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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5651

    이 사경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이 번역한 범망경 상하 2권을 조선 초기에 백지에 먹으로 쓴 1권의 사경이다. 이 경전은 보살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말씨와 마음자세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덕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라시대부터 한국불교 종단의 조직 및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사경은 권말에 화주(化主)와 시주자(施主者) 이름이 보이지만, 사성기가 없어 정확한 사성시기를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뒷 표지의 장식과 본문글씨로 보아 조선 초기의 사경으로 추정되며, 달필로 정성껏 만든 사경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2

    이 경전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이 번역한 7권을 명나라 초기에 얇은 종이에 한 책으로 제본한 것이다. 그 내용은 사람이 번뇌에 젖어 본래의 착한 본성이 더렵혀졌다고 하더라도 그 착한 본성을 되찾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간행된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것이 아니라서 확실한 간행 년대는 알 수 없으나 명나라 초기의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3

    이 금강경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을 고려 고종 15년(1228)에 목판에 새기고 고려 말에 찍은 것이다. 금강경은 금강석과 같은 지혜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경이라는 뜻이며,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번뇌와 편견의 근본이 되는 애착을 없애야 하고 깨닫게 하는 교리자체에 대한 애착도 버려야 하고 심지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경은 우리나라 조계종을 비롯하여 각 종단의 근본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소자 금강경은 낱장으로 모두 5장에 경문을 수록한 것이나 둘째장이 없어졌다. 마지막장(제5장) 말미에 조계산 수선사 제2세 국사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 1178~1234)의 발문이 실려 있으며, 고려 고종 15년(1228)에 새기고 고려 말에 찍은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4

    이 책은 고려 고종 15년(1228)에 목판에 새기고 고려 말에 찍은 낱장 5장이다. 총지란 다라니로 음역되는데, 한량없는 뜻을 포함하여 잃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란 뜻이다. 범총지집(梵摠持集)은 범어로 된 다라니집이라는 뜻이다. 이 범총지집 낱장은 금강경 권말의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의 발문에 보이는 범자대장신주(梵字大藏神呪)로 보이며 금강경과 함께 1228년에 새기고, 고려 말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5

    이 다라니경은고려 고종 연간(1213~1259) 사이에 목판에 새기고 고려 말에 찍은 낱장 3장이다. 다라니란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가지는 것이란 뜻이다. 이 낱장의 다라니경은 권말 2행의 간행기록에 “청하상국(淸河相國)"이 있는데 청하상국은 고려 고종 때 권신(權臣) 최우(崔瑀)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최우의 추종자가 최우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소자 금강반야바라밀경이나 범총지집과 간행 조건이 같은 것으로 보아 고려 고종 때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6

    오희문 쇄미록(吳希文 瑣尾錄) / 조선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 7책 / 필사본/일기류 / 국립진주박물관 / 경남 진주시 / 선장
    『쇄미록(瑣尾錄)』은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임진왜란 당시 전란(戰亂)을 직접 체험하면서 쓴 일기로서 선조 24년(1591) 11월부터 선조 34년(1601)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기록으로 7책이다. 오희문의 자는 비연(斐然), 본관은 해주, 음직(蔭職)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 監役)을 지냈다. 그의 아들 오윤겸(吳允謙)은 인조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 오달제(吳達濟)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청(淸)나라에 끌려가 절사(節死)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쇄미록』은 오희문이 지방에 있는 친척방문과 노비관리 및 신공수취(身貢收取)를 위해 1591년 11월 27일에 서울을 떠나 충청·전라지방을 순회하다가 다음해 4월 장수현에서 임진왜란 발발소식을 듣고 귀가하지 못한 채 3개월간 산중에 들어가 피난하고, 그 후 강원도로 피난했던 가족을 만나 홍주·임천·평강 등지로 전전하면서 기록한 일기이다. 책이름을 『쇄미록』이라고 한 것은 『시전(詩傳)』의 패풍(邶風) 모구장(旄丘章)"쇄혜미혜(瑣兮尾兮) 유리 지자(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유이기(流離記), 곧 피난록이란 뜻이다. 이 일기는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며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7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권13~14(大乘阿毗達磨雜集論䟽 卷十三~十四) / 조선 세조 7년(1461) / 2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송광사성보박물관 / 전남 순천시 / 선장
    이 책은 ‘아비달마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을 해석한 책으로, 대봉선사사문 현범(大奉先寺沙門 玄範)이 지은 것이다. 현범은 신라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권3 잡집로부(雜集論部)에 소(疏)16권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권13ㆍ14의 2권만이 현존하고 있다. 이는 고려 대각 국사 의천(義天)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송, 거란, 일본 등의 대장경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대성한 교장(敎藏)으로서 조선조 세조 임금 때인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 보물205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권13〜14 1.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관련 문헌 1)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대승아비달마집론』(이하 『집론』)은 무착의 저작이다. 『집론』은 미륵의 저작인 『유가사지론』에서 기술한 유식 이론을 대승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지만, 그 방법은 아비달마적 요소를 채택하여 요약,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집론’ 앞에 ‘대승아비달마’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가사지론』은 한역 100권[〈본지분(本地分)〉ㆍ〈섭결택분(攝決擇分)〉ㆍ〈섭석분(攝釋分)〉ㆍ〈섭이문분(攝異門分)〉ㆍ〈섭사분(攝事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집론』에서는 〈본지분〉과 〈섭결택분〉의 사상을 계승하여 ‘본사분’과 ‘결택분’의 2분으로 나누고, 각각 4품으로 나누어 해설한다. 현재 『집론』의 기본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역은 <大乘阿毘達磨集論(7卷), 無著菩薩造 唐 玄奘譯(T31)>으로, 현장이 645년 안혜의 주석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이하 『잡집론(雜集論)』)을 한역한 이후, 6년 후인 652년에 『집론』을 한역하였다. 범본은 ‘abhidharma-samuccaya’으로 현재 단편으로만 남아있다. 1934년 산크리트야야나(R. Sānkṛtyāyana) 박사가 티베트 ṣa lu 사원에서 11세기 전반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패엽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을 V. V. Gokhale 박사와 P. Pradhan 박사가 각각 교정, 출판하였다. 티베트 역으로는 ‘chos mṅon pa kun las btus pa(abhidharma-samuccaya)’이 있으며, 역자는 승우(勝友, Jinamitra), 계주각(戒主覺, Śilendrabodhi), 에세데(Ye śes sde)이다. 2)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잡집론』은 『잡론』에 대한 안혜의 주석서이다. 그런데 규기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술기(大乘阿毘達磨雜集論述記)』와 『성유식론료의등(成唯識論了義燈)』에 따르면, 『집론』에 대한 주석서인 『집론석』을 무착의 제자인 사자각(師子覺)이 남겼는데, 안혜가 『집론』과 사자각의 주석서를 합본하여 편찬한 것이 『잡집론』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반면 티베트 전승에서는 『집론석』과 『집론』ㆍ『집론석』의 합본 모두 최승자(最勝子, Jinaputra)의 저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역과 티베트 전승 사이에 차이가 있다. 현재 『잡집론』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범본은 N. Tatia의 교정본이 있다. 한역은 <大乘阿毘達磨雜集論(16卷), 安慧菩薩糅, 唐 玄奘譯(T31)>이 있는데, ‘안혜 보살 유(糅)’라고 하므로 여러 논서를 합유(合糅)하여 주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잡집론』에 대한 규기의 주석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술기(大乘阿毘達磨雜集論述記)』 10권이 현존한다. 이것을 <잡집론초(雜集論秒)>, <대법초(大法秒)>라는 다른 명칭이 있다고 일본 문헌[永超錄註]에는 전한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술기』는 현재 속장경(1, 75, 4-5)에 수록되어 있다. 티베트 역 교정본으로는 abhidharma-samuccaya, Asaṇga, Tibetan Text vol.1-5(大谷大學校佛敎硏究室)이 있다. 2.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1) 현범(玄範) 술(述)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16권(이하 『잡집론소』) 일본의 여러 문헌[平祚錄, 法相法門錄, 永超錄, 藏俊錄, 興隆錄 등]에서는 현범의 『잡집론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6권 또는 14권, 10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16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유식학자인 레이몬 유이키(結城令聞)는, 『유식학전적지(唯識學典籍志)』에서 일본의 문헌 기록에 따라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현궤소(玄軌疏) 16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인이 필사과정에서 ‘현범’을 ‘현궤’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산실되었지만, 원효(元曉)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5권과 지인(智仁)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5권, 승장(勝莊)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12권, 태현(太賢)의 『고적기(古跡記)』, 신배(信培)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술기관련편(大乘阿毗達磨雜集論述記貫練編)』, 작자미상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의장(大乘阿毘達磨雜集論義章)』 2권, 『대승아비달마잡집결문(大乘阿毘達磨雜集論決問)』 3권, 『대승아비달마잡집론료간(大乘阿毘達磨雜集論了簡)』 1권 등이 있다. 2) 현범(玄範) 술(述)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의 내용 현범의 『잡집론소』 전체 권수는 16권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것은 결택분(決擇分)중에서 법품 13권, 득품 14권뿐이다. ①법품 〈법품(法品)〉에서는 법을 정의하기를 ‘궤지(軌持)’라고 한다. 궤란 사물에 대한 이해를 생기게 하는 것이고, 지란 주지(住持, 독자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 하여 법상종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법을 해석한다. 그리고 법을 12분교(十二分教), 즉 계경(契經)ㆍ응송(應頌)ㆍ기별(記別)ㆍ풍송(諷頌)ㆍ자설(自說)ㆍ연기(緣起)ㆍ비유(譬喩)ㆍ본사(本事)ㆍ본생(本生)ㆍ방광(方廣)ㆍ희법(希法)ㆍ논의(論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2분교를 주석하고서, 12분교를 수다라장[경장], 비나야장[율장], 아비달마장[논장]의 삼장 및 계ㆍ정ㆍ혜의 삼학(三學)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또한 12분교는 보살장(菩薩藏)과 성문장(聲聞藏)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불교의 여러 교리를 주석하고 있는데, 사심사(四尋思), 소연(所緣), 진소유성(盡所有性)과 여소유성(如所有性), 4가지 법이(法爾) 등이다. 결택분(決擇分) 중 법품(法品) 제2-2[잡집론(雜集論) 권12]에서는 ‘수(修)’의 다양한 종류 중에서 ‘의지방편수(依止方便修)에 대해서만 자세히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18의 임지와 6바라밀의 관계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집론』과 『잡집론』에서 제시한 28가지 잘못된 견해[見]인 상견 등 및 삼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삼무자성[상무성, 생무성, 승의자성], 지관(止觀)에 대해 자세하게 주석하고 있다. ②〈득품(得品)〉: 결택분(決擇分) 중 득품(得品) 제 3-1[잡집론(雜集論) 권제 13] 먼저 득은 증득이고, 또 체입(體入)과 회증(㑹證)의 다른 이름이다. 범부와 성인 등의 가립된 것[假者]이 능득이고, 범성의 법체(法體)가 소득이라고 정의한다. 득품에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와 현관(現觀)을 설명한다. 먼저 보특가라의 건립은 7종류로 나눈다. 보특가라의 7종류는 병행차별(病行差別), 출리차별(出離差別), 임지차별(任持差別), 방편차별(方便差別), 과차별(果差別), 계차별(界差別), 수행차별(修行差別)이다. 그리고 7가지 차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현관은 10종류로 나눈다. “십현관(十現觀)에서 최초의 7개는 법의 입장이며, 나머지 3개는 사람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한다. 법현관(法現觀)이란 “교법을 대상 즉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의현관(義現觀)에 대해 “법현관은 교법에 의하지만, 지금은 표현되는 고(苦)ㆍ무아(無我) 등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는 법(法)이고 지금은 의(義)이다.”라고 주석한다. 진현관(眞現觀)이란 견도위에서 일어난다고 하였고, 후현관(後現觀)은 수도위에서 일어난다고 주석한다. 즉 후현관은 “수도위의 모든 유루와 무루도와 유분별, 무분별을 말한다. 앞의 견도에 비해서 후현이라고 이름하니, 진현관을 전현관이라고 이름함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보현관(寶現觀)이란 삼보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낳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불행현관(不行現觀)에 대해 “성인이 견도 뒤의 수도위에서 무루의 성계를 증득했음을 스스로 알고, 또 더이상 악취에 태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 그러므로 이 현관은 해로부터 이름을 세워서 불행이라고 한 것이다. 앞의 보현관은 믿음이라는 소연의 입장이라면, 여기서는 불행의 입장이다. 즉 악취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행해를 일으킨 것이다. 불행이란 능연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구경현관(究竟現觀)ㆍ성문현관(聲聞現觀)ㆍ독각현관(獨覺現觀)ㆍ보살현관(菩薩現觀)에 대해서는 주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문현관과 보살현관에 11종의 차별이 있다고 하는데, 경계차별(境界差別)ㆍ임지차별(任持差別)ㆍ통달차별(通達差別)ㆍ서원차별(誓願差別)ㆍ출리차별(出離差別)ㆍ섭수차별(攝受差別)ㆍ건립차별(建立差別)ㆍ권속차별(眷屬差別)ㆍ승생차별(勝生差別)ㆍ생차별(生差別)ㆍ과차별(果差別)이다. 경계차별ㆍ임지차별ㆍ통달차별은 견도위이며, 서원차별에서 생차별은 수도위라고 주석한다. 서원차별은 자신과 타인이 같은 몸임을 깨달았으므로 타인을 자신처럼 포섭하는 것이다. 출리차별은 극희지 등에 의해 출리를 얻은 것이다. 승생차별이란 법공의 이치를 증득했으므로 ‘법공의 이치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생차별이란 색신이 시방찰토의 타수용신의 모임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그리고 과차별을 10개로 나누어 주석한다. 예를 들어 “업차별이란 화신의 업용이 많지만 오직 업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고, “열반차별이란 무여열반의 입장이므로 소승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섭수차별과는 같지 않은데, 섭수차별은 인위의 입장이고 열반차별은 과위의 입장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후현관(後現觀)과 구경현관(究竟現觀)은 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무애해(無礙解)ㆍ신통(神通)ㆍ상수현청정(相隨顯淸淨)ㆍ역(力)ㆍ무외(無畏)ㆍ염주(念住)ㆍ불호(不護)ㆍ무망실법(無忘失法)ㆍ영단습기(永斷習氣)ㆍ대비(大悲)ㆍ18불공불법(不共佛法)ㆍ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로 나눈다. 무량은 4무량, 8가지 해탈(내무상수멸해탈 등), 8가지 승처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잡집론』에서 자세하게 주석하고 있는 10종의 허망 분별[근본분별(根本分別), 상분별(相分別)ㆍ상현현분별(相顯現分別)ㆍ상변이분별(相變異分別)ㆍ상현현변이분별(相顯現變異分別)ㆍ타인분별(他引分別)ㆍ불여리분별(不如理分別)ㆍ여리분별(如理分別)ㆍ집착분별(執箚分別)ㆍ산란분별(散亂分別)]에 대해서는 주석을 생략하고 있다. 3. 간행 경위 본 문헌은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권13과 14가 남아있다. 현재 보물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계 유일본이다. 따라서 대단히 귀중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 간본이 간행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송ㆍ요ㆍ일본 등에서 불교경전의 논소(論疏)들을 수집하여 1092년~1102년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간행하였는데, 이때 간행된 경전을 보통 ‘교장(敎藏)’이라고 부른다. 또 의천은 수집한 논소들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다. 그런데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雜集論 疏十六卷 玄範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잡집론소』가 의천이 간행한 교장의 초간본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본 간본의 말미에는 ‘大安九年癸酉歲 高麗國 大興王寺 奉宣彫造 ’라는 원간기가 적혀있는데, 대안 9년은 1093년이고 흥왕사는 교장의 초간본을 간행한 곳이므로, 본 간본이 교장본임을 알 수 있다. 본 간본에는 비록 중수기록은 없지만, 서체ㆍ판각기술ㆍ지질 등의 특징에서 볼 때, 교장의 초간본을 중수(重修)하여 조선 세조(世祖)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된 복각본이라고 추측된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많이 간행하였는데,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경전 가운데는 의천의 교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본 간본은 아마도 이때 중수되어 간행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간행된 본 간본은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다가, 1925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朴奉石 〈義天續藏の現存本に就て〉, 朝鮮之圖書館 3권6호, 1934). 4. 서지 사항 상하단변(上下單邊), 전곽(全郭) 24.3cm×57.6cm, 무계(無界), 전엽(全葉) 30행(行) 22자(字); 33.5cm×36.8cm 5. 의의 안혜의 『잡집론』에 대한 주석은 동북아시아에서 다수 이루어졌다. 이것은 『잡집론』이 유식에서 중요한 문헌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잡집론』에 대한 주석서로 가장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규기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술기(大乘阿毘達磨雜集論述記)』 10권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유식사상이 전해진 이후, 특히 신라시대에서 『잡집론』에 대해 주석한 학승이 많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원효(元曉)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지인(智仁)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승장(勝莊)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태현(太賢)의 『고적기(古跡記)』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문헌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범의 『잡집론소』 전체 권수는 16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존하는 것은 결택분(決擇分)중에서 법품 13권, 득품 14권뿐이다. 그러나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현존하는 주석서로는 현범의 『잡집론소』가 유일하다. 이런 이유에서 주석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헌적인 가치가 상당한 것이다. 특히 법품은 12분교 및 중요한 불교 교리를 『유가사지론』과 『현양성교론』에서의 근거를 들어가면서 주석하고 있어, 초기유식사상을 이해하는데 유익한 자료이다. 또한 득품에서는 견도위와 수도위 등의 깨달음의 과정과 단계[유식의 수행론]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어, 유식의 수행론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한반도에 유식사상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현범의 『잡집론소』는 신라인의 고도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작성 : 김명우 )
    출처 : 문화재청
  • 475658

