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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475751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 조선 세조 10년(1464) / 1권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자재암 / 경기 동두천시 / 선장
    당나라 법장(法藏)이 찬술한 『반야심경약소(船若心經略疏)』에 송나라 중희(仲希)가 찬술한 『현정기(顯正記)』를 저본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한계희(韓繼禧) 등이 세조의 명으로 국역(國譯)하여 1464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국역불경이다. 목판본(간경도감판)으로 1책으로 지정되었으며 자재암에 소장되어있다. ‘반야심경’이란 의미는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심(心)’은 일반적으로 심장(心臟)으로 번역되는데,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 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반야경전의 중심 사상을 260자로 함축시켜 서술한 경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한국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다. 이 경의 중심 사상은 공(空)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하여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주체·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현장(玄奘)의 역본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데, 그의 번역에 의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산스크리트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일 수 있다”가 된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이 심경에 대한 한국인의 주석서로는 신라시대 원측의 『반야심경소 般若心經疏』 1권과 『반야바라밀다심경찬 般若波羅蜜多心經贊』 1권, 원효(元曉)의 『반야심경소』 1권, 태현(太賢)의 『반야심경고적기 般若心經古迹記』 1권과 『반야심경주 般若心經註』 2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현존본은 원측의 『반야심경소』 1권 뿐이며, 원효의 소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수십 종의 번역본 및 해설서가 간행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되어 현재 동두천시 소재의 자재암(自在庵)외에 서울대 규장각과 청주고인쇄박물관 등 3곳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자재암본이 전체적으로 가장 보존이 양호하다. 다만, 표지는 지질과 실선으로 보아 근래에 새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자재암본의 판식(板式)의 특징을 보면 변란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되어 있으며, 반곽의 크기는 21.5cm×14.0cm이며, 반엽은 8행으로 한 행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다. 행 사이에는 계선이 있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에 대흑구가 보이며, 또한 그 사이로 상하 흑어미(黑魚尾)가 서로 내향하고 있다. 상어미 아래에는 ‘심경(心經)’이란 판심제가 보이며, 그 아래에는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책의 전체 크기는 31.0cm×19.1cm이며, 인쇄면의 글자의 완결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초간본의 초인본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보존이 양호한 상태이다. 자체는 한글은 월인석보와 같은 작은 글씨로 쓰여 있으며, 대자로 쓰여진 한문은 원필(圓筆)의 안진경체의 필의가 보인다. 판서자(板書者)는 1467년에 개판된 『수심결』에 안혜(安惠)·유환(柳睆)·박경(朴耕)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자체가 유사하여 이들에 의해 정서(淨書)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질은 얇게 뜬 저지로 조선초기 세종에서 성종연간에 자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경지(印經紙)이다. 권수에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어 이때 금강경언해와 동시에 간행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조 10년(1464)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국역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된 불경이다. 다른 판본과 비하여 권수에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수록되어 있으며, 목판의 새김이 정교하며 인쇄상태가 좋은 판본이다. 이는 세조가 불경간행을 위하여 설치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국역본 가운데 하나로, 간경도감판의 특징 및 초기의 훈민정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2

    이운룡 선무공신교서 및 관련고문서(李雲龍 宣武功臣敎書 및 關聯古文書) / 조선 선조 29년(1596)~선조 37년(1604) / 일괄(1축,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재령이씨지암종중 / 경북 청도군 / 권자장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운 동계 이운룡(李蕓龍, 1562∼1610)에게 선조 37년(1604)에 내린 공신교서와 교지 등 2점이다. 이운룡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옥포만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이 도망치려는 것을 막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 50여 척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이끌었다. 교서는 이운룡이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무공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이운룡을 선무공신 3등으로 정하고 포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1품계 올려주고 부모처자도 1품계 올리되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까지 1품계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장자에게 세습시켜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영원히 도울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교지는 선조 29년(1596) 이운룡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사령장이다. 이 교서 및 교지는 조선시대 공신 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인물연구의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94년 10월 17일 보물 제1212호로 지정되었으며, 교서 1축과 교지 1매 등 2점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伊西面)의 재령이씨지암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 번역 해제 】 (1축) 조선 선조대의 무신(武臣)인 이운룡(李雲龍)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한 교서로 발급일은 만력 32년(1604, 선조37) 10월이다. 이운룡(1562∼1610)은 본관이 재령(載寧)으로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이며 경상북도 청도 출신이다. 1585년(선조18)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1589년 1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휘하에 있었다. 이 교서는 정부 공식문서에 많이 쓰였던 변려문(騈儷文)으로, 대구와 전고(典故)를 사용하고 미려한 수사로 세련된 문장미를 보여 주고 있다. 내용은 선조가 이운룡의 전공(戰功)을 훌륭히 여기고 잊지 않기 위해 조목조목 기록하고 찬양한 내용이다. 선조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전란에 속수무책 패하거나 도망가는 장수들에게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운룡의 옥포해전(玉浦海戰)의 승전은 큰 위안이 되었다. 이운룡은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원균의 막하에 있으면서 당시 왜군의 기세에 눌려 전쟁을 포기 하려던 원균을 강력히 설득하여, 전라 좌수영의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에서 선봉장으로서 아군의 전군을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용맹하고 격렬하게 적진을 유린하여 적병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고, 그 결과 적선 50여척을 분소시킨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으로 대전과였다. 이에 선조는 이운룡의 공로를 중국의 비수대첩(?水大捷)이나 적벽대전(赤壁大戰)에 비길 수 없는 뛰어난 전공으로 치하하였다. 특히 그가 선봉에서 많은 적을 사살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등 선조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선조는 그의 혁혁한 공로에 대해 특별히 선무공신 3등을 하사하고 그의 모습을 영정으로 그려 영원히 후세에 전할 것 명령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품계와 관작을 한 직급씩 올리고 부모와 처자도 한 직급씩 올리되, 만약 아들이 없을 경우 조카와 사위의 품계를 올리고 적장자(嫡長子)에게 세습시켜 일정한 녹봉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또 선조는 반당(伴?) 4명ㆍ사노비 7명ㆍ관노비 2명ㆍ밭 60결ㆍ은자 5냥ㆍ겉옷과 속옷감 한 필과 자신이 사용하던 말인 내구마(內?馬) 1필 등을 특별히 하사하며 이운룡의 전공을 특별히 치하하고 있다. ( 작성자 : 정경훈 ) (2장) 조선 선조대의 무신(武臣)인 이운룡(李雲龍)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折衝將軍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임명하는 교지로, 발급일은 만력(萬曆) 24년(1596, 선조29) 1월 25일이다. 이운룡(1562∼1610)의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이며 경상북도 청도 출신이다. 1585년(선조18)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1589년 1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운룡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휘하인 옥포만호로 있으면서 싸우지 않고 도망가려던 원균을 강력히 만류하고, 전라좌수영에 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1592년 5월 7일,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선봉장으로서 아군을 진두지휘해 적선 50여 척을 분소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며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을 이뤘다. 이후 사천ㆍ진해ㆍ한산양ㆍ안골포ㆍ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하며 우리 수군이 남해를 장악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이순신(李舜臣)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였던바, 바로 이 교서가 그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교지이다. 이후 이운룡은 전란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 수군을 총괄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ㆍ비변사당상관(備邊司堂上官)ㆍ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군직에 복무,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후 은퇴했지만 1607년 오랑캐들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자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기도하였으며 후일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기록한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 2권이 있다. ( 작성자 : 정경훈)
    출처 : 문화재청
  • 475753

    신편산학계몽 권중(新編算學啓蒙 卷中) / 조선 성종년간(1470~1494)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신편 산학계몽(新編 算學啓蒙)』은 원(元)의 주세걸(朱世傑, 13∼14세기)이 처음 편찬한 산학서(算學書)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성종조(成宗朝)에 이를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여 3권 3책으로 간행(刊行)한 바 있다. 편찬자 주세걸은 천원술(天元術)을 사원술(四元術)로 확장함으로써 서민들에게까지 수학을 보급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중국 원 나라의 수학자이다. 그는 구장(九章)을 독학(篤學)하여 널리 산술(算術)에 박통하였으며, 후에 산학을 20문(門)의 259문(問)으로 도설(圖說)하여 『산학계몽(算學啓蒙)』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본서는 도합 3권 3책 중의 중권(中卷) 1책으로 표지서명은 ‘산학계몽(算學啓蒙)’으로 묵서(墨書)되어 있고 권두서명(卷頭書名)은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저자(著者)는 ‘송정(松庭) 주세걸(朱世傑) 편찬(編撰)’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서의 내용은 전답(田畓)의 각종 형태와 면적을 환산(換算)하는 방법, 곡물과 작물 등의 단위 및 각종 단위 간의 환산법 등 당시에 사용되던 각종 도량형(度量衡)의 단위에 대한 문답식(問答式)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는 본래 중국의 산학서이나 오직 우리나라에만 계승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산학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본서는 『양휘산법(楊輝算法)』과 『상명산법(詳明算法)』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산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필독서(必讀書)였음을 알 수 있다. 본서는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조선 초기의 판본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서지학연구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4

    둔촌잡영(遁村雜詠) / 조선 세조 7년(1461) / 1책 / 목판본/관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둔촌잡영(遁村雜詠)』은 고려 말기의 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의 문집으로 상ㆍ하 2권 1책이며, 조선 태종 10년(1410) 7월 간행된 것이다. 이집의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號)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다. 공민왕 17년(1368)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였으며,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개경(開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에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에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 문사들을 경탄케 했다.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어 여말삼은(麗末三隱)과 문장으로 친밀히 교우하였으며, 광주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본서의 서제(序題)는 ‘둔촌선생잡영(遁村先生雜詠)’으로 기록되어 있고 권두서명(卷頭書名)은 ‘둔촌잡영(遁村雜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책머리에는 ‘영락팔년칠월일(永樂八年七月日) 진양(晋陽)호정(浩亭) 하륜(河崙, 1347~1416) 서(序)’라 기록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는 본서의 간행경위(刊行經緯)를 비롯하여 하륜과 여말삼은(麗末三隱)과의 교유관계, 둔촌의 인품(人品)과 학문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의 명신(名臣)들이 연령(年齡)을 초월하여 학문적으로 친밀하게 사귀고 있었음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서문의 내용으로 보아 본서는 영락 8년(태종 10, 1410) 7월 직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는 조선 초기의 간행본(刊行本)으로 서지학 및 문헌학의 귀중한 연구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5

