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강씨 소생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字는 子幾였다. 그는 일찍이 9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壬亂 중에 다시 어머니마저 잃게 되자 10세 전후한 나이에 고아의 처지가 되었다.壬辰倭亂 후는 하협을 비롯한 9형제 모두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壬亂을 전후한 시기에 부모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또다시 형제간의 생이별의 고통이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뒤 얼마지 않아 丁酉再亂(宣祖 30, 1597年)때 그의 손위 형인 河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이에 이들 형제는 온 힘을 기울여 하변의 소식을 수소문하였는데 그에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한 인물이 바로 丹池 河悏이었다.하협은 형의 소식을 얻고자 일본으로 사신이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면 바로 東萊로 달려가 사신단에게 형의 소식을 수소문 해 줄 것을 애원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실로 결국 형의 생존을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還國을 도모한 결과 光海 9년(1617년)에서야 비로소 이별한 지 20여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었다.그가 이처럼 형 河忭의 생환에 온 전력을 기울인 것은 바로 손위 친형인 이유가 작용하였으나 이 외에도 이들 9형제간의 끈끈한 형제애를 간과할 수는 없다. 현재 정리 중인 晋陽河氏 단지종택 고문서 중에는 이들 형제의 우애를 확인할 수 있는 分財記가 전한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하변을 제외한 형제와 후손들이 분재를 하며 그 조건으로 하변이 생환할 경우 당시의 분재를 무시하고 다시금 재차 분재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그가 살아 돌아오게 되자 그 약속에 따라 이들 형제와 자손이 재산을 다시금 均分하는 분재를 시행하였다.하협의 형제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진주일대에 이름 높았으며 이와 아울러 그의 효성 또한 지대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壬亂 중 모친상을 당하자 혼란한 중에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후회하다 결국 후에 改葬함으로써 그 예와 효를 다하였다고 한다. 그의 효행은 진주지역 사림에 널리 알려져 결국 『晋陽誌』「人物條」에 그의 효행이 기록되기에 이르렀다.그의 학문적 성장과 교유는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뿐만 아니라 남명학파와의 깊은 연계선상에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장기를 여러 형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는데 특히 河惺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하협 역시 형들을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찍이 丙午年(宣祖 39年, 1606)에 司馬試에 응시하여 進士로 入格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하위보가 남명학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점에서 그 역시 일찍이 남명학파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문집을 남기는 등의 활발한 학문활동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그의 정치적 행보 중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어 주목된다. 하협은 그의 나이 32세때(광해군 6, 1614년) 進士로서 「定運原從功臣」 3等에 策勳되었다. 宣祖末年 大北과 小北의 대립속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파를 책훈하는 것이었다. 즉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파의 영수인 柳永慶을 탄핵하다 귀양갔던 鄭仁弘이 정권을 잡고 이에 그들의 주관하에 단행한 책훈이었다. 그러나 이 책훈에는 鄭仁弘 일당의 자의성이 강하여 책훈을 받지 않은 인물이 많았으며 1623년 仁祖反正으로 유영경이 신원되면서 廢削되었다.그의 이와 같은 정치적 행보는 조선 후기 정치적 등락속에서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진주일대 사림의 동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행장등의 기사에 형인 하성과 아울러 중앙정계에 上訴를 올리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정치적 혼란속에서 학문에 보다 전념하는 자세를 견지하였으나 하협의 정치적 활동은 일단 학맥상에서나 공신책훈의 과정속에서 본다면 정인홍과의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河悏은 1625년(仁祖 3年) 그의 나이 4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학문적 위상에 걸맞게 교유도 활발하였다. 교유관계는 成汝信(浮査), 韓夢參(釣隱), 許墩(滄洲), 李大期(雪壑), 河弘度(謙齋) 등과 같은 인물에 미쳤으며 이들은 역시 남명학파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이처럼 그는 일생을 남명학파와 진주일대에서 뗄 수 없는 중심에 서 있었다.그의 墓誌銘은 韓夢參이 撰하였으며 墓碣銘은 曺挺立이 撰하였다. 조정립은 더불어 단지의 行蹟인「進士河公行蹟」을 지었는데 이 자료가 현전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 그리고 후술하겠으나 響山 李晩燾가 撰한 행장이 있는데 이는 그의 10代孫인 河啓涍의 노력으로 갖추어 진 것이다. 이는 진양하씨 가문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양상이라 하겠다. 하협 처는 晋陽鄭氏로 通訓大夫宗簿寺僉正을 지낸 鄭密의 孫女이며 生員 鄭承勳의 딸이다.河達永은 하협의 장자로서 그의 사후 30년에 墓碣銘, 墓誌銘 등을 曺挺立, 韓夢參에게 찾아 갖추어 선영을 완비하였다. 그의 호는 具邇堂으로 河悏의 유고인『丹池集』에 이어 그 역시『具邇堂集』을 남겼으며 尙山 金在洙가 그의 墓誌銘을 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