    감지은니미륵삼부경(紺紙銀泥彌勒三部經) / 고려 충숙왕 2년(1315) / 3권 1첩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미륵삼부경(《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유송(劉宋) 저거(沮渠) 경성(京聲) 역,《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 서진(西晉) 축법호(竺法護) 역》《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을 감지에 은니로 차례로 필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미륵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남섬부주(南贍部洲)로 내려와서 성불할 때까지의 모든 공덕을 다룬 것이다. 이 사경에서 역자(譯者)를 모두 유송시대의 저거 경성으로 한 것은 잘못 쓴 것이며, 삼부경(三部經)에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대신 《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으로 한 것은 당시 이 경을 더 선호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사경의 권말에 붙인 사성기(寫成記)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2년(1315) 5월 시주(施主) 신인(信因)이 국왕의 보위(寶位), 국가의 태평, 국민의 평안, 불법(佛法)의 보급을 기원하고, 돌아가신 부모와 권속들이 극락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자신도 선글이 증장하여 세세 생생기 수승한 인연이 없어지지 않아 미륵의 하생을 만나 불법을 듣고 도를 깨쳐 중생을 구원할 것을 기원하면서 산인(山人) 즉휴(卽休)의 손을 빌려 삼가 필사하여 유통시킨다고 적고 있다. 이 사경은 변상도(變相圖, 불경의 내용이나 교리ㆍ부처의 생애 따위를 그린 그림) 없이 금니(金泥) 상하단변의 21.2cm 사이에 무계(無界)로 30항 15~16자를 한 장에 필사한 다음, 한 면에 6항이 되도록 접어 절첩장(折帖裝)으로 하였다. 앞ㆍ뒤 표지를 떼고 불복(佛腹)에 넣은 것이 나온 듯 근래에 표지를 새로 하였다. 이 미륵삼부경 사경은 사성기가 있는 은니사경으로 귀중할 뿐 아니라, 미륵을 미래 구원불(救援佛)로 상징하며 신봉해 온 고려의 미륵사상을 연구하는 데에도 소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59

    감지금니미륵하생경(紺紙金泥彌勒下生經) / 고려시대(14세기)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미륵하생경은 미륵이 미래불(未來佛)로 도솔천(兜率天)에서 하생(下生)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佛國土)를 이룬다는 내용을 다룬 것으로, 이 사경(寫經)은 감지에 금니로 썼다. 역자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서진(西晉) 시대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것이다. 이 사경은 앞ㆍ뒤 표지를 떼고 불복(佛腹)에 넣은 것이 나온 것인 듯 근래에 감색지(紺色紙)로 새로 표장(表裝)하였다. 앞 표지에는 금니 자모쌍선(子母雙線) 안에 경전 이름을 금니로 썼으나 만든 품이 조졸하며, 변상도(變相圖, 불경의 내용이나 교리ㆍ부처의 생애 따위를 그린 그림)와 사성기(寫成記)가 생략된 것이 아쉽다. 사경지(寫經紙)는 잘 뜬 닥종이를 진한 감색(紺色)으로 염색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본문의 글자는 금니가 진하여 황금색으로 빛나고, 글자체는 자못 해정(楷正)하며 필력이 예리하다. 이렇듯 이 사경은 사성기가 없지만 변상도와 장식한 표지, 사경지를 만든 솜씨, 글씨의 서법(書法), 필사(筆寫)의 정성도, 금니의 선명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사경의 품격을 제대로 갖추고 있음이 감식된다. 그 사성 시기는 14세기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의 미륵신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0

    상지은니불설보우경 권2(橡紙銀泥佛說寶雨經 卷二) / 고려시대(14세기 중기)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불설보우경(당(唐) 달마유지(達摩流支) 한역(漢譯))은 부처님이 가야산(伽倻山)에서 정수리 광명을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비추어 일광천자(日光天子)에게 중국의 여왕이 될 것을 수기(授記)하고, 일백일사(一百一事)의 물음에 대하여 매사를 십법(十法)으로 대답한 내용의 경전이며, 흔히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 일컫는다. 이 사경(寫經)은 상지에 은니로 불설보우경을 사성(寫成)한 10권본 중 권 제2의 잔존 1첩이다. 권머리의 변상도(變相圖, 불경의 내용이나 교리ㆍ부처의 생애 따위를 그린 그림)와 권말의 사성기(寫成記)는 생략되어 있다. 권수제(卷首題)와 권미제(卷尾題)의 권차(卷次) 아래에 ‘초(草)’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천자문(千字文)에 의한 함차(函次) 표시인데 이것이 호림박물관 소장의 보물 제1101호 《대반야바라밀경》 권 제305호 보물 제1102호 《대지도론(大智度論)》 권 제28은 물론, 기림사(祇林寺) 소장의 보물 제959호로 일괄 지정된 상지은니사경인 《대반야경(大般若經)》 3종,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1종, 《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 1종,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1종에도 똑같이 표시되어 있어, 은자사경원(銀字寫經院)에서 사성한 은자대장(銀字大藏)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기림사 소장의 《대반야경》 권 제210의 권말에는 ‘무자4월20일서(戊子四月二十日書)’가 표시되어 있어 그 무자년(戊子年)은 충렬왕 14년(1288)과 충목왕 4년(1348)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데, 사경의 체제 변천, 경문의 서법, 표지 장식 등에 의한 사경 제작상의 품격으로 보아 충목왕 4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 때 사경원에서 사성한 현존본 중에 대장경 머리에 위치한 《대반야경》 권 제210 ‘추(秋)’ 함차에서 《대지도론》 권 제28 ‘건(建)’ 함차까지 있음을 고려하면 충목왕 치세 무렵인 14세기 중기에 이루어진 규모가 큰 사성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함차 표시에 있어서 대장경의 첫 번째에 수록된 《대반야경》과 두 번째에 수록된 《방광반야바라밀경》 권 제20까지는 북송개보칙판대장경(北宋開寶勅板大藏經)과 고려초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 같으나 그 이하는 한 함차씩 들여 표시되어 있다. 이 보우경도 고려대장경은 ‘피(被)’의 함차이지만, 북송대장경은 ‘초(草)’의 함차로 표시되어 있다. 그것은 고려대장경이 북송개보판에 의하면서 두 번째의 《방광반야바라밀경》에서 30권본을 버리고 20권본을 채택하여 함차가 하나씩 앞당겨진데 기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경은 당시 소장되고 있었던 북송판대장경에 의해 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1

