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홈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安東의 眞城李氏家는 嶺南의 명문가문으로서 조선조 유학의 宗匠인 退溪 李滉을 배출한 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서의 주인공인 周村派는 퇴계 가문인 溫惠派와는 퇴계의 祖父代인 15세기 중반에 갈라진 가계로서 안동에 세거한 진성이씨 중에서는 宗派에 해당한다. 현재 이 가문의 소재지는 慶北 安東市 臥龍面 周村里로서, 그 宗家의 慶流亭에 600여년에 걸친 2,300여 점의 고문서와 1,300여 책의 전적을 소장하여 왔다. 본원에서는 1998년에 이 가문의 자료 중 李庭檜(1542~1612)의 松澗日記를 탈초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한 바 있다.
周村派의 자료는 그 家系가 安東에 거주하는 진성이씨 중에는 宗派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문서가 慶北地方古文書集成(李樹健 編) 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주촌파 所藏 전적과 고문서를 본원에 寄託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귀중본 고문서의 내용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전적 역시 그 목록과 개략적 내용이 소개되었다.
註1)
이번에 출간되는 고문서집성 역시 주촌파 고문서의 내용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학계에 유용한 자료로서 쓰일 것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2,300여 점의 고문서를 다 수록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 자료는 언제든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열람이 가능함을 밝혀 둔다.
진성이씨의 始祖는 高麗末의 李碩이며 당시까지는 本貫地인 眞寶에 거주하다가 그 아들인 李子脩 때 안동의 豊山縣으로 이주하였고, 다음 代에 李云侯가 현재의 世居地인 周村 지역으로 들어왔다.
註2)
이는 안동의 읍지인 永嘉志에서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註3)
臥龍面誌 에는 ‘周下洞’을 소개하면서 府北 20리에 있는 지역으로, 옛 명칭은 周村이며 二老村으로 개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註4)
二老村이라는 명칭은 진성이씨 李禎이 善山府使로서 나이가 든 후에 이곳에 와서 살았고, 永春李氏인 李惟善 또한 善山府使로서 이곳에 卜居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한 고장에서 함께 나이를 먹었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註5)
또 영가지를 인용하여 ‘軍器寺副正 李云侯가 최초로 卜居하여 그 후손 현감 庭檜가 계속하여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註6)
한편 주하동 외에도 인근에 있는 亭子洞은 이 가문의 李演(1492~1561)이 이 곳에 정자를 지었던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으며, 이 집안 직계는 아니지만 李希孟이 또한 이 곳에 거주하였다.
註7)
이당시 李演이 건축한 정자는 퇴계 이황에 의해 慶流亭으로 명명되었으며,
註8)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또 주촌에는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송간 이정회가 건축한 松澗亭이 있었으나 중간에 폐치되었다.
註9)
이렇듯 주촌 일대에는 地名에서부터 樓亭, 古蹟 등 각 분야에 진성이씨 가문과 관련된 많은 유적과 자료들이 세전되고 있다.
이렇게 진성이씨 주촌파는 600여년에 걸쳐 주촌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세거해 오고 있다. 주촌파의 先代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家系를 圖示하면 다음 〈圖 1〉과 같다.
〈圖 1〉 眞城李氏 周村派 家系
〈圖 1〉에서 보듯이 李子脩는 호장의 자제로서 麗末에 登第하여 벼슬이 判典儀寺事에 올랐을 뿐 아니라 홍건적의 침입때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松安君으로 봉군되었다. 이는 안동지역에서 사족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봉군될 당시 하사받은 전50결과 노비 5구는 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자수의 손자인 李禎은 善山府使를 지냈으며, 世祖代에 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는 등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 적극 동조하면서 중앙의 양반관료로서 입신하였다. 이는 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노비 및 전답의 증가 등 경제적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 중반까지 그다지 현달한 인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分財記 상에서 많은 재산이 확인되고,
註10)
또 안동지역의 유력사족가문인 安東金氏, 義城金氏 등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음에서 확인되고 있다. 李禎은 후에 曾孫 李滉으로 인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정의 아들인 李遇陽은 퇴계의 伯祖로서 무과를 거쳐 仁同縣監을 지냈다. 다음 代인 李哲孫은 음직으로 承義副尉를 제수 받았으며, 李壎은 護軍을 지냈다. 아들 李演은 訓導를 지냈으며 慶流亭을 지은 인물이다. 경류정에는 퇴계의 題詠이 있다.
