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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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 때에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하시중을 지냈고, 호를 杏村이라 하였으며 시호가 文貞이었다. 특히 이암은 西北面都元帥로서 홍건적을 막는 데에 공을 세워 이 가문의 입지를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홍건적을 평정한 후 扈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철성부원군을 봉하는 동시에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호를 받았다. 이암의 넷째 아들 李岡(1333 ~1368)은 공민왕조에 밀직부사를 거쳤으며, 추밀로서 졸하자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품 이상이 아니면 시호를 받을 수 없는 데도 왕으로부터 ‘文敬’이라는 칭호는 오직 이강이 족히 받을 만하다.’는 평을 받고 시호를 얻게 된 것이다.
  • 이강의 아들로 여말선초의 문신이었던 李原(1368-1429) 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초 왕자의 난에 협력한 공로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고, 세종대에 좌의정을 지내는 등 관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을 박탈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4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시호가 襄憲, 號는 容軒이다. 이원의 아들 增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靈山 현감직을 버리고 처음으로 안동에 거주하게 된 그는 권자겸 등 지역의 선비 12인과 함께 友鄕稧를 만들어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 가문은 권근 가문 등과 혼인관계를 맺고, 서거정 등과 교유하는 등 중앙의 훈척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서거정의 외조부 권근은 이강의 사위이며, 권람은 이원의 사위였다. 뿐만 아니라 서거정은 李岡・李原이 지은 시를 손자 李陸이 모아 펴낸 󰡔鐵成聯芳集󰡕의 序文을 썼고, 우향계를 축하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 李容의 손자 李遲(1560 ~1631)는 고령신씨 申末舟의 후손인 護軍 申大澐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으며, 임진왜란시의 軍功으로 공조참의를 제수받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들인 李宗培(1603 ~1633)는 高敞吳氏 吳澐의 손녀를 처로 맞아 들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治喪에 誠敬을 다한 후 이로 인해 早死하였다. 손자 李後榮(1649 ~1711)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진성이씨 李溟翼의 딸과 혼인하였다. 李善慶(1705 ~1733)은 의성김씨 학봉 후손인 金夢濂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아들 종악은 金邦杰(1623-1695)의 현손녀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호가 虛舟이다.
  • 석주 李相龍(1858 ~1932)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가서 활동하면서 500여년간 유지해 온 경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비롯한 가옥과 토지를 팔았다. 그러나 집안 후손들의 협조로 이미 매각한 재산을 되돌려 받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상룡의 출현은 안동 지역 사족 가문에서 임란 의병을 비롯, 한말 을미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인사들이 다수 배출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지위는 다소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영남 일원에서 이씨가의 사회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 李炳華(1906-1952)의 아내이자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책을 구술하여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 허은 여사였다. 아쉽게도 당시 허은 여사는 이미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았다. 허여사 자신이 어떠한 남자들보다도 더 철저한 독립운동가였다. 허여사의 재증조부는 바로 旺山 許蔿(1855-1908) 선생이다. 고문서가 온전하게 유지된 것은 허여사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밖으로만 나돌거나 쫓기는 남자들을 대신해 문서를 보관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