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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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承俊(韓國精神文化硏究院 資料調査室 硏究助敎)
本書는 京畿道 廣州郡 德谷에 世居하는 廣州安氏 安鼎福(一七一二~一七九一) 家門 및 忠南 保寧郡 川弓의 慶州金氏 鶴州公(金弘郁ˎ 一六○二~一六五四)派 金勉柱(一七四○~一八○七) 家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를 分類ˎ 影印한 것이다. 지금까지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는 慶尙道(光山金氏ˎ 義城金氏)ˎ 全羅道(技安金氏ˎ 海南尹氏)ˎ 忠淸道(城平尹氏) 등지의 고문서를 이미 펴낸 바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量ˎ 質面에서 아직도 慶尙道·全羅道에 편중된 것이었다. 本書의 廣州安氏ˎ 慶州金氏는 京幾道 廣州 및 忠淸道 瑞山ˎ 保寧 등에서 世居ˎ 活動하였던 가문으로서 이들 고문서의 刊行은 一次史料의 領域을 확대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고문서가 갖는 地域的 限界性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本書에 실린 고문서는 廣州安氏가 三七種 二七二點ˎ 慶州金氏가 四○種二二五點이며 時期는 대체로 一七세기 초부터 二○세기 초에 걸쳐 작성된 문서이다. 廣州安氏古文書가 慶州金氏古文書보다 一세기 정도 앞선 시기인 一七세기 초부터 나타나는 반면 慶州金氏는 一九세기 말부터 二○세기 초에 대부분의 文書가 分布하고 있다. 따라서 朝鮮後期에서부터 韓末에 이르는 사회상을 상호 보완하여 살필 수 있는 資料이다.
廣州安氏와 慶州金氏는 가문의 成長過程에 있어서 類似點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朝鮮時代 兩班家門의 出自背景을 보면 첫째ˎ 高靈時代 이래로 仕宦을 지속하여 朝鮮時代에도 그 名望이 이어지는 경우ˎ 둘째ˎ 高麗時代에는 鄕吏ˎ 下級武官 등 寒微한 가문이었으나ˎ 一四~一六세기에 科擧ˎ 軍功ˎ 婚姻 등을 통해 士族化한 경우 등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 바ˎ 이들 두 가문은 모두 전자에 속하여 오랜 가문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이들 두 가문이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廣州安氏 安鼎福이 남인 실학자 星湖 李瀷(一六八一~一七六三)에게서 師事하는 등 南人系列의 가문이었으며ˎ 이는 안정복 先代의 世居地ˎ 人物交流ˎ 師友關係 등에 의한 것이 큰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반해 慶州金氏는 忠淸道 瑞山ˎ保寧 등지에 世居하면서 尤菴 宋時烈과 交流하는 등 老論의 입장을 취해 朝鮮末期까지 士宦을 계속하고 있다. 각종 고문서가 韓末에 집중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廣州安氏씨는 實學者 安鼎福을 배출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연구 또한 안정복을 중심으로 실학연구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연구성과는 그의 史學思想 哲學思想 등 주로 思想的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本書에 실린 社會 經濟的 측면의 자료를 통해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慶州金氏는 金勉柱(一七四○~一八○七)와 그의 曾孫 金商悳(一八五二~一九二四)이 모두 奎章閣 直閣을 지니는 등 學的 背景이 깊은 가문이었다. 이러한 점은 金商悳이 저술한 「黍瓢顆隨筆」(서포수필)ˎ 津門甲ˎ 沽上館瓚簽(고상관쇄첨)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黍瓢鄭隨筆」에는 철저한 考證을 바탕으로 歷史學·哲學·地理學등 다방면에 걸쳐 저자의 관심사가 피력되고 있어 韓末 관변학자에 의해 實學的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본서의 출간과 더불어 앞으로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
本 古文書의 分類는 尹炳泰·張順範의「古文書分類體系에 관한 硏究」(一九八六年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資料調査室 課題)의 분류기준에 따라 敎令類ˎ 敎令類ˎ 疏劄啓狀類ˎ 牒關通報類ˎ 證憑類ˎ 明文文記類ˎ 書簡通告類ˎ 置簿記錄類ˎ 詩文類 등 크게 八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이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典籍 등의 경우에는「其他記錄類」라는 별도항목을 설정하여·여기에 포함시켰다. 원칙적으로 史料的 가치를 지니는 문서는 모두 망라하여 실었으나ˎ 다만 個別古文書가 아닌 成冊古文書의 경우 이미 간행된 것은 제외하였다. 예를 들어 안정복의 「政事」ˎ 「墓文」등 이미 「順菴叢書」ˎ 「 順菴全書1) 」에 실려 있어 본서에서는 이를 제외하였다.
한편 특정 가문의 고문서를 이해하려고 그 가문의 家系와 來歷이 중요시되는 것은 고문서 자체의 단편적 성격에 기인한다. 즉 모래알과 같은 개개의 고문서를 연결시켜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家系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해제에서는 고문서 자체에 대한 해제에 앞서 먼저 이들 가문의 家系와 그 來歷을 살펴보기로 한다.
廣州安氏의 來歷을 알 수 있는 家乘類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廣州安氏監察公派譜(乙未譜ˎ 一八九五) 및 安鼎福의 父 安極(-六九六~一七五四)이 撰한 〈廣州安氏家乘〉을 參考하였다. 安極의 家乘에 의하면 廣州安氏는 一三세기 高麗 高宗朝의 人物인 安綏代에 이미 族譜가 있어 家系를 記錄하였으며ˎ 또한 朝鮮太宗朝에 安省이 쓴 舊譜序에도 本宗을 기록한 上卷ˎ 外孫을 기록한 中ˎ 下卷 등 三卷의 族譜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가문은 비교적 일찍부터 家系記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ˎ 이것은 高麗初期 이래로 혁혁한 仕宦을 계속해와 가문적 전통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廣州安氏의 出自와 成長過程을 살펴보면ˎ 廣陽君 滉의 宗孫인 秉善에 이르기까지 家系記錄 여부ˎ 世居地 등을 중심으로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구분해 보면ˎ 始祖 邦傑~一三世 忠季까지의 第一期ˎ 一四世 綏~一八世 器까지 第二期ˎ 一九世 省~ 三十八世 秉善까지의 第三期로 나누어지는데ˎ 먼저 一~二期의 家系圖를 작성해면 다음 〈表〉一과 같다.
〈表〉一
