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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 충재일기(權橃 沖齋日記) / 조선 중종 3년(1508)~중종 13년(1518) / 6책 / 필사본/일기류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선장중종(中宗) 때의 학자(學者)이며 관료인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년~1548년)이 직접 쓴 일기(日記)이다. 일기의 구성은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수록 기간은 아래와 같다. 수록 기간은 일기의 내용에서도 확인되지만 표지에도 그 기간을 수록하고 있다. 한원일기 제1책 : 중종 3년(1508) 1월 [5]일-1508년 9월 20일 한원일기 제2책 : 중종 3년(1508) 12월 1일-동왕 4년(1509) 9월 14일 당후일기 : 중종 5년(1510) 3월 1일-1510년 3월 30일 승선시일기 제1책 : 중종 13년(1518) 5월 15일-1518년 7월 9일 승선시일기 제2책 : 중종 13년(1518) 7월 10일-1518년 11월 6일 신창령추단일기 : 중종 4년(1509) 10월 28일 작성 이 6책의 『충재일기』는 권벌(權橃)의 문집(文集)인 『충재집(冲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으며,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할 때에도 자료로서 채용되었다. 이들 일기는 충재 권벌이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직접 기록한 친필로서, 관찬 역사서와 같은 가공이 없는 직접적인 기록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일기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등 몇 종이 없고 그 내용도 관리로 재직할 때의 기록이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관료 생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1책) 한원일기(翰苑日記)는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중종 3년에 한림원 예문관에 제수되어 관직을 수행하면서 기록한 사초(史草)이다. 한원(翰苑)이란, 문한서(文翰署), 한림원(翰林院)으로도 불렸던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이다. 1책은 중종 3년(1508)년 정월 초5일부터 9월 20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충재집(冲齋集)』과 조선왕조실록에 같은 내용이 기재된 것도 있는데, 다소 글자의 출입이 있다. 주로 음직(蔭職)으로 가자(加資)한 ‘음가(蔭加)’에 대해서 논의한 내용이 많다. 노영손(盧永孫)의 공로를 한(漢)나라 김일제(金日磾)와 차이가 없다고 특별히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서용(敍用)한데 대해 음가에 대한 일은 전례가 있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더구나 전례가 없는 경우는 당연히 바로잡아야 한다며 노영손을 서반에 서용할 수 없다고 대간(臺諫)이 아뢰었다. 공신의 음가를 개정하는 일에 대하여 대간이 넉 달 동안 논계(論啓)하고 석 달 동안 사직했으며, 시종(侍從)도 여러 달 아뢰어 비로소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상(上)이 부득이 따랐다. 그리고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전토(田土)와 장획(臧獲)을 줄일 것을 청했지만,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 외 상(上)이 인후증(咽喉証)과 종증(腫證), 조그마한 종기가 있어 건강상의 이유로 경연(經筵)을 정지한 내용,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侍講)한 내용, 상이 태평관(太平館)과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등에서 명나라 사신 이진(李珍)과 진호(陳浩)를 위해 연회를 베푸는 내용, 내수사(內需司)가 대자사(大慈寺)를 중수하려 했지만 태학생 홍일덕(洪一德)과 채침(蔡忱) 등이 올린 상소로 인해 13일 만에 정지한 내용, 기신재(忌晨齋)와 양종(兩宗)을 혁파(革罷)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은 내용, 평안도와 황해도가 가뭄으로 인해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면세하지 말 것을 호조에서 청했지만 군량보다 백성들을 더 가련하게 여겨 특별히 면세한 내용, 여러 날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자 태백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모든 연향(宴享)의 일을 일체 정지하여 하늘의 재변(災變)에 응답하라는 전교를 내린 내용, 9월 20일 이후 11월까지 어버이 병환으로 정사(呈辭)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당시 조정의 정무(政務) 처리 과정과 기타 정황에 대한 기록 및 일기 변화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 작성자 : 주정순 ) (2책) 한원일기(翰苑日記)는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중종 3년(1508)에 한림원 예문관에 제수되어 관직을 수행하면서 남긴 수필 일기(手筆日記) 2책 가운데 제2책에 해당된다. 1책은 중종 3년(1508) 정월 초5일부터 9월 20일까지 기록되어 있고, 제2책은 12월부터 기사년(1509) 9월 14일까지 기록한 내용이다. 중간에 9월 21일부터 11월 말까지는 누락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 1467∼1510)과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단행한 뒤로 조정의 대신의 인사와 국정을 논하는 정황 등을 기록하였다. 이는 『충재집(冲齋集)』3권 일기에 실려 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할 때에도 자료로서 채용되었는데, 다소 글자의 출입이 있다. 중요한 기사는 아래와 같다. 영의정(領議政) 유순(柳洵, 1441∼1517)의 인물평과 반정 당시의 비굴한 처신, 기타 공신의 상격(賞格), 특히 이줄(李茁)이 독대(獨對)하여 아뢴 일을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한 사건에 대한 시비를 논한 부분을 자세하게 적었다. 대신들이 간악한 형상을 통촉하여 거듭 처벌을 주장하였지만, 그는 중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평소 서로 알았었고, 또 먼 척족(戚族)이기 때문에 접견을 한 것이라 하고, 외부에 자랑하였다는 등의 사실만 국문(鞠問)하도록 하였다. 또 조선시대 중국성운학자(中國聲韻學者)였던 최세진(崔世珍, ?∼1542)을 성균 직강(成均直講)으로 삼은 일과 자색(姿色)이 있고 재예(才藝)가 성숙한 여기(女妓)는 비록 속신(贖身)이 되었다 하더라도 입역(入役)하지 말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내연(內宴)을 할 때 자색(姿色)이 있고 재예(才藝)가 있음을 알고 이로 인해 마음이 생겼으니, 당시 제조(提調)가 된 자가 잘못하였다고 평했다. 정국(靖國)과 정난(定難) 두 공신 회맹축(功臣會盟軸)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비단 1천 여척(餘尺)은 한두 해 만에 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에서 쓰는 것도 많으므로 종이로 대신하자는 박원종(朴元宗)의 건의를 따랐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왜노(倭奴)가 제주도 지역의 선인을 피살하거나 다른 지역의 성을 함락하고 장수를 살상하는 정황을 볼 때, 우리나라를 이처럼 업신여기니 비록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이므로 그만 두자는 의논도 보인다. 한원일기 2책은 다른 책에 비하여 분량이 많다. 원본이 약간 훼손되고 말소하거나 뒤바뀐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글씨도 능숙하고 유려할 뿐만 아니라, 당시 중종이 조정에서 시행한 경연(經筵)과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과정, 기타 대신들의 인품에 대한 기록 및 문무과(文武科)의 거행과 천문(天文)과 일기(日氣) 변화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 작성자 : 김상환 ) (3책) 「신창령추단일기」는 서얼 출신 종친(宗親) 신창령 이흔(李訢)의 역모 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이다. 이는 중종조에 학자이자 관료로 이름을 떨친 충재(冲齋) 권벌(權橃, 1748~1548)이 직접 쓴 『충재일기(冲齋日記)』의 한 부분인데, 『충재일기』는 모두 6책으로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 1책이다. 권벌은 중종 4년(1509) 1월에서 1510년 3월까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하였기 때문에 이 기록을 남길 수가 있었고, 그 내용의 대강은 아래와 같다. 1509년 10월 28일 사시(巳時)에 우의정 성희안(成希顔),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 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이 상산령(常山令) 이말손(李末孫)을 빈청(賓廳)으로 데리고 와서 역모를 고변하게 하였는데, 이말손은 완성군 이귀정의 서제(庶弟)이다. 고변의 내용은 종친(宗親)인 정송수(貞松守) 이석손(李錫孫)과 그의 아들 신창령 이흔 및 의산령(義山令) 이윤(李潤),영정수(永貞守) 이복중(李福重) 등이 벼슬아치 박영문(朴永文)ㆍ황맹헌(黃孟獻)ㆍ심정(沈貞)ㆍ이공우(李公遇)ㆍ윤순(尹珣)ㆍ황형(黃衡)ㆍ강윤희(康允禧)ㆍ이이(李峓) 등과 함께 동짓날 밤에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삼공(三公)이 입궐할 때 쏘아 죽이고, 향교동(鄕校洞) 고개에서 횃불을 올리면 남산에서도 횃불을 올려 삼정승을 죽인 것을 알린 뒤에 함께 대궐 바깥에 모여서 임금을 폐위하고, 완원군(完元君)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역모에 관련된 자들을 잡아들여 밤을 새워 추문한 결과 모의 내용과 거사 과정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여 그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였다. 그러나 왕실에 불만을 품고 종친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어울려 비록 어설프나마 역모를 모의한 것은 확실하므로 주모자인 이흔은 고변 다음날인 10월 29일에 처형하였고, 관련자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으며, 사건의 고변자를 비롯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에 따라 포상을 하였다. ( 작성자 : 이완규 ) (4책) 중종 5년(1510) 3월 1일에서 그달 30일까지의 한 달 동안, 국왕(중종)의 동정과 조신의 인사ㆍ정치ㆍ외교ㆍ과시(科試) 그리고 상소 등을 당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하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직접 보고 들은 대로 적은 일기(1책, 필사본)이다. 당후(堂后)란 승정원 주서가 거처하던 방으로 승정원의 뒤에 위치해 있다 하여 주서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권벌의『당후일기(堂后日記)』는 『충재일기(沖齋日記)』란 명칭으로 다른 일기와 함께 7책이 보물 제261호로 일괄 지정된 바가 있다. 이 『당후일기(堂后日記)』가 이미 지정된 지정문화재의 기록에는 ‘1509년(중종4) 1월에서 1510년(중종5) 3월까지 권벌이 주서 재직시에 적은 일기로 1책이다.’라고 되었는데, 이 일기는 맨 마지막 달에 해당한다. 책의 표지에 ‘堂后日記’란 제첨(題簽)이 있고, 그 오른쪽에 ‘中宗大王 五年, 明武宗 五年’이란 11자가 세서(細書)로 2줄이 쓰여 있으며, 동일 부전지(附箋紙)에 ‘庚午 起三月 初一日 至晦日’이란 11자가 중대자(中大字)로 쓰여 있다. 표제(表題) 및 세서로 쓴 ‘中宗’ 등 11자는 권벌의 후손이 쓴 듯하고 ‘庚午’ 등 11자는 권벌의 친필로 보인다. 일기의 체재는, 연월일을 별항(別行)으로 잡아 그날의 간지(干支), 날씨의 음청(陰晴), 기후나 천문(天文)의 특이한 현상을 적고, 줄을 갈아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어경연(御經筵)’ ‘정상참 경연(停常參經筵)’ ‘친제(親祭)’ ‘전왈(傳曰)’이라 하여, 임금이 경연에 납시었느니, 상참(常參)과 경연을 정지하였느니, 친히 제사를 거행하였느니, 전교(傳敎)는 어떠하였다느니 등을 먼저 적고 다음에 조신과의 정치ㆍ관리 임면ㆍ축성(築城)ㆍ옥사(獄事) 등의 현안을 논한 사실, 또 조신들이나 민간인의 상소 내용과 그 처리, 과거 시험의 실시와 합격자, 외교 사절의 귀국 복명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이유청(李惟淸)의 어머니가 유배된 아들의 석방을 간청하는 애절한 소나, 하정사(賀正使) 안당(安?)이 복명한 명무종(明武宗, 정덕)의 근황에, 사냥만 하고 경연을 열지 않는다느니, 내시를 총애한다느니 하는 일, 김수동(金壽童)이 정승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옥 사발에 똥을 담는다’는 고사를 끌어 자기는 영상의 적임자가 아님을 말한 일들은 매우 흥미롭다. 중종 초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면서 겸임사관의 기능을 담당한 주서의 일기인 이 『당후일기(堂后日記)』는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 작성자 : 이정섭 ) (5책) 이 일기는 조선 중종조의 문신인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승지(承旨)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것이다. 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초5일까지의 기록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할 때 근거 자료로 쓰였던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보물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물들의 이름과 자를 혼용하고 때로 좌공(左公)이라는 표현처럼 벼슬에 공(公)이라고 존칭을 쓰는 등 현존하는 승정원일기와 같은 체제의 엄격성이나 표현의 정제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개인적인 가정사보다는 국가적인 변고나 임금 및 조정의 일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는 면에서 보면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맨 앞쪽과 맨 뒤쪽에는 임의로 메모한 것 같은 기록이 있는데,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판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글자들을 보더라도 약재명 등 일기의 주요 내용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또 본문 중에는 “마땅히 아래 3일조에 있어야 한다.[當在下三日條]”는 등 작은 글씨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는 후손들이 열람하거나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 형식은 일자, 날씨, 승정원 승지의 출근, 입직 및 경연 참석 여부를 기록하고, 기타 사항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자의 기록은 통일되지 않았다. 연도까지 완전하게 기록한 경우도 있고, 일자만 적은 경우도 있다. 날씨는 하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은 정사(政事), 즉 당시 관원들의 인사와 관련된 사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인사 기록과 마찬가지로 임명하거나 해면(解免)하는 인물의 명단을 전재하고 있지만, 그와 관련한 논의들도 세밀히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가령, 학행이 뛰어나 벼슬에 임명된 노필(盧㻶)이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뛰어넘어 5품직을 제수받자 의정부의 정승들이 극력 반대하던 일이나, 최숙생(崔淑生)이 정승에 다음 가는 참찬에 제수 된 것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누차 저지하던 일은 당시 조정의 상호 견제 작용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잦은 지진 관련 내용을 통해 당시에 지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그 피해도 막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형벌을 혹독하게 가하여 죄수들이 자꾸 죽어가는 현실을 개탄하며 방지책을 고심하고, 삼복(三覆)이라는 3심 제도의 운영을 통해 사형 집행을 신중하게 하는 대목에서는 애민(愛民)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충청도 유생 권탁(權鐸)이 학교 교육, 소격서 등의 제사 폐지, 환관의 결혼 금지 등 3가지 시폐(時弊)를 과격한 언사로 아뢰었을 때도, 제제를 가하지 않고 진지하게 논의하여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서는 언로(言路)를 중시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그 밖에 육진(六鎭)의 성 아래에 살던 귀순 여진족을 괴롭히던 주장합(住張哈)이라는 여진족 추장의 처리 방안을 두고 골머리를 앓는 내용, 전라도 광양(光陽)에서 유생들을 시험하면서 맹자(孟子)와 정자(程子)를 욕되게 하는 답안을 용인한 수령을 파직시키라는 내용 등도 당시의 외교, 유학적 이념과 관련된 편린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주요한 자료이다. ( 작성자 : 권경렬 ) (6책) 이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冲齋) 권벌(權橃)이 1518년(중종13) 7월 10일부터 11월 초6일까지 승선원(承宣院)에서 처리한 업무(業務)를 적은 일기이다. 이는 『중종실록(中宗實錄)』 수찬(修撰)에도 사료(史料)로 채용(採用)되었고, 그의 문집인 『충재집(冲齋集)』 6권에 수록되었다. 다만 문집에는 「무인일기(戊寅日記)」라는 제목 아래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 수록되어 있다. 또 그가 남긴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이 모두 보물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의 내용은 승선원(承宣院)에서 처리한 업무(業務)의 내용들을 일기로 일일이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 승선원(承宣院)에서 왕명(王命)의 출납을 맡아 보아서, 왕에게 보고되는 문서는 승선원(承宣院)을 거쳐 보고되고 왕의 결재가 끝난 문서는 승선원(承宣院)을 통해 담당자에게 전달됐다. 따라서 이 일기는 이런 보고와 결재 상황뿐만 아니라 국왕(國王)이 일찍 기침(起寢)하여 하루 동안 진행한 갖가지 일들, 즉 왕의 거처(居處), 강연(講筵)과 신료(臣僚)의 접견(接見), 각종 회의와 지방에서 올라 온 상소(上疏) 등을 격식에 맞춰 정리한 것이다. 일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승지들이 왕께 아뢰기를, “관원(官員) 중에 누구는 학식과 덕망이 훌륭하니 승진시켜 주소서.” 하고, “누구는 게으르고 탐욕 하니 면직시켜 주소서.” 하여 국가평치(國家平治)를 위하여 왕께 누차 진계(進啓)한 것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또 어느 골에 사는 아무가 이러저러한 큰 불효를 하였는데, 그 고을의 관장(官長)들이 치죄(治罪)를 잘하지 못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건도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며, 그리고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심적(心跡)이 환하게 나타나도록 되었다. 예를 들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先生)이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을 위하여 힘을 쓰고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많이 등용하며, 구폐개혁(舊弊改革)을 과감히 하려함으로 훈구세력(勳舊勢力)인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그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결국 사사(賜死)되었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그 자신도 역시 자멸(自滅)에 이른 것을 정확히 기록한 것을 볼 때, 실로 후세(後世) 인주(人主)와 신하(臣下)들의 감계(鑑戒)의 거울이 될 만한 역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 작성자 : 김연뢰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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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禮念彌陀道場懺法 卷六∼十) / 조선 성종 5년(1474) / 5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목아박물관 / 경기 여주군 / 선장아미타불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 지은 죄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내용으로 원나라 왕자성(王子成)이 집록(集錄)한 것을 고려의 승려 혜랑(慧朗) 등이 1376년에 간행한 것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성종 5년(1474) 왕실에서 새로운 체제로 편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의식집이다. 목판본으로 권6~10 5권 1책으로 목아불교박물관 소장이다.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염불하고 참회하는 불교의식인 미타신앙(彌陀信仰)의 한 형태로서, 미타신앙과 관계되는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 중 아미타경을 독송하거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예경(禮敬)하며 참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이 불경은 본래의 의미는 경전 속에 담긴 이념적인 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미타경을 독송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차차 독송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덕을 중요시하여 송경의식(誦經儀式) 중심으로 의식화하게 되었다.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책의 크기는 30.5cm×24.2cm이며, 본문은 반엽을 기준으로 광곽은 사주쌍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5.0cm×19.0cm이다. 전체 9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5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가 있으며, 그 사이로 흑어미(黑魚尾)가 모두 하향 형식으로 되어 있다. 판심제와 권차는 상어미 아래에 장수는 하어미 아래에 각각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수가 되어 있는데, 표지도 그때 개장된 것으로 보인다. 표제는 ‘彌陀懺文(미타참문)’으로 묵서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지정본은 전10권 중 권 6~10의 5권 1책인데, 간기(刊記)가 없어 정확한 간행시기는 알 수 없으나, 권말에 성화10(1474)년에 쓴 김수온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때 간행된 판본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책의 간행에 직접 참여했던 장인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조선 전기 인쇄문화사 연구에 참고할 만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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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1(妙法蓮華經 卷一) / 조선 태종 1년(1401) / 1권 1첩 / 목판본/왕실본 / 목아박물관 / 경기 여주군 / 절첩장목아불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145호 묘법연화경 권1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조선초기 명필가인 신총(信聰)의 정서본(淨書本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이며 권1 1첩(영본)으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saddharma-pundarika-sutra”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는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정본은 조선 초기 태종1(1401)년에 간행된 어람본 능엄경(국박 보물 759호)과 자체가 일치되고 있어 대략 이 무렵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초기의 판본이다. 이 판본은 양정사(楊井寺) 주지를 지낸 신총(信聰)이 판각을 위한 판서본을 직접 써서 간행한 불경인데, 현재 권1과 3의 2책만이 우리나라에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지는 감지로 만들었는데, 앞 표지 중앙에는 금니로 제첨을 긋고 안에 금니로 서명을 기재하였다. 앞 표지를 넘기면 권수에는 변상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이 자리하고 있고 이어 왼쪽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전개되고 있다. 변상도는 고려본에 보이는 기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나, 구름 문양이나 산화 등의 요소를 잘 부각시킨 변용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변상도에 이어 당나라 도선(道宣)의 홍전서(弘傳序)가 실려 있고, 이 서문 다음에 ‘묘법연화경권일(妙法蓮華經卷一)’의 권두제가 보이고 있다. 권두제에 이어 역자표시와 ‘序品第一’의 품제가 차례로 기재되어 정형적인 서명사항을 보이고 있다. 품제(品題)에 이어 제4행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부터 경문이 시작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 스님 신총이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정성스럽게 새겨진 판본으로 송판 또는 원판의 복각이 아닌 독자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판본은 현재 국내에 2책만이 전래되고 있으며, 동일본 권3이 이미 보물(968호)로 지정되어 있어 그 전본이 매우 희귀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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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4(大方廣彿華嚴經 貞元本 卷二十四) / 고려시대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목아박물관 / 경기 여주군 / 절첩장이 책은 당나라 정원(貞元, 785~805)연간에 삼장 반야(般若)가 한역(漢譯)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40권본을 저본으로 고려 중기에 간행한 불경의 일종으로 목판본이며 권24 1권 1첩이다. 보물 제1146호로 목아불교박물관 소장이다. 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 중에 하나이며,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은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500아라한(阿羅漢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아난존자가 부처의 설법 내용을 암송하여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결집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불경이 편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 역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을 것이나, 산스크리트 완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초기 경전의 상세한 성립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화엄경은 이처럼 결집과정을 거쳐 편찬된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이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번역된 한역본(漢譯本)은 현재 삼본(三本)이 전하고 있다. 