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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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원록은 호를 회당(悔堂) 또는 도암(陶岩)이라 하고 효자로 이름났었다. 그의 형 원복(元福)과 더불어 8년간이나 지성으로 환(患) 중의 아버지를 간호하였고、어머니를 위하여 연친곡(宴親曲) 8수를 지었다 한다. 1615년(광해군7、을묘)에 정려(旌閭)되었다. 원록은 주세붕(周世鵬)에게 사사(師事)하였고、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게 나아가 종유(從遊)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후진양성을 위해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설립하는 등 학문진흥과 향약실천에 힘썼다고 한다.
  • 신적도는 호가 호계(虎溪)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로서 1606년에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상운도(祥雲道)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고 군량을 마련하여 건원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며、사은하고 돌아와서는 옥산면 금학동 학소대(購巢臺)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채소와 고사리를 뜯으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읍파의 고문서 자료에 그러한 소이를 담은 『채미헌계안(採薇軒稧案)』이 있다.
  • 신달도는 호를 만오(晚悟)라 하였는데、월천(月川) 조목(趙穆)과 여헌의 문인이다. 161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의 등극을 기념하는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文翰)을 거쳐 1627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이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해 6월 병조판서 이귀(李貴)의 전횡을 배척하는 소를 올려 그의 미움을 샀으며 부사직(副司直)으로 전보되었다. 1629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을 때、내수사(內需司)가 진상을 과다하게 강요하는 폐단을 일소하도록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후일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 신열도는 호가 나재(懶齋)로 여헌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 정언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蔚珍縣監)을 지내고、1647년 사헌부 장령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냈다. 저서로『선소지(仙笑志)』、『문소지(聞韶志)』를 펴냈는데、『문소지』는 『의성지』의 전신이기도 하다.
  • 신채는 의성읍 팔지(八智)마을의 입향조이다. 채의 호는 인재(忍齋)로 1646년(인조 24)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성균관에 수학할 때 문행이 뛰어나 영남의 삼모(三某)란 칭송을 들었으며、국왕으로부터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 제작을 명받기도 하였다 한다.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는 일절 나아가지 않고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인재문집(忍齋文集)』이 있으며、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되었다.
  • 신지제는 자가 순부(順夫)、호가 오봉(梧峰)·오재(梧齋)로 증조는 증창례원 판결사 한(翰)이며、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이고、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이며、어머니는 월성박씨(月城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고、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지(址)의 딸이다. 일찍이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機)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1589년(선조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l601년에 정언(正言)과 예조좌랑을、이듬해에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성균관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16l3년(광해군 5)에 창원부사로 나가 명화적(明火賊) 정대립(鄭大立) 등을 토포(討捕)하고 민심을 안정시킨 공로로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인조반정 초에 동부승지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졸하였다. 저서로는 『오봉집(梧峰集)』이 있다.
  • 신홍망은 자가 망구(望久)、호가 고송(孤松)으로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강릉(康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정언·전주판관·지평·풍기군수·울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고송집(孤松集)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