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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7(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七) / 고려 우왕 12년(1386) / 1첩 / 필사본/사경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서울 서대문구 / 절첩장보물 제352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고려 우왕 12년(1386)에 화주 각보(覺普)가 죽산군부인 김씨의 시주로 국왕 및 왕후의 장수를 발원하고 조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각련(覺連)으로 하여금 감지(紺紙)에 은니(銀泥)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저본으로 한 사경이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으로 권7, 1권 1첩(영본)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법화경』은 『화엄경』,『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흔히 『법화경』으로 약칭하여 부르고 있다. 이 경전의 원서명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 이며, 그 의미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경전"으로 풀이한다. 법화경의 성립 연대는 다른 대승경전처럼 확실치 않으나, 대략 3차에 걸쳐 기원후 2세기 중엽까지 소품 단위로 결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3종의 법화경 역본 가운데 406년에 구마라집에 의해서 번역된 한역본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사경은 권7의 1권 1첩(영본)만이 전래되고 있으며, 접장본 형태로 장정(裝訂)되어 있다. 각 첩의 표지는 보상화문(寶相華紋) 4송이가 장식되어 있는데, 표지의 화문은 금니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사경의 표지화에 보이는 연판(蓮瓣)의 양식은 매우 길죽하고 직선적인 모습으로 14세기 후반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표지의 경제는 제첨(題簽)과 같은 형식으로 그리고 그 안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란 서명이 쓰여져 있다. 그러나 권수에는 변상도가 실려 있지 않아 다른 사경에 비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그래서 권수에 변상도 없이 바로 제 1행에는 표제와 동일한 권두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변란은 상하에 금니로 쌍선을 긋고, 계선은 가늘게 그었으며, 그 사이에 경문을 은니로 사성하였다. 경문은 한 항에 17자씩 배자하여 쓰여져 있으며, 사경의 전체 크기는 대체로 33.5cm×11.5cm이며, 사경면의 상하간 높이는 25.2cm이다. 이 사경은 감지에 쓰여져 있는데, 사경의 전후 부분이 심하게 변색되어 있어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이 사경이 은물(銀泥)이 아닌 은가루나 송화가루를 아교 등과 혼합하여 쓰여진 까닭에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가루가 떨어져 버려서 글자의 흔적만 남아 있는 듯 하다. 이 법화경(권7) 사경은 전 7권 중 마지막 권에 해당되는 것으로 권수에 변상도가 없으며, 표지와 서체 등에서도 유의한 특징을 찾아 볼 수 없는 개인발원 사경이다. 그러나 권말에 사경의 제작연대와 조성에 참여한 스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조성연대가 확실한 고려말기 사경으로 비교적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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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 고려후기 추정 / 1책 / 목판본/사찰본 / 계명대학교 도서관 / 대구 달서구 / 선장이 책은 송나라 진실(陳實)이 대장경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엮은 것을 고려시대 13세기 중엽에 원나라로부터 입수해서 복각 간행한 불서이다. 목판본으로 1권 1책(영본)이고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장경에 포함된 여러 경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먼저 문목(門目) 총류(總類)라는 제목 아래 각 품의 이름과 권수 및 품수 등을 정리해 놓았다. 전체 경전을 8부문(部門)으로 나눈 뒤, 다시 총 60개 품으로 각각 분류하였다. 제1 수표대각선용부위중생(首標大覺先容附爲衆生) 부문에는 제1 선왕품(先王品)에서부터 제8 상주품(常住品)까지 해당한다. 예컨대 선왕품에서는 석가보(釋迦譜),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등을 인용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계보를 소개하며, 제2 인지품(因地品)에서는 비바사론, 과현인과경, 석가보 등을 인용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하던 시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 부문의 마지막 품인 제60 유통품(流通品)에 이르기까지 각 품마다 주제를 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경들을 뽑아서 집대성해 놓았다. 계명대본은 고려시대에 재조대장경의 판각 사업을 지원했던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여가를 틈타 판각했던 판본으로, 현재 합천 해인사 잡판고에 그 판목이 보존되어 있다. 이 책은 상중하 3권 1책으로 구성된 영본인데, 내용은 선왕품(先王品)으로부터 번뇌품(煩惱品)에 이르기까지 총 17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21.8cm×13.1cm이다. 판면에는 계선은 없고, 반면은 10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한 행은 23자(字)이다. 어미는 상하하향흑어미(上下下向黑魚尾)이며. 판심제는 ‘람(覽)’으로 약칭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권수 및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판심(板心) 하단부에 존식(存植)·정안(正安) 등의 각수(刻手)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정은 선장으로 되어 있어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 이후 바로 인출하여 제책한 것은 아니며, 그 후 여말 선초에 다시 후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특징으로 보아 본판은 원판(元板)의 복각 또는 번각 계통으로 여말 선초에 후인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내의 전존본 중에 가장 오래된 고본으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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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본 아비달마계신족론 권하(初雕本 阿毗達磨界身足論 卷下) / 고려시대(11세기) /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권자장이 책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의 상좌부(上座部)에서 갈라져 나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논장(論藏)인 육족론(六足論) 가운데 하나이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사(論師)인 세우(世友)가 저술한 것을 현장(玄奘)이 한역한 것이다. 이 판본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판각한 초조대장경 판본 가운데 보존 상태 및 인쇄상태가 뛰어난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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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본 현양성교론 권3(初雕本 顯揚聖敎論 卷三) / 고려시대(11세기) 추정 / 1축 / 목판본/대장도감본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권자장이 책은 북인도의 무착(無着)이 저술하고 당나라 현장(玄奘)이 한역한 20권 가운데 제3권 1축이다. 성교(聖敎)를 현양(顯揚)하기 위한 논서(論書)라는 뜻으로 법상종(法相宗)의 가장 중요한 책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널리 펼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의식(意識)에 의하여 생긴 것이고 이 이치를 바로 알고 닦아야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 판본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판각한 초조대장경 판본 가운데 보존 상태 및 인쇄상태가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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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서산대사유물(海南 大興寺 西山大師遺物) / 조선 정조 12년(1788)~정조 18년(1794) / 2건 / 국왕문서/교령류 / 대흥사 / 전남 해남군 / 낱장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서산대사의 속성은 완산 최씨(完山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이다. 서산대사 입적한 뒤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대흥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대흥사서산대사유품이 되었다.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륜산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冥)과 처영(處英)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표충사 건물은 정조 13년(1789)에 지어졌고 정조가 친히 편액을 써주었다. 서산대사의 유물은 의발과 친필문서가 전한다. 이 가운데 교지(敎旨)는 2건이다. 하나는 선조 35년(1602)에 서산대사를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一都大禪師 禪敎都總攝)’에 임명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 12년(1788)에 정조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려 표충선사(表忠禪師)라 칭한 문서이다. 전자의 문서 크기는 가로 80.0㎝, 세로 86.3㎝이고 후자는 가로 105.6㎝, 세로69.0㎝이다. 이 문서는 숭유억불정책으로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승려에게 내려진 교지라는 점에게 흥미를 끈다. 【번역 해제】 (2장) 이 글은 1794년(정조18) 4월 8일 정조(正祖)가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화상(畵像)이 봉안되어 있는 해남(海南)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사당에 친히 표충사(表忠祠)와 수충사(酬忠祠)라 사액하며 내린 것이다. 정조는 서문의 말미에서, 지방관들의 요청에 따라 두 사당에 사액하고 해마다 관청에서 제수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명나라 태조가 갑인년(1374)에 인도에서 온 고승 판적달(板的達)에게 글을 하사했던 고사를 좇아, 자신도 갑인년인 1794년 서산대사의 사당에 글을 내리노라고 그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내용을 보면, 불가의 가르침 중에서도 자비가 가장 위대한 것임을 서문의 서두에서 역설한 다음, 서산대사의 행력을 불법의 참구에 매진하며 종풍을 드날린 초기, 전란 중에 승군을 창의하여 나라를 보호한 중기, 전란 후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 불법을 닦으며 열반에 든 후기로 나누어 그 대략을 설명하였다. 이어서 전란에서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한 서산대사의 공이야말로 자비의 참뜻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면벽좌선만 하면서 중생들에게는 아무런 공덕도 끼치지 못하는 다른 승려들과는 다른 것이라 크게 찬탄하였다. 서문 뒤에는 서산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는 명문(銘文)을 붙여 서산대사의 일생과 자비로운 업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한편, 그 공덕이 자손 만대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 이순신(李舜臣), 정충신(鄭忠信) 등 임진왜란 때 공훈을 세운 이들에 대해 문집 발간, 신도비 건립, 사당 사액, 시호 하사, 자손 서용 같은 일련의 선양작업을 펼쳤다. 서산대사의 사당에 사액하고 화상당명을 내린 것 역시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글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것으로, 그 표현 및 내용이 매우 짜임새 있게 정제되어 있으며, 아울러 각종 불교경전 및 조사어록에 나오는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해박한 불교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정조의 문장 법식 및 그가 지은 유가적인 글과는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 작성자 : 공근식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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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 조선시대 초기 / 8책 / 목판본/왕실본 / 계명대학교 도서관 / 대구 달서구 / 선장송나라 경덕사(景德寺)스님 법운(法雲)이 불경을 읽을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음의(音義)를 가려 뽑아 모두 14권으로 편찬한 책을 조선시대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이를 8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불교백과사전의 일종. 목판본(간경도감본) 14권 8책. 보물 제1369호. 이 책은 문헌에 1457년에 100부를 인출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현재까지 계명대외에 국내에 전존(傳存) 사실이 보고되어 있지 않은 유일본이다. 다만 일본의 대마종가문고(大馬宗家文庫)에 동일본이 2책이 소장되어 있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이제 다행히 계명대에 본서가 소장되어, 간경도감판 1종이 새로이 추가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불교학 및 판본학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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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順天 松廣寺 티베트文 法旨) / 고려 충렬왕년간(1275~1308) 추정 / 1건 / 사찰문서/기타류 / 송광사성보박물관 / 전남 순천시 / 낱장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티베트문으로 필사된 법지이다. 송광사 16국사 중 제6세인 원감국사가 당시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문서는 그동안 “팔사파 문자(八思巴 文字)”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 “팔사파 문자(八思巴 文字)”가 아니라 티벳트 문자이며 원나라(대원 울루스) 국가 명령문서의 한 종류인 法旨이고 그 내용은 통행증이나 특혜문서라고 밝혀졌다. 이 문서는 고려시대 당시 원나라와 활발했던 불교교류사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현존하는 원나라와 관계되는 유일한 문서이기도 하다. 【 번역 해제 】 (1장) 『송광사고(松廣寺庫)』 중편(中篇) 「인물부(人物部)」에 의하면 원감국사(圓鑑國師, 송광사 제6조) 충지(沖志)는 1275년 49세 때 충렬왕(忠烈王, 1275~1380 재위)의 허가를 얻어 몽골 수도에 들어갔다. 국사가 몽골에 들어 간 것은 수선사에 속해있던 사원의 토지가 몽골 군대에 몰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원감국사는 몽골 황제에게 상표문(上表文)을 올리게 되었다. 그 때 몽골의 황제는 국사의 상표문의 내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국사의 몽골 입국에 대해서 허가했다. 또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황제는 국사에게 황금실로 짠 가사(袈裟)와 법구류(法具類)를 그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고 있는 송광사 소장 티베트문 문건은 당시 원감국사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몽골 황제의 법지로, 통행증명서 내지 특혜문서의 역할을 하였다. 아직 그 내용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곳이 많지만 말미의 증명하는 내용과 인감이 찍혀 있기 때문에 증명서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문건이 몽골 문자가 아니라 티베트 문자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 몽골에서는 티베트 승려들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쿠빌라이칸(1260~1296)의 제사가 된 티베트의 팍파로되겔첸(1135~1280)은 몽골문자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 문자는 제정자의 이름을 따서 흔히 팍파('Phags pa, 八思巴) 문자라고 하며 우리나라에도 그 문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 공문서 작성에는 티베트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원감국사 당시의 법지 작성에도 티베트문 행서체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쿠빌라이칸 시대에는 고려와 몽골 사이의 교류가 빈번했다. 즉 1290년(충열왕16)에는 쿠빌라이칸의 초청으로 금자경서사를 위해서 승려 35명이 몽골로 들어가고, 이어서 사경승 65명이 또 몽골에 들어갔다. 또한, 1294년(충열왕20)에는 “折思八”이라는 티베트 승려가 고려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몽골과 고려 간에 승려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그에 따른 증명서의 발급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 작성자 : 허일범 )출처 : 문화재청 -
475808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辛景行 淸難功臣敎書 및 關聯文籍) / 조선 선조 37년(1604)~조선 후기 / 일괄(1축,4건,4책) / 국왕문서/교령류 / 영산신씨충익공파종중 / 충북 괴산군 / 권자장신경행(辛景行, 1559∼1623)과 관련하여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모두 8종 9점이다. 이 중 신경행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은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증시교지(贈諡敎旨), 시장(諡狀) 등 5종 6점이며 그의 후손들과 관련이 있는 유물은 청난원종공신록권(淸難原從功臣錄券)과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및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등 3종 3건이다. 신경행은 충청도 청안현(淸安縣) 출신으로 선조 6년(1573)에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같은 왕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키자 순찰사 종사관이었던 신경행은 난을 평정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래서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봉되고 후에 영성군(靈城君)으로 봉해졌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문서는 조선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서훈(敍勳)과 상사(賞賜)를 시행하면서 3등 공신 신경행(辛景行)에게 내린 교서(敎書)이다. 상사 시행은 시점은 선조 37년(1604) 6월이며, 교서 작성 일자는 만력(萬曆) 32년, 즉 선조 37년(1604) 10월이다. 이 공신의 훈호(勳號)는 통칭 청난공신(淸難功臣)인데,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2등은 분충출기적의 청난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 3등은 분충출기청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으로 구분하였으며, 신경행은 3등 공신으로서 분충출기청난공신에 서훈되었다. (작성자 : 김능하) [ 번역 해제 ] 『신경행청난공신교서(辛景行淸難功臣敎書) 및 관련문적(關聯文籍)』 1. 개관 이 문적은 충청북도 괴산군 영산신씨(靈山辛氏) 충익공파(忠翼公派) 종중에 전해온 것으로 조선 선조 때 문신 신경행(辛景行, 1559∼1623)의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증시교지(贈諡敎旨), 시장(諡狀) 등 5종 6점과 신경행의 아들 신면(辛勉)의 청난원종공신록권(淸難原從功臣錄券)과 후손의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및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등 3종 3건이다. 이는 모두 보물 제1380호로 지정되었고,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경행은 충청도 청안현(淸安縣) 출신으로 선조 6년(157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 군수,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키자 순찰사 종사관으로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봉되고, 뒤에 영성군(靈城君)으로 봉해졌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서지 1) 청난공신교서(淸難功臣敎書) 1축 상하단변(上下單邊), 난고(欄高) 35.7cm, 1행(行) 15자(字), 37.0cm×291.2cm (絹本 35.7×200.8cm) 상하변(上下邊)에 주연(朱緣)이 있고, 59행, 15~17자 묵서(墨書). 발급연월일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 날인. 처음과 끝에 감색(紺色) 비단을 덧대어 보강. 2) 충청도병마절도사유서(忠清道兵馬節度使諭書) 1건 상하단변(上下單邊), 난고(欄高) 42.9cm, 1행(行) 9자(字); 46.5cm×128.0cm 3) 사헌부 시호서경(諡號署經)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7.9cm×82.7cm 4) 사간원 시호서경(諡號署經)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8.2cm×84.3cm 5) 증시교지(贈諡敎旨) 1건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58.6cm×94.9cm 6) 조은신공시장(釣隱辛公諡狀) 1책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32.7cm×25.6cm,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주쌍행(注雙行); 41.7cm×31.7cm 7) 청난원종공신녹권(淸難原從功臣錄券)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7.1cm×17.5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9자(字),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 34.2cm×21.2cm 8)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5.0cm×17.1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 34.0cm×21.7cm 9)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1책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4.7cm×17.9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8자(字),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4.0cm×21.5cm 3. 내용 1) 청난공신교서(淸難功臣敎書)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통정대부 행 장흥도호부사 신경행(辛景行)을 청난공신 3등에 책록하고 포상한 교서이다. 청난공신은 1596년(선조29)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평정한 공신이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등의 건의에 따라 1604년(선조37) 6월 25일 녹훈하였다. 공신호는 1등 洪可臣은 ‘奮忠出氣合謀迪義清難功臣’, 2등 박명현(朴名賢)과 최호(崔湖)는 ‘奮忠出氣迪義清難功臣’, 3등 신경행(辛景行)과 임득의(林得義)는 ‘奮忠出氣清難功臣’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난을 평정한 공을 치하하고,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고 한 품계 올려주도록 한다. 그리고 반당(伴倘) 4인, 노비 7구(口), 구사(丘史) 2명를 지급하고 밭 60결(結), 은자(銀子) 5냥,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한다는 내용이다. 2) 충청도병마절도사유서(忠清道兵馬節度使諭書)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임명하면서 할 때 제1부(符)의 밀부(密符)를 내리면서 내린 유서(諭書)이다. 12행 9자로 썼고, 세 군데 ‘諭書之寶’가 찍혀 있다. 밀부란, 병란 등에 대비하여 유사시에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왕이 유수(留守), 관찰사(觀察使), 총융사(摠戎使), 수어사(守禦使), 통제사(統制使), 절도사(節度使), 방어사(防禦使) 등에게 주던 것이다. 모양은 둥글고 납작한 나무패 앞면에 ‘第一符’라 쓰고 뒷면에는 어압을 새겼는데 둘로 나누어 하나는 관리들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궁중에 보관하였다. 3) 사헌부 시호서경(諡號署經)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忠翼)’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사헌부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1811년(순조11)에 발급되었다. 4) 사간원 시호서경(諡號署經)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忠翼)’으로 정하는 데 대하여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1811년(순조11)에 발급되었다. 5) 증시교지(贈諡敎旨) 1812년(순조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6) 조은신공시장(釣隱辛公諡狀) 신경행의 시장(諡狀) 외에, 시호를 받는 과정에 생성된 <시호 망(望)>, 시호를 청원서, 가장(家狀), 신경행을 추모하는 정자 율수당(聿修堂)의 기문과 위 교서와 유시를 필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분충출기청난 공신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행 병조참지 영성군 신공 시장(奮忠出氣淸難功臣贈資憲大夫禮曹判書行兵曹參知靈城君辛公諡狀)> : 병조 참판 김이영(金履永, 1755~1845)이 쓴 신경행의 시장이다. - <시호(謚號) 망(望)> : 신경행이 시호를 받을 때 의망 단자이다. 충익(忠翼), 정민(貞敏), 숙정(肅靖) 세 가지를 올려 ‘충익’으로 낙점을 받았다. - <청난공신 증 예조판서 영성군에 대하여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상언(淸難功臣贈禮曹判書靈城君請謚上言)> : 신경행에게 시호를 내려달라는 청원서와 비답 내용이다. 충청도(忠淸道) 청안(淸安)의 유학(幼學) 신 윤석리(尹錫履) 등의 이름으로 올렸고 참봉(參奉) 홍준모(洪俊謨)가 지었다. 1804년(순조4) 8월 청원하여 11월에 비답을 받았다. - <분충출기청난 공신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행 병조참지 영성군 조은 신공 가장(奮忠出氣淸難功臣贈資憲大夫禮曹判書行兵曹參知靈城君號釣隱辛公家狀)> : 신경행의 가문에서 지은 전기로 1770년(영조 46) 3월에 후손 신택종(辛宅宗)이 지은 것이다. - <율수당기(聿修堂記)> : 신경행의 후손이 그를 추모하며 지은 정자이다. 청안현(淸安縣) 칠보산(七寳山) 아래 군방동(羣芳洞)에 신경행이 은둔하던 별장이 있었는데, 7세손 신택종(辛宅宗)이 옛날 집을 철거하고 가까운 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옛 사당에 그대로 유상을 봉안하고 그 앞에 한 채의 당을 지은 것이다. 명칭은《시경》의 ‘네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을 닦아야 하리라.[無念爾祖 聿修厥徳]’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1774년(영조 50) 7월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인 권진응(權震應)이 명명하고 기문을 지었다. - <분충출기 청난공신 통정대부 행 장흥 도호부사 신경행에게 내린 교서(教奮忠出氣淸難功臣通政大夫行長興都護府使辛景行書) : 앞의 공신 교서를 전사한 것이다. - <수 충청도병마절도사 신경행에게 유시함[諭守忠清道兵馬節度使辛景行]> : 앞의 유서를 전사한 것이다. - <한산 군수 때 상소[韓山郡守時上䟽]>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경행이 한산 군수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을 전사한 것이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신경행이 1592년(선조 25) 9월 10일 한산 군수에 제수되었다. 신경행의 문집 《조은집(釣隱集)》 권2에는 <한산군수를 사직하는 상소[辭韓山郡守疏]>로 되어 있다. 내용 중에 “신이 지금에 한산 군수에서 체직되었으니 의리상 군사를 정비하여 전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가야 마땅합니다.[臣今遞韓山 義當整兵勤王]”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체직된 뒤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서의 제목과 다른 것은 어떤 이유인지 미상이다. 7) 청난원종공신녹권(淸難原從功臣錄券)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5년(선조 38)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주부(主簿) 신면(辛勉)에게 내린 공신 녹권이다. 신면은 신경행의 장자이다. 청난원종공신은 정공신(正功臣) 책봉 1년 뒤에 정공신에 들지 못한 공로자 995을 책봉하였으며 신면은 3등공신에 들었다. 녹권 첫머리에 수급자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고, 다음에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우승지 신 유몽인(柳夢寅)이 전지(傳㫖)를 받들었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이는 선조실록 기사와 일치한다. 다음에 책록 사유를 적고, 3등으로 구분하여 공신 명단을 적고, 말미에 공신으로서의 특전을 적었다. 뒤에 별장으로 공신도감(功臣都監)의 유사 명단이 있다. 8)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공을 세운 보사공신(保社功臣)이 복훈되어 추록한 것을 계기로 1680년(숙종6) 8월 30일 역대의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정국(靖國)·광국(光國)·평난(平難)·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정사(靖社)·진무(振武)·소무(昭武)·영사(寧社)·영국(寧國)·보사(保社) 공신 및 그 적장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참여한 사람들을 수록한 명단이다. 앞에 회맹문(會盟文)이 있고, 뒤에 명단이 있는데, 그 중에 “청난 공신(淸難功臣) 신경행(辛景行)의 적장손 학생 신 신득중(辛得中)”이 있어 신경행의 후손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뒤에 <공훈을 회복할 때 종묘 제사의 축문[復勲時告宗廟祭祝文]>,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와 군민과 한량 등에게 내린 교서[教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복훈도감 계하 별단[復勲都監啓下別單]> 등 부속 문서가 첨부되어 있다. 9)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의 녹훈을 계기로 영조 4년(1728) 7월 18일에 개국공신 이하 각 공신의 적장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그 참여자를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6세손인 신광우(辛光禹)가 참여하여 기록되어 있다. 4. 자료의 가치 공신녹권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는 데다 완전하게 보존된 것도 많지 않다. 특히 이처럼 정공신 녹권과 아들의 원종공신 녹권 및 후손들의 회맹록이 빠짐없이 보존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로써 청난공신의 책록 과정과 포상 규정, 그 영향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사례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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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禮山 修德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腹藏遺物) / 조선시대 / 일괄(17책,1축,37건) / 목판본/사찰본 / 수덕사 성보박물관 / 충남 예산군 / 선장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에 모셔져 있는 목조 삼세불좌상의 불복에서 발견된 법화경을 비롯하여 원각경과 관음경 등의 목판본 불경류 복장유물 일괄. 목판본 불상에서 발견된 전적류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법화경(法華經)>ㆍ<원각경(圓覺經)> 등의 경전과 진언 다라니로서 임란전후에 간행된 목판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복장불서 중에 법화경 판종은 한국판 12종과 중국판 1종 등 모두 13종으로 조사되었는데, 주로 고산 화암사에서 1443년에 성달생 정서본을 저본으로 개판된 화암사판계통이 7종으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갑인자 및 을해자의 금속활자본 복각계통이 3종이 조사되었고, 안심사판 복각 계통의 판본이 1종, 간경도감에서 국역 간행한 언해본의 복각본이 1종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명나라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판이 1종이 포함되어 있다. 원각경은 을해자본 복각본으로 쌍계사에서 1611년에 판각된 판본 1종 3책이 발견되었다. 또한 필사본 고왕관세음경 1책과 복장 조성의 발원 내력을 밝혀 주는 1639년에 쓰여진 <조성기>가 발견되었으며, 복장의 충진용으로 사용된 <보협인다라니> 낱장이 27장이 수습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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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 / 조선 세종 32년(1450) / 1축 / 시고류/시고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권자장이 두루마리는 세종 32년(1450) 명(明)나라 경제(景帝)의 등극(登極)을 알리고자 조선에 사신으로 온 예겸(倪謙)과 예겸 일행을 맞이했던 조선의 원접사(遠接使) 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이 주고받은 시부(詩賦)를 추려 엮은 것이다. 시권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는 예겸과 동시대 사람인 왕숙안(王叔安)이 전서(篆書)로 쓴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이란 제목 글씨가 있고, 다음에는 예겸과 정인지 등이 주고받은 부(賦) 2편과 시(詩) 35수가 친필로 쓰여 있으며 인장이 함께 날인되어 있다. 뒤쪽에는 청(淸) 당한제(唐翰題)와 나진옥(羅振玉)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예겸은 절강(浙江)의 전당(錢塘) 사람으로 자는 극양(克讓), 호는 정존(靜存), 시호는 문희(文僖)로 조선에 왔을 당시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의 직위에 있었으며 약 1개월 동안 머물다 갔다. 이 시권은 대명외교(對明外交)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문학적 교류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친필이란 점에서 조선초기 서예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번역 해제 】 이 자료는 조선 세종 32년(1450)에 정사(正使) 예겸(倪謙, 1415~1479)이 사마순(司馬恂, ?~1466) 등 사신 일행과 함께 명(明)나라 경종(景宗)의 등극조서(登極詔書)를 가지고 왔을 때, 공식적으로 접대를 맡았던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와 주고받았던 시문을 모은 것이다. 윤(閏) 정월 1일 입국했을 때부터 2월 3일 귀국하기까지의 1개월 동안 창화(唱和)한 시문 중 37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다. 권자본(卷子本) 형태로 되어 있으며, 광서(光緖) 을사년(1905)에 개장(改裝)한 것이다. 예겸과 정인지, 신숙주의 시문만이 실려 있고 창화한 내용도 상대의 인품과 문학적 재능을 찬미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겸이 특별히 자신과 관련된 것만을 가지고 귀국한 뒤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경오황화집(世宗庚午皇華集)』에 해당 내용들이 실려 있으며, 신숙주가 지은 작품의 경우에는 그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실려 있는 내용과 일부 글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바, 사행이 끝난 뒤에 원고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대체로 칠언율시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눈이 그치고 난 뒤의 풍경을 읊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와 같은 부(賦), 효녀(孝女) 사월(四月)의 효행을 기린 장편시도 들어 있다. 시편(詩篇)의 뒤쪽에는 청(淸)나라 때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자 화가였던 당한(唐翰, 1816~?)이 경오년(1870)에 쓴 제기(題記), 역시 청나라 때의 금석학자였던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이 을사년(1905)에 쓴 발문이 있으며, 이를 입수한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등이 단기(檀紀) 4291년(1958)에 쓴 감정기가 따로 첨부되어 있다. 이 자료는 간행본이 아닌 원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개인의 필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도 매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004년 5월 7일 보물 제140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작성자 : 권경렬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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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 / 조선 세종 24년(1442) / 1첩 / 시고류/시고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 첩장‘소상팔경’이란 중국 양자강의 지류인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의 빼어난 여덟 경치를 말한다. 세종 24년(1442) 8월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53)은 명나라에서 간행된 《동서당집고첩 東書堂集古帖》에서 남송 영종(寧宗)의 소상팔경시를 보게 되자, 그 시를 베끼고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팔경시권(八景詩卷)’을 만들고, 고려 이인로(李仁老)ㆍ진화(陳?)의 소상팔경시를 붙인 뒤 이영서(李永瑞)에게 서문을 짓게 하고 18명의 문사와 스님에게 청하여 시를 짓고 쓰게 하였다. 안평대군이 만든 ‘팔경시권’의 자취가 이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이다. `비해당’은 안평대군의 호이다. 맨 앞에 명나라 문인 옹정춘(翁正春)이 “해우기관(海宇奇觀)”이라고 쓴 예서제자(隸書題字)가 있다. 이 시첩은 조선시대 소상팔경시와 소상팔경도의 유행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시학사(詩學史)ㆍ회화사에 있어서의 의미가 적지 않으며, 또 조선초기 서예자료로서도 귀중한 필적이다. 【 번역 해제 】 (1첩) 소상팔경은 동정호(洞庭湖) 주변의 빼어난 팔경(八景)을 말한다. 송적(宋迪)이 최초로 그렸다고 전하는데, 평사낙안(안)[平沙落?(雁)]ㆍ원포귀범[遠浦歸帆]ㆍ산시청람[山市晴嵐]ㆍ강천모설[江天暮雪]ㆍ동정추월[洞庭秋月]ㆍ소상야우[瀟湘夜雨]ㆍ연사만(모)종[烟寺晩(暮)鍾]ㆍ어촌석(락)조[漁村夕(落)照]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연간(1171~1197)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본 시첩을 만들게 된 동기는 이영서(李永瑞)의 서문에 기술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1442년(세종24)이다. 현재 시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그림도 있었다. 안견(安堅)이 그린 것으로 한 폭에 그린 것이 아니라 여덟 폭에 각각 그린 것이며 현재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 작성자 : 임재완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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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 / 조선 세종 29년(1447)~세종 31년(1449)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대한교과서㈜ / 서울 서초구 / 선장조선시대 세종이 죽은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게 하고, 세종이 친히 석보(釋譜)의 각 항목을 따라서 우리말로 지은 악장체의 찬불가(讚佛歌)를 주자소에서 금속활자(初鑄甲寅字)로 간행한 가사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권1)의 첫머리에 “부터 백억세계(百億世界)에 화신(化身)야(悧) 교화(敎化)샤미(悧) 리(愷) 즈믄 가견(佳犬)매 비치요미 가리(加悧)니라”라고 한 주석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한교과서 소장본은 권상(卷上)의 1책에 해당되며, 모두 194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5침법으로 장정된 선장(線裝)으로 되어 있으나, 표지 및 실선이 후대의 것으로 보여 근래 새로 개장(改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지에는 별다른 서명(書名)이 보이지 않고 있으나, 우측 상단부에 원래의 소장처를 밝혀주는 장서표가 붙여져있다. 장서표는 인쇄된 표에 ‘일오사/월인천강곡/단(壹五四/月印千江曲/單)’이란 묵서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 묵서로 정리한 불기(佛紀)연대와 원소장자인 ‘묵담소림(黙潭少林)’으로 인쇄되어 있다. 이 장서표로 보아 이 책은 본래 백양사 조실을 지낸 묵담선사가 지닌 유품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권상의 권두서명을 보면 “<월인천강지곡 상(月印千江之曲 上>”으로 국한문이 병기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소장자의 장서인 2개가 날인되어 있다. 장서인(藏書印)은 ‘묵담삼매(黙潭三昧)’와 ‘진가영장(陳家永藏)’으로 판독되어, 앞서 장서표에 기재된 묵담선사의 소장본이 진씨에게 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저자 표시는 없이 ‘기일(其一)’로부터 바로 본문이 시작되어 ‘기일백구십사(其一百九十四)’로 마치고 있다. 본문은 모두 국한문이 혼용되어 있다. 이 책의 전체 크기는 30.8cm×20.6cm이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으로 행 사이에는 계선(界線)이 없다. 반곽의 크기는 세로 22.0cm에 가로 15.5cm이며, 반엽을 기준으로 8항이며, 매 항은 한자와 한글이 혼합되어 17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大黑口)가 보이고 있으며, 어미는 흑어미(黑魚尾)가 서로 내향하고 있다. 그리고 어미사이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는 판심제가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로 권ㆍ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종이의 질은 세종 당시 불경을 인쇄할 때 흔히 사용되었던 가는 가로 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저지(楮紙)로 된 인경지이다. 자체의 경우 한글은 활자본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정방형의 고딕체로 쓰여 있으며, 한자는 매우 해정한 해서체로 중국의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주조된 초주갑인자체이다. 한글에는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인쇄상태 및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활자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세종 29년(1447)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卷上)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권상 1책과 권중의 낙장만이 전해지고 있으나,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종이 죽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발원하기 위해 지은 악장체 찬불가를 한글 활자 및 초주갑인소자로 간행한 것으로, 본래 백양사 조실을 지낸 묵담선사의 장서가 유출되어 현재 대한교과서 상권 1책만이 소장되어 있다. 불교의 서사문학 연구와 한글활자 및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를 사용하고 있어 조선초기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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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삼 상대회도 및 김종한 교지(二十三 霜臺會圖 및 金從漢 敎旨) / 조선 세조 11년(1465)~연산군 9년(1503) / 일괄(1축,6건) / 필사본/등록류 / 경기도박물관 / 경기 용인시 / 낱장김종한의 출신이나 관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종한은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특히 유교 경전에 밝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세조 8년(1462) 8월에 겸예문 성균 박사(兼藝文 成均博士) 박시형(朴始亨),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김종직(金宗直), 예문 대교(藝文 待敎) 허선 등과 함께 경연에서 경서(經書)를 강(講)하자 왕이 술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는데 그가 겨우 생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경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역임했던 관직이 주로 훈도(訓導), 교수(敎授), 전적(典籍), 사성(司成) 등이었던 점도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한편 계회도는 김종한이 사헌부 감찰에 재임하던 성종19년(1488)에 그려진 것이다. 이 계회도는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23명의 사헌부 감찰의 품계와 성명·자·본관과 그들의 아비의 신분·직역과 이름이 기재되러 있어 자료로도 흥미있는 것이며, 조선 초기 계회도의 원형을 살피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로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종한의 부친은 수의교위(修義校尉) 김하(金遐)이며 김종한의 자(字)는 종해(宗海),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한 때 이름을 김종근(金從謹)으로 개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현재 남아있는 교지 5장 중 3장은 이름이 김종근으로 되어 있으며 문과방목에도 이름이 김종근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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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망경보살계본 및 수보살계법(梵網經菩薩戒本 및 受菩薩戒法) / 고려 충렬왕 32년(1306) 추정 / 1첩 / 목판본/사찰본 /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북 청주시 흥덕구 / 절첩장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범망경(梵網經) 중 보살이 지녀야하는 무거운 계(戒)<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종의 경범죄(輕犯罪)에 해당하는 계(戒)<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설명한 불경이다. 