    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 권상1의2,하1의1~2의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卷上一之二,下一之一~二之二) / 조선 세조 11년(1465) /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강태영 / 서울 중구 / 선장
    원각경은 693년에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에 의해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는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는 불경으로 조선시대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하여 한글로 주결만 달아서 주자소에서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불경. 금속활자본(을유자) 5권 2책. 강태영 소장. 보물 제1219호. 원각경은 고려의 지눌(知訥)이 깊이 신봉하여 요의경(了義經)이라 한 뒤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통되었고, 조선 초기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을 짓고 유일(有一)과 의첨 (義瞻)이 각각 <사기(私記)>를 지은 뒤 정식으로 우리나라 승려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이 경이 널리 독송, 연구되고 많은 주석서가 만들어져서 불교수행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이 경이 훌륭한 이론과 실천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체가 유려하고 사상이 심원하며,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경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존본으로는 우왕 6년(1380)에 이색이 지은 발문이 있는 고려본을 비롯하여, 세조 연간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활자본과 세조 11년(1465)에 함허 득통(得通)이 주석을 달고 이를 언해하여 개판한 간경도감판, 1465년에 구결만 달아서 을유자(乙酉字)로 찍어낸 활자본 등이 전래되고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사찰본으로 선조 3년(1570)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판본을 비롯하여 12종이 조사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판종 가운데 강태영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한글 구결 부분만을 경문에 달아서 주자소에서 을유자로 인출한 금속활자본으로 5권 2책의 결본이다. 책의 크기는 24.0cm×16.7cm이다. 표지는 본래 5침으로 제본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표제는 목판으로 인쇄한 제첨에 ‘원각경(圓覺經)’으로 기재되어 있다. 권두의 서명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의 권수표시는 한문본과는 달리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다음 행에는 ‘종남산초당사사문종밀소초(終南山草堂寺沙門宗密疏鈔)’라고 되어 있어, 이 책은 종밀의 주소본을 바탕으로 국역된 판본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문의 체제가 아래에 종밀의 주소가 소자 쌍행으로 부기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본문은 반엽을 기준으로 변란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0.0cm×14.2cm이며, 전체 6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3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흑어미(黑魚尾)가 보이고 있으며, 어미 사이에 있는 판심제는 위에 ‘원각(圓覺)’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경문은 한글로 된 구결이 있어 독경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지질은 미색으로 염색되어 있는 전형적인 인경지로 보이며, 간혹 고정지가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을유자본 원각경이 간행되던 직전에 이미 간경도감에서도 한문본과 언해본이 개판된 바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간경도감본을 참작했을 것으로 보이나, 다만 한글활자의 문제로 본문의 언해부분만은 생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동일본이 월정사 성보박물관과 김민영 등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히 불교를 신봉한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간행토록 명하였다. 특히 이 책은 정난종의 서체를 자본으로 을유년에 시급히 활자를 주조하여 간행된 책으로 <을유자본(乙酉字本)>이라 부르고 있다. 이처럼 이 활자는 <원각경> 등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성(鑄成)되었던 까닭에 당시 유신들의 강한 반대로 오래 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갑진자 주조시에 이를 녹여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전본이 그다지 많지 않아 오히려 귀중본으로 평가되고 있어, 조선시대 국어학 및 금속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6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권상2의2, 권하3의1~3의2(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 卷上二之二, 卷下三之一~三之二) / 조선 세조 11년(1465) / 3권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
    (1책) 원각경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에 의해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는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우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는 불경으로 조선시대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주자소에서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불경. 금속활자본(을유자) 3권 2책. 김민영 소장. 보물 제1219-2호. 원각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이나, 이것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어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불경은 크고(大) 방정하고(方) 광대한(廣) 원각(圓覺)을 설명하는 것이 모든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흔히 이를 줄여서 ‘원각경’으로 약칭하고 있다. 이 경은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12장은 석가모니가 12보살과 문답한 것을 각각 1장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존본으로는 1380년에 이색이 지은 발문이 있는 고려본을 비롯하여, 세조연간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활자본과 1465년에 함허 득통(得通)이 주석을 달고 이를 언해하여 10권본으로 개판한 간경도감본, 그리고 이를 저본으로 1465년에 을유자(乙酉字)로 찍어낸 활자본 등이 전래되고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사찰본으로 1570년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판본을 비롯하여 12종이 유포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판종 가운데 해제 대상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경문의 한글 구결 부분만을 편집하여 주자소에서 을유자로 인출한 금속활자본으로 3권 2책의 결본이다. 표지는 근래 새로 개장하였는데, 권상은 ‘圓覺經(諺吐)’으로 묵서되어 있으나 권하의 경제는 아직 쓰지 않은 상태이며, 책의 크기는 27.7㎝×18.0㎝이다. 권수의 서명은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의 권수표시는 한문본과는 달리 ‘上二之二’로 복잡하게 편성되어 있다. 다음 행에는 ‘終南山草堂寺沙門宗密疏鈔’라고 되어 있어, 이 책은 종밀의 주소본을 바탕으로 국역된 판본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문의 체제가 아래에 종밀의 주소가 소자 쌍행으로 부기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간행되기 직전에 이미 간경도감에서도 한문본과 언해본이 개판된 바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간경도감본을 참작했을 것으로 보이나, 다만 한글 활자의 문제로 본문의 언해부분만은 생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동일본을 월정사 성보박물관(보물793호)과 아단문고(보물1219호), 한국학중앙연구원(보물1514호) 등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히 불교를 신봉한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간행토록 명하였다. 특히 을유자는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성(鑄成)되었던 까닭에 당시 유신들의 강한 반대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갑진자 주조 시에 이를 녹여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전본이 그다지 많지 않아 오히려 귀중본으로 평가되고 있어, 조선시대 국어학 및 금속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2책) 원각경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에 의해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는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우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는 불경으로 조선시대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주자소에서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불경. 금속활자본(을유자) 3권 2책. 김민영 소장. 보물 제1219-2호. 원각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이나, 이것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어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불경은 크고(大) 방정하고(方) 광대한(廣) 원각(圓覺)을 설명하는 것이 모든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흔히 이를 줄여서 ‘원각경’으로 약칭하고 있다. 이 경은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12장은 석가모니가 12보살과 문답한 것을 각각 1장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존본으로는 1380년에 이색이 지은 발문이 있는 고려본을 비롯하여, 세조연간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활자본과 1465년에 함허 득통(得通)이 주석을 달고 이를 언해하여 10권본으로 개판한 간경도감본, 그리고 이를 저본으로 1465년에 을유자(乙酉字)로 찍어낸 활자본 등이 전래되고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사찰본으로 1570년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판본을 비롯하여 12종이 유포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판종 가운데 해제 대상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으로 경문의 한글 구결 부분만을 편집하여 주자소에서 을유자로 인출한 금속활자본으로 3권 2책의 결본이다. 표지는 근래 새로 개장하였는데, 권상은 ‘圓覺經(諺吐)’으로 묵서되어 있으나 권하의 경제는 아직 쓰지 않은 상태이며, 책의 크기는 27.5㎝×18.2㎝이다. 권수의 서명은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의 권수표시는 한문본과는 달리 ‘下三之一’로 복잡하게 편성되어 있다. 다음 행에는 ‘終南山草堂寺沙門宗密疏鈔’라고 되어 있어, 이 책은 종밀의 주소본을 바탕으로 국역된 판본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문의 체제가 아래에 종밀의 주소가 소자쌍행으로 부기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간행되기 직전에 이미 간경도감에서도 한문본과 언해본이 개판된 바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간경도감본을 참작했을 것으로 보이나, 다만 한글 활자의 문제로 본문의 언해부분만은 생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동일본을 월정사 성보박물관(보물793호)과 아단문고(보물1219호), 한국학중앙연구원(보물1514호) 등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히 불교를 신봉한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간행토록 명하였다. 특히 을유자는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성(鑄成)되었던 까닭에 당시 유신들의 강한 반대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갑진자 주조 시에 이를 녹여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전본이 그다지 많지 않아 오히려 귀중본으로 평가되고 있어, 조선시대 국어학 및 금속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7

    백지묵서묘법연화경(白紙墨書妙法蓮華經) / 조선 태종 15년(1415) / 7권 7첩 / 필사본/사경 / 국립전주박물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 절첩장
    이 사경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죽은 류근(柳謹)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부인 이씨가 조선초기 태종15년(1415)에 발원하여 백지(白紙)에 묵서(墨書)한 사경이다. 접장본으로 7권 7첩이다. 내소사(국립전주박물관 위탁)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내소사에 전래되었던 이 사경은 7권 7첩의 완질본으로 현재 전주박물관에서 위탁 관리되고 있다.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36.0cm×13.8cm이며, 사경면의 상하 사란 사이의 높이는 25.5cm~26.0cm이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내소사 소장의 법화경 사경은 본래부터 모두 7첩으로 온전히 갖추어 있었던 것으로, 현존본 대부분이 결본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의미있는 전적문화재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조선 초기 사경 중에 표지의 장엄한 모습과 각 권의 권수에 금니로 그린 변상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지질이 우수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점에서 귀중한 전적문화재로 평가된다. 다만 내소사 소장의 법화경은 지정 명칭이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사경의 지정 명칭을 고려하여 <백지묵서묘법련화경사경(白紙墨書妙法蓮華經寫經)>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할 듯 하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8

    명안공주관련유물-1.전적류(明安公主關聯遺物) / 조선 성종 25년(1494)~조선 후기 / 일괄(2첩,12점,2책) / 간독류/간독 / 강릉시립박물관 / 강원 강릉시 / 첩장
    조선 현종의 셋째 따님인 명안공주(明安公主, 1664∼1687)와 명안공주가 거처하였던 명안궁과 관련된 전적류 8종 19점이다. 명안공주의 본명은 온희(溫姬)이다. 현종은 숙종과 명선(明善)ㆍ명혜(明惠)ㆍ명안 세 공주를 두었으나, 명안공주의 언니 되는 두 공주는 모두 일찍 요절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은 누이동생 명안공주는 총애하였으며, 궁중의 생활용품을 풍족하게 하사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현종과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그리고 숙종 등 왕실에서 오고간 한글편지를 모은 어필첩(御筆帖) 1점을 비롯하여, 왕의 필적을 찍어낸 판본(板本), 오태주 일가의 글씨를 모은 유묵첩, 영조의 80세 생신을 맞아 왕세손 및 신하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 모음집 등이다. 이 중에는 현종이 명안공주의 이름을 ‘온희(溫姬)’라고 작명한 단자(單子)가 있으며, 이것은 왕실의 것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또 어필첩에는 『옥교리(玉交梨)』ㆍ『박안경기(拍案驚奇)』ㆍ『태평광기(太平廣記)』ㆍ『위생전(魏生傳)』ㆍ『주생전(周生傳)』ㆍ『이왜전(李娃傳)』ㆍ『왕경룡전(王慶龍傳 )』ㆍ『환혼기(還魂記)』 등 8종의 중국과 우리나라의 소설 표제가 보이는데, 당시 궁중의 비빈(妃嬪) 사이에서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59