이 지정은 당나라 삼장 반야(般若)가 한역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정원본(貞元本)에 해당되는 경전이다. 형태적 특징은 상하단변(上下單邊)으로 상하간(上下間) 높이가 23.0cm이다. 한 장(張)크기 31.6cm×49.3cm에 이르며, 모두 24행으로 한 행은 17자로 배자되었고, 한 면은 6행씩 절첩(折帖)되어 있다. 판수제(板首題)가 ‘정원 이십사(貞元 二十四)’등으로 경명(經名), 권차(卷次), 장차(張次) 표시가 되어 있다. 표지는 감지(紺紙)인데, 바탕은 사경의 표지화에서 보이는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중앙에는 송광사에 소장된 경패와 유사한 형식의 패기에 학립사횡(鶴立蛇橫) 표시아래 금니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제이십사(卷第二十四)’와 그 아래로 ‘정(貞)’으로 표제(表題)와 삼본(三本) 화엄경 가운데 정원본(貞元本)임을 표시하고 있다. 이 판본은 자체가 매우 치졸함을 보이고 있어, 고려 숙종년간에 판각 인출한 판본을 저본으로 후대에 사찰에서 복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판목은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어 해인사 잡판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인출시기는 대략 14세기 후반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판본으로 권2, 7, 20, 31, 38 등 5첩이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표지 일부의 파손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된 선본으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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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3~4, 5~7(妙法蓮華經 卷三∼四, 五∼七) / 조선 성종 1년(1470) / 2책 / 목판본/왕실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을 명필의 대자 정서본을 바탕으로 궁중에서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 목판본 5권(권3~4, 5~7) 2책(결본). 강태영 소장. 보물 제1147호. 일반적으로 화엄경 ‧ 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의 우리나라 유통본은 대개 모두 7권본으로 장축(裝軸) 또는 제책(製冊)되어 있다. 이 강태영 소장본도 바로 구마라집의 한역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수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50여종이 간행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주체나 간행수단에 따라 성달생본계 ‧ 갑인자본계 ‧ 을해자본계 ‧ 대자본계 ‧ 간경도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강태영본은 조선 초기 성종 1년(1470)에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睿宗)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명필가가 법화경을 대자로 정서한 판하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불경으로, 현재 권3~4와 권5~7의 2책만 소장되어 있다. 표지는 최근에 새롭게 5침으로 제책하였는데, 앞표지에는 제첨만 붙어있지 경제는 쓰여있지 않은 상태이며, 책의 크기는 24.0cm×16.7cm이다. 권3~4은 제5품 「약초유품(藥草喩品)」부터 제13품 「권지품(勸持品)」까지 모두 9품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의 권수서명은 제1행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행에 ‘요진삼장법사구마라집봉 조역(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구마라집 한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제3행에는 품제(品題)가 보이고 제4행으로부터 경문이 시작되고 있다. 권7의 말미에는 성화 6년(1470) 김수온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마 이 무렵에 판각 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본문은 반엽을 기준으로 광곽은 사주쌍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4.0cm×16.7cm이며, 전체 8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3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가 있으며, 그 사이로 흑어미(黑魚尾)가 보이고 있다. 판심제는 위에 ‘법화경(法華經)’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경문은 표점으로 표시되어 있어 독경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그리고 난외에는 장막동(張莫同), 최금동(崔今同), 최득산(崔得山) 등의 여러 명의 각수(刻手)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특별히 각 판에 판각자의 실명(實名)을 기재하여 책임의식을 갖도록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 판본은 조선시대 판각술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자체는 상하로 길게 장방형을 이룬 구양순체의 필의를 방불케 하며, 비록 이름을 알 수 없으나 당시 최고의 선서자가 전통적인 우리의 사경체를 소화하여 쓴 서체로 이해된다. 그리고 지질 역시 최상품 인경지를 사용하였고, 먹색 또한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고의 명품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문에는 특별한 묵서구결이나 낙서가 보이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인출과 동시에 불복에 복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판본은 1470년에 판각 이후 성종 5년(1474)에 후인된 기림사본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후인(後印)되어 우리나라에 비교적 전본이 적지 않게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원판을 모본(母本)으로 중종 22년(1527)에 경상도 광흥사에서 복각된 이래 전국의 사찰에서 28차례 이상의 개판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될 정도로 널리 유통되었다. 따라서 이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 판본의 주요한 계통을 형성하였던 대표적 판본으로 불교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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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조선 성종 17년(1486)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명지대학교박물관 / 경기 용인시 / 선장이『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성종 17년(1486)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규봉암(圭峯菴)에서 간행한 목판본(木版本)이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수행자를 위해 저술한 수행 지침서로 불교 강원의 사집과(四集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고 있는 학인들이 공부해야 하는 필수 교과목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지눌(知訥)이 입적(入寂)하기 한해 전인 52세(1209)때, 말하자면 사상적(思想的)으로 가장 원숙한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교(敎)에 의해 마음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밀(宗密)(당(唐))의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간략하게 줄여 싣고 자기의 사상을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수록하면서, 부처의 마음(공적영지심(空寂霙知心))을 바로 깨닫고 만행(萬行)을 닦아 자이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야 올바른 수행자(修行者)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상근기(上根機)의 수행자가 여러 가지 알음알이에 걸려서 수행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보고, 경절문(徑截門)의 수행법(화두참구(話頭參究))을 아울러 밝혀 주고 있다. 우리나라 고승의 저술로는 드물게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현존하는 판본이 22종이나 되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연구주석서(硏究註釋書)로서 상봉정원(霜峰淨源)의 『절요사기분과(節要私記分科)』, 설암추붕(雪巖秋鵬)의 『사기(私記)가 있었고 현재 회암정혜(晦庵定慧)의 『법집별행록절요사기해(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와 연담유일(蓮潭唯一)의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등의 주석서(註釋書)가 전래되고 있다. 이 책은 고려시대 선교통합(禪敎統合)을 이룩하고 사교입선(捨敎入禪)의 한국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선사상(禪思想)이 결집되고 있어 한국최고의 철학서이며 불교이론과 실천의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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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표제공자가어구해(新刊標題孔子家語句解) / 조선 태종 2년(1402) / 6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명지학원 / 경기 용인시 / 선장이 책은 공자가 공경대부 및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 중에서 논어에 편입하지 않은 것을 모아 원나라 왕광모(王廣謀)가 각 장별로 표제(標題)하고 소상하게 구해(句解)를 붙인 것이다. 권말에 원나라 태정 갑자(泰定 甲子)에 창암서원(蒼巖書院)에서 간행하였다는 기록과 1402년 박은이 지은 간기(刊記)를 고려할 때, 원나라 태정 원년(1324) 창암서원(蒼巖書院)에서 간행한 판본을 수입하여 태종 2년(1402) 강원감영에서 번각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은(朴訔, 1370~1422)은 고려말기의 유학자 박상충(朴尙衷)의 아들로 제1~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녹훈되고 태종 2년(1402)에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로 부임하였다. 이때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간행되지 않았음을 알고 그곳에서 번각해 냈던 것이다. 가. 목판본(木版本) 6권(卷) 1책(冊) 나. 저지(楮紙)로 선장(線裝) 다. 규격은 16.3×26.8cm 라. 좌우쌍변(左右雙邊) 사주쌍(단)변(四周雙(單)邊), 반곽(半郭) 11.9cm×19.0cm, 상단 무계(無界) 소자두주(小字頭註), 하단 유계(有界) 12항(行) 22자(字), 주쌍행(註雙行), 세흑구(細墨口), 하향흑어미(下向墨魚尾) 고정(藁精)이 많이 섞인 조잡한 저지(楮紙)를 사용하여 찍어 냈으며, 권수(卷首)의 권차별 목차중 권 1~4의 목차가 수록된 2장이 결락되어 백지를 끼워 넣었다. 이 책판은 조선초기의 지방관이 주도하여 만든 강원감영 판본으로 비교적 정교하여 조선 전기 출판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1993년 1월 1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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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1~3(妙法蓮華經 卷一∼三) / 조선 세조년간~성종년간(1455~1494) / 3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선장이 책은 세조(世祖)~성종연간(成宗年間, 1455~1494)에 황진손(黃振孫)이 새로 쓴 판하본으로 간행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목판본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당나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하고 송나라 계환(戒還)이 해를(解) 붙인 7권 가운데 제 1~3권이 한 책으로 선장(線裝) 되어 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묘법연화경판본(妙法蓮華經版本) 가운데 성달생서(成達生書) 계통(系統)과 구별되는 황진손서(黃振孫書)의 법화경으로 조선조의 독자적인 판본으로 희귀한 자료이다. 이 책은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보물 제793호)에서 나온 묘법연화경과 같은 판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709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31(大方廣佛華嚴經 貞元本 卷三十一) / 고려 말기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절첩장이 책은 당나라 정원(貞元)연간에 삼장반야(三藏般若)가 漢譯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40권본을 저본으로 고려중기에 간행한 목판본 1권 1첩(결본). 가천박물관 소장. 보물 제1154호. 불교경전은 부처님 입멸후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500 아라한(阿羅漢,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아난존자가 부처의 설법 내용을 암송하여 승인을 받는 방법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결집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불경이 편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 역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을 것이나, 산스크리트 완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초기 경전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은 이처럼 결집과정을 거쳐 편찬된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이다. 이후 이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번역된 한역본(漢譯本)은 삼본(三本)이 전존되고 있다. 이 가운데 60화엄은 동진의 안제(安帝, 418~420) 때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전체 34품을 번역하여 처음에는 50권으로 편찬한 후에, 여기에 화엄종의 제3조인 현수(賢首) 법장(法藏, 643~712)이 680년에 일조(日照)스님이 인도로부터 가져온 범본(梵本)에 의거해서 결락된 부분을 보완하여 60권본으로 완성했다. 그리하여 일명 진본(晉本) 또는 진역(晉譯), 구역(舊譯)으로 불리고 있다. 80화엄은 695년에 낙양에 온 실차난타(實叉難陀, 652~698)가 39품으로 번역(695~698)한 경전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서 당나라가 20여년 동안 일시 주(周)로 이름하였던 시기로 주본(周本) 또는 주역(周譯), 신역(新譯)으로 이름되고 있는 것이다. 이 80화엄은 내용상으로도 가장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번역도 수려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40화엄은 카시밀의 스님인 반야(般若)삼장이 덕종(德宗) 연간(795~798)에 다른 범본을 저본으로 상기의 두 화엄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을 대상으로 번역하여 40권으로 편찬한 것이므로, 완전한 전체 번역은 아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으로 이름하기도 한다. 또한 번역 당시의 연호가 정원(貞元)였던 연유로 일명 ‘정원본(貞元本)’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이처럼 화엄경은 <60화엄>이 34장, <80화엄>이 39장, 티베트어역이 45장이지만, 실은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다만 유일하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화엄경은 한국에서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중에 하나이며,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이 책은 당나라 삼장반야(三藏般若)가 한역(漢譯)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정원본(貞元本) 40권본(卷本) 가운데 하나이다. 이 판본은 고려 숙종년간에 간행한 판본의 복각본으로 보이는 국보 제206호 해인사 고려각판에서 찍어낸 판본으로, 그 간행시기는 13~14세기로 추정된다. 표지는 감지(紺紙)인데 한가운데의 학립사횡(鶴立蛇橫) 표시아래 금니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제삼십일(卷第三十日) 정(貞) '으로 표제(表題)와 삼본(三本) 화엄경 가운데 정원본(貞元本)임을 표시하고 있다. 상하단변(上下單邊)이고 상하간(上下間) 23.0cm, 장(張) 크기 31.6cm×49.3cm에 24항(行) 17자(字)씩 배열되었고 6항(行)씩 절첩(折帖)되어 있다. 판수제(版首題)가 '정원 삼십일구(貞元 三十一九)'등으로 경명(經名), 권차(卷次), 장차(張次) 표시가 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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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본 경률이상 권1(再雕本 經律異相 卷一)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권 1첩 / 목판본/대장도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절첩장이 책은 양(梁) 시대(A.D. 516)에 보창(寶唱), 승민(僧旻) 등이 14부로 편찬한 불교백과전서로 고려시대 1234년에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판본에서 여말선초에 인출한 불경. 목판본 1첩. 가천문화재단 소장 보물 제1155호. 여러 경장과 율장 등에서 요점만 뽑아서 정리해 놓은 일종의 불경사전으로 극히 일부는 몇몇 논서에서 추출된 것이지만 그 예는 그렇게 많지 않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경전을 토대로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의 이해를 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요긴한 도움을 주는 문헌이다. 전체 내용은 42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문마다 항목을 설정한 뒤에 그에 해당하는 경문 등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해석의 말미에는 인용 출처를 밝히고 있다. 제1 천부(天部)에서는 3계(界)의 여러 천계(天界), 즉 욕계(欲界) 6천, 색계(色界) 23천, 무색계(無色界) 4천 등을 다루고 있다. 또한 3계의 성괴(成壞)를 3소재(小災), 3대재(大災) 등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1권부터 제2권에 해당한다. 제2 지부(地部)에서는 염부제(閻浮提)와 울단왈(鬱單曰), 둘로 나누어서 갖가지 사항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정사(精舍)로서는 죽원(竹園)과 고독원(孤獨園)에 대한 것도 언급하고 있다. 제3권에 해당한다. 제3 불부(佛部)에서는 부처님이 왕궁에서 태어나 출가한 뒤 성도(成道)하여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부처님의 일생을 중심으로 부처님과 관련된 일들을 다룬다. 제4권부터 제7권에 해당한다. 제4 보살부(菩薩部)에는 살타파륜(薩陀波崙)을 비롯하여 문수(文殊), 보현(普賢) 등의 보살들의 수행과 그들이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노력한 일, 그들의 전생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제8권부터 제12권에 해당한다. 제5 성문부(聲聞部)에서는 부처님의 여러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13권부터 제23권에 해당한다. 제6 국왕부(國王部)에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 금륜왕(金輪王), 아육왕(阿育王) 등 여러 왕들의 일화를 정리해 놓았다. 제7 태자부(太子部)에서는 태자(太子)와 왕녀(王女), 두 부문으로 나눈 뒤 아라한의 도를 구하던 태자를 비롯하여 불법에 귀의했던 여러 나라의 왕녀 이야기를 정리해 놓았다. 제8 장자부(長者部)에서는 득도(得道)와 잡행(雜行), 둘로 나누어 보칭(寶稱)의 출가 득도 이야기를 비롯하여 재가 장자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았다. 제9 우바새부(優婆塞部)에는 재가 남자 신도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10 우바이부(優婆夷部)에는 재가 여자 신도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제9 우바새부와 마찬가지로 대개 선악의 과보 이야기가 주된 것이다. 제11 외도선인부(外道仙人部)에서는 브라만을 비롯한 6사(師) 외도(外道) 등이 불법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까닭을 정리해 놓았다. 제12 거사부(居士部)에서는 거사와 상인, 남녀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13 귀신부(鬼神部)에서는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婆), 긴나라(緊那羅), 잡귀(雜鬼) 등에 관한 이야기를 불설장아함경, 보살태경(菩薩胎經) 등을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제14 축생부(畜生部)에서는 갖가지 동물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았다. 대집경(大集經), 보살영락경, 불설장아함경, 관불삼매경, 누탄경(樓炭經), 해룡왕경(海龍王經), 보은경(報恩經) 등을 인용하고 있다. 제15 지옥부(地獄部)에서는 염라왕(閻羅王)을 비롯하여 16소지옥(小地獄)과 아비(阿鼻) 지옥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문지옥경(問地獄經), 불설장아함경,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등을 참고로 인용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 우바새(優婆塞), 우파이(優婆夷), 외도(外道), 선인(仙人), 거사(居士), 서인(庶人), 귀신(鬼神), 축생(畜生), 지옥(地獄)등 14부(部)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경(經)과 율(律)에서 요점(要點)을 각주제(各主題)의 부별(部別)로 뽑고 그 출전(出典)을 표시하여 학습(學習)하는데 편리(便利)하게 엮은 일종(一種)의 사전류(事典類)이다. 이것은 전(全) 50권 중, 권제(卷第)8 자행보살부(自行菩薩部)의 ‘살타파륜위욕문법매심혈수일(薩陀波崙爲欲聞法賣心血髓一)'부터 ‘유년위귀소미(幼年爲鬼所迷)'까지를 수록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재조본(再雕本)이다. 권말의 간기에 의하면, 판각(板刻)은 고려 고종 30년(1243) 남해(南海)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이루어졌으며, 각수명(刻手名)이 2~3판(板)마다 판수제(版首題) 아래에 새겨지고 있다. 새김은 각수(刻手)의 솜씨에 따라 정조(精粗)의 차이(差異)가 있다. 이 판본(板本)의 인출시기(印出時期)는 인쇄상태(印刷狀態), 지질(紙質) 및 표지(表紙)의 꾸밈등으로 미루어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 사이로 추정(推定)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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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본 경률이상 권8(再雕本 經律異相 卷八) / 고려 말기~조선 초기 / 1권 1첩 / 목판본/대장도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이 책은 양나라의 승민(僧旻) 보창(寶唱) 등이 엮은 일종의 사전(事典)을 고려 고종 30년(1243)에 새기고 고려말에 찍은 1권 1첩의 목판본이다. 경률이상(經律異相)은 경(經)과 율(律)에서 천(天), 지(地), 불(佛), 보살(菩薩), 성문(聲聞), 국왕(國王), 태자(太子), 장자(長者), 우바색(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외도선인(外道仙人), 거사(居士), 서인(庶人), 신귀(鬼神), 축생(畜生), 지옥(地獄) 등 14부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뽑아 엮은 일종의 사전이다. 이 판본은 인쇄상태나 제본 상태 등을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기사이에 찍어 첩장으로 제본한 것으로 당시의 대장경 판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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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近思錄) / 고려시대 / 4책 / 목판본/관판본 / 권정우 / 경북 봉화군 / 선장《근사록(近思錄)》은 1175년 주희와 여조겸이 북송의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 정호(程顥), 장재(張載)의 어록과 문집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 엮은 성리학 입문서이다. 즉 주희가 한천정사(寒泉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인 1175년 4월에 여조겸(呂祖謙)이 찾아와 10여일을 머물면서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글을 읽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그 가운데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 622항을 뽑아 14권으로 엮었다. 이후에 《근사록》에 대한 여러 주석서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는 1248년 엽채(葉采)가 체제와 내용을 수정, 보완하면서 새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근사록집해》로 공민왕 19년(1370)에 이인민(李仁敏)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원나라 때 발간하였던 책을 소장하고 있는 김광원에게 박상충을 통해 받아 목판에 뒤집어 붙이고 그대로 다시 전주에서 14권 4책으로 새긴 번각본이다. 고려시대 때의 책이 극히 희귀한 오늘날, 비록 중국판의 번각본이지만 중종(中宗) 때의 권벌(權橃)의 수택본(手澤本)이라는 점과 이에 정조(正祖)가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서 붙였다는 데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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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 / 조선 중종 33년(1538) / 4권 4책 / 활자본/목활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는 중종 32년(1538)에 문신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방대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의 내용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간추려 4권으로 편집한 것이다. 《성리대전》은 명나라의 문신 호광(胡廣) 등 42명의 학자들이 송(宋)나라 때의 성리학설에다가 원(元)나라 때 성리학자들의 학설까지 보태서 집성한 전 70권 거질(巨帙)이다. 이 책은 세종 초기에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과 함께 수입된 이후 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어 왔으나, 거질에다가 내용 또한 너무 산만한 결점이 있었다. 