16세기말에 이 가문은 또 한 명의 공신을 배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松澗 李庭檜이다. 그의 아버지는 李希顔으로서 일찍이 遺逸로 徵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안동의 大姓인 의성김씨 鶴峯 金誠一의 祖父인 金禮範의 딸이었다. 이정회는 어려서 퇴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親喪에 廬墓살이 하면서 禮를 다하였다. 宣祖代인 1590년에는 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왕실의 계통을 바로잡는데 공을 세운 댓가로 주어지는 光國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시에는 橫城縣監으로 있으면서, 동생인 庭柏을 안동으로 보내 의병을 창의하게 하였다. 또 정유재란 시에는 義興 지역 방어에 힘쓰는 한편 天兵을 접대하고, 백성을 撫恤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후 眞寶 지역으로 들어와 鳳覽書院을 세우고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芝南書堂을 세워 한강 정구가 부사로 부임하자 함께 田土를 구획하여 선비를 양성할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註11)
이정회의 立身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진성이씨 주촌파의 입지를 더 확고히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가문이 이후 안동지역의 막강한 사족가문인 豊山柳氏, 安東權氏, 義城金氏 등과 계속적인 통혼관계를 맺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한편 이정회는 李氏家의 선대 사적을 정리하는 등 차후 族勢의 확장에도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진성이씨가의 世傳遺錄을 친필로 작성하였고, 족계에도 깊이 관여하여 관련 문서를 남기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註12)
이정회 이후 이 가문은 중앙에서 크게 현달한 인물은 내지 못하고 안동지역을 비롯한 영남 일원에서 在地士族으로서 그 족세를 다져 나갔다. 한말에 와서는 李兢淵이 의병으로 활약함으로써 한말 의병사 뿐 아니라, 임란 이래 영남지역 의병의 명맥을 잇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부각되고 있다. 이긍연의 의병활동 기록은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으나 본서에 수록한 差帖, 傳令 등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당시 종사관 등으로 차정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을미의병일기」는 당시의 의병전의 전개양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본서에 수록한 주촌파의 고문서는 대략 40여 종 1,000여 점에 이른다. 이 중에서 15世紀 고문서가 12점이다. 원래 이 가문에는 14세기에 작성된 李子脩의 정안과 홍패의 내용이 전하고 있으나 문서 원본은 전하지 않고 世譜에 轉寫되어 그 내용만이 전하고 있다. 본서에 수록한 주촌 종택 소장 고문서의 종류와 간략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본서에 수록한 告身敎旨는 총 39점으로 이 중 36점이 조선전기의 교지이다. 인물별로는 李云侯, 李禎, 李壎, 李演, 李庭檜, 李曾孝, 李邦翰이 교지의 주인공이다. 이 중 조선초의 인물인 李云侯는 靑海君 李堣로 인해 贈通政大夫通禮院左通禮로 증직되었다.
또 본서에 수록한 2종의 공신녹권은 李禎의 佐翼原從功臣錄券과 李庭檜의 光國原從功臣錄券이다. 좌익공신이란 端宗을 폐하고 世祖를 추대하는 과정에서 韓確, 申叔舟, 權擥, 韓明澮 등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준 공신호로서, 李禎은 당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정의 좌익원종공신녹권은 15세기의 현전하는 5종의 공신녹권 중 1종으로 두루마리 형태가 아니라 甲寅字를 사용하여 인쇄하였다는 점에서 서지적 가치 또한 높다고 하겠다.
註13)
녹권상에는 이정의 본관을 ‘寶城’이라 기재하였는데 이는 眞寶의 古名이다. 광국공신은 선조대에 이씨 왕실의 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勳號로서, 이정회는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정회의 광국원종공신녹권은 1591년에 만들어져 반포된 것이다.
이 집안은 안동의 명문사족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에 두차례 공신을 배출한 것 이외에는 특별히 중앙에서 사환을 하거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사례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安東府內에서는 유명 사족 가문과 계속 교유, 통혼하면서 재지적 기반과 경제력을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문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분재기이다. 이 가문 최초의 분재기는 15세기 중반인 1452년(文宗 2)의 李遇陽의 分衿文記이다.
註14)
이우양의 分衿文記는 조선전기 재산상속의 전형을 보여주는 분재기로 총 16口의 노비를 이우양과 그 妻인 淸州李氏가 합의하여 자식남매에게 나눠준 문기이다.
