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천도(薦度)하여 극락에 오르게 하는 내용과 의식 방법을 다룬 경전으로 줄여서 《지장경(地藏經)》이라고도 하며,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이다. 사람이 죽으면 올리는 지장재(地藏齋)와 사찰(寺刹)의 명부전(冥府殿)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 바로 이 경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빈번하게 간행되어 그 판종이 비교적 다양하다. 이 《지장경(地藏經)》은 조선 왕실에서 태종(太宗) 원경왕후(元敬王后)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된 것이다. 간행시기는 세종의 막내아들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군호(君號)를 받은 세종 29년(1447)에서 세종이 돌아가신 해인 32년(1450)까지의 세종 말년에 간행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2
목우자수심결 및 사법어(언해)(牧牛子修心訣 및 四法語(諺解)) / 조선 세조 13년(1467) / 1권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이 책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으로, 세조 13년(1467)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저술인 <수심결(修心訣)>을 비현각(丕顯閣)에서 친히 구결(口訣)하고 이를 신미(信眉)가 국역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정혜쌍수(定慧雙修)ㆍ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한 것으로, 고려 불교의 중흥자인 지눌이 마음 닦는 비결을 제시한 선이론서(禪理論書)이다. 이 책의 권수에는 또한 신미가 구결하고 국역한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皖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ㆍ<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ㆍ<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ㆍ<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등 사법어가 합철되어 있다. 규장각본의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이 책은 상하 불분권 1책으로 선장의 형태로 장정되어 있다. 표지는 문양 및 장침한 실선으로 보아 후대에 개장된 듯 비교적 양호하다. 표제는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으로 묵서되어 있으며, 이면에는 ‘경성대학도서(京城大學圖書)’라는 장서인(藏書印)이 날인되어 있다. 권수에는 헤각존자 신미가 구결하고 국역한 <법어(法語)>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어서 신미가 국역한 <목우자수심결>이 합철되어 있는데, 경우에 따라 제본할 때 이의 선후가 바뀐 판본도 있다. 판식(板式)의 특징을 보면 변란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되어 있으며, 반곽의 크기는 18.5cm×12.6cm이며, 반엽은 9항으로 한 항은 17자씩 배자되어 있다. 행 사이에는 계선이 간혹 나타나 있으나, 일정하게 분명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에 대흑구가 보이며, 또한 그 사이로 상하 흑어미(黑魚尾)가 서로 내향하고 있다. 상어미 아래에는 ‘법어(法語)’ 또는 ‘수심결(修心訣)’이란 판심제가 보이고 있는데, 판심제 아래에는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책의 전체 크기는 27.5cm×16.7cm이며, 인쇄면의 글자의 완결이 전혀 나타나고 있으므로 초간본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성화삼년정해세조선국간경도감봉교조조(成化三年丁亥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라는 간기(刊記)가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 행에는 판서자(板書者)인 안혜(安惠)ㆍ유환(柳睆)ㆍ박경(朴耕)의 이름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자체는 한글은 정방형 고딕체로 쓰여 있으며, 한문은 원필(圓筆)의 안진경체의 필의가 보인다. 지질은 얇게 뜬 저지로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연간에 주로 사용되었던 인경지(印經紙)이다. 이 책은 보조 지눌 및 몽산 덕이가 저술한 선 수행의 지침서로서 세조가 불경간행을 위하여 설치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국역본 가운데 하나로 간경도감판의 특징 및 초기의 훈민정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삼성미술문화재단외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저본으로 사찰에서 복각한 판본이 여러 종이 현재 남아있다. 특히 조선초기의 명필가 안혜(安惠)ㆍ유환(柳煐)ㆍ박경(朴耕) 등이 정성껏 써서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정각본(精刻本)이란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3
월인석보 권11, 12(月印釋譜 卷十一, 十二) / 조선 세조 5년(1459) / 2권 2책 / 목판본/왕실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1459년(세조 5)에 편찬한 불경언해서이다. 『석보상절』은 1447년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석가의 일대기를 번역한 책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찬가를 지은 것이다. 본서인 『월인석보』권 11, 12는 1459년에 간행된 초판본이다. 권 11에는 『월인천강지곡』 제272부터 275까지 실렸고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의 서품(序品)과 방편품(方便品)의 내용이 실려 있다. 권 12에는 『월인천강지곡』 제276부터 278까지 실렸고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2의 비유품(譬喩品)의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은 권(卷)11에 법화경(法華經) 권(卷)1의 서품(序品)과 방편품(方便品)이며 권(卷)12는 법화경(法華經) 권(卷)2의 비유품(譬喩品)이 실려 있다. 권(卷)11의 앞부분이 조금 훼손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지질(紙質)이나 인쇄(印刷)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한글불교대장경으로, 조선 초기의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4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부적(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 坐像 및 腹藏遺物-符籍) / 조선 초기 / 6건 / 사찰문서/기타류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 수성구 / 낱장경상북도 영풍군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흑석사의 목조아미타불상(木造阿彌陀佛像)에서 나온 복장유물(腹藏遺物)이다. 이 유물 가운데 복장기와 불상조성권선문에 의해서 이 아미타불상은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법천사의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 권 2 변상도, 감지은니묘법 연화경 3권, 부적 등의 전적류와 사경보(寫經褓) 등 직물류(織物類), 사리ㆍ오향ㆍ칠약ㆍ오곡ㆍ유리ㆍ구슬 등이다. 이 복장유물은 목조아미타불 조성 연도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개별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유물들중 부적은 진언집(眞言集)에 나오는 불교부적이다. 간행년도는 조선초기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5
묘법연화경 권6~7(妙法蓮華經 卷六~七) / 조선 성종 13년(1482)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한국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으로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기원 전후에 서북 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두 차례에 걸쳐 증보(增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구라마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8권이 가장 널리 보급되었고,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은 관음신앙(觀音信仰)의 근거가 되어 존중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사상은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다. 삼승(三乘)이 결국 일승(一乘)으로 귀일(歸一)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설한 여러 법(法)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 시방불토(十方佛土)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혀 부처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전 7권 중 6권과 7권을 한 책으로 엮은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6
