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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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坵(1211~1278)는 부(父)를 이어 개경의 중앙 귀족이 되었다. 그는 고종 19년(1232)에 22세로 지공거(知貢擧) 김인경(金仁鏡, ?~1235)에 의하여 二등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말미암아 신종, 희종, 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감수국사 류경(柳璥, 1211~1289)과 함께 고종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라는 재상직으로 관직을 마쳤고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 3권이 현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소는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전하고 있으나 이곳이 그의 초장지(初葬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1498년(홍치 11, 연산군 4)에 생원시(生員試)의 합격을 거쳐 1502년(홍치 15, 연산국 8)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吏曹佐郞), 정랑(正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봉상사첨정(奉常寺僉正)의 내직(內職)을 거쳤고 외직(外職)으로는 전라도사(全羅道事), 의성현령(義城縣令), 옥천군수(沃川郡守), 덕원(德源)·江陵都護府使를 거쳤고 중종(中宗) 반정(反正)에 참여(參與)한 공으로 그의 형(兄) 석현(錫賢)과 제(弟) 석충(錫忠)과 함께 원종(原從) 일등공신(一等公信)에 책봉(冊封)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이를 칭할 때 가장 높은 품계의 직(職)을 칭하지 않고 가장 명예로운 청직(淸職)을 따서 교리공(校理公)이라 칭한다. 그의 묘표(墓表)는 정조(正祖)때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민종현(閔鍾顯)이 지었다.
  • 호는 해옹(海翁)으로 1588년(戊子 宣祖21년 萬曆16년)進仕에 합격하였다. 壬辰 倭侵을 당하였을 때 祖의 喪을 당하고 父의 病이 위독함으로 侍病하느라고 擧義하지 못하고 義穀 白石을 義州 行在에 보내었고, 丁酉 再侵이 湖南地方에 밀려오자 檄文을 사방에 보내어 義兵을 모집하여 沃溝로부터 古群山一帶를 지키면서 倭兵을 邊山에서 격파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錦山 郡守에 제수되었고, 對馬道를 치자고 건의하였으며 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羅州牧使, 潭陽府使를 거쳐 淮陽府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晩年에는 고향에 돌아와 海山軒을 짓고 消日하였다. 이 집안에서는 羅州公으로 칭해지고 있다. 澤堂 李植, 溪谷 張維, 畸翁 鄭弘溟, 芝峰 李晬光, 玄谷 趙緯韓, 靑霞 權克中과 교유한 簡札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 生父는 璊인데 伯父에게 4세 때(1675) 養子로 들어갔다. 1710년(肅宗37) 庚寅에 進仕에 합격하여 이 집안에서는 進士公이라 稱한다. 陶庵 李縡, 北軒 金春澤, 上書 李秉常과 道義로 交友하였으며 이들에게서 받은 많은 簡札이 현전한다. 配는 順興 安氏 璞의 딸이며 後配는 靑松沈氏 若澄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