〈廣州安氏家乘〉에 의하면 始祖 邦傑은 高麗太朝 王建이 三國을 統一하는 과정에서 反亂을 平定한 功으로 大將軍의 지위에 올라 廣州君에 封해진다. 이러한 先代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이후의 자손들은 廣州를 本貫으로 하여 대대로 仕宦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邦傑 이후 一四世 綏 이전까지의 世系와 官歷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이유로써 〈家乘〉에서는 兵火로 말미암아 族譜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一三世 忠季까지의 居住地는 廣州地域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家乘〉에 七代 慶立의 墓所가 楊州四面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다소의 移居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나타나는 시기는 一四世 綏부터이다. 綏의 정확한 生沒年代는 알 수 없으나 아들 때인 祖代의 기록으로 보아 高麗 高宗朝에 활약한 人物로 여겨진다. 그는 文科를 거쳐 官이 殿中侍御史에 올랐고 嶺南按廉使를 지냈다. 한편 綏는 그 이전까지의 世居地인 廣州를 떠나 慶尙道 咸安에 卜居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妻 裵氏를 취하여 妻鄕인 咸安으로 居住地를 옮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때부터 一九世 省代까지 墓所의 위치가 咸安 白沙里인 것을 보면ˎ 이 기간 동안에 廣州安氏는 咸安地方에 계속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ˎ 수많은 자손들이 이곳에서 昌盛하였다. 咸安을 「中興之鄕」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廣州安氏는 一九世 省代에 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省은 高麗 忠惠王~朝鮮 世宗代의 人物로서 禑王代에는 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ˎ 朝鮮 太宗朝에는 江原道觀察使ˎ 議政府左參贊ˎ 開城留守에 이르렀고 죽은 후에는 思簡의 시호까지 받고 있다. 또한 그는 朝鮮王朝에 들어와 맨 처음으로 淸白吏로 뽑힌 人物이며ˎ 이후 이 가문은 淸白吏로서의 가문적 전통을 계속 이어받고 있다. 孫子인 彭命이 다시 淸白吏가 되고 一七세기의 인물인 瑞羽(一六六四~一七三五) 대의 分財記에서 淸白吏 云云한 것은 바로 이같은 가문적 전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省代의 또 하나의 특기할 사항은 그의 墓所가 그 이전의 선조들과는 달리 廣州慶安基谷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가문은 원래 世居하였던 廣州로 다시 옮기게 되었는데ˎ 그 원인은 國師 無學이 所占한 廣州慶安基谷에 省의 墓를 葬事한 까닭으로 후손들이 이곳으로 移居해왔기 때문이다. 본서에 실린 古文書는 모두 省의 直系後孫들의 文書로서 이하 第三期의 家系를 圖示하면 다음 〈表〉二와 같다.
〈表〉二
省代 이후 이 가문은 從生-彭老-潤德-漢彦 代를 거치면서 中外의 관직을 계속 해오다가 滉(一五四九~一五九三)에 이르러ˎ 그가 扈聖功臣에 책봉되면서 가문의 사회적 지위는 보다 확고해진다. 또한 아들 應元(一五六五~一六○五)이 文科에 及第여 가문의 名望이 계속 이어진다. 본서의 古文書가 가장 밀집해서 나타나는 시기도 또한 應元 代 이후이다.
이후 宗孫 중심으로 家系가 계속 이어지다가 큰 변화가 생긴 때가 安鼎福의 祖父가 되는 瑞羽(一六四四~一七三五) 代이다. 당시 宗孫인 信行(一六二~一七○九)의 孫子 命崙이 死亡함에 따라 功臣인 滉의 奉祀問題가 제기되어 信行의 同生인 健行(一六二五~一七一一)의 末子ˎ 瑞羽를 系子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의 立案文記〔1〕에 상세히 나타나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系子關係외 成立은 단순히 家系繼承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財産相續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즉 系子로 들어간 사람은 本家로 부터의 財産相續은 물론ˎ 生家로부터의 재산이 추가되기 때문에 재산이 증식되는 중요한 계기가·되었던 것이다. 본서에 실린 分財記는 바로 이와 관련된 瑞羽 代의 文書들이다.
瑞羽 代 이후 廣州安氏는 極-鼎福-景曾-喆重代를 통해 크게 顯達한 이 없이 士族으로서 계속 벼슬을 하게 되지만 단순히 벼슬만을 지낸 양반이 아니라 講學ˎ 敎育 등을 통해 思想的 폭을 넓히게 된다. 이는 당시 黨派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講學과 敎育의 家門的 傳統은 鼎福의 曾祖父 健行과 祖父 瑞羽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鼎福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星湖에게 師事받기 이전에「治統圖」ˎ 「道統圖」ˎ 「下指南」 등 저술을 한 것은 이러한 家學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鼎福 代 이후의 家系에 대해서는 註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家門所藏古文書는 몇 가지 점에서 他家門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면이 나타난다. 첫째ˎ 각종 經濟關係 古文書즉ˎ 土地 및 奴婢文記ˎ 分財記ˎ 田畓·如輔案ˎ 秋收記 등의 文書가 극히 빈약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淸白吏로서의 家門的 傳統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둘째ˎ 個別古文書 이외에 成冊된 典籍들이 多數있다는 사실이다. 其他記錄類에 분류된 歷代史略ˎ 順奄藏書目錄ˎ 廣州慶安面 二里洞約ˎ 奇門精略ˎ 通川誌 등이 바로 이것들이다. 이 가운데 順奄藏書目錄은 順奄의 후손들이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서적을 藏書 위치별로 書名目錄을 작성한 것으로ˎ 順奄의 思想的 影響을 알 수 있는 중요한 資料이다. 후대에서「著作目錄」이라고 命名한 것은 잘못이다. 洞約은 安鼎福의 著述로써 文集에 실려 있으나ˎ 洞約 이외의 관련 文記가 連接되어 있고ˎ 또 一次史料라는 점에서 본서에 실었다. 이밖에 歷代史略ˎ 奇門精略 등은 安鼎福의 著述이거나ˎ 著述에 필요한 參考資料인 것으로 생각된다. 通川誌는 著者가 확실치 않으나 安鼎福의 曾孫 安孝根이 通川縣監을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와 관련된 文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個別古文書 모두 三七種으로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 〈表〉三과 같다.
〈表〉三 古文書의 種類 및 點數