    상지은니대반야바라밀다경 권305(橡紙銀泥大般若波羅蜜多經 卷三百五) / 고려시대(14세기 중기)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대반야바라밀경은 당(唐)나라 현장(玄奘)이 한역(漢譯)한 것으로 모두 법이 모두 공(空)한 이치를 4처(四處) 16회(十六會)로 나누고 80여과의 명수로 들어 설(說)한 것이며, 줄여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대반야경(大般若經)’, 등으로 일컫는다. 이 사경(寫經)은 대품반야경을 상지(橡紙)에 은니(銀泥)로 사성(寫成)한 것 중 권 제305의 1첩이 전래된 것이다. 변상도(變相圖)와 사성기(寫成記)는 없으나, 앞ㆍ뒤의 표지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표지에는 보상화(寶相華) 3개를 꽉차게 배치하고 그 주위에 잎이 달린 줄기를 금은니(金銀泥)로 그려 돌려 장식하였다. 본문은 은니 상하단변(上下單邊) 사이 21.3cm에 계선(界線)을 긋고 한 장에 30항 17자씩 은서(銀書)한 다음, 한 면에 6항이 되도록 접어 절첩장(折帖裝)으로 하였다. 본문의 앞 2절지와 뒤 2절지는 산화(酸化)되어 글자가 희미하나 중간 부분에는 은니색이 선명하다. 권수제(卷首題)의 권차 아래에 ‘조(調)’의 천자문(千字文) 함차가 표시되어 있다. 이 사경은 보물 제959호로 일괄 지정된 기림사(祇林寺) 소장의 《대반야경》 권 제210ㆍ259ㆍ561과 같은 시기에 사성한 같은 종류의 장식경(裝飾經)으로 권 제561의 상지 염색이 이것보다 진한 것 외에는 모두 동일하다. 그 중 권 제210에 충목왕 4년 무자(1348) 4월에 사성한 기록이 있어 충목왕 치세 무렵인 14세기 중기에 은자사경원(銀字寫經院)에서 사성한 은자대장의 잔존첩(殘存帖)인 것으로 감식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2

    상지은니대지도론 권28(橡紙銀泥大智度論 卷二十八) / 고려시대(14세기 중기)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대지도론(大智度論)은 용수(龍樹)가 짓고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것으로, 모든 법이 공(空)한 이치를 밝힌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제2히(401~478)를 따로 번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婆羅蜜經)》을 해석해 놓은 200권의 대논문이다. 이 사경(寫經)은 대지도론을 상지(橡紙)에 은니(銀泥)로 사성(寫成)한 것 중 권 제28의 영본(零本) 1첩으로, 권수(卷首)의 본문 6장이 결락되고 권말에는 사성기(寫成記)가 결실되었다.앞표지는 근래 새로 하고 표제(表題)를 묵서(墨書)하였으며, 뒷표지는 오래된 것이나 보상화(寶相華) 장식이 없어 원형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본문은 은니의 상하단변(上下單邊) 21.5cm 사이에 계선(界線)을 긋고 한 장에 30항 17자씩 은니로 쓴 다음, 한 면에 6항이 되도록 접어 절첩장(折帖裝)으로 하였다. 본문의 앞 2절지와 뒤 2절지는 산화(酸化)가 심하여 글자가 희미하다. 본래 결락된 것을 불복(佛腹)에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권미제(卷尾題) 아래에 천자문(千字文) 함차(函次)와 권차 표시인 ‘건 팔(建 八)’이 기록되어 있고, 종이 뒷면에는 ‘지론 제3함 제8권 17복(智論 第三函 第八卷十七腹)’이 기록되어 있다. 앞의 것은 ‘건(建)’ 함차 제8권임을 뜻하고, 뒤의 것은 대지도론 제3 함차 제8권 제17장임을 뜻한다. 한 함차에 10권씩 수장하고 있기 때문에 제1~10권은 ‘성(聖)’ 함차, 제11~20권은 ‘덕(德)’ 함차, 제21~30권은 ‘건(建)’ 함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앞의 것은 대지도론 제29권, 뒤의 것은 대지도론 제28권 제17장을 뜻한다. 이 함차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덕(德)’ 함차 제28권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도 북송대장경(北宋大藏經)에 의해 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경은 보물 제959호로 일괄 지정된 기림사(祇林寺) 소장의 상지은니사경(橡紙銀泥寫經)과 지질ㆍ서체 등 사경의 전체적인 품격이 동일하다. 충목왕 치세 무렵인 14세기 중기에 은자사성원(銀字寫成院)에서 사성한 은자대장(銀字大藏)의 잔존첩(殘存帖)인 것으로 감식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3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13(紺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 晋本 卷十三) / 고려 충숙왕 16년(1329) / 1권 1축 / 필사본/사경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권자장
    대방광불화엄경은 부처님이 말한 넓고 크고 바르며 화려 장엄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대표적 경전이다. 이 사경(寫經)은 동진(東晋)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의 60권본 화엄경 가운데, 권 제13을 감지에 은니(銀泥)로 사성(寫成)한 영본(零本) 1축이 전래된 것이다. 본문의 은니 필서를 보면 초서(初書)에 보서(補書)가 잡다하게 혼입되어 있다. 그 중 초서는 방필체(方筆體)로 예리하게 쓴 필서인데, 은니의 심한 산화(酸化)로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보서는 네 군데에 걸쳐 크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새로 짙게 염색한 감지에 진한 은니의 원필(圓筆) 송설체(松雪體)로 정성들여 해정하게 필서하였다. 그리고 권말에는 ‘주지대사향여보서(住持大師向如補書)’라고 표시하였는데, 향여는 해인사 주지를 지냈던 목암(木庵) 체원(體元)의 별호이며, 충숙왕 때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ㆍ《화엄경관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ㆍ《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을 저술한 학문승(學問僧)이다. 그가 이전에 사성된 감지은니화엄경 진본 1질(帙)을 구하여 보서하였는데, 그 중 권 제49의 잔존 1축이 양산(梁山) 정족산(鼎足山) 대성암(大聖庵) 공인박물관(空印博物館)에도 소장되어 있다. 그 사경의 권말에는 ‘천력2년기사5월일사주대사향여보질서(天歷二年己巳五月日寺住大師向如補帙書)’라 표시되어 있는데 이 사경과 꼭 같은 보서이므로 충숙왕 16년 기사(1329)에 보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경은 비록 초서에 보서를 가하여 그 품격이 조잡해졌지만, 보기 드문 12세기 경의 사경 서법(書法)과 사경 제조 솜씨 등을 살필 수 있는 것으로 고려사경사(高麗寫經史)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4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 조선 성종 5년(1474)~성종 16년(1485) / 3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
    지장보살본원경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천도(薦度)하여 극락에 오르게 하는 내용과 의식 방법을 다룬 경전이다. 사람이 죽으면 올리는 지장재(地藏齋)와 사찰(寺刹)의 명부전(冥府殿)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 바로 이 경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빈번하게 간행되어 그 판종이 비교적 다양하다. 이 판본은 성종 5년(1474) 5월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를 위시한 인수대비(仁粹大妃), 안순대비(安順大妃) 그리고 주상전하가 그 해 4월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에서 춘추 19세로 훙거(薨去)한 성종 초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내수사(內需司)의 비용으로 광평대군(廣平大君) 부인 신씨(申氏)의 원당(願堂)인 견성사(見性寺)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영순군(永順君)이 세조의 극락천도(極樂薦度)와 정희대비의 수복무궁(壽福無窮), 그리고 돌아간 아버지 광평대군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손수 필사하여 견성사에서 판각하다 중단된 것인데, 본래의 뜻이 국가 기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비용을 내수사에서가 출자 간행하여 마치고 왕후의 천도일에 돌려 열람하였다. 그 뒤 그 초각(初刻) 유판(留板)의 일부 문자를 잃어 성종 16년(1485) 4월 화주(化主) 신환(信環)과 감조(監造) 도림(道林)선사의 주선으로 책머리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와 권 상의 제24~26판이 보각(補刻)되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권상의 말미와 권하의 끝 시주질(施主帙)에 표시되어 있다. 권말에는 초각의 시주질 머리에 대왕대비ㆍ인수왕후ㆍ왕대비ㆍ주상전하를 위시한 여러 공주ㆍ대군ㆍ군ㆍ귀인ㆍ숙빈ㆍ숙의의 이름과 신미(信眉)ㆍ학열(學悅)ㆍ학조(學祖) 등의 고승에 이어 대시주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 혜원(慧圓)ㆍ김제군부인(金提郡夫人) 최씨(崔氏) 선유(善柔) 이하 고관부인과 그 밖의 많은 시주자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판각은 당대의 이름 있는 각수(刻手)인 전녹동(全祿同)ㆍ고말손(高末孫)ㆍ전천동(全千同) 등이 분담하였다. 이 판본은 초각에 보각한 판에서 찍어낸 것이고, 책장에 훼손이 생겨 보수하였지만, 당대의 이름있는 각수들이 새긴 내수사 출재(出財)의 왕실판(王室板)이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 후 성종 20년(1489)에도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영가천도(靈駕薦度)를 위해 15부를 찍어 학조의 을해자발(乙亥字跋)을 붙여 보시하기도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5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 조선 성종 1년(1470)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는 물과 육지의 외로운 혼령과 아귀들에게 고루 공양하는 법회에 대하여 다룬 책이다. 이런 공양을 공덕 중 가장 으뜸으로 권장했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빈번하게 행해져 그 재의(齋儀)를 다룬 책이 자주 간행되어 판종(板種)이 다양하다. 이 재의촬요(齋儀撮要)는 세종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이 죽자 그의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가 발원하여 아들 영순군(永順君)에게 판각용 정서본(精書本)을 필서하게 하였다. 예종 1년(1469) 봄에 시작하여 그 해 늦은 여름에 마쳤는데, 영순군이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어머니 신씨는 그의 원당(願堂)인 견성사(見性寺)에서 비구니 혜원(慧圓)이 되어 도인(道人) 해자(海慈)의 주간 아래 그 판각에 착수하여 성종 1년(1470) 6월에 완성시켰다. 그 판에서 찍은 판본이 오늘에 전해진 것이다. 본문의 판서는 영순군의 아버지의 천도를 위해 정성껏 필서하였는데, 그의 글씨에는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필의가 엿보인다. 판각은 전녹동(全祿同)ㆍ김귀손(金貴孫)ㆍ전천동(全千同) 등 당대의 이름 있는 각수(刻手)들이 담당하였다. 이 전본(傳本)은 신씨의 견성사에 비치했던 수택본(手澤本, 몸에 지녀 손때가 묻은 책)인 듯 두 곳에 ‘혜원(慧圓)’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스님들의 손을 거친 듯 책장에 훼손이 생겨 배접 보수되어 있다. 권말에 예종 1년 여름에 쓴 영순군의 발문(跋文)과 성종 1년 6월에 쓴 김수온(金守溫)의 발문이 붙어 있으며, 천도에는 광평대군ㆍ무안군(撫安君)ㆍ신씨의 아버지 신자수(申自守) 등 10여 영가(靈駕)가 표시되고, 발원과 시주질에는 신미(信眉)ㆍ학열(學悅)ㆍ학조(學祖)를 비롯하여 무려 200여명이 열거되어 있다. 이 재의촬요는 예종 1년 6월에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貞懿)공주가 남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원찰인 삼각산 도성암(道成菴)에서 간행한 《천지명양수륙재의촬요(天地冥陽水陸齋儀撮要)》, 그리고 그 이후 왕실에서 잇달아 간행한 여러 종의 《수륙재의제반문》과 함께 배불책(排佛策)을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 전기의 왕실 불교신앙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6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4, 100, 117(大方廣佛華嚴經䟽 卷八十四, 百, 百十七) / 고려시대(12~13세기) / 3권 3첩 / 목판본/사찰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절첩장
    대방광불화엄경소는 실차난다(實叉難陀)가 새로 번역한 팔십화엄경(당(唐) 징관(澄觀) 주소(注疏))을 송(宋)나라 정원(淨源)이 각 해당 본문 아래 기록해 120권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이 판본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교장수집(敎藏收集)과 구법(求法)을 위해 송나라에 들어갔을 때 각별한 교분을 맺은 정원이 자기의 집록인 이 경소를 당지에서 새겨 상인 서전(徐戩)을 통하여 보내 온 경판에서 찍어낸 권 제84ㆍ100ㆍ117의 잔존 3첩의 전래본이다. 본문은 후인(後印)으로 소자(小字)의 인쇄가 다소 선명하지 못하나, 글자체는 구체(歐體, 구양순체)의 강건한 방필(方筆)을 해정하게 써서 정교하게 새겼기 때문에 매우 단정하다.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갔을 때 정원이 있는 혜인원(慧因院)에 송나라에 없는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 등 다수의 경을 기증하고 은화를 희사하여 경론소초(經論疏鈔) 1천여 권을 찍어 절에 소장하게 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금니화엄경 300부와 장경각(藏經閣)을 세우는 비용까지 보내주었다. 이로 인하여 혜인원을 속칭 ‘고려사(高麗寺)’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책의 경판은 의천과 정원에 의해 맺어진 두 나라의 문화교류의 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 후 세종 16년(1434)에 고려대장경판을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일본에 이 경판을 보내 주었던 사실에 의할 때, 이로 인한 3국간의 불교와 인쇄문화 교류의 연구에도 실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경판에서 찍은 같은 판본 중 권 제21ㆍ24(보물 제1128호), 권 제 28ㆍ29ㆍ30(보물 제892호), 권 제30(보물 제1124호), 권 제41(보물 제964호), 권 제42(보물 제891호), 권 제68(보물 제1013호), 권 제97(보물 제959호), 권 제100(보물 제892ㆍ1106), 권 제100~102(보물 제892호) 등이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7

