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鄭求福(韓國精神文化硏究院 敎授)
屛山書院 設立을 전후한 16세기 말 안동지방의 행정구역은 安東府 本府 외에 8개의 縣과 2개의 部曲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오늘날과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禮安이 안동부에 속해있지 않는 반면 奉化가 안동부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退溪 李滉의 근거지였던 예안은 邑誌인 󰡔永嘉誌󰡕(1608년 刊)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퇴계 사후 그의 문도들이 소위 영남학파를 형성하고 학문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서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그의 門徒들을 중심으로 先賢奉祀, 子弟敎育, 住民敎化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향촌내에서 이들의 활동은 당시로는 改革的이라 할 만큼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개혁의 이념적 지향점은 유교의 토착화에 있었으며, 개혁대상은 佛敎, 淫邪를 비롯한 고려적, 토속적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개혁운동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현상은 書院 및 書堂·書齋·精舍 등의 건립운동이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은 불교의 종교적 권위와 교육적 기능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안동지방의 경우 이 운동의 주체는 퇴계 및 그의 몇몇 제자들이 거론되지만 기본적으로는 眞城李氏를 비롯한 安東權氏·金氏, 奉化琴氏, 豊山柳氏·金氏, 義城金氏, 光山金氏 등 안동부내의 핵심 兩班姓氏들이 그 基底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양반들은 河回의 豊山柳氏, 臨河의 全州柳氏 등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住居地, 耕作地로서 절땅을 차지하는가 하면, 기존 寺刹 혹은 寺址에다 書院, 書堂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2) 그리하여 이들은 16세기 말을 전후한 무렵에는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명실공히 불교세력을 대신한 새로운 세력으로 탈바꿈하였고, 書院·書堂·精舍·書齋 등은 고려의 寺刹 機能에 대신하는 敎育, 文化空間이자, 士林派를 양산하는 터전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學脈과 官職은 반드시 科擧라는 立身揚名의 기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講學目標는 매우 실제적이었다. 陶山書院, 廬江書院 등 이들이 세운 초기 서원의 院規에 ‘科擧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李滉의 禮安鄕約, 柳成龍의 鄕約(永嘉誌 所載)에서도 알 수 있듯이 鄕約普及과 住民敎化에 힘쓰는 한편 紹修書院, 易東書院, 陶山書院, 廬江書院 등에 그들의 先輩를 배향해 모시면서 道學的 傳統과 學脈을 오로지 하였다. 16세기 사림파 진출과 맛물려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 지는 이같은 새로운 양상은 그들의 講學處이자 先賢奉祀處인 書院, 書堂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3)
안동지방에서 서원이 창건된 것은 퇴계 자신이 주도해 세운 易東書院이 최초였고, 그 후 그의 문인들과 지방사림에 의해 주도된 陶山書院, 廬江書院(후에 虎溪書院)이 차례로 건립되었다. 16세기를 전후하여 안동부내에는 거의 전역에 걸처 서원 뿐만 아니라 서당·서재·정사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었으니 이같은 사정은 당시 읍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읍지인 永嘉誌에 의하면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에 걸쳐 安東府內에는 3개의 書院과 20 餘 곳의 書堂·書齋·精舍 등이 建立되는 등 타 지방에 비해 활발한 활동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永嘉誌 소재 書堂·書齋·精舍 현황이다.
〈安東府內 書院·書堂·書齋·精舍 現況〉

名 稱

位置· 配享人物

設 立 者

設立年代

廬江書院

(虎溪書院)

府東 廬山村 白蓮寺舊基

李滉配享,1625年金誠一,

柳成龍 追加 配享

退溪門人·地方士林

1575(宣祖8)

三溪書院

柰城縣 沙峴, 權橃配享

地方士林

1589(宣祖22)

屛山書院

豊山縣, 柳成龍配享

柳成龍 門人·地方士林

豊岳書堂

豊山縣北

西厓 柳成龍

1563(明宗18)

陽坡書堂

府 東

里人

道生書堂

臨河縣 本谷里

八耦書堂

臨河縣 儉巖

裵龍吉

龍泉書堂

龍井山 東 勿也村

伊溪書堂

府 北 伊火於村

上司 權大器

西澗書堂

府 北西 可村

參奉 李漢

芝陽書堂

府 北 馬岩村

縣監 鄭士誠

鏡光書堂

府 西 金也村

1568(宣祖1)