分類別

文書名

點數

一ˎ 敎令類

敎旨

六五

敎牒

祿牌

二ˎ 疏剳啓狀類

戶籍

所志

呈辭

啓草

三ˎ 牒關通報類

四ˎ 證憑類

立案

手標

遺書

五ˎ 明文文記類

分財記(分給許與別給)

和解契約書

六ˎ 書簡通告類

簡札

一三九

通文

七ˎ 置簿記錄通

秋收記

各面面任所納

舊邑米傳掌文記

收稅官納記

兩倉留庫件記

土地臺帳

宗契日記

宗契名帖

宗中會議錄

宗中文簿

吊客錄

四柱錄

忌日錄

和劑

單方文

擇日記

八ˎ 詩六類

詩文

兩世墓文

墓碑文

合計

三七種

二七二

위 〈表〉三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가문의 古文書는 모두 二七二點이다. 作成된 시기는 대부분 安應元대 이후인 一七세기 초~一九세기 후반기에 이르는 三百여년 간이다. 가장 오래된 古文書언 安省의 王旨가 乙未譜 서두에 전하고 있으나 模寫한 것으로 본서에는 싣지 않았다. 중요한 文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敎令類의 敎旨·敎牒은 모두 七四點으로 대상인물은 應元 이하 모두 一九名이다. 시기는 一六○一~一九○三년까지 三百여년간에 걸친 것으로 이 가문의 경우 鼎福의 父인 極을 제외하면 모두 科擧에 合格하거나 仕官을 지내고 있었다. 敎旨와 敎牒을 受給對象者 및 그 內容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表〉四와 같다.
〈表〉四

文書別 No.

受給者

內容

年代

敎旨1

安應元

安岳縣監→文科及第

一六○一

2

安應元

廣原君追贈

一六○七

3

安應元妻

追觸

一六○七

4

安信行

生員入格

一六六三

5

安健行

生員入格

一六五○

6

安瑞羽

生員入格

一六九一

7

安瑞羽

文科及第

一六九四

8

安瑞羽

昌樂道察訪

一六九七

9

安瑞羽

成均館直講

一七一五

10

安瑞羽

成均館司藝

?