목판본 1첩으로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경전은 대승불교(大乘佛敎) 교단의 기본적인 계율서(戒律書)로 널리 준용되어 왔으며, 범망경보살계본(梵網經菩薩戒本)은 흔히 범망경(梵網經)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이 경전은 본래 범본(梵本)이 120권 61품이 있었다는 구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한역본(漢譯本)에 대해서도 예로부터 후진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져 왔으나, 현재는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은 앞면에 범망경이 뒷면에는 수보살계법(受菩薩戒法)이 양면으로 인쇄되어 있는 매우 특이한 판본이다. 앞면에 인쇄된 범망경보살계본(梵網經菩薩戒本)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으로, 권두에 실려 있는 서문의 일부분(3면)이 결락(缺落)되어 있으며 간혹 충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권말에는 사문 승조(僧肇)가 쓴 후서와 원나라 소경(紹瓊)이 대덕(大德) 6년(1306)에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으로 판곽의 높이는 18.5cm이며, 1절의 폭은 9.6cm이다. 본문에는 계선(界線)이 없이 접은 한 면에는 5항(行) 16자(字)씩 배자되어 있으며, 본문의 가운데는 ‘계경(戒經)’이란 판심제(板心題)와 장차(張次)가 새겨져 있다. 전체 분량은 후서(後序)를 포함하여 모두 24장(張) 120절면(折面)으로 되어 있지만, 앞부분에 서문의 3면이 낙장이 되어 뒷면의 계법(戒法)에 있어야 할 발문의 마지막 부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한판은 25행(行)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래부터 절첩장(折帖裝) 형식으로 제책하기 위해서 매 5행마다 행간(行間)을 약간 넓게 배치시킨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판본은 범망경(梵網經)이 중국에서 간행되어 한국으로 전래된 것에 비해 국내에서 간행되었으며, 고려시대 인쇄본 중 드물게 전후의 양면 인쇄된 사례로 인쇄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려말 대표적 유학자인 안향(安珦)의 발원 사실이 불서에 수록되어 있는 특이점을 보이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록 이 책은 원나라(元代)의 판본을 바탕으로 고려말에 다시 독자적으로 찍어낸 것으로 보이나, 서체는 구체(歐體)를 바탕으로 해정한 필치로 쓰여 져 있다. 국내에서는 그 현존본(現存本)이 매우 희귀한 판본으로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불교를 통한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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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 고려 충렬왕 31년(1305) / 1책 / 목판본/사찰본 /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북 청주시 흥덕구 / 선장이 책은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저본으로 당나라 육조 혜능(六祖 慧能)이 해석한 것을 저본으로 고려말에 청주에서 간행된 불경이다. 목판본으로 1책이다. 보물 제 1408호로 지정되어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정본은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구마라집(鳩摩羅什) 역본을 저본(底本)으로 육조 혜능(慧能)이 해석한 주해본을 청주의 원흥사(元興社)에서 판각한 것이다. 권두에는 육조 혜능의 서문이 실려 있고, 서문이 끝나는 다음 행에 비로소 본서명이 나타나 있다. 본서명 다음에는 양나라 소명(昭明)태자가 분장한 ‘법회인유분제일(法會因由分第一)’이 바로 시작되고 있어 응당 기입되어야할 역자(譯者)표시가 빠져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판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중국의 송나라 사찰판을 저본으로 판각된 데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된다. 판식(板式)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본문에 계선이 없으며, 반엽은 8항(行) 17자로 주해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반곽의 크기는 18.7cm×14.0cm이다. 판심부에는 ‘금강경(金剛經)’이라는 약서명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어미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간혹 상하하향흑어미가 보인다. 장 50의 하단에 ‘전일(全一)’이라는 각수명(刻手名)이 유일하게 새겨져 있다. 자체(字體)는 송판에서 보이는 서체이나, 여러 차례 복각된 판본을 복각한 듯 치졸함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마치 13세기 중반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여가에 판각한 판본들에서 보이는 서체를 방불케 한다. 지질(紙質)은 발문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후기로부터 조선전기 간본(刊本)에서 종종 사용된 저지로 보인다. 그리고 전후의 표지는 후대에 개장(改裝)한 것으로 보이며, 표제가 장정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져 전체적인 균형감을 상실하고 있다. 표제는 제첨(題簽) 형식에 ‘불설금강반약파라밀경(佛說金剛般若波羅密經)’으로 되어 있으나, 자세히 보면 복사해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크기는 27.0cm×16.2cm이다. 이 책은 고려 1305년에 청주의 원흥사(元興社)에서 판각 인출된 이후 한 동안 불복(佛腹)에 보관되었다가 근래 발견되어 개장(改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록 전체적으로는 원형이 상실되어 있으나, 고려말기에 간행된 청용사판(靑龍寺板)과 함께 조선전기에 편성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성립과정을 밝혀 줄 수 있는 자료로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의미 있는 판본으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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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소 권48, 64, 83(大方廣佛華嚴經䟽 卷四十八, 六十四, 八十三) / 고려후기 / 3권 3첩 / 목판본/사찰본 /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북 청주시 흥덕구 / 절첩장이 책은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의 주본(周本)을 저본으로 당나라 징관(澄觀)이 주소하고 여기에 송나라 정원(淨源)이 주해한 교장류(敎藏類)의 일종이다. 목판본이며 3권 1책으로 보물 제1409호로 지정되어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통칭되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 중의 하나이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이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은 저자인 정원(淨源)이 의천(義天)에게 상인 서전(徐戩)을 통해 보낸 목판으로 주본(周本) 화엄경을 주해한 주소본(註疏本) 120권을 찍어낸 것 가운데 권48, 64, 83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특히 표지는 상즙(橡汁)으로 염색한 종이를 사용하였고, 중앙의 제첨(題簽)은 금니로 그리고 그 안에 표지서명(簽題) 또한 금니로 기재하였다. 판식의 특징은 상하단변으로 계선이 보이고 있으며, 한 행은 15자씩 배자되어 있는데 상하간의 높이는 23.2cm이다. 한 장은 5면씩 접혀 있으며, 1절의 폭은 10.7cm이다. 이 책은 당나라 징관(澄觀)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송나라 정원(淨源)이 주해한 것이다. 이 판본은 저자인 정원이 당나라 상인 서전을 통하여 의천에게 보낸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당시 송나라와 고려,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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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수간(三賢手簡) / 조선 선조 9년(1576)~선조 18년(1585) / 4첩 / 간독류/간독 / 호암미술관 / 경기 용인시 / 첩장조선중기의 유명한 유학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것이다. 모두 4첩(帖)으로 첫째 첩의 앞쪽에 실린 송익필의 머리말에 의하면, 성혼ㆍ이이가 보내온 편지와 자신의 답장 원고 등을 아들 취대(就大)가 모아 서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98통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각자의 문집인 「구봉집」, 「우계집」, 「율곡전서.」에 실려 있으며, 문집에 실리지 않거나 일부만 실린 것도 31통이 있다.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대략 1560∼1593년이다. 편지의 내용은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문답 형식의 토론으로 사상사적(思想史的)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이밖에 처세(處世)나 일상(日常)에 관한 것도 더러 있다. 글씨 또한 서예사(書藝史)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데, 송익필의 초서(草書)는 또박또박 쓴 단정한 필치이고, 성혼의 행서(行書)는 둥근 필치로써 생기가 넘치며, 이이의 행서는 활달한 필치가 돋보인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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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 / 조선 세종 29년(1447) / 1책 / 목판본/사찰본 / 김민영 / 경기 성남시 분당구 / 선장고려시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제6세주(世主)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1226∼1292)가 원 황제 및 불교 의식에 관한 표문ㆍ소문ㆍ서간ㆍ제문 등을 모아 편찬한 것을 후대에 목판으로 간행한 문집의 일부. 목판본 1책. 김민영 소장. 보물 1459호. 해제 대상본인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는 고려 조계산 수선사 제6세주인 원감국사 충지가 저술한 글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편찬되어 있는데, 다만 뒷부분의 서명에는 ‘해동(海東)’ 2자가 빠져 있다. 앞부분은 주로 원나라 황제와 관련된 표(表)와 소(疏)가 실려 있고, 뒤에는 서명 다음 행에 ‘서답(書答)’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주변 사람과 주고 받은 서간(書簡)과 제문(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본래 ‘운사(雲史)’라는 사람이 소장했던 책으로, 근래에는 서여(西餘) 민영규 선생이 소유했다가 최근 다시 김민영씨에게 이관되었고 보물(145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원감국사 충지의 문집이 현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의 문집적 성격을 지닌 책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고려 중기 대원관계를 비롯하여 불교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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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권8, 9, 10(龍飛御天歌 卷八, 九, 十) / 조선 세종 29년(1447) / 3권3책 / 목판본/왕실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사왕(嗣王)들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세종(世宗)의 선조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ㆍ태조(太祖)ㆍ태종(太宗) 등 6조의 사적(事蹟)을 중국 고대 제왕들의 사례와 비교하고 찬양하여, 조선 건국이 천명(天命)에 의한 것임을 125장(章)으로 나누어 서사체(敍事體)로 노래한 것이다. 한글의 노래와 사자사구(四字四句)의 한시(漢詩)는 세종 27년(1445) 4월에 정인지(鄭麟趾)ㆍ권제(權踶)ㆍ안지(安止) 등이 공동으로 지은 것이며, 왕명에 따라 박팽년(朴彭年)ㆍ강희안(姜希顔)ㆍ신숙주(申叔舟)ㆍ이현노(李賢老)ㆍ성삼문(成三問)ㆍ신영손(辛永孫) 등이 세종 29년(1447)에 한문의 주해(註解)와 음훈(音訓)을 달아 10권으로 완성하자 그해 목판으로 550질(帙)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본서는 전체 10권 중 3권(권8∼10) 3책으로, 권8에는 제59장∼77장이, 권9에는 제78∼97장이, 권10에는 제98∼125장이 수록되어 있다. 자체(字體)는 조선 초기에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이며, 판심(版心)에는 조선초기의 형식인 흑구(黑口)에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초간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판의 책판에서 몇 군데 오각(誤刻)된 장차(章次) 부분은 수정을 거쳐 인출된 것인 듯하다. 본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후 정음(正音)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임과 동시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조선시대 악장문학(樂章文學)의 대표로 평가되고 있으며, 국어학과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전체 10권 중 3권(권8∼10) 3책으로, 권8에는 제59장∼77장이, 권9에는 제78∼97장이, 권10에는 제98∼125장이 수록되어 있다. 자체(字體)는 조선 초기에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이며, 판심(版心)에는 조선초기의 형식인 흑구(黑口)에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초간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판의 책판에서 몇 군데 오각(誤刻)된 장차(章次) 부분은 수정을 거쳐 인출된 것인 듯하다. 본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후 정음(正音)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임과 동시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조선시대 악장문학(樂章文學)의 대표로 평가되고 있으며, 국어학과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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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권3, 4(龍飛御天歌 卷三, 四) / 조선 세종 29년(1447) / 2책 / 목판본/왕실본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과 사왕(嗣王)들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하여 서사체(敍事體)로 지은 악장(樂章)이다. 내용은 선대조, 즉 목조(穆祖) ? 익조(翼祖) ? 탁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太祖)와 아버지 태종(太宗) 등 6명의 사적을 중국의 고대 제왕들의 사례와 비교 찬양하여 왕조의 건국이 일찍부터 천명(天命)에 의하여 정해진 것임을 125장에 나누어 노래한 것이다. 한글로 된 노래와 4자 4구로 된 한시(漢詩)는 세종 27년(1445) 4월에 정인지(鄭麟趾) ? 권제(權?) ? 안지(安止)가 공동으로 지은 것이고, 이에 대한 한문으로 된 주해(註解)와 음훈(音訓)은 세종의 명에 따라 박팽년(朴彭年) ? 강희안(姜希顔) ? 신숙주(申叔舟) ? 이현로(李賢老) ? 성삼문(成三問) ? 신영손(辛永孫)이 세종 29년(1447)에 전 10권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후 정음(正音)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임과 동시에『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조선시대 악장(樂章) 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종(世宗) 29년(1447)에 궁중(宮中)에서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전 10권 가운데 권3과 권4로서, 초간본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25.9 cm×17.6cm이고, 9항 20자에 주쌍행(注雙行)이며 계선(界線)이 있다. 판심(板心)에는 상하흑구(上下黑口)가 있고, 어미(魚尾)는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권3은 앞부분 8장이 결락(缺落)되었고, 권4는 끝부분 1장(第46張)이 결락되었으며, 제45장의 후면(後面) 제6항-9항의 상단부가 1-5자가 단절되었다. 이 책의 권3과 4는 본래 한 책이었던 것을 후에 2책으로 분책한 것이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현존본은 활자본으로 간행한 기록이나 실물은 나타나 있지 않고, 세종 29년에 처음 목판으로 간행한 후 수차에 걸쳐 간행된 목판본이 전한다. 그 중 광해군 4년(1612) 5월의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본과 효종 10년(1659) 12월의 내사기가 있는 본, 영조 41년(1765) 6월의 내사기가 있는 본 등이 전한다. 이 책은 영본이기는 하지만 상태가 양호하고 초간본(初刊本)으로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세종조의 국어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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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 연산군 7년(1501)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홍치십사년신유사마방목(弘治十四年辛酉司馬榜目)」은 연산군(燕山君) 7년(1501)에 시행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의 합격자 명부이다. 생원방(生員榜) 1등에 이수정(李守貞)ㆍ김안국(金安國)ㆍ이정(李涏) 등 5인, 2등에 임세영(林世榮)ㆍ강태수(姜台壽)ㆍ남세환(南世煥) 등 25인, 3등에 송자상(宋自商)ㆍ안효손(安孝孫)ㆍ홍일덕(洪一德) 등 70인이 수록되어 있으며, 진사방(進士榜) 1등에는 김안국(金安國)ㆍ나승손(羅承孫)ㆍ정충량(鄭忠樑) 등 5인, 2등에 박신원(朴臣源)ㆍ이겸(李謙)ㆍ정연(鄭淵) 등 25인, 3등에 김필신(金弼臣)ㆍ이승형(李承亨)ㆍ구첨(具瞻) 등 78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록된 인물 중 시관이었던 남곤(南袞)과 진사방의 1등의 김안노(金安老)의 성명에는 합격자 발표 이후에 죄인이 된 관계로 모두 먹으로 칠해져 있다. 방목(榜目)의 기재사항은 합격자 본인과 가족사항으로 구분하였는데, 본인에 관한 사항에는 응시(應試) 당시의 직위나 신분을 적은 전력(前歷)ㆍ성명ㆍ자(字)ㆍ본관(本貫)ㆍ거주지(居住地)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가족사항에는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권말의 영조 32년(1756) 7월에 8세손 성응(聖應:1699∼1764)이 묵서(墨書)한 지기(識記)로 미루어 본서는 당시 진사시에 합격한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1482∼1520)의 후손가(後孫家)에 전해져 왔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예조(禮曹)에서 직접 간행하여 반포(頒布)한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인 듯하다. 본서는 조선 전기의 과거제도(科擧制度)와 인물사(人物史) 및 서지학(書誌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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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선생집(陶隱先生集) / 조선 태종 6년(1406) / 5권1책 / 목판본/관판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도은선생집(陶隱先生集)」은 고려말기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었던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의 시문집으로 태종(太宗) 6년(1406)에 왕명에 의해 변계량(卞季良)이 편차(編次)하고 권근(權近)이 서문을 붙여 시집(詩集) 3권과 문집(文集) 2권으로 간행한 것이다. 본서의 저자인 이숭인의 자(字)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도은(陶隱)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으며, 그가 작성한 외교문서의 문장은 명나라 태종을 탄복시켰다. 본서의 서문에 의하면 「관광집(觀光集)」ㆍ「봉사록(奉使錄)」ㆍ「도은재음고(陶隱齋吟蒿)」 등의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본서는 고려 말에 이숭인의 주관 하에 등제(登第)한 이방원(李芳遠)이 조선의 태종으로 즉위한 후 어명(御命)으로 처음 편간(編刊)시킨 것이다. 권두에 있었던 명(明) 주탁(周卓)과 정도전의 서문은 결락(缺落)되었으나 권근의 서문은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3권의 시집과 2권의 문집의 내용과 제5권 말미에 이색(李穡)과 정도전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당시 문단의 영수였던 이색(李穡)에 의해 31세 때에 이미 찬양된 바 있고, 권근도 서문에서 그를 굴원(屈原)과 도연명(陶淵明) 등에 비하면서 대가(大家)로 손꼽았다. 본서는 조선 초기의 목판본(木版本)으로 계선(界線)이 없으며 본문의 첩자(疊字)에는 중복표시만 하고 글자를 쓰지 않는 등 고려 판본의 기풍이 남아 있다. 본서와 동일한 판본은 희귀한 편이며, 조선조에 들어 왕명에 의해 간행된 첫번째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문집간행사(文集刊行史)와 서지학(書誌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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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정운역훈 권3~16(洪武正韻譯訓 卷三~十六) / 조선 단종 3년(1455) / 7책 / 활자본/목활자본 / 고려대학교 / 서울 성북구 / 선장이 책은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편찬한 중국음에 대한 한글주음운서로서 조선 단종 3년(1455)에 간행된 책이다. 세종(世宗)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다음에 한국의 한자음(漢字音)을 바로잡기 위하여 세종(世宗) 29년(1477)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했다. 그리고 다시 한자의 중국음(中國音)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하여 당시 명(明)나라에서 새로 엮은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음(音)을 한글로 나타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단종(端宗) 때에 16권 8책으로 완성되었다. 이 책을 편찬한 취지 등은 신숙주(申叔舟)의 문집인『보한재집(保閑齋集)』권 15에 『홍무정운역훈서』가 있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1책인 권1과 권2는 없어지고 권 3에서 16까지 14권 7책만이 남아 있으며,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서 장정ㆍ표지 모두가 최초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홍무정운』은 명(明) 태조 때에 중화아음(中華雅音)을 밝히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라고 하나, 이전부터 써 내려온 『예부운략(禮部韻略)』이 운서(韻書)를 대표하였기 때문에 『홍무정운』은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여 다시 중간(重刊)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글과 한자, 큰 글자는 목활자로, 작은 글자는 갑인자로 찍은 이 책은 권1,2 1책이 없어진 낙질본이라 하더라도 세종의 업적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진본(珍本)인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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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유고(眞逸遺稿) / 조선 세조 13년(1467) / 4권1책 / 목판본/사간본 / 계명대학교 / 대구 달서구 / 선장「진일유고(眞逸遺稿)」는 조선 초에 좌정언(左正言)을 역임한 진일재(眞逸齋) 성간(成侃:1427∼1456)의 시문집으로, 진일재의 사후(死後)에 형인 안재(安齋) 성임(成任:1421∼1484)이 글을 모으고 동생인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이 편집하여 세조 13년(1467)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다. 본서의 저자 성간의 자(字)는 화중(和仲)이며 호(號)는 진일재(眞逸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이었다. 시부(詩賦)와 글씨에 능하였으며, 「궁사(宮詞)」ㆍ「신설부(新雪賦)」 등의 작품과 패관문학(稗官文學)에 속하는 「용부전(慵夫傳)」을 지었다. 본서의 권두에는 성화(成化) 3년(1467, 세조 13) 중양절(重陽節)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쓴 서문과 동년(同年) 5월에 동생 성현이 지은 진일재의 행장(行狀)이 수록되어 있다. 권1∼3에는 시(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4에는 부(賦)ㆍ서(序)ㆍ기(記)ㆍ설(說)ㆍ서후(書後)ㆍ전(傳)ㆍ전(箋) 등의 산문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진일재의 친구였던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1422∼1484)가 천순(天順) 무인년(1458, 세조 4)에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는 진일재와 교유하였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ㆍ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1409∼1481)ㆍ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1437∼1473)ㆍ보진재(葆眞齋) 노사신(盧思愼:1427∼1498)ㆍ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ㆍ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ㆍ송국재(松菊齋) 이파(李坡:1434∼1486)ㆍ사우당(四友堂) 임원준(任元濬:1423∼1500) 등 당대의 명사(名士)들과 주고받은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본서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몇 종 되지 않는 시문집으로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학사상(文學思想)과 서지학(書誌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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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順天 松廣寺 塑造 四天王像 腹藏遺物) / 고려 후기~조선 세조 / 12종 14책 / 목판본/간경도감본 / 송광사 / 전남 순천시 / 선장【1책】 : 과주묘법연화경(科註妙法蓮華經) 권7(卷七) 후진의 구마라집이 한역한 법화경을 저본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문에 주(注)를 달고 과(科)를 부쳐 고려 1317년에 국통 정오가 목판으로 간행한 주해서의 일종이다.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지난 2004년에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목판본 7권 1책이다. 법화경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ㆍ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온전한 경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으로 불리고 있다. 법화경은 모두 3종의 한역본(漢譯本)이 있으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6년에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된 판본으로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수ㆍ당대의 돈황본(敦煌本) 사경은 물론 송대 이후의 판본은 대부분 이 역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 전래된 사경 및 판경 또한 구마라집 역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법화경의 구성은 모두 28품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를 7권으로 제책하였으나, 일본에서는 대부분 8권으로 되어 있어 구분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간혹 본문에 과주를 부쳐 휴대의 편리를 도모할 목적으로 28품 7권을 1첩으로 만든 특이한 판본도 전하고 있다. 현재 이와 유사한 판본은 송광사본 외에도 봉림사본(보물1095호)과 아단문고본(보물918호)이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지정문화재로는 경주 기림사에 1점이 소장되어 있어 모두 4점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송광사본에는 권수제에 경명과 품명 사이에 역자 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어 앞에 소개한 봉림사본과 아단본과는 그 형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제3행에는 품명(品名)이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 행에는 쌍행으로 세주가 처리되어 있는데, 이 또한 앞의 2종에는 빠져 있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상단에는 과주한 요어를 해당 내용에 선으로 연결 표시가 되어 있는 점은 동일하다. 권7은 제24품 「妙音菩薩品」부터 제28품 「普賢菩薩勸發品」까지 모두 5품이 수록되어 있다. 자체는 원판을 번각한 것으로 매우 작은 해서체로 소자로 쓰여 있으며, 지질은 약간 두텁게 뜬 저지로 발문은 잘 보이지 않는 고려 후기 간행된 불경에서 자주 보이는 종이의 특징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정오(丁午)가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행히 끝 부분에 ‘延祐四年丁巳 / 雙弘定慧光顯圓宗無畏國統 丁午’라는 기록은 살아 있어, 발문을 지은 연대와 찬자를 알 수 있다. 비록 발문의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앞부분에서 천태종의 종조인 천태 지의에 대해 존숭을 표하고 이어 이 책을 지어 간행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밝힌 것으로 생각되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중요한 내용에 주해하고 본문의 상단에 연결을 선으로 표시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근래 이와 유사한 판본 3종이 발견된 바 있으나, 이 책에는 무외 정오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판본으로 법화경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여 불교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책】 : 금강비현상록(金剛錍顯性錄) 권3~4(卷三~四) 당나라 담연(湛然, ?~782)이 찬술한 『金剛錍』이라는 저술에 송나라 지원(智圓, 976~1022)이 주석한 주석서를 저본으로 조선시대 세조 1461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목판본이다. 이 책은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지난 2004년에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전체 4권 중 2권 1책만 남아있다. 담연은 중국 당나라 진릉의 형계 출신으로 천보연간 삭발 수도하여 천태 지자의 뒤를 이어 천태교를 중흥한 제6대조이다. 지원은 송나라 봉선(奉先) 청원(靑原)의 제자로 20세에 불가에 입문하여 천태교관을 주로 학습하고 항주 서호의 고산사(孤山寺)에 오랫동안 은거하여 ‘孤山’이란 칭호를 얻었던 천태종 스님이다. 그는 『顯性錄』 4권외에 『科』 1권을 저술하였다. 서명에 보이는 ‘金剛錍’는 담연이 지은 저술의 이름으로 금비에 금강삼매의 금강을 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金錍’는 본래 명의가 맹인 눈의 결막을 수술할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칼을 가리킨다. 그래서 마치 의사가 맹인의 눈을 치료하여 사물을 보이게 하는 것처럼 중생의 미혹한 마음의 눈을 열어주는 의미로 비유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담연이 천태의 입장에서 불성론(佛性論)을 밝힌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지원은 『금강비론』의 요문(要文)을 기록[錄]하여 불성(佛性)의 묘한 의미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현성록(顯性錄)이라 칭하고 있다. 이러한 담연의 『금강비론(金剛錍論)』에서는 법화경의 일체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모두 성불(成佛)한다는 사상과 『대승기신론』의 유식(唯識)사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다. 일체 초목(草木)도 모두 성불한다고 주장하며, 아울러 열반경의 불성은 허공과 같다는 입장으로서 기와 돌과 같은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는 논설에 대하여 반박을 가하고 있다. 이 책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教藏總錄)』권1 대열반경부에는 『현성록(顯性錄)』 4권으로 수록되어 있어 의천 이전에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천태종(天台宗) 중 사명지례(四明知禮)의 산가파(山家派)에 대해 산외파(山外派)의 주장을 전개한 것으로, 각 문구의 해석에 있어서 금강비의 주석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원은 『금강비론』에 대해서 바로 세상 사람들이 열반의 방편 문에 집착하여 기와와 돌은 성품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형계 담연선사가 자비심을 내어 그 전도된 의혹을 불쌍히 여기고 이에 지관(止觀)의 부사의 경계를 의지하여 찰나심(刹那心) 가운데 삼천 법이 갖추어진 바를 밝혀 염(染)과 정(淨), 의보[依]와 정보[正], 원인[因]과 결과[果], 자(自)와 타(他)를 모두 포섭하지 않음이 없으며, 찰나에 이미 두루 하고 불성이 마침내 두루 하면 기와와 돌이 오직 내 마음의 성품임을 체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금강비현성록』은 전체 4권 중에 권3과 권4의 1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자체는 조선시대 세조 때 신경부가 새로 써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고려 원간본과는 많이 다르다. 원간본은 주로 방형의 구양순체인데 비하여 이 책은 고려후기 이후로 유행한 조맹부체로 쓰여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권말의 간행 기록으로 보아 노사신(盧思愼), 해초(海超), 설준(雪峻) 등이 교감하고 신경부(申敬敷)가 판서본을 직접 서사하여 세조 7년(1461)에 간경도감에서 새로 간행한 교장에 해당된다. 이 교장본은 비록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수록되어 있으나, 당시 간행된 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어 현존 유일본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당나라 담연이 찬술한 『금강비』에 지원이 주해한 교장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세조 1461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목판본이다. 현존 유일의 교장본으로 불교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3책】 : 대위덕다라니경(大威德陀羅尼經) 권1~5(卷一~五) 중국 수(隋)나라 때 사나굴다(闍那崛多)가 한역한 다라니경을 고려시대 고종 연간에 판각한 재조대장경판에서 고려후기에 다시 인경한 판본 불경의 일종이다. 이 불경은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지난 2004년에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전체 20권 중 5권 1책만 남아있다. 수나라 596년에 사나굴다(闍那崛多)가 한역한 불경으로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다라니가 지니고 있는 위덕이 어떠한지, 다라니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가지 선악의 사상(事相)에 대해서 말한 경전이다. 이를 줄여서 “위덕다라니경(威德陀羅尼經)” 또는 “대위덕경(大威德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처가 사바제(舍婆提) 대성(大城)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여러 대중들과 함께 있을 때, 아난에게 이 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먼저 부처는 아난에게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된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쉼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경의 제2권에서는 특히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서 불법으로 이끌고 있다. 그와 동시에 내세에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마음이 인색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눈이 맑으며 늘 웃는 낯으로 머리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도리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3권에서는 부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알아들으실 수 있다고 하며, 사람뿐만 아니라 개와 여우, 용과 야차, 귀신 등에게도 설법하여 그들을 불도로 이끌어 준다고 하였다. 부처는 이 세상 그 무엇도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실체가 없는 몸이나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불법에 따라 수행에 전념할 것을 권하였다. 이어서 제4권에서도 자신의 몸이 쉽게 무너지고 마는 공(空)한 것임을 깨달아서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은 수행을 하는 동안에 어떠한 유혹이나 난관에 부딪칠지라도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에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하고 있다. 제5권에서는 다라니를 제시하고 그 공덕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고 있다. 다라니, 즉 진언에는 불법의 요지가 간략히 녹아 있다. 따라서 다라니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말과 생각이 깨끗해지며, 어떠한 의문도 생기기 않으며, 어느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내지 않고 모든 가르침에 통달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이와 같이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공(空)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는데, 공이란 결국 양 극단을 멀리하고 일체의 분별을 초월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 불경의 전반에 걸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공(空)의 이치이다. 세상 모든 것이 공한 것임을 터득하는 것은 대승 불도의 첫째임을 거듭 강조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불법을 믿고 수행한다면 큰 공덕과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된 『대위덕다라니경(大威德陀羅尼經)』은 권1~5의 1책만 발굴되었는데, 발견 당시 전체적으로 훼손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전면적으로 새로 보수하였다. 송광사본에는 권미제만 보일 뿐 간기 부분은 보이지 않고 있어 후쇄할 때 이 부분만 가리고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경은 지질로 보아 고종 27년(1240)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판에서 조선 세조 연간에 후쇄(後刷)한 것으로 판단된다. 부처가 아난에게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된 생각에도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쉼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고려재조대장경판에서 조선 세조 연간에 후쇄한 불경이다. 【4책】 :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纘述) 권5~6(卷五~六) 당나라 기국사(紀國寺)의 사문(沙門) 혜정(慧淨, 578~?)이 법화경(法華經)에 대해서 주석한 장소의 일종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교장도감본을 중수한 목판본이다. 이 교장본은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지난 2004년에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전체 10권 중 2권 1책이 발견되어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판본과 합치면 모두 4권 2책이 현전하고 있다. 법화경은 법화사상을 담고 있는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ㆍ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온전한 경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으로 불리고 있다. 경의 전체 구성을 1경(經) 3단(段), 즉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 등으로 나누자면, 일반적으로 제1「서품」은 서분에 해당하며, 제2품부터 제17품까지는 정종분, 제18품부터 제28품까지는 유통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혜정은 제2품부터 제20품까지는 경의 체를 밝히는 정종분에 해당시키고 후에 제8품은 유통분에 해당시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정종분에 해당되며 권5는 「비유품(譬喩品)」의 주석이고, 권6은 「신해품(信解品)」ㆍ「약초유품(藥草喩品)」ㆍ「수기품(授記品)」의 주석에 해당한다. 혜정은 「비유품」부터 18품을 종(宗)을 열고 널리 일승론(一乘論)을 밝히는 품에 해당시키고 있다. 이 책은 교장도감본을 번각한 것으로 교장도감본의 성격을 제시해주는 자료이다. 송ㆍ요ㆍ일본에서 필사본을 수입하여 고려에서 교감하고 새로 판각용정서본 즉 판서본을 써서 판각한 것이다. 『찬술』 권5~6은 필사자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권1은 남궁례(南宮禮)가 쓰고, 권2는 류사수(柳俟樹)가 판서본을 써서 헌종(獻宗) 즉위년(1095)에 간행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필사자가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고려 교장도감에서 조성한 간기와 필사자로 보아, 이 책은 본래 교장도감(敎藏都監)의 독자적인 판본을 저본으로 중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묘법연화경찬술』은 전체 10권 중에 권5와 권6의 1책만 발견되었다. 이 책은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표지와 본문의 일부에 훼손과 부식이 많아 전체를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였다. 자체(字體)는 고려의 남궁례 등이 필서한 것으로 주로 원형의 구양순체로 쓰여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교장본은 비록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그 이름이 수록되어 있으나, 당시 간행된 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어 현존 유일본이다. 『교장총록(教藏總錄)』의 법화경부에는 총10권으로 되어 있는데, 기존의 보물 제206호로 지정된 권1~2와 합쳐 10권 중 모두 4권이 전해지게 되었다. 『교장총록』에만 그 이름이 나올 뿐 다른 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불교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5책】 : 법화경현찬회고통금신초(法華經玄贊會古通今新抄) 권1~2(卷一~二) 연대(燕臺) 민충사(憫忠寺)의 스님인 전명(詮明)이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법화경에 주석한 규기(窺基)의 『法華經玄贊』에 대해 고금의 여러 주석을 보술(補述)한 교장의 일종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고려 교장도감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연간에 간경도감에서 새로 중수한 판본에 해당된다. 찬자 전명은 당나라 자은(慈恩) 규기(窺基, 632~682)가 찬술한 『법화경현찬』에 대해 고금의 여러 주석을 참작하여 이 책을 찬술한 것이다. 규기의 『玄贊』은 법상종(法相宗)의 유식학(唯識學)의 입장에서 법화경을 해석한 것으로,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의 설에 의거하여 일승(一乘)은 방편(方便)이고, 삼승(三乘)은 진실(眞實)이라는 입장에서,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취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권1의 시작 부분에 법화경의 경문을 3단으로 구분하고, 첫째 『序品』은 서분(序分)에, 둘째 『8品』은 정종분(正宗分), 셋째 『19品』은 유통분(流通分)에 배당하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유통분으로 나누어 풀이한다고 밝히고 있다. 내용은 주로 『법화경』에 대한 제목, 경전을 설하게 된 인연, 품명 등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한 해설이 중심이고, 경전의 서두인 여시(如是)까지를 풀이한 것이다. 이 책의 권2의 마지막에는 『법화현찬』의 내용 가운데 권1에서 『법화경』의 경문 가운데, 경전의 첫 부분인 아문(我聞)의 앞인 ‘여시(如是)’에 해당하는 주석의 내용 가운데 삼취승(三就僧) 대한 풀이를 하였다. 특히 권1과 권2의 말미에는 본문에 등장하는 난자의 음을 반절로 밝히고, 뜻을 간략히 풀이하였다. 이 책의 권수에는 유성(劉晟)이 지은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문 제목 바로 아래에 두 줄로 “송나라 판본에는 서문이 없지만 요나라 판본에는 서문이 있어서 이를 필사하여 새겨서 그 빠진 것을 채워 넣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이 서문은 거란본에 의거해서 필사 보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권2를 중국에서 발굴된 요본과는 판식, 행자수,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거란본을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필사(筆寫)하여 보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권1)의 법화경부(法華經部)에 ‘會古通今抄 十卷 詮明述’로 기재되어 있어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권1ㆍ2의 2권만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법화경현찬회고통금신초』는 전체 10권 중에 권1와 권2의 1책만 발견되었다. 