佳野書堂

府 東, 佳野南麓

生員 金彦璣 壬亂後

進士 權訥 移創

玉屛書齋

臨河縣 落淵

龍峽書堂

臨河縣 羅川村

面提書堂

一直縣

懸人

龜潭書堂

一直縣 龜尾村

參判 柳景深,牧使 張大輔,

察訪 金守一,進士 李中立,

士人 李種善

鳳山書堂

甘泉縣 珍藏洞

縣監 李介立

靑城精舍

靑城山下

松巖 權好文

寒棲精舍

安東府西 松坡里

一名 松巖(權好文)精舍

石門精舍

城山

鶴峰 金誠一

謙巖精舍

豊山縣 河回

謙巖 柳雲龍

遠志精舍

豊山縣 河回

西厓柳成龍

玉淵精舍

豊山縣 河回

西厓柳成龍

1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같이 많은 수의 교육기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안동지방이 양반문화라는 지역문화 특성을 지니게 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조선중기 이후 영남학파가 생명력을 지니고 계속적인 후진을 배출하면서 학맥을 이어갔던 것도, 西人이라는 一黨 전제세력에 대항해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人的 基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屛山書院의 전신 豊岳書堂도 당시 이같은 지역문화의 배경하에 설립되었으며, 여기서 주도적 역활을 한 사람이 柳成龍이었다. 임란을 전후한 시기 풍악서당은 서당형태를 벗어나 서원형태로 발전하였는데, 그 과정을 永嘉誌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豊岳書堂 在豊山縣北一里 嘉靖癸亥創立 生員權景전(실사+全)等上疏 仍賜學田 其後西厓柳成龍以院在路傍 不合於藏修之所 勸諸生移卜于屛山  4)
屛山書院 本豊岳書堂 在花山屛山之間 對截壁臨長淵 最爲奇絶 萬曆壬辰爲賊兵所焚 乙巳移建于南岡子坐午向之基  5)
풍악서당은 물론 權景絟, 柳成龍 등의 활동에 힘입어 서당으로서는 그 예가 드물게 왕으로부터 토지를 사급받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入院錄, 院任錄, 洞案 등의 문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튼튼한 후원세력이 있었다. 河回의 柳氏, 葛田의 安氏, 佳逸의 權氏 등 院任案, 入院錄에 나타나는 주위 洞里의 土着兩班들이 바로 이들이다. 건립초기 서당은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조직,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壬辰(1592)前 임원 구성에 있어서 초대원장 葛田 順興安氏였다는 사실, 입원록, 원임록에 권씨, 김씨 등 유력 성씨들이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유력 양반들에 의해 주도된 초기 서당은 노비안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소속 노비가 7口나 있을 정도로  6) 비교적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풍악서당이 본격적인 발전을 한 것은 유성룡 사후 1613년 그를 모시기 위한 尊德祠가 鄭經世 등 지방사림에 의해 서당내에 건립되면서 부터이다. 당시는 비록 사액을 받지 못했으나 서원으로 승격되어 풍산지방 뿐만 아니라 안동의 대표적 私學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廟號를 尊德祠라 한것은 도산서원의 尙德祠, 廬江書院의 尊道祠를 염두에 둔 作名이었다고 여겨지며 이 지방에서의 유성룡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1629년에는 士林의 公論으로 유성룡의 三子 柳袗이 추향되었다. 유진이 서원에 종향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山林으로 징소되어 사헌부지평을 역임하는 등 정치, 사회적, 학문적 비중이 높았고, 서애년보를 찬하는 등 위선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863년(哲宗 14)에는 ‘屛山’이라는 賜額을 받아 賜額書院이 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안동지방의 대표적 서원으로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있다.
屛山書院이 위치한 곳은 하회의 主山인 花山의 남사면 외진 곳이다. ‘屛山’이라 칭한 것은 속칭 ‘무도리’로 명명되는 河回의 강물이 돌아나가는 초입에 위치한 산의 모양새가 병풍처럼 생긴데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서원은 화회마을과는 달리 외진 곳에 있고 길도 포장되지 않아 답사,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서원의 관리는 군청에서 관계 공무원이 맡고 있어나 ‘永慕閣’과 달리 늘 상주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서원 소장 전적 고문서는 풍산유씨 서애종가 유물전시관인 永慕閣에 보관하고 있다. 관리상 편의 때문에 종택소장 전적·문서와 서원소장 전적·문서를 한곳에 보관하고 있으나 그 성격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섞여 있는 문서는 금방보아 구별되는 것도 있지만 소장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어 조사자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7) 본 병산서원 소장 고문서는 안동지방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서원 문서이다. 그러나 연구자 개인적으로 도산서원, 역동서원, 호계서원 등을 이용한 연구가 있어 참고가 된다.  8)
