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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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비연(斐然). 석성현감(石城縣) 옥정(玉貞)의 손자로, 장성현감 경민(景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인(南寅)의 딸이다. 부인은 연안이씨로 석형(石亨)의 증손녀이고, 외할아버지는 익양군(益陽君) 회(懷)이다. 관직이 繕工監監役에 그쳤으나 아들 允謙의 명성에 힘입어 후에 領議政까지 贈職되고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牛溪 成渾(一五三五~一五九八)의 문인으로 그가 우계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 것은 우계 성혼과 父인 오희문의 親交 때문인 것 같다. 즉 父의 영향으로 오윤겸, 윤해, 윤함 三형제가 모두 성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오윤겸은 司馬試 文科 別試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고, 壬亂이 일어나자 兩湖體察使 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승인 成渾이 奸黨의 무함을 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時論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1617年(光海君 9)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재개의 계기가 되었던 回答使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618年(光海君 10)에 廢母論이 제기되었을 때 庭廳에 불참한 후 廣州牧使를 자원하여 토당에 은거하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西人 정권이 들어서면서 大司憲을 시작으로 吏曹判書와 左議政, 領議政 등 중앙의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정치적 비중이 높았다. 그는 成渾 門下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李貴․鄭經世․李峻․金瑬등과 교유하였다. 오윤겸 후손이 중심이 된 해주오씨 집안의 정치적 성향은 초기에는 서인이었으며, 이후 노소론 分黨 후에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道一, 命恒이었다. 그러나 소론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던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후손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노론주도의 정국이 되는 것에 반비례하여 활동이 위축되어 갔다. 이후 그 일문은 慕賢面 吳山里 일대의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世居하였다. 오윤겸 이후 이 가문에는 많은 문과 합격자와 당상관 이상의 관직 역임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 오윤겸의 아들인 達天(1598-1648)은 吏曹判書를, 손자인 道一은 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윤해(允諧)의 아들이다 오달천의 從弟가 된다. 그는 典籍, 兵曹佐郞, 侍講院司書, 正言, 持平, 修撰을 거쳐 1636年(仁祖 14)에 副校理가 되었다.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후 윤집, 홍익한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영의정 윤겸(允謙)의 손자이다. 吳達天의 아들로서, 문과급제자인 그는 1694年(肅宗 20)에 개성부유수를 거쳐 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大司諫, 副提學, 大司憲, 吏曹叅判, 工曹叅判, 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4년간 울진현감으로 있다가 1686年(肅宗 12)에 조정으로 돌아갔는데, 고을 정사를 맑게 하고 敎化가 행해졌다 하여 울진 民人들이 生祠堂을 건립하고 眞影을 그려 떠나간 공을 추모했다고 한다. 또 문장에 뛰어나 시문 1300여수가 전한다고 하며 세칭 東人三學士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특히 그와 관련된 자료로서 이 가문에 家傳되어온 ‘詠畵’라는 簡札帖이 있다. 이것은 道一이 燕京에 奏請副使로 가게 된 것을 기념하여 당시 그와 교유하던 많은 인사들이 보낸 간찰을 帖으로 만들어 보존해온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