묘법연화경 권 6~7(妙法蓮華經 卷 六~七) / 조선 성종 13년(1482)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한국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으로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기원 전후에 서북 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두 차례에 걸쳐 증보(增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구라마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8권이 가장 널리 보급되었고,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은 관음신앙(觀音信仰)의 근거가 되어 존중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사상은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다. 삼승(三乘)이 결국 일승(一乘)으로 귀일(歸一)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설한 여러 법(法)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 시방불토(十方佛土)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혀 부처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전 7권 중 6권과 7권을 한 책으로 엮은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7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10(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十)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절첩장참법(懺法)은 현생에 쌓은 죄업에 대하여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참회하는 법회를 말한다.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은 바로 이를 수행하여 영험을 받아서, 죄업은 씻어버리고 화복을 누리고 나아가 망령을 구제하게 되면,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어둠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공덕을 발원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10권 가운데 마지막 권으로 권말(卷末)에 「책주신담(冊主信談)」이라는 묵서(墨書)와 그 뒷면에 「정덕원년병인십월일(正德元年丙寅十月日) 성장원권전수신담(晟將元卷傳受信談)」이라는 묵서지기(墨書識記)가 있어 이 책이 신담(信談)이란 사람이 사용하다 성장(晟將)에게 전수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고려 태조(太祖)의 휘(諱)인 「건(建)」자, 정종(定宗)의 휘(諱)인 「요(堯)」자, 목종(穆宗)의 휘(諱)인 「송(誦)」자에 각각 결획(缺劃)이 있어 고려 때 판각임이 확실하고, 인쇄상태로 보아 후쇄본(後刷本)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8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의2(大方廣圓覺略䟽注經 卷上之二)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권 1책 / 목판본/대장도감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포배장《대방광원각소주경》은 관심(觀心) 수행을 위주로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요법(要法)을 설한 《대방광원각경(大方廣圓覺經)》을 당(唐)시대 불타다라(佛陀多羅)가 번역한 것에 종밀(宗密)이 간략하게 주해한 것이다.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宗敎藏總錄)》에 ‘약소4권 혹 2권(‘略疏四卷 或 二卷)’으로 되어 있는데, 이 판본은 상ㆍ 하의 2권이 각각 1ㆍ 2로 분할된 2권 4책 중 권상지이(卷上之二)가 전래된 것이다.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승려들의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불교 수행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29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4~7,8~10(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四∼七, 八∼十) / 조선 초기 / 7권 2책 / 목판본/사찰본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선장《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은 선(禪)을 닦아 감각작용에서 유발되기 쉬운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요의(要義)를 설한 경전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얻을 것을 주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대(大)는 ‘체(體)’이고 불정(佛頂)은 ‘구경각(究竟覺)’이니, 대불정(大佛頂)은 경전의 법체(法體)이다. 여래밀인수증료의(如來密因修證了義)는 ‘여래의 비밀한 인(因)을 닦아서 증득할 요의체(了義體)’라는 뜻이다. 제보살만행수능엄(諸菩薩萬行首楞嚴)은 ‘여러 보살들이 이타행(利他行)을 닦음에 미세한 번뇌를 끊어 자타의 수행을 구족한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선(禪)에 밀교사상(密敎思想)이 가미된 것으로 우리나라 불교전문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의 하나로 채택되어 널리 유통되어 왔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0
백지묵서지장보살본원경(白紙墨書地藏菩薩本願經) / 조선 세종 22년(1440) / 3권 3첩 / 필사본/사경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절첩장당나라 때 법등(法燈)이 한역한 지장경은 우리나라 지장신앙(地藏信仰)의 기본 경전으로 널리 신봉되었던 현세 이익적인 불경으로 세종 22년(1440)에 해연 스님이 백지에 붓으로 직접 쓴 조선사경이다. 이 불경은 부처님이 도리천(忉利天)에서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하여 설법한 것을 모은 것이다. 부처님은 지장보살을 불러 갖가지 방편으로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을 교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과, 죄를 짓고 지옥의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려는 유명교주(幽冥敎主) 지장보살의 큰 서원(誓願)을 말씀하신 경전이다. 지장보살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하고자 노력하여, 죄를 짓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까지도 평등하게 구제하고자 하는 큰 뜻을 세운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장신앙(地藏信仰)의 기본 경전으로 널리 신봉되었던 현세 이익적인 불경으로,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이며, 이를 줄여서 <지장경> 또는 <지장본원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 때의 법등(法燈)이 한역한 3권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호암본 조선 초기 지장경은 당나라의 법등(法燈)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저본으로 세종 22년(1440)에 해연 스님이 백지에 붓으로 직접 쓴 사경이다. 이 책은 백지에 먹물로 글씨를 써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접장본 형태로 만들었는데, 표지는 검푸른 색을 드린 종이에 은색으로 연꽃과 보상화문을 그려 장식하였다. 따라서 고려사경에서 보이는 화려 장엄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조선 특유의 담백함이 보이고 있다. 표제는 검은 바탕의 제첨 위에 금니(金泥)로 글씨로 썼으며, 제목 위에는 학사횡립(鶴立橫蛇)의 표시가 보이고 있다. 권수에는 변상도가 없으며, 바로 경제와 품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경제와 품제 사이에 일반적으로 기재되는 역자표시가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경면의 상하사란은 먹물로 쌍란으로 그리고, 행 사이에는 계선(界線)이 가늘게 그어져 있다. 이 사경의 크기는 접었을 때를 기준으로 권상이 세로 42.3cm, 가로 15.5cm이고 권 중ㆍ하가 세로 43.8cm, 가로 15.5cm로 크기가 약간 달라서 상하간의 높이도 28.8cm와 30.5cm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 장의 전체 길이는 61.7cm이며, 모두 24항을 수록하여 6항 4절로 접혀 있다. 서체는 원나라의 조맹부체를 바탕으로 하는 고려사경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권상의 말미에는 이 사경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권중과 권하에는 사경의 조성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권중의 말미에는 사성기의 내용이 실려 있다. 호암본 지장경 조선사경은 지금까지 유례가 드문 조선 초기에 조성된 사경으로, 비록 고려시대의 사경에 비해 전반적인 제작기법이 떨어지나, 표지의 장식이나 경명(經名) 표시등이 고려시대 형식을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경과는 달리 개인발원경(個人發願經)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발원(發願)하여 사성(寫成)한 사경이다. 