김정국이 중종 32년(1538) 여름에 호남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도사(都事) 김회백(金晦伯)과 의논하여 나주목(羅州牧 : 錦城)에 있던 목활자에 부족한 글자와 이지러진 글자를 새겨 갖춘 다음, 그 해 가을에 인출(印出)하였다. 지방 관서의 목활자로서는 비교적 잘 새겨진 해정(楷正)한 필서체며 인쇄 상태도 정교한 편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학자들의 필독서인《성리대전》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새로 구성했다는 점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중종 때에 만들어진 지방관 목활자본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그 전질을 새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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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 / 조선 중종 33년(1538) / 4권 4책 / 활자본/목활자본 /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북 청주시 흥덕구 / 선장이 책은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문신인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기묘사화로 관직이 삭탈되어 고양(高陽) 망동(芒洞)에 머물면서 『성리대전(性理大全)』 70권에서 격언이 될 만한 내용을 4권으로 요약 편집하고 서명을 『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로 명명하였는데, 중종 33년(1538)에 다시 소환되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도사(都事) 김회백(金晦伯)과 의논하여 나주목(羅州牧)에 보관해 있던 목활자(木活字)를 바탕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목활자본이다. 이러한 사실은 권말에 있는 김정국의 후서에 나타나 있다. 이때 인출한 부수는 인출을 원하는 개인용을 포함하여 모두 800질이라 한다.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는 『성리대전』으로 불리는데, 명(明)나라 학자 호광(胡廣, 1370-1418) 등 42명이 송(宋)과 원(元)나라의 학자 120명의 서일학설(性理學說)을 휘집(彙集)한 책으로 『사서대전(四書大全)』,『오경대전(五經大全)』과 함께 편집간행 된 책이다. 세종조(世宗朝) 초기에 우리나라에 수입 간행된 후 학자들의 필독서(必讀書)가 되었으나, 그 내용이 방대하여 이를 이해하는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 책은 모두 4권 4책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권1의 권두(卷頭)에는 명나라 황제의 서문을 실었고, 권4의 후미에는 김정국의 후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서문이 끝나고 장을 바꾸어 권두서명이 나타나고 이어서 바로 「태극도총론(太極圖總論)」편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이 『성리대전서절요』는 유교를 국시(國是)로 건국한 조선조에 학자들의 필독서(必讀書)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대상으로 중종조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김정국이 선집했다는 점에서 당시 성리학 수용의 경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발발로 인해 거의 없어진 조선전기에 지방관서에서 인출한 목활자인본(木活字印本)을 통하여 당시 지방관서(地方官署) 목활자의 상황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목활자 연구 및 서지학연구에 도움을 준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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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운회거요 권27~30(古今韻會擧要 卷二十七∼三十) / 조선 세종 16년(1434) / 3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는 중국 원나라 때의 웅충(熊忠)이 그의 스승인 황공소(黃公紹)가 1292년에 지은 《고금운회(古今韻會)》에 주석을 첨삭하여 전 30권으로 만든 운서(韻書)이다. 이 책은 경상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신인손(辛引孫, 1384~1445)이 《운회거요》가 간행되지 못한 것을 알고, 세종에게 이를 아뢰어 경연소장본(經筵所藏本) 2부를 하사 받아 경주부와 밀양부에서 세종 16년(1434)에 간행하였다. 간행에 있어 신인손 이외에 도사(都事) 박근(朴根, ?~?), 경주부윤(慶州府尹) 김을신(金乙辛, ?~?) 등 여러 관리가 관여하였고, 판을 새기는 데에는 대선사(大禪師) 홍희(洪熙) 이하 20여 명의 승려와 전 서승(署丞) 이종생(李從生) 등 총 109명의 각수가 참여하여 5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하였다. 판각이 비교적 정교하고 글씨가 미려하며, 인쇄가 깨끗하여 원래 판본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금운회거요》는 번절음(反切音)을 우리나라 음으로 번역,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초성 차례로 자류(字類)를 배열하여 세종 29년(1447)에 완성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의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 음운학상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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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독직해 권62~70(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 卷六十二∼七十) / 조선 세종 13년(1431) / 9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본서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송(宋)나라 임요수(林堯수)가 좌씨전의 전문(全文)을 대상으로 알기 쉽게 주석한 《음주전문 춘추괄례시말 좌전구두직해(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의 원판본(元版本)을 번각(飜刻)한 전70권 중의 잔권(殘卷)이다. 수록내용은 노정공(魯定公) 5년에서 노애공(魯哀公) 14년까지의 본문과 김치명(金致明)이 쓴 발문이다. 임요수의 주석은 두예(杜預)의 주와 진부량(陳傅良, 1141~1207)의 학설을 근거로 하여 주석이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워서 널리 송원(宋元) 시대는 물론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한 책이다. 특히 두예의 주에서 어려운 부분에는 초학자를 위하여 구두(句讀)를 떼고, 인명ㆍ지명 등이 중복되면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곳에는 모인(某人)ㆍ모지(某地)로 직주(直註)를 달았으므로 서명에서 ‘구두직해(句讀直解)’라고 한 것이다. 서명의 ‘괄례시말’에서 괄례는 주석 중에서 예(例)를 들어 보인 것을 말하고, 시말은 노공(魯公) 원년조(元年條)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각기 주왕기년(周王紀年)ㆍ열국기년(列國紀年)ㆍ춘추이십국대사(春秋二十國大事)를 실은 것을 말한다. 임요수의 이 주석본은 이 보다 앞서 태종조(太宗朝)에 계미자로 인출(印出)한 바 있고, 단종 2년(1454)에는 관찰사 김연지(金連枝)의 주선으로 이개(李塏)의 발을 붙여 번각한 바 있다. 이 책은 지방 관아에서 간행한 판본이나 판각이 정교하여 원판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고, 비교적 판각한 초기에 인출한 것으로 인쇄상태가 양호하며, 조선 전기의 출판문화와 학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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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충귀개국원종공신록권(陳忠貴開國原從功臣錄券) / 조선 태조 4년(1395)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이 문서는 태조 4년(1395) 진충귀(陳忠貴, ?~1412)에게 내린 공신록권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이란 태조가 등극할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거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협력하여 즉위를 도운 사람들로, 즉위한 해 10월부터 6년 12월까지 13차례 원종공신 포상이 내려졌다. 원종공신의 전체 인원은 문헌상으로 1,698명에 이르나 중복된 자들을 빼면 대략 1,300명 전후가 된다. 수록된 공신은 진충귀를 포함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 최식(崔湜)부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윤방경(尹邦慶) 등 106명이다. 상전(賞典)으로는 각각 밭 30결, 노비 3명을 상으로 주고, 부모와 처에게 봉작(封爵)하며, 자손에게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에 오르도록 하며, 후손에게 죄와 천역(賤役)을 면하게 해 주었다. 이 자료는 조선 전기 개국원종공신에 대한 대우와 국가성립에 영향을 미친 인물에 대한 연구, 원종공신록권의 양식, 이두문의 사용과 문체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타 소장본과 기재된 공신의 명단이 달라 개국원종공신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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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충귀 고신왕지(陳忠貴告身王旨) / 조선 태조 3년(1394)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낱장진충귀 왕지(王旨)는 태조 3년(1394) 3월 27일 진충귀(陳忠貴)를 가정대부(嘉靖大夫)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 겸의주등처(兼義州等處) 도병마사(都兵馬使)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하는 사령서(辭令書)이다. 이 왕지는 도응의 왕지와 더불어 조선초 사령서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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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삼매참법 권하(妙法蓮華經三昧懺法 卷下) / 조선 성종 3년(1472) / 1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대한불교천태종 구인사 / 충북 단양군 / 선장불교에서 법화경 및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을 근거로 하여 참회하는 종교의식. 3ㆍ7일 동안을 기한으로 정하여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죄업을 참회하고 실상중도(實相中道)의 도리를 관조 수행하는 방법을 고려시대 말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수행의 지침서. 목판본 1책(결본). 구인사 소장 보물 제1162호. 구인사 소장본은 바로 고려말기에 판각된 목판에서 성종 3년(1472)에 궁실 주관으로 인출한 판본이며, 김민영이 소유했던 책이 구인사로 이관된 것이다. 이 구인사본(하권)은 의경왕(懿敬王)(추존 : 덕종)의 비이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성종 3년(1472)에 돌아간 세조ㆍ예종ㆍ의경왕ㆍ인성대군(仁城大君)의 명복과, 생존한 정희대왕대비와 주상 및 왕비의 만수를 기원하기 위해 판목(版木)이 간직되어 있는 곳을 찾아 많은 불경을 인출케 하고, 그 사실을 김수온(金守溫)에게 단일발문(單一跋文)을 작성, 갑인소자(甲寅小字)로 찍어 각 경에 붙이게 한 것의 하나에 해당한다. 이 때 참법은 겨우 20벌 밖에 찍어내지 않아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으며, 현재로는 이것이 유일(唯一)한 전본(傳本)인 듯하다. 또한 이 참법은 역대의 주요 정장(正藏) 및 교장(敎藏) 목록(目錄)에 실려 있지 않고 있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 구인사본은 경주 기림사에 소장된 권상과 더불어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의 전교(傳敎) 및 교학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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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영가집(언해) 권하(禪宗永嘉集(諺解) 卷下) / 조선 연산군 1년(1495) / 1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김민영 / 경기 성남시 / 선장당나라 영가현각(永嘉玄覺)이 찬술하였으며, 송나라 행정(行靖)이 주를 달고 정원(淨源)이 수정과문(修定科文)한 선종의 요결서로서, 세조 재위 1464년에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 판각한 것을 1495년에 후인한 불서. 목판본 1책(결본). 김민영 소장 보물 제1163호. 김민영본은 바로 1464년에 간경도감에서 판각된 목판에서 연산군 1년(1495)에 궁실 주관으로 인출한 판본이다. 전후의 표지는 근래에 새로 제책된 것으로 보아 불복(佛腹)에서 발견된 이후 근래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김민영본은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보물 제774호 가운데 권하와 동일한 판본으로 보존상태가 보다 양호하다. 이 책은 후에 사찰판의 모본이 되는 원간본으로 판본학 연구 및 중세국어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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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3~4(妙法蓮華經 卷三∼四) / 조선 성종년간(1470~1494)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대한불교천태종 구인사 / 충북 단양군 / 선장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명필의 정서본을 바탕으로 궁중에서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 목판본 권3~4의 1책(결본). 구인사 소장 보물 제1164호. 이상 3종의 법화경 한역본 가운데 구인사본은 구마라집이 406년에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된 판본으로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본은 현재 우리나라에 비교적 전본이 적지 않게 소장되어 있으며, 이 판본을 모본(母本)으로 1527년에 경상도 광흥사에서 복각된 이래 전국의 사찰에서 28차례 이상의 개판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될 정도로 널리 유통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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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 권1~3(詳校正本 慈悲道場懺法 卷一∼三) / 고려 공민왕 1년(1352) / 3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은 참회하고 수행하면 죄가 없어지고 온갖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음을 다룬 책이다. 본문에 고려 태조의 이름인 ‘건(建)’ 자와 그 겸피자(兼避字)인 ‘건(健)’ 자 등에 결획이 나타나고 있어 고려의 독자적인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보물 제875호와 같은데 이 책의 권10의 권말 간기(刊記)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년(1352) 10월 수한(守閑)ㆍ신규(信珪) 등의 화주(化主)로 정서(正西)ㆍ정소(正昭), 약림(若琳), 낭장(郎將) 남궁백(南宮伯), 별장(別將) 유맹(柳猛) 등이 시주하였고 요심(了心)ㆍ달운( 達云)ㆍ성주(省朱) 등이 각수(刻手)로 참여하였다. 이 책은 인쇄상태로 보아 조선 초기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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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東國正韻) / 조선 세종 30년(1448) / 1질(6책) / 활자본/목활자본 / 건국대학교 / 서울 광진구 / 포배장이 책은 조선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는 제목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에 통일되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모두 6권 6책의 완질본이며, 활자중 본문의 큰 글자는 목활자,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甲寅字)이다. 본래 『동국정운』은 신숙주가 쓴 서문(序文)만이 전해오다가 1940년 안동에서 제 1권과 제 6권이 발견되었으며, 1972년 강릉에서 발견된 책이 본서이다. 국보 71호『동국정운』(권 1ㆍ6) 잔질(殘帙) 2책과는 동인본(同印本)이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선장본(線裝本)을 포배장(包褙裝)으로 개장하고, 개장 당시 책의 천(天)ㆍ지(地)를 약간 절단해 냈고,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없고, 책차(冊次) 표시를 뒤에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로 묵서가필(墨書加筆)한 것뿐이다. 각 책의 공지(空紙) 뒷면에 책주망서정(冊主望西亭), 또는 ‘망서정(望西亭)’의 묵서가 있다. 망서정은 중종 때의 문신인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 1487~1540)이래 심씨가(沈氏家)의 정자 이름이다. 심언광이 직접 보다가 전해오던 것으로 후손 심교만(沈敎萬)의 집에서 소장되었다가 발견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를 연구하는 데에도 기본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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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一) / 조선 세종 4년(1422) /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중국의 위대한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문으로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조선 세종 4년(1422)에 비구 덕명(德明)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발원하여 충청도 천안의 광덕사(廣德寺)에서 쪽물로 물들인 감지(紺紙)에 은니(銀泥)로 쓴 경전이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은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근본 경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흔히는 『법화경』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 이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한다. 사경은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는 구마라집이 A.D 406년에 번역한 28품본을 저본으로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수ㆍ당대의 돈황본 사경은 거의 대부분이 이 역본을 저본으로 사경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경들 또한 구마라집 역본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존 판본류에 대장경에 편입된 2종의 역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이 28품 7권본인 구마라집의 역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존본은 대부분 전(全) 7권본으로 장축(裝軸) 또는 제책(製冊)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경은 권1의 1첩만이 전래되고 있으며, 모두 접장본 형태로 장정(裝訂)되어 있다. 각 첩의 표지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 네송이가 장식되어 있으며, 화문은 금니로 화경은 주로 은니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사경의 표지화에 보이는 연판(蓮瓣)의 양식은 매우 길쭉하고 직선적인 모습으로 15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표지의 경제는 제첨(題簽)과 같은 형식으로 그리고 그 안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이란 책이름이 쓰여져 있다. 권수에는 석가의 좌우에 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 그리고 석가의 왼쪽에는 7보살과 오른편에는 2보살 등의 권속에 둘러 싸여 법상을 앞에 놓고 사부대중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변상도가 실려 있는데, 주로 직선적인 선묘(線描)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도식화되어 다소 경직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변상도(變相圖)의 크기는 29.3cm×57.3cm이다. 변상 다음에 비로소 표제와 동일한 권두 서명과 구마라집의 역자 표시가 보이고, 다음 행에는 제1품인 서품의 품제(品題)가 기입되어 있다. 변란은 상하에 금니로 쌍선을 굵게 긋고, 계선은 가늘게 그었으며, 그 사이에 경문을 은니로 사성하였다. 경문은 한 행에 17자씩 배자하여 쓰여져 있으며, 글씨체는 조맹부체(趙孟頫體)를 바탕으로 한 전형적인 사경체(寫經體)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42.0cm×14.3cm이며, 사경면의 상하 높이는 29.2cm이다. 그리고 사경면의 뒷면에는 모두 ‘광덕사(廣德寺)’라는 사찰명이 주서(朱書)되어 있어, 이 사경이 광덕사에서 만들어졌거나 혹은 복장(腹藏)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이 사경은 1959년 11월에 광덕사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이 사경과 한 질을 이루는 사경으로 아직 미지정 상태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 7(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 7)』의 1첩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박물관에는 광덕사로부터 위탁된 같은 사경 권 2. 4. 5. 6의 4첩이 보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미지정본 사경(권7)에는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는 달리 권말에 시주질(施主秩)과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사경의 제작과 관련된 여러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권7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발원문에 의하면 비구 덕명(德明)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사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 발원문의 끝에 “영락임인동월상엄지(永樂壬寅冬月尙嚴之)”라는 기록이 있어, 이 사경이 조선 세종 4년(1422)에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어 종래 고려 후기에 조성된 사경으로 알려져 있음은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2첩의 사경의 후면에도 동대본 사경의 후면에 주서되어 있는 ‘광덕사(廣德寺)’라는 사찰 이름이 역시 같은 사람에 의해 쓰여진 서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4첩과 국립중앙박물관 2첩이 본래 한 질로 제작되었음을 입증하나, 마곡사에 보관 중 도난을 당한 이후 수습 및 기탁과정에서 분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두 기관에 나누어 소장되어 있는 마곡사 사경을 합하면 전체 6권 6첩으로 현재 권3의 1첩만이 결본 상태가 된다. 이 불경은 마곡사 사경이라 하나 광덕사 전래본이라 함이 타당하고 전권의 마곡사 사경(권1)은 전 7권 중 수권(首卷)으로 변상도와 표지장식화가 우수하며, 권말에는 사경 조성에 참여한 시주질이 기재되어 있어 조성연대가 확실한 조선 초기 사경으로 미술사 및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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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하의2(大方廣圓覺略䟽注經 卷下之二) / 조선 초기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호접장대방광원각약소주경은 관심수행(觀心修行)을 위주로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요법(要法)을 말한 대방광원각경(당(唐) 불타다라(佛陀多羅)번역)에 종밀(宗密)이 간략하게 주해(註解)를 단 것이다.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약소(略疏) 4권 혹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판본은 상ㆍ하 2권이 각각 1ㆍ2로 분할된 2권 4책 중 권 하지2가 전래된 것이다. 표지는 짙은 감색지(紺色紙)이며, 서구(書口) 위쪽에 은니(銀泥)의 자모쌍선(子母雙線) 장방형 안에 ‘대방광원각경 권하지2(大方廣圓覺經 卷下之二)’를 은니로 필서하고 있다. 이 책은 판식ㆍ글자체ㆍ판각 기법으로 보아 송판본계(宋板本系)를 번각(飜刻)한 것이며, 그 시기는 고려 14세기 경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각판에서 찍어낸 것은 여말선초로 여겨진다. 이 판본은 드물게 보이는 호접장이고, 권 하지2가 마지막으로 발굴되어 원각경 약소의 완질이 갖추어진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그간 발굴되어 지정된 권차(卷次)는 보물 제893호 권 상지1, 보물 제938ㆍ959ㆍ1016호 권 상지2, 보물 제963호에 권 하지1, 그리고 이 판본은 권 하지2에 해당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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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 조선 세조 13년(1467) / 1권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몽산화상법어약록은 원(元)나라 고승인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법어를 고려 말의 고승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초록하고 말미에 자신의〈시각오선인법어(示覺悟禪人法語)〉1편을 더해 구결(口訣)하고 역해(譯解)한 것이다. 그 역해는 신미(信眉)가 하였음을 간경도감판(刊經都監板)의 초인본(初印本)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간기(刊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간행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학계에서는 신미 역결(譯訣)의 법어(法語) 4종이 합각(合刻)된《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 세조 13년(1467)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으므로 그 무렵의 판각으로 보고 있다. 이 판본에는 권수제(卷首題) 다음에 ‘혜각존자신미역해(慧覺尊子信眉譯解)’의 표시가 생략되어 있다. 서미(書眉)에 ‘교정(校正)’ 도장이 찍혀 있어 초인본(初印本)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초각(初刻) 초인(初印)할 때 역해자(譯解者)를 제외시킬 리가 없으며, 인쇄된 권수(卷首) 지엽(紙葉)을 볼 때 도려내거나 지워버린 흔적도 전혀 나타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상태이다. 따라서 간경도감이 혁파된 다음 해인 성종 3년(1427)의 인경(印經)) 때부터 역해자 표시를 생략하였던 사실로 보아, 이 때 인경(된 200부의 판본 중 최초로 찍은 책에 그 교정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이 판본은 성종 3년이 갑인자(甲寅字) 인출 김수온(金守溫) 발문(跋文)을 잃었거나 떼어버린 듯하다. 