古文書의 경우 개별 가문이나 서원을 막론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문서 작성자와 작성연대를 파악하는 일이다. 본 해제에서는 문서 하나 하나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해당 연구자들에게 맡기고 작성자와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개별문서에 대해 해제를 한 후, 이를 도표로 만들어 해제 뒷부분에 도표로 제시하였다.
NO.1 : 1841(憲宗7), NO 2: 1853(哲宗4) NO 3: 1883,1896
서원운영 전반에 걸친 지침서이다. 이 요람은 首席之任으로 있던 李貞模가 書院文簿, 古蹟이 오래되어 훼손이 심해 임원들이 의심나는 곳이 있어도 증빙할 것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 요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李貞模는 全義人으로서 豊山柳氏 柳{雨/澤},1705~1778)의 외손이었다. 유택은 서애파 종손인 柳澐의 생가 동생이었으므로 이정모는 곧 유운의 外從孫이었다.
要覽의 내용은 祭器·雜物·書冊의 관리, 기타 田畓 및 奴婢의 收稅·收貢 등에 관한 것이다. 서원운영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규정을 적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자료이다. 요람은 원래 3년에 한번씩 改案토록 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요람은 3건이다. 2,3의 문서는 柳宇睦(1811~1886), 柳道性(1850년생)이 이정모의 요람에 추가해 넣은 것이다.
院中可行條件, 院規, 節目, 完議등 서원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내용을 적은 문서이다. 이 記事의 작성자는 李浹(延城人)이며, 院任錄(NO 5, 1面)에 1717년(丁酉年), 그가 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기사의 作成時期는 1717, 1718년(丁酉, 戊戌)임을 알 수 있다.
柳{氵+圭}가 지은 屛山書院 重修上樑文 이다.
NO.1 문서는 校理 李啓魯가 작성한 상소로서, 서원 사액을 청하는 내용이며, NO.2 문서는 柳重河(1595~1665)가 올린 額外儒生의 제한 등 향교운영의 폐단과 그 시정에 관한 상소문이다.
NO.1 : 1592以前~1640 NO.3 : 1592以前~1807
NO.2 : 1592以前~1716 NO.4 : 1652~1671
원임록은 서원 운영을 담당한 임원 즉 院長, 有司 등의 명단이다. 이 원임록은 작성당시의 원본과 이를 일괄적으로 베껴놓은 전사본 등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원본이 마멸, 혹은 분실로 말미암아 부본으로서 전사하여 비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서에는 두 종류 모두를 실었다.
임원 중 院長은 일명 都有司라고도 하는데 교체될 때마다 齋有司, 庫有司를 비롯한 서원 임원들의 사인(手決)을 하고 인수인계하였다. NO.1~NO.3 의 문서는 ‘壬辰前院長有司錄’이라 하여 시기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는 풍악서당 당시의 임원을 뒤에 추가했던 데서 기인한 듯 하다.
柳成龍의 書院奉安을 전후한 시기의 각종 執事者 및 有司의 명단, 그리고 祭文 등을 모아 만든 成冊文書이다. 1610년, 1612년에는 서원에 봉안되기 전 봉안 준비를 맡은 각종 有司(石物有司, 各里·各面有司 등)가 기록되어 있고, 1614년에는 江陵府使 鄭經世가 撰한 ‘西厓柳先生奉安祭文’이 있다. 제문 뒤에는 獻官이하 奉安時의 執事錄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幼學, 生員, 進士, 등 職役이 기재된 경우에도 이들이 ‘執事’부분에는 ‘學生’으로 기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執事錄에도 마찬가지인데, 幼學, 學生의 呼稱, 그리고 身分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자료로 여겨진다.
NO.1 : 1614~1639 NO.2 : 1658~1664
NO. 3 : 1666~1698 NO. 4 : 1723~1735
정식명칭은 ‘春秋享祀執事分定記’이며, 春秋享祠의 執事者 명단이다. 향사 시기는 대개 春享은 3월 초, 秋享은 9월 초에 행해지고 있다.