    명안공주관련유물-2.고문서류(明安公主關聯遺物 古文書類) / 조선 숙종년간(1675~1691) / 일괄(1첩,3건) / 국왕문서/궁방류 / 강릉시립박물관 / 강원 강릉시 / 낱장
    명안공주(明安公主, 1664~1687) 고문서는 명안궁과 관련된 자료들이다. 명안공주는 조선 현종의 셋째 딸이며, 숙종의 누이동생으로 숙종 5년(1679)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와 결혼하였으며 이름은 온희(溫姬)다. 명안공주 관련 고문서는 숙종 10년(1684) 명안궁에서 흥양현(현재 고흥)과 사천현(泗川縣)에 있는 명안궁 사패지(賜牌地)의 환속(還屬)과 철저한 관리를 위해 관에 청원한 문서 3점과 오태주에게 보낸 물품 종류와 수량을 기재한 물종단자 1점이다. 이들 문서는 조선후기 궁방전(宮房田)의 운영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조선 18대왕 현종(顯宗)의 셋째 딸 명안 공주의 혼례에 관계되는 물종 단자의 일부인 것 같다. 건어(乾魚)ㆍ생선ㆍ젓갈ㆍ감귤(柑橘) 따위의 물종과 그 양(量)이 적혀 있다. 그리고 명안공주의 남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의 사주단자(四柱單子)가 부속되어 있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760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조선 성종 17년(1486)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선장
    이『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성종(成宗)17년(1486)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규봉암(圭峯菴)에서 간행한 목판본(木版本)이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수행자를 위해 저술한 수행 지침서로 불교 강원의 사집과(四集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고 있는 학인들이 공부해야 하는 필수 교과목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지눌(知訥)이 입적(入寂)하기 한해 전인 52세때(1209), 말하자면 사상적(思想的)으로 가장 원숙한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교(敎)에 의해 마음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밀(宗密)(당(唐))의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간략하게 줄여 싣고 자기의 사상을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수록하면서, 부처의 마음(공적영지심(空寂霙知心))을 바로 깨닫고 만행(萬行)을 닦아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야 올바른 수행자(修行者)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상근기(上根機)의 수행자가 여러 가지 알음알이에 걸려서 수행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보고, 경절문(徑截門)의 수행법(화두참구(話頭參究))을 아울러 밝혀 주고 있다. 우리나라 고승의 저술로는 드물게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현존하는 판본이 22종이나 되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연구주석서(硏究註釋書)로서 상봉정원(霜峰淨源)의 절요사기분과(節要私記分科), 설암추붕(雪巖秋鵬)의 사기(私記)가 있었고 현재 회암정혜(晦庵定慧)의 법집별행록절요사기해(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와 연담유일(蓮潭唯一)의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등의 주석서(註釋書)가 전래되고 있다.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고려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으로 조선 성종 17년(1486)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서 간행하였으며, 1권 1책이다. 이 책은 보조국사 지눌이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했던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 지눌의 선(禪)사상이 결집된 한국철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찰강원의 사집과(四集科)의 교과서로 현재까지 교육되고 있다. 이 판본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보물 제1148호로 지정된 판본과 동일한 연대이기는 하나 이보다 더 깨끗하고 책 끝에는 대걸(大傑)의 발문이 붙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1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 권하(集註金剛般若波羅蜜經 卷下) / 조선 태종 17년(1417)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선장
    이 판본은 태종 17년(1417) 공림사(空林寺)에서 간행된 목판본 금강경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부르는 조계종의 근본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金剛經)에 대한 53가(家)의 주해(註解) 가운데 왕일휴(王日休)ㆍ진웅(陳雄)ㆍ부대사(傅大士)ㆍ안여여거사(顔如如居士)ㆍ야부도천선사(冶父道川禪師)ㆍ약눌선사(若訥禪師)ㆍ육조대사(六祖大師)ㆍ자암승미선사(茨菴僧微禪師)ㆍ지자선사(智者禪師) 등의 주해(註解)를 모아 편집한 것으로 전체 32분(分) 가운데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부터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제15분(分)부터 제32분(分)까지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부분에는 경전이 지향하는 바를 적은 글과 영경사(永慶寺)의 도과법사(道顆法師)가 돌에 새겨 찍어낸 것을 원본으로 했음을 밝히는 글이 있다. 이어 본문의 교정표ㆍ육조대사의 서문ㆍ간행경위를 적은 기록이 있는데, 간행기록 외에는 원본에 붙어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권말에는 수경게(收經偈)가 실려 있고 영경사(永慶寺) 도과법사(道顆法師)의 석본(石本)을 저본(底本)으로 했음을 밝히고 이어서 본문의 교정표ㆍ 육조대사의 서문ㆍ지자(智者) 청양대법안이선사송(淸凉大法眼二禪師頌)ㆍ 간행발(刊行跋)과 간기(刊記)가 붙어 있는데 이중 간행발(刊行跋) 이외에는 간행당시의 저본(底本)에 붙어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판본은 신주(信珠) 등의 화주(化主)로 전도관찰사(前道觀察使) 우희열(禹希烈)과 전통선랑목주감무(前通善郞木州監務) 허이(許彛) 등에 의해서 간행된 것으로 처음 나온 새로운 금강경 주석서이다. [ 번역 해제 ] * 보물1223호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권하)』 1. 『금강경(金剛經)』과 그 주석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줄여서 金剛般若經 또는 金剛經이라고 부른다)은 반야경전의 하나로서, 공(空)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경전이다. 모든 존재에 대한 집착을 떠나고, 나[我]라고 하는 관념을 물리치는 것에 의해 붓다의 깨달음이 얻어진다고 설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라고 한다. 한역(漢譯)으로는 6개가 있는데 ①구마라집(鳩摩羅什) 역 ②보리류지(菩提流支) 역 ③진제(眞諦) 역 ④달마급다(達摩笈多) 역[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 ⑤현장(玄奘) 역 ⑥의정(義淨) 역[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이며, 이 가운데 구마라집 역이 가장 대표적이다. 『금강경』은 원래 품명이 나눠지지 않았으나, 양무제(梁武帝)의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32분으로 나눈 이후로 이것이 일반화되었다. 32분은 다음과 같다. ①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②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③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④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⑤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⑥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⑦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⑧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⑨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⑩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⑪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⑫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⑬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⑭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⑮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⑯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⑰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⑱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⑲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⑳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㉑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㉒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㉓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㉔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㉕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㉖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㉗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㉘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㉙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㉚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㉛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㉜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금강경』은 『법화경』⋅『화엄경』 등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경전으로서, 특히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이 주로 읽혀졌다. 동시에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도 많이 쓰여졌는데 800명 이상이 주석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또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주석서 가운데서 편집자의 기호에 맞는 주석을 발췌, 편집한 합주본(合注本)이 간행되었는데, 적게는 삼가본(三家本)⋅오가본(五家本)에서 많게는 53가 합주본 등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2. 우리나라에서의 『금강경』 주석서 전통 1) 우리나라 찬술의 『금강경』 주석서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금강경』의 한역본이 전래되었는데 삼국 시대인 6세기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수없이 간행되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인정되어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고 있다. 나아가 삼국 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찬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①원효(元曉) :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3권(失) ②경흥(憬興) : 금강반야경료간(金剛般若經料簡) 3권(失) ③의적(義寂) : 금강반야경찬(金剛般若經賛) 1권(失), 금강반야경론술기(金剛般若經論述記) (失) ④도증(道證) :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1권(失) ⑤도륜(道倫) : 금강반야경약기(金剛般若經略記) 1권(失) ⑥태현(太賢) : 금강반야경고적기(金剛般若經古迹記) 1권(失), 금강반야경신역고적기(金剛般若經新譯古迹記) 1권(失) ⑦대비(大悲) :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1권(失) ⑧원측(圓測) :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失) <고려시대> ①혜심(慧諶) : 금강경찬(金剛經讚)1권(存) <조선시대> ①기화(己和) :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2권(存) ②의첨(義沾) : 금강경사기(金剛經私記) 1권(存) ③긍선(亘璇) : 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鏡) 1권(存) 이와 같이 『금강경』은 삼국 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특히 구마라집 번역본이 많이 읽혔으며, 억불의 시대였던 조선 시대에도 『금강경』은 끊임없이 간행되었고 주석서도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금강경』은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중시된 경전이었다. 2) 『금강경』 합주본 간행의 역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금강경』 주석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258년(고려 고종 45)에 간행된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주석서[보통 川老本이라고 부른다]이다. 이 천로본은 1387년(우왕 13)에 왕실의 지원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에는 야부도천의 천로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또 육조 혜능의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도 간행되었다. 이와 같이 천로본 등의 주석서가 단독으로 간행되는 한편, 합주본도 이미 간행되기 시작하여 1415년(태종 1)에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가 간행되었으며, 1417년(태종 3)에는 본서인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集註金剛般若波羅密經)』이 간행되었다. 또 1426년(세종 8)에는 야부도천의 주석에 정진(鄭震)이 주해를 더한 합주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주로 중국 사람들이 찬술한 주석서를 간행하다가, 1457년(세조 2)에 간행된 것이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이다. 『오가해설의』는 조선 초기의 고승인 기화(己和, 1376~1433)가 부대사(傅大士)⋅육조혜능(六祖慧能)⋅규봉종밀(圭峰宗密)⋅야부도천(冶父道川)⋅예장종경(豫章宗鏡) 5가의 주석에 설의를 붙여 간행한 것이다. 이후 『금강경』의 주석서는 『오가해설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데, 이후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15차례나 복간되었다. 오가해 뿐만 아니라 1482년(성종 14)에는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금강경』합주본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언해본(諺解本)의 간행이다. 세조는 불서의 간행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는데, 1461년(세조 7)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경전간행 사업을 전담케 하였다. 간경도감은 1471년(성종 2)에 폐지될 때까지 9개의 불경언해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1464년(세조 10)에 간행된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이다. 『금강경언해』는 『금강경』 본문과 육조 혜능의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에 세조가 구결을 달고 한계희(韓繼禧)가 번역하였으며,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판교종사(判敎宗事) 해초(海超) 등이 교정을 보아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금강경언해』는 그 후 1495년(연산군 1), 1575년(선조 8) 등 여러 차레 복각되어 간행되었다. 3. 보물 제 1223호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간행 경위 본 간본은 조선 시대인 1417년(태종 17) 공림사(空林寺)에서 간행된 목판본으로서, 공림사는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는 사찰이다. 본서는 애초 상하 2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하권만 남아 있으며 『금강경』제 15분부터 제 32분까지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금강경』에 대한 53가(家)의 주해(註解) 가운데 왕일휴(王日休)ㆍ진웅(陳雄)ㆍ부대사(傅大士)ㆍ안여여거사(顔如如居士)ㆍ야부도천선사(冶父道川禪師)ㆍ약눌선사(若訥禪師)ㆍ육조대사(六祖大師)ㆍ자암승미선사(茨菴僧微禪師)ㆍ지자선사(智者禪師) 등의 주해(註解)를 모아 편집한 것이다. 본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금강경』 본문과 주석 : 제 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 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②수경게(收經偈) ③교감발 : 저자 미상 ④본문의 교감표 ⑤육조 혜능의 서문 :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의 서문이다. ⑥지자청량대법안이선사송(智者淸涼大法眼二禪師頌) : 지자선사(智者禪師)와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선사의 게송 ⑦간기 및 시주질 이 가운데 ⑥까지는 원간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며, ⑦의 간기 및 시주질은 간행할 때 새긴 것이다. 교감발에 의하면, 『금강경』의 여러 판본 가운데 남당(南唐) 도과법사(道顒法師)의 석본(石本 : 石刻本을 가리킨다)을 저본으로 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교감발을 쓴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약눌(若訥)에게 전하여 널리 전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아 남송(南宋)대에 쓰여진 듯하다. 왜냐하면 약눌(若訥, 1110-1191)이 『금강경』을 주석한 『주금강반야경(注金剛般若經)』을 쓴 것이 1189년이기 때문이다. 간기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문신인 우희열(禹希烈, 1354-1420) 등이 중심이 되어 본서를 간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우희열은 1413년과 1415년 두 번에 걸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본서를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4. 의의 『금강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간행된 경전 중의 하나로서, 억불 시대인 조선 시대에도 끊임없이 간행되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금강경』주석서를 들여와 번각하거나 복각하여 간행하였는데, 특히 15세기에는 여러 주석서들을 모아서 간행한 합주본(合注本)이 빈번하게 간행되었다. 본서는 그러한 합주본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중국의 주석서를 재간(再刊)하는 데 그치지 않고, 1457년에는 기화(己和)가 자신의 견해를 붙인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찬술하기에 이른다. 본서는 『금강경오가해설의』가 찬술되기 직전에 간행된 것으로, 기화의 독자적인 주석서인 『금강경오가해설의』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작성 : 정영식 )
    출처 : 문화재청
  • 475762

    불조삼경(佛祖三經) / 고려 우왕 10년(1384) / 1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한솔제지(주) / 서울 강남구 / 선장
    이 책은 인도에서 가장 먼저 중국에 전한 경전으로 알려진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과, 부처님의 최후 가르침인 불유교경(佛遺敎經), 그리고 중국 위앙종(僞仰宗)의 초조 영우(初祖 靈祐)의 위산경책(위山警策)을 合綴하여 고려 1384년에 간행한 목판본. 1책. 패아시아페이퍼코리아 소장. 보물 제1224호. 이 책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최초로 번역된 경전으로 가엽마등(迦葉摩騰), 법난(法蘭)이 공역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호한한 내용을 42장의 요지로 간명하게 나누어 스님들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에는 인도에서 가장 먼저 중국에 전한 경전으로 알려진 四十二章經, 부처님의 최후 가르침인 불유교경(佛遺敎經)과 중국 위앙종(僞仰宗)의 초조 위산 영우(初祖 위山 靈祐)의 경책(警策)이 합철(合綴)되어 있다. 이 책은 몽산 덕이(蒙山 德異)의 서문이 붙어 있어 고려후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자체(字體)로 보아 송판(宋板)의 번각(飜刻)으로 추정되며, 권말에 붙은 이색(李穡)의 발문을 보면, 청룡갑자(靑龍甲子)년인 고려 우왕 10년(1384) 지봉(志峯)과 지도(志道), 각온(覺溫)이 김씨의 시주에 의하여 각온(覺溫)한 것이다. 보물 제695호와 모든 조건이 동일한 판본으로 인쇄상태가 보다 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전라도 전주 원암사에서 공민왕 10년(1361)에 간행된 판본과 우왕 10년(1384)에 간행된 것 등 2종이 전하고 있다. 보림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원암사판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이 판본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일본과 대비한 결과, 송대(宋代)에 유행한 장책 형태인 호접장(蝴蝶裝) 형식으로 제책되었던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미 상기 2종의 판본이 보물 제694, 제695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3

    묘법연화경 권7(언해)(妙法蓮華經 卷七(諺解)) / 조선 성종 3년(1472) / 1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중앙승가대학 / 서울 성북구 / 선장
    묘법연화경(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역, 7권)은 삼승(三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각기 다른 것을 깨닫게 하여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일시키는데 중점을 둔 대승경전(大乘經典)으로 흔히 ‘법화경’이라 부르고 있다. 이 판본은 송(宋) 계환(戒環) 주해(註解)와 일여(一如) 집주(集註)본을 조선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국역하여 세조 9년(1463) 9월에 판각한 것이다. 이 전본(傳本)은 그 판에서 성종 3년(1427)에 찍어낸 것 중 권 제7의 영본(零本) 1책이다. 법화경 권 제7은 제24~28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중 제26~28품의 내용이 남아 있다. 이 책 권말의 성종 3년(1472)에 갑인소자(甲寅小字)로 찍은 김수온(金守溫)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승하한 세조ㆍ예종ㆍ의경왕(덕종)의 명복을 기원하고 인성대군(仁城大君)의 선지수생(善地受生)과 정희대왕대비(貞憙大王大妃)ㆍ주상과 왕비전하의 수복과 돌아가신 친정부모를 기원하기 위해 여러 경판의 소장처로 나누어 보내서 총 29종의 경판에서 적게는 5부에서 많게는 500부까지 모인(模印)하게 하고 그 전체에 걸쳐 단일 발문을 작성하여 갑인소자로 찍어 각 경의 말미에 붙어 보시(普施)하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 때 이 법화경은 간경도감판에서 60부를 찍어냈는데, 이것은 그 중 권 제7의 후반 부분이다. 간경도감판 법화경으로 지정된 것은 보물 제959호 비로자나불복장전적(毘盧遮那佛腹藏典籍) 가운데 들어있는 권 제1과 제4의 일부분, 보물1010 강태영 소장의 권 제1,제3~6(후인본 추가지정 포함), 그리고 보물 제1140호 송성문 소장의 영본 권 제3 등이 있을 뿐이다. 이 간경도감 초각(初刻) 초인본(初印本)의 완질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4

    조흡 고신왕지(曺恰 告身王旨) / 조선 태종 6년(1406)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육군박물관 / 서울 노원구 / 낱장
    이 왕지(王旨)는 태종 6(1406)년 윤7월 13일 조흡(趙恰, ?~1249)에게 ‘가선대부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嘉善大夫 左軍都摠制府 同知摠制)’의 벼슬을 내린 것이다. 조흡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던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趙敏修, ?~1390)의 손자이다. 1400년 소위 ‘제 2차 왕자의 난(亂)’ 때에 공을 세워 공전(功田)을 하사 받았고 무관(武官)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초에는 국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임명장을 '왕지'로 썼는데, 세종 16년(1434) 경부터 교지(敎旨)로 명칭을 바꿨다. 이 왕지는 장지(壯紙)에 초서(草書)로 쓰였고, 연월일을 적은 부분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란 어보(御寶)를 찍었다. 조선 초기 왕지의 전형적 사례로서 당시의 문서형식과 관제(官制) 등을 살필 수 있는 예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5

    식물본초(食物本草) / 조선 중종 21년(1526)~명종 21년(1566) / 2권 2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
    이 책은 약용(藥用)으로 쓸 수 있는 식물(食物)을 뽑아 엮은 중국의 의서(醫書)이다. 구성은 수(水)ㆍ곡(穀)ㆍ채(菜)ㆍ과(菓)ㆍ금(禽)ㆍ수(獸)ㆍ어(魚)ㆍ미(味) 등 8류(類)로 나누어 상ㆍ하 2권에 수록하였는데, 상권에는 수(水)ㆍ곡(穀)ㆍ채(菜)ㆍ과류(菓類) 등 4류(類) 212조(條)가, 하권에는 금(禽)ㆍ수(獸)ㆍ어(魚)ㆍ미류(味類) 등 4류(類) 175조(條)가 수록되었으며 각(各) 류(類)에서는 조목마다 해당 식물(食物)의 맛ㆍ본성(本性)ㆍ이익(利益)ㆍ해독(害毒) 등을 적어 설명하고 말미에 각류(各類)의 식물에 대한 총론(總論)을 적고 있다. 이 책에는 명(明)나라 적충(狄충, 1525)과 요문청(姚文淸, 1526)이 쓴 서문이 실려 있으나 저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인용서목에 의하면 명나라 노화(盧和)가 편찬한 원고를 정덕년간에 왕영(汪穎)이 2권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라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의 간행기록이나 서(序)ㆍ발(跋) 등이 없어 출간(出刊)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가정 병오 1년(1546)에 이 책을 들여왔다는 어숙권(魚叔權)의『패관잡기(稗官雜記)』권2의 기록과 이 책이 갑진자판(甲辰字版)으로 인쇄된 점을 고려할 때 조선 명종년간(1546~1556)에 인쇄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직까지 알려진 현전하는 유일본으로서 의학사(醫學史)연구와 서지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6