이 책은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표지와 본문의 일부가 훼손되어 전체를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였다. 판제(板題)는 각 장의 경문 속에 ‘玄鈔’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권차와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각 권의 말미에는 음의(音義)가 부록되어 있다. 자체(字體)는 주로 원형의 구양순체로 쓰여 있으며,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교장본은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된 복장전적 가운데 하나로, 비록 당시에 판각한 판본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유일본이다. 특히 이 책은 거란본을 저본으로 서문을 필사하여 보각한 것으로 교장의 구성과 성격을 밝히는 근거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6책】 :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권5~6(卷五~六) 중국 당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제6조인 담연(湛然, 711~782)이 구마라집이 한역한 법화경에 천태 지의가 주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에 주해한 교장의 일종이다. 이 책은 조선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목판본으로 지난 2004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된 복장전적 중 하나이다. 찬자 담연(湛然, 711~782)은 중국 당나라 천태종(天台宗)을 중흥시킨 제6조(祖)이다. 중국 강소성 상주(常州) 진릉현(晉陵縣) 형계(荊溪) 출신으로 형계존자(荊溪尊者), 또는 묘락대사(妙樂大師)와 원통존자(圓通尊者)라 불린다. 그는 유가(儒家)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현랑(玄朗)을 스승으로 하여 천태에 입문하여 율(律)ㆍ선(禪)ㆍ화엄(華嚴)ㆍ유식사상(唯識思想) 등을 깊이 공부하고 강남(江南)에서 천태의 저술을 연구하고 강학에 힘썼다. 천태 지의(智顗, 538-597)가 주석한 『법화문구』(10권)는 587년(禎明元年)에 금릉(金陵) 광택사(光宅寺)에서 강설(講說)한 내용을 관정(灌頂)이 기록한 것이다. 지의 저술에 담연이 찬술한 『법화문구기』는 『교장총록』에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간혹 『법화경문구기』ㆍ『묘법연화경문구』ㆍ『문구기』ㆍ『법화문구소』ㆍ『묘법연화문구소기』ㆍ『묘락기(妙樂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책은 천태대사 지의가 저술한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 가운데 『법화문구』의 주석서로, 담연이 저술한 『법화현의석첨』ㆍ『지관보행전홍결』과 함께 천태종의 기본 전적이다. 이 책은 법화경을 간략하게 분과(分科)하였으나, 담연이 다시 세부적으로 분과하여 과단(科段)을 나누고, 지의가 저술한 내용이 불분명한 곳에 대해서 자세히 해석을 하였다. 권5의 서두에는 『법화론』을 인용하여 그 저술의 구성을 밝히고, 이를 천태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필두로 문답(問答)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권6은 「방편품」의 게송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아함경 등의 내용 등도 인용하여 논지를 전개시킨다. 각각의 경문에 대해 철저히 천태의 입장을 밝히면서, 선악의 인과 및 불성과 죄악의 문제 등도 논의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법화문구기』는 전체 10권 중에 권5~6과 권7~8의 2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표지와 본문의 일부가 훼손되어 전체를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였다. 판수제(板首題)는 각 장의 머리에 ‘妙樂’로 되어 있는데 별서명인 ‘妙樂記’의 약칭으로 판단되며, 그 아래로 권차와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각권의 난외의 전면(前面) 오른쪽 아래에 많은 경판을 새긴 사람들의 명단인 각수(刻手)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자체(字體)를 면밀 살펴보면 원형의 구양순체 등 여러 서체가 혼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간경도감에서 중수하면서 고려 때 간행된 원본에 누락된 내용은 새로 필서(筆書)하여 판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송광사 사천왕상 출토 복장전적 가운데 하나로 천태종의 주요 문헌으로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송광사 복장전적은 대부분 교장(敎藏)의 중수본(重修本)에 해당되는데, 이 책은 특히 간경도감에서 중수시에 원본에 누락된 것을 필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7책】 :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권7~8(卷7~8) 중국 당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제6조인 담연(湛然, 711~782)이 구마라집이 한역한 법화경에 천태 지의가 주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에 주해한 교장의 일종이다. 이 책은 조선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목판본으로 지난 2004년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된 복장전적 중 하나이다. 찬자 담연(湛然, 711~782)은 중국 당나라 천태종(天台宗)을 중흥시킨 제6조(祖)이다. 중국 강소성 상주(常州) 진릉현(晉陵縣) 형계(荊溪) 출신으로 형계존자(荊溪尊者), 또는 묘락대사(妙樂大師)와 원통존자(圓通尊者)라 불린다. 이 책은 지의가 저술한 『법화문구』에 담연이 주석한 『법화문구기』는 『교장총록』에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간혹 『법화경문구기』ㆍ『묘법연화경문구』ㆍ『문구기』ㆍ『법화문구소』ㆍ『묘법연화문구소기』ㆍ『묘락기(妙樂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태 지의(智顗, 538-597)가 주석한 『법화문구』(10권)는 587년(禎明元年)에 금릉(金陵) 광택사(光宅寺)에서 강설(講說)한 내용을 관정(灌頂)이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법화경을 간략하게 분과(分科)하였으나, 담연이 다시 세부적으로 분과하여 과단(科段)을 나누고, 지의가 저술한 내용이 불문명한 곳에 대해서 자세히 해석을 하였다. 예를 들어 금원석원(今圓昔圓)의 같고 다른 점[同異]ㆍ수성(修性)의 삼인불성(三因佛性) 등 천태종의 종조인 지의의 사상을 철저히 규명하였다고 한다. 이 책의 권7에서는 『법화경』 제4 「신해품(信解品)」과 제5 「약초유품(藥草喩品)」에 대해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권8에서는 「수기품」, 「화성유품」, 「오백제자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법사품」, 「견보탑품」, 「제바달다품」, 「권지품」 등 8품에 대한 풀이를 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법화문구기』는 전체 10권 중에 권5~6과 권7~8의 2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표지와 본문의 일부가 훼손되어 전체를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였다. 각권의 난외의 전면(前面) 오른쪽 아래에 경판을 새긴 사람들의 명단인 각수(刻手)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권7의 서명 아래에 흥진(興眞)을 비롯하여 강주(康柱)까지 15인이, 권8의 1장 법기(法琪)에서부터 현□(玄□)까지 14인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고려 때 교장도감에서 판각한 각수로 보인다. 이 책의 자체(字體)를 면밀 살펴보면 원형의 구양순체 등 여러 서체가 혼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간경도감에서 중수하면서 고려 때 간행된 원본에 누락된 내용은 새로 필서(筆書)하여 판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송광사 사천왕상 출토 복장전적 가운데 하나로 천태종의 주요 문헌으로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송광사 복장전적은 대부분 교장(敎藏)의 중수본(重修本)에 해당되는데, 이 책은 특히 간경도감에서 중수시에 원본에 누락된 것을 필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8책】 :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권6(卷六) 당나라의 자은 규기(窺基)가 현장이 번역한 호법(護法)의 『성유식론』을 해설한 교장의 일종으로, 유식학(唯識學)과 불교학의 기초문헌으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경전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고려시대 금산사 광교원본(廣敎院本)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새로 중수한 판본에 해당된다. 당나라의 자은(慈恩) 규기(窺基, 632∼682)가 현장이 번역한 호법(護法, Dharmapāla)의 『성유식론』을 해설한 것으로, 유식학(唯識學)과 불교학의 기초문헌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법상종(法相宗)에서는 근본 경전으로 의지하고 있다. 서문은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과 호법의 『성유식론』, 현장의 삼장을 칭송하고 『성유식론』의 제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내용은 5문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 가르침의 시기[敎時機]로 가르침을 펴기 좋을 때를 논하고, 대승(大乘)이 가르침의 주된 내용임을 밝혔다. 둘째 논의 종체[論宗體]는 「성유식론』의 근본 사상을 밝힌 것으로 유식설을 근본으로 삼고, 사중(四重)의 출체(出體)를 논하였다. 셋째 보살장과 일승에 포함되는 내용[藏乘所攝]은 『성유식론』이 일승(一乘) 사상과 보살장(菩薩藏)을 이끌어내는 길임을 밝혔다. 넷째 유식의 가르침을 설한 시기와 사상가[說敎年主]는 혜개(惠愷)의 『구사론서』에 근거하여 세친 등 10대 논사(論師)를 해설하였다. 다섯째 본문에 대한 해설[本文判釋]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제 대상본인 권6은 서두에서 6가지 심소[六位心所]를 거듭 밝히는데, 전체 51가지이다. 그 가운데 처음은 전체적으로 유식의 가르침을 천양하여 가르침을 일으킬 것을 밝히고 다음으로 이에 대한 해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오변행심소(五遍行心所)인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자성 등을 내용으로 이에 대해 문답을 통하여 여러 논사들의 입장을 유식학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등 자세히 해석하였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는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권3의 성유식론부(成唯識論部)에서 ‘述記 二十卷 或十卷 窺基述’이라 기재되어 있어 권수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권6을 살펴보면 권6이 ‘上半’과 ‘下半’으로 나누어져 있어 권차만 보면 10권이며, 각 권을 상하로 구분한 것을 파악하면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수량은 모두 10권 10책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송광사 사천왕상에서는 전체 10권 중 권6의 1책만이 수습되었다. 권6의 앞부분의 7장 정도는 훼손 상태가 심각하나, 그 이후로는 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근래에 전체적으로 새로 보수를 실시하여 이용에는 편의하다. 지질은 약간의 닥나무 흑피가 보이고 있으나 세조 당시에 불경 인출에 쓰였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의 자체(字體)를 살펴보면, 함께 발견된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仁王護國般若經疏法衡抄)』와 매우 흡사하며, 판식의 특징도 유사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 책 또한 소현(韶顯) 스님의 주관으로 금산사 광교원에서 판각 간행된 교장의 일종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책은 금산사 광교원본(廣敎院本)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중수 복각한 판본에 해당된다. 이 책은 고려시대 소현 스님이 금산사 광교원에서 간행한 교장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판본이다.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간행 범위와 그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9책】 : 성유식론요의등초(成唯識論了義燈鈔) 권3~4(卷三~四) 당나라 치주(淄州) 대운사(大雲寺) 사문(沙門)인 혜소(惠沼)가 찬술한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을 초략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교장도감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판본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교장 문헌이다. 이 책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教藏總錄)』(권3)의 성유식론(成唯識論)부에 ‘了義燈七卷 惠沼 述’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정작 ‘了義燈鈔’는 누락되어 있어 누가 초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초략의 저본인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은 당나라 대운사의 혜소가 찬술하였으며, 모두 7권으로 ‘유식론의등(唯識論義燈)’, ‘유식요의등(唯識了義燈)’, ‘요의등(了義燈)’, ‘의등(義燈)’이라 약칭되기도 한다. 혜소는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제2조이며, 글 중에 규기(窺基)의 설을 조술(祖述)하여 원측(圓測), 원의(圓義), 보광(普光), 혜관(慧觀) 등의 이설과 제가(諸家)의 이설을 일일이 평가하고 배척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요의등』은 유식(唯識)의 3가지 소(疏) 중의 하나인데, 『대정장(大正藏)』 책43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해석하는 가운데 이설(異說)과 관련이 있는 것을 파척하고 아울러 원론(原論)의 바른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명운(西明雲), 요집운(要集雲), 유설(有說), 유석(有釋), 유인운(有人雲), 유해(有解), 유운(有雲), 미상결(未詳決) 등의 명목(名目)을 포괄하고 있는데, 그 중에 유설은 규기를 가리키고, 유석은 원측을 가리키며, 유인운은 보광을 가리키고, 유해는 혜관을 가리키고, 유운은 현범(玄範)을 가리키며, 미상결은 의적(義寂) 등의 설(說)을 가리킨다. 이 책은 곧 유식론주소(唯識論注疏) 중에 가장 난해한 것으로 평가된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성유식론요의등초(成唯識論了義燈鈔)』는 전체 7권 중에 권3과 권4의 1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금산사 광교원에서 판각한 경우는 대체로 거란본을 저본으로 복각 간행되었기 때문에 자체가 고려 흥왕사 간행의 교장본과는 많이 다른 소형의 해정한 서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보인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판식 및 자체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 소현 스님이 금산사 광교원에서 간행한 교장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판본에 해당된다. 따라서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간행 범위와 그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의 하나로 높이 평가된다. 【10책】 : 원각경대소석의초(圓覺經大疏釋義鈔) 권13(卷十三) 종남산(終南山) 초당사(草堂寺)의 규봉(圭峰) 종밀(宗密)선사가 원각경에 대해 대소(大疏)하고 석의(釋義)하여 찬술(撰述)한 교장 문헌을 초략한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교장본이다. 찬자 규봉 종밀선사는 당나라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780)에 과주 서윤현(사천성 성도)에서 태어났다. 종밀은 천부적인 재질을 온 몸에 듬뿍 받고서 태어났는데, 7세부터 10여 년간은 유교의 학문을 배우고, 이어서 18세에서 약 3년간은 재가불자로서 불교의 경론을 배웠다. 그는 장경(長慶) 2년에서 3년에 걸쳐 많은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교장총록에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 6권과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26권, 『원각경약소초』 12권, 『원각경도량수증의(圓覺經道場修證義)』 18권 등의 대표적 원각경 주석서가 있다. 원각경은 크고 방정하고 광대한 원각을 설명함이 모든 수다라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이라는 뜻이다. 지고한 깨달음의 원융불이(圓融不二)한 경지인 원각을 돈교(頓敎)적 측면에서 밝히고, 그 수행과 깨달음의 길을 단계적으로 점교(漸敎)적 측면에서 가르치고 있어서 불교 수행에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이러한 원각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문수, 보현, 보안, 금강장, 미륵, 청정혜, 위덕자재, 변음, 정제업장, 보각, 원각, 현선수 등 12보살들과의 문답을 통해 대원각의 묘리와 그 관행을 설한 것으로서 전체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이 불경은 우리나라 전문 강원의 교과목 중 『금강경』, 『수능엄경』, 『대승기신론』과 함께 사교과의 한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주석서로는 이 경의 제일의 주석가요 유포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당나라 종밀(宗密)의 『대방광원각경대소』를 비롯한 9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원각경대소석의초(圓覺經大疏釋義鈔)』는 전체 13권 중에 맨 끝 권인 권13의 1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이러한 이유로 표지와 본문의 내용 중 일부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권말에는 ‘대안구년계유세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大安九年癸酉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라는 교장도감의 원간기와 행을 달리하여 ‘천순육년임오세조선국간경도감봉교중수(天順六年壬午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重修)’라는 중수 간기가 새겨 있어, 이 책은 고려 1093년(선종10)에 교장도감에서 판각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8년(1462)에 복각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체는 소형의 해정한 구양순체로 되어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楮皮]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당나라 규봉 종밀선사가 원각경에 대해 대소(大疏)하고 석의(釋義)하여 찬술(撰述)한 교장 문헌을 초략하여 고려 교장도감에서 간행한 교장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1462년에 간경도감에서 중수 간행한 목판본이다. 국내에서는 처음 발견된 교장으로 유일본이며, 불교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1책】 :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仁王護國般若經疏法衡抄) 권5~6(卷五~六) 당나라의 불공(不空)이 한역한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에 당나라 양분(良賁)이 찬술한 주석서에 송나라 우영(遇榮)이 법형초(法衡鈔)한 교장의 일종이다. 이 책은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교장 문헌으로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의 하나인데, 고려시대 금산사 광교원에서 소현(韶顯)의 주관으로 간행한 교장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판본이다. 인왕경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일찍이 진나라 법호(法護)가 267년에 『인왕반야경』을 역경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구마라집은 『인왕반야바라밀다경』, 진제가 『인왕반야경』, 그리고 불공 또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을 한역하여 소개되었다. 일찍이 천태종의 지의대사가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궁 안의 대국전과 양택사에서 이에 대해 강설한 이후 최초로 주석서가 찬술되었으며, 이후로 양분(良賁), 길장(吉藏), 원측(圓測), 현범(玄範) 등의 주석이 알려져 있다. 이 불경은 상하권의 전체 8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1 서품(序品), 제2 관여래품(觀如來品), 제3 보살행품(菩薩行品), 제4 이제품(二諦品), 제5 호국품(護國品), 제6 불사의품(不思議品), 제7 봉지품(奉持品), 제8 촉루품(囑累品) 등이다. 이 불경은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의 참다운 호국방법과 정신자세 및 지도자들의 정치철학 등에 관해서 구도자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경전은 각자의 삿된 알음알이와 나쁜 소견을 버리고서 참 지혜를 얻으려는 반야바라밀의 활동이 바로 국가와 국민과 국왕을 성숙시켜서 스스로 자기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경의 핵심 재용인 3공관과 4제설 및 12인연 등의 반야3공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인왕경을 도입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하였으며, 고려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난리를 당하여 이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백고좌법회 등이 성행했다.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도량은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승려와 속인은 물론, 왕실과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인왕경』에 대한 신앙이 가장 열렬하였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仁王護國般若經疏法衡抄)』는 전체 6권 중에 권5와 권6의 1책만 발견되었는데, 복장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다. 근래 전면적으로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였다. 권6의 말미에는 소현 스님이 1092년(大安8)에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발문에 송나라 수도인 변경에서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금산사 광교원(廣敎院)에서 중조(重雕)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고려 선종(宣宗) 9년(1092)에 금산사 광교원에서 중조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중수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체는 조금 특이하게 유려한 해서체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楮皮]만 이용하여 만든 굵은 발문이 보이는 종이이다. 이 책은 대흥왕사 교장도감에서 간행 것이 아니고 금산사 광교원에서 소현(韶顯)대사가 북송의 변경본(汴京本)에 의거하여 1092년에 판각하여 간행한 교장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다시 중수한 판본이다. 따라서 교장본의 판각 성격과 범위를 밝혀주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2책】 :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 권12(卷十二) 중국 송나라 사문인 담응(澹凝)이 『성유식론』에 의경(義景)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교장도감에서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목판본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처음 소개되는 교장 문헌이다. 찬자 담응의 생애나 사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관한 기록으로는 단지 의천의 총록에서 『성유식론(成唯識論)』 주석서들을 소개하면서 “義景鈔二十卷(或十四卷) 澹凝述”, 이어서 “科五卷 從式集 澹凝刪補”라고 했던 내용이 유일하다. 담응이 찬술한 『의경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또한 법상종(法相宗) 계열의 학자로서 인명유식(因明唯識)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각국사 의천은 이 『의경초』를 『성유식론』의 주석서로 그 하위에 분류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책은 규기(窺基, 632~682)의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 대해 주석한 주해서이다. 주지하다시피 『성유식론』은 세친(世親)의 유식30송(頌)에 대한 인도 10대 논사의 해석을 종합해놓은 문헌으로, 규기의 『술기』는 이를 다시 상세하게 해석한 것이다. 담응의 『의경초』는 그 『술기』의 문구들 중에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 내용만을 따라가면서 다시 상세하게 해석한 것이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 전체 20권 중에 권12과 권19의 2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특히 권12는 전체 4장의 분량만이 수습되었을 정도로 결실이 많아 표지와 본문의 내용 중 상당부분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자체는 고려 흥왕사 간행의 교장본에 보이는 해정한 구양순체로 새겨져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담응(澹凝)이 『성유식론』과 규기의 『술기』에 대해 주석한 교장의 일종이다. 서명이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으나, 송광사 사천왕상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수습되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교장본의 전체적 성격과 범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3책】 :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 권19(卷十九) 중국 송나라 사문인 담응(澹凝)이 『성유식론』에 의경(義景)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교장도감에서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목판본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처음 소개되는 교장문헌이다. 찬자 담응의 생애나 사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관한 기록으로는 단지 의천의 총록에서 『성유식론(成唯識論)』 주석서들을 소개하면서 “義景鈔二十卷(或十四卷) 澹凝述”, 이어서 “科五卷 從式集 澹凝刪補”라고 했던 내용이 유일하다. 담응이 찬술한 『의경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또한 법상종(法相宗) 계열의 학자로서 인명유식(因明唯識)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각국사 의천은 이 『의경초』를 『성유식론』의 주석서로 그 하위에 분류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책은 규기(窺基, 632~682)의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 대해 주석한 주해서이다. 주지하다시피 『성유식론』은 세친(世親)의 유식30송(頌)에 대한 인도 10대 논사의 해석을 종합해놓은 문헌으로, 규기의 『술기』는 이를 다시 상세하게 해석한 것이다. 담응의 『의경초』는 그 『술기』의 문구들 중에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 내용만을 따라가면서 다시 상세하게 해석한 것이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성유식론의경초(成唯識論義景鈔)』 전체 20권 중에 권12과 권19의 2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이 책은 권12에 비해 전체 69장이 수습되었을 정도로 분량은 많으나, 권수와 권미의 상당 부분은 훼손이 심한 실정이다. 자체는 고려 흥왕사 간행의 교장본에 보이는 해정한 구양순체로 새겨져 있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담응(澹凝)이 『성유식론』과 규기의 『술기』에 대해 주석한 교장의 일종이다. 서명이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으나, 송광사 사천왕상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수습되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교장본의 전체적 성격과 범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4책】 :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 권3~4(卷三~四) 천태 지의(智顗) 대사가 구마라집이 한역한 법화경에 대해 그 위치와 견해를 광설(廣說)한 내용을 관정(灌頂)이 구술한 교장 문헌의 일종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순천 송광사의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복장전적으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새로 보판한 판본인데, 국내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처음 소개되는 교장본이다. 천태 지의(智顗, 538~597) 대사가 법화경(法華經)을 석명(釋名), 변체(變體), 명종(明宗), 논용(論用), 판교(判敎)의 오강목(五綱目)으로 나누어 그 진리를 강설한 내용으로 줄여서 ‘법화현의(法華玄義)’라고도 한다. 찬자인 지의 대사는 중국 수(隋)나라 때의 승려로 남북조(南北朝)의 불교를 융합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였다. 법화경에 의거하여 오시팔교(五時八敎)의 체계를 세우고, 마하지관의 실천을 가르쳤다. 혜사(慧思) 대사 밑에서 도를 닦았으며, 법화경을 강의하여 선법(禪法)을 보급하고, 뒤에 천태산에서 천태교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저서로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의 법화 3부작이 전하고 있다. 이 책은 개황(開皇) 13년(593) 하안거(夏安居) 때 지의 대사가 강설한 내용을 후에 그의 제자 관정에 의해 정리되어 인수(仁壽) 2년(602) 무렵에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송광사 사천왕상에서는 권3과 권4의 1책이 발견되었는데, 의천의 『교장총록』(권1) 법화경부(法華經部)에서 ‘玄義十卷 智者 說’이라 하여 본래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권3의 내용은 12인연과 십여(十如)의 개합(開合)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무명지(無明支)는 여시성(如是性)에 합하고 행지(行支)는 여시상(如是相)에 합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삼귀(三歸)ㆍ오계(五戒)ㆍ십선(十善)이 모두 마하연이다. 그리고 권4에서는 제불의 성도(成道)와 전법륜(轉法輪)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선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밝히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대수위(大樹位)를 밝히는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수습한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는 전체 10권 중에 권3과 권4의 1책만 발견되었는데, 인출 이후 오랫동안 천왕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습기와 충해로 인해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특히 권수의 상당 부분에 훼손이 심하여 남아 있는 부분을 살려 새로 보수하여 선장으로 제책하다. 자체가 고려 흥왕사 간행의 교장본이 해정한 구양순체인데 비해 약간 유려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간경도감에서 새로 보판한 판본으로 보인다. 지질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인경지로 순수하게 닥나무 껍질만 이용하여 만든 종이이다. 이 책은 수나라의 천태 지의가 법화경에 대해 강설한 내용을 제자 관정이 정리한 교장의 일종이다. 서명이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으나, 송광사 사천왕상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전 10권 중 권3과 권4가 수습되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교장본의 전체적 성격과 범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826
마천목 좌명공신녹권(馬天牧 佐命功臣錄券) / 조선 태종 원년(1401)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장흥마씨중앙종회(마형숙) / 서울 중구 / 권자장이 녹권은 조선 태종 원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 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 上將軍) 마천목(馬天牧 : 1358∼1431)에게 발급한 것으로 필사본이다. 마천목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우왕 7년(1381)에 산원(散員)으로 처음 제수된 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조 초에는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정종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마천목은 정안군(방원;태종)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태종 원년(1401)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토지 80결(結)과 노비 8명 등을 받았는데 이때 받은 녹권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태종 14년(1414)에 장흥군(長興君)으로 책봉되었다. 마천목의 좌명공신녹권은 현재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좌명공신은 47명이 녹훈되었는데, 좌명공신녹권 중 현재 전해오고 있는 것은 마천목 공신녹권 단 한 점뿐이다. 따라서 이 공신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마천목의 좌명공신녹권은 일찍이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즉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조선사료집진」속(續)제2집에 마천목의 좌명공신교서와 좌명공신 녹권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분실되어 그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다가 1992년에 마천목의 영당(影堂)인 충정사(忠靖祠) 중건공사 중 마루바닥 밑에서 발견되었고, 최근(2006)에 보물 146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좌명공신교서 는 아직까지 그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다. 【번역 해제】 (1축) 이 녹권(錄券)은 1401년(태종1)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과 박포(朴苞) 등이 일으켰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마천목(馬天牧, 1358∼1431)에게 내려진 공신녹권(功臣錄券)이다. 이때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른 사람은 총 47명으로 이저(李佇) 외 8명은 1등 공신으로, 이래(李來) 외 2명은 2등 공신으로, 마천목 외 11명은 3등 공신으로, 조박(趙璞) 외 22명은 4등 공신으로 차등을 두어 공신 호를 내렸다. 이 녹권은 표제어, 공신녹권을 사급(賜給)한 과정 및 연유, 공신녹권 사급에 관계한 사람들의 관명(官名) 및 수결(手決)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에는 사급 기관인 공신도감(功臣都鑑)을 명시하였고, 피사급자(被賜給者)인 마천목의 공신 호, 직함 및 성명, 본관 등을 표기하였다. 공신녹권을 사급한 과정은 태종(太宗)이 1401년 1월 15일 구전왕지(口傳王旨)를 통해 당시 공이 있었던 47명에 대해 은전(恩典)을 내려줄 것을 지시하고, 이 왕지를 받아 공신도감에서 적절성 여부와 사급할 은전 등을 검토하여 다시 태종에게 보고하고, 태종이 1401년 1월 24일 왕지(王旨)를 통해 등급에 따라 내려줄 은전을 확정하고 시행할 것을 지시하여 공신도감에서 시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급한 연유는 마천목이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성심을 다하고 죽을힘을 다해 여러 차례 충심을 바쳐 진압하였고 이후 태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충심을 다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내려준 녹권 중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조선 전기 공신을 선정하는 과정 및 연유, 내려준 물목 및 특전 등에 대해 상세하게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서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작성자 : 공근식 )출처 : 문화재청 -
475827
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1.석가삼존상ㆍ16나한상 복장전적(釋迦三尊像ㆍ十六羅漢像 腹藏典籍) / 고려 우왕 4년(1378)~ 숙종 32년(1706) / 일괄 / 목판본/사찰본 / 불갑사 / 전남 영광군 / 선장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사명(寺名)에서도 짐작되는 바와 같이 매우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 땅에 불교가 초전(初傳)되는 과정에서 창건되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로 그 초창의 역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갑사는 백제 중기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후 통일신라 때인 8세기 후반 원성왕 원년(785) 이전에 중창이 있었다는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라는 상량문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 시기에 불갑사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처럼 유서 깊은 영광 불갑사에서 지난 1998년 여름에 태풍으로 천왕문 앞에 서있던 전나무가 쓰러져 천왕문 및 사천왕상에 큰 피해를 입혔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사천왕상의 피해를 조사하던 중에 사천왕상에 복장되어 있던 일부의 불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천왕상의 복장전적을 조사하던 무렵에 불갑사 경내의 명부전 및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는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도 상당수의 불서 및 조성기 등의 복장유물도 함께 수습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다시금 2006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 1470호로 모두 승격되었다. 금번 새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일괄 명칭은「영광 불갑사 불복장전적」이며, 전체 수량은 209종 259점으로 수습 전각을 기준으로 3건으로 구분되어 지정되어 있다. □ 보물 1470-1호 : 팔상전(석가삼존상ㆍ16나한상) 복장전적 팔상전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래 팔상전이란 부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정을 여덟로 나누어 묘사한 불화를 모신 전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화 없이 불상으로 석가불과 여러 권속을 봉안하고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불갑사 팔상전에는 현재 석가불(釋迦佛)을 본존으로 해서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보살 좌상을 모셨다. 그리고 다시 그 옆으로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아난과 가섭존자를 입상으로 모시고, 또 16나한상도 모두 봉안하였다. 그런데 이 16나한상 가운데 명문이 적혀 있어 숙종 32년(1706)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사자상ㆍ시자상ㆍ인왕상을 각각 2분씩 모셨다. 이처럼 석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과 제자 그리고 수호신들이 한데 어우러진 팔상전은 마치 석가재세시의 영축산 법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겼지만 한 때 이 팔상전에는 숙종 28년(1702)에 조성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는 여러 존상에서 고려본 3점 등을 비롯하여 임란 전후로 간행된 국내전적 65종 73점, 중국전적 11종 11점, 그리고 조상발원문 17점이 수습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간행된 불서에는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개판된 고려본「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되어 주목되었다. - 영광불갑사장천로해금강반야바라밀경 이 책은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송나라 야보천로(冶父川老)가 주해한 금강반야바라밀경, 곧 금강경을 저본으로 고려 말에 유구(柳玽)와 강인부(姜仁富) 등의 계청으로 우왕비(禑王妃)가 왕과 원자를 위해 시재하여 1387년에 간행한 불경으로 목판본 1책이다. 현재 영광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인도에서 원시불전이 결집된 이후로, 대승경전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금강경은 대략 2세기 이전에 인도에서 결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에 인도에서는 불탑숭배(佛塔崇拜)가 활발했던 시기로 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에서 탑묘(塔廟)의 석주(石柱)나 입석(笠石)을 시주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으나, 빈곤한 계층은 이처럼 고가의 재물을 시주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자 이 무렵 반야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지혜의 사상을 결집한 대승경전의 근본경전인 금강경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불자 사이에는 이 경전을 매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게 되면, 누구나 동일한 공덕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해 있었다. 그리하여 금강경이 성립된 이후로는 오히려 부유층에서도 이 경전을 항상 수지하여 독송하고자 하는 수행의식이 강조되어, 법화경 및 반야심경과 함께 많은 대중들에 의해 독송되자 점차 동아시아 전역으로 널리 유포되었다. 이처럼 금강경의 역본으로는 현재까지 6종의 역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대장경에는 달마급다(達摩笈多)의 역본이 입장(入藏)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유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저본으로 양나라 소명(昭明) 태자가 32과분으로 분장(分章)하였고, 이후 당나라 혜능 등 5가에 의해서 끊임없는 주해 작업이 있었다. 이 불갑사 소장본은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본을 바탕으로 천로(川老)가 협주한 송판을 저본으로 우왕 13년(1387)에 고려에서 복각․간행한 것이다. 불복에서 나온 관계로 전후의 표지는 결락되어 있는 상태이다. 권두에는 <천로금강경>에 대해서 1179년(순희(淳熙) 기해(己亥))에 송나라 혜장 무진(慧藏 無盡)이 쓴 서문이 실려 있고, 서문이 끝나는 다음 행으로부터 개경게(開經偈)가 시작된다. 게송이 끝나고 이어서 다음 행에 비로소 서명 ‘금강반야파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서명 아래로 ‘○’이 표시되어 있을 뿐 역자나 주해자에 관한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음 행에 서명에 보이는 ‘금강(金剛)’에 대한 협주로부터 천로의 주해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본문의 ‘여시(如是)’에 대한 주해가 시작되어 ‘신수봉행(信受奉行)’에 까지 이르고 있다. 본문의 주해가 끝난 다음 장에는 1161년(소흥(紹興) 신사(辛巳))에 태주 숭도관(崇道觀)인 정진(鄭震)이 쓴 후기가 수록되어 있고, 이어 선월암(禪月庵) 산인 천연(天演)이 쓴 발문이 보이고 있다. 발문의 다음 행 아래로 ‘동량도인 유천지(棟梁道人 惟遷誌)’와 ‘도인 정안각(道人 正安刻)’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저본이 된 송판은 고려 의종 15년(1161)에 천로의 주해본이 완성되자 1179년에 혜장 무진의 서문을 수록하여 유천의 주관으로 정안이 판각하여 송나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원간본의 간행 사실에 이어 고려에서 복각 간행된 사실을 담고 있는 이색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고, 발문의 다음 행으로부터 이 책의 간행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차례로 기입되어 있다. 이를 보면 화주(化主)에는 지성(志成)과 각호(覺毫)가 참여하였으며, 발원자로는 유구, 강인부, 묘정(妙淨), 자연(子珚)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고, 다음에 ‘산인지담 중간(山人志淡 重刊)’과 ‘각지 서발(角之 書跋)’이 기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책은 남송때 간행된 판본을 지담에 의해 그대로 복각되었는데, 다만 복각본인 까닭에 ‘발문만은 각지가 쓴(書跋)’ 것을 한 판에 새겨서 맨 뒤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과 발문의 자체는 서로 확연히 다르게 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경문의 사이사이에는 현토를 묵서로 표기한 구결이 전체에 일관되게 기입되어 있다. 판식(板式)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좌우쌍변(左右單邊)으로 반엽은 10항으로 한 항은 21자씩 새겨져 있다. 판면에는 계선이 없고, 반곽의 크기는 19.0cm×12.5cm이다. 중앙에는 판심이 있으나, 상어미는 마치 초승달처럼 가늘게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로 ‘천로(川老)’라는 약서명이 보인다. 