특히 시주자(施主者)가 평민(平民)또는 천민(賤民)으로 고려시대 사경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조선 초기 사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1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및 송언신 초상-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 및 宋言愼 肖像 - 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 / 조선 선조 18년(1585)~정조 18년(1794) / 일괄(2첩,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경기도박물관 / 경기 용인시 / 첩장이 서첩은 조선조 제 14대 임금인 선조(宣祖)가 문신 호봉(胡蜂) 송언신(宋言愼, 1542~1612)에게 보낸 어서밀찰(御書密札)로 모두 7건을 합철하여 첩(帖)으로 장정한 것이다. 또 뒷부분에 정조대왕이 직접 쓴 발문(跋文)을 별책으로 장정하여 도합 2책으로 함께 보관되어 있다. 밀찰첩을 받은 송언신(宋言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유희춘(柳希春)과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도 출입한 바 있다. 선조 13년(1580) 예조좌랑ㆍ병조정랑ㆍ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냈고, 선조 19년(1586)에는 호남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파견된 뒤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홍문관의 전적(典籍)ㆍ수찬(修撰)사헌부의 장령(掌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선조 25년(1592)에 삭직(削職)되었고, 1596년 동면순검사(東面巡檢使)로 재등용되어 대사간(大司諫),병조ㆍ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으나 광해군 초에 다시 파면되어 낙향하였다. 이 선조어찰첩(宣祖御札帖)은 호봉(壺峰) 송언신(宋言愼)의 후손에 의하여 보존되어 왔으며, 정조(正祖)의 명에 의하여 광주(廣州)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선조어서밀찰과 정조어제어필발(正祖御製御筆跋)을 함께 보관하게 되었다. 이 첩은 선조(宣祖)와 정조(正祖)의 어제어필로서 문학 및 서예사적인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편지의 내용 또한 단순히 소식을 묻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전쟁상황이나 변방의 방어 등 국방에 관한 사항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사료적인 가치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2
황진가 고문서(黃進家 古文書) / 조선 선조 8년(1575)∼고종 30년(1893) / 123건 / 국왕문서/교령류 / 황맹연 / 전북 남원시 / 낱장황진(黃進, 1550∼1593)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명보(明甫)이다.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거산도 찰방과 안원보 권관(安原堡 權管) 등을 역임하다 다시 선전관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시찰에서 돌아온 뒤 그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에 뜻을 같이하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준비를 나름대로 착실히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제용 감주부(濟用 監主簿)를 거쳐 동복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틈이 날 때마다 무술을 연마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진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용인으로 올라와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남하하다가 전라도 진안에 침입한 왜적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다. 훈련원 판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이치전투[梨峴戰鬪]에 참가해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도중 호남지방 대부분은 왜적의 약탈로부터 면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군량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에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진은 이치전투에서 쌓은 공이 인정되어 익산군수로 승진하였으며 충청도조방장도 겸직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으로 올라와 왜군을 맞아 싸웠으며 3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으로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해서 죽산성에 있는 적과 대치하였는데 이 때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성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왜군과 접전하여 죽산성을 점령했으며,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그 해 6월에 적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9일 동안이나 항전을 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그의 후손가에는 약 200여 점의 고문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를 종류별로 소개하면 교지류(敎旨類)가 120점, 호구단자(戶口單子) 15점, 소지류(所志類) 40점, 분재기 13점, 기타 14점이다. 교지류에는 황진이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합격하여 받은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그가 여러 관직을 역임할 때마다 받은 교첩(敎牒)과 교지들이다. 또 유지(有旨) 1점도 교지류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선조 26년(1593)에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을 때 국왕이 밀부(密符)의 인수인계를 위하여 발급한 것이다. 전쟁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밀부를 전임 병사(兵使)로부터 직접 인수하도록 황진에게 지시하고 있어서 주목을 끈다. 호구단자는 황진의 5대손인 황치중 등에게 발급된 것으로 가족의 구성원 등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 소지류는 상서(上書), 단자(單子), 등장(等狀), 품목(稟目) 등을 포함시켰다. 양자의 입양과 종가의 면역(免役), 황진의 가증(加贈), 서원 철폐 후 서원터 귀속 등 조선 후기 가문의 역할 등을 규명하는데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귀중한 자료이다. 분재기에는 특별한 일이 있어서 재산을 나누어주는 별급(別給) 문서와 부모 돌아가신 후 형제자매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고서 작성한 회회문기(和會文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중후기 재산 분배에 따라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기타에는 통문(通文), 완문(完文), 입양문서, 입안(立案), 관(關) 및 시권(試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통문은 정충사(旌忠祠) 건물 수리와 정충록(旌忠錄) 간행을 위해서 여러 인물들에게 보낸 것이다. 완문은 정충사 근처에 살면서 정충사를 위해 봉사하는 주민들의 군역을 면제해주는 것을 인정하는 일종의 공증서이다. 입양문서는 양자 입양과 관련된 문서로 입양을 최종적으로 승인해 준 예조의 입후입안(立後立案)과 생부와 양부 사이에 주고받은 입안 관련 문기이다. 관은 예조(禮曺)에서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낸 것으로 황위의 정려를 수립할 때 여기에 필요한 각종 자료와 목수 등을 관에서 지급토록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황진가 고문서는 조선 중기 이래 향촌지역의 사회 변모 현상 등을 세밀히 관찰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 번역 해제 】 (15장) 이 문서는 만력(萬曆) 16년 곧 선조 21년(1588) 11월에, 당시 겸 선전관(兼宣傳官)이었던 황진(黃進)이 병조에 올린 소지로서, 선조 13년(1580) 선전관에 제수한 고신(告身)을 분실하였으므로 재발급을 청원한 것이다. 병조에서 다시 발급해 주는 병조입안(兵曹立案)이 있다. 황진(黃進:1550~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으로,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아술당(蛾述堂)이다. 1576년(선조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고,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선조26) 6월 왜군이 진주(晉州)를 공격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결재자는 병조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이 하였고, ‘병조지인(兵曹之印)’이란 관인이 세 군데 찍혀 있다. 이 문서는 고신을 분실하여 재발급을 신청한 소지로서, 병조에서 고신을 재발급해 주겠다는 입안도 같이 붙어 있는 고문서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작성자 : 이정섭)출처 : 문화재청 -