註15)
또 1533년(中宗 28) 李壎 分衿文記를 통해 약 80여년 이후 이 가문의 재산의 증가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註16)
이 분재기는 遺書의 성격도 함께 지니는 것으로서 이 당시에 이훈 夫妻가 표방한 孫外與他 금지의 조항은 조선전기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朱子家禮에 의한 종법질서보다도 血孫을 중시여긴 시대적 분위기의 표현이다. 이 分財에서 이훈 夫妻가 자식 삼남매에게 제시한 원칙은 長子의 承重位財産相續, 어릴때부터 率養한 조카에 대한 배려, 비교적 작은 규모의 家舍를 받은 次子에 대한 재산상의 배려, 일찍 어미를 여읜 承重長孫에 대한 재산상의 배려 등이다. 또한 財主인 이훈의 妾에 대한 재산상속상의 조치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분재기는 이렇듯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재산상속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시 分衿한 재산은 노비 62口, 토지 344斗落에 달하므로 불과 80여년 만에 이 집안 노비의 숫자가 4배에 달할 정도로 재산이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재산증가의 원인은 혼인을 통해 妻家의 재산을 획득하고 당대에 토지를 買得하는 등 많은 경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같은 날 이훈은 조카인 李濟에게도 별도의 별급문기를 작성하여 주었다. 즉 위의 문서에서 일찍 부모를 여읜 조카에 대한 분재를 행하고 이를 〈分衿文記〉에 밝혔을 뿐만 아니라, 상속 당사자인 조카 李濟에게 별급문기도 작성하여 준 것이다. 하지만 이 별급문기는 이 집안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고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註17)
이 집안의 문서임이 분명한 〈李壎別給文記〉가 어떤 경로로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문서와 앞의 分衿文記는 證保로 나서고 있는 인물이 서로 같고, 이 문기에서 별급을 받고 있는 李濟는 앞의 分衿文記에는 필집이 되고 있다. 별급사유는 일찍 죽은 동생을 대신하여 조카를 데려다 길러 친자식처럼 사랑하지만, 田民이 적어 畓13斗落只만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기가 다른 분재기와 함께 이 가문의 사회 경제적 기반과 分財 양상을 밝히는 데에 이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정서하여 이를 제시하기로 한다.
註18)
嘉靖十二年七月十九日三寸姪李濟亦中成文許
給爲臥乎事叱段汝矣父亦不幸早世爲去乙汝矣身乙率
來長養愛同己子爲乎矣田民數少乙仍于子息一例以許
給不得爲在果草峴員奴[哲]金記上畓柒斗落只新
[巾]員乭伊名字付大畓頭戶奴白金名字付平加耕畓參斗
落只及[吾]古介員加耕畓參斗落只等庫乙永永別給爲臥乎鎭長耕
作爲乎矣後次萬一別爲少有去乙等此明文以告官卞正事
財主敦勇校尉行龍驤衛副護軍李[壎](手決)
證保 六寸弟前參奉 李自藝(手決)
三寸姪幼學 鄭栝(手決)
筆執 長子幼學 李演(手決)
이로부터 약 50년 후인 1580년(宣祖 13) 李庭檜 남매는 부모가 미처 分財하지 못한 재산을 和會分執하였다.
註19)
참석자는 장남인 이정회를 비롯한 嫡子 7남매와 孽子 1명이다.
註20)
얼자를 상속대상에 포함시켰다는 점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분재기 자료 중 이 가문의 재산상속과는 무관하지만 매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私奴 卜萬의 분재기가 있다.
註21)
이는 양반들의 재산으로서 소유당하는 존재로만 생각되던 노비 신분이 재산을 소유하고, 또 스스로 분재기를 작성하여 재산을 상속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노비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료로 여겨진다.
한편 주촌파 고문서 중 재산관련 고문서는 분재기 외에도 노비매매명문과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노비매매명문은 점련문기의 형태로 되어 있어 立案으로 분류된 것도 있으나 그 수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토지매매명문은 약 500여점이 본서에 수록될 정도로 많은 양이 世傳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약 200여점은 이 가문이 직접 혹은 노비를 통해 토지를 사고 판 문서이며, 나머지 300여점은 토지를 매매할 때 함께 첨부하여 주고받은 舊文記에 해당한다.
註22)
일련의 구문기는 동일 字號, 동일 地番의 토지에 대한 거래상황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지가변동을 비롯하여 경제사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註23)
私家에 所藏된 호적은 주로 호구단자나 준호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본서에 수록한 1528년(中宗 23)의 호적은 안동부 부북 호적대장의 단편이다.
