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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향교 비각
향교는 유교의 옛성현을 받들고, 지역 사회에서 인재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교육 기관이다. 진주에는 799(신라 소성왕 원년)에 진주의 전신인 청주 거로현을 국학 학생들을 위한 녹읍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987년(고려 성종 6)에 향학당을 창건하고 중앙에서 교수를 파견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사교학당이 세워져 있어서 강민첨(姜民瞻, 963-1021) 장군이 그곳에서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398년(조선 태조 7)에는 여기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를 창건하고 성균관에서 교수를 파견하여, 그때까지 이어져 오던 관학의 지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교육 도시 진주의 명성도 오랜 전통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뉘다.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ㆍ서재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ㆍ서무는 제례 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진주 향교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향교 건물배치의 일반덕 형태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교육 영역에 명륜당 외에 사교당이 있어, 명륜당이 두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떄문에 중심 축선이 통로처럼 되어버렸다. 또한 대성전의 영역이 너무나 넓고 지대 또한 높아, 아래의 명륜당 영역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인 데다가, 대성전의 내삼문 역시 너무 들어와 있어서 동 ㆍ서무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중수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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