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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서는 평소 효행이 남달랐으며, 특히 상중(喪中)에 죽만 먹었으며 3년간의 여묘살이도 독실히 행하였다. 당시 그가 여묘살이 하던 마을이 시묘동이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효행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김기서는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의 문인으로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과 학문을 논하였다. 그의 처남이기도 한 양팽손이 1519년(중종 15)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능성으로 낙향하자 그도 고창에 은거하며 후학을 육성하였다. 당시 그의 강학처가 돈목재이다.고창의 광산김씨가는 김기서에 의해 효행을 실천의 근본으로 강조하였으며, 학문적 기틀도 이 당시에 마련되었다. 김기서에 의해 확립된 가문의 기반은 그의 아들 노계 김경희(蘆溪 金景熹)를 거쳐 확충되고, 손자 백곡 김홍우(白谷 金弘宇)에 의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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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유학자. 자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노계(蘆溪)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돈목재(敦睦濟)公의 아들로 中宗乙亥 4월6일에 고창읍 虎洞에서 출생, 일찍 그 외숙인 學圃 양팽손(梁彭孫)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뛰어나 나이 이십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奸黨의 농간으로 과제가 違格이라 칭탁하고 拔去되니 중종께서 은반으로 된 杜詩 한질을 하사하고 위로했다. 이로부터 세상을 하직하고 드디어 과거를 패하고 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公은 素性이 至孝하여 參奉公의 병환이 위독하자 단지하여 和藥하고 兩親喪에 철필여묘(啜弼廬墓)하여 복을 맟이니 鄕人이 감탄하여 그 洞을 시묘(侍墓)골이라 하였다. 乙巳에 尹元衡이 惡을 펴서 士禍가 대기하니 공의 나이 三十一이며 사화에 연루가 되어 詩를 짓되 直道澄淸天下後에 男兒方是出人間(맑은 세상이 돌아온 뒤에 남아가 바야흐로 인간사회에 나아갈 것이라)하고 길이 둔세(遯世)할 것을 맹세하고는 虎洞 밑에 水石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醉石이라 편액하고는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表從 梁應鼎과 鄭翰林 滋와 李竹陰萬榮과 宋圭菴麟壽와 沈判書光彦 諸公과 道義交를 하고 모이면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경서를 강론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魚鳥로 짝을 하여 세속의 塵累를 한 점도 가슴에 두지 않았으니 志尙과 高潔과 行義와 嚴正을 晉나라 陶靖節에 비교했다. 백여명의 문인들에 들어난 선비가 많았으니 그 師表됨을 알만하고 황이재윤석(黃頤齋胤錫) 贊에 문학과 行義는 百世에 師表가 된다 했으니 공은 자못 그러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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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陰 尹斗壽(1533-1601)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金景壽, 奇孝曾과 함께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였다. 그는 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의병을 소모함은 물론 義穀을 행재소로 보냈다. 1592년 11월 24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직산에서 왜적 수 백명을 참하였다. 1593년(선조 27) 정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고창으로 돌아왔다. 그해 전주 별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후 1596년 예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明將과 더불어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전란후에는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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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우의 아들 金汝聲(1564-1637)은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인으로 정묘호란당시 소모유사로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특히 義村 金南式(1617∼1683)은 조선후기 절의를 지킨 인사로 명망이 높아 광산김씨가의 가격을 크게 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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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은 일찍이 아버지 김여성의 명에 따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小學⌟과 ⌜家禮⌟를 중심으로 실천궁행하였다. 특히 김집은 ‘君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군은 이제 나에게 배우니 이는 백대 종친에 義가 있음이요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로다.’라고 언급하면서 그의 면학을 독려하였다.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남식은 고창을 중심으로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淸州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낙향하여 고부 소성면 계령산 아래(현재의 玉山)에 서실을 짓고 ‘崇禎日月 大明遺界’라 명하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김남식은 이른바 ‘崇禎處士’로서 절의와 충신의 표상이 되고자 하였으며, 사후에 충신정려가 내려졌다.김남식은 아들들에게 평소 ‘사람의 행실은 막중하고 크니 효제충신과 인의예지를 명심하라’는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그도 또한 일생을 통해 이를 실천하였다. 정축년(1637) 부친상에 3년 상을 다하였으며, 경자년(1660) 어머니 상에 여묘살이를 곡진히 하였다. 김남식은 중형 김남익과 더불어 문중규약 10여조를 만들어 위선과 후학교육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분묘의 관리를 위한 위토를 마련하여 제사에 정성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다. 