지질(紙質)은 가느다란 발문이 보이는 매우 얇게 뜬 저지로 보아 고려후기로부터 조선 초기 간인본에서 종종 사용된 종이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과 같은 해에 간행된 <화엄경행원품별행소>(보물 제1126호)의 간행 사실에 의하면, 동일한 공덕의 목적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말미의 ‘판유경도금사사(板留京都金沙寺)’란 기록으로 보아 경판은 개성의 금사사(金沙寺)에 보관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천로해금강경> 경판 또한 금사사에 함께 보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송나라 천로가 금강경에 대해 주해하고 송(頌)을 부친 송판을 저본으로 유구와 강인부가 우왕 비(妃)에게 계청하여 고려 우왕 13년(1387)에 왕실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또한 조선전기에 편성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성립과정을 밝혀 줄 수 있는 자료이며,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이 보물 제919호, 974호, 1127호로 지정되어 있어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판본으로 생각된다. - 영광불갑사장묘법연화경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을 저본으로 우리나라에서 휴대에 편리하게 소자로 써서 고려 우왕 13년(1387)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3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법화사상의 핵심 경전인 법화경은 한국 불교계의 근본 경전의 하나로서 불교전문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강의되고 있으며,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 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小字本)도 등장하고 있다. 이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으로 권1에서 권3의 1책에 해당된다. 이 소자본은 전 7권의 내용을 2책으로 제책하여 휴대의 편리를 위해 매우 작은 세소자로 써서 판각한 것이다. 이 책은 불복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표지가 선장(線裝) 형태로 장정되어 있는데, 앞뒤의 표지는 감색을 드린 종이로 완전한 상태로 제책되어 있다. 그리고 본래부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인출한 듯 아주 얇게 뜬 인경지를 사용하여 무게를 가볍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본문 여러 장의 천두부분에 묵서되어 있어 누군가 한 동안 소장해 오던 것을 불복에 시납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수에는 급남(及南)이 지은 서문이 실려 있으며, 서문의 다음에 권1의 권두서명은 제1행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행에 ’온릉개원연사비구 개환 해(溫陵開元連寺比丘 開環 解)‘란 주해자표시가 나타나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의 높이는 크기는 20.2cm×13.3cm이다. 반엽은 14항으로 한 항의 경문은 24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중앙에 판심부는 마련되어 있으나, 별도의 어미는 없으며 다만 ‘법(法)’이란 약서명과 그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기입되어 있다. 자체(字體)는 세소자로 해정한 느낌을 주나 자획에 부분적으로 완결(刓缺)을 보이고 있어 판각 이후 시일이 흐른 뒤에 다시 인출한 후쇄본으로 보인다. 경문의 사이사이에는 가느다란 세필로 구결이 전체에 걸쳐 묵서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판본으로 우왕 8년(1382)에 간행된 보물 제960호, 1383년에 홍법산 백련암에서 간행된 판본, 그리고 정종 1년(1399)에 판각된 보물 제1081호 등이 남아 있으나, 발문만 다를 뿐 판식의 특징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불갑사본은 1382년에 판각된 이후 선초에 다시 인출된 판본으로 보인다. 불갑사본은 고려 소자본 법화경으로 한 항에 24자씩 새겨져 있어 운수하는 스님이 휴대에 편리하도록 7권을 2책으로 제책한 것 중 권1에서 권3에 해당되는 1책 뿐이다. 현재 고려 소자본은 판종도 희귀할 뿐 만 아니라 수량도 많지 않아서 판본학상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 영광불갑사장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 책은 고려시대 백운화상 경한(景閑, 1298~1374)이 임제종 18대 종주인 원나라 석옥(石屋) 청공화상에게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1권을 대폭 증보하고 상하 2권으로 재편하여 우왕 4년(1378)에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선문의 지침서이다. 목판본 2권 1책으로 영광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요체가 되는 과법 칠불로부터 석옥의 제자인 법안(法眼) 선사에 이르는 역대 제불과 조사들의 법어와 게송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완전한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줄인 서명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깨달을 때 그 심성이 바로 부처의 실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에 의하여 자기 마음속에서 그 심성이 자정(自淨)함을 깨닫고 늘 자수(自修)ㆍ자행(自行)하면 곧 불성(佛性)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며, 자기 마음이 바로 불심이 된다는 요지를 밝히고 있다. 본래 백운화상이 입적한 3년 후인 우왕 3년(1377) 7월에 석찬(釋璨)과 달담(達湛)의 주도 아래 비구니 묘덕(妙德)의 시주를 얻어 청주목 흥덕사(興德寺)에서 먼저 주자(鑄字)로 인쇄한 책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현존 최고활자본 ‘직지’ 또는 ‘직지심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갑사본은 주자본이 간행된 이듬해인 1378년에 편찬자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제자인 법린(法隣)과 자명(自明) 등이 모연(募緣)하고 흥덕사 주자본 간행할 때 시주자였던 묘덕과 묘성(妙性) 등이 조연하여 판통예문사 김계생(金繼生) 등의 시주를 받고, 앞서 성사달(成士達)이 쓴 서문에 이색(李穡)의 서문을 추가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때 판하본은 일암(壹庵), 선화(禪和), 천긍(天亘) 등이 썼고 각수로는 종건(宗乾), 참여(旵如), 신명(信明) 등이 참여하였다. 이와 동일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현재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불갑사본은 비록 권수의 서문 부분과 권하의 뒤 부분 일부가 결락되어 있으나, 지질이나 인쇄 상태는 매우 양호한 상태이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17.0cm×13.5cm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반면은 11항으로 되어 있으며, 한 항에는 20자씩 배자되어 있다. 접힌 중앙의 판심에는 위에 하향흑어미(下向黑魚尾)가 주름 잡힌 모습이며, 아래로 ‘심요(心要)’라는 판심제가 그리고 그 아래로 권수 및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불복에 시납할 때 분책하였던 까닭에 전후의 표지를 비롯하여 앞의 서문과 뒤의 발문 및 간기(刊記)면이 빠져 있는 상태이다. - 영광불갑사장선종영가집 당나라 영가 현각(永嘉 玄覺) 선사가 수행인의 입지(立志)와 수선(修禪)의 요결(要訣)에 대해 찬술한 내용을 당나라의 위정(魏靜)이 편집하고, 송나라 행정(行靖)이 주를 달고 정원(淨源)이 과문(科文)한 것을 고려시대 우왕 7년(1381)에 목판으로 간행한 선종의 지침서이다. 목판본 1책으로 현재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불갑사 복장본은 1381년에 충주 청룡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파악되었는데, 불복에서 발견된 까닭에 전후의 표지는 탈거된 상태이며, 책의 전체 크기는 26.7cm×15.6cm이다. 천두(天頭)에는 낙서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이다. 권하의 말미에는 중국본의 후기가 그대로 복각되어 있어, 이 책이 중국본을 저본으로 우리나라에서 복각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에 있어야 할 간기가 떨어져 나간 점이 아쉬움을 주고 있으나, 이미 보물로 지정된 동일본(641호)에 의해서 이 책이 1381년에 충주의 청룡사에서 간행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청룡사판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며 행 사이에는 계선(界線)이 있다. 반곽의 크기는 17.0cm×12.0cm이며, 반엽을 기준하여 9항으로 한 항은 20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흑어미(黑魚尾)가 위쪽에 만 있는데, 하향하고 있는 형식이다. 상어미 아래에는 ‘영가집(永嘉集)’이란 판심제가 보이고 있고, 하어미 아래에는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이처럼 불갑사 복장본은 바로 청룡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전권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나, 다만 권말의 간기 부분이 일실된 점이 유감이다. 현재 산기(山氣) 문고에 소장된 동일본이 보물 제641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귀중한 판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당나라 종밀(宗密)이 신회(神會)의 뜻을 개진하기 위하여 저술한 <法集別行錄>을 바탕으로 고려시대 고승인 지눌(知訥)이 간략하게 줄여서 싣고(節要)하고, 여러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을 인용 비판하여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자 저술하였던 내용을 목판으로 간행한 선종의 불서이다. 목판본 1책으로 현재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이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이다. 지눌은 당나라 종밀(宗密)이 신회(神會)의 뜻을 개진하기 위하여 저술한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간략하게 줄여서 싣고, 여러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을 인용, 비판하면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눌은 서문에서 교(敎)에 의하여 마음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집별행록》에서 번거로운 말을 줄이고 요긴한 강령만을 뽑아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음 닦는 사람들은 진실한 가르침에 의지하고 근본과 지엽을 분명히 알아서 마음을 관조(觀照)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눌의 재편 이래 이 책에 대한 우리나라 고승의 연구 주석서로는 정원(淨源)의 《절요사기분요과(節要私記分要科)》를 비롯, 정혜(定慧)의 《법집별항녹절요사기해(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 조선후기 유일(有一)의 《법집별항녹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추붕(秋鵬)이 지은 사기《私記》도 있었음이 기록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고승 정심(正心)은 이 책으로써 수행인의 지견(知見)을 세우는 지침으로 삼았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전통적 특색과 사상을 규정지어 준 선서(禪書)로 평가될 뿐 아니라, 지눌의 선사상이 분명하게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눌의 제자 혜심이 고려시대에 판각하여 유포하였던 것으로 기록에 보이고 있으나, 이때 간행된 고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불갑사 팔상전의 복장본에는 고려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을 비롯해서 3종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 불갑사 나한상에서 발견된 고간본으로 보이는 판본이 바로 혜심에 의해 유포된 판본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리나라 불교도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어 자주 간행된 결과, 현재까지 전해오는 판본은 대략 유간기본(有刊記本)만 25종 이상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현존 판본 가운데 성종 17년(1486)에 전라도 광주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서 간행된 판본이 보물 제1148호•제122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전기에 이를 한글으로 번역한 언해본이 성암고서박물관 등에 전하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1∼5> 이 책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금강경》ㆍ《원각경》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는 불경을 조선 초기 명필가인 성달생(成達生)이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새종 25년(1443)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5권 1책으로 현재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곧 《능엄경》은 고려 고종 22년(1235)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한 판본으로, 현재 해인사에 그 목판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충선왕 1년(1309)에 소자(小字)로 간행된 묵서 구결이 들어 있는 호접장본(蝴蝶裝本), 공민왕 21년(1372)에 안성 청룡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간본 등이 있다. 조선시대 태종 1년(1401)에 신총이 쓴 대자판본, 사찰본 중에 최고본은 1443년의 성달생(成達生)의 발문이 있는 전라도 화암사판(花岩寺板) 등의 한문본이 보인다. 세조 7년(1461)에 원나라 유측의 능엄경 회해본을 을해자로 간행한 국역 활자본과, 1462년에 간경도감에서 세조의 명으로 새로이 언해하여 간행한 것이 있다. 이밖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 개판되었을 만큼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이 능엄경에 관한 우리나라 고승의 주석서로는 고려시대 보환(普幻)의 《능엄경신과(楞嚴經新科)》 2권과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刪補記)》 2권, 조선후기 유일(有一)의 《능엄경사기(楞嚴經私記)》 1권과 의첨(義沾)의 《능엄경사기》 1권 등이 현존하고 있으며, 고려 소자본 능엄경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간경도감에서 편찬한 언해본을 비롯하여 다양한 판본이 전래되고 있다. 불갑사 복장본은 바로 세종 25년(1443)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이 계환(戒環)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목판으로 간행한 판본이다. 불갑사본은 전체 10권 중에 권1~5의 1책에 해당되며, 전후의 표지는 복장시에 탈거시킨 까닭에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표지 없이 바로 급남(及南)의 서문이 보이고, 이어 권1이 시작되고 있으나, 권1의 첫 장은 떨어져 나가고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권2의 권수제면을 보면, 첫 행의 권수제에 이어 다음 행에 주해자인 계환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권5의 말엽에는 후대 인출시에 시주했던 ‘대시주 채종(大施主 蔡宗)’ 등의 이름이 차례로 묵서 기재되어 있다. 불갑사본의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으로 되어 있으며, 광곽의 크기는 22.2cm×15.0cm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11항이며, 매 항은 22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에 판심은 있으나, 상하에 어미는 없으며 그 위치에 ‘능일(楞一)’ 라는 약서명과 권수가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로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본문의 경문 사이에는 묵서(墨書)로 구결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지질은 조선 초기에 불경을 인쇄할 때에 흔히 사용되었던 가는 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저지(楮紙)인데 약간 염색한 듯 갈색을 띄고 있다. 자체(字体)는 전권이 동일한 서체으로 쓰여져 있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정사(淨寫)된 듯 한데, 이곳에서 동시에 간행된 법화경과는 달리 성달생 1인에 의해서 전체가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권10 말에 수록되어 있는 발문의 기록과도 일치되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묘법연화경언해 이 책은 대승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온릉(溫陵) 계환(戒環)이 요해(要解)하고 일여(一如)가 집주(集註)한 것을 저본으로 세조가 구결을 달고 간경도감에서 번역하여 세조 9년(1463)에 목판으로 간행한 국역불경이다. 목판본 1권 1책이며, 현재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주체나 간행수단에 따라 성달생체판계ㆍ갑인자판계ㆍ을해자판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 비롯해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국역 간행된 언해본 등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많은 복장본 중에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으로 다른 간경도감판과 함께 중세 국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갑사본은 불복에서 발견되었던 까닭에 전후의 표지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나, 본문은 전체적으로는 앞뒤에서 2장 정도의 결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전문(箋文)은 비록 한 장이 탈락되어 있으나, 이어 나타나는 감조관(監造官)의 명단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권수의 진전문에 이어 태종 18년(1418)에 오군 요광효(吳君 姚廣孝)가 쓴 <신주법화경서(新註法華經序)>가 실려 있고, 이어 일여(一如)의 <집주(集註)>, 도선의 <홍전서(弘傳序)>, 급남의 <요해서(要解序)>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급남의 서문 다음에 비로소 권수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 행으로 ‘계환 해(戒環 解)’와 ‘일여 집주(一如 集註)’가 표시되어 있어 이 책이 이들의 업적이 담긴 저본을 바탕으로 국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역 형식은 세조가 친히 경문에 구결을 달고, 한계희 등에 의해서 요해와 집주의 내용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맨 끝에는 반엽 정도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파악되어 후미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알 수 없으나, 한문본에서 보이는 각 권의 종제(終題) 구분표시는 없는 것 같다. 판식(板式)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四周單邊)으로 반엽은 9항으로 한 항은 17자씩 새겨져 있다. 판면에는 계선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반곽의 크기는 21.5cm×18.0cm이다. 중앙에는 판심이 있는데 상하에 대흑구(大黑口)가 있으며, 그 사이에 상하내향흑어미가 보이고 있는데, 조선시대 판본의 전형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다. 특히 어미는 간경도감판 특유의 형식으로 어미의 흑지부분 테두리에 가늘게 여백을 두고 있다. 어미 사이에 ‘법화경(法華經)’이라는 약서명이 보이며, 그 아래로는 권수 및 장수 표시가 새겨져 있다. 지질(紙質)은 가로로 가느다란 발문이 보이는 매우 얇게 뜬 저지로 보아 조선 초기에 주로 간경도감에서 불경 인출에 사용된 전형적인 인경지(印經紙)로 약간의 볏집이 가미된 고정지(藁精紙)로 보인다. - 영광불갑사장묘법연화경 이 책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온릉(溫陵)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저본으로 조선 초기 태종 5년(1405)에 성달생(成達生)과 성개(成槪) 형제가 쓴 판서본을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7권 2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갑사본은 조선 초기 태종 5년(1405)에 명필가인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노스님들의 독서 편리를 위해 중자로 판서본을 써서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판각한 목판에서 인출한 판본으로, 복장본은 권3에서 권5의 1책과 권4에서 권7의 1책 등 2책이 발견되었다. 권4의 권수서명을 보면, 제1항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항에 “온릉개원연사비구 계환 해(溫陵開元蓮寺比丘 戒環 解)”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송나라 계환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불갑사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으로 되어 있어 본래 권자나 접장에 적합한 판식이다. 그래서 현존본을 보면 대부분 선장 형식으로 제책되어 있으나, 일부에는 접장이나 호접장을 방불케 하는 형식으로 제본한 것도 보이고 있다. 반엽을 기준으로 반곽의 크기는 20.8cm×14.3cm이다. 본문은 전체 10항으로 되어 있는데, 한 항의 경문은 20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판심부에 어미는 없으나, 판심제는 위에 ‘법(法)’이란 약칭이 기재되어 있어 다른 계통의 판본에서 보이는 ‘법화(法華)’ 또는 ‘법화경(法華經)’과는 구분되며,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지질은 조선 초기에 불경 인출에 주로 사용되었던 인경지로 매우 얇은 저지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각 권의 말엽에는 시주자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다만 권7의 말미에 권근(權近)이 태종 5년(1405)에 쓴 발문과 김씨 등의 시주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권근의 발문에 보면, 이 책은 조계종 대선인 신희(信希) 등이 오래전부터 법화경을 신봉해 왔는데, 이제 연로하여 눈이 침침하게 되어 독서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이런 노스님을 위해서 글씨를 중자로 써서 간행할 계획이었는데, 그 때 선친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는 중에 있던 성달생이 신회선사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돌아가신 선친의 추복을 기원할 생각으로 아우인 성개와 함께 선사(繕寫)하게 되었다. 선사가 완료되자 도인 신문(信文)이 이를 가지고 전라도 운제현의 안심사로 가서 판각하게 되었던 간행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1405년에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서사한 판서본을 바탕으로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판각 간행한 판본이다. 비록 복장본인 까닭에 표지 등이 산일되고 일부 훼손이 심한 상태이나, 성달생 형제에 의해서 써진 여러 판본 중에 처음으로 쓰여진 것으로 서체에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어, 이미 동일본이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로 평가되고 있을 만큼 조선 초기 불교 판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 영광불갑사장선원제전집도서 이 책은 중국 화엄종의 제5조인 종밀(宗密)이 선교일치를 제창하기 위하여 편찬하였는데 우리나라에 전래 된 이래 불교 전문강원의 사집과 필수과목으로 선정된 교과서로 조선전기 성종 24년(1493)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목판본 2권 2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에는 규봉암판(圭峯菴板, 1486년간)<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가 합철되어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성화이십이년병오하(成化二十二(1486)年丙午夏) 전라도광주무등산규봉암개판(全羅道光州無等山圭峯菴開板)’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으며, 간기에 다음으로 대걸(大桀)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발문에 이어서 ‘서대시주이순기양주(書大施主李順基兩主)’를 비롯하여 간행에 참여했던 명단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이순기(李順基)에 의해서 본문이 단정하게 정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판각에 있어서 선오(善午), 두명(斗明), 신오(信悟) 등에 의해서 판목 작업이 진행되었고, 의경(義敬)에 의해서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중국 화엄종의 제 5조인 종밀(宗密)이 지은 것으로 선교 일치를 제창하기 위하여 편찬한 불서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불교 전문강원의 사집과의 교과서로 채택된 이래 오늘날까지 강원 승려의 필수 과목이 중시되고 있다.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25종 이상이 간행되었는데, 이 중 불갑사 복장본은 1493년에 화암사에서 개판된 최초의 판본으로 중시되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영가진각선사증도가(합철천로금강경) 당나라의 영가(永嘉) 진각(眞覺) 스님이 선가의 요체가 될만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책에 법천(法泉)이 계송하여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초기 세종 6년(1424)에 전라도 문수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목판본 1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현존 판본 중에 불갑사 시왕상의 불복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1424년에 전라도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고려 주자본 계통의 판본을 저본으로 새로 개판한 판본으로 보인다. 문수사에서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사찰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판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좌우쌍변(左右雙邊)으로 광곽의 크기는 16.3cm×12.3cm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10항으로 되어 있으며, 매 항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다. 판심부의 어미는 여타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으로 위쪽에만 흑어미가 매우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상흑어미는 아래쪽을 향해 있으며, 이 사이에 ‘천송(泉頌)’이라는 판심제와 권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본문은 구분 없이 한 책으로 제책되어 있는데, 크기는 23.7cm×14.5cm이다. 이 책은 전후 표지가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권수에 오용(吳庸)이 쓴 서문(序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서문 다음으로 권수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뒤에는 <천로해금강경>이 합철되어 있는데,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본을 저본으로 복각한 판본으로 보인다. 그리고 말미에 환인삼정(幻人杉庭)이 태조 10년(1410) 영락경인(永樂庚寅)에 쓴 발문 보이고 있는데, 이로 보아 <금강경>이 앞서 먼저 개판되어 있다가 이후 세종 6년(1424)에 간행된 <증도가>와 합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판본에는 문수사에서 간행된 사실을 알려주는 간기가 보이지 않고 있으나, <영광불갑사장영가진각선사증도가>의 동일 판본에는 ‘영락갑진(1424)십월일(永樂甲辰十月日) 고창문수사개판(高敞文殊寺開板)’이라는 간기가 후서 다음에 기재되어 있어 간행 사실이 확인된다. 이처럼 이 책에는 <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이 합철되어 있는데, 이 무렵 문수사에서 간행된 다른 판본들과 함께 당시의 사상적 경향 및 문수사의 사격(寺格)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조선 초기 판본으로 극히 일부에만 소장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실정이다. - 영광불갑사장예념미타도량참법 아미타불에게 지극한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 지은 죄업(惡業)을 참회하는 법회의 절차를 수록한 내용으로 원나라 왕자성(王子成)이 집록(集錄)한 것을 고려의 승려 혜랑(慧朗) 등이 우왕 2년(1376)에 간행한 것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성종 5년(1474) 왕실에서 새로운 체제로 편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의식집이다. 목판본 5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염불하고 참회하는 불교의식인 미타신앙(彌陀信仰)의 한 형태로서, 미타신앙과 관계되는 무량수경(無量壽經)ㆍ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ㆍ아미타경(阿彌陀經) 중 아미타경을 독송하거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예경(禮敬)하며 참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이 불경은 본래의 의미는 경전 속에 담긴 이념적인 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미타경을 독송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차차 독송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덕을 중요시하여 송경의식(誦經儀式) 중심으로 의식화하게 되었다. 불갑사 시왕상의 불복에서 발견된 이 책은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가 주선하고 인수대비가 시주하여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종 5년(1474)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권10 말에는 이러한 사정을 기록한 김수온(金守溫)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문 다음에는 시주자가 새겨져 있는데, 말미에는 이 책을 간행하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불갑사본에는 시주질 말미에 4행이 추가 기입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새로운 복각본인지 아니면 마지막 판만을 별도로 보각(補刻)하였는지의 여부가 가려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복각본 중에 이 김수온의 발문과 시주질을 그대로 판각해 붙인 판본이 있어 간혹 원간본과의 혼동을 야기시키고 있다. 특히 연산군 9년(1503)에 해인사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의 경우 학조(學祖)의 발문을 제거하면 원간본과 식별키 곤란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따라서 권말의 시주자가 추가로 기입되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밖에 불갑사 복장본에는 선조 40년(1607)에 전라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간행된 소자본도 함께 발견되었다. - 영광불갑사장월인석보<권23> 석가의 일대기와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노래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월인(月印)’ 두자와 석가의 일대기와 설법을 수록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석보(釋譜)’ 두 글자를 뽑아 서명으로 삼아서 세조 5년(1459)에 간행한 원간본을 저본으로 명종 14년(1559)에 전라도 순창의 무량굴(無量崛)에서 복각 간행한 국역 불경이다. 목판본 1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석가의 일대기와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자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편하여 세조 5년(1459)에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저본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에 따라 석가의 일대기(석가보(釋迦譜)) 중 요긴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詳), 요긴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여(節) 세종 29년(1447)에 편찬한 것이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수양대군이 지어 올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보고 그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으로 같은 무렵에 활자본으로 간행된 바 있다. 불갑사 소장본은 1559년에 전라도 순창의 무량굴(無量崛)에서 복각한 중간본 권23의 1책에 해당되며, 불복에서 발견되어 전후의 표지가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권23의 권두 서명을 살펴보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제23’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제23’이 2행으로 병기되어 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광곽의 크기는 21.3cm×17.0cm이다. 판면에는 계선(界線)이 있으며, 반엽을 기준으로 7항으로 매 항은 본문(월인부(月印部))은 한자와 한글이 혼합되어 14자씩 배자되어 있으며, 석가부(釋譜部)는 위로부터 한자를 내려서 14자~16자로 일정치 않다. 그리고 협주부(夾註部)는 소자쌍행으로 역시 14자로 되어 있다. 판심의 상하에는 대흑구(大黑口)가 보이고 있으며, 어미는 흑어미로 서로 내향하고 있다. 그리고 어미사이에 ‘월인석보(月印釋譜)’ 라는 판심제가 보이고 있고, 그 아래로 권•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지질은 가는 가로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저지(楮紙)와 볖집등이 여러 재료가 혼합되어 있는 열품지(劣品紙)이다. 자체는 한자는 매우 해정한 해서체인 송설체(松雪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한글은 활자본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정방형의 고딕체로 쓰여 있다. 물론 한글에는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전라도 순창의 무량굴(無量崛)에서 1559년에 복각 간행한 판본이다. 그러나 중간본(重刊本)임에도 불구하고 원간본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만큼 정밀하게 복각되었다. - 영광불갑사장육경합부 이 책은 조선시대 초기에 <금강반야바라밀경>ㆍ<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ㆍ<대불정수능엄신주>ㆍ<불설아미타경>ㆍ<관세음보살예문>ㆍ<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 등 여섯 가지 경전을 모아 휴대 및 독경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한 책으로 모아 편찬하고 ‘육경합부(六經合部)’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육경(六經) 가운데 금강경 등 일부 경전만을 수록한 판본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최고본은 조선 초기 명필가인 성달생(成達生)이 서사한 정서본을 바탕으로 세종 6년(1424)에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개판되었으며, 이후 이를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현재까지 대략 20여종 이상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금속활자본도 보이고 있는데, 대부분 임란 이전인 15세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 1.〔묘법연화경(언해) (妙法蓮華經(諺解)〕- 총5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세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일괄 지정되어 있는 판본 가운데 간경도감본 언해불서의 복각 계통의 판본으로는 나주 쌍계사판(인종 1, 1545년간)과 순창 취암사판(선조 1, 1568년간) 2종이다. 2.〔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22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찰판으로는 조선 초기에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판하본을 써서 안심사(태종 5년, 1405), 대자암(세종 4년, 1422), 화암사(세종 25년, 1443) 등에서 간행한 판본과 이를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일괄 지정되어 있는 법화경 판본 가운데 성달생 형제가 판서본을 써서 간행한 계통의 판본으로는 고산 안심사판(1424년간)이 있으며, 또한 고산 화암사판(1443년간)을 비롯하여 이를 저본으로 복각 간행한 간행미상의 판본과 용천사판, 쌍계사판 등 다수 지정되어 있다 3.〔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 총 21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조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로 되어 있는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에 주자소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 계통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신흥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4.〔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15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종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일괄 지정되어 있는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에 주자소에서 간행한 을해자본 계통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용천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5.〔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8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조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한편 법화경 판본 중에 대자로 써서 1470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주관으로 판각 간행한 대자본(大字本)이 한 계통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일괄 지정되어 있는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 성종 1년(1470)에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睿宗)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명필가가 법화경을 대자로 정서한 판하본을 바탕으로 왕실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광흥사판(중종 22, 1527년간)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불서일괄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이 책은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知訥)이 간화선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대략 고려 신종 1년(1198) 이후에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지눌의 사후에 제자 혜심이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함께 그의 유고를 발견하여 고려 고려 고종 2년(1215)에 초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의 주요한 내용은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법계연기설이 이해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는 간화선의 경절문에는 미치지 못하며, 아직도 이에 비하면 낮은 차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광해군 1년(1608)에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간행된 판본 1종이 발견되었다. 이 판본은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 일반적으로 다른 선종관련 불서와 합철되어 간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이 책은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社)를 만들고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을 때,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과 수선사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 저술하게 되었다.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지나치게 국가의 보호속에서 안일과 명리에 빠져 승려 본분을 망각한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크게 걱정한 제자가 수선사의 승려만이라도 수도인 답게 생활하게 하고자 지은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의범인 율문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 중 핵심 내용만을 뽑아 우리나라의 사원 생활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이 책이 저술된 이후로 불교전문강원의 초등과정인 사미과(沙彌科)에서 처음단계로 배우는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6년(1397)에 상총(尙聰)이 태조의 명을 받아 전국 사원의 청규(淸規)로 시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 교과목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승려는 물론 일반 신도까지 배워야 할 기본서가 되었다. 이 현존본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에서 발견된 판본은 대부분이 임란 직후에 간행된 것으로 광해군 1년(1608)에 간행된 순천 송광사판과 인조 13년(1635)에 간행된 전라도 태인 용장사판 등 2종이 발견되었다.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이 책은 송나라의 고승 고봉(高峰) 화상의 법문을 모아 엮은 책으로 선의 요체만을 간추려서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간행 유통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전문강원의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세번째 과목으로 채택되어 널리 독송되었다. 이 책은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 이름을 붙였으며, 책머리에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총 29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가 큰 뜻을 분발하여 조사의 현관을 뚫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고려시대에 간행된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지리산 덕기사에서 정종 1년(1399)에 간행된 판본이 고려본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덕기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대략 30여종의 판본이 전래되고 있는데, 불갑사의 복장본에서는 경상도 문경의 중종 25년(1525)에 심원암(深源菴)에서 개판된 판본 등 3종이 발견되어 보물 제1470호로 지정되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 금강반야바라밀경, 곧 금강경은 벼락을 자르는 무궁한 지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공(空)의 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경전 중에서 공이라는 문자가 한마디도 쓰여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대승과 소승이라는 두 관념의 대립이 성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우리에게 집착 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완성을 이루어 석가가 행한 보시의 정신을 구현하여 일체의 악업을 소멸하는 구제방법을 표방하고 있어, 일찍부터 공덕경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주요 판본으로는 태종 15년(1415)에 한문본(漢文本)이 간행된 이래로 득통(得通)의 설의가 편입된 <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가 세종 24년(1442)에 처음으로 개판되었으며, 그 후 세조 3년(1457)에는 활자본『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의 인출을 보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국의 유명 사찰에서 끊임없이 이 활자본을 복각 또는 재차 복각 간행하여 선교의 근본경전으로 삼았다. 불갑사 복장본에서는 간행연대 미상본(未詳本) 1종이 발견되었다. 간기가 탈락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사항을 알 수 없으나, 세조 3년에 정축대자(丁丑大字)와 갑인중소자(甲寅中小字)로 인출되었던 활자본을 저본으로하여 복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각은 비교적 정교하게 판각되어 있어 활자본의 여러 특징을 보이고 있을 정도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화엄경은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한국불교 소의경전(所義經典)의 하나로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 과정에서 학습되어왔던 최고의 대승경전이다. 현재 한역본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 번역의 60화엄과 실차난타 번역의 80화엄, 반야번역의 40화엄 등 3종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넘어오면서 신라 화엄학이 정립되고 아울러 화엄종이 성립되어 화엄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고 화엄사상이 정립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화엄경은 구례 화엄사의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80권본 화엄사경이다. 불갑사 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은 인조 13년(1635)부터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의 일부인 3책 뿐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이 책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이 경의 제7권에 수록된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235년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한 판본으로, 현재 해인사에 그 목판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309년에 간행된 소자본계통의 구결이 묵서된 판본이 보이고 있으며, 또한 1372년에 안성 청용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간본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태종 1년(1401)에 신총(信聰)이 정서하여 궁실에서 개판한 판본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 사찰본 중에 최고본으로는 1443년에 성달생(成達生)이 직접 판서하고 발문을 부쳐서 전라도 화암사(花岩寺)에서 간행한 판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1457년에 원나라 유측의 능엄경 회해본을 을해자(乙亥字)로 궁중에서 간행한 판본과, 특히 1462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세조의 명으로 국역하여 간행한 것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에는 화암사판 외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이 개판 간행되었을 만큼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불갑사 복장본은 전라도 태인 용장사(龍藏寺)에서 1635년에 간행된 판본이 발견되어 보물 제1470호로 지정되었다.