    의방유취 권201(醫方類聚 卷二百一) / 조선 성종 8년(1477)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한독의약사료실 / 충북 음성군 / 선장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조선 세종(世宗)이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 김례몽(金禮蒙)과 저작랑(著作郞) 유성원(柳誠源) 등에게 의방(醫方)을 수집하여 편찬하게 한 것을 뒤에 다시 신석조(辛碩祖)와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의관(醫官) 진순의(陳循義) 등을 모아 새로이 편찬하게 하고, 안평대군 용(瑢)과 도승지 이사철(李思哲) 등에게 감수하게 하여 세종 27년(1445) 10월에 완성된 도합 365권의 한의학(韓醫學) 백과사전이다. 그러나 세조 때에 이르기까지도 워낙 거질(巨帙)이라 간행하지 못하고 간요(簡要)한 방서(方書)로서 부문별로 나누어 강습하게 하였다가, 그 뒤 수차의 교정과 정리를 거쳐 266권 264책으로 편성되자, 성종 8년(1477)에 한계희(韓繼禧)와 임원준(任元濬) 등이 30부를 인출하는데 그쳤다. 본서는 266권 중 제201권 1책의 영본(零本)으로 권두서명(卷頭書名)은 ‘의방유취(醫方類聚)’로 기록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표시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내용은 「양성문삼(養性門三)」이며 이에는 '보단요결이(寶丹要訣二)', '주씨집험방(朱氏集驗方)', '왕씨집험방(王氏集驗方)', '수친양로서(壽親養老書)', '사림광기(事林廣記)', '산거사요(山居四要)' 등 6가지 의방(醫方)이 전재(轉載)되어 있다. 본서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유일한 초판본으로 한의학과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7

    향약제생집성방 권4~5(鄕藥濟生集成方 卷四~五) / 조선 정종 1년(1399) / 1책 / 목판본/관판본 / 한독의약사료실 / 충북 음성군 / 선장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은 조선 초기의 명신(名臣)이며 의학자(醫學者)인 김희선(金希善) 등이 수집한 고려조의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과 조선 초기에 권중화(權仲和)가 서찬(徐贊)에게 명하여 편찬케 한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중심으로 하여, 김희선과 권중화 등이 종래 우리나라의 의료경험 및 한의서(韓醫書)들을 참고 또는 채집ㆍ보완하여 제생원(濟生院)에서 태조 7년(1398)에 편찬하고, 이듬해(1399)에 강원도관찰사였던 김희선이 강원감영(江原監營)에서 간행한 의약서로 뒤에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덧붙이고 있다. 전질은 총 30권이며, 338종의 각종 질병 증상과 2,803종의 약방문을 개괄한 다음 약방문을 질병의 부문별로 수록하고 각각 설명을 하고 있다. 본서는 제4권과 제5권을 합권(合卷)한 1책으로 제4권은 도합 44장 중 앞부분 1∼9의 9장, 제5권은 도합 44장 가운데 41∼44장의 4장이 결락(缺落)되었고, 자수의 경우 제4권은 12항 24자, 제5권은 12항 22자로 되어 있으며 판식(版式)도 다소 차이가 있다. 제5권의 권두서명(卷頭書名)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著者)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판심부(版心部)에는 흑구나 어미가 없으나 ‘향방(鄕方)’이라는 판심제(版心題)와 권차 및 장차(張次)가 기록되어 있다. 본서는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기초가 되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우리의 풍토와 체질에 맞는 향약(鄕藥)을 개발하여 적용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국내에서 전하는 것이 드문 희귀본으로 한의학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8

    노인 금계일기(魯認 錦溪日記) / 조선 선조 32년(1599) / 1책 / 필사본/일기류 / 국립진주박물관 / 경남 진주시 / 선장
    『금계일기(錦溪日記)』는 조선조 의병인 노인(魯認, 1566∼1623)이 정유재란 때 남원성의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경위를 쓴 일기문으로, 선조(宣祖) 32년(1599)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 약 4개월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금계 노인(魯認)은 고향인 나주(羅州)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 장군의 밑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일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후에는 일본에 대한 복수책을 명나라에 알려주는 일을 했던 인물이다. 이 일기는 책의 앞뒤가 없어지고 글씨도 많이 훼손되어 읽기가 매우 힘들어 책 내용의 대체적인 정황만을 알 수 있다. 전체 내용은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히게 된 경위부터 귀향 때까지 기록이나, 내용의 앞뒤가 유실되고 그 일부만이 남았다. 그가 죽은 후 200여 년이 지나고 그의 7대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으며 노인의 시문(詩文)과 함께 《금계집(錦溪集)》속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학자들과 만나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조선의 교육ㆍ과거ㆍ재정ㆍ군사ㆍ문화ㆍ풍속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준 내용이 일기에 쓰여 있어 당시의 시대상황과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69

    구급간이방 권6(救急簡易方 卷六) / 조선 성종 20년(1489) / 1책 / 목판본/관판본 / 한독의약사료실 / 충북 음성군 / 선장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은 구급(救急)의 한의방(韓醫方)을 집대성하여 민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한글로 쓴 한의학 서적으로, 조선 성종 20년(1489)에 윤호(尹壕), 임원준(任元濬)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고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것을 후대에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한 번각본(翻刻本)이다. 종래 의약서(醫藥書)로서 백과사전격인 『의방유취(醫方類聚)』와 『의방유취(醫方類聚)』의 번잡한 것을 깎아 그 긴요한 것만을 수록한 『향약제생방(鄕藥濟生方)』과 『구급방(救急方)』 등이 있었으나, 취사선택이 정밀하지 못하고 상략(詳略)이 적절하지 못하여 이용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성종은 즉위 후 이를 보완하여 민간의 이용에 편리하도록 한의서(韓醫書)의 편찬을 구상하고 준비하였다가 성종 20년(1489)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윤호(尹壕) 등에게 명하여 질병을 중풍과 두통 등 127문(門)으로 나누고 그 치료의 방문(方文)을 모아 새로이 편찬하게 하였으며, 이를 감수하여 한글로 국역함으로써 누구나 알기 쉽게 하였던 것이다. 본서는 제6권의 영본(零本)으로 권두서명(卷頭書名)은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표시(著者表示)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판심부(版心部)에는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가 있고 상하의 어미 내에는 ‘간이방(簡易方)’이라는 판심제(版心題)와 권차(卷次) 및 장차(張次)가 기록되어 있다. 본서는 희귀한 언해본(諺解本)의 의약서로서 한의학과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0

    구급간이방 권6(救急簡易方 卷六) / 조선 선조(16세기) / 1권1책 / 목판본/관판본 / 허준박물관 / 서울 강서구 / 선장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은 구급(救急)의 한의방(韓醫方)을 집대성하여 민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한글로 쓴 한의학(韓醫學) 서적으로, 조선 성종(成宗) 20년(1489)에 윤호(尹壕:1424∼1496)와 임원준(任元濬:1423∼1500)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고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것을 후대에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한 번각본(翻刻本)이다. 권말(卷末)에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1531∼1598)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선조조(宣祖朝) 이전의 16세기 간본(刊本)임을 알 수 있다. 종래 의약서(醫藥書)로서 백과사전격인 「의방유취(醫方類聚)」와 「의방유취」의 번잡한 것을 깎아 그 긴요한 것만을 수록한 「향약제생방(鄕藥濟生方)」과 「구급방(救急方)」 등이 있었으나, 취사선택이 정밀하지 못하고 상략(詳略)이 적절하지 못하여 이용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성종은 즉위 후 이를 보완하여 민간의 이용에 편리하도록 한의서(韓醫書)의 편찬을 구상하고 준비하였다가 그의 20년(1489)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윤호 등에게 명하여 질병을 중풍과 두통 등 127문(門)으로 나누고 그 치료의 방문(方文)을 모아 새로이 편찬하게 하였으며, 이를 감수하여 한글로 국역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알기 쉽게 하였던 것이다. 본서는 제6권의 영본(零本)으로 권두서명(卷頭書名)은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표시(著者表示)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판심부(版心部)에는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가 있고 상하의 어미 내에는 ‘간이방(簡易方)’이라는 판심제(版心題)와 권차(卷次) 및 장차(張次)가 기록되어 있다. 권말(卷末)에 설월당(雪月堂)ㆍ광성후인(光城後人) 등의 소장인기(所藏印記)가 있으며, 표지는 후대에 개장(改裝)된 듯하다. 본서는 희귀한 언해본(諺解本)의 의약서(醫藥書)로 한의학(韓醫學)과 국어학(國語學) 및 서지학(書誌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1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고문서(密城朴氏 三友亭派 宗中 古文書) / 조선 선조 12년(1579)~순조 16년(1816) / 일괄(16건,1책) / 국왕문서/교령류 / 밀성박씨삼우정파종중 / 경북 청도군 / 낱장
    이 문서들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박경신(朴慶新, 1539∼1594)과 그의 두 아들 지남 · 철남과 관련된 각종 유물들이다. 이 유물은 현재 밀성박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데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상도 관찰사 겸순찰사가 박경신과 그의 두 아들 지남 · 철남에게 발급한 ‘공신록훈 인증서’ 13점, 공신도감에서 박경신에게 준 선무원종공신록권 1책, 순조 21년(1821)에 박경신과 그의 처에게 발급된 증직교지 2매, 선조 12년(1579)에 박경신의 어머니 장씨가 박경신의 과거급제와 출사(出仕)를 축하하여 노비와 토지를 별급하는 별급문기 등 모두 4종 17점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2

    묘법연화경 권3~4(妙法蓮華經 卷三∼四) / 조선 성종 1년(1470)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통도사성보박물관 / 경남 양산시 / 선장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명필의 대자 정서본을 바탕으로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으로 권3~4의 1책(영본)이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이를 흔히 ‘법화경(法華經)’으로 약칭하여 불리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saddharma-pundarika-sutra”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는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도사본은 조선초기 성종 1년(1470)에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睿宗)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명필가가 법화경을 대자로 정서한 판하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불경으로, 현재 권3~4의 1책만 소장되어 있다. 권3~4는 제5품 「약초유품(藥草喩品)」부터 제13품 「권지품(勸持品)」까지 모두 9품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의 권두서명은 제1행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행에 “요진삼장법사구마라집봉 조역(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구마라집 한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제3행에는 품제(品題)가 보이고 제4행으로부터 경문이 시작되고 있다. 본문은 반엽을 기준으로 광곽은 사주쌍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3.2cm×16.0cm이며, 전체 8행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의 경문은 13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가 있으며, 그 사이로 흑어미(黑魚尾)가 보이고 있다. 판심제는 위에 ‘법화경(‘法華經’)’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이 판본은 판각 이후 여러 차례 후인(後印)되어 우리나라에 비교적 전본이 적지 않게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원판을 모본(母本)으로 1527년에 경상도 광흥사에서 복각된 이래 전국의 사찰에서 28차례 이상의 개판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될 정도로 널리 유통되었다. 따라서 이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 판본의 주요한 계통을 형성하였던 대표적 판본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3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禮念彌陀道場懺法 卷六∼十) / 조선 연산군 9년(1503) / 5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직지사성보박물관 / 경북 김천시 / 선장
    아미타불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 지은 죄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내용으로 원나라 왕자성(王子成)이 집록(集錄)한 것을 고려의 승려 혜랑(慧朗) 등이 1376년에 간행한 것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성종 5년(1474) 왕실에서 새로운 체제로 편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의식집. 목판본 5권 1책. 직지사 소장 보물 제1241호. 이 판본은 성종 5년(1474)에 간행된 원간본(原刊本)을 저본으로 연산군 9년(1503)에 복각하고 난외(欄外) 각수명(刻手名)을 새로 새겨 넣어서 중간(重刊)한 책의 초쇄본으로 추정된다. 따로 전하는 동일 판본에 비교하여 각자(刻字)와 인면(印面)이 선명한 초쇄본으로서, 1503년에 중간된 불경으로 판의 새김이나 인면(印面)이 원간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판본이며 더욱이 난외(欄外) 각수명은 그 무렵의 간본년대(刊本年代) 추정(推定)에 근거를 제공하는 점에서 서지학과 불교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4

    천안 광덕사 감역교지(天安 廣德寺 減役敎旨) / 조선 세조 3년(1457) / 1첩 / 국왕문서/교령류 / 광덕사 / 충남 천안시 / 첩장
    교지는 일반적으로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ㆍ관작(官爵)ㆍ자격(資格)ㆍ시호(諡號)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이지만, 사여하는 것의 내용에 따라 교지의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고, 명칭도 다르다. 이 문서는 천순 원년(天順 元年) 즉 조선 세조 3년(1457) 8월 10일에 국왕(세조)이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광덕사와 개천사에 발급한 것으로 두 사찰을 더욱 보호해주고 잡역을 경감해주라는 내용이다. 같은 시기에 내려진 예천(醴泉) 용문사(龍門寺)의 교지(敎旨)[보물 제729호], 능성(綾城) 쌍봉사(雙峰寺)의 면역사패 교지(免役賜牌 敎旨)[보물 제1009호]와 체제 및 형식이 동일하다. 이 교지는 사찰에 특권을 내리는 왕명서이다. 세조가 사찰 및 불교보호에 관심을 기울인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1첩) 조선 세조 3년(1457)에 왕이 충청도 천안 광덕사(廣德寺)에 대해 잡역(雜役)을 면제 하도록 내린 교지이다. 꼭 같은 날짜에 꼭 같은 내용으로 같은 천안 땅에 있던 개천사(開天寺)에 대해서도 내린 교지가 부속되어 있다. ( 작성자 : 이동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775