註24)
즉 官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호적대장이 이씨가에 일부 보관된 것으로 그 소장 경위는 분명치 않다. 이것은 비록 소략한 자료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의 호적으로선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註25)
이 호적에는 모두 6戶가 기재되어 있는데, 제1호가 이 집안인 李壎의 戶이다. 이훈의 호는 이훈 부부 2명과 노비 38명, 奴妻인 良女 9명, 仰役雇工百姓 1명, 仰役百姓 1명으로 총51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6개의 호 중 그 구성원의 수가 가장 많다. 제6호 역시 양반호인데, 호주는 여자인 李承賱妻金氏로 되어 있다. 그 외 3개의 호가 호주의 직역을 新白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호적에 등재된 인원은 총 82명으로, 이 중 노비가 51명, 良女 12명, 雇工百姓 2명, 仰役百姓 1명, 新白丁 10명이다. 이 호적은 조선전기 호적연구에 유용한 자료이며, 이의 연구를 위해 신백정, 앙역백성, 앙역고공백성 등의 용어를 정확하게 풀이해야 할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진성이씨 주촌파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眞城李氏世傳遺錄」과 「奉先錄」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註26)
「眞城李氏世傳遺錄」은 李庭檜가 친필로 작성한 것이지만, 작성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이정회의 생졸년을 고려해보면 16세기말~17세기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遺錄」에는 始祖 李碩으로부터 第九代까지의 9명과 舍弟인 李庭栢의 略傳과 이들에 대한 祭享에 관한 제반사항을 구체적으로 싣고 있다.
註27)
그리고 退溪 李滉의 교시에 의해 始祖 李碩이 안동으로 이거할 당시의 文蹟과 형제간의 序次를 확인하게 된 내력이 첨부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1612년(光海君 4)에 이정회가 직접 작성한 ‘族中完議’가 실려있으며, 이후 李溟翊(1617~87)의 後識가 첨부되었다. 족중완의의 내용 중에는 婚喪禮에 따른 族中의 상호부조 규정과 거기에 따른 벌칙조항도 아울러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奉先錄」은 奉先錄第一~第三과 續奉先錄 모두 4책으로 成冊되어 있다. 그러나 奉先錄第二는 喪禮備要를 轉寫한 부분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에 본서에는 수록하지 않고, 세 책만 수록하였다. ‘奉先錄第一’은 우선 맨 앞부분에 奉先列位를 李壎~李庭檜에 이르는 4代의 夫妻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四時仲朔祭儀나 墓祭 등의 의례절차를 기술하고 있다. 또 1660년(顯宗 1)에 李曾孝가 쓴 別廟事實에는 代盡後 神主를 最長房에 보내야 하나, 최장방이 나이가 많거나 他官에 거주하는 경우 신주를 別廟에 두었다가 埋置하도록 족중에서 논의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또 李禎의 墳墓齋宮으로서 1480년(成宗 11)에 창건된 鵲山齋宮의 내력과 重修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 외에도 李演墓碣文, 李希顔夫妻合墓碣文(權松巢 撰), 李庭檜夫妻合墓碣文(李曾孝 撰) 등이 수록되었다.
奉先錄第三은 각종 祭文, 呈文과 선대묘소 封植관련 문서들이 전사되어 있다. 續奉先錄에는 鵲山精舍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1764년(英祖 40)에 松安君 위판을 鵲山舊廟에 봉안했고 1790년(正祖 14) 企庵公을 祔享, 1794년(正祖 18) 松溪公과 松澗公을 流巖으로부터 移奉하여 祔享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1804년(純祖 4)에 李國僑가 기록한 歧谷齋舍重修事實과 李兢淵이 쓴 九老洞齋舍重創事實,
註28)
후손 李晩燾의 磨峯府君(이증효)行狀 등도 이 가문의 내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족회완의는 이정회 당대의 것으로서 진성이씨 족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註29)
이는 1583년(宣祖 16)과 1596년(宣祖 29) 2회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전자 부분은 “萬曆十一年十月初二日 族會完議”로, 후자는 “萬曆二十四年四月二十三日 契中完議”라 기재되어 있다. 족계의 창립 목적은 주로 春秋降神, 婚姻時扶助, 喪事時扶助, 喪具豫備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계에서는 有司를 따로 두어 宴會 및 對話의 자리를 마련하여 敦睦을 기하는 한편 婚·喪禮時에 상호부조를 하기도 하였다. 부조할 때의 액수와 준비하는 喪具의 내역 등이 約條로서 명기되어 있다. 약조에는 반드시 벌칙조항이 따랐다. 이 족계에서의 벌칙은 重罰, 中罰, 輕罰이 있으며, 각각 永永損徒, 1년 損徒, 笞奴 50으로 정해져 있었다.