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이 책은 우리나라 불교전문강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로 사집과 과정으로 학습되어 오고 있는 불서로 흔히 ‘대혜서(大慧書)’ 또는 ‘대혜서장(大慧書狀)’, ‘서장(書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나라의 대혜 종고(宗杲)가 간화선법에 바탕을 두고 그에게 법을 물어온 42인에게 사된 견해를 깨뜨리고 정법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 보낸 62통의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사집과 교과목 중 제1의 과목으로 선정하여 중시하게 된 까닭은, 고려의 지눌이 이 책을 보다가 도를 깨친 뒤 간화선 수행에 지침서로 삼았고, 또한 책의 내용이 공부를 시작하는 학승들에게 바른 지견을 심어 주어 그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핵심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현존본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명종 1년(1546)에 간행된 황해도 토산 석두사판(石頭寺板)과 선조 3년(1570)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개판된 판본을 비롯하여 간년미상본 1종 등 모두 3종이 발견되었다. 간년미상본은 모두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사항은 알 수 없어나,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선조 37년(1604)에 개판된 쌍계사판(雙溪寺板)으로 조사되었다. 이 석두사판은 중종 6년(1511)에 전라도 순천의 대광사(大光寺)에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복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광사판은 조선조에 사찰본으로 가장 일찍 개판되었는데, 이후에 간행된 대구 공산본사판(公山本寺, 1543), 하동 지리산의 신흥사판(1537) 등의 동일계통의 모본이 되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원판(元板)의 복각판으로 고려판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권말의 발문에는 원본(元本)의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원나라 스님 몽산화상 덕이(德異)가 편찬한 선(禪) 수행의 지침서로 조선조에 널리 유통된 법어(法語) 가운데 하나이다. 찬자인 몽산 덕이는 고려의 고승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특히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과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와는 깊은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편집한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법어(法語)는 우리나라에 중국 고승의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이 유통될 정도로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고승이다. 그리고 부록의 찬자인 나옹은 혜근(彗勤)이라고 부르며,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던 인물이다. 그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충혜왕 5년(1344)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인 승려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던 인물이다. 불갑사 복장본은 9종의 언해본 중에 1566년에 전라도 순창 취암사(鷲菴寺)에서 간행된 판본이 있다. 순창 취암사에서는 임란 이전에 언해본이 여러 종 간행된 바 있어 그 연유가 매우 주목되는 사찰이다.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이 책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고승인 몽산화상 덕이(德異)가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일체유심조의 입장에서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인ㆍ천의 육범(六凡)과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 등의 사성(四聖)을 합한 10계를 설하여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 성인의 지위에 들어갈 것을 권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만일 사람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성(法界性)을 관하여야 하고, 일체가 오직 마음의 지은 바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마음이란 신령하고 고요하고 묘하여 모든 성현의 조(祖)요 일체법의 종(宗)으로서, 이 마음이 발현되어 육범과 사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셋째, 육도의 중생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을 밝히고 인과법을 믿고 도를 닦아 성인의 과정에 들어갈 것을 밝혔다. 그리고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충렬왕 7년(1281)에 화엄경을 읽으면서 무차무애법식(無遮無碍法食)을 베푼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접장본으로 위에 소개한 판본과는 전혀 상이한 판식을 보이는 계통이다. 그러나 간기(刊記)가 탈락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사항은 알 수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에 간행된 판본이 분명하여 보물 제1470호로 지정되었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이 책은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이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이다. 지눌(知訥)은 당나라 종밀(宗密)이 신회(神會)의 뜻을 개진하기 위하여 저술한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간략하게 줄여서 싣고, 여러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을 인용, 비판하면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눌은 서문에서 교(敎)에 의하여 마음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집별행록>에서 번거로운 말을 줄이고 요긴한 강령만을 뽑아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음 닦는 사람들은 진실한 가르침에 의지하고 근본과 지엽을 분명히 알아서 마음을 관조(觀照)할 것을 강조하였다. 불갑사 팔상전의 복장본에는 고려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을 비롯해서 3종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고려본은 혜심이 판각 유통시킨 고판본의 가능성이 없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밖의 고판본은 <영광불갑사장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며, 그 외에 1570년에 간행된 평안도 해탈사판(解脫寺板)과 1604년의 쌍계사판(雙溪寺板)으로 조사되었다. 《법화령험전(法華靈驗傳)》 이 책은 고려말기에 요원(了圓) 스님에 의해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의 영험담에 관한 내용만을 가려 뽑아 엮은 것이다. 법화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간행되었던 공덕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법화경을 지니고 독경과 사경하는 수 많은 사례를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경전에서 채록하였다. 특히 그는 당나라 혜상(慧詳)이 편찬한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10권과 송나라 종효(宗曉)의 『현응록(現應錄)』 4권, 그리고 고려의 진정(眞淨) 국사의 『해동전홍록(海東傳弘錄)』 4권 가운데 ‘영험설화(靈驗說話)’에 관한 내용 107항목을 가려 뽑아 상하 2권으로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판본으로는 고려 말에 수원 만의사에서 개판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실물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조선조 간본으로 중종 29년(1534)에 전라도 고창의 문수사(文殊寺)에서 개판된 것을 비롯하여 함경도 석왕사판(釋王寺板, 1544년 간)과 전라도 개흥사판(開興寺板, 1652년 간) 등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 불갑사 복장본은 조선시대 1534년에 전라도 문수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조사되었는데, 현재까지 간행된 판본 중에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불설광본태세경(佛說廣本太歲經)》 이 책은 태세경외에도 《불설조왕경(佛說竈王經)》, 《불설안택신주경(佛說安宅神呪經)」, 《불설백민신주경(佛說百愍神呪經)》, 《불설용왕삼매경(佛說龍王三昧經)》, 《불설패목신주경(佛說敗目神呪經)》, 《불설도니경(佛說度尼經)》, 《불설구호신명경(佛說救護身命經)》등 8종의 경문이 수록되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중국불교화가 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전통신앙인 도교와의 접목을 통하여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다. 판본의 경우에 따라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과의 관계도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17세기 이후에 간행된 한문본과 한글 음역본으로 대별되는 판본이 대략 9종 정도로 알려 져 있다. 이 중 불갑사의 복장본은 명종 4년(1549)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개판된 판본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조선조 판본으로는 최고본으로 생각된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은중경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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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2.지장보살상ㆍ시왕상 복장전적(地藏菩薩像ㆍ十王像 腹藏典籍) / 고려 초기~ 조선 효종 5년(1654) / 일괄 / 목판본/사찰본 / 불갑사 / 전남 영광군 / 선장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사명(寺名)에서도 짐작되는 바와 같이 매우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 땅에 불교가 초전(初傳)되는 과정에서 창건되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로 그 초창의 역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갑사는 백제 중기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후 통일신라 때인 8세기 후반 원성왕 원년(785) 이전에 중창이 있었다는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라는 상량문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 시기에 불갑사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처럼 유서 깊은 영광 불갑사에서 지난 1998년 여름에 태풍으로 천왕문 앞에 서있던 전나무가 쓰러져 천왕문 및 사천왕상에 큰 피해를 입혔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사천왕상의 피해를 조사하던 중에 사천왕상에 복장되어 있던 일부의 불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천왕상의 복장전적을 조사하던 무렵에 불갑사 경내의 명부전 및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는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도 상당수의 불서 및 조성기 등의 복장유물도 함께 수습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다시금 2006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 1470호로 모두 승격되었다. 금번 새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일괄 명칭은「영광 불갑사 불복장전적」이며, 전체 수량은 209종 259점으로 수습 전각을 기준으로 3건으로 구분되어 지정되어 있다. □ 보물 1470-2호 : 명부전(지장보살상ㆍ시왕상) 복장전적 명부전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래 이 명부전은 대웅전 왼쪽 옆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각진국사가 중창하던 고려 때는 이 자리에 승당으로 쓰이던 정묵당이 있었다. 또한 그 뒤에는 객사로 쓰던 청풍각(淸風閣)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주초석으로 미루어 보아 청풍각은 대웅전의 크기와 버금갈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삼존상(地藏三尊像)을 봉안하였고, 명부세계에서 지장보살을 도와 사자(死者)를 심판한다는 시왕상과 판관(判官)ㆍ녹사(祿仕)ㆍ사자(使者)ㆍ인왕(仁王) 등을 각각 2분씩 모셨다. 그 가운데 시왕상은 효종 5년(1654)에 조성된 우수한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목조 조각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한편 명부전에는 효종 5년(1654)에 조성한 지장탱화,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업경대(業鏡臺), 목조 동자상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이곳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여러 존상에서 고려본 2점 등을 비롯하여 임란 전후로 간행된 국내전적 60종 88점, 중국전적 8종 9점, 그리고 조상발원문 15점이 수습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간행된 불서에는 고려 초기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본「묘법연화경」(권3) 1권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국역본「금강경언해」가 수습되어 세간에 주목되었다. - 영광불갑사장묘법연화경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을 저본으로 우리나라에서 휴대에 편리하게 소자로 써서 고려 우왕 13년(1387)에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3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법화사상의 핵심 경전인 법화경은 한국 불교계의 근본 경전의 하나로서 불교전문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강의되고 있으며,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 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小字本)도 등장하고 있다. 이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으로 권1에서 권3의 1책에 해당된다. 이 소자본은 전 7권의 내용을 2책으로 제책하여 휴대의 편리를 위해 매우 작은 세소자로 써서 판각한 것이다. 이 책은 불복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표지가 선장(線裝) 형태로 장정되어 있는데, 앞뒤의 표지는 감색을 드린 종이로 완전한 상태로 제책되어 있다. 그리고 본래부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인출한 듯 아주 얇게 뜬 인경지를 사용하여 무게를 가볍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본문 여러 장의 천두부분에 묵서되어 있어 누군가 한 동안 소장해 오던 것을 불복에 시납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수에는 급남(及南)이 지은 서문이 실려 있으며, 서문의 다음에 권1의 권두서명은 제1행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행에 ’온릉개원연사비구 개환 해(溫陵開元連寺比丘 開環 解)‘란 주해자표시가 나타나있다.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의 높이는 크기는 20.2cm×13.3cm이다. 반엽은 14항으로 한 항의 경문은 24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중앙에 판심부는 마련되어 있으나, 별도의 어미는 없으며 다만 ‘법(法)’이란 약서명과 그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기입되어 있다. 자체(字體)는 세소자로 해정한 느낌을 주나 자획에 부분적으로 완결(刓缺)을 보이고 있어 판각 이후 시일이 흐른 뒤에 다시 인출한 후쇄본으로 보인다. 경문의 사이사이에는 가느다란 세필로 구결이 전체에 걸쳐 묵서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판본으로 우왕 8년(1382)에 간행된 보물 제960호, 1383년에 홍법산 백련암에서 간행된 판본, 그리고 정종 1년(1399)에 판각된 보물 제1081호 등이 남아 있으나, 발문만 다를 뿐 판식의 특징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불갑사본은 1382년에 판각된 이후 선초에 다시 인출된 판본으로 보인다. 불갑사본은 고려 소자본 법화경으로 한 항에 24자씩 새겨져 있어 운수하는 스님이 휴대에 편리하도록 7권을 2책으로 제책한 것 중 권1에서 권3에 해당되는 1책 뿐이다. 현재 고려 소자본은 판종도 희귀할 뿐 만 아니라 수량도 많지 않아서 판본학상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 영광불갑사장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금강반야바라밀경》 곧 《금강경》의 경문과 당나라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주해문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세조가 여기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하여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국역 불경이다. 목판본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금강경》은 벼락을 자르는 무궁한 지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공(空)의 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경전 중에서 공이라는 문자가 한마디도 쓰여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대승과 소승이라는 두 관념의 대립이 성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우리에게 집착 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완성을 이루어 석가가 행한 보시의 정신을 구현하여 일체의 악업을 소멸하는 구제 방법을 표방하고 있어, 공덕경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이 불갑사본은 불복에서 발견되었던 까닭에 전후의 표지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나, 본문은 전체적으로는 2장 정도의 결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간경도감판에서 보이는 전문(箋文)과 감조관(監雕官)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으나, 권말에 육조 혜능의 후서는 다행히 전문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권수제면을 보면 첫 행의 권두서명에 이어 다음 행에 ‘어정구결(御定口訣)’이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 행에도 ‘한계희봉 교역(韓繼禧奉 敎譯)’이란 역자 표시도 확실히 보이고 있어, 불갑사본이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의 초쇄본 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이 이와 동일한 판본이면서 성종 때 후인본과는 구별되는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판식(板式)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四周單邊)으로 반엽은 8항으로 한 항은 18자씩 새겨져 있다. 판면에는 계선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반곽의 크기는 22.0cm×15.5cm이다. 중앙에는 판심이 있는데 상하에 대흑구(大黑口)가 있으며, 그 사이에 상하내향흑어미가 보인다. 어미는 간경도감판 특유의 형식으로 어미의 흑지부분 테두리에 가늘게 여백을 두고 있다. 어미 사이에 ‘금강경(金剛經)’이라는 약서명이 보이며, 그 아래로는 장수 표시가 새겨져 있다. 지질(紙質)은 가로로 가느다란 발문이 보이는 매우 얇게 뜬 저지로 보아 고려 후기로부터 조선 초기 불경 인출에 주로 사용된 전형적인 인경지(印經紙)로 보인다. 불갑사본은 당나라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주해가 달린 금강경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으로, 세조 10년(1464)에 세조가 확정한 구결을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하여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불갑사본과 동일한 판본이 규장각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은 성종 때의 후쇄본이거나 잔본이다. 권수제면에 ‘어정구결(御定口訣)’ 등 의 표시가 있는 것은 불갑사본이 유일하여 세조때 언해 간행된 원간초쇄본임이 확인된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다른 국역 불경과 함께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6∼10> 이 책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금강경》ㆍ《원각경》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는 불경을 조선 초기 명필가인 성달생(成達生)이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새종 25년(1443)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5권 1책으로. 현재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곧 《능엄경》은 고려 고종 22년(1235)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한 판본으로, 현재 해인사에 그 목판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충선왕 1년(1309)에 소자(小字)로 간행된 묵서 구결이 들어 있는 호접장본(蝴蝶裝本), 공민왕 21년(1372)에 안성 청룡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간본 등이 있다. 조선시대 태종 1년(1401)에 신총이 쓴 대자판본, 사찰본 중에 최고본은 1443년의 성달생(成達生)의 발문이 있는 전라도 화암사판(花岩寺板) 등의 한문본이 보인다. 세조 7년(1461)에 원나라 유측의 능엄경 회해본을 을해자로 간행한 국역 활자본과, 1462년에 간경도감에서 세조의 명으로 새로이 언해하여 간행한 것이 있다. 이밖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 개판되었을 만큼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이 능엄경에 관한 우리나라 고승의 주석서로는 고려시대 보환(普幻)의 《능엄경신과(楞嚴經新科)》 2권과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刪補記)》 2권, 조선후기 유일(有一)의 《능엄경사기(楞嚴經私記)》 1권과 의첨(義沾)의 《능엄경사기》 1권 등이 현존하고 있으며, 고려 소자본 능엄경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간경도감에서 편찬한 언해본을 비롯하여 다양한 판본이 전래되고 있다. 불갑사 복장본은 바로 성종 19년(1488)에 계환(戒環)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박경(朴耕)이 직접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판본이다. 이 불갑사본은 전체 10권 중에 권6에서 10의 1책에 해당되며, 전후의 표지는 복장시에 탈거시킨 까닭에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표지 없이 바로 권6이 시작되고 있으며, 첫 항의 권두제에 이어 다음 항에 주해자인 계환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권10의 말미에는 성종 24(1493)년에 김열경(金悅卿)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문에 이어 시주자와 간기가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불갑사본의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되어 있으며, 광곽의 크기는 22.3cm×15.5cm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12항이며, 매 항은 22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에 판심이 있는데, 상하로 대흑구가 보이고 그 사이에 내향흑어미가 자리하고 있다. 어미 사이에 ‘능육(楞六)’이라는 약서명과 권수가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로 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지질은 조선 초기에 불경을 인쇄할 때에 흔히 사용되었던 가는 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저지(楮紙)인데 약간 염색한 듯 갈색을 띄고 있다. 자체(字体)는 전권이 동일한 서체으로 쓰여져 있어 어느 한사람에 의해서 정사(淨寫)된 듯하다. 권10 말에 수록되어 있는 간기면에 ‘어모장군 박경서(禦侮將軍 朴耕書)’라는 한 줄의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그가 바로 판하본을 쓴 인물임은 발문에 능해자박경서일부(能楷者朴耕書一部), 자해정연(字楷精硏), 간재시어정미춘(刊梓始於丁未春), 흘우무신추(訖于戊申秋), 전공기필(鐫功旣畢)” 의 기록과도 일치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간행 연대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문제를 보이고 있는데, 간기에는 ‘홍치원년무신(弘治元年戊申,1488)’으로 되어 있으나, 김열경의 발문 연대는 ‘홍치육년계축(弘治六年癸丑, 1493)’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보물 1248호로 지정되어 있는 《호림본(권1-4)》의 간년(刊年)은 1488년으로 되어 있다. 발문의 내용을 보면, 박경이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정미년인 1487년 봄에 판각에 착수하여 무신년(1488) 가을에 일단 완료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이 간행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지희(智熙) 대사가 임자년(1492) 가을에 김열경에게 발문을 의뢰하여 그 다음해 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의 순서가 뒤바뀌어서 약간의 혼동을 주고 있으나, 이를 정리해 보면 이미 1488년에 인출해 놓은 상태에서 6년 후에 발문을 추록하여 제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영광불갑사장대전화상주심경 이 책은 반야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반야심경>에 대해 대전선사 요통(了通)이 주해한 것을 태종 11년(1411)에 전라도 고창 문수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목판본 1책이며, 현재 영광 불갑사 소장되어 있다. 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불경이다. 불갑사본은 이 중 대전(大顚)선사 요통(了通)이 <반야심경>에 주를 편입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411년에 전라도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개판되었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이와 동일한 판본이 송광사를 비롯하여 9부 정도가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문수사판을 저본으로 전라도 익산 상원사에서 복각한 판본이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종 7년(1666)에 강원도 신흥사에서 체제가 다른 새로운 판본이 개판된 바 있다. 이 불갑사본은 불복장에서 발견된 까닭에 앞뒤의 표지가 몹시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표지는 종이 위에 비단을 덧 부친 방식이다. 표지를 넘기면 바로 권수에 ‘마가반야파라밀다심경서(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序)’가 보이고, 다음 항에 ‘대전선사요통주(大顚禪師了通注)’라는 주해자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이어 서문이 시작되고 있으며, 서문이 끝난 다음 장에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이란 별도의 서명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서명 표시의 다음 항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주해는 서명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형식은 먼저 요통의 주해를 제시하고 다음에 ‘금강경운(金剛經云)’ 또는 ‘달마운(達磨云)’으로 방증한 서적을 흑지에 음각한 묵개자(墨蓋子)로 표식하고 그 아래로 인용한 내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주해 대상어는 2항을 합쳐 대자로 쓰고, 주해는 그 아래로 2항으로 구분하여 식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이 끝난 말미에는 짤막한 발문이 수록되어 있고, 이어 ‘영락신묘(1411)계하 장고창현문수사(永樂辛卯(1411)季夏 藏高敞縣文殊寺)’란 간기가 보이고 있으며, 다음 항에는 시주자가 기입되어 있다. 이 시주면의 끝에는 ‘화주 신공(化主 信空)’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발문에 있는 ‘공선중간(空禪重刊)’이란 내용과 상호 연결이 되어 있는 듯한데 이들이 동일인물인지는 단언키 어렵다. 어쨌든 1411년에 이 책을 간행하는데 있어서 신공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문수사에서 개판될 무렵에 <천로해금강경>과 영가진각선사의 <증도가>도 같은 시기에 간행되어 이 사찰의 사상적 경향을 이해하는데 시사점을 주고 있다. - 영광불갑사장묘법연화경 이 책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온릉(溫陵)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저본으로 조선 초기 태종 5년(1405)에 성달생(成達生)과 성개(成槪) 형제가 쓴 판서본을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목판본 7권 2책이며, 현재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갑사본은 조선 초기 태종 5년(1405)에 명필가인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노스님들의 독서 편리를 위해 중자로 판서본을 써서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판각한 목판에서 인출한 판본으로, 복장본은 권3에서 권5의 1책과 권4에서 권7의 1책 등 2책이 발견되었다. 권4의 권수서명을 보면, 제1항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다음 항에 “온릉개원연사비구 계환 해(溫陵開元蓮寺比丘 戒環 解)”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송나라 계환의 주해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불갑사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으로 되어 있어 본래 권자나 접장에 적합한 판식이다. 그래서 현존본을 보면 대부분 선장 형식으로 제책되어 있으나, 일부에는 접장이나 호접장을 방불케 하는 형식으로 제본한 것도 보이고 있다. 반엽을 기준으로 반곽의 크기는 20.8cm×14.3cm이다. 본문은 전체 10항으로 되어 있는데, 한 항의 경문은 20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판심부에 어미는 없으나, 판심제는 위에 ‘법(法)’이란 약칭이 기재되어 있어 다른 계통의 판본에서 보이는 ‘법화(法華)’ 또는 ‘법화경(法華經)’과는 구분되며,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지질은 조선 초기에 불경 인출에 주로 사용되었던 인경지로 매우 얇은 저지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각 권의 말엽에는 시주자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다만 권7의 말미에 권근(權近)이 태종 5년(1405)에 쓴 발문과 김씨 등의 시주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권근의 발문에 보면, 이 책은 조계종 대선인 신희(信希) 등이 오래전부터 법화경을 신봉해 왔는데, 이제 연로하여 눈이 침침하게 되어 독서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이런 노스님을 위해서 글씨를 중자로 써서 간행할 계획이었는데, 그 때 선친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는 중에 있던 성달생이 신회선사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돌아가신 선친의 추복을 기원할 생각으로 아우인 성개와 함께 선사(繕寫)하게 되었다. 선사가 완료되자 도인 신문(信文)이 이를 가지고 전라도 운제현의 안심사로 가서 판각하게 되었던 간행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1405년에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서사한 판서본을 바탕으로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판각 간행한 판본이다. 비록 복장본인 까닭에 표지 등이 산일되고 일부 훼손이 심한 상태이나, 성달생 형제에 의해서 써진 여러 판본 중에 처음으로 쓰여진 것으로 서체에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어, 이미 동일본이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로 평가되고 있을 만큼 조선 초기 불교 판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 영광불갑사장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이 책은 수륙재(水陸齋)의 제반 의식에 필요한 절차의 요점만을 간결하게 정리한 내용을 연산군 4년(1498)에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 의례에 관한 불서이다. 목판본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설회인유(設會因由)>편에서 무차법회의 개념을 밝히고 시방의 모든 성인이 강림하기를 빌고 있는데, 이렇게 차례로 37편의 의식문을 수록하고 있고, 각 편에는 삽화를 수록하여 의식을 행할 때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이 나옴으로써 이전의 산만하고 번잡하였던 재의 의식이 통일되고 간소화되었으며, 지금도 각 사찰에서 수륙재를 행할 때 이 책을 기준으로 하여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에 견성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42종 이상의 많은 종수가 개판되었던 사실을 보이고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이 중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연산군 4년에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모두 9종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중 불갑사 소장 무량사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반엽을 기준으로 변란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의 크기는 29.5cm×21.0cm이다. 반면은 7항으로 되어 있는데, 한 항의 경문은 17자씩으로 배자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흑어미(黑魚尾)가 모두 내향 형식으로 되어 있다. 판심제는 위에 ‘미타참(彌陀懺)’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권수는 상어미 아래에 장수는 하어미 아래에 각각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수가 되어 있는데, 표지도 그때 개장된 것으로 보인다. 표제는 ‘미타참문(彌陀懺文)’으로 묵서되어 있다. - 영광불갑사장영가진각선사증도가 당나라의 영가(永嘉) 진각(眞覺) 스님이 선가의 요체가 될 만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책에 법천(法泉)이 계송을 붙여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조선 초기 세종 6년(1424)에 전라도 문수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목판본 1권 1책이며,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당나라의 영가(永嘉) 진각(眞覺) 스님이 불교의 요체가 될 만한 내용을 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서 이 책을 수입하여 선가(禪家)의 지침서로 활용한 듯 몇 차례에 걸쳐서 간행한 바 있다. 지금 쉽게 눈에 보이는 판본은 영가대사의 누이로 알려져 있는 정거(淨居)의 주해(注解)와 법천(法泉)의 계송(繼頌)이 들어 있는 판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현존 판본 중에 불갑사 시왕상의 불복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1424년에 전라도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고려 주자본 계통의 판본을 저본으로 새로 개판한 판본으로 보인다. 문수사에서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사찰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판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좌우쌍변(左右雙邊)으로 반곽의 크기는 16.8cm×12.0cm이다. 반엽을 기준으로 10항으로 되어 있으며, 매 항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다. 판심부의 어미는 여타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으로 위쪽에만 흑어미가 매우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상흑어미는 아래쪽을 향해 있으며, 이 사이에 ‘천송(泉頌)’이라는 판심제와 권장수가 표시되어 있다. 본문은 구분없이 한 책으로 제책되어 있는데, 크기는 26.0cm×18..0cm이다. 이 책은 전후 표지가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권수에 오용(吳庸)이 쓴 서문(序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서문 다음으로 권두제가 나타나고 있다. 말미의 중국본의 후서 다음에 ‘영락갑진(1424)십월일(永樂甲辰十月日) 고창문수사개판(高敞文殊寺開板)’이라는 간기가 수록되어 있어, 이 책이 문수사에서 1424년에 간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 책은 현존 판본 중에 불갑사 시왕상의 불복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1424년에 전라도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고려 주자본 계통의 판본을 저본으로 새로 개판한 판본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244호와는 달리 <증도가>만 수록되어 있으며, 인쇄 상태로 보아 후대에 인출한 후쇄본으로 보인다. 이 무렵 문수사에서 간행된 다른 판본들과 함께 당시의 사상적 경향 및 문수사의 사격(寺格)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조선 초기 판본으로 극히 일부에만 소장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실정이다. -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 1.〔묘법연화경(언해) (妙法蓮華經(諺解)〕- 총5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세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가운데 간경도감본 언해불서의 복각 계통의 판본으로는 나주 쌍계사판(인종 1, 1545년간)과 순창 취암사판(선조 1, 1568년간) 2종이다. 2.〔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22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찰판으로는 조선 초기에 성달생과 성개 형제가 판하본을 써서 안심사(태종 5, 1405년), 대자암(세종 4, 1422), 화암사(세종 25, 1443년) 등에서 간행한 판본과 이를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의 법화경 판본 가운데 성달생 형제가 판서본을 써서 간행한 계통의 판본으로는 고산 안심사판(1424년간)이 있으며, 또한 고산 화암사판(1443년간)을 비롯하여 이를 저본으로 복각 간행한 간행미상의 판본과 용천사판, 쌍계사판 등 다수 지정되어 있다 3.〔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 총 21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조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의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에 주자소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 계통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신흥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4.〔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15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종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의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에 주자소에서 간행한 을해자본 계통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용천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5.〔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총 8책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두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은 계환(戒環)의 주해가 들어 있는 송나라 판본 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휴대의 편리를 도모한 소자본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독자적 판본이 다수 출현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현재 대략 16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이들 판본의 계통은 참여 주체나 간행 수단에 따라 성달생판본계ㆍ갑인자판본계ㆍ을해자판본계ㆍ대자판본계ㆍ간경도감판본계로 크게 가름된다. 이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고려시대에 개판된 소자본(小字本) 비롯해서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본 등 각 계통의 법화경 불서 모두 43종이 발견되었다. 단일 경전으로 불갑사 한 곳에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되고 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소자본은 휴대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소자로 판각하여 2책으로 제책한 것이다. 또한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경도감에서 언해 간행된 판본은 조선시대 법화경언해 불서의 기준본으로 가장 정형미를 갖춘 선본(善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자본으로는 조선 초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세종 32, 1450년간)과 을해자본(세조 1, 1455~1461년간) 등이 있으며, 또한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한편 법화경 판본 중에 대자로 써서 1470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주관으로 판각 간행한 대자본(大字本)이 한 계통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묘법연화경일괄>의 법화경 판본 중에 조선 초기 성종 1년(1470)에 정희왕후가 세조와 예종(睿宗)의 명복을 기원할 목적으로 명필가가 법화경을 대자로 정서한 판하본을 바탕으로 왕실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복각(또는 재복각) 간행한 광흥사판(중종 22, 1527년간)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한 다수의 판본이 지정되어 있다. -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불서일괄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이 책은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知訥)이 간화선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대략 고려 신종 1년(1198) 이후에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지눌의 사후에 제자 혜심이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함께 그의 유고를 발견하여 고려 고려 고종 2년(1215)에 초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의 주요한 내용은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법계연기설이 이해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는 간화선의 경절문에는 미치지 못하며, 아직도 이에 비하면 낮은 차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광해군 1년(1608)에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간행된 판본 1종이 발견되었다. 이 판본은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 일반적으로 다른 선종관련 불서와 합철되어 간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이 책은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社)를 만들고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을 때,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과 수선사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 저술하게 되었다.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지나치게 국가의 보호속에서 안일과 명리에 빠져 승려 본분을 망각한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크게 걱정한 제자가 수선사의 승려만이라도 수도인 답게 생활하게 하고자 지은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의범인 율문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 중 핵심 내용만을 뽑아 우리나라의 사원 생활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이 책이 저술된 이후로 불교전문강원의 초등과정인 사미과(沙彌科)에서 처음단계로 배우는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6년(1397)에 상총(尙聰)이 태조의 명을 받아 전국 사원의 청규(淸規)로 시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 교과목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승려는 물론 일반 신도까지 배워야 할 기본서가 되었다. 