이런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 판종은 보물 제767ㆍ768ㆍ769ㆍ1012호와 동일하며, 다만 그 인출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편 이 판본은 조선 후기의 고승이며,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草衣) 의순(意恂)의 수택본(手澤本)인 점에서 주목된다. 본문 제467장의 뒷면에《청하당보장록(淸虛堂寶藏錄)》을 초사하여 이어 이를 길이 전하기 위한 그의 발문을 헌종 10년(1844) 동지일(冬至日)에 묵서(墨書)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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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로 정사공신교서 및 초상 - 이중로 정사공신교서(李重老 靖社功臣敎書 및 肖像-李重老 靖社功臣敎書) / 조선 인조 3년(1625)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경기도박물관 / 경기 용인시 / 권자장이 교서는 인조 3년(1625) 이중로(李重老, 1577~1624)에게 추증한 것으로 그가 죽은 뒤에 내린 것이다. 이중로는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이다.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의 후손으로, 이괄의 난 때 이성부(李聖符)와 함께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전사하였다. 선조 38년(160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훈련도감낭청을 지내고, 광해군 13년(1621)에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어 청흥군(靑興君)에 봉하여졌다. 정사공신(靖社功臣)은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당시 53명이 공신으로 녹훈되었는데, 이중로는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 교서에는 2등 공신은 초상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2계(階)를 올려주었고, 부모ㆍ처자에게 2계를, 적장자는 세습하여 녹을 잃지 않게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또한 반당(伴倘)ㆍ노비ㆍ구사(丘史)를 합하여 19명과 밭 80결, 은 30량, 옷감 1단, 말 1필 등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 공신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에 대한 포상의 내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축) 이 교서는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마탄(馬灘)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자결하였던 무신(武臣) 이중로(李重老)에게 사후에 내려진 정사공신(靖社功臣) 교서이다. 인조 3년 을축년(1625) 4월에 내려졌다. 앞부분에서는 그의 용맹함과 강개함, 용모 등이 장수의 전형임을 언급하였다. 다음으로는 허균의 역모를 저지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실과 인조반정에 참가하였던 사실을 언급하였다. 다음으로는 이괄의 난을 막다가 전사한 사실을 언급하고, 그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다음으로는 공신을 책봉함에 미처 이미 전사하였으므로 직접 공신 회맹연에 참석할 수는 없지만, 그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고, 품계와 벼슬을 두 등급 올려 주도록 할 것,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또한 두 품계를 올려주게 하겠다는 것, 적장(嫡長)이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제사는 영원토록 지내게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다음으로는 반당(伴倘) 6인, 노비(奴婢) 9구(口), 구사(丘史) 4명, 전(田) 80결, 은(銀) 30냥, 표리(表裡) 1단, 내구마(內廐馬) 1필 등 함께 하사된 품목의 명세가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는 함께 공신에 봉해진 이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이중로는 공신 2등에 등록되어 있다. (작성자 : 권경렬)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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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 호성공신교서(沈岱 扈聖功臣敎書) / 조선 선조 37년(1604)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경기도박물관 / 경기 용인시 / 권자장이 교서는 선조 37년(1604)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던 청원군 심대(沈垈, 1546∼1592)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심대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이다. 영의정 온(溫)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輔德)으로서 근왕병 모집에 힘썼는데, 그 공로로 왕의 신임을 받아 왕을 가까이에서 호종하였다. 왜군의 기세가 심해지면서 권징(權徵)의 후임으로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서울 수복작전을 계획하던 중 왜군의 야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호성공신에 책록되어, 청원군(靑原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공신호이다. 심대는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교서에는 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2계(階)를 올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2계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사위는 1계를 올려주고 적장자는 세습하여 녹을 잃지 않게 하며, 노비 9명과 밭 80결, 은자 7냥, 비단 1필을 내려주었다. 이 호성공신교서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조선시대 공신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1축) 이 공신교서는 임진왜란에 선조(宣祖)가 의주로 피난할 때 호종((扈從)하였던 공로로 심대(沈岱)가 받은 호성공신교서이다. 교서에는 심대의 위인과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훈,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서울을 수복하고자 하였으나 왜병의 야습(夜襲)을 받아 전사한 공로를 적고, 심대를 호성공신 2등에 책록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딸린 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은 2계급을 진급시키고 부모, 처자에게도 2계급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는 1계급을 올려주고 큰아들과 그 후손에게 그 벼슬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하게 하며, 노비 9명과 밭 80결, 은자 7냥, 비단 1필을 내린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심대(沈岱 )의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으로, 본관은 청송이다. 영의정 온(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경력(經歷) 의검(義儉)이며, 어머니는 우참찬 신광한(申光漢)의 딸이다. 27세 때인 1572년(선조5)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正字)ㆍ박사ㆍ수찬(修撰)을 지내고, 1584년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동서 붕당의 기미가 보이자, 언관으로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고, 이어서 사인(舍人)ㆍ사간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輔德)으로서 근왕병 모집에 힘썼고, 그 공로로 왕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ㆍ좌부승지가 되었다. 왜군의 기세가 심해지면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수행하였다. 그해 9월에 권징(權徵)의 후임으로 경기관찰사가 되어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하던 중 삭녕(朔寧)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왜군의 야습(夜襲)을 받아 전사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 호성공신교서는 보관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심대의 전기 자료로서의 가치와 함께, 조선시대 공신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작성자 : 신승운)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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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항 초상 및 양무공신교서(吳命恒 肖像 및 揚武功臣敎書) / 조선 영조 4년(1728) ~영조 5년(1729) / 일괄(1건,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오준석 / 경기 용인시 / 낱장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명항(吳命恒, 1673∼1728)과 관련하여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3점으로 그의 초상화와 양무공신으로 책록하는 교서 및 이것들을 담았던 나무 상자이다. 오명항은 경기도 용인에 세거하던 해주오씨 출신으로 그의 고조는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이었으며 외조부는 역시 영의정을 역임한 여성제였다. 숙종 31년(170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그는 내직으로는 필선,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와 강원도 및 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쳤다. 영조 4년(1728)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조판서로서 자원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그는 이때의 공적으로 분무공신이 되고 해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 후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분무공신(奮武功臣)은 조선왕조에서 책봉한 28회(그 중 광해군 때 4차례의 공신은 삭훈됨)의 공신 중 마지막 공신이었는데 공신 명칭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사료에는 공신 명칭이 ‘분무공신’으로 되어 있으나 현전하는 오명항의 공신교서와 증시교지 등을 살펴보면 ‘양무공신’으로 되어 있다. 추측컨대 처음에는 양무공신이었으나, 후에 ‘양(揚)’ 자를 피해야 할 이유가 생겨서 ‘분(奮)’ 자로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 번역 해제 】 (2축) 이 문서는 조선 영조 4년(1782)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이 청주(淸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에 임명되어 난적을 토평한 오명항(吳命恒)에게 서훈(敍勳)과 상사(賞賜)를 시행하면서 내린 교서이다. 훈호를 정한 시점은 영조 4년(1728) 4월이고, 교서를 작성 일자는 옹정(雍正) 6년, 즉 영조 4년(1728) 7월이며, 약칭 양무공신(揚武功臣)이라고도 한다. 처음의 훈호는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效力奮武功臣)으로, 약칭 분무공신(奮武功臣)이었는데 뒤에 양무공신으로 고쳤다. 또 정조 12년(1788) 3월에 추록(追錄)이 있었다. (작성자 : 김능하)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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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제생집성방 권6(鄕藥濟生集成方 卷六) / 조선 정종 1년(1399) /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조선 태조 7년(1398) 권중화(權仲和)ㆍ김희선(金希善)ㆍ조준(趙浚)ㆍ김사형(金士衡) 등이 찬(撰)한 것을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한 의약서, 정종 1년(1399) 김희선(金希善)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총 30권이다. 이 책은 1책. 보물 제1178호. 이 책은 30권 중 제6권 책으로 완질(完帙)이 아니며, 이것도 중반부 이후에는 판심(版心)이 ‘권 5(卷 五)’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곽(匡郭)의 크기도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이란 권수제(卷首題)는 분명하며, 특히 처음 발견된 유일본 이란 점에서 의학서 인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본서(本書)는 영본(零本)이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권근(權近)의 문집인 양촌집 제17권에 수록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서문에 의하여 편찬 간행 경위와 약방문 수록 등을 대략 유추(類推)하여 알 수 있다. 권근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국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물을 얻기 어렵다. 나라의 풍속에 간혹 풀 하나로 병 하나를 치료하여 효력을 보았다. 일찍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있었는데 꽤 간요(簡要)하였으나 논하는 이는 오히려 그 소략함을 병되게 여겼다. 이제 판문하(判門下) 권중화(權仲和) 공이 서찬(徐贊)에게 명령하여 『간이반(簡易方)』을 저술하게 하였는데 세간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태조가 개국한 다음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태조의 마음을 헤아려 제생원(濟生院)을 두기를 청하고, 중추 김희선을 시켜 향약을 채취하여 백성들의 질병을 널리 고치게 하였으며, 또 각 도에 의학원(醫學院)을 두고 교수를 보내어 질병을 치료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관약국관(官藥局官)에게 특명을 내리어 여러 가지 약방문을 검토하게하고 또 우리나라에서 얻은 경험방(經驗方)을 채집하여 그 종류에 따라 문을 나누어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집하고 끝에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덧붙였다. 강원도 관찰사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한 것이다.” 전질(全帙) 30권에는 “3백 38종의 각종 질병의 증상과 2천8백 3종의 약방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종래의 의료 경험을 개괄한 다음 약방문을 질병의 부문별로 제시하고 각각 그에 따르는 설명을 하고 있다.”고 김성수의 「한약학서지의 발전과 고찰」 이란 논문에서 적고 있다. 이 향약제생집성방은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체질에 알맞은 향약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으며,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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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요록(胎産要錄) / 조선 세종 16년(1434) / 2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조선 세종때 의학자 노중례(盧仲禮)가 왕명에 의해 편찬한 태산(胎産)과 어린아이의 질병 치료에 관한 전문의서, 2권 1책, 세종 16년(1434)에 밀양부(密陽府)에서 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하였다. 보물 제1179호. 상ㆍ하 2권으로 나누었는데, 상권은 주로 태산의 교양법을 논하고, 하권은 주로 유야의 보호법을 기술하였다. 상권은 태산문(胎産門)이란 제목 아래에 태교론(胎敎論)ㆍ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ㆍ양태근신법(養胎謹愼法)ㆍ식기법(食忌法)ㆍ태살기피산전장호(胎殺忌避産前將護)ㆍ십이월산도(十二月産圖)ㆍ임신난산유오(姙娠難産有五)ㆍ산보제방(産寶諸方)ㆍ장호산부(將護産婦ㆍ산후피기(産後避忌) 등 20항목을 열거하였다. 하권에는 영아장호문(영兒將護門)이란 제목 아래에 거아법(擧兒法)ㆍ식구법(拭口法)ㆍ단제법(斷臍法)ㆍ초생세아법(初生洗兒法)ㆍ장포의법(藏胞衣法)ㆍ택유모법(擇乳母法)ㆍ유아법(乳兒法)ㆍ유모기신법(乳母忌 辰法)ㆍ소아시포법(小兒始哺法)ㆍ통변법(通便法)ㆍ소아식기(小兒食忌)ㆍ소아행지(小兒行遲) 등 27항목이 수록되었다. 인용 서목(書目) 중에는 당나라의 『천금방(千金方)』, 송나라의 『성혜방(聖惠方)』ㆍ『성제총록(聖濟總錄)』ㆍ『직지방(直指方)』ㆍ『비급대전(備急大全)』ㆍ『득효방(得效方)』 등을 비롯하여, 산부인과의 전문서로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 『태산구급방(胎産救急方)』, 『왕악산서(王岳産書)』, 『산서집록(産書集錄)』을 들고, 소아과의 전문서로서 『활유구의(活幼口議)』, 『전씨소아방』을 들었다. 이상과 같이 당(唐)ㆍ송(宋)의 고전 방서(方書)와 태산 및 유아의 전문서 15종을 참작하여 임산부의 임신ㆍ분만ㆍ산전ㆍ산후에 필요한 사항과 초생아 및 유아들의 양호와 치료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정연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특히 이 태산요록은 조선 중기까지 산서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태산요록이란 서명은 ‘태산에 있어 실용에 요긴한 기록을 모아 엮은 것’이란 뜻이다. 책의 머리에 선덕 9년, 곧 세종 16년(1434) 7월에 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정인지의 서문이 있고, 책의 끝에 경상도 관찰출척사 김효정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지은 연대(年代)는 서문(序文)과 같다.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책은 특히 소장자가 드문 희귀본(稀貴本)으로 귀중한 의학관계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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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경(神應經) / 조선 성종 5년(1474) /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이 책은 침구(鍼灸,침질과 뜸질) 관계를 다룬 전문 의학서적으로, 명나라 유근(劉瑾)이 1425년 중교(重校) 출간한 것을 우리나라에서 성종 5년(1474)에 처음 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원군 한계희(西原君 韓繼禧, 1423~1482)의 서문이 있다. 가. 목판본(木版本) 불분권(不分卷) 1책(冊) 나. 저지(楮紙), 선장(線裝) 다. 16.8cm×26.2cm 라. 도(圖),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13.6cm×19,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2항(行) 23자(字), 주쌍행(主雙行), 두주(頭註) 서문이 빠져 있어 필사하여 끼워 넣고, 본문도 하단이 닳아 헤어져 간지를 넣어 배접하였다. 이 책은 인조 21년(1643)에 훈련도감자판으로 다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침구 관련 초간본(初刊本)이라는 점에서 서지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93년 11월 5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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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 / 조선시대~1977년 / 일괄(1첩,27책) / 필사본/사본류 / 고현양약회중 / 전북 정읍시 / 선장조선시대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고현동(古縣洞,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결성된 향약에 대한 자료집이다. 향약은 선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며 어려울 때 서로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향촌의 자치규약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 문헌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년간(宣祖年間))에 시작하여 1977년까지 약 4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 현재의 전북 정읍 지방에서 결성하고, 시행한 향약에 관한 자료이다. 총 29책인데, 책의 형태와 체재, 명칭은 다소 다르기는 하나 내용이 향약자료로 분류되는 문헌이 24책이며, 나머지 5책은 향약 관련 자료들이다. 현존하는 향약 문헌으로서는 양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 가장 많고 충실하며 향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1) 태인 고현 동중 향음서문 해제 태인 고현 동중 향음서문은 1475년(성종6)에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이 지었다. 그가 태평성대를 만나 30여 호 되는 조용한 시골에 살면서 어린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개도하는 법을 엄격히 하고 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시(設施)하여 이웃과 친목 하는 규정을 세웠다. 그리하여 공경과 화목, 정결과 효도, 공손과 사양을 준행하고 사치와 음란을 가르치거나 방자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한다면, 향촌의 친목뿐만 아니라 그 효과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데 이르게 될 것이고, 선행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면 옛날 향음주례를 강론하여 사람마다 모두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 있었던 주(周) 나라의 풍속과 교화를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니 힘쓰라는 내용이다. 2) 동중 향음 서문에 대한 발문 해제 동중 향음 서문에 대한 발문은 1510년(중종5) 전 예조좌랑 송세림(宋世琳)이 지었다. 정언(正言) 정 선생(丁先生)은 문종조(文宗朝)의 유일(遺逸)일뿐만 아니라 연세도 많고 덕망도 높은데 선생의 서문과 규약을 통하여 동리의 기풍을 보니 우뚝하여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태인 동중은 최고운 선생(崔孤雲先生)이 부임했던 곳으로 산천이 길게 뻗어 있어 굉재(宏才)와 석덕(碩德)이 배출되는 특이한 곳이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서로 화합하게 지내는 것은 정 선생이 전하신 규약을 준행하기 때문이며, 당시에는 겨우 30여 호였었는데 지금은 50여 호가 넘는다. 그 가운데 관자(冠者)와 동자(童子)가 선생이 지으신 서문과 규약을 외고 음미하며 불목(不睦)과 불의(不義)를 저지를 겨를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송세림 자신도 태어나 30년이 지난 뒤에야 선생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지금 옛날 좌목[舊座目]의 오손(汚損)을 염려하여 새롭게 하려고 하는데 혹자가 작고(作故)한 분들의 이름을 빼버리자고 하므로 굳이 만류하기를 “중요한 것은 후세에 <좌목에 기재된> 사람의 행동이 어떠하였는가를 알게 할 뿐이다. 좌목에 행동한 바를 기록하지는 않지만 후세의 사람들이 아무개는 정직하고 아무개는 간사하며 아무개는 착하고 아무개는 악하다고 낱낱이 따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간사하고 악한 것은 제거하고 그 정직하고 착한 자와 같이 나아가려고 도모할 것이니 이것이 하나의 귀감이다.” 하였더니, 모두 옳다고 하기에 위와 같이 기록한다는 내용이다. (작성자 : 조명근)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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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0(初雕本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三十) / 고려시대(11세기)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권자장이 책은 11세기(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목판으로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周本) 80권 가운데 제 30권이다. 이 권 제30은 화엄경의 39품 가운데 보살 수행의 한 단계로서 자신이 이룩한 덕행을 남에게 돌려주는 십회향품(十廻向品)에 해당된다. 이 권의 내용은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이라고 하는데, 세상만물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가식 없이 깨우쳐주면 사람들은 나와 내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착한 마음을 닦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 화엄경(華嚴經) 판본(版本)은 해인사(海印寺) 대장경판본(大藏經版本)이 매행(每行) 17자본(字本)인데 비하여 14자본(字本)으로 초조본(初雕本) 가운데 해인사본(海印寺本)과 가장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는 송태조(宋太祖)의 조부휘(祖父諱)인'경(敬)'자(字)의 겸피휘자(兼避諱字)인 '경(竟)'자(字)에 결획(缺劃)이 있다. 이 초조본(初雕本)은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로 보아 11세기경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권 제 1, 13, 29, 36, 74, 75가 지정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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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紺紙金泥妙法蓮華經 卷六) / 고려 우왕 14년(1388) / 1첩 / 필사본/사경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절첩장사경(寫經)으로서의 체제는 모두 제대로 갖추었고 또 맨 뒤에 발기(跋記)까지 붙어있기는 하나 표제문양(表題文樣)의 수법이 졸렬하며 글씨도 치졸(稚拙)하여 보물 제269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는 비교도 되지 아니하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경류(寫經類) 중에서도 수준이 떨어진다. 다만 "홍무이십일년(1388) 무진사월 일사성 시주봉익대부전공판서치사노유린(洪武二十一年(1388) 戊辰四月 日寫成 施主奉翊大夫典工判書致仕盧有麟)"이라는 발기(跋記)로 인하여 그 작성 연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의 가치가 한층 더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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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8(大方廣佛華嚴經 晋本 卷三十八) / 고려 후기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첩장이 책은 고려말에 해인사에서 다시 새겨 찍은 목판본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한역한『화엄경』진본 60권 중 제38권이다. 