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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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字는 聖佑(혹은 聖有), 號는 歸晩窩.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百佛庵 崔興遠(1705-1786)에게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騎馬와 화살, 병법을 익혔다. 49세 때인 1753년(영조29)에 閑良으로서 武科 丙科 제 5인으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경 새재를 넘다가 호랑이를 만나자 가지고 있던 채찍으로 내리쳐 호랑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英祖가 이 소문을 듣고 ‘拍虎大將’이라 칭찬하고 불러다 관직에 임용하였다. 1763년에 參上에 오르고 1767년에 남한산성의 축성에 참여, 五衛將 虞侯가 되었다. 1771년 전라도 樂安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이 때 품계가 올라 嘉善大夫로 승격되었다. 1776년에 함흥성 축성에 참여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7년(정조 1) 경상도 尙州營長, 1782년에는 평안도 龍川府使, 조금있다가 경상도 中軍으로서 영남감영의 築城을 지휘감독하였다. 1789년에는 함경도 三水府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水原 中軍에 임명되어 陵園의 개․보수를 담당하였다. 이 일을 훌륭히 완수하여 그 공으로 資憲大夫로 승진하는 한편 防禦使에 임명되었다. 1791년에 다시 용천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793년(정조 17)에 병으로 사퇴하고 구례 오미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후 4년 뒤인 1797년(정조 21)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天文地理에 정통하였으며, 축성 전문가였다. 水原 園役을 비롯해 변방 각 지역의 築城사업을 주도하였다. 이같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낙안군수 당시 보아 두었던 구례 오미동을 開基, 자신과 후손들의 터전으로 삼고, 세거지였던 대구에서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부인 양천허씨는 딸 하나만을 낳고 아들이 없자 從弟 爾翼의 아들 德浩를 繼後하였다. 딸은 南雲紀에게 시집갔으며, 측실이 낳은 딸은 洪錫榮에게 시집갔다.
  • 柳爾冑의 系子. 贈職敎旨 및 호적에 의하면 그의 初名은 述浩이었다. 30세 되던 1786년에 술호에서 德浩로 改名하고 있다. 유덕호의 부인 載寧李氏는 이 지방 부호이자 역시 무과급제자인 李時華의 딸이다. 본서 所志에 그가 土豪로서 많은 長利를 놓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토지명문에도 빈번히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따라서 그의 사위인 柳德浩도 많은 妻財를 물려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유씨가는 顯達한 양반가는 아니었지만 豪富한 무과출신 가문끼리 결합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지위를 구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덕호는 운조루 건축을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등 가문내에서는 일정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早死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뚜렷한 행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 字는 大年, 初名은 震億. 德浩의繼後子로서 生父는 光浩이다. 所志 戶籍 등에 의하면, 震億 또는 鎭億이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어려서 射藝를 익혀 1825년(순조 25) 謁聖武科에 급제하였다. 紅牌敎旨에는 그가 閑良으로서 丙科 제 4인으로 급제하고 있다. 1814년과 1815년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해 治喪하였고, 3년상 뒤 宣傳官과 東道叅軍, 訓練判官, 別宮守門將을 지냈고 이 때 3품으로 진급하였다. 外職으로는 虞侯와 中軍을 지냈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특히 가깝게 지냈고, 농업경영 등 治産理財에 힘써 家業이 풍족하였다. 유억의 부인 淳昌趙氏(1794-1852)는 남편을 대신해 올린 한글소지가 남아있다.
  • 족보에 1846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세살 많은 계묘생(184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25세 때의 호적에는 柳根溢, 28세 때에는 柳濟泰로 개명하였다. 班名을 지닌 농촌 지식인으로서 쓴 친필일기 是言을 남겼고, 가문 소장 전적을 일차적으로 정리하였다. 각종 서책과 고문서 겉봉투에는 작성자 작성시기 사건명 등 정리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정리한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