475433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권3(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諺解) 卷三) / 조선 세조 7년(1462) / 1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동국대학교 / 서울 중구 / 선장세조 7년(1462)에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당대의 고승과 유학자를 동원하여 국역하여 주자소에서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국역본 능엄경(國譯本 楞嚴經)이다. 당나라 반자밀제(般刺密帝)가 번역하고 송나라의 계환(戒環)의 해(解)가 붙어 있는 10권 가운데 제 3권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대불정경', '수능엄경', '능엄경'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과 함께 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고 있을 정도로 귀중하게 여기는 경전이다. 이 경전은 자신에게 불성이 내재되어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래의 진실한 지견(知見)을 얻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마음의 실상(實相)이 무엇인지, 깨달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며 오음(색(色), 애(受), 상(想), 행(行), 식(識)등 마음의 작용)이 모두가 허망하며, 세간의 모든 법이 모두 여래장의 미묘한 진여성(眞如性)의 작용이라 하여 마음의 영원불멸성(永遠不滅性)을 깨닫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여래장(如來藏), 업(業), 육근(六根), 육식(六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화현(化現) 등과 ,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방법, 해탈을 위한 능엄주, 보살의 수행 등에 관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 경전은 대ㆍ소승 뿐 아니라 밀교사상(密敎思想)과 선정(禪定)을 역설하고 있어 선종(禪宗)에서도 중요시하는 경전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 속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득하여 힘을 갖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스님들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경전이다. 이 능엄경 국역본은 원래 세종의 명으로 세종 31년(1449)에 수양대군이 번역에 착수한 것인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루어 오다가 세조 7년(1461)에 유명한 승려와 유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완성하고 을해자로 찍어낸 것이다. 이 을해자본은 간경도감(刊經都監)국역 불경 간행에 기준이 되었다. 을해자로 간행된 능엄경(楞嚴經) 가운데 제1ㆍ2ㆍ4ㆍ5ㆍ7ㆍ8ㆍ9ㆍ10권이 보물 제760ㆍ761ㆍ762ㆍ973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으며, 6권은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4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권3(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諺解) 卷三) / 조선 세조 7년(1461) / 1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김창현 / 경기 성남시 / 선장능엄경은 금강경ㆍ원각경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는 불경으로 조선 초기에 우리말로 번역하여 조선 세조 때 금속활자 을해자로 인출된 언해본. 금속활자본(을해자) 1권 1책(결본). 김창현 소장 보물 제948-2호. 능엄경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중국에서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으며, 원명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고도 한다. 본래 모두 10권으로 편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능엄경 판본으로는 1235년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하였는데, 그 목판이 현재 해인사에 유전하고 있다. 그리고 1309년에 소자(小字)로 간행된 묵서구결이 들어 있는 호접장본(蝴蝶裝本), 1372년에 안성 청용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 판본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1401년에 남송판을 복각한 대자판본, 사찰본 중에 최고본은 1443년의 성달생(成達生)의 발문이 있는 전라도 화암사판(花岩寺板) 등의 한문본이 보인다. 그리고 송나라 계환이 주해하고 원나라 유측이 회해한 것을 저본으로 언해하여 1461년에 을해자로 간행한 국역활자본과, 이 을해자언해본을 저본으로 1462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국역본이 현존하고 있다. 언해본은 먼저 세조가 친히 구결을 달고 여기에 왕사 신민의 도움을 받아 한계희와 김수온 등이 국역하였다. 이밖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의 다양한 판본이 개판되었을 만큼 능엄경은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해제 대상본은 바로 1461년(세조7)에 주자소에서 을해대ㆍ중ㆍ소자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전 10권 중 권3의 1책에 해당된다. 권3의 핵심내용은 세간(世間)의 만법(萬法)이 모두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 하여 마음의 영원불멸성을 깨우치고 있다. 전후의 표지는 능화문(菱花紋)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불복(佛腹)에서 발견된 이후 근래 새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전체 크기는 35.4㎝×24.0㎝이다. 본문에는 여러 곳에 걸쳐 주서(朱書)로 교정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지질은 세종에서 성종 무렵 불경을 인쇄할 때에 흔히 사용되었던 가는 가로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저지(楮紙)와 볏짚 등이 혼합되어 있는 고정지(藁精紙)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자체는 대자는 매우 해정한 해서체로 세조의 친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중ㆍ소자는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주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안진경의 필의가 느껴진다. 한글은 활자본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정방형의 고딕체의 소자로 쓰여 있다. 이 책은 세조 때 국역한 능엄경을 을해자와 한글활자로 인쇄한 불경이다. 비록 권3의 1책에 불과하나 한글에는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을해대ㆍ중ㆍ소자와 한글 활자가 혼용되고 있어 조선초기의 인쇄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5
통감속편(通鑑續編) / 조선 세종 4년(1422) / 24권 6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손성훈 / 경북 경주시 / 선장이 책은 중국 고대에서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원(元)나라 진경(陳경)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권말에 있는 변계량의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세종 2년(1420) 11월에 공조참찬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서 사용한 경자로 세종 4년(1422)에 인출(印出)한 것이다. 그러나 서ㆍ목록ㆍ서례는 계미자이다. 24권 6책의 완질본(完秩本)이며, 내용은 권 1은 반고씨(盤古氏)부터 고신씨(高辛氏)까지, 권 2는 거란(契丹; 唐과 五代史), 권 3~24는 송대(宋代)까지 역대왕조의 사적(事蹟)을 수록하였다. 각 책의 권수 및 권말에는 ‘즙희경지(緝熙敬止)’ ‘눌재(訥齋)’ ‘국노(國老)’ ‘경보(景寶)’ 효중(孝仲) 등의 도장과 ‘송첨(松첨)’이란 지기(識記)가 있다. 송첨은 양동(良洞)의 별칭이므로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 손씨 집안에 소장되어 온 것이다. 통감속편은 원나라 지정 21년(1361)에 중국에서 발간된 바 있고 그 후 6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찍어낸 책이다. 북경(北京)도서관 목록을 보면 모두 세 질이 있는데, 지정 21년(1361)에 찍어낸 것은 같지만 한 질만 완질이고, 나머지 두 질은 영본(零本)이다. 대체로 남아있는 『통감속편』이 영본(零本)인 경우가 많으나 본서는 완질본이므로 가치가 더욱 크며, 경자자(庚子字)와 계미자(癸未字)가 함께 쓰인 점에서 서지학 및 고인쇄기술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6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 조선 성종 5년(1474) / 2책 / 목판본/왕실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아미타불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 지은 죄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내용으로 원나라 왕자성(王子成)이 집록(集錄)한 것을 고려의 승려 혜랑(慧朗) 등이 고려 우왕 2년(1376)에 간행한 것을 바탕으로 조선 성종 5년(1474) 왕실에서 새로운 체제로 편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의식집. 목판본 10권 2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949호.