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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士純, 號는 三溪이다. 입향조 崔秀雄의 손자이다. 妻父는 閔恬(민념)이다. 1531년에 생원시, 1537년(중종 32)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正言, 翰林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왕에게 올린 封事 건으로 권신인 윤원형과 갈등을 빚은 후 사직한 뒤 남원에 퇴거하여 永慕堂을 지어 河西 金麟厚 秋巒 鄭之雲 등 명인들과 교류하였다. 1787년(정조 11) 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驪州閔氏이며, 외조는 대사헌을 지낸 李世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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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汝厚. 호는 未能齋. 영의정 최항의 6세손이며, 濬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彦粹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潁이며, 어머니는 현감 송구(宋駒)의 딸이다. 眉巖 柳希春에게 수학하였다. 1576년(선조 9) 진사에 합격하고 1589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權慄의 啓請으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5, 6년간 그를 도와 참전하였다. 그 뒤 검열 예문관 봉교 헌납 지평 장령 사간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02년 사간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鄭仁弘이 禍心을 품고 있다고 첫눈에 알아보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호남을 내왕할 때 쌀을 가지고 다니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연의 귀함으로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1649년(인조 27) 露峰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이 1권이 전하는데 그의 아들들 유고와 함께 {帶方世稿} 엮어져 있다. 부인은 남원윤씨 생원을 지낸 尹中의 딸이며, 尹孝孫의 증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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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孺長, 호는 星灣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이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李爾瞻 등의 모의에 반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 12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고, 응교·집의·사간 등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정책을 건의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좌승지로서 왕을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예조참의, 한성부 좌윤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당시는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다. 그러나 명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16년 (숙종 42) 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아우 蘊, 아들 徽之와 함께 <尊周錄>에 등재되어 있다. 부인은 南原梁氏 軍器寺 事簿 梁俊遇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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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다. 미능재 최상중의 아들이며, 崔연(艹+衍)의 아우이다. 1609년(광해군 1)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遺逸로 천거되어 寧陵參奉, 세자 師傅 洗馬를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순창현감으로 있으면서 창의하였고 만년에 승정원 승지 사헌부 정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남원의 유력 사족인 興德張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처부가 현령을 지낸 張經世였다. 1661년(현종 2) 노봉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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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子琴, 호는 鰲洲이다. 1624년(인조) 진사에 합격한 뒤 1630년(인조 8)에 遺逸로 천거되어 金吾郞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季父 최온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 후 여러 번 관직을 사양하다가 잠시 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 2) 노봉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처는 전주이씨 李惟侃의 딸이다. 李景奭, 李景稷이 그의 매부들이다. 그의 묘문은 당대의 명망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영의정 金壽恒이 碑銘, 판서 李德成이 글씨, 朴世采가 墓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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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子有,호는 간호(艮湖)이다. 1630년(인조 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정축년에 세자가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을 때 발탁되어 洗馬가 되었다. 을유년에 直長 벼슬을 지내면서 문과에 응시, 급제하여 翰苑에 들어갔고 이후 三司의 관직과 執義, 司諫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71세에 세상을 떠나자 명재 윤증이 글을 보내 그의 도덕과 학문을 칭송했다. 사후 露鋒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풍양조씨이며 부윤을 지낸 趙邦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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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漢臣, 호는 東岡이다. 1698년(숙종 24)에 遺逸로 천거되어 敎官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 지평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남원 출신의 문인 윤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학행으로 당대의 정치가이며 유학자 박세채의 추천을 받아 지평이 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에 [東岡遺稿]가 있다. 대제학 洪良浩가 墓誌를 찬하였다. 부인은 파평윤씨 참봉을 지닌 尹叔擧의 딸이며, 尹恮의 손녀이다. 둘째 부인은 흥덕장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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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虞鳳, 호는 牧春子. 아버지는 徽之, 어머니는 李惟侃의 딸이다. 10세에 經史를 읽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최씨가문의 奇童子로 불렸다. 13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660년(현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한림을 거쳐 옥구현감을 지냈다. 사헌부지평으로 재직하다가 평소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1667년 영의정 金壽恒의 청으로 체직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순천 松廣寺에 〈普照國師甘露塔碑文〉이 전한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承仕郞 文源의 딸이며, 교리를 지낸 李尙馨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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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乃心, 호는 迂窩. 徽之의 아들이다.1681년(숙종 7) 通德郎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왕의 매부이던 張希載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1695년 지평으로 冬至使의 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세자시강원과 양사 및 西學의 敎授를 역임했다. 1704년 단종이 폐위될 때 이를 지지하였던 대신들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1706년 다시 보덕으로 기용되어 집의·사간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1710년 영상 申琓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부인은 남원의 유력사족인 전주이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