이 현존본 중에 불갑사의 시왕상에서 발견된 판본은 대부분이 임란 직후에 간행된 것으로 광해군 1년(1608)에 간행된 순천 송광사판과 인조 13년(1635)에 간행된 전라도 태인 용장사판 등 2종이 발견되었다.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이 책은 송나라의 고승 고봉(高峰) 화상의 법문을 모아 엮은 책으로 선의 요체만을 간추려서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간행 유통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전문강원의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세번째 과목으로 채택되어 널리 독송되었다. 이 책은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 이름을 붙였으며, 책머리에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총 29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가 큰 뜻을 분발하여 조사의 현관을 뚫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고려시대에 간행된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지리산 덕기사에서 정종 1년(1399)에 간행된 판본이 고려본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덕기사판을 비롯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대략 30여종의 판본이 전래되고 있는데, 불갑사의 복장본에서는 경상도 문경의 중종 25년(1525)에 심원암(深源菴)에서 개판된 판본 등 3종이 발견되어 보물 제1470호되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 금강반야바라밀경, 곧 금강경은 벼락을 자르는 무궁한 지혜로써 그 근본을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공(空)의 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경전 중에서 공이라는 문자가 한마디도 쓰여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대승과 소승이라는 두 관념의 대립이 성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우리에게 집착 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완성을 이루어 석가가 행한 보시의 정신을 구현하여 일체의 악업을 소멸하는 구제방법을 표방하고 있어, 일찍부터 공덕경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주요 판본으로는 태종 15년(1415)에 한문본(漢文本)이 간행된 이래로 득통(得通)의 설의가 편입된 <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가 세종 24년(1442)에 처음으로 개판되었으며, 그 후 세조 3년(1457)에는 활자본『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의 인출을 보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국의 유명 사찰에서 끊임없이 이 활자본을 복각 또는 재차 복각 간행하여 선교의 근본경전으로 삼았다. 불갑사 복장본에서는 간행연대 미상본(未詳本) 1종이 발견되었다. 간기가 탈락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사항을 알 수 없으나, 세조 3년에 정축대자(丁丑大字)와 갑인중소자(甲寅中小字)로 인출되었던 활자본을 저본으로하여 복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각은 비교적 정교하게 판각되어 있어 활자본의 여러 특징을 보이고 있을 정도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화엄경은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한국불교 소의경전(所義經典)의 하나로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 과정에서 학습되어왔던 최고의 대승경전이다. 현재 한역본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 번역의 60화엄과 실차난타 번역의 80화엄, 반야번역의 40화엄 등 3종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넘어오면서 신라 화엄학이 정립되고 아울러 화엄종이 성립되어 화엄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고 화엄사상이 정립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화엄경은 구례 화엄사의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80권본 화엄사경이다. 불갑사 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은 인조 13년(1635)부터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의 일부인 3책 뿐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이 책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이 경의 제7권에 수록된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235년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한 판본으로, 현재 해인사에 그 목판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309년에 간행된 소자본계통의 구결이 묵서된 판본이 보이고 있으며, 또한 1372년에 안성 청용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간본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태종 1년(1401)에 신총(信聰)이 정서하여 궁실에서 개판한 판본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 사찰본 중에 최고본으로는 1443년에 성달생(成達生)이 직접 판서하고 발문을 부쳐서 전라도 화암사(花岩寺)에서 간행한 판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1457년에 원나라 유측의 능엄경 회해본을 을해자(乙亥字)로 궁중에서 간행한 판본과, 특히 1462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세조의 명으로 국역하여 간행한 것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에는 화암사판 외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이 개판 간행되었을 만큼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불갑사 복장본은 전라도 태인 용장사(龍藏寺)에서 1635년에 간행된 판본이 발견되어 보물 제1470호로 지정되었다.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이 책은 우리나라 불교전문강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로 사집과 과정으로 학습되어 오고 있는 불서로 흔히 ‘대혜서(大慧書)’ 또는 ‘대혜서장(大慧書狀)’, ‘서장(書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나라의 대혜 종고(宗杲)가 간화선법에 바탕을 두고 그에게 법을 물어온 42인에게 사된 견해를 깨뜨리고 정법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 보낸 62통의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사집과 교과목 중 제1의 과목으로 선정하여 중시하게 된 까닭은, 고려의 지눌이 이 책을 보다가 도를 깨친 뒤 간화선 수행에 지침서로 삼았고, 또한 책의 내용이 공부를 시작하는 학승들에게 바른 지견을 심어 주어 그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핵심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현존본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명종 1년(1546)에 간행된 황해도 토산 석두사판(石頭寺板)과 선조 3년(1570)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개판된 판본을 비롯하여 간년미상본 1종 등 모두 3종이 발견되었다. 간년미상본은 모두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사항은 알 수 없어나,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선조 37년(1604)에 개판된 쌍계사판(雙溪寺板)으로 조사되었다. 이 석두사판은 중종 6년(1511)에 전라도 순천의 대광사(大光寺)에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복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광사판은 조선조에 사찰본으로 가장 일찍 개판되었는데, 이후에 간행된 대구 공산본사판(公山本寺, 1543), 하동 지리산의 신흥사판(1537) 등의 동일계통의 모본이 되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원판(元板)의 복각판으로 고려판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권말의 발문에는 원본(元本)의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원나라 스님 몽산화상 덕이(德異)가 편찬한 선(禪) 수행의 지침서로 조선조에 널리 유통된 법어(法語) 가운데 하나이다. 찬자인 몽산 덕이는 고려의 고승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특히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과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와는 깊은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편집한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법어(法語)는 우리나라에 중국 고승의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이 유통될 정도로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중국의 고승이다. 그리고 부록의 찬자인 나옹은 혜근(彗勤)이라고 부르며,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던 인물이다. 그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충혜왕 5년(1344)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인 승려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던 인물이다. 불갑사 복장본은 9종의 언해본 중에 1566년에 전라도 순창 취암사(鷲菴寺)에서 간행된 판본이 있다. 순창 취암사에서는 임란 이전에 언해본이 여러 종 간행된 바 있어 그 연유가 매우 주목되는 사찰이다.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이 책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고승인 몽산화상 덕이(德異)가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일체유심조의 입장에서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인ㆍ천의 육범(六凡)과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 등의 사성(四聖)을 합한 10계를 설하여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 성인의 지위에 들어갈 것을 권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만일 사람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성(法界性)을 관하여야 하고, 일체가 오직 마음의 지은 바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마음이란 신령하고 고요하고 묘하여 모든 성현의 조(祖)요 일체법의 종(宗)으로서, 이 마음이 발현되어 육범과 사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셋째, 육도의 중생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을 밝히고 인과법을 믿고 도를 닦아 성인의 과정에 들어갈 것을 밝혔다. 그리고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충렬왕 7년(1281)에 화엄경을 읽으면서 무차무애법식(無遮無碍法食)을 베푼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접장본으로 위에 소개한 판본과는 전혀 상이한 판식을 보이는 계통이다. 그러나 간기(刊記)가 탈락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사항은 알 수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에 간행된 판본이 분명하여 보물 제1470호로 지정되었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이 책은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이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이다. 지눌(知訥)은 당나라 종밀(宗密)이 신회(神會)의 뜻을 개진하기 위하여 저술한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간략하게 줄여서 싣고, 여러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을 인용, 비판하면서 참다운 수행인의 길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눌은 서문에서 교(敎)에 의하여 마음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집별행록>에서 번거로운 말을 줄이고 요긴한 강령만을 뽑아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음 닦는 사람들은 진실한 가르침에 의지하고 근본과 지엽을 분명히 알아서 마음을 관조(觀照)할 것을 강조하였다. 불갑사 팔상전의 복장본에는 고려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을 비롯해서 3종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고려본은 혜심이 판각 유통시킨 고판본의 가능성이 없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밖의 고판본은 <영광불갑사장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며, 그 외에 1570년에 간행된 평안도 해탈사판(解脫寺板)과 1604년의 쌍계사판(雙溪寺板)으로 조사되었다. 《법화령험전(法華靈驗傳)》 이 책은 고려말기에 요원(了圓) 스님에 의해서 묘법연화경, 곧 법화경의 영험담에 관한 내용만을 가려 뽑아 엮은 것이다. 법화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간행되었던 공덕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법화경을 지니고 독경과 사경하는 수 많은 사례를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경전에서 채록하였다. 특히 그는 당나라 혜상(慧詳)이 편찬한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10권과 송나라 종효(宗曉)의 『현응록(現應錄)』 4권, 그리고 고려의 진정(眞淨) 국사의 『해동전홍록(海東傳弘錄)』 4권 가운데 ‘영험설화(靈驗說話)’에 관한 내용 107항목을 가려 뽑아 상하 2권으로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판본으로는 고려 말에 수원 만의사에서 개판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실물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조선조 간본으로 중종 29년(1534)에 전라도 고창의 문수사(文殊寺)에서 개판된 것을 비롯하여 함경도 석왕사판(釋王寺板, 1544년 간)과 전라도 개흥사판(開興寺板, 1652년 간) 등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 불갑사 복장본은 조선시대 1534년에 전라도 문수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조사되었는데, 현재까지 간행된 판본 중에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불설광본태세경(佛說廣本太歲經)》 이 책은 태세경외에도 《불설조왕경(佛說竈王經)》, 《불설안택신주경(佛說安宅神呪經)」, 《불설백민신주경(佛說百愍神呪經)》, 《불설용왕삼매경(佛說龍王三昧經)》, 《불설패목신주경(佛說敗目神呪經)》, 《불설도니경(佛說度尼經)》, 《불설구호신명경(佛說救護身命經)》등 8종의 경문이 수록되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중국불교화가 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전통신앙인 도교와의 접목을 통하여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다. 판본의 경우에 따라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과의 관계도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17세기 이후에 간행된 한문본과 한글 음역본으로 대별되는 판본이 대략 9종 정도로 알려 져 있다. 이 중 불갑사의 복장본은 명종 4년(1549)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개판된 판본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조선조 판본으로는 최고본으로 생각된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은중경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이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이 경은 유교의 효경(孝經)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경은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 널리 보급되었고, 나라마다 많은 유통본을 남기고 있다. 특히 부모의 효를 강조하였던 유교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이 책이 많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나, 한편 한국불교의 민중성과 기복적 성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이러한 책을 간행하는데는 비록 사찰에서 주관은 하고 있으나, 그에 소용되는 경비는 대부분 민간 시주자들의 헌금에 의해서 충당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헌금의 기본적인 목적은 가문의 번영과 안위를 기원하는데 있으므로, 기복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 비록 간행동기가 기복적인 목적이 보이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효행심을 널리 전파하였던 긍정적인 측면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통행되고 있는 판본은 크게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변상과 삽화를 곁들인 판본이 많이 간행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언해본이 개판되기도 하였다. 언해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명종 1년(1545)에 개판된 판본이 전존되고 있으며, 그 간행지는 지금의 전라도 전주 인근의 지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판본 이외에 30여종의 언해본이 조사되고 있으며, 이 중에 최선본(最善本)은 정조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간행토록한 화성 용주사판(龍珠寺板)을 꼽을 수 있다. 이 판에는 당대 최고의 화공이었던 단원 김홍도의 판화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현존 판본 중에 불갑사 복장본은 1432년에 명빈낌씨(明嬪金氏)의 발원으로 궁실에서 간행된 판본을 비롯해서 쌍계사판(雙溪寺板)과 화암사계열의 간기미상본 등 3종으로 조사되었다.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 이 책은 예수재(豫修齋)에 관한 대표적인 경전으로,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10대왕과 그 권속 및 고통받는 죄인들을 묘사한 판화를 수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시왕경(十王經)’으로 통칭한다. 변상의 형식은 책머리 변상과 삽화 변상으로 대별되고, 각 판본의 변상은 그 당시의 목판화 및 풍속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경전의 내용은 사후 저승의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시왕의 위덕을 빌려서 10재를 구족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불갑사 복장본은 1618년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花岩寺)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되는 1종이 발견되었다. 화암사는 성삼문의 조부인 성달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찰로 조선 초기에 우수한 불경을 다수 간행했던 사실을 보이고 있다. 《선가귀감(언해)(禪家龜鑑(諺解))》 조선 중기의 고승인 서산 휴정이 명종 19년(1564) 여름에 선종의 요긴한 내용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 선가귀감이다. 당시는 불교계가 선종과 교종이 서로 혼합되어 있어, 불교인들이 수행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선문은 견성법을 전하고 교문은 일심법을 전하는 것임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올바른 길을 밝히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1564년 여름에 저술을 완료하였고, 금강산의 백화암에서 그 서문을 썼다. 그 체재는 전체적으로 ①원리론, ②불조론, ③선교론, ④방법론, ⑤결론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언해본과 한문본이 있는데, 다른 책과는 그 성립 과정이 단순치 않다. 그것은 이 책의 모본(母本)으로 보이는 《삼가귀감(三家龜鑑)》과《삼교귀감(三敎龜鑑)》이 근래 새로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삼가귀감》은 휴정에 의해서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 귀감으로 합본되어 간행되었는데, 이 중 <불가귀감>의 내용을 언해본으로 간행하였고, 그것을 초략하여 편성된 책이 바로 이 《선가귀감(禪家龜鑑)》이다. 이처럼 이 책은 여러 단계의 편찬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은 현재 한문본 12종과 언해본 2종이 전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불갑사의 복장본은 언해본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순천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이다. 이 판본은 선조 2년(1569)에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부휴당 선수(善修) 선사가 교정하여 복각한 책으로 임란 직후의 국어 변화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이 책은 중국 화엄종의 제5조인 종밀(宗密)이 지은 것으로 선교일치를 제창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불교전문강원의 사집과의 교과서로 채택된 이래 오늘날까지 강원 승려의 필수과목이 되고 있다. 이 책은 101권의 방대한 내용을 지닌 종밀의 <선원제전집> 가운데에서 선교일치사상의 요긴한 글을 발췌하여 만든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선교의 일치를 주장하기 위함은 물론이며, 불경의 방편과 진실, 여러 종류의 선에 대한 시비 등 당시의 여러 가지 논란을 정리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집의 내용은 일실되었고 이 중에 도서(都序)만이 현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불갑사의 복장본은 성종 24년(1493)의 전라도 고산 화암사 초간본을 제외하고 중종 32년(1537)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에서 간행된 판본, 명종 8년(1553)의 금강산 유점사판(楡岾寺板), 그리고 선조 3년(1570)의 황해도 해주 신광사판(神光寺板) 등 4종이 발견되었다. 이들 판본은 모두 임란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매우 귀중한 판본에 해당된다.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要)》 수륙재(水陸齋)의 제반 의식에 필요한 절차의 요점만을 뽑아 간결하게 정리하여 편의를 도모하고자 편찬한 것이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이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발이 되었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진 것은 고려시대 초기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광종은 수륙재를 성대히 개최한 바, 광종 21년(970)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이후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던 사실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식이 유교의식으로 많이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여 크게 재의를 거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태조 4년(1395)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의식의 유교화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시키지는 못하였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하였다. 이후 수륙재는 대체로 중종 10년(1515) 경까지 크게 변동됨이 없이 지속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설회인유(設會因由)>편에서 무차법회의 개념을 밝히고 시방의 모든 성인이 강림하기를 빌고 있는데, 이렇게 차례로 37편의 의식문을 수록하고 있고, 각 편에는 삽화를 수록하여 의식을 행할 때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이 나옴으로써 이전의 산만하고 번잡하였던 재의 의식이 통일되고 간소화되었으며, 지금도 각 사찰에서 수륙재를 행할 때 이 책을 기준으로 하여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42종 이상의 많은 종수가 개판되었던 사실을 보이고 있다. 위의 현존 판본 가운데 불갑사의 복장본은 이 중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연산군 4년(1498)에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모두 8종이 발견되었다. 이 중 무량사판은 <영광불갑사장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이며, 그 밖의 7종의 판본이 <영광불갑사지장시왕상및나한상복장불서일괄>이다. 이 불갑사 복장본은 대부분 임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현재는 매우 희귀한 실정이다. 《승가일용식시묵언작법(僧家日用食時黙言作法)》 이 책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바루 공양을 할 때의 행하는 상용의례를 기록한 의례서로 사찰 대중이 묵언으로 바루 공양을 할 때 묵언작법과 식당작법의 절차를 수록하고 있다. 묵언작법은 밥그릇인 바루를 내리는 하발게, 바루를 대중 일동이 돌리는 회발게, 또 각자가 바루를 펴는 전발게, 그리고 시념, 이어서 식사를 하라는 뜻으로 창식게, 식사를 하게 되는 수식게, 이어서 불삼신진언ㆍ법삼장진언ㆍ승삼승진언ㆍ계장진언ㆍ정결도진언ㆍ혜철수진언 등 6대 진언의 절차가 있고, 이어 봉발게ㆍ오발게ㆍ생반게ㆍ정식게ㆍ삼시게ㆍ절수게ㆍ해탈주ㆍ수발게 등의 순서를 싣고 있다. 이 묵언작법은 식사에 대한 불교적 의미를 부여한 신앙의례로서 절에서 식사때 언제나 행하는 상용의례이다. 한편 묵언작법이 바루 공양시에 언제나 행하는 상용의례인데 반하여, 식당작법은 식사 그 자체의 의미를 의식화 한 불교의식을 말한다. 그 식당작법은 영산재가 끝난 뒤에 행하며, 대중공양의 의미를 의식화한 것이다. 이 책은 본래 <제반문(諸般文)>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별책으로 독립시킨 것으로 보이며, 식당작법에 소요되는 제반 절차도 적고 있어 소제문(小諸文)으로도 알려져 있다. 의식의 절차는 물론이고, 의식을 맡은 승려의 배역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판본은 현재까지 9종이 조사되고 있는데, 이중 7종이 주로 경상도 소재 사찰에서 간행되었던 사실을 보이고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연산군 2년(1496)의 경상도 거창 옥천사판(玉泉寺板), 중종 26년(1531)의 경상도 지리산 신흥사판(神興寺板) 등 모두 6종이 발견되었다. 옥천사판은 이번에 처음으로 발견된 판본이며, 이러한 의식집이 이미 조선 초기에 널리 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조선초기의 스님인 설잠 김시습(金時習의 법명)이 중국의 상찰(常察)이 저술한 『십현담(十玄談)』의 요지를 해석한 책이다. 이 책은 선종의 주요 용어를 칠언팔구의 게송으로 설명한 것인데, 여기에 중국의 문익(文益)이 주해한 것이다. 십현담은 불조의 현관(玄關)으로 뛰어난 대장부가 아니면, 그 관문 속을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4년(1509)에 전라도 순천 대광사(大光寺)에서 간행된 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갑사 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바로 대광사판으로 권말에는 <조주삼문(趙州三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으로 간기(刊記)와 시주질(施主秩)이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책이다.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이 책은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염불하고 참회하는 불교의식인 미타신앙(彌陀信仰)의 한 형태로서, 미타신앙과 관계되는 무량수경(無量壽經)ㆍ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ㆍ아미타경(阿彌陀經) 중 아미타경을 독송하거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예경(禮敬)하며 참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이 불경은 본래의 의미는 경전 속에 담긴 이념적인 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미타경을 독송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차차 독송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덕을 중요시하여 송경의식(誦經儀式) 중심으로 의식화하게 되었다. 불갑사 시왕의 복장에서 발견된 판본은 왕실본(1474년 간)과 그밖에 선조 40년(1607)에 전라도 순천 송광사에서 간행된 소자본으로 조사되었다. 송광사판은 왕실본이 대자로 쓰여진 것과는 달리 10항 18자의 소자본인데, 아마 1576년에 간행된 해인사본을 저본으로 복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판면의 난외에는 시주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권9의 말미에 시주질 및 간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임란 직후에 간행된 판본으로 비교적 희귀한 실정이다.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이 편찬한 운수단은 종래의 헌공의식문을 선의 입장에서 재편한 일종의 불교의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상위인 제불보살과 중위인 삼부제대성중, 하위인 귀신을 청하여 헌공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부록으로 망자의 영혼을 맞이하여 헌공하는데 필요한 영혼식, 선을 설하는 법회의식인 설선식과 칠성청 등의 의례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1605년에 합천 해인사에서 초간된 이래 전국의 사찰에서 20여 종의 판본이 개판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존판본의 대부분이 임란 직후인 17세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주로 전라‧경상에 소재하는 사찰에서 각종의 사찰의례를 주관하는데 필요해서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현존 판본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이 중에 1636년에 전라도 광주 증심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비롯해서 모두 3종이 발견되었다. 《육경합부(六經合部)》 이 책은 조선시대 초기에 《금강반야바라밀경》ㆍ《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ㆍ《대불정수능엄신주》ㆍ《불설아미타경>ㆍ《관세음보살예문》ㆍ《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 등 여섯 가지 경전을 모아 휴대 및 독경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한 책으로 모아 편찬하고 ‘육경합부(六經合部)’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육경(六經) 가운데 금강경 등 일부 경전만을 수록한 판본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최고본은 조선초기 명필가인 성달생이 서사한 정서본을 바탕으로 세종 6년(1424)에 전라도 고산 안심사에서 개판되었으며, 이후 이를 전국의 사찰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 현재까지 대략 20여 종 이상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금속활자본도 보이고 있는데, 대부분 임란이전인 15세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불갑사 복장본은 모두 9종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성달생 정서본을 바탕으로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1424년에 개판한 판본을 비롯하여 대부분 15세기 판본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 간행연도가 확실한 판본은 세종 6년(1424)에 전라도 고산 안심사(安心寺)에서 개판된 판본을 비롯하여 세조 3년(1457)에 전라도 전주 원암사판(圓巖寺板), 1460년의 전라도 진안 중대사판(中臺寺板), 성종 19년(1488)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판(花岩寺板) 등 7종(8책)은 현재까지 매우 희귀하게 전래되고 있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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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3.사천왕상 복장전적(四天王像 腹藏典籍) / 조선 세종 23년(1441)~현종 11년(1671) / 일괄 / 목판본/사찰본 / 불갑사 / 전남 영광군 / 선장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사명(寺名)에서도 짐작되는 바와 같이 매우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 땅에 불교가 초전(初傳)되는 과정에서 창건되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로 그 초창의 역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갑사는 백제 중기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후 통일신라 때인 8세기 후반 원성왕 원년(785) 이전에 중창이 있었다는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라는 상량문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 시기에 불갑사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처럼 유서 깊은 영광 불갑사에서 지난 1998년 여름에 태풍으로 천왕문 앞에 서있던 전나무가 쓰러져 천왕문 및 사천왕상에 큰 피해를 입혔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사천왕상의 피해를 조사하던 중에 사천왕상에 복장되어 있던 일부의 불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천왕상의 복장전적을 조사하던 무렵에 불갑사 경내의 명부전 및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는 시왕상 및 나한상에서도 상당수의 불서 및 조성기 등의 복장유물도 함께 수습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다시금 2006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 1470호로 모두 승격되었다. 금번 새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일괄 명칭은「영광 불갑사 불복장전적」이며, 전체 수량은 209종 259점으로 수습 전각을 기준으로 3건으로 구분되어 지정되어 있다. □ 보물 1470-3호 : 사천왕상 복장전적 불갑사 천왕문에 안치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설두 스님이 1876년에 인근의 고창 연기사(烟起寺)에 있었던 것을 이전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998년 태풍으로 천왕문 및 사천왕상이 파괴되어 정밀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갑사의 신고로 조사를 실시하기 이전에 이미 사천왕상의 복장품은 여러 차례 도굴된 상태였으며, 이때 발견된 복장 불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불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불서의 지정현황은 33종 46책에 이른다. 그러나 사천왕상의 복장불서의 조사결과, 대부분 14세기 전반으로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귀중본으로 밝혀졌다. 금번에 수습된 불갑사 사천왕상의 복장불서는 그 대부분은 이미 이전에 도굴되었던 관계로, 고려본이나 매우 귀중한 불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비교적 완전한 상태인 31종 중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441년간)을 비롯해서 15종은 임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귀중본 가운데 전라도 고산 화암사에서 개판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장수경(長壽經)과 합철(合綴)되어 있음)과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1453년간)은 보물급 불서로 평가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월인석보(月印釋譜)」(1569년 중간)는 비록 후대의 중간본이나, 중세 국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영광불갑사사천왕상복장불서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이 책은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社)를 만들고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을 때,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과 수선사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 저술하게 되었다.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지나치게 국가의 보호속에서 안일과 명리에 빠져 승려 본분을 망각한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크게 걱정한 저자가 수선사의 승려만이라도 수도인답게 생활하게 하고자 지은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의범인 율문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 중에서 핵심 내용만을 뽑아 우리나라의 사원 생활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이 책이 저술된 이후로 불교전문강원의 초등과정인 사미과(沙彌科)에서 처음단계로 배우는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6년(1397)에 상총(尙聰)이 태조의 명을 받아 전국 사원의 청규(淸規)로 시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 교과목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승려는 물론 일반 신도까지 배워야 할 기본서가 되었다. 현존본 가운데 불갑사에서 발견된 판본(板本)은 대부분이 임란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명종 18년(1563, 가정 42)에 간행된 능주 쌍봉사판(雙峯寺板), 선조 5년(1570, 융경 4)에 간행된 강진 무위사판(無爲寺板) 등 2종이 발견되었다. 《고봉화상선요 (高峰和尙禪要)》 이 책은 송나라의 고승 고봉(高峰) 화상의 법문을 모아 엮은 책으로 선(禪)의 요체만을 간추려서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간행 유통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전문강원의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세번째 과목으로 채택되어 널리 독송되었다. 이 책은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 이름을 붙였으며, 책머리에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총 29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가 큰 뜻을 분발하여 조사의 현관을 뚫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고봉이 겪은 갖가지 경험을 토대로 하였고,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간절함과 뛰어난 지혜의 섬광이 곳곳에 나타나 있어 방황하는 수도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고려 이후 우리나라 선종 승려의 필독의 서적으로 채택되었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선조 23년(1590)에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조사되었다. 《대방광불화엄경소 (大方廣佛華嚴經疏)》 화엄경은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한국불교 소의경전(所義經典)의 하나로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 과정에서 학습되어 왔던 최고의 대승경전이다. 현재 한역본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 번역의 60화엄과 실차난타 번역의 80화엄, 반야번역의 40화엄 등 3종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통일신라시대를 넘어오면서 신라 화엄학이 정립되고, 아울러 화엄종이 성립되어 화엄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고 화엄사상이 정립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화엄경은 구례 화엄사의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80권본 화엄사경이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은 1635년부터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의 일부인 9책 뿐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 5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一, 五)》 이 책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이 경의 제7권에 수록된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곧 능엄경은 고려 고종 22년(1235)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한 판본으로, 현재 해인사에 그 목판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년(1401)에는 신총(信聰)이 정서하여 궁실에서 개판한 판본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 사찰본 중에 최고본으로는 세종 25년(1443)에 성달생(成達生)이 직접 판서하고 발문을 붙여 전라도 화암사(花岩寺)에서 간행한 판본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조 3년(1457)에 원나라 유측의 능엄경 회해본을 을해자(乙亥字)로 궁중에서 간행한 판본과, 특히 세조 8년(1462)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세조의 명으로 국역하여 간행한 것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갑사 복장본은 황해도 토산 석두사(石頭寺)에서 명종 2년(1547)에 간행된 판본이 발견되었다.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곧 법화경은 한국 불교계의 근본경전의 하나로서 불교전문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강의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 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경은 예로부터 모든 경전 중의 경전으로 인정받았고,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기원 전후에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서북인도에서 최초로 소부의 것이 만들어졌고, 2차에 걸쳐 증보되어 중국을 비롯해서 여러 국가에 전래 번역되었다. 우리나라 유통본은 대부분 7권본으로 장축(裝軸) 또는 제책(製冊)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가장 오래된 법화경은 최근에 전라남도 영광의 불갑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권3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려대장경 및 그 이후에 간행된 고려본과는 권수제의 특징이 상이한 점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간행 이전 시기인 고려 초기의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초기 고려본은 성암본과 연대본이 있으며, 이들 판본에는 각필(角筆)부호가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성종8년(1477)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花岩寺)에서 개판된 성달생판본계열을 비롯해서 갑인자판, 을해자판, 대자판계열의 5종이 발견되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은중경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이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이 경은 유교의 효경(孝經)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불경은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 널리 보급되었고, 각 나라마다 많은 유통본을 남기고 있다. 특히 부모의 효를 강조하였던 유교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이 책이 많이 간행, 유포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80여종의 판본이 통행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크게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부터 변상과 삽화를 곁들인 판본이 많이 간행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언해본이 개판 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순 한글로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선본(善本)은 정조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간행토록 하명하여 간행된 화성 용주사판(龍珠寺板)을 꼽을 수 있다. 이 판본에는 당대 최고의 화공이었던 단원 김홍도의 판화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찰본만 대략 80여종의 판본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효도가 강조된 조선시대에 효를 강조함으로써 그 사회의 저변에서나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던 방편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상의 80여종의 판본 중에 영광 불갑사에서 발견된 화암사판은 이후 전국의 사찰에서 이를 저본으로 복각 간행된 바 있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판본은 세종 23년(1441)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花岩寺)에서 조선초기 명필가로 알려 진 성달생이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판본인다. 특히 20장에 이르는 판화가 수록되어 있고, 여백에 언해가 묵서(墨書)되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현재까지 왕실에서 간행된 판본을 제외하고 사찰에서 간행된 판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 이 책은 당나라 영가(永嘉) 현각(玄覺) 선사가 수행인의 입지(立志)와 수선(修禪)의 요결에 대해 찬술한 10편을 같은 당나라의 경주자사 위정(魏靜)이 편집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 후 송나라 행정(行靖)이 주를 달고 정원(淨源)이 과문(科文)으로 정리한 것에 세조가 구결(口訣)을 달고 신미(信眉)등이 국역하여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바도 있다. 