    묘법연화경 권5~7(妙法蓮華經 卷五~七) / 조선 문종 1년(1451) / 3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
    묘법연화경은 삼승(三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각기 다른 것을 깨닫게 하여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일시킴을 주안으로 하는 대승경전(大乘經典)으로 여러 번역본 중 요진(姚秦)시대 구마라집(鳩摩羅什) 본에 의거, 문종 1년(1451)에 간행한 것 중 권 제5~7의 잔존 1책이 전래된 것이다. 권말에 붙인 문종 1년(1451) 7월 하순에 순선당(順善堂) 희인(希忍)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큰 단월(檀越)인 명빈(明嬪) 김씨가 귀인(貴人) 최씨와 함께 대사(大事)의 인연을 깊이 깨닫고 이 법화경을 간행 보시하여 후학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주상전하의 만세와 세자저하의 천추를 빌고, 돌아간 태종ㆍ원경왕후ㆍ세종ㆍ소헌왕후의 영가천도(靈駕薦度), 그리고 아버지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ㆍ어머니 장경댁주(莊敬宅主) 신씨(申氏)ㆍ역대 친척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두루 기원하기 위해 출판한 것이다. 이전의 것을 다시 새긴 것이나 새김이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이 판본(板本)을 간행한 대덕공주는 명빈 김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이외에도 그가 시주하여 간행한 판본 중 세종 14년(1432)에 소월헌(昭月軒) 정암(定菴)의 권연(勸緣)으로 간행한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이 보물 제959-43호와 보물 제1125호로 지정되었고, 세종 29년(1447)에도 정암의 권연으로 간행한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이 보물 제1143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 중 보물 제959-43호로 지정된 부모은중경은 세종 14년(1432)에 새긴 판에서 세조 8년(1462)에 인출한 것인데, 이를 간각(刊刻)으로 잘못 알고 있으며, 보물 제1143호로 지정된 자비도량참법은 전존(傳存)의 같은 판본 권 제10의 간기에 의하면 세종 29년(1447)에 구판본을 번각한 것인데 고려 말기 새긴 판에서 조선 초기에 인출한 것으로 또한 잘못 알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8

    묘법연화경찬술 권1~2(妙法蓮華經纘述 卷一~二) / 조선 세조 7년(1461) /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송광사성보박물관 / 전남 순천시 / 선장
    당나라 경사기국사(京師紀國寺)의 사문(沙門) 석혜정(釋慧淨)이 『묘법연화경』에 대해서 찬술(讚述)한 책이다. ‘신편제종교장초록(新編諸宗敎總錄)’ 권1 법화경부에 10권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권1과 권2의 2권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송, 거란, 일본 등의 대장경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대성한 교장(敎藏)으로 조선 세조 임금 때인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69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 조선 성종 16년(1485) / 3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은 신비하고 슬기로운 힘을 함유하고 있어 이를 오로지 마음으로 읽고 지니면 여러 재난과 흉액을 면할 수 있음을 설(說)한 밀교경전(密敎經典)의 하나이다. 이 판본은 권말의 학조(學祖)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성종 16년(1485)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주상전하의 슬기가 영묘하고 재앙의 근원이 소진되기를 발원하여 당본(唐本)을 본 따서 그림을 세밀하게 그리고 본문을 해정(楷正)하게 써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다라니경은 이후 여러 차례 번각(飜刻)되어 유통되고 있으나, 이 왕실판본은 판각이 정교하고 그림의 각선(刻線)이 섬세 우아하고, 글자의 필획이 단정 예리하여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0

    임고서원 전적 - 1.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臨皐書院 典籍 - 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 조선 명종 8년(1553) / 6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는 주돈신(周敦頣), 정호(程顥), 정이(程頣) 등 송대(宋代) 18인의 유학자들의 시문(詩文)을 유형별로 분류(分類)하여 편찬한 ≪성리군서구해(性理羣書句解)≫에 주요 글자에 대한 발음(音點)을 음각(陰刻)으로 표기하여 재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1553년에 당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 이황에게 내사된 것인데, 명종 8년(1553)에 지방 유림들이 임고서원을 창건하고 서적을 구하기 위하여 상사(上舍) 노수(盧遂)가 널리 서적을 구할 때 이황이 1554년에 자신이 내사 받은 이 책을 기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책의 표지 이면에는 그와 관련된 퇴계의 묵서 지기(識記)가 있는데, ‘하사받은 책을 기증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지만 서원에 수장된 책은 한편으로 선현을 위한 것이고 또한 후학을 위한 것이므로 의의가 있는 일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한 서원으로 명종 8년(1553)에 창건되어 동왕 9년(1554)에 사액(賜額)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낙질(落帙)이지만 보존상태가 양호(良好)하며 이황에게 내사(內賜)된 내사본이고, 이를 선현과 후학을 위하여 기증한다는 이황의 묵서 지기(識記)가 있어 서적의 반사(頒賜)나 기증(寄贈)의 실례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1

    임고서원 전적 - 2.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臨皐書院 典籍 -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 조선 선조 18년(1585) / 3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은 남송 초 금(金)과의 전쟁을 주장하다가 주화파 승상(丞相)이었던 진쾌(秦快)에 의해 죽음을 당한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의 정충기사(精忠紀事)와 포전(褒典), 유사(遺事) 등을 수록한 것이다. 악비는 자(字)가 붕거(鵬擧)이고, 시호(諡號)는 무목왕(武穆王)이며, 가정 4년(1211) 악왕(鄂王)에 추증되었다. 이 책은 선조 18년(1585)에 국왕이 임고서원(臨皐書院)에 내린 내사본(內賜本)이며, 동일한 판본이 도산서원에도 함께 내사되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한 서원으로서, 명종 8년(1553)에 창건(創建)되었고, 동왕 9년(1554)에 사액(賜額)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중건(重建)되었다. 인출에 사용된 활자는 선조 13년(1580)에 주조된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이며 활자주조 후 5년 뒤에 간인(刊印)된 초기의 인본으로서 초기 재주갑인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더불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알게 해 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2

    임고서원 전적 - 3.논어언해(臨皐書院 典籍 - 論語諺解) / 조선 선조 23년(1590) / 3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논어언해(論語諺解)》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논어(論語)》의 원문에 토를 달고 언해(諺解)한 책이다. 논어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으로,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문헌이다. 내용은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게 기재되었다. 유교의 통설(通說)로는 공자의 사후(死後), 제자들이 그 때까지 써 두었던 스승의 말을 논찬(論纂)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은 표지가 후대에 개장되어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본문의 제1면 우측 상단에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내사인(內賜印)이 날인된 것으로 미루어 이 서원에 내려졌던 책임을 알 수 있다. 임고서원(臨臯書院)에 서적의 내사(內賜)가 이루어 진 것은 명종 9년(1554)에 소수서원의 예에 따라 문무루에 소장된 사서오경(四書五經) 1질을 내려 보낸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책의 하단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이라는 소장인(所藏印)과 「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라는 장서기(藏書記)가 묵서되어 있다. 사서의 언해본(諺解本)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선조 18년(1585) 교정청(校正廳)을 설립하고 이산해(李山海), 정철(鄭澈) 등이 참여하여 선조 23년(1590)에 경서체자로 완성한 것이다. 내사기록이 남아있는 동일한 판본이 도산서원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임고서원본은 같은 해에 간행되고 내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차(卷次)는 낙질(落帙)이지만 권수(卷首) 하단(下段) 우측이 약간 닳아졌을 뿐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이 언해본(諺解本)은 한글에 방점(傍點)이 있으며, 서지학(書誌學), 국어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3

    임고서원 전적 - 4.심원록(臨皐書院 典籍 - 尋院錄) / 조선 명종 8년(1553)~숙종 43년(1717) / 6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이 《심원록(尋院錄)》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창건된 명종 8년(1553)부터 1912년까지 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의 명부(名簿)이다. 명단에는 직명 또는 신분명, 성명, 자, 거주지, 내방 연도를 수록하고 있다. 창건 초기에 내방한 인사들로 군수 이의(李義), 직장(直長) 권동보(權東輔), 현감 황준량(黃俊良), 생원 조목(趙穆), 구봉령(具鳳齡), 유학 조호익(曺好益) 등이 보인다. 모두 6책인데 각각 58장, 49장, 26장, 25장, 22장, 40장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록 기간은 아래와 같다. ① 제 1책: 가정계축(1553) 월 일(嘉靖癸丑 月 日) ② 제 2책: 천계을축(天啓乙丑, 1625)~숙묘을묘(肅廟乙卯, 1675) ③ 제 3책: 현묘무신(顯廟戊申, 1668)~숙묘기미(肅廟己未, 1679) ④ 제 4책: 숙묘기사(肅廟己巳, 1689)~정유(丁酉, 1717) 구월(九月) ⑤ 제 5책: [무술]삼월 칠일([戊戌]三月 七日)~[무진]정월이십오일([戊辰]正月二十五日) ⑥ 제 6책: [갑진]사월([甲辰]四月)~[경진] 원월이오일([庚辰] 元月二五日) 이 책을 통해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4

    임고서원 전적 - 5.임고서원 고왕록(臨皐書院 典籍 - 臨皐書院 考往錄) / 조선 명종 8년(1553)~영조년간(1725~1776) / 2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이 책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창건 이래의 연혁(沿革)과 당시의 원장(院長), 유사(有司), 재지사림(在地士林)과 지방관(地方官)과의 관계, 경제적 기반 등 서원(書院)과 관련된 중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은 진사(進士) 노수(盧遂) 등이 명종 8년(1553)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서원을 창건한 사실과 명종 9년(1554) 편액을 받은 것에서부터 광복 후인 1975년까지의 서원(書院)과 관련된 기록이다. 처음 수찬된 것이 광해군 12년(1620)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때부터 계속하여 추가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제 1책은 임고서원 창건이래 고종 7년(1870)까지 수록되어 있고, 제 2책은 고종 8년(1871) 이후부터 1975년까지 기록하고 있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으로 한 서원으로서, 조선 명종 8년(年)(1553)에 창건되고, 명종 9년(1554)에 사액(賜額)된 서원이다. 수록된 서원의 운영과 사업 관련 내용을 통하여 임고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현전하는 서원의 고왕록 중에서는 가장 상세하다. 이는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제도(書院制度)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5