이 판본은 간행당시의 표지가 붙어 있는 고려 숙종년간(1096~1105)에 간행된 목판본의 번각(飜刻)으로 보이는 해인사 사간판본(寺刊版本)으로 간행 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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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1~5(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一∼五) / 조선 성종 5년(1474) / 5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선장조선 성종 5년(1474)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목판본이다. 양나라의 무제가 황후 치씨를 위해 지은 10권 가운데 1~5권이다. 자비도장참법(慈悲道場懺法)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으로, 이를 수행하면 죄가 없어지고 복이 생기며, 나아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책 끝의 간행기록이 없어서 간행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예념미타도량참법』권1~5, 6~10(보물 제949호)과 동일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조선시대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판본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제악업(諸惡業)을 회회(懷悔)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法會)의 절차를 수록(收錄)한 내용이다. 이 판본은 10권 중 제 1~5권으로 권말(卷末)에 간기(刊記)가 없으나 보물 제949, 보물 제1144호와 동일한 판본으로 왕실에서 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판본이다. 조선조 전적(典籍) 가운데 가장 뛰어난 판본 가운데 하나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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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2(妙法連華經 卷二) / 조선 초기 / 1권 1첩 / 목판본/사찰본 / 통도사성보박물관 / 경남 양산시 / 절첩장보물 제1194호인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조선 초기 명필가인 신총(信聰)의 정서본(淨書本)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이며 권2 1권 1책(영본)으로 통도사 소장이다. 일반적으로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는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통도사 소장본은 조선 초기 태종 1년(1401)에 간행된 어람본(御覽本) 능엄경(보물 759, 1195호)과 자체가 일치되고 있어 대략 이 무렵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판본이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접장본의 형식에 적합한 상하단변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간의 높이는 21.0cm이다. 1절의 폭은 11.0cm로 6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7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접장본인 까닭에 특별한 판식의 특징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6절마다 위쪽에 ‘법화이(法華二)’이란 간략 서명과 권수가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본문의 경문 내용에는 묵서로 표점이 찍혀있다. 표지는 미색으로 그다지 오래 되어 보이지 않으며, 표지의 크기는 33.2cm×11.0cm이다. 통도사 소장의 법화경은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 스님 신총이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정성스럽게 새겨진 판본으로 송판 또는 원판의 복각이 아닌 독자적 판본 계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판본은 현재 국내에 2책만이 전래되고 있으며, 동일본 권1과 3이 이미 보물(제1145, 제968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 그 전본이 매우 희귀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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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9~10(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九~十) / 조선 태종 1년(1401)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통도사성보박물관 / 경남 양산시 / 선장보물 제1195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금강경·원각경·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의 하나로 채택되어 학습되는 불경이다. 조선 초기(1401년)에 신총(信聰)이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 지정본은 권9~10, 2권 1책(영본)으로 통도사에 소장되어있다. 이 불경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중국에서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이 경의 제7권에 수록된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으며, 원명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능엄경’이라고도 한다. 모두 10권으로 편성되어 있다. 통도사 소장본은 바로 태종 1년(1401)에 신총(信聰)이 계환(戒環)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통도사본은 전체 10권 중에 권9와 10의 2권 1책이다. 전후의 표지는 근래에 새로 개장(改裝)하였으나, 보수 시에 원래의 표지를 안에 넣어 수리하였다. 원표지의 표제는 ‘수릉엄경(首楞嚴經)’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소유자의 수결로 보이는 서명이 묵서되어 있다. 이 책의 크기는 34.2cm×22.5cm이다. 이 책은 조선 태조가 태상왕으로 있었던 태종 1년(1401)에 신총 대사로 하여금 대자 능엄경을 보기 좋게 대자로 쓰게 하여 어람(御覽)하고 판각케 한 10권 5책 중의 권9, 권10 이렇게 2권 1책이 전래된 것이다. 이것은 척불숭유책을 국시로 정한 조선 태조가 건국과정에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이어 왕자의 란(亂)과 같은 참사가 계속 일어나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간행한 점에서 주목된다. 권말의 권근 발문에 의하면 판각(板刻)은 대덕 명호(明昊)를 비롯한 많은 각수들이 참여하였고 간역(刊役)의 감독은 윤백안(尹伯顔)이 맡아 완성한 조선초기의 우리의 독자적 판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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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妙法連華經) / 조선 세조 1년(1456) / 7권 7책 / 목판본/사찰본 / 통도사성보박물관 / 경남 양산시 / 선장보물 제1196호인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조선초기 명필가인 신총(信聰)의 정서본(淨書本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이며 7권 1책으로 통도사 소장이다. 일반적으로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는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정본은 조선초기 세종 4년(1422)에 명필가인 성달생과 성개(成槪) 형제가 이른 나이에 홍역으로 죽은 성녕대군과 그 어머니 원경왕후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법화경을 정서한 판하본(板下本)을 바탕으로 서울 인근의 고양 대자암(大慈庵)에서 도인 정암(定庵)의 주관으로 판각된 판목으로 세조 2년(1456)에 후인(後印)한 전 7권 3책 완질본이다. 제 1책의 권수에는 호법신장의 변상판화(變相板畵) 1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 종남산 도선(道宣)의 홍전서와 복주(福州) 상생선원(上生禪院) 급남(及南)이 지은 서문이 실려 있다. 권1의 권두서명은 제1행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행에 “온릉개원연사비구 계환 해(溫陵開元蓮寺比丘 戒環 解)”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송나라 계환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변상판화는 권1 외에도 권4와 권6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권4에 수록된 연화문의 판화 1점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도상으로 주목된다. 표지는 근래 새로 개장되어 있으나, 권1의 제1책은 원래의 표지가 안쪽에 그대로 제책되어 있는 상태이다. 원표지는 바탕이 남색비단으로 되어 있으며, 좌측 상단에 홍색의 비단 위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란 경제를 금니로 쓴 듯하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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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 / 조선 중종년간 (1506~1544) / 1첩 / 간독류/간독 / 순흥안씨종중 / 전북 남원시 / 첩장『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은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 1492~1534)이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떠날 때, 동료와 친구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써준 서(序) ㆍ 시(詩)등을 안처순의 사후에 하나의 첩(帖)으로 모은 것이다. 안처순(安處順)은 자(字)는 순지(順之), 호(號)는 사재(思齋) 또는 기재(幾齋)라 하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그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홍문관 박사로 재직 중 남원(南原)에 홀로 사는 모친을 위해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내려갔다. 이 서첩(書帖)은 바로 그가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동료와 친우들이 송별의 뜻에서 서(序) ㆍ시(詩) 등을 지어준 것을 그의 사후 일첩(一帖)으로 장정(粧幀)한 것이다. 조광조(趙光祖)ㆍ성세창(成世昌) 등 사림파(士林派)의 기묘명현(己卯名賢) 24명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이와 관련된 명현들의 글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으나, 이 첩에 많은 글이 수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정치사상사 및 서예사 등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이 서첩은 순흥 안씨 사재(思齋) 안처순(安處順)이 1518년 홍문관 박사로 재직할 때 남원(南原)에 계신 모친(母親)을 위해 가까운 곳의 지방관을 자청, 구례현감(求禮縣監)에 부임하게 되자, 유용근(柳庸謹)ㆍ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동료ㆍ친우들이 송별(送別)의 뜻에서 서(序)ㆍ시(詩) 등을 지어준 글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 서두에 실린 한준겸(韓浚謙)의 발문에 따르면, 1601년 남원을 지나다가 이 서첩을 보고 이를 서울로 가지고 가 친우들에게 보였는데, 대제학 이호민(李好閔)은 궁중 장인(匠人)을 시켜 깨끗이 표장(表粧)하게 하고 명필 한호(韓濩)에게 표제(表題)를 부탁했다고 한다. 친우를 전별(餞別)하며 지은 작별시를 모은 별장(別章)인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에는 24명의 글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이 시문(詩文)은 후대에 편찬한 안처순의 『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記)』 5권의 구례간독(求禮別章)에 거의 수록되었고, 혹은 조광조(趙光祖) 등은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다만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시고는 외손(外孫) 심인최(沈仁最)가 가져가서 가보(家寶)로 삼고 대신 모사(摹寫)하여 보충하였다. 그런데 최산두의 2번째 서간, 원본 31쪽 군지발패(君之發旆)로 시작하는 내용의 후반부는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 51쪽에 금빙건지(今憑健之)로 시작되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또 박상(朴祥)의 옥인청모(玉人淸耗)로 시작하는 서간이 47쪽에 실려 있는데, 분류 기준에 맞지 않는다. 기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 역대(歷代) 명현(名賢)들의 서(序)ㆍ발(跋)ㆍ지문(識文)ㆍ경위(經緯) 등 글이 첨가(添加)되어 있다. 뒤쪽에는 조인영(趙寅永)이 1829년에 전라감영에서 다시 표장하고 일부를 판각(板刻)하여 원본을 후손에게 돌려주었다는 1830년에 지은 발문이 있으며, 맨 끝에는 송병선(宋秉璿)의 발문이 붙어있다. 이 수필첩은 안처순이 기묘명현에게서 받은 서간을 모은 『기묘제현수첩』과 함께 16세기 정치사 및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서찰(書札)인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에는 12명의 서신(書信)이 실려 있고,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에는 25명의 글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이 두 첩(帖)에 중복 수록(收錄)된 6명과 서발(序跋)을 지은 3인을 포함하여 글을 지은 문인(文人)은 총(總) 33명이다. (작성자 : 김상환)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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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 / 조선 중종년간 (1506~1544) / 1첩 / 간독류/간독 / 순흥안씨종중 / 전북 남원시 / 첩장『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은 대체로 사화(士禍)가 일어난 기묘년(己卯年)을 전후하여 동료 ㆍ 친구로 부터 안처순(安處順)에게 보내온 서신(書信)을 묶어 만든 것으로 거의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된 인물(人物)들의 글이다. 중종 14년(1519)을 전후하여 홍문관 박사ㆍ구례현감을 지낸 안처순(安處順, 1493∼1534)에게 보내온 최산두(崔山斗)ㆍ김구(金絿) 등 기묘명현(己卯名賢) 12명 등 동료ㆍ친구들의 서찰을 모아 만들었으며 모두 39통이 수록되었다.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과 같이 선조 36년(1603) 전라도관찰사 한준겸(韓浚謙), 대제학(大提學)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국장(國匠)을 시켜 정장(淨粧)토록 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1534∼1605)에게 표제(標題)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고종 12년(1875)에 전라감영에서 개장하였다. 이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된 명현(名賢)들의 글과 필적(筆蹟)으로 조선전기 서화(書畵)는 물론, 기묘사화(己卯士禍)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이 문서는 사재(思齋) 안처순(安處順)이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부임할 때, 동료에게서 받은 서간을 모은 것인데 대부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된 인물이다. 이들은 중종 때의 정권다툼인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죽거나 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불린다. 안처순은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으로 1517년에 홍문관박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구례현감으로 제수(除授)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으나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뒤에 복관(復官)되었다. 이 수첩(手帖)은 선조 때 한준겸(韓浚謙)과 이호민(李好閔)이 주선하여 첩장(帖裝)으로 장황(張皇)하였다. 그러나 원본을 잘라 붙이는 과정에서 피봉과 내용이 혼잡된 곳도 있다. 수록(收錄)된 39통(通)의 서찰(書札)은 장옥(張玉)ㆍ성수종(成守琮)ㆍ남주(南趎) 등 3명(名)이 각(各) 1통(通), 정응(鄭譍)ㆍ기준(奇遵)ㆍ조광조(趙光祖)ㆍ한충(韓忠)ㆍ유용근(柳庸謹) 5명이 각 2통(通), 이연경(李延慶) 3통(通), 박상(朴祥)ㆍ김구(金絿)ㆍ김정(金淨)이 각 4통(通), 최산두(崔山斗) 11통(通)으로 최산두(崔山斗)의 서찰(書札)이 가장 많다. 이 서간은 후대에 편찬한 안처순의 『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記)』 5권의 제현간독(諸賢簡牘)에 거의 수록되었고, 혹은 조광조(趙光祖)와 김구(金絿) 등은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다만 절의(節義)에 시비(是非)가 있는 남곤(南袞)의 서간은 누락되었다. 그런데 최산두의 5번째 서간, 원본 38쪽 금빙건지(今憑健之)로 시작되는 내용은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 51쪽에 군지발패(君之發旆)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당대 명사들이 열람했으며 후에 보물로 관리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지 의아스럽다. 또 박상(朴祥)의 서간 5, 옥인청모(玉人淸耗)로 시작하는 내용은 기묘제현수필 47쪽에 실려 있다. 역시 분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수첩 앞쪽에는 한준겸(韓浚謙)의 지문(識文)이 있고, 뒤쪽에는 조광조의 11대손 조성교(趙性敎)가 쓴 1875년의 발문이 있다. 한준겸은 글은 『유천유고(柳川遺稿)』 잡저(雜著)에 「기묘제현서첩지(己卯諸賢書帖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또한 조성교의 발문에 의하면, 그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11대손(代孫)으로 이곳 도순찰사(都巡察使)로 부임(赴任)하여 이 서첩(書帖)을 보고 완영(完營)에서 보수(補修) 개장(改粧) 하도록 하고, 이어 이 첩(帖)에 대한 감회(感懷) 및 경위(經緯) 등을 서술(敍述)하였다. 이 서간첩은 정축년(1517, 중종12)에서 신묘년(1531, 중종26)에 이르는 15여 연간에 걸쳐 그의 동료인 기묘제현(己卯諸賢) 12명으로 부터 안처순이 직접 받은 서신(書信) 39통(通)을 수습(收拾), 한 첩(帖)으로 장정(裝訂)한 것으로 면수(面數)는 3면(面)부터 72면(面)에 걸쳐 수록(收錄)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개인적인 정황(귀양지에서 술을 담아 보내달라는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은 물론이고, 기묘사화와 관련된 당대 명현들의 필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구례현감으로 부임하는 안처순에게 친우들이 지어준 송별시를 모은 『기묘제현수필』과 함께 중종 연간의 정치사 및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다. (작성자 : 김상환)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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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 종가 문적(李賢輔 宗家 文籍) / 조선 연산군 4년(1498)~정조 15년(1791) / 일괄(7책,1첩,23건) / 필사본/사본류 / 이성원 / 경북 안동시 / 선장《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명종(明宗)년간의 조선 중기 문신(文臣)이며 학자로서 본관(本貫)은 영천(永川),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설빈옹(雪鬢翁)으로 예산출신이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倡導者)로 일컬어지는 시조작가(時調作家)로 특히 유명한 인물이다. 저서로는 농암문집(聾巖文集)이 전한다. 이 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는 현재 농암(聾巖)의 종손가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는 자료들 중 하나로 그의 아들 이숙량(李叔樑)이 농암의 유고(遺稿)를 모아 필사(筆寫)하여 편집한 것이다. 《정동면례시일록(亭洞緬禮時日錄)》 「정동면례시일록(亭洞緬禮時日錄)」과 「영정개모시일기(影幀改摹時日記)」를 합철한 책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23매, 전적 7종8책, 회화1폭 등과 함께 가계일괄유물로 지정된 것 중의 하나이다.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조선 중종(中宗)때의 문신(文臣)이자 작가(作家)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이다.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두 자료가 모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관련있는 것이다. 「정동면례시일록(亭洞緬禮時日錄)」은 정조 15년(1791) 10월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묘소(墓所)를 이장(移葬)하면서의 일어난 일들을 농암의 9세손인 이만흡이 기록한 것이다. 「영정개모시일기(影幀改摹時日記)」은 농암의 10세손인 이시옥(李時沃, 1761∼1846)이 농암의 영정(影幀)을 다시 베껴 그리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일기이다. 이들 자료는 농암 이현보에 관한 기록들을 알려주는 사료이며 조선 중기 예식의 절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계사구로회첩(癸巳九老會帖), 속구로회첩(續九老會帖)》 이 책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계사(癸巳)년, 곧 중종 28년(1533)에 예안(禮安)에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모아 열었던 구로회에 관한 기록으로 일종의 계회첩(契會帖)이다. 「계사구로회첩(癸巳九老會帖)」과 「정미추속구로회첩(丁未秋續九老會帖)」이 수록되어 있는데, 「계사구로회첩(癸巳九老會帖)」은 농암이 처음 예안(禮安)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70세 이상 되는 노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창설한 것을 아들인 이문량(李文樑)이 선조 2년(1569)에 정리한 것이다. 일종의 계회첩(契會帖)으로서 후에 농암이 두 번째로 창설한 구로회인 ‘정미추속구로회(丁未秋續九老會)’의 기록이 덧붙여졌다. 이현보의 대표적인 문집인『농암집(聾巖集)』을 통해서 살펴보면 ‘구로회(九老會)’란 일종의 양로회와 같은 것으로 농암은 고향에 내려와 70세 이상의 노인을 초청하여 수연을 베풀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었던 까닭에 ‘구로회’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전통은 수백년을 내려오는 농암가의 전통이 되었으며 ‘구로회’, ‘속구로회’, ‘속로회’ 등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분천강호록(分川講好錄)》 《분천강호록(分川講好錄)》은 조선 중종(中宗)때의 문신(文臣)이자 작가(作家)였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여러 가지 문화재들 중 하나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숙량(李叔樑)이 분천동(汾川洞)에서 여행(勵行)한 동약(洞約) 등을 모아 편집하고 글을 쓴 것이다. 편자(編者)인 이숙량(李叔樑)은 약조(約條) 뒤에 국문가사(國文歌詞)를 직접 써 덧붙여 놓았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십오대손(十五代孫)인 이용구(李龍九)가 쓴 발문(跋文)이 있다. 책에 포함되어 있는 주된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고, 이웃 간에 화목하게 지내자는 4조(條)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매월(每月)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서 글을 풀이하고 해석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하자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당음비사(棠陰比事)》 《당음비사(棠陰比事)》는 일종의 재판판례집 또는 소송기록집으로 조선 중종(中宗)때의 문신(文臣)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여러 문화재들 중 하나이다. 이현보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 시조작가로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 책은 중종 35년(1540) 4월에 국왕이 당시 형조참판(刑曺參判)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에게 내린 내사본(內賜本)이다. 이 책의 편찬자는 송나라 계만영(桂萬榮)으로 1207년에 중국 송(宋)나라의 재판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며, 법을 집행하는데 참고하던 법관의 참고서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금속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하였으며 각 장은 10행 18자로 찍어서 간행되었다. 책의 표지 이면에는 중종(中宗)이 농암 이현보에게 1540년에 내린 내사기(內賜記)와 宣賜之記라는 내사인(內賜印)이 찍혀 있다. 《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명종(明宗)년간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강호도가(江湖道歌)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시조작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현재 농암의 종손가에 소장된 교지를 포함한 전적ㆍ회화류 등의 자료들이 보물 1202호로 일괄 지정되어 전한다. 이 책도 농암 이현보 종손가에 소장된 문적 가운데 하나로 「화산양로연시(花山養老宴詩)」ㆍ「농암애일당시(聾巖愛日堂詩)」ㆍ「애일당관척록(愛日堂觀戚錄)」ㆍ「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 그리고 「효빈가(效顰歌)」ㆍ「농암가(聾巖歌)」ㆍ「생일가(生日歌)」ㆍ「귀전록(歸田錄)」ㆍ「분천속구로회발(汾川續九老會跋)」ㆍ「농암선생축시」 등 이현보의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그의 아들 이숙량(李叔樑)이 편집한 것이다. 수록 작품가운데 「효빈가(效顰歌)」에는 중종 37년(1542)에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성문을 나가 한강에서 배를 타고 술마시며 친지들과 전별할 때 배위에서 취하여 누우니 달은 동산에 떠오르고 미풍이 잠깐 일기에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어 귀흥이 더욱 더하여지므로 이 노래를 짓게 되었다는 경위를 밝히고 있다. 또한 「생일가(生日歌)」는 농암이 85회 생일을 맞이하여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그 감격을 ‘생일가(生日歌)’로 표현한 것인데 그 내용은 ‘7월 29일 나의 생일을 맞이하여 아들과 손자들이 술자리를 베풀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 해에는 특별히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향중의 노인들과 이웃 고을의 원들이 모두 참석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술잔을 나누다보니 마침내 취해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늙은이 역시 노래를 지어 여기에 화답하였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이현보의 작품뿐만 아니라 책의 편자(編者)이자 이현보의 6째 아들인 이숙량(李叔樑)의 <분천강호가(汾川江胡歌)> 등의 작품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그의 효제충신(孝悌忠信)에 관한 견해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즉 이 자료는 영천이씨문중에 관한 사료적인 가치에 더하여 그 수록된 작품가운데 특히 「효빈가(效顰歌)」ㆍ「농암가(聾巖歌)」ㆍ「생일가(生日歌)」 등의 국문가사들로 인하여 국문학 분야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명종(明宗)년간의 문신이자 학자로 그는 시문에 능하여 우리말 시가문학을 비롯한 다수의 시조작품을 창작하였다. 