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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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禑王 三年(一三七七, 洪武 丁巳)에 進士 壯元에 합격하였고 八年(壬戌, 一三八二)에 文科에 登第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公州通判. 西海 楊廣 江原經歷, 原州敎授를 지냈다. 태조 三年(一四〇三, 永樂 癸未)에는 聖節使 書狀官으로 배를 타고 南京에 갔다. 松都로 돌아와서는 左獻納知製敎, 外職으로 慶尙道經歷을 지냈다. 또 內職으로 돌아와 直禮文官兼直講, 平壤敎授를 지냈다. 太宗 七年(一四O七, 丁亥)에는 다시 謝恩使 書狀官으로서 중국을 다녀왔으며, 돌아와서는 內職으로 判承文院直集賢殿 直禮文館 典農正 知製敎 令知文書應奉司事를, 外職으로는 知金山郡兼勸農兵馬鍛鍊使를 지냈다. 太宗 一三年(一四一三, 癸巳)에 左司諫大夫를 거쳐 成均館大司成, 集賢殿直提學, 太宗 一四年(一四一四, 甲午)에는 禮曹左參議 寶文閣直提學, 世宗 元年(一四一九, 己亥)에는 讀卷官試士, 世宗 五年(一四二三, 癸卯)에 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세종 당시인 六八세 때에 함양에 돌아와서는 文章行誼로서 「八溪先生」이라고 칭해졌다. 世宗一七年(一四三五, 乙卯)에 나이 八O歲로 죽었다. 遺稿 一권이 전하는데 宗宅에는 전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八溪世芳集』에 그의 글이 전한다. 처음에는 居昌 龍山 晚築, 咸陽 介坪에 살았다. 墓는 咸陽 德谷 辛坐原에 있다. 부인은 高靈朴氏로 軍器少尹 邦龍의 딸이며 宜寧 芝山에 別葬했다. 둘째부인은 河東鄭氏로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竹堂 鄭復周의 딸이다. 함양에 오랫동안 寓居했음은 邑誌 寓居條에 전한다.
  • 南漢山城 함락 후 낙향하여 자신을 백이 숙제와 비유, 은거한 곳이다. 邑誌와 文集 現地踏査 등을 통해 그 某里 및 某里齋의 내력을 略述한다. 某里齋는 德裕山 자락의 金猿山 北麓에 자리잡고 있으며, 薑川里 鄭蘊 宗宅뒤를 돌아 도보로 一시간 거리이다. 仁祖 一五년(一六三七, 崇禎 丁丑) 鄭蘊이 이곳에 隱居한 후 산에 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 자급자족하며 지냈다. 그 때 지은 움막을 「鳩巢」라 했으며, 지금은 重修하여 某里齋의 왼쪽 방이 「鳩巢」, 오른쪽이 「採藢軒」이다. 건물은 여느 곳의 書院 이상으로 웅대하며, 주위의 경관이 빼어났다. 모리재의 주위 山水 등은 一六三七년(정축년)봄 그가 모리재에 은거하며 지은 「某里鳩巢記」가 있다. 某里齋의 門樓의 명칭이 花葉樓이다. 鄭蘊 死後 그의 及門 生徒들이 齋舍를 건립, 春秋로 配獻禮를 행하였다. 某里契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鄕儒 및 道儒들이 조직한 조직이었다. 契의 草創時期, 參與人物 등은 정확하지 않다. 그 결성 취지는 「某里鳩巢記」(壬辰, 一八九二) 서문에 구체적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