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염불하고 참회하는 불교의식인 미타신앙(彌陀信仰)의 한 형태로서, 미타신앙과 관계되는 무량수경(無量壽經)ㆍ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ㆍ아미타경(阿彌陀經) 중 아미타경을 독송하거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예경(禮敬)하며 참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이 불경은 본래의 의미는 경전 속에 담긴 이념적인 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미타경을 독송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차차 독송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덕을 중요시하여 송경의식(誦經儀式) 중심으로 의식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의 전래 이래 서방극락정토의 왕생을 바라는 신앙인들이 많아져 삼국시대부터 미타참법이 크게 성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신라 경덕왕 때 미타사(彌陀寺)에서 불교신도 10여명이 조직한 염불만일계(念佛萬日契)의 참회기도를 비롯하여, 당시에 현신(現身)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한 욱면(郁面)의 미타참법, 오대산 서대(西臺)의 미타방(彌陀房)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던 미타예참 등을 들 수 있다. 그후 이 책을 고려 충숙왕 복위 1년(지순 3, 1332 )에 이미 순암(順菴)이 중국에서 구하여 민천사(旻天寺)에 두었으나,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불타 없어져 버린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을 다시 간행하고자 각인(覺因)과 혜랑(慧朗)을 비롯하여 화평군부인 사씨(舍氏), 정설곡(鄭雪谷)의 부인인 완산군부인 최씨 등이 후원하고 신천서, 이인렬, 김윤귀 등이 판각에 참여하여 1376년에 간행하였던 판본이 현재 보물 제1320호로 지정되어 계명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불경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제악업(諸惡業)을 참회하고 보리심을 내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조선시대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가 성종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바 있다. 우리 나라에는 목아박물관본 외에도 원간본(1474년 간)이 보물(제 949,1144,1165)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에 국립박물관본은 전10권 2책으로,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시기는 알 수 없으나, 권말에 1474년인 성화10년에 쓴 김수온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때 간행된 판본으로 판단된다. 권말에 수록된 김수온(金守溫)의 발문에 의하면,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자성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과 세종, 소헌왕후, 세조, 예종, 의경왕 등 선대왕과 왕비에 대한 추모를 함께 빌기 위해 지중추부사 성임(成任)에게 명하여 자비삼매참(慈悲三昧懺)과 미타참(彌陀懺)을 다시 쓰게 하여 판각하였다. 발문의 다음에 이 책의 간행에 조력한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시주에는 인수(仁粹) ‧ 인혜대비(仁惠大妃) 등 왕실과 월산대군(月山大君)ㆍ제안대군(齊安大君) 등 종친, 신미(信眉)ㆍ학조(學祖) 등 고승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화원(畵員)에 백종린(白終麟) ‧ 이장손(李長孫), 각수에 권돈일(權頓一) ‧ 장막동(張莫同) ‧ 이영산(李永山) ‧ 이장손 등 당시의 일류 장인이 총동원되어 가장 정성을 기울여 제작한 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판식의 특징이 동일한 판본이 더러 현전하는데, 난외 우측 하단에 동일각수(同一刻手) 이름이 새겨진 점도 동일하다. 이들 각수는 이 책보다 5년 앞서 정의공주 발원으로 간행된 <지장경(地藏經)>의 판각에도 참여하고 있어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닌 전문 장인으로 보인다. 이 책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책의 크기는 36.3cm×24.0cm이며, 본문은 반엽을 기준으로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5.7cm×19.0cm이다. 전체 9항으로 되어 있는데, 한 항의 경문은 15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가 있으며, 그 사이로 흑어미(黑魚尾)가 모두 하향 형식으로 되어 있다. 판심제는 위에 ‘미타참(彌陀懺)’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권수는 상어미 아래에 장수는 하어미 아래에 각각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의 표지는 원상으로 보이는데 훼손이 심한 상태이며, 표제는 후대에 ‘정토문(淨土文)’으로 묵서한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성종연간 불경 인출에 많이 사용된 상품 저지로 전면에 가는 발무늬가 드러나 보인다. 자체는 당대 능서자로 알려져 있는 성임의 글씨로 조선전기에 유행한 송설체로 보인다. 이 책은 본래 송성문이 소유했던 것으로 근래 국립중앙박물관에 일괄 기증한 전적문화재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의 권말에는 1474년에 김수온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문의 다음에 시주자 및 간역자(刊役者)의 이름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간행에 직접 참여했던 장인들의 역할과 이름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조선 전기 인쇄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참고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7
묘법연화경 권5~7(妙法蓮華經 卷五~七) / 조선 성종 19년(1488) / 3권1책 / 목판본/왕실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여러 번역 중, 요진(姚秦)시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7권 본을 사용하였다. 성종 원년(1470) 4월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예종이 일찍이 승하하자 먼저 세상을 떠난 세조ㆍ의경왕(덕종)의 명복을 아울러 빌기 위해 당대의 명필가에게 정문(正文)을 큰 자로 정성껏 필서(筆書)하게 하고, 또한 당대의 일류 각수(刻手)들을 총 동원하여 나누어서 지성껏 새기게 한 경판에서 뒤에 찍어낸 것이다. 권말에 첨부된 을해자(乙亥字) 인출 발문(跋文)에 의하면 후인(後印) 시기는 성종 19년(1488) 7월이며,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비(貞顯王妃)가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빌기 위해 14부 찍어낸 것 중 권 제5~7 잔존 1책이 전래된 것이다. 판각한 지 19년 뒤에 인출한 것임에도 정성껏 찍어내서 인쇄가 매우 정교하다. 또한 불복장(佛腹藏)에서 갓나온 것인 듯 책지에 오손 된 곳이 없이 깨끗하며 감색(紺色) 표지의 제첨(題簽)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성종 19년에 함께 봉안한 복장품에는 이 법화경 외에도 《첨법》ㆍ《지장경》각 14부를 비롯하여 태조대왕이 조성한 <원각회도(圓覺會圖)> 1탱, <석가수도상(釋迦修道像)> 1탱, <달마(達磨)>2탱, <미륵하생회(彌勒下生會)> 1탱, <관음(觀音)> 1탱을 각각 보수하고 또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 1탱, <시왕도(十王圖)> 1탱을 새로 그려 함께 넣었음이 알려지고 있다. 성종 원년판에서 초인 또는 후인한 것 가운데, 성종 1년에 찍은 것으로 여겨지는 권 제3~7 잔질(殘帙) 2책이 보물 제1147호(강태영 소장), 성종 5년(1474)에 궁중의 상의(尙儀) 조씨(曺氏)가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0부 찍은 것 중 권 제5~7 잔존 1책이 보물 제959호(기림사 소장), 동왕 13년(1482) 인수대비(仁粹大妃) 명숙공주(明淑公主)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부 찍은 것 중 권 제6ㆍ7 잔존 1책 2부가 보물 제 936호(호암미술관 소장), 그리고 인출년을 알 수 없으나 인쇄가 매우 정교한 권 제3ㆍ4 잔존 1책이 보물 제1164호(김민영 소장)와 보물 제1240호(통도사 소장)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38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 / 조선 선조 26년(1593)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부산시립박물관 / 부산 남구 / 낱장이 문서는 선조 26년(1593) 9월에 선조가 백성에게 내린 국문유서이다. 보물로 지정할 때의 명칭은 《선조국문교서》로 되어 있으나 교서의 서식을 따르지 않았고, 또 '시명지보(施命之宝)'를 찍지 않고 '유서지보(諭書之寶)'를 찍었으므로 유서(諭書)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문서를 공표할 당시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에 파천해 있었고, 왜군은 남하해 부산ㆍ동래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국문으로 유서를 내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백성을 회유해 돌아오도록 한 것이다. 