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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로는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이다.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 또는 춘포(春圃)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조용한 삶을 즐겼다. 『오천세적(烏川世蹟)』에 의하면 ‘그는 생원이 된 뒤에 전원에 은거하였는데, 일찍이 태도와 행실이 우뚝하고, 명성과 덕망이 높아서 고을 사람들의 천거를 받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려고 할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추천을 받은 것은 65세의 고령이었으며, 이 해는 그의 아들 김연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던 해였다. 퇴계가 지은 김효로의 묘갈명에 의하면 ‘과거 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남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 태도와 행실이 높고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 후 유림에서는 사당을 세우고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과 김효로의 위패를 모셨으며 사당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이는 이 고을에 자리잡은 두 명망있는 가문의 조상으로서 그 자손 중에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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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로의 아들이다. 자는 자적(子迪) 또는 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죽연이며, 1510년(중종 5) 생원시ㆍ진사시를 거쳐, 1519년(중종 14)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부정자(副正字)등 대소관직을 역임한 후 강원도관찰사,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1524년 정언으로서 김안로의 추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뒤 지평으로 있을 때 심언광ㆍ채무택 등이 김안로를 다시 기용하려고 하자 이너적과 함께 거부하였다. 재집권한 김안로에 의해 경성통판으로 좌천되었다. 19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사간으로 기용되었다. 이듬해 탁영시에 급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44년 경주부윤으로 재직하였다. 저서에 <운암일기>가 있다. 그는 영남지방의 명유들과 교유하였고 그후 영남지방에 확고한 기반을 가진 사족ㆍ양반들과 통혼하며 본 가문이 안동지방에서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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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1491~1555)는 1491년(성종 22) 광산김씨 예안파의 파조(派祖)인 김효로(金孝廬)와 그의 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주로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거주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조선시대 식생활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이다. 이 책은 550년여 년전에 이곳에서 쓴 책이다. 김유는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부녀자들의 관심사였던 요리서를 저술할 만큼 실용과 탐미를 적절히 조화해 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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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필은 아버지인 대사헌 연(緣)과 창녕조씨 치당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다. 약관에 이미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있으면서 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 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1571년(선조 4) 36세에 처음 퇴계 선생의 문에 이르러 퇴계와의 각별한 사제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퇴계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구봉령·권호문·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의 시호가 내렸다.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후조당문집 後彫堂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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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자 문신이다. 자는 달원(達遠)이며 호는 근시재(近始齊)이다. 시재(始齋). 효로(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연(緣)이고, 아버지는 부의(富儀)이며, 어머니는 권습(權習)의 딸이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신(朝臣)의 천거로 1587(선조 20)년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를 거쳐 1589년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1월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 등지에서 분전하였다. 이듬해 3월 좌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상주 당교(唐橋)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거두고, 4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적을 차단, 공격하여 대승하였으며, 5월에는 양산을 거쳐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근시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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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의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다. 예안 출신. 효노(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綏)이고,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수민(壽民)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올라 승문원정자,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에 옮겼으나 이른바 대북ㆍ소북이 서로 대치하여 국정이 어지럽자 묘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인조 4년 청나라가 침략하여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여러 도의 군사가 잇달아 패하는 긴박한 지경에 이르러 예안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매 김령은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도왔으며 이듬해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 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요형(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 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 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인조 19년 향년 65세를 일기로 몰하였다. 나중에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문집 2책과 40여 년간의 일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