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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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의 아들이다1538년(中宗 34) 윤7월 20일 서울의 皇華坊에서 李穉와 宜寧南氏 사이에서 長子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항상 조부 墓所(高巒山)와의 연관 속에서 회자되면서 명당 發福의 모범적인 사례로 굳어진 것이 사실이다.이산해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시종하는 과정에서 서울과 보령을 자주 왕래하였고, 본격적인 서울생활이 시작된 것은 17세 되던 1555년(명종 10) 참찬 趙彦秀의 딸과 혼인하면서였다. 이후 그는 학업에 정진하여 1561년(명종 16) 문과에 합격하면서 官界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 해는 마침 큰아들 慶伯까지 출생하여 경사가 겹쳤다.과거 합격 이후 이산해는 탄탄대로를 달려 1562년에는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고, 1563에는 사림의 극선인 湖堂에 선발되어 賜家讀書의 영광을 누렸다. 특히 名筆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1562년 24세의 청년관료 시절에 이미 명종의 명에 의해「景福宮」의 편액 글씨를 쓰기도 했다.이후 그는 내외의 요직은 물론 중국 사신이 오면 遠接使로 자주 파견되었으며, 1584년(선조 17)에는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에 임명되어 1587년(선조 20)까지 3년 동안 文衡의 자리에 있었다. 1588년(선조 21)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1589년(선조 22)에는 영의정이 되어 1592년(선조 25)까지 3년 동안 庶政을 총괄하였다.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자 이것을 빌미로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平海에 유배되어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1595년 해배된 뒤로는 선조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국정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保寧․南陽․新昌 등지에서 우거하는 일이 잦았고, 1600년 이후로는 일체의 벼슬을 단념하고 주로 노량의 江亭에서 강호처사로 자적하다 1609년(광해군 1) 서울 長通坊의 셋집에서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이처럼 이산해는 청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관료로서는 최고의 현달을 구가하였지만 동서분당과 남북분당의 와중에서 정치적인 부침도 적지 않았다. 그는 동서분당시에는 동인을, 남북분당시에는 북인을 표방하였는데, 1592년의 평해 유배는 그의 정치적 부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그리고 이산해는 생전에 여러 차례 상화를 당했는데, 33세 되던 1571년에는 父喪을, 42세 되던 1580년에는 장자 慶伯의 상을, 56세 되던 1594년에는 적소에서 막내아들 慶愈의 상을, 1609년에는 자신이 사망하기 6개월 전에 손자 久의 상을 당함으로서 개인적인 불행이 적지 않았다.그러나 이산해의 학식과 문장 그리고 정치적 위상은 韓山李氏가 당대 최고의 士林名家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하며, 그에 의해 다져진 사회적 지위는 혼인관계에도 잘 반영되어 있었다.이산해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여주이씨 출신의 큰사위 이상홍(春洲:文科)은 湖堂에도 선발된 문사로 李瀷(星湖)의 증조 李尙毅(少陵)은 그의 아우이다. 장자 慶伯 역시 명문 全義李氏와 혼인하였고, 둘째사위 이덕형(漢陰:文科)은 영의정을 지냈다. 차자 慶全은 안동김씨 金瞻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金瞻(荷塘:文科)은 許篈(荷谷)․洪迪(荷衣)와 더불어 세칭「三荷」로 지칭된 文士로 許曄(草塘)의 딸 許蘭雪軒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아버지는 영의정 산해(山海)이며, 어머니는 조언수(趙彦秀)의 딸이다.
  • 한말의 의사(義士).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팔(元八), 호는 산좌(汕左)·수당(修堂). 서울 출신. 호직(浩稙)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淸松沈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