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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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德耀, 호는 八松堂․魯谷. 成渾의 門人이자 사위로, 1597년(宣祖30) 謁聖文科에 乙科로 及第한 후 承文院 正字에 보직되고 이어 典籍으로 승진, 監察, 正言, 兵曹, 禮曹, 刑曹의 佐郞을 거쳐 軍資監 正에 전임한 뒤, 奸黨들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尼山에 隱居했다. 1623年 仁祖反正이 되자 청렴한 관리로 지목되어 다시 執義․應敎 등을 거쳐 司諫이 되었다. 이듬해 글을 올려 李适의 난 때 檢察使였던 李貴가 賊旗를 보고 도피함으로써 軍勢를 크게 무너뜨린 죄를 탄핵하였으며, 1627年 丁卯胡亂 때에는 司諫으로 和議를 주장하는 李貴와 崔鳴吉을 반박하면서 「名爲和而其實降」이라고 上疏하여 和議를 극력 반론하다가, 上疏 中 「降」자가 凶慘한 말이라 하여 奪職編配의 罪名을 받았다. 뒤에 三司의 極諫으로 留任되어 吏曹參議․大司成․大司諫․全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1637年 正月 丙子胡亂으로 淸에 항복하여 斥和臣을 처벌하게 되자 永同에 流配되었다가 이듬해 가을에 尼山丙舍로 돌아와 卒하였다. 著書에 「八松封事」가 유명하고 文筆에 능하였다. 뒤에 領議政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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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전의 호는 後村, 본관은 坡平이다. 노강서원에 제향된 윤황의 아우이자, 成渾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당쟁에 의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24(인조 2)에 이괄의 난 때에는 난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하는 인조를 모시었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호소사 김장생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시호는 忠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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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吉甫, 호는 美村․魯西․山泉齋. 金集의 門人. 아버지인 煌이 靈光郡守 在任 당시 靈光 官舍에서 태어났다. 1633年(仁祖11) 生進兩試에 합격하고 成均館에 入學중 1636年 後金의 사신 龍骨大가 왔을 때 館學儒生들의 疏頭가 되어 사신을 斬首하고 明나라에 대한 大義를 지킬 것을 上疏하였다. 그 해 12월 淸太宗이 大軍을 거느리고 來侵하자 江華島로 피난, 이듬해 正月에 江華島가 함락되자 仲父인 烇은 적과 싸우다 戰死하고, 妻 李氏(李長白女 貫公州)도 殉節하였다. 이어 南漢山城이 함락되어 王이 친히 항복하고 그의 아버지 煌도 斥和의 죄로 몰려 流配 당하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나 또는 가정적으로 쓰라린 변을 겪고 나서 일체 벼슬의 뜻을 버리고 錦山에 隱居하여 학문정진에 열중, 특히 禮論에 정통했고 性理學 전반에 걸쳐 대가가 되어 당시 宋時烈․宋浚吉․兪棨․李惟泰와 함께 忠淸山林五賢으로 불리었다. 뒤에 孝宗․顯宗이 그의 學德을 높여 持平․掌令․執義․世子侍講院 進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江華島에서 殉死 하지 못하고 구차히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평소 친교가 있던 宋時烈과 尹 鑴의 학문적 대립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宋時烈로부터 오해를 받아 끝내는 老․少分黨의 前兆를 만들었고, 모든 禮의 源流가 되는 「家禮源流」를 兪棨와 共撰하였는데, 그것이 끝내는 老少論의 싸움을 더욱 격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하고 領議政에 追贈되었으며 諡號는 文敬이고 저서에는 「魯西遺稿」․「癸甲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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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擬書=尹拯이 宋時烈에게 보내려고 써 놓았던 書札. 辛酉年(1681, 肅宗7) 尹拯은 宋時烈의 學文的․政治的 결점을 들어 규간하는 書札을 써 놓고 먼저 朴世采에게 이 書札을 보였다. 朴世采가 이 書札을 보고 보내지 말 것을 극력 권함으로 해서 보내지 않았는데, 그 후 尹拯은 자기의 妻姪이며, 또 宋時烈의 외손이 되는 權以鋌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 書札을 宋時烈에 보내지 못한 사연을 말하였다. 권이정이 이 書札에 관한 사실을 宋時烈에게 傳言하게 되자, 宋時烈은 朴世采에게 拯의 書札을 찾아보내라고 독촉하였다. 朴世采는 그 書札이 말썽이 될 것을 염려하여 없다고 잡아때었으나, 宋時烈은 자기의 손자이자 朴世采의 사위인 宋淳錫으로 하여금 몰래 그 書札을 찾아오게 하여 결국 그 書札을 宋時烈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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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長文. 1684年 生員試에 合格하고 1694年 文科에 及第한 후 說書․記注官․知製敎․牧使․觀察使 등을 거쳐 大司憲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