이 유서는 총 12항으로 묵서되어 있으며, 세 곳에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찍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부득이 왜인에게 잡혀간 백성들의 죄는 묻지 않음은 물론,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동태를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된 우리 백성을 많이 데리고 나오면 양천(良賤)을 물론하고 벼슬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어 아군과 명군이 합세해 부산ㆍ동래 등지의 왜군을 소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왜국에 들어가 분탕하려는 계획도 알려주면서 그 전에 서로 알려 빨리 적진에서 나오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 국문유서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공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하던 통례와는 달리 국문으로 쓰여진 점에서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번역 해제】 (1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길어진 왜군의 병참선을 유린하였고 명나라 군대도 참전하여 평양과 한양의 회복에 힘을 보태었다. 이 글이 작성된 시기인 1593년 9월 선조 임금은 비록 의주에 파천해서 머무르고 있었지만 전쟁 상황은 점차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에 왜군의 주력은 부산과 동래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도 왜군의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도 있었다. 선조 임금은 이런 백성들에게 더 이상 왜군에게 협조하지 말고 왜군의 영역으로부터 나올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문서는 보물 제951호로 지정될 당시 『선조국문교서』로 명칭을 삼았으나 교서의 서식을 따르지 않은 점, 교서에 찍히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지 않고 ‘유서지보(諭書之寶)’를 찍은 점, 교서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백성들이 적진에서 빨리 나오기를 권유하는 내용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교서로 보기보다는 유서(諭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의 일면을 알 수 있는 1차 자료이며 또 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하던 시대에 한글로 작성되어, 자료를 통해서 16세기 당시의 한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국어사적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작성자 : 김성주 )출처 : 문화재청 -
475439
이광악 선무공신교서(李光岳 宣武功臣敎書) / 조선 선조 37년(1604) / 1첩 / 국왕문서/교령류 / 독립기념관 / 충남 천안시 / 첩장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선조 37년(1604) 10월에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錄勳)된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 1567-1608)에게 발급(發給)된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이다. 이 공신교서를 받은 이광악은 선조조(宣祖朝)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진지(鎭之)이며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영남의 요새인 진주성(晋州城)이 왜적의 공격을 받고 고립되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부상을 당한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고 진주성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선조 27년(1594) 가을에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부장으로 동래전투(東萊戰鬪)에 종군하였으며, 선조 31년(1598)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서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금산(錦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선조 37년(1604)에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로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37년(1604) 6월 갑진(25)일에 선무공신 18인을 녹훈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공신교서가 발급된 것은 선조 37년(1604)년 10월이었다다. 이 공신교서의 서두에 〈교 효충장의선무공신 가의대부 광남군 이광악 서(敎效忠仗義宣武功臣嘉義大夫廣南君李光岳書)〉라고 공신호(功臣號) · 품계 · 군호(君號)와 성명을 썼고, 이어 왕은 왜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한 때에 그가 세운 공로를 치하하고 상당한 특전과 상을 내리고 있다. 말미에는 등급별 선무공신의 명단과 이 교서를 발급한 시기인 ‘만력 삼십이년 시월 일(萬曆三十二年十月日)’이 기재되어 있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이 공신교서는 광주이씨 충장공 종가의 가전문서(家傳文書)로 현재 충장공의 여러 유물과 함께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62행 1축으로 작성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1면당 7행씩 안배하여 잘라서 10면으로 첩장(帖裝)함으로써 원래의 형태적인 면은 손상되었다. 재질(材質)은 명주(明紬)이고 광곽(匡郭)은 주사란(朱絲欄)이며, 서체(書體)는 해서(楷書)이다. 첩장면(帖裝面)의 크기는 세로 41.0㎝ 가로 22.3㎝이고 지문명(地文面)의 크기는 세로 34.0㎝ 가로 22.3㎝이며 권축장 형태의 원래 크기는 세로 34.0㎝ 가로 175.0㎝였던 듯하다. 이 공신교서는 선조시대 공신과 공신교서의 연구에는 물론 선조조(宣祖朝)의 공신에 대한 포상(褒賞)과 은전(恩典)의 내용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 해제 】 (1첩) 이 문서는 만력(萬曆) 32년 곧 선조 37년(1604) 10월에, 국왕이 임진왜란 때 특히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인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에게 내린 공신 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이다. 이 녹훈교서는 ‘교 효충 장의 선무공신 …… 이광악 서(敎効忠仗義宣武功臣 …… 李光岳書)’란 제목 아래에 대개 5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 ① 공신의 공적 사례로 이광악의 뛰어난 자질과 무용, 역관(歷官)을 서술하고, 이어서 이광악이 임란 때 얼마 되지 않은 군사로써 백만의 왜군을 격퇴한 무공(武功)을 찬양하고 있다. ② 공신의 특전으로서, 선무공신 3등인 이광악에게 내려지는 특전 및 상사(賞賜)를 적고 있는데, 이광악은 1계급 승진하고 부모ㆍ처자도 1계급 승진하며, 적장자(嫡長子)는 세습(世襲)하고 자손에게 면죄시키는 이외에 반당(伴倘) 4인, 노비 7구(口), 구사(丘史) 2명, 전지 60결(結), 은자 5냥,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상사(賞賜)하고 있다. ③ 공신과의 서맹(誓盟)으로, 공적을 태상(太常:깃발)에 기록하고 공신녹권을 내려 은전을 베푸니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여 총애 가득한 이 왕명을 보전하도록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④ 공신의 명단으로 1등에 이순신(李舜臣) 등 3인, 2등에 신점(申點) 등 5인, 3등에 정기원(鄭期遠) 등 10인을 적고 있는데, 이광악은 3등 5번째에 기록되었다. ⑤ 사실 증명으로 ‘만력(萬曆) 32년 10월’이라 하여 녹훈교서 발급 연월을 적고 그 위에 새보(璽寶)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평정(平定)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선무(宣武)ㆍ호종(扈從)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당시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에게는 선무공신으로,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는 데에 유공한 자에게는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록(策錄)하였다. 이 녹훈교서는 조선조 공신 연구 및 임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이광악의 전기 자료이기도 하다. (작성자 : 이정섭)출처 : 문화재청 -
475440
