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 주요인물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석담 이윤우는 광주이씨 성주낙남파에게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인물이다. 그 선대가 성주로 낙남한 후 영남학파의 핵심적 가문들과 통혼을 하며 사회적 기반을 다졌다면, 석담 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석담은 선조 24년(159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그로부터 15년 후인 선조 39년(1609)에 문과에 합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성주로 낙남한 이후 최초의 문과급제였다.당시 그는 탁월한 문장과 학식을 바탕으로 관계의 촉망을 받아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고제(高弟)로서 남인을 표방하고 있던 그의 관로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열로 재직하면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 일파의 비리와 죄상을 직필한 일로 광해군 2년(1610)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곧 다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석담은 번번이 사양하여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몰락하기까지 7년간 일체의 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 때 그는 한강과 함께 강학에 전념하는 가운데 한강의 주요 저술을 강정(講定)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선현의 유적지를 심방하거나 『서애집』 교정작업에 참여하는 등 영남유림에서의 활동의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그러던 중 1620년 한강이 사망하자 치상에 주력하고, 한편으로 저술의 편간 및 원우의 건립 등 한강추양사업에 몰입하게 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급반전하고 서인계의 영남조용론이 상주․인동․성주 등 강안지역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대북정권에 직필로 맞서다 수난을 겪은 석담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 예조정랑에 전격 발탁되어 입경하였으며, 탁월한 학식을 바탕으로 경연관으로 활동하며 군왕을 계도하는 한편, 부제학 정경세와 함께 『대학』, 『논어』를 교정하는 등 당대의 학술문화를 주도하였다. 문한이 출중하고 직무상의 실사에도 능했던 석담은 정묘호란 당시에는 경상좌도 호소사 정경세의 종사관으로 추천되어 열읍의 의병을 초유하고 군량을 모으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인조 6년(1628)에는 세 번째 외직으로 담양부사로 부임하여, 약 2년 6개월간 봉직하는 동안 향풍진작과 기민구제, 흥학에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선정의 결과 그가 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민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사림들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구전에 따르면 담양민들이 칠곡에 까지 와서 웃갓(上枝)에 있던 석담의 구택(舊宅) 담을 새로 쌓아주었다고 한다. 인조 10년(1632) 6월 인목대비의 상에 부곡한 것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선대의 장갈을 제찬하는 등 자가(自家)의 문헌을 정비하는데 노력하다 1634년에 생을 마감하였다.이러한 중앙관계에서의 성공에 더하여 석담은 한강학단, 나아가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석학으로 활동하였다. 한강사후에는 현양사업을 통해 동문의 결속을 강화하며 한강학풍의 계승과 발전에 이바지했던 행적에 힘입어 석담은 사망과 동시에 ‘강문고제’로 인식되어 갔고, 숙종 3년(1677)에 한강이 주향인 회연서원에 종향되기에 이르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공조참의 윤우(潤雨)의 아들이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이도장은 인조 8년(1630)에 문과에 급제한 후, 친부 이윤우와 처부 김시양의 가문적 배경, 한강과 여헌 학맥의 계승자로서의 입지 등을 바탕으로 사환의 길에 나아갔다. 출사 후 주서와 검열․이조정랑 등 승정원․홍문관․삼사․육조의 낭관직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 발발 당시에는 주서의 직책을 띠고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조정의 의론이 주화와 척화로 양분되어 가다가 결국 패전의 치욕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에 이도장은 이후 벌어진 조정의 척화신 공격에 앞장섰다. 이도장을 위시로 한 남인계 대간의 척화신 공격은 패전 이후 척화신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국왕의 뜻을 받든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정국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려 했던 남인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효종대의 북벌추진과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서인 산림계가 정국의 전면에 나서는 정치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도장의 정치적 행적은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은 인조 26년(164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31세되던 해인 효종 3년(1652)에 문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이원정은 이러한 자신의 실력과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의 위광을 바탕으로 예문관 대교․봉교, 즉 한림을 거쳐,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다. 현종 원년(1660)에는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었고, 이후로 좌승지․형조참의․호조참의․우승지․공조참판․도승지를 지냈다. 서인계가 집권하였던 현종조에 영남 남인의 일원이었던 이원정이 관력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현종 11년(1670) 11월에 있었던 별시에 합격한 이담명에 대한 서인계 대간의 파방요구, 현종 14년(1673) 이원정의 도승지 제수에 대한 반대 상소는 이원정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 현종 15년(1674)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에 즈음하여 일어난 2차예송인 갑인예송이 남인계의 승리로 귀결되자 이원정은 예조참판에 임용되어 왕후의 장례를 진행하는 등 그 역할이 커져 숙종조에는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도 얼마가지 못하여 숙종 6년(1680)에 이르러 경신환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신환국은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넘어서 고변과 옥사가 이어지며 역모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원정은 유배를 떠났다가 다시 불려 들어와 공초를 당하고, 끝내는 장살되기에 이르렀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지만 남인 집권기에 이조판서라는 중책을 담당한 이상 집요한 정치적 공격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이원정의 사후에도 이러한 당쟁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복관되었던 그는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관직을 추탈당했다. 이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숙종 38년(1712)에야 손자 이세원(李世瑗)의 격쟁을 통해서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고종 8년인 1871년에야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내려 받을 수 있었다.이원정의 장자 이담명(李聃命)은 당쟁이 극심하던 시대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의 자제로 현종 11년(1670) 별시에 급제하자 부친 이원정이 시관으로 참여하여 비호한 것이 아니냐는 서인계 대간의 의혹제기가 줄을 이었다. 출사한 직후인 숙종 초는 기존의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최초로 정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이에 이담명 등은 기존 서인세력 청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송시열 고묘론(告廟論) 등에 동참하였다.
  • 이원정의 장자 이담명(李聃命)은 당쟁이 극심하던 시대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의 자제로 현종 11년(1670) 별시에 급제하자 부친 이원정이 시관으로 참여하여 비호한 것이 아니냐는 서인계 대간의 의혹제기가 줄을 이었다. 출사한 직후인 숙종 초는 기존의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최초로 정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이에 이담명 등은 기존 서인세력 청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송시열 고묘론(告廟論) 등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남인정권이 경신환국으로 종식을 고하게 되자, 이담명 역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환국이 역모로까지 이어져 결국 부친 이원정이 장살되기에 이르고, 자신은 파직되어 영천 금강리에 은거하였다. 영천에서는 영농방법의 개선과 상행위를 통해 경제력 축적에 주력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1683년에 특서되어 기사환국과 함께 재입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형조참의에 임명받은 직후부터 이담명은 부친 이원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을 주도하는 한편, 남인측 주론자로서 서인계 인사들을 치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앙의 치열한 당쟁을 잠시 잊고 민생안정에 주력하여, 유사 이래 영남의 최대 진정(賑政)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막대한 진휼곡을 조성해 기민을 구제하였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에 갑술환국이 발생하자 창성으로 유배되었고, 남포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숙종 25년(1699) 봄 세자의 환후 완쾌를 기념하여 방환되는 등 그는 말년까지 당쟁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이담명 대에 이르러 광주이씨가에 나타난 큰 변화는 한강․여헌 중심의 영남학맥에 그치지 않고 근기남인 학맥과 연결이 된다는 점이다. 이담명이 어려서 연천에 거주하던 미수 허목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는 사실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