    임고서원 전적 - 6.임고서원전곡집물범례등록(臨皐書院 典籍 - 臨皐書院錢穀什物凡例謄錄) / 조선 후기 / 1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임고서원전곡집물범례등록(臨皐書院錢穀什物凡例謄錄)》은 조선조(朝鮮朝) 후기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봉향(奉享)하는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소유(所有)하고 있었던 자산(資産) 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필사한 편저자(編著者)는 알 수 없으며, 구성은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전곡(錢穀)ㆍ예물(例物)ㆍ집물(什物) 등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관어염복정등록(各官魚鹽卜定謄錄)ㆍ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ㆍ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卜在位田謄錄) 등도 포함 되어 있어 조선조 후기의 임고서원의 재정상태ㆍ운영상태와 생활상등을 자세하고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토지나 세금관련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6

    임고서원 전적 - 7.임고서원장학계안부절목(臨皐書院 典籍 - 臨皐書院奬學稧案(附)節目) / 조선 명종 8년(1553)~조선 후기 / 1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임고서원장학계안(臨皐書院獎學稧案)》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봉향(奉享)하는 영천(永川)의 임고서원의 유생(儒生)과 향리(鄕吏)자제의 교육을 위해 각 문중(門中)과의 결성을 나타낸 것이다. 내용은 장학계안(獎學稧案) 결성에 대한 서윤보(徐輪輔)의 서문(序文)과 정하원(鄭夏源)의 후서(後序)가 있으며, 오천정씨(烏川鄭氏) 등 56문중의 수곡기(收穀記)와 절목(節目)이 기재되어 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소장된 전적은 임고서원의 창건일(創建日)인 명종 8년(1553)부터 조선 후기까지 있는데, 이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전적은 10종 25책으로, 1991년 12월 16일 보물 1109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책의 표지는 가표지(假表紙)로 되어 있고, 다음 장 내표지(內表紙)에 ‘임고서원장학계안(臨皐書院獎學稧案)’이라는 서명과 그 우측에 작은 글씨로 ‘부 절목(附 節目)’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책 부분에 얼룩진 흔적이 있고 표지가 약간 닳아졌을 뿐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서원의 운영과 재정과 관련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시대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7

    임고서원 전적 - 8.환성사결립안(臨皐書院 典籍 - 環城寺決立案) / 조선 명종 8년(1553)~조선 후기 / 1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봉향(奉享)하는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5개 사찰(寺刹)인 하양(河陽)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義興) 인각사(麟角寺), 영주(永州) 성혈사(聖穴寺)ㆍ 정각사(鼎脚寺)와의 분쟁에 대한 입안문(立案文)이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소장된 전적은 임고서원의 창건일(創建日)인 명종 8년(1553)부터 조선 후기까지 있는데, 이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전적은 10종 25책으로, 1991년 12월 16일 보물 제1109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책의 표지는 가표지(假表紙)로 되어 있고, 다음 장 내표지(內表紙)에 '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이라는 서명(書名)과 그 우측에 작은 글씨로 '내사고적(內賜古籍)'ㆍ'춘조순영관문(春曺巡營關文)'ㆍ'갑진상송문서(甲辰相訟文書並附)'라고 기재되어 있다. 책 부분에 얼룩진 흔적이 있고 표지가 약간 닳아졌을 뿐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이 책은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서원의 운영에 관련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시대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78

    임고서원 전적 - 9.임고서원범규(臨皐書院 典籍 - 臨皐書院凡規) / 조선 명종 17년(1562) / 1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서, 명종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되었고 그 이듬해 사액(賜額)받은 서원(書院)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배향하였고 영조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선생을 추향하기도 하였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는 약 200책의 전적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임고서원범규(臨皐書院凡規)≫는 필사본으로 작성 시기는 명종 17년(1562)이다. 책의 보존상태는 누습(漏濕)으로 얼룩이 많이 진 상태이며 권수부분도 일부분 훼손 되었으나 본문 판독에는 무리가 없다. 본문의 내용은 ‘임고서원범규식(臨皐書院凡規式)’으로 시작하며 권수면 하단과 권말의 간사연도를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 책의 소장사항을 밝힌 서원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서원내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의 범규 및 그 관련 사례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책의 가장 앞부분에는 ‘임고서원범규식(臨皐書院凡規式)’이 실려있어서 ‘일왈근사 이왈예현 삼왈수우 사왈비름 오왈점서(一曰謹祀 二曰禮賢 三曰修宇 四曰備? 五曰點書)’와 같이 서원운영의 바탕이 되는 기조와 규범을 밝혔다. 이어서는 ‘춘추대향도(春秋大享圖)’와 ‘의도제용잡물식(依圖祭用雜物式)’를 기록하여 원내에 제향(祭享)된 선현(先賢)의 구도와 그에 따라 제향시에 소용되는 여러 물건들을 명시하였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제향의 절차와 제문을 밝히는 ‘제식(祭式)’과 ‘제문(祭文)’항이 이어지며, 뒤를 이어 ‘금사문유연(禁射侯遊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권말에는 ‘가정사십일년(嘉靖四十一年) 삼월십오일행군수(三月十五日行郡首)’와 같이 기록하고 있어서 명종 17년(1562)에 현행 군수가 작성하였음을 밝혔고 더불어 작성자의 수결도 부기되었다. 【 번역 해제 】 (1책)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신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원규(院規)로 명종 17년(1562)에 작성된 것이다. 원규는 5개항이 제시되고, 그 5개항의 세목(細目)에 해당하는 내용이 서술체로 기록되어 있다. 5개항은 (1)제사를 삼가히 지낸다[謹祀] (2)현인을 예우한다[禮賢] (3)원우(院宇)를 수리한다[修宇] (4)양식을 갖춘다[備?] (5)서책을 점검한다[點書]가 그것이다. 세목에 해당하는 내용은 ‘제사를 삼가히 지낸다’ 항에 속한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해 가장 많은데, 제사 날짜ㆍ과정ㆍ제물 진설ㆍ제물 절차ㆍ제문이 규정되어 있다. ‘현인을 예우한다’ 항에서는 특히 고을 수령의 자제들이 서원에 머물며 온갖 작패를 할까 경계하는 내용이 주목된다. 그 밖에 5개항에 해당되지 않는 기타 세목 네댓 가지가 서술되어 있는데, 원장(院長) 선임 문제와 수직(守直)을 열읍(列邑)의 사반(私伴) 즉 고관이 사사로이 부리는 호위병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문제 등에 관한 것이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679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金剛般若經疏開玄抄 卷四~五) / 고려 숙종 3년(1098) / 3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송광사성보박물관 / 전남 순천시 / 선장
    촉군사문(蜀郡沙門)인 공철(公哲)이 지은 것을 동경부청사(東京夫淸寺) 사자사문(賜紫沙門) 지람(志藍)이 필요 없는 것을 빼고 다시 보충하여 지은 『금강반야경』의 해석서이다. ‘신편제종교장초록’ 권1 금강반야경부에 ‘개현초(開玄鈔)’ 6권, 과(科)1권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송, 거란, 일본 등의 대장경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대성한 교장(敎藏)으로 조선 세조 임금 때인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0

    임고서원 전적 - 10.서원규범(臨皐書院 典籍 - 書院規範) / 조선 명종 8년(1558)~인조 9년(1631) / 1책 / 서원향교문서/좌목 / 영천시립도서관 / 경북 영천시 / 선장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서, 명종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되었고 그 이듬해 사액(賜額)받은 서원(書院)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영조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선생을 추향하기도 하였다. 임고서원(臨皐書院)에는 약 200책의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임고서원규범(臨皐書院規範)≫은 목판으로 인쇄된 판식을 갖춘 형태에 내용을 필사한 것으로, 보존상태는 일부 얼룩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작성 시기는 권말에 숭정사년삼월이십오일(崇禎四年三月二十五日)에 작성된 완의(完議)의 기록이 있어서 그 이후로 짐작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필사시기에 관한 기록은 없다. ≪임고서원규범(臨皐書院規範)≫의 내용은 서원내의 <원규>와 제향시 소용되는 제수품을 일일이 열거한 <제물식> 그리고 추가된 서원의 규정을 밝힌 <임고서원신증원규(臨皐書院新增院規)>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종 17년(1562)에 작성된 ≪임고서원범규(臨皐書院凡規)≫와 공통된 부분이 많은데, <원규(院規)>와 <제물식(祭物式)> 등이 그러하다. 권말에는 책의 간사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숭정사년 삼월이십오일 원중유안수정시완의(崇禎四年 三月二十五日 院中儒案修正時完議)가 부기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1

    찬도방론맥결집성 권1, 3(纂圖方論脈訣集成 卷一, 三) / 조선 광해군 4년(1612) / 2권 2책 / 활자본/목활자본 / 한독의약사료실 / 충북 음성군 / 선장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은 허준(許浚, 1546∼1615)이 선조(宣祖)의 명을 받들어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고양생(高陽生)이 중국 중세 이전의 유명한 의가(醫家)인 희범(希范)ㆍ결고(潔古)ㆍ통진자(通眞子) 등의 맥론(脈論)을 모아 편찬한 『찬도맥결(纂圖脈訣)』을 교정하여 광해군 4년(1612)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허준은 선조 7년(1574) 의과에 급제하고 이듬해(1575) 내의원의 의관이 되어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치면서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의(御醫)로서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종(扈從)하여 선조 39년(1606)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중인(中人) 출신에게 당상관(堂上官)의 위계(位階)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는 대간(臺諫)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그가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韓醫學)의 백과서전이며 중국의 의학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권두서명(卷頭書名)은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저자(著者)는 고양생(高陽生) 편집(編輯)ㆍ교정(校正)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진맥입식(診脈入式)으로 시작하여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심장(心臟) 등 여러 병세에 따른 진맥법을 29문(門)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권1에는 진맥입식(診脈入式)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 2는 결락되고 권3에는 이십사맥총론(二十四脉總論)ㆍ칠표(七表)ㆍ팔리(八裏)ㆍ구도(九道)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는 『동의보감』의 저술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여겨지며, 한의학과 서지학의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2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大方廣佛華嚴經䟽 卷三十) / 고려 말기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이 책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역한 주본 화엄경을 징관(澄觀)이 해석 부연(敷衍), 송나라 정원(淨源)이 각 해당 본문 아래 기록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를 11세기말에 새기고 14세기에 찍은 1권 1첩의 목판본이다. 권말의 먹으로 쓴 기록을 통해 정사년(丁巳年)에 경남 창원시 백월산(白月山)에 있던 남백사(南白寺)에 있었던 책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이 판본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책을 찍어내자 불복(佛腹)에 봉안되었을 것인데, 인쇄 상태로 보아 후쇄(後刷)이고, 제본 상태로 보아 고려 말에 찍어 제본한 책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3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 조선 세종 14년(1432) / 1권 1첩 / 목판본/왕실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세종 14년(1432)에 간행한 1권 1첩의 목판본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막중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자연스럽게 보은(報恩)하도록 하는 불교의 효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 권말에 있는 정암(定菴)의 발문(跋文)에 통하여 조선 세종 14년(1432)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김씨(明嬪金氏)가 발원하여 부모은중경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을 함께 판각하여 부모와 국왕과 왕비, 세자의 수복(壽福)을 기원하고, 아울러 친정 종손자의 명복을 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4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別行疏) / 고려 우왕 13년(1387)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이 책은 당나라 반야(般若)가 한역한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貞元本) 40권 가운데 권 제 40권의 내용을 당나라 징관(澄觀)이 해석 주해한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번각(飜刻)한 불분권(不分卷) 1책의 목판본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는 화엄경은 석가모니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문으로 법계 평등(法界平等)의 진리를 증오(證悟)한 부처의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칭양(稱揚)하고 있다. 이 책은 무용(無用)의 지문(誌文)과 이색(李穡)의 발문을 보면 고려 고종 43년(1256)에 청하상국(淸河相國) 최항(崔沆)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해 목기(牧其)가 필사한 것을 신지(信之)가 교감(校勘)하고, 연기사(緣起寺)의 심익(心益)이 함께 발원(發願)하여 간행한 것을 1387년에 경도금사사(京都金沙寺)에서 번각(飜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5