조숭 고신왕지(趙崇 告身王旨) / 조선 태조 5년(1396)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조선 태조 5년(1396) 3월 15일에 태조가 가정대부 상의 중추원사 도평의사사사(嘉靖大夫商議中樞院事 都評議使司使)인조숭(趙崇)을 의주등처의 도병마사 지안무영전사 판의주목사(義州等處 都兵馬使 知安撫營田事 判義州牧事)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사령장이다. 태조는 서북면을 중요시하여 중추원의 관리 8명으로 하여금 서북면의 수령을 겸직하도록 하였는데 『태조실록(太祖實錄)』의 같은 날 기록에 의하면 김노(金輅)는 이성(泥城), 임경(林敬)은 강계(江界), 조숭은 의주, 박포(朴苞)는 황주(黃州), 장담(張湛)은 정주(定州), 황거정(黃居正)은 숙주(肅州), 남실(南實)은 성주(成州), 오몽을(吳蒙乙)은 연산(延山)의 수령을 각각 겸직하도록 명령하였다. 조숭에게 내린 왕지를 살펴보면 총 6항(行)으로 이루어 졌으며 초서(草書)로 작성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를 대개 초서체로 작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숭의 본관(本貫)은 풍양(豊壤)이고 고려시대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右副代言)을 역임한 조염휘(趙炎暉)의 손자이며, 호군(護軍)을 지낸 조사충(趙思忠)의 아들이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태조 5년에 가정대부로서 상의중추원사와 도평의사사사를 역임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조선건국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의 생몰년대(生沒年代)나 관력(官歷) 등과 같은 기초적인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왕지는 태조 2년(1393)에 도응(都膺)에게 발급(發給)된 것(보물 제724호)을 비롯하여 김회련(金懷鍊, 보물 제438호), 양이시(楊以時, 보물 제725호), 전흥(田興, 보물 제727호), 성석린(成石璘, 보물 제746호), 조흡(曺恰, 보물 제897∼899호) 등에게 발급된 것 등이 전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1
조서경 무과홍패(趙瑞卿 武科紅牌) / 조선 세종 17년(1435)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세종 17년(1435) 4월에 조서경(趙瑞卿)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받은 합격증서로 일명 홍패(紅牌)라고도 한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기 이전에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수의부위 우군부사정(修義副尉 右軍副司正)을 역임하였다. 수위부위는 서반(西班) 종 8품 품계이며 부사정은 종 7품 관직명이다. 이 왕지(王旨)를 통하여 세종 17년 무렵에는 행수법(行守法)이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행수법이란 조선시대 품계(品階)와 관직(官職)이 일치하지 않은 관원에게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행(行)’, 관직이 품계보다 높은 경우를 ‘수(守)’라 하는 관직명 앞에 붙이는 제도이다. 품계와 관직을 일치시키는 것을 대품(對品)이라고 했는데, 품계는 모든 관리들에게 주어졌으나 관직은 제한되어 있었으며 또 관리들의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관직을 제수할 때 품계와 관직을 모두 일치시킨다는 것은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행된 제도가 바로 행수법이었다. 조선시대에서는 세종 24년(1442)부터 행수법을 시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 과정에서 양산된 고질훈로(高秩勳老)들이 세종대에 이르면 대부분 사망하고 순자법(循資法)의 실시로 새로운 고질자(高秩者)가 쉽게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법(守法)이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수직(守職)을 제수할 때 몇 등급씩 격등수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다시 고질자가 많이 나타나 성종대에는 당상관이 8, 9품 군직(軍職)을 행직(行職)으로 받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7품 이하는 2계, 6품 이상은 3계 이상을 수직으로 올려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홍패 왕지는 조선 초기 관제(官制)와 과거제도(科擧制度) 등을 연구하는데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2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1.상지은니대반야경(권210)(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大般若經 卷二百十)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경전은 감지에 은니(銀泥)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으로 당나라 현장(玄奘)이 한역한 600권 가운데 제210, 259, 561권이다. 줄여서 반야경(般若經)으로 부르는데 이 반야경은 반야부의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사경은 권 머리에 함차표시(函次表示)가 추(秋, 권210), 여(餘, 권259), 과(果, 권561)등으로 표시되어 있어 대장경(大藏經)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품격(品格)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은자사경원(銀字寫經院)에서 제작된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으로 추정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3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2.감지은니대반야경(권259)(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大般若經 卷二百五十九)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경전은 감지에 은니(銀泥)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으로 당나라 현장(玄奘)이 한역한 600권 가운데 제210, 259, 561권이다. 줄여서 반야경(般若經)으로 부르는데 이 반야경은 반야부의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사경은 권 머리에 함차표시(函次表示)가 추(秋, 권210), 여(餘, 권259), 과(果, 권561)등으로 표시되어 있어 대장경(大藏經)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품격(品格)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은자사경원(銀字寫經院)에서 제작된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으로 추정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4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3.상지은니대반야경(권561)(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大般若經 卷五百六十一)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경전은 감지에 은니(銀泥)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으로 당나라 현장(玄奘)이 한역한 600권 가운데 제210, 259, 561권이다. 줄여서 반야경(般若經)으로 부르는데 이 반야경은 반야부의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사경은 권 머리에 함차표시(函次表示)가 추(秋, 권210), 여(餘, 권259), 과(果, 권561)등으로 표시되어 있어 대장경(大藏經)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품격(品格)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은자사경원(銀字寫經院)에서 제작된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으로 추정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5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4.상지은니방광반야바라밀경(권12)(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放光般若波羅蜜經 卷一十二)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상지은니방광반야바라밀경(橡紙銀泥放光般若波羅蜜經)》은 서진의 무라차(無羅叉)의 한역(漢譯)으로 현장(玄奘)이 한역(漢譯)한 대반야경의 제401~478권의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 사경은 상지에 은니(銀泥)로 쓴 것으로 전체 20권 가운데 제12권이다. 고려 공민왕 년간(1351~1374)에 제작된 은자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 조선 세조 10년(1464) / 2첩 / 사찰문서/기문류 / 박옥생 / 강원 평창군 / 절첩장조선 세조의 왕사(王師)인 혜각존자 신미(慧覺尊者 信眉) 등이 학열(學悅)ㆍ학조(學祖) 등과 함께 왕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하여 상원사를 중창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세조가 채색ㆍ쌀ㆍ무명ㆍ베와 철재(鐵材)를 보내면서 그 취지를 쓴 글과, 그리고 왕의 하사품을 받고 신미 등이 쓴 글이다. 2첩으로 되어 있는데 한 첩은 한문의 원문으로만 쓰고,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ㆍ학열ㆍ학조 등의 수결, 세조가 쓴 글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기(印記), 이어 효녕대군(孝寧大君) 이하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있다. 다른 한 첩은 권선문을 한문으로 쓴 다음에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을 붙이고, 뒤에 세조와 세자의 수결과 인기, 왕비ㆍ세자빈ㆍ공주 및 외명부(外命婦)의 기명(記名)과 인기가 있다. 글이 쓰여진 시기는 신미 등의 권선문 끝에 「천순팔년랍월십팔일(天順八年臘月十八日)」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세조 10년(1464) 12월이다. 표지는 붉은 바탕에 당초문(唐草文)이 들어있는 비단으로 쌌으며, 어첩(御牒)이라 묵서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조선조 왕실에서 사찰의 중창을 위해 보조한 기록으로서 귀중할 뿐 아니라, 또한 당시의 학승(學僧)으로 유명했던 신미ㆍ학열ㆍ학조와 세조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더욱 중요하다. 