11

安瑞羽

泰安郡守

一七一七

12

安瑞羽

通禮院相禮

一七二三

13

安瑞羽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一七二八

14

安瑞羽妻

淑夫人

一七三○

15

安瑞羽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一七三一

43

安極

廣平君

一七九○

16

安鼎福

萬寧殿奉事

一七五○

17

安鼎福

義盈庫奉事

一七五一

21

安鼎福

靖陸直長

一七五二

22

安鼎福

歸厚署別提

一七五三

23

安鼎福

司憲府監察

一七五四

25

安鼎福

濟用監主簿

一七六五

26

安鼎福

翊衛司翊贊

一七七二

27

安鼎福

翊衛司衛率

一七七三

28

安鼎福

懹仁縣監

一七七五

30

安鼎福

木川縣監

一七七六

31

安鼎福

敦寧府主簿

一七八一

33

安鼎福

長陵令

一七八三

34

安鼎福

獻陵令

一七八三

35

安鼎福

儀賓府都事

一七八四

37

安鼎福

通政大夫

一七八九

38

安鼎福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一七八九

39

安鼎福妻

成氏ˎ 淑夫人追贈

一七八九

40

安鼎福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一七八九

41

安鼎福

廣成君封君

一七九○

42

安鼎福妻

成氏ˎ 貞夫人 追贈

一七九○

24

安景曾

生員入格

一七六二

44

安喆重

生員入格

一八○一

45

安喆重

義禁府都事

一八○九

46

安喆重

司宰監直長

一八○五

47

安喆重

義盈庫主簿

一八○七

48

安喆重

義禁府都事

一八○七

49

安喆重

司憲府監察

一八○七

50

安喆重

縣陵令

一八○七

51

安喆重

禮山縣監

一八○八

52

安喆重

翊衛司翊贊

一八一八

53

安喆重

江華府經歷

一八一九

54

安孝根

生員入格

一八三四

55

安孝根

繕工監副奉事

一八四一

56

安孝根

尙瑞院直長

一八四二

57

安孝根

尙瑞院副直長

一八四二

58

安孝根

司僕寺主簿

一八四三

59

安孝根

形曹佐郞

一八四三

60

安孝根

形曺正郞

一八四四

61

安孝根

鎭安縣監

一八四四

62

安孝根

通川那守

一八四六

63

安兢遠

進士入格

一八六七

64

安兢遠

恭陵參奉→文科及第

一八七二

65

安鍾夔

任內部主事敍判任官六等

一九○三

敎牒 1

安信行

修義副尉

一六三六

2

安極

通德郞

一七二五

3

安鼎福

厚陵參奉

一七四九

4

安鼎福

將仕郞

一七四九

5

安鼎福

萬寧殿參奉

一七五○

6

安鼎福

萬寧殿參奉

一七五○

7

安景曾

通德郞

一七五四

8

安孝根

翼陵參奉

一八三九

9

安兢遠

恭陵參奉

一八七○

祿牌는 安鼎福이 正祖 一四年(一七九○)과 一五年에 받은 것으로써 모두 四點이 전한다. 여기서 鼎福은 正祖 一四年 七월과 一○월에 廣興倉으로부터 각각 科米 一石一一斗와 太一石 五斗씩을 지급 받고 있다.
疏劄啓狀類에는 戶籍 二點과 所志類七點ˎ 啓草 一點이 전한다. 이 가운데 戶籍〔1〕은 肅宗 一○년(一六八四)의 安瑞奎妻 德水李氏의 准戶口로서 이 가문의 경제규모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내용은 率子  2) (一三歲) 이외에 率居如轉 六口ˎ 慶州ˎ 豊川 등 全國各處의 外方奴婢 四十九口ˎ 逃亡奴婢 九口 등 모두 六十二口의 奴婢가 등재되어 있다. 戶籍〔2〕는 支派인 安孝秉이 憲宗 一五년(一八四九) 廣州府에 제출한 戶口單子이다. 率居奴婢 二口를 所有하고 있었다.
所志는 安瑞羽([2])ˎ 安瑞熙([3])ˎ 安極([4])ˎ 安景曾([5])代의 것이 주목되는데 대부분 墓位田이나 山訟과 관련된 기록이다. 〔3〕의 문기에서 「蔚山宅」은 蔚山府使를 지낸 安瑞羽를 말하며ˎ [5]의 所志는 安景曾 등 一四人 공동명의의 等狀이다. 또한 각 文記의 서두에 있는 「化民」이란 말은 「外化之民」ˎ 곧 外方의 敎化를 받은 百姓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牒關通報類에는 關이 二點ˎ 差定帖 二點ˎ 照訖帖 一點이 전하며ˎ 시기는 각각 瑞羽ˎ 喆重ˎ 競遠代에 작성된 것이다.
證憑類에는 景宗 二年(一七二二)의 立案과 極-鼎福 兩代에 걸친 二點의 遺書가 주목되는 자료이다. 一七二二년의 禮曹立案은 예조에서 安滉의 奉祀孫을 정하여 인정해준 문서이다. 원래 宗孫인 信行의 아들로 參奉을 지낸 瑞奎가 죽고 그 외아들 命崙이 母喪을 당하여 여묘살이(侍墓)중에 죽으니 命崙의 同行列에서 마땅한 사람이 없어 五寸叔인 瑞羽를 入系하여 奉祀케 하였다. 이 立案은 이러한 사실을 禮曹에 올려 허락을 받은 文書이다.
二點의 遺書는 極과 鼎福이 자손들에게 주는 家訓의 성격을 띠는 文書로서ˎ 이 가문아 처한 사회 경제적 당면문제와 아울러 면면이 이어져 온 가문의 내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明文文記類에는 分財記 五點 이외에 他家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土地 및 奴婢文記는 一點도 전하지 않는다. 分財記는 分給이 一點ˎ 許與가 二點ˎ 別給이 二點으로 모두 信行·健行-瑞羽代의 것들이다. No.[1]의 許與文記는 瑞羽의 生父 健行이 早死한 瑞雲을 제외한 六남매에게 財産을 分給한 내용이며ˎ 肅宗 三十五年(一七○九)의 文書이다. 일반적 경향과 같이 一八세기 초의 財産分財이므로 奉祀條가 우대되고 있다. 각 자녀들에게는 奴婢만 分給하였으며ˎ 田畓은 健行 死後 다시 和會分財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머지 分財記는 瑞羽의 父〈信行〉 및 生父 健行이 그의 婚姻ˎ 科擧에 합격한 것을 기뻐하여 別給한 것들이다.
書簡通告類의 簡札은 모두 一三九點이며ˎ 極ˎ 鼎福ˎ 景曾ˎ 喆童 등 家門內의 人物들이 서로 주고받은 私信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用務ˎ 安否ˎ 慶弔ˎ 通告 등에 대한 것이 다수이며ˎ 학문적 토론을 주고받은 편지도 있다.
