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 주요인물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부(睡夫), 호는 운수당(雲水堂). 하윤은 성종․연산군 대에 주로 활동한 문신․관료로서 운문파가 배출한 가장 현달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477년(성종 8)의 사마시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科才를 크게 드러내었고, 1483년(성종 14)에는 문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이후 그는 시림의 극선인 예문관 검열․봉교를 거쳐 모든 문신이 선망하던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은전을 누렸으며, 홍문관 교리, 홍문원정 등 내내 문한직에 종사하였다. 그 역시 조부 하순에 의해 다져진 사회․학문적 기반을 계승하여 사림파로 활동하였고, 특히 처부 김지경과 처남 김응기는 하윤의 사회적 지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김지경은 판서를 지낸 고급관료였고, 아들 김응기 역시 문과에 장원하여 좌의정에까지 오른 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윤의 어머니 선산김씨가 하윤의 재관시에 京第를 마련하여 사환활동을 도을 수 있었던 것도 김지경․김응기 부자의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하윤은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김종직의 문인․제자들과 함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1498년(연산군 4) 일군의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는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하연 역시도 무사할 수 만은 없었다. 비록 그는 중형을 받지는 않았지만 요직인 사헌부 지평에서 순천부사로 좌천되고야 말았고,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500년 49세의 나이로 순천객사에서 사망하였다. 이처럼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관료로 발신하였으나 사화의 와중에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관료로서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학들은 그의 학행과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1720년(숙종 46)에는 진주의 鼎岡書院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가문 내에서도 명실공히 起家祖로 인식되었다. 영의정 鄭光弼이 하윤의 묘갈명을 찬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의 사림에서의 지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하윤의 입지는 후일 그의 자손들이 학문․사회․정치적으로 성장․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선 그는 6자 1녀를 두어 후손이 번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아들들은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직장․봉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특히 취굉․취양은 사마시에도 합격하여 科慶 역시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 하취양은 벼슬하지는 못했지만 1496(연산군 2) 백형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여 부조 이래의 가성을 유지하였고, 아들 하충은 별좌․직장, 손자 하춘년은 진사를 거쳐 별좌․봉사를 역임함으로서 사환이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운문파의 혼반이다. 즉 운문파는 사환적인 기반은 약했지만 혼반에 있어서는 당대의 명가들과 두루 연계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우선 하충은 진주의 대성 진양정씨와 혼인하였고, 아들 하춘년은 함안이씨 대사간 이림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림은 문과를 거쳐 이조참의․대사간을 지냈으나 을사사화에서 화를 당한 명종조의 명신이었다. 특히 그는 남명과도 교유가 깊었고, 학행을 바탕으로 사림에서의 명망이 높았다. 특히 하춘년은 이곤변을 사위로 맞았는데, 李鯤變은 바로 한 때 남명의 절친한 친구였던 龜巖 李楨의 손자이다.
  • 이림의 외손자였던 하천서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덕룡․신남 등과 더불어 의병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송암 이로의『용사일기』 등에 따르면, 그는 진주성의 정비와 균율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나며, 사후에는 훈공으로 인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하천서는 남명의 생질서였고, 신암 이준민과는 처남매부의 사이였다. 김우옹․곽재우가 남명의 외손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하천서 역시 남명학파의 중심권에 있었고, 그의 의병활동 역시 그 연장선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천서․하경호 부자가 의병 또는 관군으로서 국난 타개에 앞장 선 데에는 남명학파의 실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하천서는 남명의 문인은 아니었지만 李公亮(安分堂)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이공량은 바로 남명의 아버지 조언형의 사위였던 것이다.
  • 하천서의 아들 하경호 역시 임란에서의 활약상이 혁혁했다. 그는 참봉으로서 별천무과에 등제하여 선전관, 훈련부정 등 무반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체찰사 윤두수의 휘하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평소 하경호를 신임했던 윤두수는 유성룡에게 하경호의 기국을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하경호는 선조로부터의 신임도 깊어 의주 피난시에는 항상 그를 선발대로 내세웠으며, 원래의 이름인 경남을 경호로 개명한 것도 선조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하경호는 무반출신이었지만 임란에서의 전공을 토대로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고 벼슬이 공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평소 성격이 검박했던 그는 임종시 자손들에게 묘갈명을 문장가에게 부탁하지 말 것이며, 관함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으로 쓸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운문파는 하경호의 아들 하진룡 대에 이르러 무반명가로서의 기반을 보다 강화하게 된다. 우선 그는 참봉으로 입사한 뒤 1633년(인조 11) 현량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의 청요직인 선전관을 역임하며 무재를 크게 인정받았다. 이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이 추진되자 송시열은 그의 장재를 높이 평가하여 북벌의 실질적인 추진자로 발탁하였다.
  • 이산군수로 부임한 하진룡은 군사들을 조련하고 군비를 강화하는 등 북벌에 만전을 기하였으나 1659년 효종이 승하함으로서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 진주로 돌아와 은거하였는데, 아호인 雙負軒은 부모와 임금을 저버렸다(負天負君)는 의미의 겸사였다. 하진룡의 북벌 참여는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그는 북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송시열 등 중앙의 거물급 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는데, 이는 후일 그의 자손들이 노론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그의 사후 우암의 사우이며 호서산림의 명사였던 유계가 행장을 지은 것도 우암과의 연계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