    천안 광덕사 조선사경(天安 廣德寺 朝鮮寫經) / 조선 세종 23년(1441)~성종 17년(1486) / 3종 7첩 / 필사본/사경 / 광덕사 / 충남 천안시 / 절첩장
    이 사경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당나라 불다바리(佛陀波利)가 한역한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을 백지에 먹으로 조선 초기(1441~1486)에 쓴 것으로 2권 1첩본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구체적으로 열거해 자식이 부모에게 자연스럽게 보은하도록 하는 불교의 효 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은 불법에 귀의하여 지은 죄를 참회하면 장수할 수 있음을 설한 경이다. 이 책은 권말의 시주질(施主秩)에서 효령대군(1396~1486)이 부인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정씨와 아들이 함께 시주하여 필사한 사경임을 알 수 있는데 필사 년대는 효령대군의 셋째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이 세종 23년(1441)에 군(君)으로 책봉되었고, 효령대군이 성종 17년(1486)에 입적했으므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경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을 조선 전기에 필사한 5권 5첩의 필사본이다. 묘법연화경은 화택(火宅)의 비유 등을 들면서 누구나 일승(一乘)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내용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는 대승경전이다. 이 사경은 사성기가 없어 정확한 작성 년대는 알 수 없으나 권수의 금니변상도(金泥變相圖)와 정성스런 본문 글씨 등에서 나타난 품격으로 보아 고려 전성기 때의 사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려시대 사경의 품격을 이은 조선 초기의 사경으로 추정된다. 이 사경은 당나라 불타파리(佛陀波利)가 한역한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과 양나라 진체(眞諦)가 한역한《대승기신론》을 조선 전기에 두꺼운 백지에 먹으로 쓴 2권 1첩의 필사본이다.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중생을 위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참회하고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육바라밀을 실행하는 등 불법의 심오한 진리를 믿고 실행하면 죄를 멸하고 무병장수하는 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 사경은 현존하고 있는 사경 가운데 규격이 가장 큰 것이다. 이 사경은 앞ㆍ뒤에 두 개의 경(經)이 필사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많이 보이지만, 뒷면에 변상도와 함께 《대승기신론》이 필사되어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권말에 사성기가 없어 정확한 제작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종이의 질이나ㆍ변상도, 본문 글씨 등을 종합해 볼 때 조선 초기의 사경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6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보살만행수능엄경 권1~4(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一∼四) / 조선 성종 19년(1488년) / 4권 1책 / 목판본/사찰본 / 호림박물관 / 서울 관악구 / 선장
    능엄경(당(唐) 반랄밀제(般剌蜜帝) 역, 송(宋) 계환(戒環) 해설, 10권)은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요의(要義)를 설한 경전으로, 으로 엮은 것이다. 흔히 ‘대불정수능엄경’, ‘수능엄경’, ‘능엄경’이라 일컫고 있다. 이 판본은 성종 19년(홍치 1, 1488) 8월 충남 홍산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에서 화납(化納)대사 지희(智熙)와 공덕주 덕원군(德源君)의 주간(主幹) 아래 장불동(張佛同)ㆍ선년(善女) 주씨(朱氏)ㆍ내장(內莊) 등의 시주로 판각이 이루어졌는데, 그 판각용 판서본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품계의 서예가 박경(朴耕)이 본문은 중간자, 세주는 작은자로 정서하였다. 박경은 교수청(校讎廳)의 사자생(寫字生)으로 특히 세자(細字)에 능하였다. 그는 일찍이 세조 13년(1467)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국역본의 중자와 소자를 필서할 때 안혜(安惠)ㆍ유환(柳睆)과 함께 관여하였다. 또한 성종 15년(1484)에는 조선의 동활자(銅活字) 중 글자체가 가장 작은 갑진자(甲辰字)를 주조할 때 글자본의 부족자를 모두 닮게 써서 활자를 주조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본문에는 한자의 일부 획을 떼어 결합한 구결(口訣)과 한글토를 병용한 것이 특징이며, 능엄경 중 가장 작은 해자(楷字)로 써서 정교하게 새긴 독자적 판본인 동시에, 구결과 한글토는 중세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7

    간이벽온방(언해)(簡易辟瘟方(諺解)) / 조선 선조 11년(1578년)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은 중종 20년(1525)에 의관 김순몽(金順蒙, ?~?)ㆍ유영정(劉永貞, ?~?)ㆍ박세거(朴世擧, ?~?) 등이 왕명에 의해 온역(瘟疫, 돌림병)의 치료에 필요한 방문(方文, 처방글)을 모아 언해하여 엮은 의서(醫書)이다.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쓴 서문에 의하면, 1524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평안도 전역에 여역(厲疫, 전염성 열병)이 크게 번져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였으므로, 행부호군(行副護軍) 김순몽 등에게 명하여 온역에 필요한 모든 방문들을 뽑아 책으로 엮어 한글로 번역하여, 이를 1525년 5월에 널리 보급하였다. 현재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선조 11년(1578)의 을해자(乙亥字)본과 광해군 5년(1613)의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로 된 중간본이 전한다. 이 책은 1578년 을해자로 간행된 것이며, 첫 장에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도장이 찍혀 있어 내사본임을 알 수 있으나, 내사기(內賜記)는 떨어져 나가고 없다. 고려대학교도서관 만송문고(晩松文庫)에도 같은 책이 소장되어 있다.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은 의학사 연구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국어사 자료로서, 특히 1578년의 중간본은 방점(傍點)이 없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78