朔望, 즉 매월 초 하루와 보름 廟宇에 焚香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문서이다. 이 명단에는 분향자의 職役, 官職 등이 기재되지 않고 성명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書院 院生으로 들어온 사람의 명단으로서, 시기별로 정리한 전사본이다. 入院者는 서원 건립 이전인 서당 시절부터 소급해 기록했다. 따라서 최초의 입원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각 시기마다 입원록을 작성한 것으로 보이나 시기별 입원록은 전하지 않는다. 본서에 실린 입원록은 맨 뒷장 戊戌年 입원자 가운데 柳聖天(1690~1746)의 생졸년으로 보아 1718년(肅宗 44)임을 알 수 있다. 기재사항에는 生死與否(仙), 官職, 科擧事項(生員·進士, 文科 表示와 合格 時期 ) 기타 改名事項 등이 기록되어 있다.
入院者들이 서원에 寄居하면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명부이다. 입원자들이 특정한 敎課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때 각자의 집을 떠나 서원에서 거주하였는데, 대개는 기간과 순번(初巡~4巡)을 정해 공부하였고, 공부내용은 주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通讀, 즉 朗誦하는 것이었다. 본 거재안에는 柳宗春(1720~1795)이 撰한 〈屛山書院通讀案序〉, 〈通讀時會案〉,〈居齋案〉이 함께 엮어져 있다.
申丑年(1781) 〈通讀時會案〉에는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4일간 居齋하면서 󰡔大學󰡕을 함께 통독한 인물들의 명단을 적고 있다. 명단에는 居齋한 인물의 字, 또는 號 그리고 出生干支를 기재하였다.
〈居齋案〉에는 1781년 신축년, 1792년 임자년의 2개년도 분의 명단이 실려있다. 居齋時期는 2개년도 모두 10월부터 12월에 1~4차(初巡~4巡)에 걸쳐 실시하고 있다. 1회에 居齋하는 기간은 15일간이었다. 신축년 10월 거재안의 경우, 거재자들은 初巡(제1회)에 10월 16일부터 末日까지 15일 동안 거재했고 통독한 책은 朱書, 中庸 등이었다. 기재사항으로는 字·號, 出生干支였다.
정식 명칭은 〈己酉二月初一日設講講生〉이다. 서원에서 院生들이 講을 한 뒤 그 점수를 通, 略 등 점수를 매겨 기록한 명부이다. 講한 서적은 주로 사서삼경이었다. 작성시기인 己酉年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는 講生 가운데 柳晟祚(改名 柳岡祚)(1769~1834)의 生卒年으로 미루어 보아 1789년(正祖 13)임을 알 수 있다. 1789년은 유성조가 20세되던 때였다.
‘傳與’란 말 그대로 ‘전해준다’라는 어미로서, 임원의 교체시에 서원업무와 관계되어 주고 받은 인수인계 문서이다. 작성기간은 丁亥~己丑으로 간지로만 기재되어 있어 구체적 시기는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이는 업무 인계인수자가 手決(花押)로서 사인했기 때문에 당사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원임록, 집사록 등 관계 자료와 면밀한 비교검토가 필요하다.
NO.1 : 1663(顯宗4) NO.2 : 1666,1669(顯宗7,10)
NO.3 : 1738(英祖14) NO.4 : 1739(英祖15)
NO.5 : 1750(英祖 26) NO.6 : 1756(英祖 32)
NO.7 : 1762(英祖 38)
院奴婢案에는 노비명단을 적은 순수 노비안과 노비의 父母·所生, 居住地, 收貢與否 등을 조사한 뒤 작성한 추쇄안의 두가지 종류가 있다.
작성시기는 NO.3~NO.7 문서의 경우는 중국연호 등으로 쉽게 파악되나 NO.1, NO.2는 노비들의 연령, 부모이름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NO.1은 문서 10면에 ‘萬曆四十年(1612,광해군 4)’, ‘萬曆四十六年(1618,광해군 10)’,崇禎庚子(1660,현종 1)의 연호가 주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1660년 이후 작성되었으며, NO.2 이후 자료에서 나이 등을 비교해볼 때 작성시기는 1663년 임을 알 수 있다.  9) NO.1 문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以上院在豊岳時奴婢’라는 註記 부분이다. 위의 주기는 도망비 1구를 포함한 7구의 노비명단 아래에 附記된 것으로 서원으로 되기 이전 풍악서당 당시 이미 서당노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풍악서당 당시 왕으로부터 學田을 하사받았다는 기록과 함께 당시 풍악서당의 경제적 규모를 짐작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NO.2 문서는 노비의 친족관계, 나이 등을 고려할 때 작성시기는 병오 - 1666년(顯宗7), 기유년 -1669년(顯宗 10)임을 알 수 있다.
NO.1 : 1629(仁祖 7) NO.2 : 1629(仁祖 7)
NO.1 문서는 鄭經世 撰의 柳成龍 復享時 祭文이며, NO.2는 유성룡 3子 柳袗의 從享時 祭文이다. 2번문서 뒷부분의 ‘上之二十四年은 숙종 24년(1689)을 말하며, 이 때는 李沃이 원장으로 있을 때이며, 이옥 당시에 이 제문을 전사한 듯 하다.