置簿記錄類는 모두 一七點이며ˎ 이 가운데〈宗契日記〉는 一七三八~一七四四년 사이 七년 동안의 宗契置簿로써 到記ˎ 執事記ˎ 名帖記ˎ 單記ˎ 捧上記ˎ 打作記ˎ 息利記 등이 실려 있다. 廣州安氏家門의 門中契의 운영과 절차ˎ 그리고 이와 수반되는 경제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宗中會議錄〉ˎ〈宗契名帖〉ˎ〈宗契文簿〉 등도 이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 가운데 〈宗中文簿〉는 위의 〈宗契日記〉와 아주 유사한 성격의 문서로서ˎ 一八五五년부터 一八六三년까지 收入記ˎ 用下記ˎ 會計記錄 등의 내용을 담은 門中契 記錄이다.
詩文類에는 詩六首ˎ 兩世墓文 一點ˎ 基牌文 二點이 있다. 양세묘문은 瑞羽와 極의 兩代碑文이며ˎ 이에는 恭人李氏(安極 妻) 墓誌銘ˎ 안정복이 쓴 李子粹語序ˎ 順庵記ˎ 扈聖功臣錄 등이 粘連되어 있다. 한편 墓碑文에는 金安國이 撰한 韓世淸의 碑文과 韓復胤의 碑文草가 있다.
慶州金氏의 家系에 대한 記錄은 族譜 이외에 金漢綠(一七二二~一七九○)이 撰한 家乘이 參考가 된다. 물론 桑村 金自粹 및 鶴州 金弘郁(一六○二~一六五四) 등 有名人物은 實記ˎ 文集이 남아있다.
慶州金氏族譜가 처음 刊行된 시기는 肅宗 一一년(一六八五)의 乙丑譜로서 單卷으로 되어 있다. 그후 크게 一○○년 단위로 修譜되어 正祖 八년(一七八四)의 甲辰譜(五卷)ˎ 高宗一一년(一八七四)의 甲戌譜가 차례로 간행되었다. 一九六二년에는 위의 족보를 다시 정리하여 壬寅譜를 刊行하였는데ˎ 본고에서는 주로 이 壬寅譜를 參考하였다.
慶州金氏는 머리말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高麗~朝鮮時代에 걸쳐 면면히 仕宦을 계속한 전통적 兩班家門이었다. 그러나 본 해제에서는 始祖에서 現在에 이르는 전 시기의 家系를 자세히 살필 겨를은 없으며ˎ 古文書를 作成ˎ 所藏한 人物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주지하듯이 慶州金氏는 始祖 金關智로부터 그 연원이 시작된다. 그후 新羅王姓으로 이어지던 金氏들은 신라말 敬順王代 이후에는 慶州金氏ˎ 義城金氏ˎ 江陸金氏ˎ 彦陽金氏ˎ 三陟金氏ˎ 蔓山金氏 등 여러 派로 갈라진다. 이 族譜에 의하면ˎ 本 古文書를 소장하고 있는 慶州金氏 太師公派는 敬順王의 第四子 殷說(大安君)에 연원은 두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殷說 이후 이 가문에서 실질적 始祖로 삼고 있는 仁琯과 殷說과의 관계는 기록이 미비하여 확실히 고증할 수는 없다.
仁琯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서 경주김씨는 다시 여러 派로 나누어지는데ˎ 본서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金勉柱 家門의 직계는 桑村公泒(金自縣)-鶴州公派(金弘郁)로 연결된다.
金自粹는 麗末鮮初의 王朝교체기에 節義를 지킨 대표적 人物이었다. 일찍이 鄭夢周ˎ 李崇仁 등과 교류하였고ˎ 朝鮮王朝 開創 이후에는 太宗의 出仕 요구를 거절하고 절의를 지켜 자결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士林派 등장 이후에는 鄭夢周ˎ 吉再ˎ 李崇仁 등과 같이 오히려 숭상되었고ˎ 子孫을 또한 그를 영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한편 慶州金氏의 世居地는 自粹 代 때까지만 하여도 한 곳에 오랫동안 世居하였던 곳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十四世 堧 代에 이르러 거주지가 忠淸道의 瑞山으로 정해진다. 즉 族譜에 의하면ˎ 堙자신이 직접 地理를 점쳐 瑞山 鷲嶺峰 아래 大橋洞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가문의 후손들은 瑞山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에 世居하게 되었고ˎ 商悳(一八五二~ 一九二四) 代에 保寧 川弓으로 移居할 때까지 여기서 居住하게 된다.
弘郁은 金勉柱의 五代祖가 되는 인물로 文科를 거쳐 두루 高官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黃海道觀察使당시 昭顯世子의 嬪 姜氏의 伸寃을 상소하였다가 孝宗의 미움을 받아 親鞫을 받던 중 枕殺되었다. 弘郁이 죽은 후 宋時烈과 宋浚吉의 도움으로 다시 復官되고 또한 子孫들도 禁錮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말미암아 경주김씨 가문은 송시열ˎ 송준길과 師友關係를 맺는가 하면 黨色 또한 같은 老論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弘都 代 이후의 가문은 漢禧-勉柱ˎ 漢祿-觀柱·日柱代에 와서 크게 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漢祿이 正祖 代에 唐中宗時의 「八字凶言」을 정조 당시와 비교하여 논하고ˎ 또 그것이 純祖 代에 再論됨으로써 이 가문은 큰 수난을 겪게 된다. 즉 순조 一○년에 본격적으로 거론된 이 사건에서 이 가문의 人物들이 모두 緣坐되어 治罪ˎ 流配되었다. 勉柱 또한 당시 司憲府 大司憲으로서 이 사건에 緣坐되어 巨濟島에 流配되어 죽게 되었다.
勉柱 代에는 또한 그가 無後하게 됨으로서 族兄 師柱의 二子 慶錫(改名 魯錫ˎ 一七八九~一八四○)을 후사를 삼게 된다. 그러나 魯錫 및 昌載가 科業에 나아가지 못했으며ˎ 勉柱의 曾孫인 商悳(一八五二~一九二四)代에 와서 그가 文科를 거쳐 內職으로는 大司成ˎ 外職으로는 仁川府使 등 韓末의 경제관계 전문가로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또한 學問的으로도 哲學·歷史·地理 등 다방면에서 걸쳐 능했으며ˎ 閔宗植을 도와 洪州義兵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表〉五
기타 이 가문의 인물 및 世系에 대해서는 위의〈表〉五 및 註를 참고하기 바란다.
慶州金氏 金勉柱 家門에서 소장하고 있는 文書의 量은 모두 四○種 二二五點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表〉六과 같다.
〈表〉六