농암 가문의 유물은 교지를 포함하여 고문서류ㆍ전적류ㆍ회화류 등의 자료들이 안동의 농암 종가에 소장되어 전하여 보물 제1202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으며 지정된 전적가운데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은 당대 명사들의 그림과 시를 모은 시첩이다. 첩의 서명 중에 ‘애일당(愛日堂)’은 농암의 당호(堂號)이고 ‘구경(具慶)’이란 ‘부모(父母)가 함께 생존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이다. 곧 농암의 아들 이숙량(李叔樑)이 그 부모를 위하여 모은 시첩(詩帖)이다. 수록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두 2책 가운데 상권 1책은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와「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ㆍ「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가 있고 그에 해당되는 그림 아래에 각각 당대의 명사들의 시(詩)가 첨부되어 있으며 이를 모아서 첩장(帖裝)한 것이다. 하권 1책에는 농암 이현보의 시와 당대의 명사들이 친히 지은 차운시(次韻詩)를 집록하여 모았다. 수록된 시의 저작 시기는 중종 14년(1519) 가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재직하던 때로 농암이 경내(境內) 노인을 관정(官庭)에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고, 「화산양로연시(花山養老宴詩)」와 「농암애일당시(聾巖愛日堂詩)」를 지었다고 하였다. 작품이 수록된 인물은 사지당(四止堂) 김연(金演)ㆍ눌재(訥齋) 박상(朴祥)ㆍ김세경(金世卿)ㆍ유희령(柳希齡) 등 경향(京鄕)의 명사들 40인이며 그 내용은 주로 그들이 친히 보내온 송축시(頌祝詩)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이 첩(帖)은 문학적인 가치는 물론 조선전기 명사(名士)들의 친히 저작한 시고(詩稿)란 점에서 서예사적(書藝史的) 가치도 높게 평가된다. 《고문서》 이 문서는 조선 중기 문신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교지류이다. 이현보는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으로 경상도 예안 출신이다.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을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과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이현보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교지류는 모두 23점이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리면서 발급해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을 말한다. 먼저 이현보와 관련한 교지류를 살펴보면, 연산군 4년(1498) 4월에 문과에 급제한 홍패, 연산군 7년(1501) 4월에 이조에서 종사랑행영흥훈도(從仕郞行永興訓導)로 임명한 사령장 등 교첩이 5점, 중종 9년(1514) 10월에 대구진관병마동첨절제사(大丘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임명받은 사령장 등 교지가 7점, 그가 죽은 후 명종 12년(1557) 3월 22일에 왕이 ‘효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증시교지 1점이 있다. 다음은 명종 1년(1546) 11월 초2일에 증조 이파가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曺參議)로 추증 받은 추증교지 1점이 있다. 아들 이문량과 관련한 교지류로는 중종 15년(1520) 윤 8월에 이문량을 장사랑(將仕郞)에 임명하는 사령장 등 교첩이 7점, 명종 15년(1560) 9월에 그를 조봉대부 행평릉도찰방(朝奉大夫行平陵道察防)에 임명하는 사령장 1점이 있다. 이현보 종손가에 소장된 교지류의 특징은 아들 이동량이 부친 이현보의 자궁(資窮)으로 인하여 대가(代加)를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가문의 이러한 교지류를 통해서 이현보와 그의 아들의 관력(官歷)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또한 이는 조선전기 관제를 연구하는데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1. 개관 가. 개요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종가에 소장된 시화첩이다. 시화첩에는 이현보가 그 어버이를 위하여 1512년(중종 7년)에 고향 예안현(禮安縣) 분천리(汾川里) 분강汾江 기슭 농암 바위 가에 ‘애일당(愛日堂)’이라는 건물을 짓고 장수를 축원하며 지은 시와 경향 사대부들의 차운시를 장첩하고 있다. 또한 안동부사로 재임하면서 1519년(중종 14)에 중양절(重陽節)에 부모와 관내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지은 ‘화산양로연시’와 차운시도 포함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부모 봉양을 위하여 1508년(중종 3) 영천 군수(永川郡守), 1522년(중종 17) 성주 목사(星州牧使), 1528년(중종 24)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부임할 때의 전송시와 축시 등도 포함하고 있다. 한 첩은 원본을 장첩한 것이고, 한 첩은 원본을 전사하고 연회 광경 그림을 추가하였다. 현재 일반에서 원본 첩은 ‘상책(上冊)’, 사본 첩은 ‘하책(下冊)’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본의 내용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적절한 명칭이 아니며, 전자는 ‘사본 첩’, 후자는 ‘원본 첩’이라 해야 옳다. 애일당(愛日堂)은 이현보가 그 어버이를 위하여 1512년(중종 7년)에 고향 예안현(禮安縣) 분천리(汾川里) 분강汾江 기슭 농암 바위 가에 지은 건물이다. 1548년(명종 3)에 중창하고 이현보가 기문을 지었다. 안동댐 건설로 1975년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쯤 떨어진 영지산 남쪽 기슭으로 이건하였고, 그 이후에 다시 현재 도산면(陶山面) 가송리(佳松里)로 이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뒤쪽 열 양옆에 각각 1칸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 2칸과 앞 열 4칸은 모두 대청마루로 꾸몄다. 애일(愛日)의 뜻은 연로한 부모를 둔 자식이 봉양할 날이 많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날을 아끼면서 효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나. 관련 인물 1)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명종(明宗)년간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또는 설빈옹(雪靈翁)이다. 시문에 능하여 우리말 시가문학을 비롯한 다수의 시조작품을 창작하였다. 국문학 분야에서도 그를 일컬어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던 인물로 ‘강호문학의 창도자'라고 평한다. 성품이 강직하고 맑아 ‘소주도병(燒酒陶甁, 겉은 검고 속은 맑은 모습.)’이라 하였다고 한다. 2) 이흠(李欽, 1440~1537) 이현보의 부친이다. 자가 경지(敬之)이다. 증조는 고려 말에 봉선대부(奉善大夫) 군시기 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다 벼슬을 버리고 분천(汾川)에 입향한 헌(軒)의 증손이고, 조선 태종 때 의흥 현감(義興縣監)을 지낸 파(坡)의 아들이고, 봉례(奉禮) 효손(孝孫)의 아들이다. 1483년(성종 14)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내고, 진보(眞寶)와 인제(麟蹄)의 현감을 지낸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98세의 장수를 하였다. 3) 안동 권씨(安東權氏) 이현보의 모친이다. 호군(護軍)인 권겸(權謙)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85세의 장수를 하였다. 2. 서지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상책(上冊) : 1책(冊).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36.8cm×26.4cm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하책(下冊) : 1책(冊).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77.4cm×36.5cm 3. 내용 가.《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상책(上冊) 전체 면수는 표지를 포함하여 98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표제는 ‘愛日堂具慶帖’이다.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 2) 이희보(李希輔)의 시와 서문 3) 신상(申鏛, 1480∼1530)의 시 4)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의 시 5) 안처명(安處明, 1476~?)의 시 6)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시 7) 유여림(兪汝霖, 1476∼1538)의 시 8) 소세량(蘇世良, 1476∼1528)의 시 9)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 1457∼1520의 시 10)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1486∼?)의 시 11) 수재(睡齋) 류인귀(柳仁貴, 1463∼1531)의 시 12) 항재(恒齋) 류운(柳雲, 1485∼1528)의 시 13) 서후(徐厚)의 시 14) 삼당(三塘) 김영(金瑛, 1475~1528)의 시 15) 퇴우당(退憂堂) 조계형(曺繼衡, 1470~1518)의 시 16)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 1475∼?)의 시 17)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의 시 18) 기묘년 계추 화산 양로연 그림[己卯季秋花山養老燕圖] 19) 이현보(李賢輔)의 양로연(養老燕) 시와 서문, 애일당(愛日堂) 시와 서문 20) 사지당(四止堂) 김연(金縯)의 시 21) 상정(橡亭) 황필(黃㻶, 1464년∼1526)의 시 22) 남호(南湖) 손수(孫洙, ?∼1522)의 시 23)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시 24) 낙서(洛西) 이항(李沆, 1474∼1533)의 시 25) 퇴우(退憂) 표빙(表憑)의 시 26) 지정(止亭) 남곤(南袞, 1471∼1527)의 시 27)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 1476∼1528)의 시 28) 김수담(金粹潭, 1480~1523)의 시 29) 나헌(蘿軒)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시 30)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의 시 31)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의 시 32)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의 시 33) 낙재(樂齋) 김영(金瑛, 1475~1528)의 시 34) 우수(愚叟) 황한충(黃漢忠 1464~?)의 시 35) 적암(適菴) 조신(曺伸)의 시 36) 축옹(蓄翁) 황효헌(黃孝獻, 1491∼1532)의 시 37) 송정(松亭) 어영준(魚泳濬, 1483∼1529)의 시 38) 십완(十玩)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시 39) 치호(稚湖) 김수함(金粹涵)의 시 40) 명지(明之) 안처명(安處明)의 시 41) 왕산탄주인(王山灘主人) 유중익(兪仲翼)의 시 42)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 1471∼1536)의 시 43)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시 44)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시 45) 관포당(灌圃堂)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시 46) 옥봉야로(玉峯野老)의 시 47)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1486∼?)의 시 48) 심사손(沈思遜)의 시 49)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1473∼1548)의 시 51) 이위(李偉)의 시 52)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시 53) 소요정(逍遙亭) 심정(沈貞, 1471∼1531)의 시 54) 용재(慵齋) 상로(商老)의 시 55) 유환(兪瑍)의 시 56) 김영균(金永鈞)의 시 57)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1474∼1519)의 시 58) 몽암(夢菴) 류희령(柳希齡) : 1480∼1552)의 시 59) 유정(柳亭) 장옥(張玉, 1493~?)의 시 60) 병술년(1526, 중종 22) 중양일에 분천에서 잔치를 올릴 때 그림[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 61)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의 시와 서문 62) 청학도인(靑鶴道人)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시 63) 묵재(默齋)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의 시 나.《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하책(下冊)의 구성과 내용 전체 면수는 표지를 포함하여 8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는 ‘愛日堂具慶帖’이고, 수록된 시문은 다음과 같다. 1) 이현보(李賢輔)의 시와 서문 2) 사지당(四止堂) 김연(金縯)의 시 3) 상정(橡亭) 황필(黃㻶, 1464년∼1526)의 시 4)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 5) 낙재(樂齋) 김영(金瑛, 1475~1528)의 시 6) 우수(愚叟) 황한충(黃漢忠 1464~?)의 시 7) 남호(南湖) 손수(孫洙, ?∼1522)의 시 8)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시 9) 낙서(洛西) 이항(李沆, 1474∼1533)의 시 10) 나헌(蘿軒)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시 11)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의 시 12)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의 시 13) 지정(止亭) 남곤(南袞, 1471∼1527)의 시 14)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 1476∼1528)의 시 15) 치청(稚淸) 김수담(金粹潭, 1480~1523)의 시 16) 심사손(沈思遜)의 시 17)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1473∼1548)의 시 18) 추계자(楸溪子) 신희정(辛熙貞)의 시 19) 이위(李偉)의 시 20)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시 21)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 1471∼1536)의 시 22)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시 23) 관포당(灌圃堂)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시 24) 옥봉야로(玉峯野老)의 시 25)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1486∼?)의 시 26) 적암(適菴) 조신(曺伸)의 시 27) 축옹(蓄翁) 황효헌(黃孝獻, 1491∼1532)의 시 28) 송정(松亭) 어영준(魚泳濬, 1483∼1529)의 시 29) 십완(十玩)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시 30) 치호(稚湖) 김수함(金粹涵)의 시 31) 명지(明之) 안처명(安處明)의 시 32) 왕산탄주인(王山灘主人) 유중익(兪仲翼)의 시 33) 용재(慵齋) 상로(商老)의 시 34) 유환(兪瑍)의 시 35) 눌암(訥庵) 홍언국(洪彦國)의 시 36)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의 시 37) 김영균(金永鈞)의 시 38)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1474∼1519)의 시 39) 몽암(夢菴) 류희령(柳希齡) : 1480∼1552)의 시 40) 유정(柳亭) 장옥(張玉, 1493~?)의 시 4. 자료의 가치 가. 서지적 가치 《애일당구경첩》 하책은 모두 친필로 쓴 시고로서 작자의 글씨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친필 시고는 희소성이 있고, 작자들이 주로 당대 정치와 문학의 주류로 활동했던 인물들이란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 내용적 가치 이 책에 실린 시문의 작자들 중 다수가 문집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문집이 있는 경우에도 이곳의 시문은 수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작자들의 행력과 문학을 연구하는 데 일단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 연구사적 가치 2003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귀중본자료집’으로 하책을 영인하여 발간하였고, 논문으로는 강순애의 <이현보(李賢輔)의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권하에 관한 연구> 1편이 있다. 이번의 탈초와 표점 및 번역을 통하여 그 내용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을 계기로 이현보의 일생과 문학세계는 물론, 차운한 문사들의 연구에 진일보한 자료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 이현보 종가문적(李賢輔 宗家文籍) - 6책 『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 1. 머리말 『애일당구경별록』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佳松里)에 있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가에 소장된 서첩으로, 『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등 총31건의 문적과 아울러 1994년 보물 1202호로 지정되었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1512년(중종7)에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분천(汾川)에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지었던 정자이고, ‘구경’은 부모가 함께 장수하는 경사라는 말이다. 따라서 서첩 이름을 쉽게 풀이하면 ‘애일당에서 어버이가 장수하는 경사에 대하여 지은 글을 따로 모은 기록’ 정도가 될 것이다. 『애일당구경별록』을 통해 이현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는 만년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2. 이현보(李賢輔)의 생애 이현보는 29세 때인 1495년(연산군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32세 때인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서 76세인 1541년(중종37) 호조 참판을 사직하기까지 40년 넘게 벼슬을 하였고, 귀향하여 10여년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다가 1555년 6월 13일 89세의 장수를 누리고 긍구당(肯構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현보의 삶을 논할 때는 주로 강직함, 청렴, 효성, 양로, 장수, 강호문학 등의 키워드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연산군 때 사관으로서 곧이곧대로 기록하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뜻을 어긴 적이 있었는데,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연산군이 이현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는 단지 ‘철면(鐵面)에 수염난 자’라고 일컬었다고 하고, 또 성품이 강직하고 맑아 사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 겉은 검고 속은 맑음)’이라 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강직하면서 청렴한 면을 잘 말해준다. 이현보의 가정에는 특별히 장수하는 유전자가 있었던 듯하다. 부친 이흠(李欽) 98세, 모친 안동권씨 85세, 숙부 이균(李鈞) 99세, 조부 효손(孝孫) 84세, 조모 청주 양씨 77세, 증조 이파(李坡) 76세, 고조 이헌(李軒) 84세, 외숙 권수익(權受益) 93세, 외숙 권수복(權受福) 73세, 외사촌 권구(權矩) 85세, 아우 이현우(李賢佑) 91세, 아우 이현준(李賢俊) 86세, 아들 문량(文樑) 84세, 희량(希樑) 65세, 중량(仲樑) 79세, 계량(季樑) 83세, 숙량(叔樑) 74세, 윤량(閏樑) 74세였다고 한다. 벼슬과 수명을 오래 누린 것도 남다르지만, 졸하기 1년 전인 1554년 1월 17일에도 명종(明宗)이 “이현보는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이로 시골에 물러가 살고 있으니 그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李賢輔, 以耆年宿德, 退居田野。 其令乘馹上來。]라고 하였으니, 조정에서 추앙한 것이 어는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1557년에 ‘효절(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뜻이 “인자하고 은혜로움으로 어버이를 사랑한 것이 ‘효’이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자신을 잘 다스린 것이 ‘절’이다.[慈惠愛親曰孝 好廉自克曰節]”라고 하였으니, 시호 두 글자가 그의 일생을 명료하게 말해준다고 보겠다. 3, 형태 및 편집과 구성 1) 형태 서지 필사본 1첩(帖)으로,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에 43.2cm×26.2cm 크기이다. 원본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두꺼운 배접지 위에 올려 장첩 하였다. 글씨체는 주로 해서이고, 간간이 행서가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사람이 쓴 글씨로 보이나, 누구의 글씨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권응정(權應挺)과 권응창(權應昌) 형제의 시고는 원본 크기가 다른 것보다 조금 작고 전후에 낙관이 찍혀 있어 흡사 자필 원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글씨 형태는 여타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아, 수필 원고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워 글씨를 비교한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2) 편집과 구성 편집에 대하여는 말미에 있는 황준량의 발문에서 “내가 늘 공의 책상 앞에서 뵈면서 서첩을 꾸며서 발문을 쓰라는 명을 하셨기에 즐겁게 그 사실을 적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첩을 꾸몄다는 것이 어떤 과정과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또 그 서첩이 이 본이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의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현보가 직접 꾸민 서첩에 쓴 것이라면 적어도 황준량의 발문은 자필 원본으로 되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준량의 발문은 다른 시문과 동일인의 글씨로 보인다. 따라서 이 서첩의 편자나 필사자에 대하여는 누구라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이 서첩에 실린 시문의 내용과 편집 취지는 『애일당구경첩』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형식적인 면에서 『애일당구경첩』은 개별 작자의 자필 원본을 장첩 하였고, 이 서첩은 누군가가 일괄하여 필사하였다는 점과 글을 지은 시기가 주로 이현보 퇴임 이후에 해당하는 것은 다름 점이다. 따라서 왜 『애일당구경첩』처럼 수필 원본을 가지고 장첩하지 않고 베껴 썼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원본 첩이 따로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애일당구경첩』에 작자의 수필이 장첩 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앞부분에 이현보의 양로연과 애일당 시를 실은 것은 이 서첩의 큰 취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서첩의 실질적인 시는 그 다음의 「애일당희환록」, 「속구로회」, 「귀전록」에 담긴 일화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애일당희환록」을 쓴 경위를 살펴보면 이 서첩을 만든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현보가 추국경차관(推鞠敬差官)으로서 진해(鎮海)에 갔다가 1526년 여름에 돌아올 때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는데, 관리가 옥관자를 가지고 내려오자 모친이 어루만지며 “옥관자가 구멍이 많으니 꿰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하니, 이현보가 “다는 것이 어렵지 꿰는 것이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여 웃음꽃을 피우고, 그것을 기념하여 칠언절구 1수를 지었다. 또 이듬해 2월에 동부승지로서 근친하니, 모친이 미리 “먹기도 좋을시고 승정원 선반이야, 놀기도 좋을시고 대명전 기슭이야, 가기도 좋을시고 부모님 향하는 길이야”라는 시가를 지어 여종에게 익히게 하여 부르게 하니 즐거워 오언절구 1수를 지었다. 이때 경상감사 신상(申鏛, 1480~1530) 잔치를 베풀어주고 흠모하여 칠언절구 1수를 지었다. 이 두 가지 일화에 대하여 “내가 벼슬하면서 서울과 지방을 출입한 지 40여 년이 되었고, 그 동안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즐겁게 해드린 것이 한두 가지 일이 아니지만, 오직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즐겁고 기뻤다. 우스개 이야기와 아까운 시문을 헛되어 버릴 수 없겠기에 이어서 작은 첩을 만들고 동양(東陽)의 시를 함께 기록하여 애일당에 보관하여 후손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한다.” 하였다. 발문은 지은이가 이현보의 영향을 누구보다 더 많이 받았을 손자사위 황준량이고, 비교적 장문에 속하며, 이현보의 일생을 매우 화려한 글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황준량이 이현보를 예안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용수산(龍首山)에 빗대 찬송한 시로 마무리를 하였다. 4. 수록 내용 (1)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양로연 시 1수 칠언율시 1수와 서문이다. 1519년 9월 그믐날 안동 부사로 재임하면서 관내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관아에 불러 잔치를 열고 지었다. 제목은 「화산 양로연 시[花山養老宴詩]」이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수필 원본과 차운시가 실려 있다. (2) 이현보의 애일당(愛日堂) 시 2수 칠언절구 2수와 서문이다. 이현보가 살던 예안(禮安) 분천(汾川) 강가에 부모를 위하여 애일당을 짓고 지은 것이다. 제목은 「농암 애일당 시[聾巖愛日堂詩]」이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수필 원본과 차운시가 실려 있다. (3) 애일당희환록(愛日堂戱歡録) 이현보가 61세 때인 1526년 여름에 귀향하여 웃음꽃을 피웠던 일의 기록과,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지은 가사 1편, 이현보의 칠언절구 1수, 경상감사 신상(申鏛, 1480∼1530)의 축시 칠언절구 1수가 있다. (4)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 이현보가 1533년 가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고향에 내려와 부친(이흠(李欽))의 수연(壽筵)을 베풀었던 사실을 소개한 글이다. 