이 판본은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보물 제774호를 비롯하여 동일한 판본 여러 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중종 37년(1542)에 황해도 토산 석두사(石頭寺)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조사되었는데, 임란 이전의 귀중본으로 평가된다.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수륙재(水陸齋)의 제반 의식에 필요한 절차의 요점만을 뽑아 간결하게 정리하여 편의를 도모하고자 편찬한 것이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이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발이 되었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 광종은 수륙재를 성대히 개최한 바, 광종 21년(970)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이후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던 사실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식이 유교의식으로 많이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여 크게 재의를 거행하였다. 불갑사의 사천왕상 복장본은 경상도 안음 영각사(靈覺寺)에서 중종 31년(1536)에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모두 4종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임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십지경론 권9,10 (十地經論 卷九,十)》 이 책은 화엄경의 <십지품(十地品)>에 해당되는 내용을 독립시킨 불교경전이다. 화엄경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존이 미혹을 떨치고 성도(成道)했던 그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본래 이 화엄경은 반야의 40화엄본, 불타발타라의 60화엄본, 실차난타의 80화엄본 등 3종의 번역이 출현하였다. 이 중 <60화엄본>은 7처 8회 34품의 구성으로 성립되어 있는데, ‘7처 8회(7處 8會)’라고 하는 것은 설법의 장소와 모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으로는 고려 재조대장경 속에 「불설십지경(佛說十地經)」이 보이고 있으나, 독립된 경전으로는 황해도 서흥 성수사(星宿寺)에서 명종 12년(1557)에 개판된 것이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송광사 및 용장사(龍藏寺)에서 인조 13년(1635)에 간행된 판본도 현전하고 있다. 이 불갑사 복장본은 임란 이전에 간행된 성수사판으로 조사된다.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 (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생전에 사후의 왕생을 빌고 닦는 예수재(預修齎)에 대한 의식집인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는 대우가 집술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통서인유(通敍因由)>편에서 예수재의 시원을 밝히고 이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이 차별없이 극락으로 왕생 할 수 있음을 밝힌다. 둘째, <엄정팔방(嚴淨八方)>편에서는 재를 열었으니 부처님이 가호하여 기도를 따라 감응할 것을 빌고 있는데, 각 편마다 의식을 행하는 의의를 먼저 말하고 절차를 진행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의식과 사상은 중국 도교에서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나열되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본래의 불교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불교가 새로운 이역의 문물에 토착하는 과정에서 그 지방의 민간 신앙과 융화를 꾀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는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10종 이상의 판본이 간행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이 중에 불갑사의 복장본은 간기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7세기 중엽 이전에 경기도 청계사(淸溪寺)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운수단가사 (雲水壇謌詞)》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이 편찬한 운수단은 종래의 헌공의식문을 선의 입장에서 재편한 일종의 불교의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상위인 제불보살과 중위인 삼부제대성중, 하위인 귀신을 청하여 헌공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부록으로 망자의 영혼을 맞이하여 헌공하는 데 필요한 영혼식, 선을 설하는 법회의식인 설선식과 칠성청 등의 의례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선조 38년(1605)에 합천 해인사에서 초간된 이래 20여종의 판본이 개판되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임란 이후인 17세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으며, 주로 전라‧경상의 양도 소재의 사찰에서 각종의 사찰 불사의 필요에 의해 주로 개판되었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불갑사의 사천왕상 불복에서는 이 중에 선조 40년(1607)에 순천 송광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포함하여 모두 3종이 발견되었다. 《월인석보 권21 (月印釋譜 卷21)》 이 책은 석가의 일대기와 그의 설법을 수록한 내용을 국역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월인(月印)’ 두자와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석보(釋譜)’ 두 자와 석가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월인(月印)’ 두 자를 취하여 서명으로 삼아서 세조 5(145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저본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에 따라 석가의 일대기(석가보, 釋가(迦)譜) 중 요긴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상(詳)), 요긴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여(절(節)) 세종 29(1447)년에 편찬한 것이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수양대군이 지어 올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보고 그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으로 같은 무렵에 간행된 바 있다. 조선시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가 돌아간 후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우리말로 역편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 책을 읽고 그 각 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 반포 직후에 편찬된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의 국역 불교성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원간본과 복각본을 포함하여도 완질이 현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이 책의 저본은 이미 세종 때 편찬 간행된 바 있으며, 이때 세조의 적극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음도 알 수 있다. 조선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시로 표방한 국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태조대왕을 비롯한 역대선왕들의 호불(好佛)성향보다도 더욱 확고하게 불경의 편찬, 국역, 간행사업 등에 강한 의지를 천명하여, 마침내 조선조에 전무후무한 불경간행 기관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였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그가 간경사업에 굳은 뜻을 두고 있는 연유는 표면적으로는 그의 어머니 소헌왕후와 아들인 덕종(德宗)의 명복을 기원함을 표방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그의 왕위 등극 과정에서 사사된 어린 조카 단종과 사육신 등 많은 신하의 죽음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과 인생의 무상함에서 벗어나고자 이에 적극적인 추진자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세조의 의지가 반영된 간행사업 이었던 까닭에 정인지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등극 초기로부터 해인사에서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였고, 한편으로는 『금강경(金剛經)』과 『영가집(永嘉集)』을 교정케 하고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더니, 세조 5년(1459)에 이르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본인이 직접 주관하여 편찬 간행하였다. 불갑사에서 발견된 판본은 궁실에서 원간본(1459년)이 간행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선조 2년(1569)에 쌍계사에서 복각한 판본에 해당된다. 이 쌍계사판은 충청도 은진의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인출한 이후 목판은 한 동안 인근의 쌍계사에 보존되어 왔으나, 현재는 공주 갑사에 이관 보존되어 있다. 《작법절차 (作法節次)》 이 책은 불가(佛家)의 제반적인 의례절차에 관하여 편찬된 예수문과 중례문 가운데 수록된 주요한 절차만을 뽑아서 편찬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 대부분 의례집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이를 별도로 독립시켜 한 책으로 편찬한 것도 전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으로는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동국대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불갑사에서 발견된 것도 같은 판본이다. 권말의 끝 부분이 탈락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사실은 알 수 없으나 판식 및 지질의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이후에 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지정문화재로서의 지정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 이 책은 우리나라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으로 널리 신봉되었으며, 그 성격이 현세 이익적인 불경으로 대표적 공덕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지장경(地藏經)’으로 약칭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 때의 실차난타가 번역한 3권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이 경은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한 것을 모은 것이다. 부처님은 지장보살을 불러 갖가지 방편으로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육도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과, 죄를 짓고 지옥의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려는 유명교주 지장보살의 큰 서원을 말씀하신 경전이다. 그리하여 지옥의 고통을 파하여 극락세계에 왕생을 목적으로 간행 유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때 왕실에서 주관하여 간행한 판본 등 모두 30여 종 이상이 현존하고 있다. 이 중에 불갑사 복장본은 단종 2년(1453)에 전라도 고산 화암사(花岩寺)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조사되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간행된 판본을 제외하고 사찰에서 간행된 판본 가운데 최고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와 동일본인 강태영소장본은 보물 제1011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이 책은 수륙재의 기원과 의식 절차에 대한 것을 집성한 불교 의례서로 일명 ‘중체문(中禮文)’으로 불리기도 하며, 편자는 미상이다. 수륙재는 양나라 무제 때인 6세기 초반부터 열리기 시작한 불교의 야외 법회의식 중 하나이다. 물이나 육지에 있는 고혼•아귀 등의 혼령들에게 법식을 평등하게 공양함으로써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 책에는 수륙재에 대한 모든 의식과 절차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절차 때마다 외우는 염불도 차례로 언급되고 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궁중에서 공식적으로 수륙재가 개최되어 불교 의례에 관한 서적이 중시되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점차 축소 또는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례문은 불교 의례가 쇠퇴하기 이전인 조선전기에 왕실에서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갑사의 복장본은 명종 17년(1562)에 전라도 화순의 쌍봉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전라도 지역의 사찰에서 개판된 것으로 4종이 발견되었다. 판본의 형식은 크게 상이한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수차에 걸쳐 복각, 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문 (請文)》 이 책은 사찰예법 가운데 진언청문에 관한 모든 의식을 집대성한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며, 경우에 따라 ‘제반문(諸般文)’으로 제명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상단과 신중단의 의식에 쓰이는 각종 진언을 모은 것이다. 대웅전에서의 예불ㆍ사시마지ㆍ공양의례등을 기록하였다. 또, 극락전ㆍ미륵전ㆍ약사전ㆍ관음전ㆍ지장전ㆍ나한전ㆍ독성각ㆍ칠성각ㆍ산신각 등 사찰의 부속건물에서 행하는 진언 의례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불교 의식에 있어서 밀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지를 입증하는 좋은 자료이다. 또 오늘날 전통 불교의례의 축소화 또는 생략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자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이 책은 고려시대 간본 중에서 찾아 볼 수 없어 조선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종 30년(1535)에 경상도 영각사(靈覺寺)에서 간행된 판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이를 바탕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15종 이상이 간행되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중에 불갑사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기왕에 가장 이른 판본으로 알려져 있는 덕주사본보다 5년 앞서 1535년에 전라도 덕유산 영각사에서 개판되었던 판본이다. 그러나 인쇄 상태가 조잡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다시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치문경훈 권 하(緇門警訓 卷 下)》 이 책은 당 말에 편찬된 『치림보훈(緇林寶訓)』 (1권)을 저본으로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환주(幻住) ‧ 지현(智賢) 선사가 지은 2권본 『치문경훈』이 있고, 성종 1년(1470)에 이르러 여근(如巹)이 그의 스승인 용곡(容谷) ‧ 경륭(景隆)으로부터 이 책을 받아서 <속집(續集)>(2권)을 증보하고 경륭과 각담(覺澹)등의 서문를 붙여서 간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유통본은 모두 10권이고, <산경책(山警策)>을 비롯하여 <양황습도사불조(梁皇拾道事佛詔)>에 이르기까지 180여 편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에 다시 개수한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의 고승 보우(普愚) 스님이 원나라로부터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우왕 4년(1378)에 명회(明會)와 도암(道庵)이 간행하여 승려들의 지침서로 유통시켰다. 조선시대에 성총(性聰) 스님이 이를 승려들의 기본 교과서로 삼고, 여러 가지 고전과 고사, 사물의 명수 등 쉽게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해석하고 근거를 밝히고, 이에 집주하여 간행하였다. 조선조 사찰본은 대부분이 중국 전래본을 그대로 판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간본(初刊本)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서 중종 27년(1532)에 간행되었으며, 임란 전후로 대략 13종이 이상이 간행된 바 있다. 이 중 불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전라도 해남 대흥사(大興寺)에서 인조 16년(1638)에 개판된 판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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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양월문중 고문서 및 향안 - 이지대 왕지(慶州李氏 楊月門中 古文書 및 鄕案 - 李之帶 王旨) / 조선 태종 13년(1413) / 1점 / 국왕문서/교령류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종로구 / 낱장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헌에는 그 가문에 관련된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전해오고 있다. 그 외에도 사실상 그 가문의 자료라고 보기 어려운 경주 향안 등 유향소 관련 자료와 구강서원 문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경주이씨 양월문중에는 여러 가지 고문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을 보면, 조사첩 2점, 교지와 교첩 등 인사관련 문서 23점, 소지 1점이 있으며 보물 제147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지대(李之帶)의 왕지는 보물 제1474-2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작성한 왕지로 양월문중 관련 고문서 중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자료이다. 이 왕지의 수취자인 이지대는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파조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자료가 알려지지 않아 그 가치가 더욱 높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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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초상 일괄 - 영당기적(尹拯 肖像 一括 - 影堂紀蹟) / 조선 고종 22년(1885) / 1책 / 관부문서/증빙류 / 윤경식 / 충남 논산시 / 선장조선 숙종 때 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유택을 그린 유봉전도(酉峰全圖)와 영당(影堂) 그림, 그리고 초상 제작과 초상원본을 그대로 베끼는 이모(移摹)과정을 기록한 첩이다. 윤증(1629~1714)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다. 충청남도 논산군 유봉(酉峰) 아래 살았으므로 호를 ‘유봉’이라고도 하였다. 그에게 조정에서 계속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714년 정월에 타계하였다. 『영당기적(影堂紀蹟)』에는 1885년에 이한철(李漢喆, 1808~1892)이 그린 조감도 형식의 유봉전도(酉峰全圖)와 영당(影堂) 그림이 있고, 초상의 제작과 3차에 걸친 이모(移摹)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즉 윤증의 초상은 1711년 4월에 화사(畵師) 변량(卞良)에 의해 처음 그려진 이래 1744년 4월에 화사 장경주(張敬周)에 의해 첫 번째로 이모(移摹)되었고, 1788년 2월에 화사 이명기(李命基)에 의해 두 번째로 이모되었으며, 세 번째는 1885년 4월에 이한철이 이모하였다. 『영당기적(影堂紀蹟)』에는 명재선생 초상 제작과 이모 과정뿐 아니라 재정적인 부조(扶助) 사실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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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 / 고려 우왕 6년(1380) / 2권 1책 / 목판본/목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원각경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에 의해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는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우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는 불경으로 고려 1380년 목판으로 간행한 목판본 2권 1책. 김민영 소장. 보물 제1518호. 원각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이나, 이것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어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불경은 크고(大) 방정하고(方) 광대한(廣) 원각(圓覺)을 설명하는 것이 모든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흔히 이를 줄여서 ‘원각경’으로 약칭하고 있다. 이 경은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12장은 석가모니가 12보살과 문답한 것을 각각 1장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원각경에는 훌륭한 이론과 실천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체가 유려하고 사상이 심원하며,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존본으로는 1380년에 이색이 지은 발문이 있는 고려본을 비롯하여, 세조연간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활자본과 1465년에 함허 득통(得通)이 주석을 달고 이를 언해하여 10권본으로 개판한 간경도감본, 그리고 이를 저본으로 1465년에 을유자(乙酉字)로 찍어낸 활자본 등이 전래되고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사찰본으로 1570년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판본을 비롯하여 12종이 유포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판종 가운데 해제 대상본은 1380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2권 1책 완본이다. 표지는 근래 새로 개장하였는데, 표제는 제첨을 부치고 금니로 쓰여 있는 상태이며, 책의 크기는 23.6㎝×16.0㎝이다. 권수에는 배휴(裵休)가 원각경 약소(略疏)에 대해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수제는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아래에 ‘宋孝宗皇帝註’라는 주해자 표시가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경문의 체제가 대문 아래에 송나라 효종의 주소가 소자 쌍행으로 부기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송본을 저본으로 고려에서 판하본을 써서 판각한 판본으로 보인다. 권말제 다음에 ‘經書比丘 宗昢’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종출이 판하본을 쓴 인물로 생각된다. 권말제 후면에는 ‘中昊’ 등의 6인의 이름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는데, 간행에 참여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 말미에는 ‘庚申四月開刊’이라는 간기가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다음 장에는 ‘庚申三月’에 이색(李穡)이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간지로 기재된 ‘庚申’은 이색이 생존했던 시기에 해당되는 고려 우왕6(1380)년에 해당되며, 바로 이 해에 이 책이 간행되었다. 지질은 여말선초에 불경 인출에 사용되었던 저지로 보이며, 볏짚물로 염색되어 있어 지색은 전체적으로 갈색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현재까지 동일본이 없는 유일한 고려본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의 표지가 원상이 아니라는 점과 앞뒤에 충식으로 인해서 훼손된 부분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 책은 권말의 간기와 이색의 발문으로 보아 송본을 저본으로 종출이 판서본을 써서 1380년에 간행된 판본이다. 현재까지 이와 동일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유일본으로 보이므로 고려시대 판본 및 불교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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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삼매참법 권상(妙法蓮華經三昧懺法 卷上) / 고려 충숙왕 13년(1326) 판각(板刻) 조선 성종 3년(1472) 후인(後印) / 1권 1첩 / 목판본/목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절첩장이 책은 법화경 및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을 근거로 하여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 관조 수행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고려 1326년에 월산사(月山寺)에서 목판에 새긴 책판에서 조선 1472년에 후인(後印)한 불교수행의 지침서. 목판본 1책(결본). 김민영 소장 보물 제1519호. 삼매참법은 불교에서 법화경 및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을 근거로 하여 참회하는 종교의식으로 삼칠일 동안을 기한으로 정하여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죄업을 참회하고 실상중도(實相中道)의 도리를 관조 수행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처럼 삼매참법은 법화경에 근거하여 죄업을 참회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먼저 육시오회(六時五悔)라 하여, 아침ㆍ낮ㆍ해질녘ㆍ초저녁ㆍ밤중ㆍ새벽의 여섯 때를 정하여 참회ㆍ권청(勸請)ㆍ수희(隨喜)ㆍ회향(廻向)ㆍ발원(發願) 등 5문(門)의 차례에 따라서 죄를 소멸시켜 가는 수행 방식을 가리킨다. 이 책은 천태종의 전교승(傳敎僧) 산긍(山亘)이 법화삼매의 수행을 위해 예불(禮佛)하고 송경(誦經)하고 참회하는 행법(行法)을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하여 상중하(上中下)의 3권으로 성편(成篇)한 것이다. 이 참법의 내용은 법화경의 서품(序品)부터 화성유품(化城喩品)까지의 7품을 4과(科)로 구분하여 상권으로 하고, 다음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부터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까지의 10품을 또한 4과(科)로 나누어 중권으로 하고, 그 다음의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부터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의 11품을 역시 4과(科)로 간추려 하권으로 성편하였다. 우리나라의 법화참법 의식은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을 전수하여 교종(敎宗)이 시창된 이후 그의 문하승들이 전교한 데서 퍼지기 시작하여 여말(麗末)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 그런데 현재 보물로 지정된 판본에는 판각시에 새긴 간기(刊記)가 없어 언제 간행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판식(版式)이 본시 권자(卷子) 또는 접장형식이고, 장차(張次)표시에 ‘丈’자의 이체자(異體字)로 보이는 ‘卜’자로 표기하고 있고, 또한 자체(字體)가 고려후기에 유행하였던 송설체(松雪體)이며, 조선 성종3년(1472)에 후인(後印)해 냈음에도 각자(刻字)에 별로 마멸이 나타나 있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말기에 판각한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런데 최근 경주 왕룡사원의 삼존불에서 상중하 3책이 온전할 뿐만 아니라, 권하 말미에는 구인사본에 결락되어 있는 교감자를 비롯하여 간기와 간행 참여자가 수록되어 있어 간행에 관한 구체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새로운 판본이 발견되었다. 해제 대상본은 전 3권 중 권상에 해당하는 1책만 지정되었는데, 이 책은 왕룡사원과 구인사 소장본과 비교해 보면, 고려 1326년에 판각된 목판에서 후대 1472년(성종3)에 궁실 주관으로 인출한 판본에 해당된다. 표지는 원래 것으로 보이나 많이 훼손되어 최근 새로 보수한 상태로 표제는 아직 쓰여 있지 않다. 이 책은 전 3권 중 권상 1책에 해당되며, 전체 크기는 33.0㎝×12.5㎝이다. 권말에는 찬집자 산긍(山亘)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뒤표지의 내지에는 ‘化主 信海’라는 묵서(墨書)가 보이고 있는데, 후쇄할 때 참여한 인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는 동일본 5책이 현전하고 있는데, 상중하 전 3권 완질본은 왕룡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 상권은 김민영과 기림사에, 하권은 구인사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역대의 주요 정장(正藏) 및 교장(敎藏) 목록(目錄)에 실려 있지 않고 그 현전본이 매우 희귀하여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의 전교(傳敎) 및 교학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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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十七史纂古今通要 卷十六) / 조선 태종 12년(1412) /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서울대학교규장각 / 서울 관악구 / 선장이 책은 원나라 호정방(胡定芳)이 편찬한 정사를 조선 태종 3년(1403)에 주조한 계미자(癸未字)를 사용하여 태종연간(1412년 경)에 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중국 태고로부터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의 17왕조의 정사(正史)를 간추려 모은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책은 모두 2권 2책의 영본(零本)으로 권 16의 1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으로 본서에 해당하며, 나머지 권 17의 1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다. 두 책은 묵서(墨書)와 소장인(所藏印)이 ‘김원룡인(金元龍印)’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1책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김원룡이 소장하였다가 분책되어 두 군데로 나누어져 보존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로 인쇄되었다는 점 그 가치가 크며, 초기의 인쇄 기술조건이 하루 몇 장에 불과했던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글자주조술과 인쇄조판술의 발달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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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三國遺事 卷二) / 조선시대 초기 / 1권1책 / 목판본/관판본 / 성암고서박물관 / 서울 중구 / 선장「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1206∼1289)이 편찬한 사서(史書)로 모두 5권이다. 내용은 왕력(王曆)ㆍ기이(紀異)ㆍ흥법(興法)ㆍ탑상(塔像)ㆍ의해(義解)ㆍ신주(神呪)ㆍ감통(感通)ㆍ피은(避隱)ㆍ효선(孝善) 등 9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편은 분량에 따라 제1권(52장)에 왕력(王曆)ㆍ기이(紀異)36편, 제2권(49장)에 기이23편, 제3권(56장)에 흥법(興法)ㆍ탑상(塔像), 제4권(31장)에 의해(義解), 제5권(30장)에 신주(神呪)ㆍ감통(感通)ㆍ피은(避隱)ㆍ효선(孝善)으로 편제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의 역사ㆍ지리ㆍ문학ㆍ종교ㆍ언어ㆍ민속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는 책이다. 이 책은 비록 잔본(殘本)이기는 하지만 현존본 「삼국유사」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알려진 국보 제306호(곽영대장본, 권제3~5)와 보물 제419-3호(범어사장본, 권제4~5)와 같은 판본이다.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정덕본(正德本) 보다 앞선 간본이어서 조선 초기 서지학 연구는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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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諺解) 卷一) / 조선 세조 7년(1461) / 1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능엄경은 금강경ㆍ원각경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는 불경으로 조선 초기에 우리말로 번역하여 조선 세조 때 금속활자 을해자로 인출된 언해본. 금속활자본(을해자) 1권 1책(결본). 김민영 소장 보물 제1520호. 능엄경은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하여 인도 이외의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의해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중국에서 후대에 찬술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으며, 원명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고도 한다. 본래 모두 10권으로 편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능엄경 판본으로는 1235년에 이승광(李勝光)등이 간행하였는데, 그 목판이 현재 해인사에 유전하고 있다. 그리고 1309년에 소자(小字)로 간행된 묵서구결이 들어 있는 호접장본(蝴蝶裝本), 1372년에 안성 청용사(靑龍寺)에서 간행한 고려 판본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1401년에 남송판을 복각한 대자판본, 사찰본 중에 최고본은 1443년의 성달생(成達生)의 발문이 있는 전라도 화암사판(花岩寺板) 등의 한문본이 보인다. 그리고 송나라 계환이 주해하고 원나라 유측이 회해한 것을 저본으로 언해하여 1461년에 을해자로 간행한 국역활자본과, 이 을해자언해본을 저본으로 1462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국역본이 현존하고 있다. 언해본은 먼저 세조가 친히 구결을 달고 여기에 왕사 신민의 도움을 받아 한계희와 김수온 등이 국역하였다. 이밖에도 전국의 사찰에서 16종 이상의 다양한 판본이 개판되었을 만큼 능엄경은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해제 대상본은 바로 1461년(세조7)에 주자소에서 을해대ㆍ중ㆍ소자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전 10권 중 권3의 1책에 해당된다. 권3의 핵심내용은 세간(世間)의 만법(萬法)이 모두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 하여 마음의 영원불멸성을 깨우치고 있다. 전후의 표지는 능화문(菱花紋)이 보이지 않는 감지로 보아 불복(佛腹)에서 발견된 이후 근래 새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전체 크기는 38.2㎝×25.0㎝이다. 본문에는 여러 곳에 걸쳐 주서(朱書)로 교정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지질은 세종에서 성종 무렵 불경을 인쇄할 때에 흔히 사용되었던 가는 가로발문이 들어 있는 얇은 하얀 저지(楮紙)이다. 자체는 대자는 매우 해정한 해서체로 세조의 친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중ㆍ소자는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주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안진경의 필의가 느껴진다. 한글은 활자본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정방형의 고딕체의 소자로 쓰여 있다. 이 책은 세조 때 국역한 능엄경을 을해자와 한글 활자로 인쇄한 불경이다. 비록 권1의 1책에 불과하나 한글에는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을해대ㆍ중ㆍ소자와 한글 활자가 혼용되고 있어 조선초기의 인쇄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475837
경국대전 권3(經國大典 卷三) / 조선 성종 17년(1486) / 1권 1책 / 활자본/금속활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조선 건국 초기에 편찬된 여러 법전을 통합하여 성종 때 초주갑인자로 간행한 조선의 통합법전. 금속활자(초주갑인자) 1권 1책. 김민영 소장. 보물 제1521호. 조선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해 만든 조선시대 통일 법전이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이고 그것들이 전후 모순되거나 미비해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하는 고식적 법전 편찬 방법을 지양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만세성법(萬世成法)을 이룩하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여 통일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460년(세조 6) 7월에 먼저 재정ㆍ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戶典)과 호전등록(戶典謄錄)을 완성, 이를 『경국대전』‘호전’이라 이름 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刑典)을 완성해 공포, 시행했으며,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吏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공전(工典)도 완성하였다. 또 호전ㆍ형전도 함께 다시 전면적으로 검토해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신중을 기해 반행(頒行)을 보류하고 수정한 ‘신묘본(辛卯本)’을 편찬하였다. 이후로도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여 ‘갑오본’을 편찬하고, 또한 개수를 거쳐 마침내 ‘을사본’을 완성하여 초주갑인자로 간행하였다. 이 법전은 조선 창업주인 태조의 강력한 법치 의지가 계승, 발전된 조종성헌으로서,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법전의 조문은 나중의 법전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 사료가 된다. 이 대전의 ‘乙巳本’은 편찬 당시 초주갑인자로 인출되어 반포되었고, 그 뒤에도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여러 차례 복각 간행되었다. 이처럼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국대전은 최종본인 을사본을 저본으로 1486년(성종17)에 인출된 초주갑인자본과 1721년(경종1)에 무신자(戊申字)로 인출된 활자본이 남아 있으며, 후대에 이 활자본을 복각 간행한 목판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법전은 모두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1권 또는 2권씩 묶어 4책으로 제책되어 있다. 해제 대상본은 바로 1486년에 초주갑인자로 인출된 활자본인데, 전 6권 중에 권3에 해당되는 1책뿐으로 5권이 결본 상태이다. 현재 이와 동일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권1-3의 2책이, 성암고서박물관에 권5-6의 2책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주갑인자는 1434년(세종16)에 조선시대에 세 번째로 동(銅)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주조된 활자이다. 이 책은 전 6권 중 권3에 해당되는 1책으로 '예전'을 다루고 있다. 표지는 최근에 새로 보수하고 개장하였으며, 책의 크기는 34.7㎝×22.0㎝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이 보이고 있어 최선본으로 보기에는 곤란하나, 현전본이 극히 희귀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기본법전으로 1486년에 초주갑인자로 인출된 금속활자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비록 완질본은 아니지만 조선의 법제사와 금속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475838