또한 여기에 한글로 된 기록은 훈민정음을 제정한 이후에 판각이나 활자로 발행된 한글문헌은 많이 있으나 직접 묵서(墨書)한 것으로는 이것이 가장 오래된 진적(眞蹟)이므로 초기의 한글 서체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96년 11월 28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292호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 번역 해제 】 (1첩) 이 어첩(御牒)은 1464년(세조10년) 12월 18일에 한문 문장으로 쓴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과 권선문의 언해(諺解) 1편 및 제목 미상(題目未詳)의 한문 문장과 그 문장의 언해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임금인 세조의 수결(手決)과 어인(御印), 자성 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의 왕비인(王妃印), 보시 명세(布施明細)가 적혀 있고, 이어서 세자(世子)의 수결과 세자인(世子印), 정빈 한씨 인(貞嬪韓氏印), 진의 공주(眞懿公主) 이씨 인(李氏印), 의숙 공주(懿淑公主) 이씨 인(李氏印), 예성 부부인(蘂城府夫人) 정씨(鄭氏), 제안 부부인(齊安府夫人) 최씨 인(崔氏印),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 대방 부부인(帶方府夫人) 송씨 인(宋氏印),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 인(金氏印), 최씨, 정씨, 박씨(朴氏), 이씨, 정부인(貞夫人) 심씨 인(沈氏印), 전씨(全氏), 정경부인 고씨 인(高氏印)이 찍혀 있는 필사본(筆寫本)이다.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에는, 당시의 선승(禪僧)인 신미(信眉) 등이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세조의 은덕을 갚고자 상원사를 중창하여 세조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곳으로 삼으려고 한 것과, 이러한 계획(計劃) 하에 많은 사람의 동참을 권면하던 차에 이 사실이 세조와 왕비 윤씨에게까지 알려진 것과, 이에 세조가 어의(御衣) 몇 벌을 내놓고 또 쌀 5백 석(石)ㆍ면포 5백 필(匹)ㆍ정포 5백 필ㆍ정철 1만 5천 근(斤)을 내려주는 큰 보시(布施)가 있게 되어 불교의 중흥을 기약하게 된 것과, 이것을 많은 시주(施主)들이 보고 듣고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보리심(菩提心)을 내고 덕본(德本)을 심어 위로는 임금의 무궁한 장수를 축원하고 아래로는 만세토록 국운의 흥성과 한량없는 복리(福利)가 현세와 내세에 이익이 되기를 바란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제목 미상의 문장은 구성 내용으로 보아 세조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세조가 대군(大君) 시절부터 선승인 신미 선사(禪師)와 친하게 지내면서 취향(趣向)이 같고 마음이 통하여 자신을 잡아주고 일으켜 준 점과, 오늘이 있기까지의 공(功)을 신미에게 돌리며 그에 대한 극진한 경의(敬意)와 세조의 병환에 수백 리 밖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그의 정성(精誠)에 대한 감동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선사가 학열(學悅)ㆍ학조(學祖) 두 선사와 함께 세조 자신을 위해 절을 중창한다는 말을 듣고, 선사가 세조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세조가 선사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이 기술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끝으로, 선사 등을 위해 세조 자신이 상원사 중창에 조금의 보조(補助)를 한 것이야말로 최고의 바른 씨앗이 된다고 하면서, 길이 후세 자손에게 전하도록 세자에게 의뢰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어첩은 조선 초기 불교사 연구와 훈민정음 유통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작성자 : 조명근 ) (2첩) 세조 10년(1464)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학열(學悅) · 학조(學祖)와 함께 세조를 위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창할 때의 권선문(勸善文) 및 이에 부속되는 세조의 어서를 첩장(帖裝)한 것이다. 신미의 권선문에는 세조가 펼친 통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여 복을 비는 곳으로 삼으려는데 세조와 왕비가 이 소식을 듣고 옷과 쌀, 포목 및 중창에 소용되는 물품들을 보시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세조의 어서에는 혜각존자와 일찍이 지우(知遇)하여 항상 자기로 하여금 맑은 마음을 품게 하고 욕망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게 했는데, 근간 자기의 건강이 좋지 않자 수 백리 바깥에서 밤낮으로 달려 온 대비심(大悲心)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또한 자기를 위해 절을 중창한다는 말을 듣고 그 비용을 조금 희사했다 했으며, 세자에게 분부하여 길이 후사(後嗣)에게 전하라 했다. 어서의 뒤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 · 임영대군(臨瀛大君) · 영응대군(永膺大君)과 조선 초기의 여러 공신들 및 전국의 지방관, 특히 경상도 일원 지방관들의 관직명과 수결(手決)이 열서(列書)되어 있다. ( 작성자 : 이동환 )출처 : 문화재청 -
475447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5.상지은니불설대방광십윤경(권5)(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佛說大方廣十輪經 卷五)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상지은니불설대방광십륜경(橡紙銀泥佛說大方廣十輪經)》은 북량대의 실역(失譯)으로 방광십륜경(方廣十輪經), 십륜경(十輪經) 등으로 불리어 진다. 이 경은 지장보살의 공덕과 신통력을 찬탄하고 믿고 받들면 모든 소원을 성취하고 악세의 중생이나 파계(破戒)한 비구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 년간(1351~1374)에 제작된 은자대장경의 하나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8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6.자지은니등집중덕삼매경(권하)(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紫紙銀泥等集衆德三昧經 卷下) / 고려 충목왕 4년(1348)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자지은니등집중덕삼매경(紫紙銀泥等集衆德三昧經 )》은 서진의 축법호(竺法護)가 한역(漢譯)한 3권 가운데 제 하권으로 자색지(紫色紙)에 은니로 쓴 고려 공민왕년간(1351~1374)에 제작된 사경이다. 등집경(等集經), 등집중덕경(等集衆德經)으로도 불리는 삼매의 공덕을 시작으로 육도, 보살행 등에 대해서 설한 경전으로 집일체복덕삼매경과 내용이 같다. 고려 공민왕 년간(1351~1374)에 제작된 은자대장경의 하나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49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7.백지금니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白紙金泥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 고려 공민왕 19년 (1370)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백지은니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白紙金泥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은 당나라 불타파리가 한역(漢譯)한 것으로 공민왕 19년(1370)경에 백지에 금니로 쓴 것이다. 이 경전은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사로잡혀 악업을 짓고 그 악업의 보로 인하여 온갖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이 이 경전을 독송(讀誦)하고 자기가 지은 죄를 참회하면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자기가 원하는 일이 성취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 사경은 공민왕 19년(1370)경에 여러 사람의 시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475450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1-9.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권25)(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 - 橡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 卷二十五) / 고려 말기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기림사 / 경북 경주시 / 절첩장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橡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은 동진의 불태발타라가 한역한 경전으로 무한한 시공을 초월한 부처님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것과 같이 대방광불의 세계를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경전이다. 사성기가 없어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표지의 문양과 본문 글씨 등을 보면 고려말기의 사경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