그때 부친의 나이가 94세였고, 향중에서 80세 이상의 노인 8인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 고사에 빗대어 명칭을 붙였다고 하였다. (5) 귀전록(歸田録) 귀향의 즐거움을 3수의 가사로 읊고 그 연유를 밝힌 글이다. 87세 때인 계축년(1553) 윤3월 16일 기록하였다. 서문에 “나이 금년 87세이고,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 지 열두 해가 되었다. 그 만년의 거취와 즐겁게 논 자취를 이 세 단가(短歌)에 다 표현하고 써서 스스로 자랑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 효빈가(效顰歌) 1542년 가을에 한강에서 배를 빌려 잔치를 하고 귀향할 때 흥이 절로 무르익어 흐뭇하게 웃으며 이 노래를 지었고, 제목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본떴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 하였다. * 농암가(聾巖歌) 귀향하여 농암(聾巖)에 올라가 산천을 두루 살펴보며 옛날 감회에 젖어 지은 것이다. * 생일가(生日歌) 1551년 7월 그믐 생일에 고을의 부로와 사방 이웃 고을의 수령이 함께 모여 잔치를 열고 지은 것이다. (6) 이중량(李仲樑)의 「분천의 속구로회[汾川續九老會]」 시 1수 이현보의 넷째아들 이중량이 1547년 중양절에 분천에서 구로회를 열고 지은 칠언율시 1수와 서문이이다. 이현보가 1545년에 정2품인 자헌대부에 승진하여 선대에 증직이 되었으나 인종의 승하로 인하여 가묘 고유를 하지 못하다가 이때 고유하고 고을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중량이 영천 군수(永川郡守)로서 잔치를 주선하고 축시를 지었고, 이현보ㆍ이황ㆍ황준량 등이 차운시를 지었다. 이때 참석한 9명은 이현보(李賢輔 81세), 교수 남륙(南稑 82세), 김영균(金永鈞), 이세충(李世忠), 우의현(禹義賢), 김영근(金永根 74세), 김염(金琰 73세), 습독 이현우(李賢佑 70세), 변효검(卞孝儉 70세)이다. (7) 이황(李滉)의 차운시 1수 위 이중량의 시에 차운한 것이고, 짧은 서문이 있다. 잔치가 지난 1547년 중양절 며칠 뒤에 지었다고 하였다. (8) 이문량(李文樑)의 차운시 1수 이문량은 이현보의 장자이다. 위 이중량의 시에 차운하였고, 짧은 서문이 있다. (9) 이현보의 차운시 1수 위 이중량의 시에 차운한 것이고, 잔치를 연 시말을 자세하게 설명한 서문이 있다. (10) 임내신(任鼐臣, 1512~1588)의 차운시 1수 위 이중량의 시에 화답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지은 시이다. 임내신은 1544년 7월부터 1549년 정월까지 예안 현감으로 재임하였다. (11) 황준량(黃俊良)의 차운시 1수 황준량은 이현보의 맏아들 이문량의 사위로, 위 이중량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금계외집(錦溪外集)』 권3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구로회의 이 영양 공간의 시에 차운하다[九老會, 次李永陽公幹韻]」로 되어 있다. (12) 권응정(權應挺, 1498~1564)의 차운시 1수 권응정은 성주(星州) 출신으로, 7년 뒤인 1554년 3월 하순에 차운한 시이다. 1553년 윤3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하여 구로회의 시를 보고 차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13) 권응창(權應昌, 1505~1568)의 차운시 1수 권응창은 위 권응정의 아우로, 같은 때인 1554년 3월 16일에 차운하였다. (14)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차운시 2수 1554년 3월 하순에 차운한 것이다. 짧은 서문에서 “청송(青松)에 살면서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이 시로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 하였다. (15) 황준량(黃俊良)의 발문 1554년 정월 상순에 이 서첩의 발문이다. 황준량은 이현보의 생애 전반을 서술한 장편의 글로, 제목은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글 말미에 “내가 늘 공의 책상 앞에서 뵈면서 서첩을 꾸미고 끝에 발문을 쓰라는 명을 받았기에 즐겁게 그 사실을 적게 되었다.”라고 하여 쓴 연유를 밝혔다. 이는 이곳 외에 수록된 것을 볼 수 없다. (16) 황준량의 칠언장편 시 1수 1551년 7월 그믐 이현보의 85회의 생일에 축수한 시이다. 제목은 「용산이 높구나[龍山高]」이다. 장편의 시로 구양수(歐陽脩)의 「여산이 높구나[廬山高]」 시를 본떠 지은 것이다. 구양수의 시는 동년(同年) 진사 유환(劉渙)이 벼슬을 버리고 여산 남쪽으로 옮겨 가자 그의 절개를 여산에 비유하여 찬미한 작품으로, 험운(險韻)을 사용하여 한 운에 2구, 3구, 4구 등을 구사하여 문장력을 보인 것으로 이름났다. 이현보의 절개와 황준량의 문장력이 어우러진 작품이라 할 만하다. 5. 자료의 가치 이 서첩은 450여 년 전 이현보의 고향인 예안 분천(汾川)의 애일당에서 이루어진 효친(孝親), 양로(養老)의 윤리와 전원 속 시인의 서정이 녹아 있는 기록물이다. 그 세월만큼이나 그 공간 또한 많은 변화가 이루어져, 애일당이 있던 곳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수몰되어 가뭄이 심할 때만 가끔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멀지 않은 곳에 종택과 애일당을 이건하여 놓았으나, 옛날 농암이 서 있던 분강(汾江) 가의 풍광에는 비할 수 없다. 이 서첩을 통하여 89세의 장수를 누리고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이현보의 효도와 문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문명사회가 진보할수록 이 서첩에 담긴 뜻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작성자 : 안정)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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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 종가 문적(吳澐 宗家 文籍) / 조선 중종 33년(1538)~헌종 6년(1840) / 일괄(12책,110건) / 목판본/관판본 / 고창오씨죽유공파종중 / 경북 고령군 / 선장>> 1호 분재기 이 문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죽유(竹牖) 오운(吳澐) 종손가에 소장되어 오던 7종 110점의 문서 중 명종 16년(1561)~영조 30년(1755)사이에 작성된 분재기(分財記) 18점이다. 분재기는 재산상속을 위하여 작성되어진 문서로 재산상속의 시기와 방법에 따라 재주(財主)가 살아있을 때 재산을 자녀에게 분배하는 분급문기(分給文記), 재주(財主) 사후(死後) 그 자녀들에 회의(會議)에 의해 재산이 분배되는 화회문기(和會文記), 특별한 사유에 따라 재산을 분배하는 별급문기(別給文記)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별된다. 18점의 분재기는 명종 16년(1561) 2월에 오수정(吳守貞)이 아들 오운(吳澐)에게 발급한 별급문기(別給文記), 오운의 화회문기(和會文記),를 비롯하여 남매화회문기(男妹和會文記), 외손화회문기(外孫和會文記) 등 다양한 형태의 분재기를 포함하고 있다. 재산상속의 이유와 대상도 다양하며 시대에 따라 재산의 정도가 다르므로 문서의 길이도 40.0cm의 별급문기에서 7.0m가 넘는 화회문기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들 자료는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한 집안의 재산내력을 담고 있어서 당시 양반가의 재산상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경제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 2호 입안 이 문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죽유(竹牖) 오운(吳澐)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7종 110점의 문서 중 선조 18년(1585) 5월 20일에 발급된 입안(立案) 1점이다. 한가지 사안에 대하여 2가지 이상의 문서가 붙어 있는 점련문서(粘連文書)의 형태로 2년전(1583) 오씨가에서 제출한 소지가 함께 붙어있다. 입안(立案)은 관에서 발급하는 일종의 공증서로서, 개인의 청원에 따라 매매, 양도, 결송, 입후 등의 사실을 확인하여 이를 공증(公證)해주는 문서다. 그 내용은 노비 매매와 관련하여 오운의 집안에서 올린 소지(所志)에 대하여 함안군수(咸安郡守)가 발급한 것으로서 2년전(1583) 오씨가에서 제출한 소지에 의거하여 노비의 소유를 인증해주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하여 당시의 노비매매제도와 오씨 가문의 노비소유정도를 알 수 있으며 사회경제사적으로도 귀중한 사료이다. >> 3호 유지 이 문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죽유(竹牖) 오운(吳澐)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7종 110점의 문서 중 광해군 6년(1615)부터 인조 1년(1623) 사이에 발급된 유지(有旨) 10점이다. 유지(有旨)는 조선시대 승정원의 담당승지를 통하여 왕명을 받는 이에게 전달되는 왕명서(王命書)로 오운 종손가에 소장된 유지는 광해군 6년(1614)부터 오여은(吳汝穩)이 발급받은 유지가 7점, 오익환(吳益煥)이 받은 유지가 광해군 9년(1617)에 받은 것을 비롯한 3점이다. 유지의 내용은 관찬사서(官撰史書)에도 전재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관계 있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 4호 전령 이 문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죽유(竹牖) 오운(吳澐)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7종 110점의 문서 중 선조 25년(1592)에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의병부장 우치홍(禹治洪)에게 내린 전령(傳令) 1점이다. 전령(傳令)은 상급관원이 하급관원이나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서로 갑오경장 이후 훈령(訓令)으로 개칭되었으나 지방에서는 계속 전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주로 근무내용을 명하거나 임명 등의 내용으로 작성되며 인사행정제도(人事行政制度)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된다. 내용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1592) 7월 13일에 왜군이 조선인의 귀를 잘라 봉상(捧上)하는 등 전란이 치열해지면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고목(告目)을 보내어 영산의병부장(靈山義兵部長)으로 우치홍(禹治洪)을 임명하는 내용이다 >> 5호 교지 이 자료는 조선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1617)의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들이다. 오운종택(吳澐宗宅)에는 약 400년간 전래 되어온 고문서와 전적이 상당수 있다. 이 가운데 고문서는 명종 16년(1561)~영조 30년(1755) 사이에 작성된 분재기(分財記) 18점, 선조 18년(1585)에 작성된 입안(立案) 1점, 오운(吳澐) 및 자손들의 교지(敎旨) 58점, 국왕의 사제문(賜祭文) 1점, 호적단자(戶籍單子) 21점 등 7종 110점이다. 이 자료는 선조 24년(1591)에 오여은(吳汝穩)이 진사 3등 제9인에 입격하여 받은 백패이다. 1203고령(2)~0057. 다음의 자료는 광해군 8년(1616) 오익환(吳益煥)을 통덕랑행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通德郞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으로 임명하는 교첩이다. 1203고령(2)-0097. >> 6호 치제문 제문(祭文)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나 죽은 사람을 제사지낼 때 쓰는 글을 말하며 흔히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문과 축문은 그 내용에 차이가 있고, 문장의 길이에도 차이가 있는데 제문은 축문보다 긴 것이 일반적이다. 대개 축문은 죽은 사람이나 조상 또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수(祭需)를 드리니 받으라는 내용의 간단한 글이지만, 제문은 죽은 사람을 추도, 추모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기 때문에 자연히 길어지게 마련이다. 현존하는 제문 중에는 유학(幼學) 이상위(李相渭)가 30세 전에 죽은 부인 장씨(張氏)의 탈상을 당해 쓴 것이 있는데, 1,000여 자의 긴 글이다. 정경세(鄭經世)의 『우복집(愚伏集)』에는 「제종숙참봉문(祭從叔參奉文)」이 있는데, 1,320여 자나 된다. 제문 가운데 특히 고위 관원이 죽으면 왕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 때에 쓰는 제문을 치제문(致祭文) 또는 임금이 내린다 하여 사제문(賜祭文)이라 하였다. 현재 전하는 고문서에도 제문ㆍ치제문ㆍ축문 등이 많이 있다. 이 문서는 만력 45년(1617) 4월 29일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이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사이던 오운(吳澐)이 죽자 그의 죽음을 기려 영전에 제사(祭祀)할 때에 내린 치제문(致祭文)이다. >> 7호 호구단자 호구단자(戶口單子)는 호구장적(戶口帳籍)을 3년마다 개수하기 위하여 각 호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한 문서이다. 호주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이임(里任)ㆍ면임(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州郡)에서는 구대장(舊臺帳)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착오를 확인한 후 1부는 제출한 호주에게 돌려주고 1부는 호구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하였다. 그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이 연호를 쓰고 호주와 호주처의 사조(四祖) 및 가족상황, 노비의 수와 이름 등을 각각 별행으로 쓰고 있다. 연속적으로 작성된 호구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당시 사회, 경제체제를 직접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오운(吳澐) 종손가(宗孫家) 소장의 호구단자는 현종 10년(1669)~헌종 6년(1840)의 약 170년간에 걸친 오씨가문의 집안자료이다. 문서는 형태상 1장으로 된 단독문서가 13점, 2장이 연결된 점련문서가 1점, 3장연결의 점연문서가 5점, 4장연결의 점연문서 1점, 5장연결의 점연문서 1점으로 모두 21점이 남아 전한다. >> 8호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은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당시 성행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총 49편의 『예기(禮記)』 중 제 42편이 바로 『대학(大學)』으로 여기에 주자가 장구(章句)를 짓고 해설을 붙였으며 착간을 바로 잡은 것이 『대학장구(大學章句)』이다. 이 책은 죽유 오운(吳澐)이 선조 36년(1603)에 하사받은 내사본(內賜本)으로 목판본이지만 표지에 있는 내사기(內賜記)로 간년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오운(吳澐)은 자(字)는 태원(太源), 호(號)는 죽유(竹牖)ㆍ 죽계(竹溪), 본관(本貫)은 고창(高敞)이며 명종 16년(1561)에 생원(生員)이 되는 것을 관직의 시작으로 하여 학유(學諭)ㆍ직강(直講)ㆍ전적(典籍) 등을 지냈으며 충주목사, 성균사성(成均司成)을 거쳐 광주목사에서 사퇴하였다. 1592년 임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의 휘하에서 수병장(收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듬해 상주목사, 합천군수가 되었으며 정유재란때 다시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明將) 진린(陳璘)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했다. 저서(著書)로는 『죽유집(竹纜集)』외에『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표지 이면에 내사기(內賜記)가 있고 후표지(後表紙) 이면(裏面)에 ‘구가간인(久假于人) 기지불환(幾至不還) 근득추래(僅得推來)’라 하여 오래도록 남에게 빌려주어 거의 돌려받지 못하게 될 뻔하다가 겨우 찾아왔다는 지기(識記)가 있다. 이 책이 목판본(木版本)이기는 하나 죽유(竹牖)가 내사(內賜)받은 책으로 대학(大學)의 간년(刊年)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9호 동문선(東文選) 『동문선(東文選)』은 성종(成宗)의 명(命)으로 서거정(徐居正)외 23인이 참여하여 성종 9년(1478)에 편찬한 역대 시문선집으로 시대는 신라시대에서부터 조선조의 서거정 당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용은 목록 3권, 본문 1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광해군 10년(1618) 11월에 내린 내사본으로 현재 남아 있는 책은 목록(目錄) 상(上) ㆍ 중(中), 권 33~35, 67~69, 100~102등 5책이 전해지고 있으며 목록상에 표지이면지에 내사기가 있으며, 첫 장 상단에 「선사지기(宣賜之記)」의 내사인(內賜印)이 찍혀 있다. 광해군 10년(1618) 당시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이던 오익환(吳益煥)에게 내려진 내사본으로 훈련도감자판이다. >> 10호 노주연송덕시(勞酒宴頌德詩) 『노주연송덕시회편(勞酒宴頌德詩會編)』은 광해군 12년(1620) 3월 일에 국왕(國王)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농(先農)에 제사지내고 적전(籍田)에 밭갈이를 한 다음, 노주연(勞酒宴)을 행하자, 호종(扈從)에 참여했던 신하들이 송덕비(頌德詩)를 지어 왕(王)의 덕(德)을 칭송하였는데 이를 모아 편집한 것이다. 이때 죽유(竹牖)의 장자(長子) 오여은(吳汝穩)이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참여하여 송축시(頌祝詩)를 지었는데 이 책도 그때 반질(頒帙)되었던 것이다. 책의 서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선조조에 광릉참봉(光陵參奉)과 이조정랑을 엮임한 이이첨(李爾瞻)이 적었으며 간행은 판중추부사 박홍구(朴弘耉, 명종 7년(1552)~인조 2년(1624)가 맡아서 하였다. 이 책은 광해(光海)가 폐위(廢位)된 뒤에 전존(傳存)을 기피한 탓인지 아직까지 발견(發見)되지 않은 국내 유일본(唯一本)이다. >> 11호 한구소시(韓歐蘇詩) 『한구소시(韓歐蘇詩)』는 중종(中宗) 33년(1538) 6월에 오운(吳澐)의 조부(祖父) 오언의(吳彦毅)가 당(唐)의 한유(韓愈), 송(宋)의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등의 시(詩)를 써서 자손에 준 것으로 이황, 오수영(吳守盈)등의 글씨도 포함되어 있다. 단 맨 첫머리에 쓰인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와 「남산사자연시(南山謝自然詩)」는 대사헌(大司憲) 이상공(李相公)(이해(李瀣))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각각 쓴 것으로 전하며, 특히 퇴계(退溪)는 소동파시(蘇東坡詩) 책의 일부를 간간이 썼다 한다. 또 상하(上下) 격지(隔紙)에 쓴 율시 와 절구시는 초서(草書)인데 오운의 숙부 진사(進士) 춘당(春塘) 오수영이 썼다 한다. 이『한구소시(韓歐蘇詩)』는 원래 1책에 엮어져 있었는데, 선조 38년(1605) 중추(中秋)에 편사자(編寫者)의 손자 죽유(竹牖) 오운(吳澐)이 배접(褙接)을 하면서 건곤(乾坤) 2책으로 나누었다. 오운은 『창려시(昌黎詩)』, 곤책(坤冊)은 『구소시(歐蘇詩)』로 나누어 책제(冊題)를 썼는데, 이 책의 제목은 죽유의 숙부 춘당 오수영이 85세때에 쓴 것이다. 책의 권말에는 선조 38년(1605) 8월에 쓴 죽유(竹牖) 오운이 작성한 후지(後識)가 기록되어 책의 편성과 전래과정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 12호 시원수창첩(試院酬唱帖) 『시원수창첩(試院酬唱帖)』은 별시(別試)때의 고관(考官) 9명이 모여 주고받은 시집이다. 고관은 시관(試官)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설행(設行)되었던 각종 과거에서 책임을 맡았던 관원을 말한다. 시관(試官)외에 시원(試員)이라고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 과거에 종사하는 관원을 총칭하기 일컫기도 하였다. 이 서첩을 작성한 9명의 고시관은 모두 별시(別試) 시원(試員)으로 별시란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설행된 과거를 총칭하는 것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또는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되기도 하였으며 문과와 무과만 열고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와 잡과(雜科)는 열지 않았다. 서첩의 앞부분에는 19행에 걸쳐서 서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작성자는 1600년 호조참판과 이조참판을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던 유인길(柳寅吉)이 적었다. 이 서첩은 당시 이러한 별시 시관들의 우호적인 문회(文會)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또 한편으로 시문학 연구 자료임은 물론 본문의 호방한 필체는 서예적 가치도 높게 평가된다. >> 13호 매촌동약(梅村洞約) 동약(洞約)은 16세기 이후 재지사족(在地士族)이 만든 자치조직을 일컫는 것으로 17세기 이후 동성부락이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활성화되었다. 현전하는 동약은 영조 15년(1739)에 경상도 달성군 부인동에서 최흥원(崔興遠)이 실시한 『부인동 동약(夫仁洞洞約)』 외 다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동약의 실시목적과 조직 및 그 기능 등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매촌동약』은 오씨(吳氏)가 세거하던 매촌동(梅村洞)의 동약으로 순조 5년(1805)에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8세손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여 동왕(同王) 22년(1822)에 편한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는 당시 고령현감(高靈縣監) 한광선(韓光善)이 순조 22년(1822)에 쓴 「동약소서(洞約小序)」가 있고, 다음에 순조 5년(1805)에 쓴 오경정(吳慶鼎)의 「동약서(洞約序)」가 있으며 이어서는 「동약절목(洞約節目)」으로 29조가 열록(列錄)되어 있다. 권말에는 ‘도광이년(道光二年 순조 22, 1822) 유화절하한(流火節下澣)’이란 작성년월일(作成年月日)과 관(官)의 수결(手決)을 적고 있다. 다음에 「매평선돌기(梅坪船突記)」가 있는데 ‘청후청명절(靑候淸明節 槐翁記)’ 라 하여 작성연월, 작성자를 밝히고 있다. 즉 ‘갑신(甲申)(순조 24, 1824) 청명절(淸明節)에 괴옹(槐翁)은 기록한다’는 뜻이며 괴옹(槐翁)은 오경정(吳慶鼎)의 호(號)로 곧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향약(鄕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14호 양세유묵(兩世遺墨) 이 책은 죽유(竹牖) 오운(吳澐)과 아들 경암 오여벌(敬菴 吳汝벌, 1579∼1635)의 유묵이다. 오여벌은 『주역(周易)』등을 깊이 연구하여 『역괘도(易卦圖)』, 『천지만물도(天地萬物圖)』, 『음양오행도(陰陽五行圖)』를 저술하였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어서 『중국역대총론(中國歷代總論)』과 『동국역대기사(東國歷代紀事)』를 남겼으며 저서로는 『경암집(敬菴集)』 6권 3책이 있다. 이 서첩은 죽유(竹牖)의 8세손 오경정(吳慶鼎)이 장정한 것으로 서첩의 첫머리에는 최흥벽(崔興璧)의 서(序)가 있는데 서문의 글씨는 도한동(都漢東)이 순조 1년(1801) 신유년(辛酉年)에 쓴 것이다. 『양세유묵(兩世遺墨)』의 본문은 초서로 쓰였으며 최흥벽(崔興璧)은 서문에서 양공(兩公)의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수경고고, 여장송노회, 피진이골로자, 죽유필야ㆍ농려활동, 여창등벽라, 기교이영밀자, 경암필야.” (“수硬高古, 如長松老檜, 皮盡而骨露者ㆍ竹?筆也, 濃麗活動, 如蒼藤碧蘿, 技校而影密者, 敬菴筆也”) 라고 하여 아버지 오운의 글씨는 장송, 노회를 들어 정적이고 안정된 서풍임을 강조하였던 반면 아들 경암의 글씨는 창등(蒼藤), 벽나(碧蘿)를 빗대어 서체가 힘있게 약동함을 설하였으며 서예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 번역 해제 】 (8첩) 이 책은 기해년(1599, 선조 32) 과거시험 고시관으로 선발된 아홉 사람이 시원(試院)에서 시험을 채점하면서 여가를 보아 서로 간에 창수한 시를 엮은 것이다. 1599년 7월 26일에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즈음에, 세자의 입학(入學)과 원손(元孫) 탄생이라는 두 가지 경사를 내걸고 별시문과 과거시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갑과 1명 조탁(曺倬)을 비롯하여 16명을 뽑았다. 이 때 아홉의 고시관은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 송암(松菴) 이충원(李忠元), 백암(白巖) 남탁(南晫), 규오(葵塢) 류인길(柳寅吉), 행원(杏園) 최동립(崔東立), 허주(虛舟) □□□, 태암(泰巖) 양경우(梁慶遇), 부평(富平) 이계록(李繼祿), 채진(采眞) 윤청(尹暒)이다. 그런데 윤청은 시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없고 8명의 시가 실려 있다. 7언 절구 「시원추야(試院秋夜)」 2수(首)와 7언 율시 「고원즉사(考院卽事)」 1수(首)의 시제(詩題)를 가지고 같은 운자로 각각 3수씩 지었다. 고시관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이수광이 먼저 시를 지어 보였다. 때문에 그이 시가 제일 앞에 실려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앞에서 제시한 순서대로 고시관의 시가 차례로 실려 있다. 따라서 모든 고시관이 기본적으로 3수씩 지은 셈이 된다. 그러나 이계록만은 2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는 「시원추야(試院秋夜)」에는 1수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작품 순서도 「고원즉사(考院卽事)」가 먼저 나와 있고 「시원추야(試院秋夜)」가 뒤에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한 사람이 3수씩 지은 것 외에 허주는 추가로 「고원즉사(考院卽事)」 3수를 더 지었고, 이에 따라 이수광도 역시 「고원즉사(考院卽事)」 2수를 더 지었다. 따라서 허주는 총 6수로 가장 많은 시를 지었고, 이수광은 총 5수를 지었다. 추가로 지은 이들의 작품은 허주의 경우는 기본으로 지은 3수 바로 뒤를 이어서 실려 있지만, 이수광의 작품은 앞의 3수와는 따로 떨어져 허주의 추가 작품 3수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허주가 차운하는 시를 더 많이 짓자 이수광도 이것에 차운하여 지었기에, 허주 작품의 바로 뒤에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이 ?시원수창첩?에 실려 있는 작품 수는 총 28수가 된다. 유인길의 서문에 보이듯이 이 시들은 별시를 치르고 난 뒤에 1599년 8월 초에 시원에 모여서 채점하면서 창수한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 안정된 정국에서 새로워진 문물을 찬미하는 것, 고시관 자신들이 높은 안목을 가지고 천하의 인재를 잘 선발할까 걱정이 된다는 것, 그리고 시원에 머물면서 꿈속에서라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을 기술한 것 등이다. 서문을 지은 이는 류인길인데, 본문의 시와 필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1614년에 자신이 친히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문의 시는 1599년에 당시 수창첩을 만드는 그 자리에서 이충원이 직접 쓴 것이다. 그는 글씨에 뛰어났는데, 현존하는 작품으로 경기도 고양의 「계원군이의묘비(桂原君李艤墓碑)」 등이 남아 있다. 이 책에 서문을 부쳐서 ?시원창수첩?이 하나의 완전한 책이 되게 한 사람은 죽유(竹牖) 오운(吳澐 : 1540~1617)이다. 과거시험이 치러진 15년 뒤인 갑인년(1614)에 오운의 아들 오여은(吳汝檼)을 시켜서 류인길에게 가서 서문을 받아오게 한다. 이에 류인길은 옛날 일을 회상하고 그 때 고시관이었던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이 반이나 된다고 하면서 인생무상을 느끼며 서문을 지었다. 그런데 한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첫 번째는 이 책이 당시 고시관이 아니었던 오운의 집에 어떤 연유로 소장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류인길이 이 책의 서문을 쓴 해가 1614년인데, 모든 인명사전에 그의 졸년이 1602년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오류임에 분명하다. (작성자 : 오용원)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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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7, 77(初雕本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十七, 七十七) / 고려시대(11세기) 추정 / 2권 2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권자장이 책은 11세기(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목판으로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周本 80卷) 가운데 제 67권(第 67卷)가 77권이다. 