금장요집경 권1~2(金藏要集經 券一~二) / 고려 후기(13세기) / 2권 1책 / 목판본/목판본 / 범어사 성보박물관 / 부산 금정구 / 선장[ 번역 해제 ] 1.『금장요집경』에 대하여 『금장요집경(金藏要集經)』은 그 제목에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이 ‘금장(金藏, 황금창고)’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고, ‘요집경(要集經, 여러 경전에서 발췌하여 수집)’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일본 및 국내 몇 명의 학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었으나, 2002년 초 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본이 알려지고, 이후『금장요집경』에 대한 지정(보물 1525호)이 이루어지면서 연구가 활발해지고, 오늘에 이르러 본격적인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금장요집경』은 남북조시대 말기 북제(北齊, 550년~577년)~북주(北周, 557~581)시대를 살았던 승려 도기(道紀)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관한 설화를 중심으로 각 경전에서 일반대중의 불교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을 편찬한 것이 ������금장론(金藏論, 처음 명칭)������이다. 범어사 본 『금장요집경』은 총 7권(卷) 중 산질(散帙)된 일부인 1~2권이다. 먼저『금장요집경』의 전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일본에는 모두 3종이 있다. ①가장 오래된 것으로 헤이안[平安]시대 전기에 필사된 흥복사본(興福寺本, 『금장요집론(金藏要集論)』 권 제6), ②헤이안시대 말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대곡대학 박물관 소장 필사본(大谷大學博物館所藏筆寫本, 『중경요집금장론(金藏要集金藏論)』, 약칭 대곡대본, 권1~권2, 권 2는 본래 『금장요집경』이 아닌 것이 오인되어 함께 수록된 것), ③근세말기 혹은 근대에 대곡대학본을 충실하게 베껴 쓴 경도대학본(京都大學本)이다. 한편 한국, 일본과 달리 중국에 고문헌의 형태로 전해지지는 『금장요집경』은 없지만 최근에 돈황사본에서 『금장요집경』의 일부로 볼 수 있는 6개의 문헌이 확인되었다. 돈황본A(敦煌本A, 권 5, 6) 돈황본B(권5, 6), 돈황본C(stain collecction, S3962), 돈황본D(stain collecction, S4654)와 『의초육첩(義楚六帖)』과 『육부보주(六部補注)』가 그것이다. 돈황본A는 본래 하나의 사본이 서로 단편으로 나뉘어진 3종류로 권5에 해당하는 일화 23편과 건6의 첫 번째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돈황본B는 돈황본A와 마찬가지로 『금장요집경』 권5와 권6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은 A보다 적다. C는 A, B의 권5 부분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돈황본D는 권 6의 목록 일부와 권6의 첫 번째 일부가 쓰여있다. 『의초육첩』은 『금장요집경』에서 인용하였음을 명기한 54항목, 명기치 않은 3항목 등 57항목(전문 혹은 대부분 발췌 형식)이 인용되고 있고, 『육부보주』는 『금장요집경』에 수록된 일화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위 각 소장본에서 보이듯이 『금장요집경』은 여러 이명(異名)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는 ������금장론(金藏論)������, 일본 대곡대본(大谷大本)과 경도대본(京都大本)은 ������중경요집금장론(衆經要集金藏論)������, 그밖에 ������금장집(金藏集)������, ������금장경(金藏經)������, ������제경요약문(諸經要略文)������, ������중경요약집(衆經要約集)������으로도 통용됨을 알 수 있다. 금번 『금장요집경』번역에 있어 저본(底本)은 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본 권1~권2으로, 11행 20자로 된 13세기 고려 후기 목판본으로 추정된다. 판심(版心)에는 ‘금장(金藏)’이라 적혀 있으며 판심에 기록되어 있는 판수(版手)들의 이름 중에는 재조대장경 목판의 각수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 있다. 그리고 교감본은「대곡대학부속도서관소장본(大谷大學附屬圖書館所藏本)」『중경요집금장론(衆經要集金藏論)』권1~권2이다. 1권은 저본과 일치하여 교감에 무리가 없었으나 2권의 내용은 타본의 6권에 해당하는 일화들로서 실제 교감대상이 될 수 없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2. 편찬자와 찬술 배경 『금장요집경』의 편찬자 도기(道紀)에 대해서는 ������속고승전(續高僧傳)������ 권30, 「잡과성덕편(雜科聲德篇)」 중 「고제업하사문석도기전(高齊鄴下沙門釋道紀傳)」에 그의 생애와 ������금장요집경������을 편찬하게 된 상황이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그는 북제(北齊) 천보(天保) 연간, 업성(鄴城)에서 30년간 성실론(成實論) 강의하였다. 그렇듯 성실론 등 강론의 우두머리였으나, 제자의 무례함의 도가 지나쳐 도덕과 윤리가 크게 땅에 떨어진 것을 한탄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신이 해왔던 교학을 접고 일반대중의 불교교화를 위한 인과응보의『금장요집경』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금장요집경』7권을 도속(道俗) 7명과 매 7일마다 강의하였으며, 경서와 탑 ․ 불상을 한 마리 소에 싣고, 또 다른 한 마리 소에는 노모와 빗자루를 싣고 다녔다. 지혜의 텃밭을 일구기 위하여 불지(佛地)와 탑을 쓸고, 십지(十地) 계위에 오른 보살과 같아지고자 어머니를 복전(福田)으로 친히 모시고 공양하였다. 사람들에게 8계를 지키게 하였고 도살(屠殺)을 허락하지 않으며 길에 서서 찾아다니며 교화하니, 당시 업성 근교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집이 열에 아홉 집은 되었다고 한다. 도기는 중국 불교에 있어서 일반대중을 위한 ‘교화승(敎化僧)’의 역할을 선도적으로 한 것으로 기억될 수 있다 하겠다. 일본 경도대본의 서문에는 이 책의 편찬 배경에 대하여 북제의 멸망과 폐불정책(廢佛政策)의 단행이 『금장요집경』 편찬의 배경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속고승전』의 내용이 사실을 보다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경도대본에서 북주의 폐불을 『금장요집경』 편찬의 원인으로 이야기 한 것은 폐불 이후 새로 증보된 책(7권 →9권)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3.『금장요집경』의 구성과 내용 『금장요집경』은 중국, 일본 및 한국 3국의 소장본을 검토한 현재까지, 권3~권4를 제외한 전체의 구성과 내용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범어사에 소장된 있던 『금장요집경』은 앞서 언급한 일본 소장본 및 중국 소장본과 비교할 때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자료이다. 『금장요집경』 전체의 구성을 알 수 있는 목차가 정확히 첫 장에 적기되어 있고 권1~권2의 내용이 낙장 없이 그대로 전해져 전체『금장요집경』이 본래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범어사본의 발견은 『금장요집경』 연구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범어사본 『금장요집경』(총 7권 중 산질(散帙)된 일부인 1~2권)의 구성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의상 기존에 발견된 권5~권6을 제외한다.) (1) 구 성 * 권1 사견연(邪見緣) 제1, 살해연(煞害緣) 제2 * 권2 매리연(罵詈緣) 제3, 참회연(懺悔緣) 제, 칭불연(稱佛緣) 제5, 관상연(觀像緣) 제6, 청법연(聽法緣) 제7, 구법연(求法緣) 제8 * 권3~권4 계연(戒緣) 제9, 식연(食緣) 제10, 업연(業緣) 제11, 보시연(布施緣) 제12, 간연(慳緣) 제13, ○○연 제14 * 권5 탑연(塔緣) 제15, 상연(像緣) 제16, 향화연(香花緣) 제17, 등연(燈緣) 제18, * 권6 번개연(幡盖緣) 제19, 출가연(出家緣) 제20, 가사연(袈裟緣) 제21, 효양연(孝養緣) 제22 * 권7 ○○연 제23, 잡연(雜緣) 제24 (2) 내 용 (권1~권2, 총 33연) * 권1 # 삿된 견해의 인연[邪見緣] 제1(3항) - 술의(述意) : 사견연 전체에 대한 서론적이며 결론적으로 삿된 의견에 대한 단선근자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명료하게 경계함. ① 구마라가섭이 비사왕(蜱肆王)을 위하여 삿된 견해의 과오를 비유로 설한 인연[迦葉爲蜱肆王說邪見過惡譬喩緣」 -『중아함경』에서 간략히 요약[出中阿含經略要] ② 수달장자의 집, 늙은 노비가 과거에 삿된 견해를 일으켜서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須達家老婢過去起邪見得惡報緣] -『관불삼매경』 6권에 나오는 내용[出觀佛三昧經六卷] ③ 삿된 견해로 삼보를 훼멸하고 나쁜 과보를 얻은 인연[邪見毁滅三寶得惡報緣] - 『살차니건경』을 요약함[薩遮尼乾經略要] # 살해를 한 인연[殺害緣] 제2(7항) - 술의(述意) : 살생의 과보를 말하니, 그 첫째는 단명, 둘째는 병이 많으니 그를 경계하고자 함. ① 석가족이 과거에 물고기를 죽여서 지금 유리왕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 인연[釋種過去殺魚今爲琉璃王所滅緣] -『증일아함경』에서 나오는 내용을 요약[出增一阿含經略要] ② 가류타이 등이 과거에 양을 죽이고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迦留陁夷等過去殺羊得惡報緣] -『비나야경』 제9권에 나오는 것을 요약[出鼻奈耶經略要第九卷] ③ 비사리의 서른두 명의 아들이 과거에 소를 죽여서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毗舍離三十二子過去殺牛得惡報緣] -『현우경』에 나오는 것을 요약함[出賢愚經略要] ④ 미묘비구니가 과거에 질투로 작은 부인의 아들을 살해하고 나쁜 과보를 얻은 인연[微妙過去妬殺小婦子得惡報緣] -『현우경』제3권에 나오는 것을 요약[出賢愚經要第三卷] ⑤ 숙대치가 벽지불을 살해하고 악한 과보를 받은 인연[宿大哆過去殺辟支佛得惡報緣] -『아육왕경』에 나오는 것을 요약[出阿育王經略要] ⑥ 사질이 과거에 벽지불의 팔을 자르고 과보를 받은 인연[師質過去斫辟支佛臂得報緣] -『불설보살본행경』 제 1권에 나오는 이야기를 요약[出菩薩本行經要第一卷] ⑦ 구나라가 과거에 사슴의 눈을 도려내고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駒那羅過去壞鹿眼得惡報緣] -『아육왕경』 제4권의 내용을 요약 [出阿育王經略要第四卷] *권2 - 술의(述意) : 『십지경』을 인용하여 악구의 과보를 3악도에 태어나며, 항상 악성을 들어야 하고, 다툼과 시비가 있게 된다 함. # 욕하고 꾸짖은 인연[罵詈緣] 제3(5항) ① 정진하며 계를 지키는 비구를 꾸짖어서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罵精進持戒比丘得惡報緣] -『출요경』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出出曜經略要)] ② 염파라가 과거에 비구를 욕하고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閻波羅過去罵比丘得惡報緣] -『백연경』에서 요약[出百緣經要)] ③ 가비리가 비구들에게 짐승의 머리를 들어 욕설하고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迦毗梨罵比丘獸頭得惡報緣] -『현우경』에서 요약[出賢愚經略要] ④ 부나기가 과거 비구를 욕하고 노비가 되어 나쁜 과보를 받은 인연[富那竒過去罵比丘作奴緣] -『현우경』에 나오는 이야기[出賢愚經)] ⑤ 금강추녀가 과거 벽지불에게 욕설하여 추한 과보를 받은 인연[金剛醜女過去罵辟支佛得醜報緣] -『현우경』 제2권에서 요약[出賢愚經略要第二卷)] # 참회한 인연[懺悔緣] 제4(3항) ① 월지국왕이 지혜로운 세 사람과 친한 벗이 된 인연[月氏國王與三智人作親友緣]-『잡보장경』에 나오는 것을 요약[出雜寶藏經略要)] ② 화생한 왕자가 과거에 향을 탑에 바르고 참회한 인연[化生王子過去香塗塔懺悔緣]-『백연경』에서 요약[出百緣經略要)] ③ 부처님이 설하신 다라니주로 참회하여 죄를 없앤 인연[佛說陁羅尼呪懺悔除罪緣]-『칠불신주경』에서 요약[出七佛神呪經略要)] #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인연[稱佛緣] 제5(3항) ① 국왕이 부친을 죽이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불러서 지옥을 벗어난 인연[國王殺父至心稱佛得脫地獄緣] -『비유경』에서 요약[出譬喩經略要)] ② 오백명의 석자들이 과거에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하늘에 태어난 인연[五百釋子過去稱佛得生天緣] -『관불삼매경』에서 요약[出觀佛三昧經略要)] ③ 재수보살이 과거에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부처님을 만난 인연[財首菩薩過去稱佛得值佛緣] -『관불삼매경』에서 요약[出觀佛三昧經略要)] # 부처님의 상(像)을 관하는 인연[觀像緣] 제6(3항) ① 시방불이 과거에 불상(佛像)을 관(觀)하고 찬탄하여 성불한 인연[十方佛過去觀像讚歎成佛緣] -『관불삼매경』에 나옴[出觀佛三昧經] ② 사방불이 과거에 상을 관하여 성불한 인연[四方佛過去觀像佛得成佛緣] -『관불삼매경』에 나옴[出觀佛三昧經] ③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에 불상(佛像)을 관하여 성불한 인연[釋迦佛過去觀像成佛緣] -『가섭경』에 나옴[出迦葉經] # 법을 들은 인연[聽法緣] 제7(5항) ① 중생이 법을 듣고 이익을 얻은 인연[衆生聽法得利益緣] -『부법장경』에 나옴[出付法藏經] 사나웠던 코끼리가 절 근처에서 설법을 들은 후 온순해짐. 다시 도살장 근처에 두자 본래대로 사나워짐. ‘일체 중생은 성품이 정해진 바가 없음[一切衆生 志性無定] ② 월광이 절에 가서 경을 듣고 천상에 태어난 인연[月光詣寺聽經得生天緣] -『백연경』에 나옴[出百緣經] ③ 앵무새가 사제의 이름을 듣고 천상에 태어난 인연[鸚鵡聞四諦名得生天緣] -『현우경』에 나옴[出賢愚經)] ④ 조개가 설법을 듣고 천상에 태어난 인연[蛤聽法得生天緣] -『선견율비바사』에 나옴[出善見律毗婆娑] ⑤ 새가 비구의 경 외우는 것을 듣고 천상에 태어난 인연[鳥聞比丘誦經得生天緣] -『현우경』에 나옴[出賢愚經] # 법을 구한 인연[求法緣] 제8(4항) ① 여인이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구하여 도를 얻은 인연[女人至心求法得道緣] -『잡보장경』에 나옴[出雜寶藏經] ② 석가가 과거에 여덟 글자를 위하여 몸을 버린 인연[釋迦過去爲八字捨身緣] -『열반경』에 나옴[出涅槃經] ③ 석가가 과거에 법을 구하고 공양하기 위하여 몸을 판 인연[釋迦過去爲求法供養賣身緣] -『열반경』에 나옴[出涅槃經] ④ 석가가 과거에 법을 위하여 살가죽을 벗겨 종이를 만든 인연[釋迦過去爲法剝皮爲紙緣] -『집일체복덕삼매경』에 나옴[出集一切福德三昧經] 4.『금장요집경』 연구의 과제 위에서 간략히 보았듯이 『금장요집경』은 일본, 중국, 한국을 포함한 3국에 널리 유통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금장요집경』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져 왔고, 큰 성과물도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초부터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오다가 근래에 몇 편의 논문이 나왔으나 개인 몇 학자에게만 국한되어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연구 학자 층이 매우 얇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앞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일이다. (작성자: 효탄)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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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관련 고문서-이순신선무공신교서(李舜臣宣武功臣敎書) / 조선 선조 37년(1604)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현충사관리소 / 충남 아산시 / 권자장임진왜란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이다. 충무공 사후(死後) 6년 후인 1604년(선조37년, 만력32년)에 내린 선무공신교서는 임진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18명에게 내린 것이다. 1등은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의 3인이고, 2등은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 이억기(李億祺)등 5인, 3등은 정기원(鄭期遠), 권협(權?), 유사원(柳思瑗),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 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 이운룡(李雲龍) 등 10인이다. 이순신은 1등 3인 중에도 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 문서는 77행(行)에 걸쳐 이순신이 세운 공적에 대한 찬양과 공신으로 책훈함에 따른 상으로 본인과 부모, 처자를 3階級(계급) 승진시키고, 노비 13구와 토지 150결, 은자 10량, 표리 1단,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면(裏面)에는 본 교서를 필서한 당대의 이름 높은 사자관((寫字官)인 이경량(李景良)의 성명이 작은 글자로 필서 되어 있다. 이 교서는 임진왜란사 및 이순신에 대한 연구와 함께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번역 해제 】 (1축) 1604년 10월 宣祖가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李舜臣·權慄·元均 등 18명에게 ‘宣武功臣’이라는 이름으로 공신을 책봉하여 敎書를 내렸다. 이때 이순신에게 내린 교서가 ‘敎正憲大夫行全羅左道水軍節度使 贈效忠仗義迪義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德豊府院君李舜臣書’인데, 이를 이순신의 宣武功臣敎書라고도 한다. 이 宣武功臣敎書는 덕수이씨 종가에서 소장해 오다가 현충사에 기증하였고,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4호로 지정 예고되었다. 글씨는 寫字官 李景良이 씀. 목판활자본으로『忠武公全書』에 ‘策宣武元勳敎書’가 있고, 또 다른 필사본으로 규장각본 ‘扈聖宣武原從三功臣都監儀軌’가 있다. 선조는 서두에서 이순신의 忠義와 貞節을 존숭하고자 元勳에게 포상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임진왜란으로 八道가 위급한 상황에서 왜적이 평안도북방까지 침탈하려는 것을 막고 국난의 위기를 극복한 공훈이 가장 으뜸이었다. 全羅左水使 재직시에 거북선을 창제하여 露梁해전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조정은 후퇴한 일로 감옥에 가두어 수군이 패전하게 되자, 그후 다시 장수의 권한을 돌려주어 수습하였다. 당시에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처사가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후회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이순신에 대한 사후의 포상과 가족과 후손들에 대한 처우를 기록하였고 이순신의 畵像은 雲臺와 凌煙閣에서 생생한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고 칭송하였다. ( 작성자 : 노승석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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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 조선 성종 16년(1485) / 3권 1책 / 목판본/목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당나라 때 법등(法燈)이 한역한 지장경은 현세 이익적인 불경으로 우리나라 지장신앙(地藏信仰)의 기본 경전으로 널리 신봉되었으며, 조선시대 성종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85년에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주관으로 견성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 목판본 3권 1책(완). 김민영 소장. 보물 제1567호. 이 불경은 부처님이 도리천(克利天)에서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하여 설법한 것을 모은 것이다. 부처님은 지장보살을 불러 갖가지 방편으로 지옥 ㆍ 아귀 ㆍ 축생 ㆍ 아수라 ㆍ 인간 ㆍ 천상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을 교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과 죄를 짓고 지옥의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려는 유명교주(幽明敎主) 지장보살의 큰 서원(誓願)을 말씀하신 경전이다. 이 불경은 도리천궁신통품(忉利天宮神通品) ㆍ 분신집회품(分身集會品) 등 13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옛 부터 불문(佛門)의 효경(孝經)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를 천도하고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재식법회(齋式法會) 등에서 중요하게 독송되고 있다. 특히, 지장재(地藏齋)의 의식과 사찰 당우(堂宇) 가운데 명부전(冥府殿)의 구성은 이 지장경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 경은 지옥의 고통을 파하고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공덕에 근거하여 교학적 측면의 연구보다는 공덕용으로 수많은 판본이 개판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장신앙(地藏信仰)의 기본 경전으로 널리 신봉되었던 현세 이익적인 불경으로,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이며, 이를 줄여서 『지장경』 또는 『지장본원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 때의 법등(法燈)이 한역한 3권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이 책은 성종 5년(1474) 4월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에서 불과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해 5월에 정희대왕대비의 전지로 내수사에서 비용을 충당하여 광평대군(廣平大君) 부인 신씨의 원찰인 견성사(見性寺)에서 완성한 경판을 기본으로 하고, 1485년에 누락된 경판을 보각하여 간행한 불경에 해당된다. 이처럼 이 책은 그 후에 경판의 일부가 없어져 성종 16년(1485) 4월 화주 비구니 신환(信環)이 권수의 ‘至心歸命禮’와 상권의 판심에 대흑구가 들어 있는 제24~26판을 새로 보각(補刻)하여 간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보판기록은 권상의 말미에 ‘成化二十一年(1485)四月日補刊’이라는 기록이 있고 보각한 제24~26판의 판심 상하에 대흑구가 새겨져 있어 다른 판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후대의 보판(補板)임이 확인된다. 이와 동일판이 현재 호림박물관, 국립도서관, 성암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보물 1104호로 지정되어 있는 호림박물관소장본은 권수에 변상도가 들어있지 않고 완결이 보이고 있어 후인본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성종 5년(1474) 4월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에서 불과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해 5월에 정희대왕대비가 내수사로 하여금 비용을 충당케 하여 광평대군(廣平大君) 부인 신씨의 원찰인 견성사(見性寺)에서 완성한 경판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1485년에 누락된 경판을 보각하여 간행한 불경에 해당된다. 이 책은 비록 후대 보판한 판본에 해당되나, 현재 초각본이 발견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동일본이 이미 보물로 지정된 사례가 있어 조선전기 불교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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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 / 조선 광해군 6년(1614) / 1첩(帖) / 서예/서예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첩장조선중기의 명필 김현성(金玄成)이 쓴 행서(行書) 서첩이다. 첩 말미에 쓴 김현성의 글을 보면, 돌아가신 판서 이증(李增)의 아들 이경함(李慶涵)이 집안에 간직해 온 부친의 유고(遺稿) 첩을 보이면서 따로 한 벌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옛날 이증과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인연을 생각하여 1614년 10월에 썼다고 한다. 이증(1525~1600)은 선조(宣祖) 때의 문신으로 호는 북애(北崖),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549년 진사가 되고 156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각조의 낭관과 참판, 한성부 좌우윤ㆍ사헌부ㆍ대사헌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황해도ㆍ충청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590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으며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형조ㆍ예조ㆍ공조 판서와 의정부 좌우참찬 등을 지냈다.이 서첩에 실린 이증의 유고는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9편으로 1581년 원수(元帥)에게 증여한 시와 1582년 충청도 덕산ㆍ신창 등을 돌아보고 지은 시들이다. 김현성(1541~1621)의 호는 남창(南窓),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560년 진사가 되었고 양주목사 등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618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폐위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직되었다.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잘했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글씨는 조선초기 이래 유행된 조맹부(趙孟頫) 서풍을 따랐는데 부드럽고 유려한 필치가 특징적이다. 비문 필적으로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여수의 「이순신좌수영대첩비(李舜臣左水營大捷碑)」 등이 유명하다. 이 서첩은 김현성 63세의 원숙한 노년(老年) 서풍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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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첩 곤(宸翰帖 坤) / 조선 17세기 후반 / 1첩(帖) / 서예/서예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 달서구 / 첩장조선후기 17세기 여섯 왕과 왕비가 쓴 한글서찰을 모은 첩이다. 표지에 “신한첩(宸翰帖) 곤(坤)”이라 쓰여 있어 원래 건곤(乾坤) 2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한’이란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뜻한다. 서찰을 보낸 사람은 효종(孝宗, 1619~1659), 현종(顯宗, 1641~1674), 숙종(肅宗, 1661~1720),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이다. 서찰을 받은 사람은 효종의 넷째 딸로 정제현(鄭齊賢)과 혼인한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이다. 서찰은 모두 36통(효종 2, 현종 3, 숙종 6, 인선왕후 18, 명성왕후 2, 인현왕후 5)이다. 작성 시기는 17세기 후반이다. 내용은 대부분 일상적인 안부나 소식, 당부 등이다. 첫 면에 정제현의 후손 되는 정진석(鄭晉錫, 1779~?)이 1802년 작성한 글이 있어 원래 건(乾) 첩에 4분의 어필을 실었고 곤(坤) 첩에 6분의 한글서찰을 실었는데, 사위나 공주에게 써준 서찰과 숙종의 시, 효종의 발문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첩 말미에 인현왕후가 흰색 비단으로 만든 선물주머니 두 면을 붙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신한첩은 17세기 조선왕실의 한글서찰을 대표하는 것으로 편지에 사용되는 우리말 어법과 한글 필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정진석의 글 풀이) 한글서찰첩[諺書帖] 공손히 생각하건대 이 두 첩이 건은 바로 4분의 어필이요 곤은 바로 6분의 한글서찰이다. 혹 도위(都尉: 임금의 사위)를 명하여 주신 것이요 혹 공주를 은혜로써 물으신 것이니, 일찍이 숙종께서 몸소 지으신 시율과 효종께서 친히 지으신 발문 같은 것은 더욱이 아낌으로써 주신 것이다. 집에 간직된 옛 첩이 크고 작음이 가지런하지 않아 편안히 모실 도리에 편치 못 한 점 있는 까닭에 이제 고쳐 꾸며 합치어 두 권으로 만들고, 언서첩 끝에 공경히 인현왕후께서 친히 만드신 비단으로 붙인 선물주머니[膳囊] 양면을 붙여서 길이 대대로 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에 자손이 되어서는 다행이요 신하에 있어서는 영화이다. 가히 후손으로 하여금 석실과 금궤에 감추고 호위하여 장차 천지와 함께 하며 국가와 한 가지로 그 오램을 같이 할 것이니, 어찌 감히 보통의 중보(重寶)로서만 의논하겠는가? 금상(今上) 2년 임술 칠월에 외손 신(臣) 진석이 황공스럽게 삼가 적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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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李衡 佐命原從功臣錄券 및 函) / 조선 태종 11년(1411) / 1축 / 국왕문서/교령류 / 이병진 / 충북 영동군 / 권자장조선 태종 11년(1411) 11월에 당시 통훈대부판사재감사였던 이형에게 발급한 3등원종공신록권이다.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태종이 세자로 잠저(潛邸,동궁)에 있을 때, 밤낮으로 호위하고 보좌한 신하들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포상하였던 원종공신록권으로 모두 83인에게 발급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에게 수여된 포상은 일등(一等)에게는 전지(田地) 30결(結)·노비(奴碑) 3구(口) 이등(二等)에게는 전지 25결(結)·노비 2구(口), 삼등(三等)에게는 전지 15결(結)을 각각 지급하고 후손에게는 음직(蔭職)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녹권 끝에는 시행일자 다음에 발급에 관여한 사무 집행자의 관함(官銜), 성(姓), 수결(手決)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연월일과 문서를 이은 부분 4군데에 ‘이조지인(吏曹之印)’을 찍었다. 태종 때의 원종공신녹권으로는 처음 발견된 녹권으로,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진위이씨문중자손(振威李氏門中子孫)에 의해 소중하게 보관되어 오다가 문화재지정과 함께 궁중유물전시관에 위탁되어 보관되었다. 【 번역 해제 】 (1축) 이 녹권(錄券)은 1411년(태종11) 11월, 전(前)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司宰監) 판사(判事)였던 이형(李衡)에게 발급한 3등 원종공신(原從功臣) 녹권이다. 공신녹권은 국가나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인 공신에게 공적의 보답으로 봉작(封爵)하여 공신호(功臣號)를 내려주었고 등급에 따라 포상과 혜택을 주었다. 그리고 공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교서(敎書)나 녹권이 발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佐命) 등, 세 가지 공신의 정공신(正功臣)에게 한해 교서와 녹권을 주었으며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 주었다. 원종공신의 명칭에서 ‘원종(原從)’이라 한 것은 명나라 태조의 휘(諱)가 주원장(朱元璋)이어서 피휘(避諱)한 것이다. 조선초기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사용되었다가 중종 조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개 원종공신은 정공신에 비해 인원이 매우 많아,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조선 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이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따라,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고 4등위로 나누었다. 이와 별도로 태종은 세자 시기였던,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밤낮으로 호위한 신하 83명을 선정하여 그들을 세 등위로 나누어 원종공신으로 삼고 이들에게 전지(田地)와 노비를 하사였다. 1등 공신은 의령군(宜寧君) 남재(南在) 등 19명, 2등 공신은 순녕군(順寧君) 이지(李枝) 등 15명, 3등 공신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정역(鄭易) 등 49명이다. 1등 공신은 전지(田地) 30결ㆍ노비 3명, 2등 공신은 전지 25결ㆍ노비 2명, 3등 공신은 전지 15결 등이 각각 사급(賜給) 받았고, 후손들에게 음직(蔭職)을 수여하며 자손들이 비록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고 사면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이형은 3등 공신으로 원종공신녹권을 사급 받았다. 이 녹권의 발급처는 이조(吏曹)로서 당시까지 발급된 녹권들과 다르다. 공신도감(功臣都鑑)이 충훈사(忠勳司)로 개칭된 것은 1434년(세종16)이고, 충훈부(忠勳府)로 승격한 것이 1454년(단종2)이다, 그러므로 녹권 발급이 이조로 이관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녹권은 공신도감에서 발급한 것이 아니고 이조에서 왕명(王命)을 받들어 발급한 것이므로 끝에는 시행 일자와 녹권 발급에 관여한 이조 관원들의 관직명ㆍ성씨ㆍ수결 등이 나열되어 있다. 좌랑(佐郞) 3명, 정랑(正郞) 3명, 지사(知事) 1명, 좌·우참의(左·右參議) 2명, 판서(判書) 1명, 판사(判事) 1명 등 모두 11명이다. 이형의 원종공신녹권은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녹권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원종공신녹권이다. 공로의 내용과 공신의 직함ㆍ성명과 등급별 포상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그들에게 내려진 대우와 포상규정을 알 수 있으며, 이런 내용 등은 『태종실록(太宗實錄)』에도 없는 조선 초기 원종공신 관련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 공신들의 이름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이 녹권에만 전하므로 좌명원종공신의 유일한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 작성자 : 정경훈 )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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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千字文) / 조선 선조 16년(1583) / 1책(冊) / 목판본/관판본 / 김자현 / 경기 성남시 / 선장이 목판본은 1583년(선조16) 정월에 한호(韓濩)가 왕명에 따라 쓴 천자문으로 흔히『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이라 부른다. 표지 안쪽 면에 1583년 7월에 사간원 대사간 박승임(朴承任)에게 천자문 1건을 내린다고 쓰여 있고 첫째 면 위쪽에 “내사지기(內賜之記)”란 어보(御寶)가 찍혀 있어 임금이 하사한 내사본(內賜本)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초간본은 매우 드물어 현재 도쿄 국립공문서관(國立公文書館)에 하나 전하며 국내에는 이것이 유일하다. 벌레 먹은 곳은 적으나 군데군데 물에 젖은 자욱이 있고 먹물도 묻었으며 책장을 넘기는 귀퉁이가 헐었다. 또 책장을 배접하고 귀퉁이를 보강하는 한지를 덧붙이기도 했다. 이처럼 보존 상태는 좋지 않으나 전체 42장이 모두 남아 있고 내사 기록을 통해 1583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초간 후『석봉천자문』은 임진왜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601년(선조34)에 내부(內府: 조선시대 왕실 재정ㆍ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간행되었고 1691년(숙종17), 1754년(영조30)에도 중간(重刊)되었으며, 또 지방 관아나 개인에 의해서도 널리 되새겨졌다. 이처럼『석봉천자문』은 계층을 막론하고 애호를 받았고 특히 초학(初學)의 아동을 위한 한자교재 또는 표준 자형을 갖춘 글씨교재로서 널리 애용되었다. 한호(1543~1605)의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이다. 개성 출신으로 1567년(명종22) 진사시에 합격했다. 글씨 재주로 외교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이 되어 명성을 얻었으며, 국가적인 서사(書寫) 업무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필적을 남겼다. 벼슬은 와서별제(瓦署別提)ㆍ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등을 거쳐 가평 군수(加平郡守)ㆍ흡곡 현령(歙谷縣令)을 지냈다. 글씨는 조선 초 이래 유행된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따라 고풍스럽고 단정한 글씨를 구사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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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 고려 우왕 13년(1387) / 1책 / 목판본/목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송나라의 대혜 종고(大慧 宗杲)가 간화선법을 물어온 42인에게 사악한 견해를 깨뜨리고 정법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 보낸 62통의 편지글을 후에 그의 문인 혜연(慧然)이 기록하고 황문창(黃文昌)이 엮어 송나라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고려 말 1387년에 지담(志淡) 등이 개판한 선종 불서. 목판본 1책. 김민영 소장. 보물 제1662호. 이 책은 우리나라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로 사집과 과정으로 학습되어 오고 있는 불서로 흔히 이를 약칭하여 ‘大慧書’ 또는 ‘大慧書狀’, ‘書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나라의 대혜 종고가 간화선법에 바탕을 두고 그에게 법을 물어온 42인에게 삿된 견해를 깨뜨리고 정법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 보낸 62통의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고려시대의 지눌이 이 책을 보다가 도를 깨친 뒤 간화선 수행에 지침서로 삼았던 까닭에,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사집과 교과목 중 제1의 과목으로 선정하여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은 선학 공부를 시작하는 학승들에게 바른 지견을 심어 주어 그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길라잡이와 같은 선종의 지침서이다. 김민영 소장본은 고려 말 1387년에 지담(志淡)과 각전(覺全) 등이 개판한 판본이다. 표지는 가철 상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래 불복에서 나온 책으로 보인다. 표제는 ‘大慧語錄’으로 묵서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24.5㎝×15.1㎝이다. 권수에는 서문이나 목차 없이 바로 권두제면이 나타난다. 권수 서명은 ‘大慧普覺禪師書’로 되어 있으며, 다음 행 아래에는 ‘參學 慧然 錄/淨智居士黃 文昌 重編’이란 저자표시가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혜 종고가 남긴 글을 문인 혜연이 수집 기록하고 황문창이 재차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은 먼저 표제어를 두고 행을 달리하여 내용이 시작되는 형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권말에는 이 책의 편찬 및 간행배경을 밝히고 있는 황문창의 후기와 ‘乾道二年(1166) 徑山妙喜菴刊行’이란 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洪武二十年(1387)‘에 李穡이 쓴 발문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은 이미 남송 1166년에 중국 임안부의 경산 묘희암에서 간행된 사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1387년에 이색의 발문을 붙여 송판본을 저본으로 복각 간행하였던 내력을 알 수 있다. 권말에 이색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 ‘同願/王謹妃’란 기록과 그 아래에 晉川君 姜仁富와 幹善山人 志淡과 覺全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강원에서 사집과에서 학습 교재로 널리 사용되어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23종이 개판되었던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김민영 소장의 해제본은 현존 유일의 고려본으로 조선 사찰본의 모본이 되었던 귀중한 판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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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4~5(三國遺事 卷四~五) / 고려 충렬왕 7년(1281) / 2권 1책 / 목판본/관판본 / 범어사(성보박물관) / 부산 금정구 / 선장《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후기에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경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것은 그 중 권4∼5를 1책으로 묶은 것이다. 4권은 62장, 5권은 56장으로 모두 합하여 118장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의 저술을 위해 사료를 수집한 것은 청년시절부터였으며, 원고의 집필은 대개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저자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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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의기 권상, 하(大乘起信論義記 卷上, 下) / 고려 / 2권 2책 / 목판본/목판본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선장(1책)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법장(法藏)이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해 『의기(義記)』를 붙여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 이론서. 목판본 1권 1책(결본). 김민영 소장. 보물 제1663호. 마명(馬鳴)의 편찬으로 알려 진 『대승기신론』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서 단편에 불과 하지만 불교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법장의 『義記』와 원효(元曉), 혜원(慧遠)이 각각 소(疏)를 붙인 것을 ‘起信論三疏’라 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법장의 『의기』는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에 저술된 기신론에 관한 주석서들은 대부분 이 법장의 『의기』를 참작하였을 정도로 가장 훌륭한 주석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법장은 이 『의기』에서 『대승기신론』이 1심(心)ㆍ2문(門)ㆍ3대(大)ㆍ4신(信)ㆍ5행(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불교 전체를 4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다만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총록』에 서명은 보이고 있으나, 정작 찬자인 법장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해제 대상본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유일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표지는 원상으로 보이나 훼손이 많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책은 본래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김민영본은 권중이 결본인 상태로 권상과 권하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0.7㎝×19.6㎝이다. 표지를 넘기면 바로 권수제 ‘大乘起信論義記’가 보이고, 다음 행에 ‘西大原寺沙門 法藏 述’이란 저자표시가 분명히 기입되어 있어 법장이 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간기 또한 보이지 않고 있어 간행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본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필로 구결이 묵서되어 있다. 판식의 특징이 고려 후기에 간행된 『선문염송집』과 『천로금강경』 등 고려본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특징과 흡사하다. 그리고 자체(字體)는 교장본에서 보이는 특징을 다분히 지니고 있으나, 어미가 있는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대체로 교장본을 저본으로 고려 후기에 새로 판하본을 써서 판각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정장(大正藏)에 수록된 판본과는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법장이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에 대해 『의기』를 붙여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이 판본은 현재까지 일반에 소개되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책)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법장(法藏)이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해 『의기(義記)』를 붙여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교 이론서. 목판본 1권 1책(결본). 김민영 소장. 보물 제1663호. 마명(馬鳴)의 편찬으로 알려진 『대승기신론』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서 단편에 불과하지만 불교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법장의 『義記』와 원효(元曉), 혜원(慧遠)이 각각 소(疏)를 붙인 것을 ‘起信論三疏’라 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법장의 『의기』는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에 저술된 기신론에 관한 주석서들은 대부분 이 법장의 『의기』를 참작하였을 정도로 가장 훌륭한 주석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법장은 이 『의기』에서 『대승기신론』이 1심(心)ㆍ2문(門)ㆍ3대(大)ㆍ4신(信)ㆍ5행(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불교 전체를 4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다만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총록』에 서명은 보이고 있으나, 정작 찬자인 법장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김민영 소장본이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유일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표지는 원상으로 보이나 훼손이 많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책은 본래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해제 대상본은 권중이 결본인 상태로 권상과 권하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1.0㎝×20.0㎝이다. 표지를 넘기면 바로 권수제 ‘大乘起信論義記’가 보이고, 다음 행에 ‘西大原寺沙門 法藏 述’이란 저자표시가 분명히 기입되어 있어 법장이 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간기 또한 보이지 않고 있어 간행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본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필로 구결이 묵서되어 있다. 판식의 특징이 고려 후기에 간행된 『선문염송집』과 『천로금강경』 등 고려본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특징과 흡사하다. 그리고 자체(字體)는 교장본에서 보이는 특징을 다분히 지니고 있으나, 어미가 있는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대체로 교장본을 저본으로 고려 후기에 새로 판하본을 써서 판각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정장(大正藏)에 수록된 판본과는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법장이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에 대해 『의기』를 붙여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불서이다. 이 판본은 현재까지 일반에 소개되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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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진 전예 경산전팔쌍절첩(李漢鎭 篆隸 京山篆八雙絶帖) / 조선 정조 14년(1790) / 1첩 / 서예/서예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첩장이 첩은 18세기 후반의 전예 명필인 경산 이한진(1732-?)이 59세인 1790년(정조14) 겨울에 오언율시 여러 수를 전서와 예서로 쓴 것이다. 전서는 획이 가늘고 굵기가 일정한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옥저전(玉箸篆) 계통이며, 예서는 동한시대 예서비로 유명한 예기비(禮器碑)와 조전비(曺全碑)를 혼합한 듯하다. 이한진은 앞 시기의 명필인 이인상과 송문흠의 서풍을 계승하여 이를 발전시킨 인물로, 이 서첩은 현존하는 이한진의 몇몇 필적 가운데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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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 / 조선 순조 10년(1810) / 3첩(帖) / 서예/서예 /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 종로구 / 첩장이『하피첩(霞帔帖)』은 조선후기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49세 때인 1810년(순조10)에 쓴 것이다. ‘하피(霞帔)’는 아내의 예복을 뜻한다. 첩 앞쪽에 쓴 정약용의 글에 따르면,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홍씨 부인이 헐고 빛바랜 활옷(혼례 때 신부가 입는 붉은 비단 예복)을 부쳐오자 이를 잘라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훈계하는 말을 써주었다고 한다. 두 아들은 정학연(丁學淵, 1783~1859)과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이다. 훈계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첫째 첩 : 효성과 우애[孝悌]는 어짐[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다.『소학(小學)』의 아름다운 말씀과 선한 행동을 본받아 실천하라. 또 사대부가 벼슬에 나가면 빨리 산언덕에 셋집을 내어 선비의 본색을 잃지 말고, 벼슬에서 떨어지면 빨리 서울에 의탁하여 문화(文華)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라. 늘 마음을 화평(和平)하게 하라. * 둘째 첩 : 아버지 책을 차분히 연구하여 깊은 이치에 통하기를 바란다. 군자가 책을 쓰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알아주길 구하는 것이다. 입고 먹는 것과 재물은 모두 부질없는데, 특히 재물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 제일 좋다. 벼슬이나 세력, 재물이나 돈 등은 달관(達觀)한 사람의 눈에는 한 톨의 밤처럼 보인다. (어린 손자에게 보낸 훈계에서) 고향 마현(馬峴)의 옛 터전을 굳게 지켜라. * 셋째 첩 : 공경[敬]으로 몸을 곧게 하고 의리[義]로써 몸을 방정하게 하라. 옛사람이 “우주 사이의 일은 바로 자기 분수 안의 일이며, 자기 분수 안의 일은 바로 우주 사이의 일이다” 하였듯이 대장부는 늘 이를 생각해야 한다. 도(道)로써 몸을 굽히고 펴며, 때[時]에 따라서 사라지고 쉬어라. 영달과 수치[榮辱]는 하나같이 이르게 되니, 끝까지 통하는 것은 오직 천명(天命)이다. 마음을 성실[誠]로써 기르고, 몸에 공경[敬]을 지녀라. 사대부는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게 된다. 사소한 것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지 말라.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하며 가난하고 낮은 사람일수록 더욱 말을 참아야 한다. 붕당(朋黨)에 엮이지 말라. 붕당의 사사로움을 깨끗이 씻어버려라. 큰 흉년에 굶어 죽은 백성이 수만 명인데, 그들을 살펴보니 모두 게으른 사람이었다.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근면[勤]과 검약[儉]이다. 성실[誠]을 귀중하게 여기라. 설령 부귀가 극에 이른 선비군자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은 오직 근검이다. 근면으로 재물을 이루고 검약으로 가난을 구제하라.출처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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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선생집 권1(三峯先生集 卷一) / 조선 세조 11년(1465), 성종 18년(1487) / 1권 1책(59장) / 목판본/관판본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 달서구 / 선장『삼봉선생집(三峯先生集)』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이며 문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시문집으로, 세조 11년(1465)에 중간(重刊)된 안동판(安東版)과 성종 18년(1487)에 삼간(三刊)된 강릉판(江陵版)이 합본된 1책의 목판본(木版本)이다. 『삼봉선생집』은 권두(卷頭)에 권근(權近, 1352~1409)의 서문(序文)에 이어 오언고시(五言古詩) 51수, 칠언고시(七言古詩) 7수, 오언절구(五言絶句) 4수, 육언절구(六言絶句) 8수 등 도합 70수의 시(詩)와 「양촌부(陽村賦)」「묵죽부(墨竹賦)」「매천부(梅川賦)」 등의 부(賦)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卷末)에는 중국인 주탁(周倬)의 「후지(後識)」와 중국인 장부(張溥)의 「제삼봉시집(題三峯詩集)」 및 이색(李穡, 1328~1396)의 발문(跋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봉선생집』의 판형은 2종으로 구성되어 제1~30판은 중간의 안동판이고 제31~54판은 삼간의 강릉판이며, 제41판과 제42판은 제책상(製冊上)의 실수인 듯 순서가 바뀌어 있다. 전체적으로 변란(邊欄)의 형태와 책의 크기 및 지질(紙質) 등은 동일하나, 안동판(제1~30판)의 판식(版式)은 ‘반곽(半郭) 16.3×12.5㎝, 유계(有界), 11행20자, 백구(白口), 무어미(無魚尾)’인데 비하여 강릉판(제31~54판)의 판식은 ‘반곽 16.7×13.0㎝, 유계, 11행20자, 대흑구(大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삼봉선생집』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문집으로 인물의 비중이나 내용의 중요성은 물론 한문학(漢文學)과 서지학(書誌學) 및 판본학(版本學)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