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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서원
충렬서원은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576년(선조 9) 이계(李啓)ㆍ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와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이 서원을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웠었다. 서원 이름도 죽저서원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회진되어 1605년(선조 38)에 이정구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현감 정종선, 이시윤등과 함께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중건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문주방과 고사 등을 갖추었다. 이때 조광조이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겨 배향 하였다. 중창과 함께 충렬이라 사액되었으며,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설곡 정보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저한 죽창 이시직을 추가 배향 하였다. 1706년(숙종 32)에 다시 후손 정제두ㆍ정찬조를 비롯한 여러 유림의 공의로 옛터 서쪽 가까운 곳에 이건하였다. 그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칸의 사우, 동서 협문,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 되고 있는 추담 오달제(秋潭 吳達濟)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를 사용되고 있다. 특히 출렬서원은 일정한 중심 축이 없어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사당이 동시에 보인다. 한떄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나, 그후 교육공간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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