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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은 초휘가 天翊, 字가 太始이다. 그는 박영균과 능성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밀양의 府北面 鍤浦에서 출생하였으며, 과거를 통해 출사하게 되자 개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고려왕조에서 禮部侍郎․中書令․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여말선초에는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杜門洞의 歸隱第로 들어가 잠시 은거하였다고 하며, 이를 계기로 이후 그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특히 박익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등과도 교의가 두터웠으며 이들과 더불어 八隱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다. 또한 朝鮮開國의 元勳인 裵克廉이 그의 처남이기도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조선왕조에서는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내려 그의 입조를 종용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이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박익은 그의 아우 朴天卿(知足堂 朴明榑의 家系), 從弟 逃隱 博文彬과 더불어 밀양으로 돌아와서는 이름을 朴翊으로 고치고 호를 松隱으로 자호하였다. 그리고 거처하는 집 뒷산을 松岳, 마을을 松溪, 집을 朴庵이라 하였다. 이는 모두가 송악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충절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후일, 이 지역의 기반은 종제인 朴文彬 系列에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익은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忠肅의 시호를 받았다. 밀양의 德南書院과 新溪書院, 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선생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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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융은 문과를 통해 출사하여 1411년(太宗11)에는 사간원 정언, 1423년(世宗5) 이조좌랑 등 경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손자가 중종조의 좌의정인 安塘이다. 문집으로는 우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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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의 둘째 아들 박소는 태종조에 생원으로 급제하여 만년에 안음현감을 역임하였다. 박소는 박융과 함께 덕남서원에 배향되었다. 한편, 이들 네 형제는 모두가 포은 정몽주의 가르침을 받아 학행이 있었으며,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아 정려가 내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밀성박씨의 가계에 있어 이들 네 형제는 조선초기 새로운 가계기반을 마련한 인물로서 각각 중조로 추앙되면서 우당, 인당, 아당, 졸당의 4당으로 칭송되고 있다. 박소는 선대의 거주지인 밀양의 삽포를 떠나 밀양 府西面의 新村(현재 初同面 儉岩里)일원으로 이거하였다. 이주 배경에는 신촌이 春堂 卞仲良(1352~1398)과 春亭 卞季良(1369~1430)의 우거지와 인접한 곳이었던 점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박소는 이곳에서 이들과 강학활동을 하였으며 향풍교화를 위해 조직된 龜齡洞案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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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견은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효행 또한 남달랐다. 그는 1508년(中宗3) 모친 楊州趙氏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廬墓살이에 독실하였으며, 시묘살이 후에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묘하에 기거하였다. 박수견은 묘하에 「慕先齋」라는 초막을 건립하고는 종신토록 모선재에 기거하면서 선대의 분묘를 지키는데 열중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향중에 널리 알려지자 당시 밀양부사가 주청하여 조정으로부터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박수견의 시묘살이와 각별한 효행으로 인해 당시 그가 거주하던 주변의 동리를 비롯하여 山川의 명칭이 모두 「慕先」으로 개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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