    천노해 금강반야바라밀경(川老解 金剛般若波羅蜜經) / 고려 우왕 13년(1387)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금강반야반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에 대한 송나라 야보천노(冶夫川老)의 송(頌)을 붙인 것으로 천로금강(川老金剛)이라 약칭된다. 이 경은 금강석과 같은 지혜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경이란 뜻이며, 우리나라 조계종을 비롯하여 각 종단의 근본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 권말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진원군 유구(晉原君 柳玽)와 진천군(晉川君 姜仁富)가 주선하여 우왕비(禑王妃)의 시주(施主)로 판각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 때 화주(化主)는 지성(志成) 각호(覺毫)이었고, 동참시주는 유구와 강인부 외에 강인부의 부인 조씨(趙氏) 묘정(妙淨)과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자향(鄭子珦) 등이 함께 동참하였다. 판각(板刻)은 산인(山人) 지담(志淡)이 맡고 발문(跋文)은 이색이 짓고 각지(角之)가 필사하였다. 본문 글씨는 송본의 번각으로 보이며 왕실에서 참여하여 판각했기 때문에 인쇄가 정교하다. 동일한 판본이 보물 제919ㆍ974,ㆍ1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6

    대방광불화엄경소 권21, 24(大方廣佛華嚴經䟽 卷二十一, 二十四) / 고려 선종 4년(1087) / 2첩 / 목판본/사찰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절첩장
    선종 4년(1087) 송나라 상인 서전 등이 가져온 송판(宋板)에서 찍어낸 《화엄경소》.《화엄경》80권본에 대한 징관(澄觀)의 연구서를 정원(淨源)이 주석(註釋)한 것인데 1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가서 정원법사를 만나고 이 책의 판각을 주문하고 귀국하였는데, 그 다음해 송나라 상인을 통하여 납품받은 목판에서 찍어낸 것이다. 이 목판은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으로 세종 6년(1424)에 대장경판을 달라는 일본에 이 목판을 대신 주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불교를 통한 동양 3국의 문화교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는 판본은 십수권에 이르고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제891, 제892, 제964, 제1013, 제1106, 제1124, 제1128호 모두 동일한 판본이다. 특히 보물 제964호(권41)은 다른 것과는 달리 권머리에 〈각주화엄경도변상연기 刻注華嚴經都變相緣起〉와 〈변상도 變相圖〉가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각국사에게 보낸 이 경판에 변상도가 없어 공민왕 21년(1372)에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에서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물 제964호는 변상도가 처음 등장하는 판본으로 동일본의 인출시기를 추정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것은 서울의 이경희(李京姬)가 수장하고 있으며, 보물 제1013호는 서울의 김민영(金敏榮)이, 보물 제1106호(제84·제100·제119권)는 성보문화재단(成保文化財團)이, 보물 제1124호(제30권)는 서울의 송성문(宋成文)이 소장하고 있으며, 보물 제1128호(제21·제24권)는 장서각도서에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7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첩 / 목판본/사찰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절첩장
    고려말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니(陀羅尼). 1권 1첩. 목판첩장본(木板帖裝本). 보물 제1129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다라니 가운데 하나이다. 범문(梵文)으로 된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라 하는데, 구별없이 다라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다라니는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독송하는데, 이는 원문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고, 본래의 뜻을 그대로 전한다는 신앙 목적에서 번역 하지 않는 것이다. 이 판본은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시기는 알 수 없으나, 판식과 장정 등에서 고려말의 간행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려말 밀교密敎)가 성행하였던 ‘충(忠)’자 임금 때의 간행으로 보이나, 다소 후쇄(後刷)일 소지도 있다. 이 시기에 간행된 밀교경전으로는 기림사(祇林寺) 소장의 ≪정본일체여래대불정백솔개총지 正本一切如來大佛頂白率蓋摠持≫가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 다라니 등 5개의 다라니를 모은 ≪오대진언집 五大眞言集≫이 널리 유통되었다. 장서각 도서에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8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선장
    불교경전. 1권 1책. 목판본. 보물 제1130호. 숙종 7년(1102) 흥왕사(興王寺)의 간기(刊記)가 있다. 흥왕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1101년까지 속장(續藏)을 간행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 책은 대장경의 주석서인 속장이 아니고 일반 경전으로, 대장경의 천자함(千字函, 대장경을 보관하는 함의 순서를 천자문(千字文)에 따라 붙인 것) 표시인 ‘국(鞠)’자가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천자함 표시는 대장경 간행 때만 한정되고 개별 경전 간행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 판본은 대각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간행된 것인데, 국사 생전에 쾌유를 빌기 위하여 이 경전의 간행을 시작하였고, 이때 저본(底本)의 천자함 표시를 그대로 새긴 경우로 생각된다. 이 책은 비록 속장을 간행한 간기가 있으나 속장과는 판식이나 성격과 지질이 다르며, 현존 판본의 상태로 보아 이 당시의 간행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판본은 1102년의 판본을 저본으로 후대에 번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번각 수법이 뛰어나서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서 간행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이 판본의 번각(飜刻)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경전의 판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보면, 매 항(行) 15자씩으로 글자 수는 동일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성종의 계비인 자순대비(慈順大妃)의 발원에 의하여 1중종 23년(528)에 봉은사에서 중간한 판본이다. 여기에는 세조 5년(1459) 어제발(御製跋, 왕의 명령에 의해 조성했다는 발문)이 붙어 있다. 여기에서 세조 5년에 간행하였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번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이 판본은 1102년 흥왕사본을 가지고 1459년 어제발을 붙여 번각했던 판본일 가능성이 짙으나, 여기에는 어제발이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다. 또한, 고려 고종 때의 대장경판각이 있었기 때문에 이 경전의 고려시대 복각(覆刻)의 가능성도 희박하나 고려시대 판본의 격을 갖추고 있으므로, 간행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되며 장서각도서에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89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제10의하(梵綱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第十之下) / 고려 후기 /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첩장
    고려 말기에 간행된 ≪범망경≫. 1권 1책. 목판본. 보물 제1131호. 권10의 상·하 가운데 하권이다. ≪범망경≫은 승조(僧肇)의 ≪범망경≫ 후서(後序)에 따르면 112권 61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체는 한역이 되지 않았다. 하권의 내용은 보살이 지녀야 하는 10가지 무거운 계(十重大戒)와 48가지 경범죄에 해당하는 계(四十八輕戒)를 설한 것인데, 대승불교의 기본계율서로서 널리 유통되어 왔다. 이 판본은 1306년의 원나라 고승 소경(紹瓊)의 후서가 붙어 있는 책이다. 이처럼 소경의 후서가 있어 원본 계열로 오인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간행할 당시 고려 승려와 친교를 맺고 있던 소경의 후서를 받아 고려에서 간행한 책이다. 충렬왕 30년(1304) 7월 원나라 고승 소경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왕이 승지 안우기(安于器)를 교외에 보내어 영접하였으며, 친히 군신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수령궁(壽寧宮)에 맞이하여 설선(說禪, 참선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는 기록(고려사 권32, 충렬왕 30년 7월. 8월조)과 궁중에서 불화(佛畵)에 점안하고 ≪화엄경≫을 전독(轉讀, 돌려가며 읽음)하고 왕과 왕비가 보살계를 받았다고 한다(고려사, 열전 권17, 韓希愈條). 또 충렬왕 때 지첨의부사 권단(權滑)이 소경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는 기록(고려사, 열전 권20) 등이 있다. 그는 고려시대 고승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와 친밀하게 교유했던 몽산 덕이선사(蒙山 德異禪師)의 제자이기도 하다. 판본에 붙은 소경의 후서를 보면 이때까지 소경이 고려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의 간행에 즈음하여 소경과 친교가 있던 고려 고승의 부탁을 받아 고려 불교계가 부처님의 법을 떨치고 있다는 내용을 써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판본은 고려시대 원나라와 불교를 통한 교류의 일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중간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고려 말경의 판본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0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柳希春 眉巖日記 및 眉巖集木板) / 조선 명종 22년(1567)∼선조 9년(1576) / 11책 / 필사본/일기류 / 유근영 / 전남 담양군 / 선장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년)의 친필 일기이다. 저자 유희춘은 중종 6년(1537)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 무장현감(茂長縣監) 등을 역임했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선조 원년(1567)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서의 구결(口訣)과 언해(諺解)를 상정(詳定)하는 등 유교 문화와 한글의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미암일기』는 선조가 즉위한 1567년 10월 1일부터 선조 10년(1577)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 간의 일기이다. 이 일기는 조선시대 개인일기 중 가장 많은 분량의 일기 가운데 하나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본인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희춘이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선조 초년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서울과 지방의 각 관서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및 당시의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료로서의 가치 때문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첫 10년 동안의 사료(史料)로서 활용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일기는 조선시대의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및 문화사 연구의 일대 보고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1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 고려 우왕 4년(1378) /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선장
    우왕 4년(1378)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불조직지심체요절≫. 2권 1책. 목판본. 보물 제1132호. 백운화상 경한(景閑)이 75세 때(1372) 제자인 법린(法隣)·정혜(靜慧)의 요청에 의하여 임제종(臨濟宗) 18대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2권으로 편집한 것이다. 내용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 요체가 되는 과거칠불(過去七佛)로부터 석옥의 제자인 법안선사(法眼禪師)에 이르는 역대 제불과 조사들의 법어·게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운화상이 입적한 3년 후(1377) 석찬(釋璨)의 주도로 성사달(成士達)의 서문을 받아 청주목 흥덕사(興德寺)에서 비구니 묘덕(妙德)의 시주에 의해서 주자(鑄字)로 인쇄하였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흥덕사의 활자인쇄가 인쇄부수뿐만 아니라 후쇄(後刷)할 수 없는 제약으로 널리 펼 수 없었기 때문에 판하본(板下本)을 마련하여 다시 새긴 것이다. 이 판본은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한 취암사에서 제자 법린 등이 주관하여 이색(李穡)의 서문을 붙이고 판통예문사 김계생(金繼生) 등의 시주를 받아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때 판하본은 민암(民巖)·선화(禪和) 등이 썼고 흥덕사의 주자본의 시주자였던 묘덕이 이때도 참여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2