풍산 유씨 서애종가에서 祭祀를 지낼 때 儀禮節次, 祭物 등에 관해 적어놓은 定式이다. 6면에 ‘高祖考贊成府君’,‘祖考領議政府君’이라는 句節에서 이글의 撰者를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贊成府君은 유성룡의 祖父 柳公綽이며, 領議政府君은 유성룡이다. 따라서 이글의 찬자는 유성룡의 손자 柳元之임을 알 수 있다. 작성 시기는 유성룡 사후 유원지 생존년간인 1607~1674년 사이인 것으로 추증되나 아마도 유원지 老年인 1650년대 이후일 것이다. 이 문서는 不遷位制의 實際 모습을 비롯한 양반가의 제사의례와 그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병산서원 소장으로 되어 있어나 내용상 서애종택인 충효당 문서이다.
萬曆四十三年(1615)과 四十五年(1617) 두해에 걸친 문서가 합철되어 있다. 내용은 前, 後 院任(都有司, 有司)간에 이루어진 祭器의 인수인계서이다. 傳與記, 院任錄 등과 함께 성원 임원들의 임무 교체시에 작성된 문서이다.
正位, 從祀位로 배향된 유성룡, 유진의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기록한 물목류이다. 작성시기는 ‘己酉’의 간지만 나타나 있어 정확히 알 수 없다.
‘屛山掌務’에게 ‘豊山書堂會中’ 에서 보낸 ‘削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서 보낸 통보이다. 정확한 작성시기는 알 수 없다.
柳雲龍·柳成龍 당시 河回마을의 洞案이다. 洞案이 처음 작성된 해는 유운룡·유성룡이 仁洞縣監, 禮曹判書로 있던 1584년부터 이며, 追入한 맨 마지막 인물들 예컨대 柳慶龍(1564~1612), 柳裿(1561~1613), 柳襑(1572~1632), 柳袽(1578~1605) 등의 생졸년을 검토해보면 유여의 卒年 즉 1605년 이전까지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洞案에 등재된 인물로는 위의 두사람 외에 4차례의 ‘追入’이 있어 모두 49명이 올라있다.
병산서원소장 慶老會案은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책은 서울 박정로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책명은 〈慶老會案 1〉로 되어있고 책표지에 ‘屛山書院藏’이란 소장처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인지 그 소장처부분이 지워저 ‘藏’字만 남아있다. 慶老會案 1은 內題로 ‘豊山慶老所品官坐目’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555년(명종 10)~1677년(숙종 3)까지의 좌목이 실려있다. 이 자료는 󰡔古文書硏究󰡕 2집에 자세한 해제와 함께 실려있다.  10) 慶老會案 2에는 柳{氵+奎}(1730~1808) 서문과 함께 甲子(1804), 戊辰(1808), 辛未(1811) 3시기의 慶老會 坐目이 실려있다.
안동지방 鄕案으로서 萬曆 己丑年(1589, 선조 22)에 작성된 문서이다. 그러나 문서말미에 기록되어 있듯이 入錄, 削籍是非와 관련되어 이전의 문기 즉 기축년분 원본은 파기하여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그 후 새로 부본을 轉寫하였는데 본서에 실린 것은 뒤에 베낀 전사본이다. 전사한 해는 戊申年이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NO.1 : 1639(仁祖 17), 1642(仁祖 20), 1646(仁祖 24)
NO.2 : ?
하회의 洞約과 같은 성격의 문서이다. 내용상 NO. 1, 2 문서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契約, 作契, 死喪相助, 定罰, 掌契有司, 患亂相救, 講信,(附重設立議), 變通 등에 관한 約束을 적고 있다. NO.1의 문서는 연호가 있어 작성연대를 쉽게 알 수 있으나, NO.2 문서는 시기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有司 등의 동계조직으로 미루어 볼 때 NO. 1 문서와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NO. 1 : 1634(仁祖 12) NO. 2 : 1634(仁祖 12)
NO. 3 : ? NO. 4 : ?
NO. 5 : 1731(英祖 7) NO. 6 : 1731(英祖 7)
霜臺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사헌부 관직자들이 계를 만들어 그 명단을 적은 것이 霜臺契帖이다. 이 계첩은 풍산유씨 서애가 종손인 柳元之(1598~1648), 柳聖和(1668~1748)가 사헌부 감찰로 재직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계첩이다. 소장처가 서원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유씨종가일 것이다.
NO.1~4 문서는 柳元之, NO.5~6은 柳聖和가 霜臺契員으로 명단에 올라있다. 연대가 확인되지 않은 NO.3,4 문서도 유원지가 사헌부감찰로 재직할때 작성되었으며, NO.1,2번 문서와 거의 동시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金應祚(1587~1667)가 撰한 辨誣錄(附謙巖書), 전라도 유생 鄭武瑞 등의 上疏, 司諫院, 경연 등에서 유성룡 변무에 관계되는 여러 문헌들을 편집해놓은 책이다. 변무내용은 두가지 내용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김응조가 찬술한 부분으로서 柳成龍이 主和誤國한 점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변호하였고, 둘째는 유성룡이 기축옥에 관련된 부분으로서 변무와 관련된 상소 등이 포함되어 있다.