分類別

文書名

點數

一ˎ 敎令類

敎旨

三○

敎牒

勅命

勅旨

敎書

有旨

諭書

訓令

下膳狀

二ˎ 疏剳啓狀類

疏草

所志

三ˎ 牒關通報類

告目

立案

四ˎ 證憑類

完文

手標

約證書

陳述書

判決謄本

五ˎ 明文文記類

土地文記

六ˎ 書簡通告類

簡札

九三

七ˎ 置簿記錄類

秋收記

直閣會圈

笏記

擇日記

기일생신첩

八ˎ 詩文類

詩文

二五

燕行詩軸

楹聯

記·序·跋

畵像贊

心性情說

賡載錄

黍瓢隨筆

試劵

一四

九其他記錄類

甲申政變

津門甲

沽上館瓚簽

合計

三九種

二二五點

먼저 敎令類는 모두 九種 四八點으로 종류가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이 가운데 敎旨가 三○點으로 受給者는 金勉柱(一七四○~一八○七)와 金商悳(一八五二~一九二四)이다. 敎旨 이외에 敎牒ˎ 勅命ˎ 勅旨ˎ 敎書ˎ 有旨ˎ 訓令ˎ 下膳狀 등도 모두 이 두 사람이 발급받은 것으로ˎ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다음 〈表〉七과 같다.
〈表〉 七

文書別

受緒者

內容

年代

敎旨

金勉柱

文科及第

一七七六

1

金勉柱

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一七七八

2

金勉柱

通訓大夫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一七七八

3

金勉柱

藝文館待敎兼春秋館記事官奎章閣待敎校書館著作

一七七九

4

金勉柱

禮曺參議

一七八○

5

金勉柱(妻)

貞夫人

一七八○

6

金勉柱

知製敎

一七八一

7

金勉柱

敦寧府都正知製敎

一七八三

8

金勉柱

寧越都護府使

一七八八

9

金勉柱

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官修撰

一七八九

10

金勉柱

安邊都護府使

一七九二

敎旨11

金勉柱

嘉善大夫

一七九八

12

金勉柱

龍驤衛護軍兼五衛都摠府副摠管

一七九九

13

金勉柱

兼京畿兵馬水軍節度使

一八○一

14

金勉柱

平安道觀察使兼巡察使平壤府尹

一八○一

15

金勉柱

兼五衛都摠府都摠管

一八○四

16

金勉柱

兼知實錄事同知成均館事

一八○五

17

金勉柱

司憲府大司憲兼知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

一八○六

18

金勉柱

龍驤衛副司果

一八八八

19

金商悳

文科丙科及第

一八八八

20

金商悳

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一八八九

21

金商悳

奎章閣直閣兼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理知製敎

一八九○

22

金商悳

奎章閣直閣兼春秋館編修官校書館校理知製敎

一八九○

23

金商悳

禮曹佐郞兼奎章閣直關春秋館編修官校書館校理知製敎

一八九○

24

金商悳

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一八九一

25

金商悳

侍講院弼善知製敎

一八九二

26

金商悳

侍講院弼善

一八九二

27

金商悳

兼仁川鎭兵馬僉節制使討捕使

一八九二

28

金商悳

兼監理仁川港通商事務

一八九三

29

金商悳

仁川都護府使

一八九三

30

金商悳

內務府副主事

一八九三

敎牒1

金商悳

龍驤衛副司勇

一八八六

2

金商悳

洪州府觀察使敍奏任官二等

一八八七

勅命1

金商悳

兼任洪州裁判所判事

一八九六

2

金商悳

宮內府參議

一八九六

勅旨1

金商悳

承宣院左副承宣兼經筵參贊官

一八九四

2

金商悳

一八九四

敎書1

金勉柱

一七九九

2

金勉柱

一八○一

3

金勉柱

一八○一

有旨1

金勉柱

一七七七

2

金勉柱

一八○二

3

金商悳

一八一三

諭書1

金勉柱

一七九九

2

金勉柱

一八○○

3

金勉柱

一八○一

4

金勉柱

一八○一

訓令1

金商悳

一八九六

下膳狀1

金勉柱

?