    세의득효방 권10~11(世醫得效方 卷十∼十一) / 조선 중종 1년(1506)∼명종 22년(1567) / 2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가천박물관 / 인천 남동구 / 선장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은 1328∼1337년에 원(元)나라 남풍(南豊)의 의학교수 위역림(危亦林, ?~?)이 고조 때부터 이후 5대 동안 치료했던 경험방(經驗方)을 모아 편찬한 의학책으로 조선 세종 7년(1425) 2월에 춘천부사에 의해 원나라판을 모방하여 갑진자(甲辰字)로 다시 찍은 것으로 총 20권 22책 가운데 2권 1책이다. 이 책은 그 중의 권10과 권11이다. 이 책은 간행 이후 의학시험을 위한 교재와 강의서적으로 널리 읽혔으며, 전체를 8과(科) 276자목(子目)으로 나누어 19권을 만들고, 그 뒤『양생법절문(養生法節文)』이란 손진인(孫眞人)의 책을 덧붙여 총 20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권10은 두통, 면병 등 10항목으로 되어 있고, 권 11은 활유론(活幼論), 초생(初生) 등 22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갑진자(甲辰字)의 활자본으로 세종 때의 판본이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 궁내청도서료(宮內廳圖書寮), 대판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 대만(臺灣)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내에는 전해져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없었다. 비록 20권 가운데 2권 1책이긴 하지만,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희귀한 의학책으로 의학연구자료 및 서지학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 번역 해제 ] * 보물 제1250호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 권10~11』 1. 『세의득효방』 개괄 『세의득효방』은 중국 원(元)나라의 위역림(危亦林)이 편찬하여 1345년(원나라 혜종13) 간행된 의방서(醫方書)로 보통 줄여서 ‘득효방(得效方)’으로 불렀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는 전체 19권에 당(唐)나라의 명의(名醫)로 알려진 손진인(孫眞人)의 「양생법절문(養生法節文)」 1권을 덧붙여 총 20권으로 편성하였다고 하였다. 「자서」에서 천력(天曆) 원년(1328)에 이 책의 저술을 시작하여 후지원(後至元) 3년(1337)까지 1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서문」에는 위역림의 고조부가 동봉(董奉)이라는 선인(仙人)의 25세손을 만나 비방(秘方)을 전수받은 것을 위역림이 고조부 이래 5대에 걸친 처방을 모아 편성한 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 강서성(江西省)의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가 태의원(太醫院)에 보내 자세히 검토하게 하여 10여 년 뒤인 1345년 간행되었다. 구성은 부록과 같은 「양생법절문(養生法節文)」을 제외하면 8과(科) 276자목(子目) 총 19권으로 되어 있다. 내용의 차례는 원나라의 의학교육제도인 의학십삼과(醫學十三科)에 의거하여, 대방맥 잡의과(大方脈雜醫科) 91자목ㆍ소방맥과(小方脈科) 71자목ㆍ풍과(風科) 10자목ㆍ산과 겸부인잡병과(産科兼婦人雜病科) 33자목ㆍ안과(眼科) 12자목ㆍ구치 겸인후과(口齒兼咽喉科) 6자목ㆍ정골 겸금족과(正骨兼金鏃科) 29자목ㆍ창종과(瘡腫科) 24자목ㆍ침구과(針灸科)로 편성되어 있다. 각 전문과에 속하는 질병의 맥상(脈象)과 병증 및 치료법을 비교적 세밀하게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총목록에 수록된 침구과(針灸科)는 목록에만 있고 내용이 없는데, 책 속의 문장을 검토해 보면 모두 각 과(科) 속에 흩어진 채로 덧붙여져 있다. 기술방법은 해당 항목을 3자 낮추어 ○표하여 적고, 그 아래에 각 대증(對證)의 처방을 기록하였다. 각 병증마다 처방은 검은 바탕에 백문(白文)으로 표기하여 구별하기 쉽게 하였고, 적응증이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중복된 처방은 처방이 들어있는 문류(門類)를 주석으로 작게 표기해 두어 찾아보기 용이하게 하였다. 내용은 많은 고방(古方) 및 집안에서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효과 있는 방제가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정골과 방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면 골절(骨折)ㆍ탈구(脫臼)의 정복(整復)에 대하여 오두(烏頭)ㆍ만타라(曼陀羅)ㆍ풍가아(風茄兒)를 써서 먼저 마취할 것을 주장하였고, 현조복위법(懸吊復位法)을 새롭게 채용하여 척추 골절 등을 치료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당시 의학의 선례(先例)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425년(세종7) 2월에 춘천부에서 처음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주 유학교수(原州儒學敎授)인 윤황(尹晃)의 발문에 의하면 원나라 판본을 복각한 것으로 당시 20권 22책으로 간행되었다. 1430년(세종12)에 『위씨득효방(危氏得效方)』이라는 서명으로 의과 취재 과목으로 언급되었고, 1456년(세조2)과 1471년(성종2)의 『조선왕조실록』 및 『경국대전』에도 올라있어 조선 초기부터 의학취재(醫學取才)나 의과시강서(醫科試講書)로 널리 읽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의득효방』은 『의방유취(醫方類聚)』에서 152군데 총 188항목에 채록되어 있으며,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서 133조문, 『동의보감』에서 1,045조가 인용되어 있는 등 조선 의학 서적들에서 매우 높은 인용 빈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허준(許浚, 1539~1615)이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와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를 집필하는 데도 주요 참고서로 이용하는 등 조선 의학에도 큰 영향을 준 의서라고 할 수 있다. 2. 편저자 위역림(危亦林, 1277~1347)은 호는 달재(達齋)이며, 남풍(南豐: 지금의 강서성)의 의학교수(醫學敎授)를 지냈다. 내과ㆍ부인과ㆍ소아과ㆍ안과ㆍ정골과(正骨科)ㆍ구치과(口齒科)ㆍ인후과(咽喉科) 등을 두루 연구하였고 특히 골상과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위역림의 5대조 위운선(危云仙)은 송대 그 지방의 명의였으며, 큰할아버지 위자미(危子美)는 부인과와 정골・금족과를 전공하였고, 조부 위벽애(危碧崖)는 소아과와 안과를 연구하는 등 집안 대대로 의업(醫業)에 종사하였다. 위역림은 20세에 의원을 열었으며, 선조로부터 전해진 의술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가지고 집안에 전해오는 의서와 처방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연구했다. 이에 10년에 걸쳐 고대의 다양한 의방(醫方)과 그의 집안에 5대째 전해 내려오는 경험 방제를 문(門)으로 나누어 정리하여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을 편찬하였다. 3. 중요기록물 지정 – 보물 제1250호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 권10~11은 1425년(세종7)에 춘천부사가 원나라 위역림(危亦林)이 지은 의서(醫書)를 복각하여 인출한 책의 일부이다. 당시 20권 22책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중 2권 1책이 현재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02번길의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종 때 갑진자(甲辰字)의 활자본으로 간행된 판본이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 궁내청도서료(宮內廳圖書寮), 오사카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 대만 등에 완질이 소장되어 있으나 국내에는 전해지지 않다가, 20권 가운데 2권 1책이 발견되어 1997년 6월 1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50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20권 중 2권 1책이기는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도록 『화제국방(和劑局方)』과 함께 조선에서 가장 널리 애용되어오던 의서로서 국내에서 발견된 희귀본이라는 점에서 의학 및 서지학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4. 구성 및 주요내용 권 10에는 10항목, 권 11에는 23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권 10은 대방맥 잡의과(大方脈雜醫科)이며, 두통(頭痛)ㆍ면병(面病: 얼굴에 생기는 병증)ㆍ이병(耳病: 귓병)ㆍ비병(鼻病: 콧병)ㆍ액기(腋氣: 액취증)ㆍ중독(中毒)ㆍ제충(諸蟲: 여러 가지 기생충)ㆍ구급(救急)ㆍ골경(骨鯁)ㆍ괴질(怪疾)로 구성되어 있다. 권 11은 소방과(小方科)이며, 활유론(活幼論: 유아의 생활에 대한 논의)ㆍ초생(初生: 갓난아이)ㆍ금풍(噤風)ㆍ제풍(臍風)ㆍ촬구(撮口)ㆍ불유(不乳)ㆍ변증(變蒸)ㆍ통치(通治: 두루 치료하는 방법)ㆍ상아명단장법(相兒命短長法: 아이의 수명 장단을 보는 법)ㆍ경후(驚候: 경기(驚氣)의 징후)ㆍ급경(急驚)ㆍ만경(慢驚)ㆍ만비(慢脾)ㆍ절풍(截風: 풍사를 없애는 법)ㆍ제간(諸癎: 여러 간병)ㆍ외감(外感)ㆍ제열(諸熱: 여러 가지 열로 인한 병)ㆍ담수(痰嗽)ㆍ진창(疹瘡)ㆍ학질(瘧疾)ㆍ벽기(癖氣)ㆍ비결(痞結) ㆍ객오(客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권 10의 마지막 괴질에서는 ‘득효사십육방(得效四十六方)’이라는 부제 아래 46가지 괴난증에 대한 치험례와 의안(醫案)이 수록되어 있다. 처방은 소풍산(消風散)ㆍ향유산(香薷散)ㆍ흑석단(黑錫丹)과 같은 명방들이 원인별로 분류ㆍ수록되어 있다. 또 경우에 따라 구법ㆍ세면약ㆍ고약과 외용약도 채택하는 등 다양한 치법과 제형을 응용하고 있다. 5. 판본 조선에서는 1425년(세종7)에 춘천부에서 갑진자(甲辰字)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총 20권 22책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원주유학교수(原州儒學敎授) 윤황(尹晃)의 발문에 원나라 판본을 복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1587년(선조20) 간행한 『고사촬요(攷事撮要)』의 ‘팔도책판(八道冊版)’에는 춘천판과 담양판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전해지지 않다가 20권 가운데 2권 1책이 발견되어 보물 제125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가천박물관에 권10과 권11이 소장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가천박물관 소장본은 금속활자본으로 갑진자본(甲辰字本)이다. 닥나무종이로 세로는 29.5cm, 가로는 19.0cm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을 이루고 있고 반곽(半郭)은 세로 21.1cm, 가로 15.1cm이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반엽(半葉)은 12행 19자씩이다. 주쌍행(註雙行)이며 대흑구내향삼엽화문어미(大黑口內向三葉花文魚尾)를 이루고 있다. 권미제(卷尾題)는 ‘씨소아방(氏小兒方)’이라고 되어있다. 세종 때의 판본은 일본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 궁내청도서료(宮內廳圖書寮), 오사카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 대만 등에 완질이 소장되어 있다. 일본궁내청서릉부 소장자료는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세종 때의 판본 이외에 『사고전서(四庫全書)』본은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자부5(子部五) 의가류(醫家類)』에 수록되어 있다. ( 작성 : 윤민향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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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4(紺紙金泥妙法蓮華經 卷三~四) / 고려 공민왕 15년(1366) / 2첩 / 필사본/사경 / 국립경주박물관 / 경북 경주시 / 절첩장
    중국의 위대한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문으로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권도남(權圖南)등의 시주로 고려말 공민왕 15년(1366)에 감지(紺紙)에 은니(銀泥)로 쓴 고려사경이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은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흔히 『법화경』으로 약칭하여 부르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 saddharma-pundarika-sutra>로 이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한다. 이 사경은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는 구마라집이 A.D.406년에 번역한 28품본을 저본으로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수ㆍ당대의 돈황본 사경은 거의 대부분이 이 역본을 저본으로 사경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경들 또한 구마라집 역본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류에는 대장경에 편입된 2종의 역본(譯本)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이 28품 7권본인 구마라집의 역본(譯本)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존본은 대부분 전(全) 7권본으로 장축(裝軸) 또는 제책(製冊)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위탁되어 있는 광흥사 법화사경은 권3, 4의 2첩으로 모두 접장본 형태로 장정되어 있다. 비록 각 첩의 표지는 채색이 다른 보상화문(寶相華紋)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사경의 표지화에 보이는 연판(蓮瓣)과 엽맥의 양식은 14세기 후반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표지의 경제(經題)는 전남 순천 송광사에 남아 있는 경패(經牌)와 같은 형식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란 서명이 쓰여져 있다. 제3첩의 권수(卷首)에는 일반적으로 사경에 보이는 변상도는 없으며, 바로 권3의 권두서명과 구마라집의 역자 표시가 보이고, 다음 행에 제5품인 <약초유품(藥草喩品)>의 품제가 기입되어 있다. 변란은 상하에 금니로 단선을 굵게 긋고, 그 사이에 경문을 은니로 사성하였다. 경문은 한 장에 24항으로 매항에 17자씩 배자하여 쓰여져 있다. 서체는 날렵하고 유려한 서풍으로 고려의 전형적인 사경체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31.0cm×10.8cm이며, 사경면의 상하간 높이는 20.5cm이다. 그리고 각 권의 말미에는 ‘시주 권도남(施主 權圖南)’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권3과 권4는 서로 한 질을 이루는 사경으로 보인다. 지질은 비록 지정 명칭에 ‘취지(翠紙)’로 되어 있으나, 닥나무 종이에 남색으로 물들인 ‘감지(紺紙)’로 보인다. 최근 송성문씨가 소장했던 전적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이 기증본에 권도남이 대표 시주자로 나타나는 『법화사경 권7』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사경 표지화의 채색 부분이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짝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법화사경 권7의 말미에는 지정 26년(공민왕 15, 1366)에 추가로 기록한 사성기가 실려 있는데, 시주자로 도평의녹사전농직장(都評議錄事典農直長)인 권도남의 이름이 맨위에 있고, 그의 일족으로 보이는 권씨 일문 이름이 아래에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광흥사본 사경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동일본으로 추정되므로, 그 사경의 제작시기는 고려 1366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광흥사본 법화사경 권3. 4는 비록 권수에 변상도가 없어 아쉬움을 주나, 고려말(1366년 이전)에 제작된 사경으로 추정이 가능하여 사경의 연대 추정에 참고가 되는 개인 발원 사경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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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9~10(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九∼十) / 조선 세조 8년(1462) / 2권 2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보림사 / 전남 장흥군 / 선장
    참법은 현생에 쌓은 죄업에 대하여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참회하는 법회를 말한다. 『자비도량참법』은 바로 이를 수행하여 영험을 받아서 죄업은 씻어버리고 화복을 누리고 나아가 망령을 구제하게 되면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어둠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공덕을 발원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양 무제의 찬집 이후에 재차 천감 연간(502~519)에 고승들에 의하여 본문 중에 번잡한 곳을 삭제하고 핵심 요지를 정리한바 있으며, 또한 원대에 이르러 참법의 내용을 대교하고 다시금 정리하였던 까닭에 비로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는 이른바 ‘상교정본(詳校正本)’이라는 관칭이 붙은 판본이 출현하였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간행된 판본류는 충남의 향천사(香泉寺)에 소장되었던 판본이 현존 최고본으로 알려진 충숙왕 3년(1316)에 간행된 고려본을 비롯하여 10여종이 현재 남아 있다. 이 책은 10권 가운데 마지막 책인 권9,10으로 세조 8년(1462)에 간경도감에서 중수 간행한 책이다. 권9의 끝에는 시주명을 비롯하여 발원문, 중수기 등 간행에 관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또한 지금까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판본이 25종으로 밝혀져 있었으나, 이제 새로이 중수본(重修本) 한 종을 추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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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完州 松廣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腹藏遺物) / 조선 인조 5년(1641 ) / 3첩 / 사찰문서/기문류 / 금산사성보박물관 / 전북 김제시 / 절첩장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소조삼불좌상에서 나온 불상의 조성내력을 기록한 조성기와 불복에 시납되었던 법화경 등 복장품 유물 일괄. 필사본 및 목판본 2종 6점. 완주 송광사 소장. 보물 제1274호.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에 체징(體澄)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읍 대흥리 종남산(終南山)에 위치해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고려 중기에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절을 세울 수 있는 터라 생각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 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폐사(廢寺)한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에 응호(應浩) ‧ 승명(勝明) ‧ 운정(雲淨) ‧ 덕림(德林) ‧ 득순(得淳) ‧ 홍신(弘信)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碧巖)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천 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조 14년(1636)에 각성(覺性)이 약사전과 칠성각을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대웅전은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에 있는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순조 13년(1813) 정준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대웅전을 단층으로 개축하였다. 1814년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34년 극인(克仁)이 나한전을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송광사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5m가 넘는 거불(巨佛)이며, 조선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삼불상의 각 불상에서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조성기(造成記)> 3장이 발견되었는데, 각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기는 후에 <송광사삼세불조성기(松廣寺三世佛造成記)>로 이름되었으며, 크기는 284.0cm×43.5cm이다. 그밖에 본존인 석가불에서는 임란 전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6책을 비롯하여 후령통(喉鈴筒) 3점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특히 불상 조성기에 의해 이들 불상의 제작년대, 제작자, 제작배경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해당 불상의 조성에 소용되는 비용은 당시 이 지방에 거주했던 지역의 유지 2인의 시주로 충당되었으며, 또한 불복의 복장품을 시주한 ‘복장경대시주(腹藏經大施主)’란 구체적 내용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조성기 말미에는 숭정 14년(인조 19,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성기에는 명과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완주 송광사 삼불상은 제작년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혼란기를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국가적인 신앙심과 국난극복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나, 복장유물이 전문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습되지 못하여 학술적 가치를 크게 상실한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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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권236~238(資治通鑑 卷二百三十六~二百三十八) / 조선 세종 18년(1436) / 3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선장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연대에 따라서 편찬한 역사편찬의 한 체제)의 중국통사를 조선시대 세종의 명령으로 윤회(尹淮, 1380~1436)ㆍ권제(權踶, 1387~1445) 등이 교정하고 주석을 덧붙이거나 빼서 세종 18년(1436)에 간행한 것이다. 모두 294권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중 이 책은 권236, 237, 238로, 당기(唐紀) 81권 중 권52, 53, 54에 해당되며, 보존 상태는 아주 좋다. 간행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완질이 전하는 중간본(重刊本)의 책 끝에 ‘정통(正統) 원년(1436) 8월 인출’이란 원간의 기록으로 그 해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과 같이 원간본(原刊本)은 전본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비록 영본(零本) 1책이나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로 인출 한 것으로서 서지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권수편자(卷首編者)의 관직과 이름은 2항(제1항 32자, 제2항 29자)으로 낱개 활자가 아니라 1항 단위의 활자로 주조한 것이 특이하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83

    최유련개국원종공신녹권(崔有漣開國原從功臣錄券) / 조선 태조 4년(1395)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강릉최씨대종회 / 서울 성동구 / 권자장
    이 녹권(錄券)은 조선 태조 4년(홍무 28, 1395)에 공신도감에서 최유련에게 발급한 개국원종공신록권으로 필서본이다. 최유련은 고려말~조선초기의 인물로, 본관은 강릉이다. 태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원종공신의 포상을 받았다. 경상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지내는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공신녹권은 공신(功臣) 책록의 증서(證書)이다. 조선초기에는 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佐命) 3공신(功臣)의 정공신(正功臣)에 한하여 교서와 녹권을 아울러 주었으며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 주었다. 교서와 녹권은 구별되는 것으로, 교서는 왕이 직접 내리는 문서이고 녹권은 왕명을 받들어 공신도감에서 발급하는 것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이란 정공신(正攻臣)에는 들지 못했으나 태조가 등극할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거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협력하여 즉위를 도운 사람들로, 즉위한 해 10월부터 6년 12월까지 13차례 원종공신 포상이 내려졌다. 수차례에 걸쳐 포상 하교된 원종공신의 인원은 문헌상으로 1,698명에 이르나 중복된 사람들을 빼면 대략 1,300명 전후가 된다. 이 녹권은 공신도감에서 사급자(賜給者)의 성명과 신분, 7회에 걸친 공신들의 공적내용과 포상(褒賞) 지시 및 처리내용, 그리고 녹권을 받은 105명의 공신명단 및 포상내용, 녹권발급에 관한 기구별 담당 관원의 직함(職銜) 및 수결에 이르는 내용이 모두 208항에 걸쳐 필서되어 있다. 권말에 승지 민여익(閔汝翼)과 발급에 관여한 임원인 15명의 직함과 성(姓)이 기재되어 있고, 이들 가운데 10명은 수결을 하였다. 상전(賞典)으로는 각각 밭 30결, 노비 3명을 상으로 주고, 부모와 처에게 봉작(封爵)하며,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주고, 죄를 용서함(宥)이 후세에 미치게 했다. 이들 녹권자료는 조선 전기 개국원종공신에 대한 대우와 국가성립에 영향을 미친 인물에 대한 연구, 공신녹권의 양식, 이두문의 사용과 문체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84