내용은 2권 모두 전체 39품 가운데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入法界品)으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인(人)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구도행각(求道行脚)을 밟는 과정을 설(說)한 것이다. 이 초조본은 권말(卷末)의 간기(刊記)가 생략되어 있는데 비해 해인사본에는 '을사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라 되어 있다. 본문에는 송태조(宋太祖)의 조부휘(祖父諱)인 '경(敬) '자(字)에 결획(缺劃)이 보이고 있으며, 본문 배열에 있어서 1행(行) 14자이나 해인사본은 1행 17자로 차이가 있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각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해인사대장경보다 글씨가 힘이 있고, 새김이 정교한데, 매 행(行)의 글자 수가 14자로 해인사본의 17자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이 판본(板本)은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印刷狀態) 등으로 보아 11세기에 간행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화엄경 주본은 권 1, 13, 29, 30, 36, 74, 75가 지정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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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은니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0(白紙銀泥大佛頂如來密因脩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十) / 고려 공민왕 5년(1356) / 1첩 / 필사본/사경 / 경북대학교도서관 / 대구 북구 / 절첩장이 불경은 고려 공민왕 5년(1356)에 이방한(李邦翰)이 죽은 어머니 이씨를 위하여 만든 개인발원(個人發願)의 사경(寫經)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의 원래 명칭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며, 스님들이 수련 과정 중에 필수적으로 배울 만큼 중요한 경전(經典)이다. 부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득하여 힘을 갖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책의 맨 끝부분에는 이방한(李邦翰)이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는 발원 기록이 있다. 또 어려운 한자의 음을 적어 놓은 부분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능엄경(楞嚴經)』 10권 전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말(卷末)에 전권(全卷)의 음석(音釋)이 붙어 있어 본래는 십권(十卷)의 완본(完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경(寫經)의 글씨는 그다지 미려하지는 않으나 발원기록(發願記錄)이 분명하여 제작연대와 배경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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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본 십주비바사론 권17(初雕本 十住毗婆沙論 卷十七) / 고려 현종년간(1010~1031) / 1권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권자장이 책은 11세기(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목판으로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다. 십주비파사론(十住毗婆沙論)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십주비파사론 17권 가운데 마지막 권이다. 이 책은 십주비파사론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제(第) 1지(地)와 제(第) 2지(地)에 대한 논술인데, 이 책은 보살이 수행하는데 있어 계율을 지키는 방법과 보살의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판본(版本)은 판수제(版首題)가 '십주비파사론권제십칠(十住毗婆沙論卷第十七) 제육장(第六丈) 자(資) '라고 경명(經名)과 장차(張次), 함차(函次)가 표시되어 있는데 해인사본에는 '장(丈) '이 '장(張)'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 초조본은 권말(卷末)의 간기(刊記)가 생략되어 있는데 비해 해인사본에는 '을사세고려국대도감봉칙조조(乙巳歲高麗國大都監奉勅調造) '라 되어 있다. 본문에는 송태조(宋太祖)의 조부휘(祖父諱)인 '경(敬) '자(字)에 결획(缺劃)이 보이고 있다. 이 판본(版本)은 판식(版式), 본문내용(本文內容), 지질(紙質)이나 인쇄상태(印刷狀態) 등으로 보아 11세기에 간행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본(版本)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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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사요(山居四要) / 조선 성종년간(1470~1494) / 4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이 책은 양우(楊瑀)의『산거사요(山居四要)』를 원나라 왕여무(王汝懋)가 증보ㆍ편집한 4권 1책으로, 이 책에서는 산촌(山村)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알아야 할 네 가지 요결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4요결을 총 74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 아래에 해당사례 및 대증(對症), 처방 등을 서술하고 있다. 간행된 때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머리말이나 맺음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보존 상태로 보아 조선 성종대로 보인다. 가. 목판본 4권 1책(木版本 4券 1冊) 나. 저지(楮紙), 선장(線裝) 다. 16.0cm×26.7cm 라.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14.2cm×21.6cm. 유계(有界), 10항(行) 20자(字) 서문의 일부 및 후미 2장이 없어져 필사하여 끼워 넣었다. 편차를 보면 머리에 공민왕 9년(1360) 유인태(劉仁台)(元)의 서(序), 이어서 목록(目錄), 권1에 왕여무(王汝懋)의 자지(自識)가 있다. 권1에는「섭생지요(攝生之要)」란 제목아래 기거격언(起居格言)ㆍ기거잡기(起居雜記) 등 6항목, 권2에 「양생지요하(養生之要下)」라 하여 복약기식(服藥忌食)ㆍ음식잡기(飮食雜忌) 등 9항목, 권3에는「위생지요(衛生之要)」라하여 제풍(諸風)ㆍ상한중서(傷寒中暑) 등 18항목, 권4에는「치생지요(治生之要)」라하여 월별로 양법(禳法)ㆍ하자(下子) 등 각 6항목으로 서술하고 다음에 종화과소채법(種花果蔬寀法)을 모단(牡丹)ㆍ연우(蓮藕) 등 29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부록으로 문방필용(文房必用), 행주비급(行廚備急), 성심법언(省心法言)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산거사요(山居四要)』는 간년(刊年), 간행 경위 등이 밝혀지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여러 목록에 보이지 않는 조선초기 간행본으로 추정되는 의약서로서 조선전기 의서(醫書) 간행(刊行)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94년 7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 번역 해제 ] * 보물 제1207호 『산거사요』 1. 개괄 『산거사요』는 중국 원나라 때 왕여무(汪汝懋, 1308~1369)가 편찬한 4권 1책의 의약서(醫藥書)이다. 왕여무는 양우(陽瑀, 1285~1361)의 글을 증보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양우의 자는 원성(元誠)으로 전당(錢塘, 지금의 항주)사람이다. 원나라 문종이 그의 성품이 청렴하고 진중함을 높이 사서 주의대부(奏議大夫), 태사원판관(太史院判官)에 임명하였다. 1355년(지정15)에 강동(江東)과 절서(浙西)에 도적이 창궐하자 건덕로(建德路)총관으로 직을 옮겼다.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중봉대부(中奉大夫), 절동도선위사(浙東道宣慰使),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1360년(지정20)에 직을 마쳤다. 양우는 질병을 예방하는 양생법을 수집하여 「섭생요람(攝生要覽)」으로, 단방(單方)ㆍ경험방 등을 모아서 「위생요람(衛生要覽)」으로, 음식과 식료에 관한 내용을 모아 「양생요람(養生要覽)」으로, 여러 과수와 채소 등의 지식을 모아 「치생요람(治生要覽)」으로 정리하였다. 양우가 건덕로의 총관으로 있을 때 왕여무는 그 속현의 현관(縣官)이었는데 손으로 쓴 양우의 위 글을 얻었다. 왕여무가 이 글에 내용을 증보하고 4권으로 분류하여 『산거사요』라고 이름지었다. 이 사정은 권두에 들어 있는 유인본(柳仁本)의 서문과 왕여무의 자지(自識)에서 분명히 보인다. 『산거사요』에서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서 요긴한 의약, 농학 등의 지식을 4권 각각에 담고, 부록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誠心法言]을 더하였다. 2. 중요기록물(보물1207호) 지정 경과 우리나라에서 『산거사요』가 간행된 년도나 경위 등은 밝혀진 것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서문이나 발(跋)ㆍ간기(刊記) 등이 없어 분명치는 않으나 보존 상태로 보아 성종대(재위기간 1470~1494)에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초기 의서 간행의 사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1994년 7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저본의 판각 형식은 목판본 4권 1책으로 저지(楮紙)에 선장(線裝)으로 되어 있다.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14.2cm x 21.6cm, 유계(有界), 10행 20자이다. 3. 편저자 『산거사요』는 중국 원나라 때의 왕여무(汪汝懋, 1308~1369)가 편찬하였다. 그의 자는 이경(以敬), 호는 둔재(遯齋), 자호는 동강야객(桐江野客)이다.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사람으로 단양(丹陽)ㆍ정해(定海) 등에서 관리 생활을 했고, 틈틈이 여러 학자들과 강학했다. 후에 관리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 가 강학과 강독으로 여생을 보냈다. 1360년(지정 경자년)에 『산거사요』 전4권을 완성했다. 『산거사요』 이외에 그가 지은 책으로는 『춘추대의(春秋大義)』ㆍ『예학유범(禮學幼范)』ㆍ『둔재고(遯齋稿)』등이 있다. 4. 주요내용 및 내용요약 (1) 주요내용 『산거사요』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은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기거격언[일상생활의 가르침]、 기거잡기[일상생활의 금기]、 기거지의[건전한 일상생활]、 영택피기[집 지을 때 피할 것]、인사방한[인간사의 금기]、 리관경성[벼슬 생활의 경계]、복약기식[약 먹을 때 피할 음식]、 음식잡기[음식 중에 가려야 할 것들]、 음식반기[서로 상반되거나 가려야 할 음식]、잉부식기[임부가 피해야 할 음식]、 유모식기[젖먹일 때 피할 음식]、 해음식독[음식독을 푸는 법]、 음식지의[알맞은 음식] 등을 포함한다. 나아가 각 달에 행해야 하는 농사일과 상용할 수 있는 방제(方劑)의 주치ㆍ용법ㆍ가감법 등이 들어 있다. 책의 처음에 나오는 유인본(劉仁本)의 서에는 “동강 왕군이 삼가 『산거사요』 한편을 저술하니 모두 4권이다. 이는 이전에 태사령 양원성이 지은 것을 증보하여 책을 완성한 것이다. 원성은 이전에 일찍이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공경하는 마음으로 고을 관리직에 임하여 그 정치를 하는 데에서 인(仁)을 실천하는 것에 힘썼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방법과 위로는 어른을 섬기고 아래로는 어린이를 잘 교육하는 가르침을 아침저녁으로 서로 가르치고 의론하기를 충분히 다하였다. 이제 비로소 (그 책을) 판각하여 전한다. 섭생이라 한 것은 그 인사의 의식과 법칙을 취한 것으로 생활할 때에 고단하고 방탕한 일을 막고 철에 따라 몸을 잘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양생이란 그 음식을 마땅하게 조절하고, 정신(精愼)을 덜거나 더하는 법으로써 좋아해서 하고 싶어 하는 바[욕구]를 조절하는 것이다. 약과 침, 기름진 진액[膏液]으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지목하여서는 위생(衛生)이라고 했다. 논농사와 밭농사에 두루 노련한 농부가 사시의 기후에 따라 잘 심고 거두어 저장하는 등 복날과 납일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치생(治生)이라 했다. 조목을 나누고 류를 갈라서 중요한 것을 열거하고 널리 다루어서 분명하게 다 싣고 그 즐거움을 대중과 함께 함께하고자 했다. 마지막 편은 성심편을 부록으로 붙였다. 조도[도에 나아감]ㆍ려사[일을 신중히 대함]ㆍ응물[사물과 일에 대응함]ㆍ신수[삼가 수양함]에 관한 고금의 격언을 대단히 많이 실었는데 모두 실천할만한 것이니 그 마음 씀이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여 『산거사요』가 출간된 경위와 그 주요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높은 수준의 이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고 실용적인 치료와 양생법으로 채워져 있다. 나아가 적지 않은 처세의 방법 및 농학과 생활 상식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왕여무는 자지(自識)에서 『산거사요』를 지은 경위와 그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전에 태사령을 지낸, 자는 원신이고 자호는 산거도인인 전당 양우가 일찍이 4 개의 그림을 자리 곁에 배열해 두었는데, 그 대의는 인생 혈육의 신체를 잘 보호할 방법을 알지 못하면 쉽게 깎아 내거나 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여러 책에 실려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능히 알 수가 없고 천박한 이는 미처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해하기 쉬운 말을 취하여 「섭생요람」을 편집하였다. 생각건대 이는 강절 선생이 「병이 난 뒤에 약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병이 나기 이전에 스스로 예방하는 편이 낫다」고 말씀한 뜻이니, 예방을 게을리 하면 질병이 반드시 생긴다. 갑자기 위급하고 곤란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 궁벽한 시골에 사는 이들 중에는 길이 멀어 의원에게 갈 수가 없거나 가난하여 시중 약재의 도움도 받지 못하여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이에 세상의 단방(單方)으로 치료한 사례를 널리 모아서 「위생요람」이라 이름 붙였다. 입과 배의 욕구 중에 음식 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잘못 조리되거나 때가 아닌 음식은 성인이 드시지 않는다 했다. 더구나 식품이나 약이 되는 음식 중에는 서로 피해야 하는 종류가 있고 성질이 상반되는 것들도 있는데, 음식이나 본초에 대한 서적을 어떻게 집집마다 다 알려줄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잘못 먹고 사람을 해치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잘 설명해 주어야하기에 또 「양생요람」을 지었으니 이는 모두 인[仁]한 사람의 마음 씀이다. 농작물을 기르는 일과 같은 것은 비록 일반 사람들의 작은 일이지만 집안을 경영할 때에 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때에는 이르거나 늦는 일이 있고 사람의 일에도 완급이 있으니 진실로 그 때를 잘못 선택하면 그 이로움을 얻지 못하여 일용의 양식이 부족하게 된다. (진실로 그 때를 잘못 선택하면 그 이로움을 얻지 못하여 일용의 양식이 부족하게 된다.) 또 나무[菜木]와 채소를 심고 가꿀 때의 적절한 기후를 택하여 매월에 맞게 기록하고, 양법(禳法: 액을 쫓는 법)으로 시작하여 농사로 끝을 맺어, 「치생요람」이라 이름 지었으니, 이것이 또한 이용후생에 일조(一助)가 될 것이다. 공(公)이 덕을 세우는 나날을 지키고 있을 때, 나는 그 현에 속한 관리로 있으면서 그것을 손으로 베껴왔다. 근래에 사명(四明)에 살 때 병에 걸려 한가로이 있었는데, 다시 네 그림으로 나누어 살펴보니, 모두 일상에 적실히 드러날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특히 섭생지요[섭생의 요점] 편에서는, 기거격언[일상생활의 가르침]에서 근본을 미루어 책의 첫머리로 삼고, 거택피이[집에 기거할 때 피할 것], 인사방한[인간사의 금기] 및 리관경계[벼슬 생활의 경계]를 덧붙였다. 또 양생지요와 위생지요 두 편은 절목을 분류하고 각각 그 갖추어져야 할 것을 덧붙였다. 벽곡구황[벽곡으로 흉년구제]과 같은 좋은 방법도 양생지요의 뒤에 붙이고, 육축병[소, 말, 돼지, 양, 닭, 개 등 여섯 가축의 병]도 위생지요의 뒤에 붙였다. 그 치생지요[치생의 요점] 편에서는 ‘문방필용[글방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과 ‘행주수지[음식을 만드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것]’까지 모두 취하여 붙였다. 또 ‘성심법언[마음을 돌아보는 법언]’에서 취한 것은 세속의 사람들을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들이니, 이를 마지막에 실어서 부록으로 삼았다. 이를 모두 네 권으로 분류하여 제목을 『산거사요』라고 했으니, 집안을 경영하고 관직에 있는 자들이 볼만한 것을 갖춤으로써, 일상생활과 음식의 절도를 지키고, 질병에 따라 약과 음식을 적절하게 하며, 농사일과 밭일과 부엌일을 다스리는 법에 모두 바탕으로 삼을 것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저 성찰의 공이 정밀해지고 함양의 공이 이루어진다면, 학문에 있어서도 또한 보탬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내용 요약 권1 「섭생지요」에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여기서는 『황제내경 ㆍ소문』 -「이법방의론 異法方宜論」「사기조신대론 四氣調神大論」 「오장별론 五臟別論」에서 인용된 부분이 많다. 여기에는 도가의 색채가 짙은 당시 민간지식이나 민간신앙과 연관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또 도둑을 방비하는 방법이나 관직에 임하는 태도 등을 설명하는 내용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권2 「양생지요」에서는 주로 음식ㆍ음식과 약물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였다. 현재 검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음식 섭취를 위한 연구, 또는 음식과 약물 관계를 연구한 태도 등은 충분히 참고할 가치를 지닌다. 여기 기재된 내용들은 오랫동안 경험적으로 전승된 내용들이고 의료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기댈 수 있는 자료가 되었던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권3 「위생지요」에서는 여러 다양한 질병의 치료방법이 들어 있다. 특별히 단방(單房)위주의 간단한 치료법을 제시함으로써 의료 사각지대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권4 「치생지요」에는 농사의 월령(月令)이 주요 내용이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의 사람들은 12개월 각 시기마다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이것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가정 경영의 주요한 사무를 점검하고 시행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마지막에 부록으로 성심법언을 첨부함으로써 “이를 모두 네 권으로 분류하여 제목을 『산거사요』라고 했으니, 집안을 경영하고 관직에 있는 자들이 볼만한 것을 갖춤으로써, 일상생활과 음식의 절도를 지키고, 질병에 따라 약과 음식을 적절하게 하며, 농사일과 밭일과 부엌일을 다스리는 법에 모두 바탕으로 삼을 것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저 성찰의 공이 정밀해지고 함양의 공이 이루어진다면, 학문에 있어서도 또한 보탬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책은 간단하고 쉽게 서술한 의약서이나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그것이 모든 생활의 근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데에서 이 책의 인문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5. 판본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은 이 국역 사업에서 저본으로 삼은 중요기록물(보물1207호로) 지정된 목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판본에 비해 글자체가 수려하고 판각의 형식도 완정된 형식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 『산거사요』의 판본은 두 가지 종류가 대표적이고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적설청록(薛淸錄)의 『중국중의고적통목(中國中醫古籍總目)』의 기록에 그 내용이 전한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산거사요』 판본은 1592년(명 만력23, 임진(壬辰)년)의 문회당각본(文會堂刻本) 곧 수양총서본(修養叢書本)과, 1603년(만력31) 계묘문회당각본 곧 격치총서본(格致叢書本)이 있다. 이 두 판본의 판식과 자체는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판본을 서로 다른 총서에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양총서본은 청대의 초본(抄本)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 문회당각본에 근거한 초록으로 31종의 저작을 수록하였다. 청초본은 1990년에 중의고적출판사의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수양총서본 속의 『산거사요』가 만력 20년 판각으로 내용이 완정되고 문자가 명확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번 국역에서 중국 판본으로 삼은 중의고적진본집성(中醫考籍珍本集成)본 『산거사요』는 수양총서본을 저본으로 삼고 청초본을 교본으로 삼았다. ( 작성 : 안은수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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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경좌씨전구해 권60~70(春秋經左氏傳句解 卷六十∼七十) / 조선 세종 13년(1431) / 11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이 책은 춘추(春秋)의 경문(經文)과 좌씨전(左氏傳)을 구해(句解)한 것이다. 인용하고 있는 주는 두예(杜預)의 주가 중심으로, 전체 70권중 정공(定公)에서 애공(哀公)까지 11권이 남은 잔본(殘本)이다. 이 책의 권말에는 간행경위를 기록한 발문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이 책은 조선 세종 13년(1431)에 경상도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조치(曺致)와 도사(都事) 안질(安質)의 주선으로 참의(參議) 박분(朴賁)의 가장(家藏) 선본(善本)인 좌씨전(左氏傳)을 구해서 청도지군사(淸道知郡事) 주소(朱邵)의 책임하에 청도(淸道)에서 출간(出刊)한 것이다. 발문(跋文)에서 , '우리 동방(東方)이 문교(文敎)가 크게 행해져서 경서(經書) ㆍ사서(史書)가 다 갖추어졌으나,『좌씨전(左氏傳)』만은 간행되지 못하여 춘추(春秋)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상고할 길이 없었다. 신해년(辛亥年)(1431)에 감사(監司) 조치(曺致), 도사(都事) 안질(安質)이 선본(善本)을 두루 구하여 나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는데 그해 중추(仲秋)에서 시작하여 중동(仲冬)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판각(板刻)은 세종 13년(1431) 6월(月)에 마치고 인쇄(印刷)는 그 해 11월에 개판(開板)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문(跋文) 뒤에 '선덕육년(宣德六年) 십일월(十一月) 청도개판(淸道開板)'이란 간기(刊記)가 있고 그 다음에 간행제원(刊行諸員)의 관명(官名) ㆍ성명(姓名)이 10행(行)에 걸쳐 기록되었는데 교정(校正) ㆍ도색(都色) ㆍ색기관(色記官) ㆍ각수(刻手) 등의 이름이 열기(列記)되었는데, 이 책은 전래과정에서 선덕(宣德)의 덕(德) 자를 광(光)자로 변조하고 있다. 비록 낙질(落帙)이기는 하나 조선초기 간본으로 발문(跋文) ㆍ간기(刊記) ㆍ간행제원(刊行諸員)의 성명(姓名)이 열기(列記)되어 있어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는 물론, 경서(經書) 특히 좌씨전연구(左氏傳硏究)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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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두율(虞註杜律) / 조선 성종 1년(1470) / 1책 / 목판본/관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이 책은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칠언율시 151수를 중국 원나라의 학자 우집(虞集)이 주를 붙이고 해설을 한 것을, 성종 1년(1470)에 당시 청주목사 권지(權至)가 청주목(淸州牧)에서 판각(板刻)하고 이듬해에 김뉴(金紐)의 발문을 받아 간행한 것이다. 앞에는 양사기(楊士奇)ㆍ양영(楊榮)ㆍ임정(林靖, 1443)ㆍ황회(黃淮)ㆍ호형(胡?, 1434)의 서문과 목록이 있고, 권말에는 김뉴(金紐, 성종 2년, 1471)의 발문과 본서의 간행에 참여한 제원(諸員)의 함명(啣名)이 열서되어 있다. 이 책은 시의 내용에 따라 기행(紀行)ㆍ술회(述懷)ㆍ회고(懷古)ㆍ장상(將相)ㆍ궁전(宮殿)ㆍ성우(省宇)ㆍ거실(居室)ㆍ제인옥벽(題人屋壁)ㆍ종족(宗族)ㆍ은일(隱逸)ㆍ석로(釋老) ㆍ사관(寺觀)ㆍ사시(四時)ㆍ절서(節序)ㆍ주야(晝夜)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누각(樓閣)ㆍ조망(眺望)ㆍ대사(臺?)ㆍ과실(果實)ㆍ주즙(舟楫)ㆍ교량 (橋梁)ㆍ연음(燕飮)ㆍ음악ㆍ금조(禽鳥)ㆍ충류(蟲類)ㆍ간기(簡寄)ㆍ심방(尋訪)ㆍ수기(酬寄)ㆍ송별ㆍ잡부(雜賦)의 32목으로 나누어 수록하여 내용의 파악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서명은 서문에는 『우주두율(虞註杜律)』로 되어 있으나 권수제(卷首題)는 『두공부칠언율시(杜工部七言律詩)』이다. 이 책의 간행경위가 발문과 권말에 부수된 간행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영의정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이 충청도사(忠淸都事) 윤사하(尹師夏)에게『두율우주(杜律虞註)』를 주면서 출간하기를 부탁했는데, 윤사하는 감사 안철손(安哲孫)에게 보고하고 청주목사 권지(權至)에게 출간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출간을 마치기 전에 감사가 김양경(金良璥)으로 교체되었는데 신임 감사가 뒤를 이어 본서의 간행을 진행하였는데 윤사하 또한 곧 체임되었다. 그후 윤사하는 청주목사 권지로부터 발문(跋文)의 청탁을 받고는 김뉴(金紐)에게 다시 발문을 부탁하여 발문을 받았다. 성종 2년 신묘년(1471) 맹추(孟秋) 7월이다. 글씨는 괴산군수(槐山郡守) 박병덕(朴秉德)이 썼고 교정은 이경방(李經邦)이 담당하였다. 김뉴가 발문을 쓴 것은 성화 7년(1471)이고, 발문뒤의 간행기록에는 '성화육년경인춘정월일충청도청주목간행(成化六年庚寅春正月日忠淸道淸州牧刊行)'이라 적고 있어서 간행년월이 발문작성 보다 1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아마도 본문의 판각(板刻)을 마치고 그 이듬해에 발문을 추각(追刻)하여 출간, 배포(配布)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서(序)ㆍ발(跋) 및 간기(刊記) 등이 완전(完全)하며, 제목록(諸目錄)에 보이지 않는 희귀본(稀貴本)으로서 두시의 연구와 서지학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