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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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1383년(禑王 9)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太宗 李芳遠과는 同甲이며 同榜이었다. 그리고 그는 權近(陽村)의 아들이며 대제학을 지낸 權踶의 딸을 아내로 맞음으로서 相門의 女壻가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박습이 조선왕조개창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태종과의 관계, 왕조개창 이후의 환력을 고려할 때 그 역시 역성혁명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399년(定宗 1)에는 대장군, 이듬해인 1400년(정종 2)에는 左諫議를 지냈다. 태종 즉위 후에도 그의 관직은 계속 이어져 1409년(태종 9)에는 左司諫, 1411년에는 강원도관찰사, 1412년에는 正朝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1416년에는 義禁府提調․戶曹參判, 1417년에는 경상도관찰사․대사헌, 1418년에는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그 해 8월 姜尙仁의 獄事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옥사는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세종의 장인 沈溫一家를 멸문시킨 정치적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만오(晩悟). 상욱(尙郁)의 아들이다. 박상욱의 아들. 그는 1674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참판, 황해․전라․경기의 3도 감사를 지내고 1682년(숙종 8)에는 尹趾完․李彦綱과 더불어 通信使(從事官)로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본서에서는 박경후의 고신 전량과 황해도․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할 당시의 敎書․諭書를 수록하였다. 사실 박경후는 숙종초기 남인정권의 주요 당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내직에 있을 때는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675년-1705년까지 30년 동안의 관직생활을 담은「宦海浮沈」(본서 置簿記錄類. N0 7) 이라는 親筆 日記를 남겼는데, 이는 사환일기로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그의 遺著로『歸翁文集』이 전한다. 한편 박경후는 아우 경승의 아들 흥신을 양자로 들였는데, 족보에 따르면, 당시 경승계열은 이미 경기도 이천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신은 아버지와 처부의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벼슬하지 않았고, 말년에 감역이 주어졌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박경후는 정치적인 顯達을 구가하는 과정에서 청송심씨[沈檀系], 원주김씨[金德遠系], 전주이씨[李義徵系] 당대 남인의 명가들과 통혼하게 되면서 함양박씨의 사회적 입지도 크게 강화되었다. 심단은 윤선도의 외손으로 경종조 청남의 영수였으며, 김덕원은 기사당국자로 지칭될 정도로 숙종조 남인정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의징 역시 남인의 중견으로서 영조 무신란의 주동자 이인좌는 바로 그의 종손이었다. 이러한 혼맥은 당시 함양박씨의 사회적 지위를 방증하고도 남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