    이윤손 유서(李允孫 諭書) / 조선 세조 3년(1457) / 1건 / 국왕문서/교령류 / 이영옥 / 서울 중랑구 / 낱장
    이 문서는 세조 3년(1457) 3월 12일에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이윤손(李允孫, 1414~1467)에게 밀부(密符)를 내리면서 내린 유서이다. 이윤손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본관은 가평(加平). 초명은 원손(元孫). 자는 맹숙(孟叔)이다. 세조 1년(1455)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벼슬은 경상좌도병마절제사를 비롯하여 호조참의ㆍ평안도도절제사ㆍ한성부윤ㆍ호조참판ㆍ공조참판ㆍ형조참판ㆍ평안도관찰사ㆍ내금위장ㆍ중추부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유서는 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원에게 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를 내리면서 함께 발급하는 명령서이다. 밀부라는 것은 군사권을 가진 관원이 왕의 명령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이 유서에서는 세조가 이윤손에게 밀부 제 14부를 내렸다. 밀부는 원형의 목제인데 가운데를 나누어서 오른쪽 부는 해당 관원에게, 왼쪽 부는 궁궐에 보관하였다. 만약 국가에 긴급한 일이 생기면 왕이 내려준 교서를 읽은 후 좌부와 해당 관원이 가지고 있던 우부를 합쳐보고 틀림이 없으면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유서는 모두 9행에 묵서되어 있으며, 연호 위에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찍혀있다. 문서 상태는 접은 부분이 약간 검은 선으로 나타나 앞부분에 일부 훼손되었지만 본문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이 유서는 이미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유서 가운데 시기가 가장 이르며, 조선초기 유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 번역 해제 】 세조 3년(1457) 3월 12일에 세조(世祖)가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이윤손(李允孫)에게 내린 유서(諭書)이다. 유서는 조선시대 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지방관에게 내린 명령서이다. 조선시대에는 한 지방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관찰사ㆍ절도사ㆍ방어사ㆍ유수(留守) 등이 왕명이 없이 자의로 군사를 발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밀부(密符)의 제도가 있었다. 밀부는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있었다. 군사의 동원은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부와 국왕이 보낸 반쪽의 부를 맞추어 의심이 없을 때 거행하였다. 조선 전기의 발병부(發兵符)는 모양이 둥글었다. 앞면에 '발병(發兵)'이라 쓰고, 뒷면에는 '모도관찰사(某道觀察使)' 또는 '모절도사(某節度使)'라고 썼다. 여러 진(鎭)인 경우는 '진호(鎭號)'를 쓰고 둘로 나누어 우부(右符)는 해당 관찰사ㆍ절도사 및 진에 주고 좌부(左符)는 대내에 보관하였다. 만약 군사를 움직이려면 좌부와 함께 교서(敎書)를 내렸고, 그것을 받은 관원은 내려온 좌부와 자신이 간직한 우부를 합쳐서 틀림없음이 확인되면 군사를 움직였다. 조선 후기의 밀부는 원형이다. 앞면에는 '제기부(第幾符)', 뒷면에는 '어압(御押)'을 표시하였다. 둘로 나누어 우부는 해당 관원에게 주고 좌부는 대내에 간직하였다. 국왕이 밀부를 관원에게 내릴 때 함께 내리는 유서는 관원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으로 유서통(諭書筒)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유서의 문서식은 『전율통보(典律通補)』에 실려 있다. 유서는 조선시대 고문서학은 물론 군사제도의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된다. ( 작성자 : 심영환 )
    출처 : 문화재청
  • 475785

    진산세고(晉山世稿) / 조선 성종 7년(1476) / 4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박영돈 / 서울 강서구 / 선장
    『진산세고』는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조부 강회백(姜淮伯, 1357∼1402), 부 강석덕(姜碩德, 1395∼1459),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행장과 시문을 1권으로 하고,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 1권을 합하여 4권 1책으로 엮어 성종 7년(1476)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책이다. 이 책의 권수에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ㆍ최항(崔恒, 1409~1474)ㆍ정창손(鄭昌孫, 1402~1482)의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ㆍ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의 발문이 있어 편집과 발간의 경위를 알 수 있다. 권 1은 강회백의 시문집으로 첫머리에 강희맹이 쓴 행장1편, 그의 시 42수와 서(序)ㆍ발(跋), 권2는 강희맹이 쓴 강석덕의 행장과 그의 시 42수,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권4는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강희맹이 쓴 서ㆍ발, 서거정과 최호(崔灝)가 쓴 강희안의 시문집 발이 수록되어 있다. 화훼분야의 전문서적 중 가장 오래된 『양화소록』은 화초의 성질ㆍ재배ㆍ관리방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원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86

    대악후보(大樂後譜) / 조선 영조 35년(1759) / 7권 7책 / 필사본/사본류 / 국립국악원 / 서울 서초구 / 선장
    『대악후보(大樂後譜)』는 영조 35년(1759)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대악전보(大樂前譜)』와 함께 7권 7책으로 편집한 악보이다. 서명응은 세종 때의 음악 22곡을 모아 『대악전보』라 하였고,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 『대악후보』라 하였는데, 『대악전보』는 청일전쟁(1894∼1895) 때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그 구성을 보면, 권1~2에 세조조의 악보를 싣고, 권3~7은 시용향악(時用鄕樂)으로서 고려시대의 「동동(動動)」ㆍ「만전춘(滿殿春)」ㆍ「쌍화점(雙花店)」ㆍ「서경별곡(西京別曲)」ㆍ「이상곡(履霜曲)」ㆍ「한림별곡(翰林別曲)」 등을 수록하여 고려가요 연구에 있어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세조조의 음악만을 실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18세기에 간행되었다고는 하나 최초로 관(官)에서 편찬한 독립된 악보로서, 세조 때의 음악을 비롯하여 여러 시기 음악을 담고 있는데, 고려에서 전래된 다양한 향악곡(鄕樂曲)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과,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변화와 발전과정을 거친 정악곡(正樂曲)의 초기형태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87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 조선 태조 원년(1392)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이석기 / 경남 / 권자장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조선 태조 원년(1392) 9월에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녹훈(錄勳)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1398)에게 발급(發給)된 개국공신교서(開國功臣敎書)이다. 이 공신교서를 받은 이제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시호(諡號)는 경무(景武)이다. 증조부는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부친은 권신 이인임(李仁任, 1312-1388)의 동생 이인립(李仁立, ?-1387)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 딸 경순궁주(慶順宮主 : 康氏소생)와 혼인한 뒤에는 이를 인연으로 개혁파에 가담하여 공양왕 4년(1392)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으면서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왔으며, 개국 후에는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진 후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올랐고, 태조 2년(1393)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으나, 태조 7년(1398) 소위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피살되었다. 세종 3년(1421) 11월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었다. 이 공신교서의 서두는 〈 교 순충좌명개국공신 흥안군 겸 의흥친군위절제사 지경연사 이제(敎純忠佐命開國功臣興安君兼義興親軍衛節制使知經筵事李濟)〉라고 이제의 공신호(功臣號), 군호(君號), 겸직명(兼職名 )과 성명을 썼고, 이어 고려말 어려운 정국 하에서 이룬 그의 공로를 칭찬하고 상당한 특전과 상을 내리고 있다. 말미에는 교서를 발급한 시기인 ‘홍무 이십오년 시월 일(洪武貳拾伍年拾月日)’이 기록되어 있고,(《태조실록》에는 9월에 공신들에게 교서와 녹권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위에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찍었다. 이 공신교서는 성주이씨 경무공 종가의 가전문서(家傳文書)이다. 후대에 원본의 훼손으로 인하여 교서 전체를 두터운 저지로 배접하고 말미에 목축(木軸)을 붙였으나, 원래의 재료였던 명주의 올이 삭고 풀려서 글씨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적지 않다. 재질(材質)은 명주(明紬)이고 광곽(匡郭)은 주사란(朱絲欄)이며, 서체(書體)는 해서(楷書)이다. 본문의 크기는 세로 36.9㎝ 가로 112.0㎝이고 견본(絹本)의 크기는 세로 32.5㎝ 가로 94.5㎝의 권축장이다. 이 공신교서는 개국공신교서로서는 유일하게 전래되는 것이라 역사적· 사료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초의 공신교서의 형식을 짐작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서자료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공신과 공신교서의 연구에는 물론 공신에 대한 포상(褒賞)과 은전(恩典)의 내용 등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1392년 조선 태조(太祖) 원년 10월 일에 태조의 셋째 사위이며 개국(開國) 1등 공신(功臣)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내린 교서이다. 이제의 타고난 성품이 선량함과 행동을 삼가하고 직무에 성실한 마음가짐과 욕심을 적게 하는 자기 수양을 통하여 지조를 지키는 일면들을 거론하고, 그를 사위로 삼은 것과 그의 늠름한 풍채와 당당한 논의는 간웅(奸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사직(社稷)의 계책을 도울만하다 하였다. 또한 충성심과 의리가 대단하다 하며 은(殷)나라의 개국을 도운 이윤(伊尹)과 주(周)나라의 개국을 도운 여상(呂尙)에 다음가는 부류로 비견하였고, 왕씨(王氏)의 고려(高麗)가 혼란하여 왕씨로 위장(僞裝)한 신씨(辛氏)가 왕위를 훔친 지 10여 년이 되었기에 두세 대신과 왕씨의 후예를 찾아 선왕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왕씨에게 귀부하지 않고 배반하여 떠나므로 종사(宗祀)가 끊기게 되었기에, 이제가 천명(天命)과 인사(人事)의 기미를 살펴서 배극렴(裴克廉)ㆍ조준(趙浚) 등 대신과 대의(大義)를 창도하고 계책을 결단하여 임금인 자신을 추대(推戴)하여 새로운 왕업(王業)을 시작하게 하여 그 공로는 더 성대할 수 없으니 공신의 집안은 영원히 단절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벼슬을 더하고 인구(人口)와 전토를 내려주며 또 3대를 추증(追贈)하고 자손의 죄를 용서하게 하며, 금띠와 비단과 명주를 보낸다 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의기가 투합하니 신자(臣子)는 기필코 같은 소리로 대응하여 군친(君親)의 생각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장인과 사위의 은정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내용이다. (작성자 : 조명근)
    출처 : 문화재청
  • 475788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조선 성종 3년(1472) / 2권 1책 / 목판본/왕실본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
    선종영가집은 중국 당나라 영가 현각선사(玄覺禪師, 647∼713)가 수행하는 방법을 10가지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한 내용으로 현각영가집 또는 영가집으로 불린다. 육조 혜능대사(六祖 惠能大師)의 법제자인 영가현각 선사가 수행하는 후인들을 위하여 누구나 먼저 입지를 굳게 해야 하고 교만하고 사치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등 수선(修禪)의 요결(要訣)과 수행하는 자세 등을 말한 것이다. 이 책은 고려 우왕 7년(1381) 봄 충주 청룡사에서 새긴 목판에서 조선 성종 3년(1472)에 인수대비에 의해 찍어 낸 200부 가운데 한 권이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세조, 예종, 의경왕의 명복을 빌고, 정희대왕대비, 성종과 왕비의 만수무강 등을 기원하기 위해 간행한 불경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89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白紙金泥金剛 및 普門發願) / 고려 공민왕 20년(1371) / 1첩 / 필사본/사경 / 직지사성보박물관 / 경북 김천시 / 절첩장
    고려 공민왕 20년(1371)에 비구니(比丘尼) 묘지(妙智), 묘수(妙殊)의 시주(施主)와 발원으로 금강경과 법화경의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금니로 사성(寫成)한 고려사경. 필사본. 1첩. 직지사 소장 보물 제1303호. 금강경의 한역본은 402년에 요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 외에 6종이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역본으로는 현재까지 6종의 역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대장경에는 달마급다(達摩笈多)의 역본이 입장(入藏)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유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경의 금강경은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양나라 소명태자가 분장한 것을 저본으로, 권수에 금강계청(金剛啓請)과 발원문(發願文)이 있고, 책 끝에는 반야진언(般若眞言)과 보궐진언 (補闕眞言)이 있으며, 특히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영험찬(靈驗讚)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白紙墨書妙法蓮華經 卷一, 三) / 고려 창왕 1년(1389) / 2첩 / 필사본/사경 / 국립경주박물관 / 경북 경주시 / 절첩장
    중국의 위대한 불경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묘우(妙遇)가 고려말(공양왕 즉위년 1389년)에 백지(白紙)에 묵서(墨書)한 고려사경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광흥사 법화사경은 권1. 3의 2첩으로 모두 접장본 형태로 장정되어 있다. 비록 각 첩의 표지는 채색이 다른 보상화문(寶相華紋)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사경의 표지화에 보이는 연판(蓮瓣)과 엽맥의 양식은 14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표지의 경제(經題)는 장방형의 경패(經牌)에 쌍선을 금니로 그리고 그 안에 붉은 색 바탕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란 서명이 금니로 쓰여져 있다. 제1첩의 권수(卷首)에는 일반적으로 사경에 보이는 변상도는 없으며, 바로 도선(道宣)의 서문에 이어 권1의 권두서명과 구마라집의 역자표시가 보이고, 다음 행에 제1품인 <서품(序品)>의 품제가 기입되어 있다. 변란은 상하에 금니로 쌍선을 굵게 긋고, 행 사이의 계선은 가늘게 그리고 그 사이에 경문을 묵서하였다. 경문은 한 장에 24항으로 매항에 17자씩 배자하여 쓰여져 있다. 그러나 권3의 권수에는 석가의 좌우에 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 그리고 석가의 왼쪽에는 7보살과 오른편에는 2보살 등의 권속에 둘러 싸여 법상을 앞에 놓고 사부대중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변상도가 백지에 금니로 그려져 있는데, 주로 직선적인 선묘(線描)를 세밀하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도식화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서체는 조맹부체를 바탕으로 유려한 서풍으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사경체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37.3cm×13.2cm이며, 사경면의 상하간 높이는 25.5cm이나, 권3의 경우는 대략 1.0cm 정도 작다. 그리고 권3의 말미에는 "우파이장씨묘우근발성심(優婆夷張氏妙愚謹發誠心) 서사차경(書寫此經) 용천선세부모급일절유정동인일승자(用薦先世父母及一切有情同人一乘者) 홍무이십이년기사구월일지(洪武二十二年己巳九月日誌)"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고려 창왕 원년(1389)에 장씨(張氏) 성(性)을 가진 묘우(妙愚)가 돌아가신 부모와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해 사성(寫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흥사본 법화사경 권1에는 비록 권수에 변상도가 없어 아쉬움을 주나, 고려말에 백지에 묵서로 제작된 사경으로 오히려 고려시대에는 백지묵서사경(白紙墨書寫經)이 희귀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어 참고가 되는 개인 발원 사경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1