    원균 선무공신교서(元均 宣武功臣敎書) / 조선 선조 37년(1604)~선조 38년(1605) / 일괄(1축,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원제대 / 경기 평택시 / 낱장
    이 문서는 선조 37년(1604) 10월에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1540∼1597)에게 내려진 공신교서이다. 원균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후 임진왜란 때 왜군과 대적하여 크게 격파하였고, 정유재란 때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혁혁한 공적으로 1604년 이순신ㆍ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공신교서는 교서의 일종이다. 교서는 국왕이 내리는 선포문이나 명령문, 혹은 훈유문(訓諭文)으로 왕이 자신의 시정(施政) 방침을 천명할 때, 구언(求言)할 때, 공신을 책봉 할 때, 관찰사ㆍ병사 등에게 사명을 다하라고 훈유할 때 등 다양한 경우에 발급하였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병을 천하였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호이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난중에 각 방면에서 공을 세운 문ㆍ무 관원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선무공신은 모두 18명을 3등으로 구분했는데, 원균은 이순신(李舜臣)ㆍ권율(權慄)과 함께 1등으로 책록되었다. 교서를 보면 1등에게는 본인과 부모 처자에게 3계(三階)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때는 조카나 사위에게 2계를 올려 주며 적장자(嫡長子)가 이를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했다. 또한 노비 13구(口), 전지(田地) 150결, 은자(銀子) 10냥(兩), 비단 1필,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하도록 하는 특전이 주어졌다. 이 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직후에 포상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만력(萬曆) 32년 곧 선조 37년(1604) 10월에, 국왕이 임진왜란 때 큰 무공(武功)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인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에게 내린 공신 녹훈 교서(功臣錄勳敎書)이다. 앞에 쓰인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는 원균이 생전에 행공(行公)한 관계(官階)와 관직이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은 선무공신 1등에 책록 될 때에 증직된 것이다. 이 공신교서는 대략 5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 ① 공신의 공적 사례로, 원균의 재능, 탁월한 무용 등과 역관을 서술하고, 이어서 원균이 임진왜란 때 세운 큰 공훈을 중국의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장을 원용하여 찬양하고 있다. ② 공신의 특전으로서, 선무공신 1등인 원균에게 내려지는 특전 및 상사(賞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③ 공신과의 맹세로, 왕이 공신에게 국가의 존립과 함께 영원히 고락을 같이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④ 공신의 명단으로 1등에 이순신(李舜臣)ㆍ원균(元均) 등 3인, 2등에 신점(申點) 등 5인, 3등에 정기원(鄭期遠) 등 10인 도합 18인을 녹훈(錄勳)하였다. ⑤ 사실 증명으로 ‘만력(萬曆) 32년(1604) 10월’이라 하여 공신호를 반급(頒給)하는 연월을 적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란 새보(璽寶)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호성(扈聖)ㆍ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당시 훈호를 심정(審定)할 때에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수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에, 왜적을 정벌한 장수들은 선무공신에 녹훈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태조 1년(1392)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공신의 마지막인 영조 4년(1728)의 분무(奮武)공신에 이르기까지 28개 공신이 책록 되었는데, 그 중에 호성ㆍ선무 두 공신은 외적(外敵)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공신들과는 달리 오늘날까지 중요시되고 있다. 이 공신교서는 임란사 연구의 사료인 동시에 원균의 전기 자료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충무공 이순신과 동일한 1등 공신이면서 상대적으로 무공이 낮게 평가되는 불평등한 점을 재조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작성자 : 이정섭) (2장) 이 글은 임금이 원균(元均)에게 제사를 하사하면서 내린 제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몇 해 뒤인 선조 37년 갑진년(1604)에 대대적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관련 공신을 책봉하였는데, 원균은 이미 사후였으므로 그 이듬해 정월 18일에 예조정랑(禮曹正郞) 유성(柳惺)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문의 내용은 크게 몇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원균의 자질이 용맹스러웠던 것과 당당히 무과에 급제하였던 일, 변방의 여러 고을에 임용되어 성과가 있었던 것을 언급하였다. 중간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에 임명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을 칭송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된 것을 언급하고, 장군의 큰 계책과 지략을 다 펼쳐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공신을 봉하는 즈음에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제사를 내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작성자 : 권경렬)
    출처 : 문화재청
  • 475693

    조온 사패왕지(趙溫 賜牌王旨) / 조선 정종1년(1399)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낱장
    정종 1년(1399) 조온(趙溫)에게 내린 사패왕지(賜牌王旨). 보물 제1135호. 1점. 필사본(원본). 세로 82.4cm, 가로 80.7cm. 1399년 2월 8일, 국왕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정사공신 한천군 조온(定社功臣漢川君趙溫)에게 공전(功田)을 사여(賜與)하는 사패왕지이다. 양질의 저지(楮紙)에 총 11줄에 걸쳐 행서체(行書體)로 썼다. 조온은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인벽(仁璧)의 아들로, 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이 되고 한천군에 봉해졌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세자인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芳碩)을 옹호하는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몰아내는 데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이 되었으며,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 회안대군 방간(懷安大君芳幹)의 군사를 평정,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 문서는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에 대한 포상으로 전지를 내리는 사여왕지이다. 정사공신에 대한 특전과 포상은 공신녹권에 명시되어 있거니와, 이 왕지에는 녹권에 기재된 150결(結)의 공전에 대해 그 지방, 위치와 결(結)·부(負)·속(束)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당해 지번을 적은, 예컨대 ‘업자(業字), 월자(月字)’ 등의 우측에 바뀌어진 지번 ‘금채(今彩), 금영(今盈)’ 등을 적고 있다. 그 공전은 양주(楊州)·견주(見州)·교하(交河)·개성(開城)·광주(廣州)·연안(延安)·이천(利川)·강화(江華)·서원(瑞原)·마전(麻田)·수원(水原) 등에 위치한 전답 150결 38부이며, 이를 자손들이 영구히 소유하도록 왕지를 적고, 문서의 말미에 왕지를 받은 연월일이 적혀 있다. 또한 이를 확증하는, 3개의 ‘조선왕보(朝鮮王寶)’라는 새보(璽寶)를 ‘왕지(王旨)’, ‘한천군조온(漢川君趙溫)’, ‘연월일’에 각각 주인(朱印)으로 찍고 있다. 그리고 끝에 왕지를 받들어 사급(賜給)하는 ‘도승지……지이조사(都承旨……知吏曹事) 이(李, 文和)’가 서명, 수결(手決)하고 있다. 이 왕지는 정사공신에게 사여한 공전문권(功田文券) 가운데 처음 발견된 것으로, 조선 초기 공신 연구는 물론, 고문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의 사령홍패 등의 왕지는 현재 10여 건이 발견, 지정되었으나, 사패왕지는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번역 해제 】 (1장) 조선 정종 1년(1399)에 사급한 왕지로, 그 전해(1398)의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 조온에게 각처의 토지를 사급한 내용이다. 임금이 내려주는 전지(田地)인 사패지(賜牌地)의 소재지와 면적이 기재되어 있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694

    입학도설(入學圖說) / 조선 세종 7년(1425) / 1책 / 목판본/관판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 성남시 / 선장
    공양왕 2년(1390) 권근(權近)이 초학자들을 위하여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 목판본으로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의 두 가지가 있다. 전집 단간본은 태조 6년(1397) 경상도 진양(晉陽)에서 도호부사 김이음(金爾音)에 의하여 간행된 초간본이다. 도합 26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합간본은 14종의 도설을 첨가하여 세종 7년(1425)에 역시 진양에서 출간되었으며, 변계량(卞季良)의 발문이 있다. 그 밖에 낭주본(浪州本)·영천본(榮川本)·경안각본(慶安刻本) 등이 남아 있다. 권근의 책 서문에 이 책의 저술동기가 초학자들에게 성리학의 기초지식을 쉽게 소개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하여 도해(圖解:문자의 설명 속에 그림을 끼워 그 부족한 것을 보조한 풀이)의 방식을 이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내용은 전집에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천인심성분석도(天人心性分釋圖)>·<대학지장지도(大學指掌之圖)>·<중용수장분석도(中庸首章分釋圖)>·<제후소목오묘도궁지도(諸侯昭穆五廟都宮之圖)> 등 26종, 후집에 <십이월괘지도(十二月卦之圖)>·<주천삼신지도설(周天三辰之圖說)>·<일기생윤지도설(日期生閏之圖說)> 등 14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이 중 첫머리에 나오는 〈천인심성합일지도〉는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된다.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성리학의 중심개념인 태극·천명·이기·음양·오행·사단·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도설은 후대에 이황(李滉)과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후대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대학지장지도〉·〈중용수장분석도〉·〈논맹대지(論孟大旨)〉·〈오경체용합일지도(五經體用合一之圖)〉 등은 사서와 오경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해설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그의 〈대학지장지도〉는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에서 제4〈대학도(大學圖)〉에 거의 그대로 인용, 설명되고 있다. 그 밖의 하도(河圖)·낙서(洛書)·태극·선천(先天)·후천(後天)·율려(律呂)·오성(五聲) 등의 도설로 성리철학의 우주론 및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자 김반(金泮)에 의하여 계승되어 ≪속입학도설≫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카 채(採)로 하여금 ≪작성도(作聖圖)≫·≪작성도론(作聖圖論)≫ 등을 지어 학풍을 이어받게 하였다. 또한, 이황과 정지운으로 연결되어 조선시대 성리학을 심화시켜주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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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4(橡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 貞元本 卷四) / 고려 말기 /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이 책은 당나라 때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본 주본화엄경을 저본으로 고려시대에 상지(橡紙)에 은니(銀泥)로 사성한 고려사경. 고려사경 1권 1첩(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137호. 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 중에 하나이며,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은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500아라한(阿羅漢: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아난존자가 부처의 설법 내용을 암송하여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결집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불경이 편찬되어 별개로 유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 역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을 것이나, 산스크리트 완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초기 경전의 상세한 성립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화엄경은 이처럼 결집과정을 거쳐 편찬된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이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번역된 한역본(漢譯本)은 현재 삼본(三本)이 전하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경은 당나라 정원 연간에 반야가 번역한 40권본 정원본 화엄경 가운데 권4의 경문을 감지(紺紙)에 은니로 사성(寫成)한 1첩에 해당된다. 장정은 마치 병풍처럼 펼쳐 볼 수 있는 접장(摺裝)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전후의 표지는 훼손이 심하여 보수한 상태이다. 표지는 연꽃과 보상화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앞표지의 중앙에 경패 모양의 도기(圖記)에 ‘대방광불화엄경권제4(大方廣佛華嚴經卷第四)’라는 경명이 기재되어 있고 그 밑에 ‘정 1(貞 一)’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貞)’은 ‘정원본(貞元本)’을 줄여 기재한 것으로 이해되나, 숫자 ‘1(一)’은 책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4(四)’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권수에 변상도는 실려 있지 않으며, 권수제는 표지의 서명과 동일하며, 다음 행에 역자표시가 보이고 있다. 경문은 은니로 사경되어 있으나, 전후부분이 누습으로 인하여 훼손상태가 심각하여 은색이 탈색되어 있다. 사경면은 상하의 사란(絲欄)은 금니로 가느다랗게 그어져 있으며, 행을 구분하는 계선도 매우 가는 실선으로 그어져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한 장은 24행이 수록되어 있고, 접은 한 면은 6행씩 구분되어 한 행에는 17자씩 배자되어 중국의 돈황사경과 동일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상하사란 사이의 높이는 21.0cm이며, 1절은 12.4cm로 한 장의 길이는 대략 50.0cm정도이다. 접은 상태의 사경 크기는 31.0cm×12.4cm이다. 서체는 전형적인 수 ‧ 당사경에 보이는 사경체가 반영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상지(橡紙)에 은니로 쓰여 있는 이 사경의 제작시기는 금니로 그려진 표지화의 연화문과 사경체의 특징 등으로 보아 대략 고려후기 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이 사경은 전체 권40 중 1축 해당되고 권수에 변상도와 권말에 사성기(寫成記)가 없으나, 상지에 은니로 쓰여진 희귀한 고려사경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6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7(紺紙金泥妙法蓮華經 卷七) / 고려 공민왕 15년(1366)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이 책은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것을 고려시대 감지(紺紙)에 금니(金泥)로 필사한 7권 7첩 가운데 1권 1첩의 사경이다. 법화경은 화택의 비유 등을 들면서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열반의 언덕에 실어 나르는 수레에 비유하여 누구나 각기 다른 방법으로 수행하더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대승경전이다. 권말의 사성기(寫成記)에 의하면 공민왕 15년(1366) 9월 권도남(權圖南)을 비롯한 권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선조들의 극락 정토에 머물기를 발원하여 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경은 앞부분 금니의 색깔이 바래고 글씨 획의 일부가 희미해진 부분이 있고 뒷부분의 글씨와 종이의 질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14세기 초기에 뒷부분이 파손된 사경을 1366년에 보사(補寫)하여 봉정사(鳳停寺)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7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7(白紙墨書妙法蓮華經 卷七) / 조선 태종 5년(1405) / 1권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간행된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이 사경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본을 태종 5년(1405) 백지에 먹으로 쓴 전질 7권 중 제 7권이다. 권말에 붙인 태종 5년 6월 15일에 각지(角之)가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도인(道人) 신운(信雲)이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성한 것이다. 이때 한상식(韓尙植)의 부인 윤씨(尹氏)에게 말하여 동참하도록 하고,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의 부인 한씨(韓氏)가 또한 함께 발원(發願)하여 본문을 묵서로 사성하고 겉장을 금ㆍ은니로 장식하였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표지를 잃어 볼 수 없다. 이 때 《범망경(梵網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보현원행품(普賢行願品)》 등을 함께 사성하였고, 파평군부인(坡平郡夫人) 윤씨와 청주군부인(淸州郡夫人) 한씨, 정의택주(貞懿宅主) 한씨,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 송씨(宋氏) 등이 시주로 동참하였다. 이 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백지문서사경(白紙墨書寫經)으로는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8

