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은 조선유학의 종사로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자못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을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돈이(周敦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정이(程頤) 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동자와 안자의 고풍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선생의 경의정신과 실천유학은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져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大士禍)로 말미암아 사림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를 살았다. 이같은 시대를 맞아 선생은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할을 통감하면서, 직설적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 이를 외면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회포, 조정 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닦지 않은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선생이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나 무진봉사(戊辰封事)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는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士風)을 크게 진작시킨 선생의 명망과 은연 중에 형성된 재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선생을 벼슬로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평가 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으로 만품을 굽어보고,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위럼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였다. 선생의 이같은 기상과 위엄, 출처와 학문은 만세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였으며, 그 문도들은 이를 스스로가 본받고 또한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서원을 짓고 강학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