    유몽인위성공신교서(柳夢寅衛聖功臣敎書) / 조선 광해군 5년(1613)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유효주 / 전남 고흥군 / 권자장
    이 문서는 광해군 5년(1613) 조선 중기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에게 내려진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이다. 유몽인은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ㆍ간재(艮齋)ㆍ묵호자(默好子). 설화문학의 대가로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1589년(선조 22) 장원급제하고 임진왜란 직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세자시강원 사서로 광해군을 호종(扈 從)하였다. 예조판서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위성공신교서는 ‘갈충진성위성공신(竭忠盡誠衛聖功臣)’이라는 칭호로 3등 공신에 녹훈된 한성좌윤(漢城左尹) 유몽인에게 내려진 것이다. 위성공신이란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관원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3등공신에게는 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은 1계(階)를 올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1계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사위는 계를 올려주고 적장자는 세습하여 녹을 잃지 않게 하고 반당(伴倘) 6명, 노비 3명, 구사(丘史) 3명, 밭 20결, 은자 5냥, 비단 1필, 내구마(內俓馬) 1필을 수령토록 하였다. 그런데 위성공신은 광해군이 폐위된 후 삭훈(削勳)되었다. 이 문서는 괭해군 때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 및 그 사례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만력(萬曆) 41년 곧 광해군 5년(1613) 3월에, 국왕이 임진왜란 때 광해군 분조(分朝)에 호종(扈從)한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인 영양군(瀛陽君) 류몽인(柳夢寅)에게 내린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이다. 이 공신녹훈교서는 5개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공신의 공적 사례로 류몽인의 의표(儀標)ㆍ기국(器局)ㆍ재품(才品)ㆍ문예(文藝)ㆍ역관(歷官)을 서술하고, 이어서 그 사이에 있었던 공적을 춘추전국 때 진문공(晉文公)을 도운 오신(五臣)과 공자의 사례를 들어 류몽인의 충심을 찬양하고 있다. ② 공신의 특전으로, 위성공신 3등인 류몽인에게 내려지는 특전 및 상사(賞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③ 공신과의 맹세로, 왕이 공신에게 국가의 존립과 함께 영원히 고락을 같이 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④ 공신의 명단으로 1등에 최흥원(崔興源) 등 10인, 2등에 이헌국(李憲國) 등 17인, 3등에 이순인(李純仁) 등 53인을 적고 있는데, 류몽인은 3등 19인 째에 기록되어 있다. ⑤ 사실 증명으로 ‘만력(萬曆) 41년 3월’이라 하여 공신교서(功臣敎書) 반급(頒給) 연월을 적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란 새보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 개국 이래 태조 1년(1392)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공신책봉(功臣冊封)의 마지막인 영조 4년(1728)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총 28회의 공신이 책록 되었다. 그 중에 1545년(명종 즉위) 대윤(大尹)을 제거하고 명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위사공신(衛社功臣)은 위훈(僞勳)이라 하여 폐삭(廢削) 되고, 광해군 때 책록된 위성공신(衛聖功臣)ㆍ익사(翼社)공신ㆍ정운(定運)공신ㆍ형란(亨難)공신 등 4개 공신호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廢黜)되면서 폐삭 되었고, 1722년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부사공신(扶社功臣)호는 영조 즉위로 폐삭 되고 28개 공신 중에 남아 있는 것은 22개 공신호이다. 22개 공신호 중에 보사공신(保社功臣)호는 1680년(숙종6) 삼복(三福)의 역모고변(逆謀告變)으로 김만기ㆍ김석주 등 12명이 책록 되었다가, 1689년(숙종15) 폐적(廢籍)되고 1694년(숙종20)에 다시 복작되는 등 곡절이 많았다. 이 위성공신은 광해군의 폐위로 폐삭(廢削)된 공신호이기는 하나, 전존(傳存)이 극히 드물고, 조선조 공신 연구 및 임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류몽인(柳夢寅)의 전기 자료이기도 하다. 정탁에게 내려진 위성공신 교서가 전존하고 있다. (작성자 : 이정섭)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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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조선 태종 5년(1405) / 7권 2책 / 목판본/사찰본 / 직지사성보박물관 / 경북 김천시 / 선장
    이 책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을 조선초기 명필가인 성달생의 정서본을 바탕으로 1405년에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 목판본 7권 2책(완본). 직지사 소장 보물 제1306호. 직지사본은 조선초기 태종 5년(1405)에 명필가인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선친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법화경을 정서한 판하본(板下本)을 바탕으로 전라도 고산 안심사(安心寺)에서 도인 신문(信文)의 주관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안심사판을 모본(母本)으로 번각 계통의 판본은 1422년의 대자비암(大慈悲庵)판본과 1436년의 동화사(桐華寺) 판본이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안심사판은 비교적 희귀한 상태이나, 근래 발견된 복장본 가운데 많이 나타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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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 호성공신교서(洪進 扈聖功臣敎書) / 조선 선조 37년(1604)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홍천군 / 강원 홍천군 / 권자장
    교서는 국왕이 발급하는 명령서(命令書)ㆍ훈유서(訓諭書)ㆍ선포문(宣布文)이다. 교서를 발급하는 경우는 매우 다양하여 즉위교서, 구언교서, 배향교서, 문묘종사교서, 권농교서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공신교서도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한 홍진(洪進)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선무(宣武)ㆍ호성(扈聖)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당시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이 있는 자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왕을 시종하며 공을 세운 자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록(策錄)하였다.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홍진에게 선조 37년(1604) 10월 호성공신 2등에 봉하고 내린 공신교서(功臣敎書)이다. 교서에는 호성공신에게 내려주는 특전과 상전이 기재되어 있고 끝에는 86명의 공신의 명단이 등급별로 적혀있다. 당시 호성공신에 대한 포상 규정을 알 수 있는 문서로 공신연구(功臣硏究) 및 임란사연구(壬亂史硏究)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임진왜란 때 홍진(洪進)이 선조를 모시고 의주(義州)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공신에 녹훈되고, 1604년(선조37) 10월 일에 받은 공신교서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을 모두 세 종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신을 말한다. 두 번째는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明)나라에 병량(兵糧)을 주청(奏請)하러 간 사신으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을 말한다. 세 번째는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선조29) 7월에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을 말한다. 홍진이 받은 공신교서는 이 중에서 첫 번째인 호성공신교서로 2등에 녹훈되었다. 호성공신은 모두 3등급으로 나누었다. 1등에는 이항복(李恒福)과 정곤수(鄭覡壽)가 녹훈되었는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였다. 2등에는 이원익(李元翼)과 윤두수(尹斗壽) 등이 녹훈되었는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였다. 3등에는 정탁(鄭琢) 등이 녹훈되었는데,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였다. 이들 공신에게는 등급에 따라 특전이 주어졌다. 1등 공신에게는 본인과 부모ㆍ처자에게 각각 3계의 관계(官階)를 더해주고, 반당(伴倘) 10인, 노비 13구, 구사(丘史) 7인, 밭 1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주었다. 2등 공신에게는 본인과 부모ㆍ처자에게 각기 2계의 관계를 더해주고,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인, 전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주었다. 3등 공신에게는 본인과 부모ㆍ처자에게 각기 1계의 관계를 더해주고,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인, 전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주었으며, 적장자에게 그 녹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작성자 : 심영환)
    출처 : 문화재청
  • 475794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曆) / 조선 선조 12년(1579) / 1책 / 활자본/목활자본 / 국유 / 서울 종로구 / 선장
    대통력(大統曆)은 명(明)나라의 역법(曆法)으로, 고려 말인 공민왕 19년(1370)에 수입되어 조선 효종 4년(1653)에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할 때까지 근 300년간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역법이다. 조선은 태조(太祖)의 즉위교서(卽位敎書)에서 명나라의 형률인 대명률(大明律)의 사용을 천명한 이래로 형률은 대명률(大明律)을 사용하고 역서는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역적 차이로 시각과 절기가 중국과 잘 맞지 않고 역서가 도착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려 때맞춰 널리 알릴 수 없으므로 실제로는 독자적인 책력(冊曆)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曆)》은 모두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첫 장은 정월에서 12월까지 윤4월을 포함한 13개월의 24절기에 관한 내용과 연신방위지도이고, 제2장~제14장은 책력의 본체인 1월에서 12월까지의 월력이다. 달력에는 날짜별로 일상생활에서 그날그날 하기에 좋은 일과 해서는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제15장은 부록격으로, 간지별로 피해야 할 일들을 열거한 부분과 이 책력의 편찬ㆍ인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다. 이 책력이 만들어진 때는 조선 선조 13년(1580)이나 대개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인쇄하는 것은 새해가 시작되는 전년도의 동지이므로 이 대통력을 인쇄한 것은 선조 12년(1579)으로 추정된다. 《경진년대통력》은 관상감(觀象監)에서 활자로 찍은 임진왜란 이전의 역서로는 유일한 것이다. 또한 관상감 인력자(印曆字)로 찍어낸 책 중 가장 앞선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활자연구와 서지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5

    예념미타도량참법 권7(禮念彌陀道場懺法 卷七) / 고려 우왕 2년(1376) / 1책 / 목판본/사찰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
    이 책은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 지은 악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책이다. 참법(懺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 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신앙인들이 많아 삼국시대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이 책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간행된 것으로 책 끝에는 박면타(朴免妥)가 쓴 발문(跋文)이 있고, 다음으로 간행에 참여한 이단(李端) 등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시주질(施主帙, 시주자 명단)로서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 정씨(鄭氏), 완산군부인 최씨(崔氏) 등의 이름이 보인다. 소장본은 권7~10의 1책 영본(零本)으로 ‘발원왕생제팔(發願往生第八)’의 22장까지 각 한자에 한글토를 달고 있으며 희귀한 판본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6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 조선 광해군 2년(1610) / 1책 / 목판본/관판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
    이 책은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대에 훈련도감의 도청(都廳)을 맡았던 최기남이 《무예제보속집》에 《일본고(日本考)》를 첨부하여 편찬한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군사병법과 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임진왜란 직후 당시 관리였던 한교(韓嶠)가 선조의 명으로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선조 31년(1598) 《무예제보(武藝諸普)》를 편찬하였고, 1604년에는 무예제보에 빠진 것을 보충하여 속집을 편찬케 하였으나 이를 간행하기 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때에 와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속집을 간행할 즈음에 김수가 《일본고(日本考)》 4책을 가져와서 그 중 일본의 지지(地誌), 토속(土俗), 구술(寇術), 검제(劍制)를 덧붙여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간행 성격은 최기남(崔起南)의 발문에 “적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일본국도(日本國圖)>, <일본고(日本考)>, <왜선(倭船)>, <왜도(倭刀)> 등 일본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본의 재침(再侵)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귀한 판본으로 서지학ㆍ군사학뿐만 아니라 17세기 초기의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7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군공책(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軍功冊) / 조선 선조 25년(1592)∼선조 26년(1593) / 1첩 / 관부문서/첩관통보류 / 단양우씨열락당종중 / 대구 달서구 / 첩장
    의병군공책(義兵軍功冊)을 비롯하여 첩(帖), 소지(所志), 전령(傳令) 등 12종 20건의 문서가 수록되었는데, 임란사(壬亂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그 중에 특히 의병군공책은 우배선(禹拜善)이 거느리던 의병부대의 편성과 구성원 88명의 직책, 전투시기, 전투장소, 전투형태 및 전공이 비교적 상술되어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는 것이며, 그 외 우배선의 고신(告身) 10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증교지(追贈敎旨) 각1점, 정인홍(鄭仁弘)의 간찰, 당시 고관요직의 서울 주소록인 각택기(各宅記) 등도 우배선의 이력은 물론, 당시 고관의 거주, 관직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8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1.교지(교첩)(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敎旨(敎牒)) / 조선 선조 26년(1593)~광해군 1년(1609) / 12건 / 국왕문서/교령류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475799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2.간찰(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簡札) / 조선 선조 32년(1599) / 1건 / 간독류/간독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번역 해제】 (1장) 정인홍(鄭仁弘)이 1599년(선조32) 합천군수(陜川郡守)에게 올린 글이다. 자신의 죽은 아들의 비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무렵 진군(陣軍)에게 강제로 약탈당하였고, 또 잉질걸(芿叱乞)의 소를 염말(廉末)이 경군인(京軍人)에게 빼앗겨 지금 본 현의 강경소리(康京所里)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 전말을 알고 있는 응세(應世)를 추문(推問)하여 소를 되찾아달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곧바로 주목(州牧)에 고발하여 처분을 바라겠으니, 살펴달라는 내용의 편지이다. ( 작성자 : 조명근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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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각택기(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各宅記)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건 / 민간문서/기타류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 번역 해제 】 (1장)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이하 47명의 문신(文臣)에 대한 거주지를 적은 것이다. 일별해보면, 의정부의 삼정승ㆍ돈녕부사ㆍ오성부원군ㆍ좌찬성, 그리고 육조의 판서ㆍ참판ㆍ참의와 사헌부의 대사헌ㆍ집의ㆍ장령ㆍ지평, 그리고 사간원의 대사간ㆍ사간ㆍ정언ㆍ헌납, 승정원의 육 승지와 기타 청평 부원군, 전임 판서, 박홍로ㆍ이수광ㆍ송사재로 분류된다. 기록한 시기는 1603년(선조36)으로 추정되며, 기록 목적은 비상연락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듯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서식이 일정하지 않고 상이한 점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48명을 선별해서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 기록만으로는 규명이 쉽지 않다. ( 작성자 : 조명근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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