文書名

番號

作成年代

發·受給者

規格

面 數

院案要覽

1

2

3

1841(헌종7)

1853(철종4)

1883,1896

28,3x20

30x21

30,3x21,3

53

51

57

屛山書院記事

1

1718(숙종45)

31x22

12

上樑文

1

1771(영조47)

119x62

2

上疏

1

2

1851(철종2)

1595~1665

李啓魯

柳重河

31,8x28

27x134

5

4

院任錄

1

2

3

4

5

6

7

8

1592以前~1640

1592以前~1716

1592以前~1807

1652~1671

1717~1806

1807~1885

1887~1918

1955~1972

32,6x27

13

39

13

45

39

33

40

13

奉安錄

1

1610~1614

39x24,5

23

執事錄

1

2

3

4

1614~1639

1658~1664

1666~1698

1723~1735

26,5~29,5

64

47

154

焚香錄

1

1823~1826

入院錄

1

? ~1718

115

居齋案

1

1781~1792

26

講案

1

1789(정조13)

16

傳與記

1

丁亥~己丑

32x21

15

院奴婢(推刷)案1

1

2

3

4

5

6

7

1663(顯宗4)

1666,1669(顯宗7,10)

1738(英祖14)

1739(英祖15)

1750(영조26)

1756(영조32)

1762(영조38)

12

35

30

20

26

25

17

祭文

1

1629(인조7)

鄭經世撰

28x25

9

2

1629(인조7)

35x25,3

9

祭物儀式

1

1607~1674

9

祭器

1

1615~1617

6

祭需物目

1

己酉

3

通報

1

甲午

27x24

1

廟內尺量圖

1

?

1

洞案

1

1598~1607

5

慶老會案

1

1804~1811

32x29

36

鄕錄

1

1589(宣祖 22)

40.5x21.8

16

契約

1

2

1639,1642,1646

?

46x21,8

8

5

霜臺契帖

1

2

3

4

5

6

1634(인조12)

1634(인조12)

1674(숙종1)

?

1731(영조7)

1731(영조7)

34,6x21,4

38x21,3

43,5x30

35x21

35x21,7

35x21,6

7

6

6

6

4

4

龍庭對策

1

?

52

辨誣錄

1

2

?

30x22,5

31,2x20,5

14

30

各房雜物未收都重記

1

戊午

12

齋舍洞完文

1

壬戌

6

詩文

1

2

?

?

36x47

3

望記

1

1897

柳承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