첨부된 좌목을 보면 이정회를 포함해 모두 21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16명이 진성이씨이며 청주정씨 3명, 안동권씨 1명, 개성고씨 1명, 봉화금씨 1명이다. 진성이씨 이외의 타 성씨들은 모두 이 가문과 혼인관계로 연결된 처족, 혹은 외족일 것으로 생각된다. 1596년 좌목에는 이정회를 포함하여 18명이 기재되어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李庭檜, 鄭士誠(1545~1607, 淸州人, 號 芝軒), 權宇(1552~90, 安東人, 號 松巢) 등이다. 이 족계를 주도한 사람은 주촌파 종손 이정회였으나, 참여한 계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족세가 당시까지는 그렇게 번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이들 완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족계의 모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족계가 사족 내에서도 배타적인 족중의 결속을 위한 조직이라고 한다면, 이와 달리 신분을 초월한 동갑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甲稧座目」이 있다.
註30)
이 자료는 1664년(顯宗 5)에 안동부 관내의 戊午生(1618)과 己未生(1619) 인사들이 결성한 동갑계의 좌목이지만, 원본은 아니고 辛酉年에 이를 베껴 쓴 전사본이다. 이들은 1664년에 45~6세의 나이로 봉정사에 회동하면서 상호간의 친목도모를 위한 동갑계를 실질적으로 결성하였고, 계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별도의 完議를 마련하였다. 완의의 규정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상하의 구분 없이 이 계에 참여시킨다’는 규정이다. 이 규정대로 실제 좌목에는 사족 뿐만이 아니라 이족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즉 총 36명 중 人吏 3명과 律學 1명의 이름이 맨 말미에 기재되어 있다. 어느 지역보다도 사족층이 두텁고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안동부내에서 이러한 동갑계가 구성되었다는 점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 가문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과 지도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본서에 4~5종을 수록하였다. 먼저 대표적인 것이 무이구곡도이다.
註31)
이 무이구곡도는 작자미상이며, 제작시기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무이구곡도가 진성이씨 가문에 전하는 것은 주자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무이구곡은 주희학문의 발양지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그린 무이구곡도는 주희의 도학자적 행적을 간접체험하고 그에 대한 존모의 심정을 가탁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註32)
중요 지도로는 오군영도와 팔역도를 들 수 있다. 오군영도의 정식명칭은 「五司合爲一營之圖」이다.
註33)
이는 오군영의 조직과 편제, 지휘체계 등을 도표로 만든 軍圖帖이다. 折帖 방법, 작성연대 등을 고려해 보면 임진·정유왜란 당시 야전용으로 사용되었거나, 훈련등에서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림은 1營의 조직을 그림으로 나타낸 圖解부분과, 군사의 조직과 편제, 금고 및 깃발의 쓰임새 등 작전상의 중요사항을 명기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圖解 부분은 9개로 절첩되어 있고, 五司는 정 중앙에 中司, 네 모서리 부분에 前司, 後司, 左司, 右司가 각각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中司를 중심으로 ‘五司合爲一營之圖’라는 題名과 함께 ‘一營分五司’라고 쓰여져 있어 이 도표의 題目을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면에 의하여 1營은 5司로 구성되어 있으며, 1司는 5개 哨로, 1哨는 3개 旗로, 1旗는 3개 隊로, 1隊는 11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1개 司는 54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1營은 모두 2,700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편제방법은 기효신서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임란 직후 5군영이 정비되었고, 그당시 5군영의 편제는 기효신서에 의거 ‘營-司-哨-旗-隊-伍’로 하였다. 이 군영도에도 ‘分軍之法’을 기효신서에 따랐다고 한 것을 보면 이 군영도가 임란직후의 군사체제 정비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와룡면지에는 1606년(선조 39) 9월에 安東講武堂에서 習陣하는 과정을 그린 軍圖帖이 당시 武學試才御史 姜弘立과 安東鎭武學敎授 李庭檜 등 5인의 冑孫家에 소장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註34)
따라서 확실치는 않지만 이 오군영도가 와룡면지에 기록된 軍圖帖인 것으로 생각된다.
八域圖는 8도의 지도로서 粧帖되지 않고 한 장에 한 도씩 모두 8장 낱장으로 되어 있다.
