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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1539-1592)은 1591년(선조 24)에 처음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김해에 내려와 있었다. 왜란이 나자 승병들을 이끌고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그 아들 신갑(信甲, 1564-1597)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였고, 다시 정유재란 때에도 전공을 세웠는데 그 와중에 왜의 대군을 만나 자결하고 만다. 후에 안신갑의 효성과 충심이 조정에 알려져 정표가 내려졌다두릉재실은 현재의 두릉서당을 말한다. 1832년에 창건된 두릉서원은 죽계와 그의 형 안민(安慜), 그 아들 안신갑(安信甲)을 기리기 위한 문중 사우(祠宇)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1930년에 그 터에 두릉서당을 건립하였고, 1984년에 중건되었다. 지금도 두릉서당이라는 현판은 남아 있으나, 재실로서의 성격만을 갖고 있다.1591년(선조 24)에 처음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김해에 내려와 있었다. 왜란이 나자 승병들을 이끌고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그 아들 신갑(信甲, 1564-1597)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였고, 다시 정유재란 때에도 전공을 세웠는데 그 와중에 왜의 대군을 만나 자결하고 만다. 후에 안신갑의 효성과 충심이 조정에 알려져 정표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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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의 동생인 안희(1551-1613)는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와 같은 인물들과 교유가 있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환로에 올랐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의병을 지휘하며 적에게 항거하였다. 난후에도 대구부사를 지내는 등 관직을 계속 이어갔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식암(息庵) 황섬(黃暹) 등과 교유하였다. 또한 남명이 수년간 거주하였던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김해에 남명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530년(중종 25)의 일이다. 친가 및 외가의 세거지인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서 처향인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주하여 문인(門人)들과 강학·논도하였으며, 그러한 공간으로서 산해정(山海亭)이 지어졌다. 1545년(인종 1)에는 다시 삼가 토동으로 환거하였으며, 61세 되던 1560년(명종 15)에는 진주목 덕산(德山)의 사륜동(絲綸洞)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제자들과 함께 강론하였다. 남명이 운명하자 그의 제자들은 남명의 숨결이 묻어있는 산천재 부근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삼가현 토동에는 회산서원(晦山書院)을, 김해 탄동에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이루어진 신산서원의 건립은 당시 경상감사 윤근수(尹根壽, 1537-1616)와 김해부사 하진보(河晉寶, 1530-1580)가 향인들과 의논하여 주도하였다. 이때 안희는 실무를 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으로 말미암아 산해정과 신사서원이 모두 소실되자, 1608년(선조 41) 안희는 황세열(黃世烈), 허경윤(許景胤)과 더불어 산해정 옛터에 신산서원을 중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안희가 남명학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짐작된다.안민, 안신갑 부자의 의병활동, 안희의 관력 및 명유(名儒)들과의 교유 등으로 인해 함안 순흥안씨는 이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현달한 선조를 중심으로 다시 파가 나누어지는 것이 상례이듯, 함안 순흥안씨도 안민과 안희 계열로 분지된다.이주하지 않고 함안 두릉에서 계속 거주하였던 안희 후손들이 바로 본서의 주인공들이다. 안민 후손과 안희 후손은 지역적 분리에 더하여 안민과 안희의 추향 문제로 대립하면서 한층 더 분파적인 속성을 뚜렷이 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순흥 용연사(龍淵祠) 추향 시비가 그것이다. 안희 추향 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안민과 안희 후손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감정대립으로 치달았고, 결국 용연사 추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문중 내 시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민 후손과 안희 후손 사이에 뚜렷하게 분리된 정체성이 존재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더욱 분명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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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의 4대손인 안성흥(安聖興, 1683-1746)은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산을 풀어 관군의 군량미를 대었다. 이 은혜를 입은 군인들이 난이 평정된 후 여러 차례 안성흥의 포장(襃獎)을 요청하였고, 후에는 인근 유림의 공의로 조정에 알려져 1759년(영조 35)에 안성흥은 통선랑(通善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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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應瑞(1708-1754)는 족보상에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이는 이 시기 죽계가문의 향방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신산서원 건립과정의 참여를 통해 드러나듯이 안희 대에는 남명학파와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후 남명학파의 몰락으로 많은 남명문도들이 남인의 길을 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계가문도 남인과의 친연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변화는 다른 인물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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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순조 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족보에는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문인으로 기록되었다. 정종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으로, 중년에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가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안희, 안응수(安應璲, 1728-1793)의 행장과 묘갈을 정종로가 찬한 것도 안몽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안홍범(安弘範), 안우룡(安羽龍) 등 다수의 순흥안씨가 인물들이 족보에 입재(立齋) 문인으로 기록되었다.이 시기에 작성되어진 소지류에서 안몽백의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당시 안몽백이 종손과 더불어 가문의 대소사를 함께 주관해 가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안희와 안민, 안신갑을 배향하기 위해 두릉서원을 건립하고, 당대의 명유들에게 선대의 묘갈 및 행장을 청하고, 또 스스로 직접 찬하기도 하면서 선대에 대한 현양사업을 주도하였던 것이다.두릉서원에 안희와 안민·안신갑 부자를 함께 배향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 안씨 가문은 이후 두릉서원과 족계를 중심으로 문중을 이끌어 나갔다. 이 족계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1970년까지 그 운영기록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