敎旨 가운데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金商悳이 받은 No.[23]ˎ [26]의 敎旨이다. 이 敎旨에는 官職에 임명되는 대상자와 그 직책명을 간단히 기록하는 일반적인 교지의 양식에서 벗어나 그 직책의 중요함과 왕의 뜻을 담은 서두부분이 추가되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특이한 敎旨 양식을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敎書는 일반적으로 卽位ˎ 求言ˎ 功臣錄勳ˎ 配享ˎ 文廟從祀ˎ 頒赦ˎ 賜與ˎ 勸農ˎ 使命訓諭ˎ 封爵ˎ 冊封ˎ 收稅ˎ 恤敎書3)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ˎ 이 가문의 敎書는 이 가운데 使命訓諭敎書에 속한다. 受給者는 金勉柱로서 그가 京畿의 水原ˎ 開城ˎ 江華ˎ 廣州 및 平安道 등지의 地方守令으로 재직할 때 國王으로부터 발급받은 것이다.
三點의 諭書도 또한 金勉柱 당대의 것으로 그가 開城府留守兼管理便ˎ 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管餉使平壤府尹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인 正祖 二三年(一七九九)과 二四年(一八○○)에 수여된 것이다. 이 諭書는 外國의 侵入이나 內亂 등 국가의 非常事 態時에 國王이 發兵歡限을 가진 守令에게 내라는 것으로 그 내용은 극비사항이다. 따라서 諭書를 내리게 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訓令은 一八九六년 法部大臣 李範晉(一八五三~?) 명의로 洪州觀察使이자 裁判所 判決事였던 金商悳에게 내린 것으로 당시의 시대 사항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문기의 성격상으로는 牒關通報類에 가깝다. 내용은 「賊盜處斷」에 관한 새로운 처벌기준을 정하고 이를 해당 수령인 觀察使金商悳에게 통지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賊盜」란 一八九六년의 시대상황과 洪州라는 지역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곧 義兵임을 알 수 있다.
流劄啓狀類는 모두 三點으로 극히 적은 분량이다. 이 가운데 疏草[2]는 立後에 관한 내용이며ˎ 人名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證憑類 立案[1]의 문기 가운데 金勉柱 上疏부분이 이 疏草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어 이 문기의 작성자가 金勉柱임을 알 수 있다. 所志[1]은 具亨錫ˎ 具東煥 등이 「金承宣令公」에게 올린 것으로ˎ 金承宣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지만 金商悳이 一八九四년에 承宣院左副承旨에 임명되는 것을 보면(勅旨[2] 참조) 「金承宣」이 곧 金商悳인 것으로 추정된다.
牒關通報類는 告目 二點이 전한다. 告目은 下官이 上官에 公的인 일을 알리거나 問安할 때 올리는 간단한 문서로  4) 이해되지만 여기서는 官과 官사이의 公的인 일이 아니라 山所立案이라는 私的용무에 관한 것이다. 문기 내의 「金直閣」은 金商悳을 말한다.
證憑類에는 立案文記 등 모두 六種一○點의 문기가 전한다. 立案[1]ˎ [2]는 金勉柱의 立後에 관한 立案文記로서 당시 工曹判書였던 金勉柱가 族兄인 故縣監師柱의 第二子 慶錫을 系後子로 맞아들이고 있다. 系子가 된 慶錫은 후에 魯錫으로 改名하여 이후의 족보류에는 모두 魯錫으로 기록하고 있다.
立案[3]ˎ [4]이하 完文[1]ˎ [2]ˎ 手標[1] 등은 모두 金商悳당대의 山所 관계 문서이며ˎ 陳述書[1]과 判決謄本[1]의 문기는 金敏濟(一八七二~?) 당대의 山訟 관계 문서이다.
明文文記類에는 三點의 土地文記만이 전한다. 土地文記[1]ˎ [2]는 買賣 당사자가 이 가문의 인물이 아니다. 아마도 토지를 買入할 때 구비되어 딸려온 舊文記가 아닌가 생각된다. 土地文記[3]은 金敏濟가 田地 八斗落과 柴場을 매입한 문서로서 二點이 粘連되어 있다. 이 문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문서의 내용자체보다 문서양식이다. 즉 이 문서는 買賣契約書ˎ 買收人ˎ 賣渡人 등 근대적 표기방식을 취함과 동시에 서술체계는 전통적 土地明文의 예에 따르고 있다. 土地文記의 樣式의 변화를 잘 나타내주는 자료이다.
書簡通告類에는 簡札 九三點이 실려 있어 이 가문의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簡札 중에서도 金商悳ˎ 金敏濟 당시의 것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韋觀」(金商悳의 號)ˎ 「金進士」라고 한 인물이 바로 이들이다. 簡札의 내용은 간단한 安否에서부터 學問的 討論에 이르기까지 人間生活의 생생한 실제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가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簡札 끝부분에 실린 簡札帖은 原本이 아니라 轉寫된 것이지만 내용상 중요한 간찰이다. 이 簡札帖에는 韓末의 독립운동가인 金福漢(一八六○~?)ˎ 艮齊 田愚(一八四一~一九二二) 등 韓末開化期의 有名人物들과 주고받은 書簡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 簡札帖은 義兵運動 및 儒學思想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置簿記錄類에는 秋收記ˎ 直閣會圈ˎ 笏記ˎ 擇日記ˎ 기일생신첩 등 모두 七點의 문서가 있다. 이 가운데 秋收記는「헤도평츄슈긔」라 적혀 있으나 어느 때 누구의 것인지 확인되지 않으며ˎ 物目은 치마ˎ 저고리ˎ 버선 등 여러 가지의 의복을 적기한 것이나ˎ 이 또한 어느 때 어떤 용도로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詩文類에는 一一種 五九點의 문서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詩는 모두 二六點으로 簡札과 마찬가지로 韋觀 金商悳 당시의 것이 대부분이다
詩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가로 三二㎝ˎ 一六·五㎝의 두루마리로 된 燕行詩軸이다. 이 詩는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주인공이 中國을 여행하면서 지나는 곳마곳다·그곳의 風景을 읊은 것이다. 여기에 실린 詩는「贈季君」이하 모두 六○首에 달하는 연작시이다.