註35)
1면부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순서이다. 지도의 작성방식은 평면상에 주·부·군·현의 위치를 기록하고, 중요한 산하를 표기하였으며, 도면의 상단에 각 도의 찰방 수를 일일이 기재하여 보여주고 있다.
본서에 수록한 간찰은 모두 211건에 달한다. 대부분이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안동 지역 내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오간 서신이다. 다만 앞부분에 수록한 9건의 간찰은 비교적 시기가 앞서는 16~17세기의 유명인들의 친필간찰이다. 그 중 1번은 퇴계 이황의 친필간찰이며, 葛庵 李玄逸(1627~1704)과 密庵 李裁(1657~1730) 父子, 顧齋 李槾(1669~1734) 등의 간찰이 수록되었다. 갈암 이현일은 載寧李氏로서 아버지는 石溪 李時明이며, 어머니는 安東張氏 張興孝의 딸이다. 이현일은 퇴계의 학통을 이른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이 가문과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이어 퇴계 학통을 계승하였고 이후 李象靖, 李光靖 등으로 학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이만 역시 재령이씨로서 叔父인 이현일로부터 수업하였고, 禮學에 밝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간찰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재령이씨 가문과 진성이씨 주촌파와의 교유가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註36)
또한 내용은 길지 않지만 미수 허목의 간찰은 진성이씨 선대의 묘갈명과 관련된 것으로, 허목과 주촌 종택간에 문자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註37)
주촌파의 인물 중 李肯淵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병한 안동의병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계기로 「일기」와 관련 자료들을 남기고 있다. 그가 남긴 일기는 1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의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안동의병의 활동상을 충분히 보여줄 만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일기」에는 원래 표지가 없으나 그 내용이 을미의병과 관련이 깊고, 을미년 12월의 상황부터 기재되고 있으므로 편의상 「乙未義兵日記」로 명명하였다.
註38)
일기는 총 42면의 필사본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 앞의 30면까지는 이긍연이 직적 보거나 전해 들은 내용을 상세히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1895년(乙未年) 12월부터 다음 해인 丙申年 10월까지의 안동의병의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註39)
을미년 12월은 안동의병이 일어난 시기이고, 병신년 10월은 의병이 해산한 직후 시기이다. 이긍연은 의병창립시에 직접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의병장 金道和로부터 종사관 첩지를 받는 등 안동의병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註40)
일기의 31면부터는 안동의병과 관련한 각종 자료를 전사한 부분이다. 안동군수가 의병에 보낸 帖紙, 안동에서 晉州로 보내는 答通, 충청도 제천 격문, 湖西 召募將 격문 등이 전사되어 있다.
안동 의병은 안동지역 주민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기병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도움이 兵勢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安東倡義所各門中分排記」이다.
註41)
이 자료는 1896년 정월에 의병소에서 각 문중과 향교·서원 등에 의병에 지원할 의연금의 액수를 책정하여 분배한 내역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各門分排錄’이고 뒷부분은 ‘鄕中各儒中加排錄’이다. 즉 전자는 面別로 각 문중마다 2냥에서 천냥까지 의연금의 액수를 정한 것이며, 후자는 향교와 서원·사우마다 의연금의 액수를 정한 것이다.
各門分排錄에 따르면 21개면 141개 문중에 의연금을 배정하고 있다. 의연금의 액수는 당시 문중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정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각 문중의 族勢를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큰 액수인 천냥을 배분받은 가문은 豊南面의 河回柳氏, 乃城의 酉谷權氏, 臨東 水谷柳氏 세 집안이다. 하회 柳成龍 가문이나, 닭실의 權橃 가문은 조선전기부터 한말까지 안동지역에서 족세가 번성했던 집안이며, 무실의 전주유씨의 경우 족세도 성했지만 안동의병이 그 연원을 定齋學派에 두고 있었으므로 더 많은 의연금을 배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鄕中各儒中加排錄’은 향교와 39개 서원 및 사우의 의연금 분배현황을 보여준다. 향교의 경우 600냥을, 서원의 경우 40냥에서 최고 800냥까지 배분되고 있다. 서원 중 최고 액수인 800냥의 의연금을 배분받은 곳은 호계서원이었다. 이 역시 풍산유씨 가문과 함께 호계서원의 안동지역 내에서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 자료는 실제 의연금이 의병에게 지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동부 전 지역을 통틀어 의병 봉기에 관심이 지대하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자료이다.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원은 일찍이 임란시기부터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특히 도학의 전통이 두드러진 안동지역에서 도학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한 이러한 사례들이 발굴됨으로써 차후 더 활발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