    묘법연화경(언해) 권3(妙法蓮華經(諺解) 卷三) / 조선 세조 9년(1463) / 2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묘법연화경은 삼승(三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각기 다른 것을 깨닫게 하여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일시킴을 주안으로 하는 대승경전(大乘經典)으로 요진(姚秦)시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7권본이며, 흔히 ‘법화경’이라 일컫고 있다. 이 판본은 송(宋)나라 계환(戒環) 주해(註解), 일여(一如) 집주(集注) 본을 바탕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국역하여 새긴 것 중 권 제3책이 분책된 잔존 2책이다. 책머리에 세조 9년(1463) 9월에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신사로(申師路) 등이 이 역본을 새겨 장정하여 올린 상전문(上箋文)에 이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새긴 19인의 직함이 열거되어 있다. 권수(卷首)와 제82장의 서미(書眉)에는 초각(初刻) 초인(初印)하여 본문을 교정하고 찍은 ‘校正(교정)’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다. 이 초인본이 바로 불복(佛腹)에 봉안되었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듯 책이 더러움과 마멸됨 없이 깨끗하다. 글자체는 당대의 명필가를 동원하여 송설체계(松雪體系)의 원필(圓筆)로 정성껏 판서하여 새기고 있다. 그 중 큰자는 힘있게 쓴 굵은 필서체로 사뭇 중후하고 아름다우며, 한글자는 선획(線劃)으로 결구한 인서체(印書體)로 사뭇 곧고 강직하다. 이들 굵고 유려한 필서체 한자와 가늘고 작은 직선의 인서체 한글자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정교하게 새겨지고 묵청색의 윤을 내며 진하게 찍혀져 있다. 본문에는 한글로 토를 달고, 국역의 한글에는 방점을 찍고, 한자음은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으로 표기하고 있어 당시의 국어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699

    선문삼가염송집 권1(禪門三家拈頌集 卷一) / 조선 세조 10년(1464) /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고려 수선사 2세 법주인 혜심(慧諶)이 편찬한 『선문점송집(禪門坫頌集)』30권 중에서 고려시대 구암(龜庵)이 설두(雪竇) ‧ 천동(天童) ‧ 원오(珤悟) 등 3가(三家)의 내용만을 뽑아 6권으로 편집하여 고려시대 고려 고종 33년(1246)에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세종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중수(重修)한 선서(禪書). 목판본(간경도감판) 1권 1책(영본). 강태영 소장. 보물 제1142호. 이 판본은 간기가 없으나 보물 제959호로 일괄 지정된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祇林寺毘盧那佛腹藏典籍)에 동일본이 소장되어 있다. 기림사본이 제6권 말에 천영(天英)의 발문과 간행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고종 33년(1246)에 최이(崔怡)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하여 간행된 판본을 가지고 간경도감에서 중수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은 저본이 되는 『선문염송집』은 고려 중기의 진각국사 혜심(慧諶)이 문인 진훈(眞訓)등과 함께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을 모아 30권으로 집록하여 간행한 것이다. 혜심은 문인 진훈(眞訓)과 함께 선문공안 1,125칙(則)을 불경 또는 조사(祖師)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 염(拈)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선문의 기본학습서로 채택되어 선종의 승려들은 반드시 이를 공부하였고, 선종선(禪宗選)에서도 이 책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점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간본은 현존치 않아 그 간행여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고종 31년(1244)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 개판한 목판이 현재까지 해인사 판고에 보관되어 있어 간혹 후인본이 유통되고 있다. 이 남해도감본에는 새로이 347칙을 더하여 1,472칙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후기의 승려 각운(覺雲)이 스승인 혜심(慧諶)이 저술한 이 <선문염송>에 대하여 요어(要語)를 뽑고, 거기에 다시 ‘설화(說話)’를 붙인 주석서가 30권 5책으로 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간행 사실이 확실치 않은 실정이다. 그리고 각운이 이 책을 저술한 장소 역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또는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 등으로 알려져 있어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 책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통되어 선문(禪門)에서 필독서로 읽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숙종 12년(1686)에 천은자(天隱子)가 서(序)를 가하여 개판(開板)해 냄으로써 비로소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삼가염송>에는 설화의 내용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설화보다 앞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현재 고려 때 판각 간행된 판본은 그 전본이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조선시대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중수된 판본이 현재 경주의 기림사(보물 제959호)에 권 1~6의 3책이 소장되어 있고, 또한 권 1의 1책이 강태영(보물 제1142호)이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해제 대상본인 강태영본은 권 1의 1책의 영본이다. 전후의 표지가 근래 선장형태로 개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불복에 복장되어 있다가 나온 책으로 보인다. 새로 만든 앞표지에는 표제를 비롯하여 아무런 표시도 없으며, 책의 크기는 27.2cm×17.0cm이다. 이 책은 권 1임에도 불구하고 권수에는 서문을 비롯하여 별 다른 내용이 없이, 바로 권수서명이 보인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판면에는 계선(界線)이 없으며, 광곽의 크기는 17.7cm×13.3cm이다. 인쇄면은 반엽을 기준으로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매 행은 19자를 기준으로 배자하였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위쪽에만 가느다란 흑어미(黑魚尾)가 하향하는 형식이며, 상어미 아래에 ‘삼가점송(三家坫頌)’이라는 간략한 서명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권수와 장수(張數)가 표시되어 있으며, 장수 아래로 각수로 판단되는 이름이 각 장마다 새겨져 있다. 이들 각수의 이름이 고려본에 새겨진 것을 그대로 복각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세조 때 중수시할 때의 각수 이름인지의 여부는 보다 면밀한 조사가 요망된다. 자체는 고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불경들에서 보이는 매우 단아한 해서체로 구양순체를 방불케 한다. 지질은 조선 간경도감본에서 흔히 보이는 세로발이 굵게 나타난 인경지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간혹 볏짚이 혼용된 고정지도 보이고 있다. 현재 기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은 전체 6권이 3책으로 제본되어 있어, 본래 2권을 한 책으로 편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강태영본은 1권만이 한 책으로 제책되어 있는데 복장시에 분책하여 넣었거나, 혹은 불복에서 나온 이후 각 권마다 따로 제책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리고 기림사본 권6의 말미에는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고, 또한 후서의 끝부분에 ‘천순8년갑신세(1464)조선국간경도감봉 교중수(天順八年甲申歲朝鮮國刊經都監奉 敎重修)’라는 간행기가 기재되어 있다. 이 후서는 ‘丙午(병오)’년에 천영(天英)이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천영은 고려 수선사 제5세 법주인 원오국사로 바로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양택춘노비문서>의 주인공이다. ‘丙午(병오)’년은 고려재조대장경이 거의 완료가 된 무렵인 고려 고종 32년(1246)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남해 등에 분사된 분사대장도감에서는 정장(正藏)이 아닌 일반 불서류와 개인 문집 등이 판각되었으며, 특히 이 책의 저본이 된 <선문염송집> 또한 분사도감에서 판각되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본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후서의 내용에는 ‘구암노선(龜庵老禪)’이 편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편찬자 ‘구암(龜庵)’은 당시 이러한 송고(頌古)를 취급할 만한 인물로는 혜심이 찬집한 <염송집>을 보완 중각한 바 있는 수선사의 4세 법주인청진(淸眞)국사 몽여(夢如)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후서의 끝에 기재되어 있는 간행기에 의하면, 이 책은 조선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중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청진국사 몽여의 주관으로 편찬된 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 선가의 입장을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선문 삼가의 견해를 수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책이 편찬된 이후 선종의 세력이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 중심으로 강화되면서, 그 외 계통의 선서가 점차 잊혀져 버렸으나, 그 후 조선 세조 때 새로 중수되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고려의 선사상 및 불교 판본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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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 권4~6(詳校正本 慈悲道場懺法 卷四∼六) / 조선 초기 /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참법은 현생에 쌓은 많은 죄업을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참회하는 법회를 말하는 것으로, 양나라 진관(眞觀) 등 여러 스님에 의해서 편찬된 책이 바로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다. 이후 원나라에서 이를 상세하게 교정하여 편찬한 ‘상교정본(詳校正本)’이 간행되었으며, 고려에서 이 판본을 저본으로 복각 간행한 불교의례서. 목판본 3권 1책(결본). 강태영 소장. 보물 제1143호. 이 책은 참회의 법회를 수행하여 영험을 받아서 죄업은 씻어 버리고 화복을 누리게 되고 나아가서 망령을 구제하게 되면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어둠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공덕을 발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강태영 소장본은 전 10권 가운데 권4에서 권6의 3권 1책에 해당되는 결본 상태이다. 표지는 비단으로 만들고 제첨을 붙여 경제(經題)를 기재하고 있는데, 제첨의 테두리와 경제만은 금니로 쓰여져 있다. 이러한 표지 형식은 대부분 궁중에서 발원하여 조성된 공덕경에서 간혹 보이고 있다. 권수에는 별다른 사항 없이 권두의 경제는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으로 되어 있고, 다음 행으로 ‘양조제대법사 집찬(梁朝諸大法師 集撰)’이란 매우 특이한 저자표시가 기재되어 있다. 양나라의 여러 법사가 공동으로 편찬한 일종의 단체저자 표시로 생각된다. 각 권의 말미에는 <음의(音義)>가 부기되어 있어 참고된다. 이 책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으로 일반적으로 권자나 접장(摺裝)의 형태로 제책할 수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중앙의 접힌 부분에 있는 판심부가 없으며, 어미나 흑구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권수 및 장수는 ‘참4 1’(懺四 一)로 표시되어 해당 위치를 알 수 있다. 반엽을 기준으로 모두 5행이며, 한 행은 13자로 배자되어 판각되어 있다. 본문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휘(諱)인 ‘건’(建)자에서 대해서 결획방식으로 피휘(避諱)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 서적의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의 중수본에도 피휘가 그대로 판각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피휘만으로는 고려본의 여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지질은 조선 전기에 불경 인출에 주로 사용되었던 전형적인 인경지(印經紙)로 보이는데, 발무늬는 매우 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강태영본과 동일한 책으로 보이는 판본이 장흥 보림사에 권9 ‧ 10의 1책이 보물 제1252호로 지정되어 소장되어 있다. 보림사본의 권9의 끝에는 원판(原板)의 시주명을 비롯하여 새로이 김혼(金渾) 등의 영가명(靈駕名)이 보이고 있으며 그 끝으로 ‘정통12년(세종 29, 1447)정묘계추유일(正統十二年丁卯季秋有日)’이라는 기록이 또한 판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장에 ‘선부노귀산(先父盧龜山)’의 영가문과 ‘주상전하보위천장(主上殿下寶位天長)’으로 시작하여 발원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끝으로 ‘대공덕주 명빈김씨(大功德主 明嬪金氏)’와 ‘동원시주 소혜궁주노씨(同願施主 昭惠宮主盧氏)’ 등의 이름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10의 음의(音義) 말미에 ‘천순6년임오세(1462)조선국간경도감봉교중수(天順六年壬午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重修)’라는 중수기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판본은 정통 12년(1447)에 대공덕주 명빈김씨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각성되었던 판본을 어느 곳에 보존해 오다가 세조 8년(1462)에 이르러 간경도감에서 재차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권10의 간경도감의 중수 사실을 밝힌 간기만을 추가로 새겨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유사 판본 여러 종이 전존되고 있는데, 이 중수기를 통해 정확한 간행연대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현생에 쌓은 많은 죄업을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참회하는 과정을 의례화한 책으로, 이와 유사한 참법서들이 몇 종이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고려본을 저본으로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판본으로, 이와 권책수가 다른 동일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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