그러나 이 시의 作者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끝부분에 「右高祖領相公燕行詩律止一道……」ˎ 「先王考亞使時詩聯」이라고 하는 註記가 있어 작자를 추리해 볼 수 있다. 여기서「領相公」이란 領議政에 추증된 漢祿으로 보이며ˎ 「先王考」란 冬至使ˎ 副使로서 淸에 다녀온 金勉柱인 것으로 생각된다.
詩[26]은 秋史 金正喜(一七八六~一八五六)의 親筆詩로써ˎ 後記에「書贈大卿仁弟」이라 한 것을 보면 金正喜가 八寸 동생되는 昌載(大卿은 昌載의 號)에게 직접 써 준 詩임을 알 수 있다.
楹聯(영련)은 柱聯이라고도 하며ˎ 聯句를 써서 기둥에 걸어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 본서의 楹聯은 이러한 聯句를 모아둔 것이다.
賡載錄(갱재록)은 王이 지은 詩에 신하들이 和答하는 형식으로 지은 詩를 모아 놓은 것을 말한다. 본서의 賡載錄은 正祖 一九년(一七九五)의 것으로 먼저 御製序가 있고 다음에 領議政이하 無官인 幼學에 이르기까지 賡載에 응한 臣下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慶州金氏家門에서는 金勉柱가 原任直閣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詩文類 가운데 史料的 가치가 높은 것으로 黍瓢隨筆(서포수필)을 들 수 있다. 黍瓢가 別名인지 號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글의 내용 가운데「金商悳謹按」([1-63])ˎ 「悳按」(1-61])이라는 句節을 보아 金商悳이 쓴 隨筆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隨筆」이라 할 때 그 의미는 근대의 文學의 한 장르로서의 隨筆의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ˎ 붓 가는 대로 어떤 형식을 취하지 않고 쓴 글을 말한다. 따라서 漫筆ˎ 雜記ˎ 雜錄ˎ 雜著ˎ 釋說ˎ 小說ˎ 僿說ˎ 叢話등과 대동소이하다.  5) 그런데 이 季瓢隨筆은 그 서술방식에 있어서 철저한 考證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ˎ 또한 그 연구대상이 우리나라의 哲學ˎ 歷史學ˎ 地理學이란 점에서 실학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저작이다. 앞으로 여기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
試卷은 모두 金商悳이 大·小科에 웅시할 때 작성된 것으로 賦八ˎ 表二ˎ 詩一ˎ 策二ˎ 箋一點 등 모두 一四點이다.
其他記錄類에는 田申政變ˎ 津門甲ˎ 沽上館瓚簽(고상관쇄첩) 題詠 등 四點이 실려 있다. 甲申政變은 정변의 전말 및 이와 관련된 국내외 상황을 소상히 적고 있다. 누구의 저술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정변의 주역인 金玉均ˎ 朴泳孝ˎ 洪英植 등을 「逆黨」이라 칭한 것을 보면 정부측 인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津門甲ˎ 沽上館瓚簽은 天津公事 및 仁川港通商事務ˎ 仁川都護府使등을 지낸 金商悳의 저작으로 보이며ˎ 그가 淸國의 公事 및 開港地의 守令을 지내면서 업무에 필요한 사항을 메모한 문서로 추측된다. 대 청국 사회·경제관계 및 외교관계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沽上館瓚簽에는 淸나라 뿐만 아니라 日本ˎ 英國ˎ 美國ˎ 러시아 등 各國의 事務를 기록해 두고 있어 韓末의 外交 및 通商事務實態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題詠〉은 각종 樓臺에 걸린 有名人物들의 詩文을 拓本한 것들이다. 탁본된 題詠은 모두 五六點이며 金方慶ˎ 金永濡ˎ 鄭宗周ˎ 洪允成ˎ 金正國 등 高麗末~朝鮮後期에 이르는 有名人物들의 것이다.
이 제영의 탁본이 언제ˎ 누가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물이 거의 없어진 현재는 이 탁본이 바로 唯一本이 되고 있다. 탁본 주위에 후대에 누군가 해당인물의 四祖를 기록해 놓고 있어 참고가 된다. 이 제영은 문학적 가치 이 외에도 書藝硏究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廣州安氏·慶州金氏家門의 古文書를 그 家系와 함께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문서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ˎ 각각의 文書에 대한 性格ˎ 用語의 개념ˎ 年代考證 등에 대한 파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고문서 자료를 이용할 경우 전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문서의 기초적 연구가 반듯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ˎ 年代記 資料와의 相互補完의 문제이다. 고문서는 기본적으로 特殊資料쇄 속하므로 여기서 얻어진 결론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문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종 年代記類ˎ 文集類ˎ 法典類 등 一般資料를 함께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ˎ 古文書利用 方法論에 대한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고문서는 비단 歷史硏究에서 뿐만 아니라 哲學ˎ 國文學ˎ 國語學ˎ 社會學ˎ 法學ˎ 經濟學 등 다방면에 걸친 자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학문분야에서 고문서자료를 이용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각 학문분야에서 고문서를 어떻게 이용할 것이지ˎ 이용한다면 어떤 방법이 타당한지 그 방법론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문서 연구 및 이용상의 문제점이 해결될 때ˎ 고문서는 그야말로 韓國學硏究의 基礎資料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