형제간의 우애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고자 하였다. 1634년 백형 김남수의 상에 힘을 다해 초종의 장례를 치렀으며, 1682년 중형 김남익의 상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효제의 행적에 따라 1829년(순조29) 도내 유림의 상소에 따라 예조판서 徐俊輔가 상주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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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성은 고창의 백양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 “사람이 사람됨은 효도와 공손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요순의 道도 효도와 공손뿐이다.”라고 강조하고 이에 진심을 다하였다. 이러한 수학 신념에 따라 그는 孝悌의 실천에 일생동안 전념하였다. 1674년(현종15)에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1683년(숙종9) 정월에 아버지 병환이 재발하여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려 이틀 동안 연명하였다고 한다. 부친상에 있어서도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그 슬픔도 극진하여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켰고, 시묘 3년 동안 한결같았다. 뿐만 아니라 1689(숙종15)년 아우 金履綏(1660-1689)의 병환에도 간병을 극진히 하였다. 김이성은 아우가 정성어린 간병에도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열손가락으로 땅을 파다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고창, 고부 일대의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평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어른들을 부모를 대하는 마음으로 공경하였으며, 이웃의 상사소식에도 삼가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이러한 효제에 대한 실천은 집안 노복에게도 영향을 미쳐 龍伊, 命今도 효로서 향중에 알려졌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유명으로 尤庵 宋時烈(1607-1689)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엄격히 따랐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이 축출되었다. 이 당시 송시열이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賜死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회오리를 직접 목도한 김이성은 기사환국 이후 벼슬의 뜻을 접고 오직 스승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고부 鮐城 雲谷에 서재를 ‘華軒’이라고 직접 쓴 편액을 걸고 후학 양성에 열중하였다. 김이성의 이러한 효행과 학행은 1828년(순조28) 어사 魚有龍의 상달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고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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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학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진력한 인물이 김성은이다. 김성은의 학덕과 효행은 고부에 정착한 광산김씨가가 기호사림계의 주류에 접근하는데 계제를 마련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김성은의 행적은 크게 효행, 학행과 위선으로 구분 할 수 있다.金性溵(1765-1830)은 김윤중의 셋째 아들로서 자가 聖淵이고 호는 引逸亭이다. 그는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부친의 상사에 送終의 절차를 엄격히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에는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살피고, 병세가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부모의 상사에 6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그는 가내의 가르침에 따라 형제간 우애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에도 성실하였다.김성은은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季父 聲湖 金允明을 섬겼다. 부친상 후 頤齋 黃胤錫(1729-1791)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으며, 황윤석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 3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中洲 李直輔(1738-1811)와 剛齋 宋稚圭(1759-1838)문인이 되었다. 이직보는 그에게 친히 ‘引逸’이라 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心經, 近思錄, 五經을 깊이 독서하였으며,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 주자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데 오로지 전념하였다. 美湖 金元行(1702-1772), 過齋 金正黙(1739-1799), 薑山 李書九(1754-1825)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서로 교유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서인 노론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성은의 학덕은 그의 사후에도 趙寅永과 艮齋 田愚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김성은을 비롯한 광산김씨가의 학통과 관련한 당대의 분위기와 입장은 김성은의 스승인 황윤석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잘 반영되어 있다.숙종 경신대출척에 적신 허적 윤휴등이 사형당하자, 처음에는 우암 송시열을 존모하다가 나중에는 변심한 사람들이 ‘적신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더니만 갑자년에는 윤증도 역시 스승을 배반하고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에 또 다시 적신 목래선, 민암, 유명현 등이 더욱 왕성하게 선동하여 기사환국에 이르러서는 궁내로 들어간 희빈장씨가 필경에 인현왕후의 왕비 자리를 찬탈한 즉 송시열 및 김수항, 민정중, 박태보는 송시열의 문도가 아닌데도 우뚝하게 함께 화를 당하였다. 비록 윤증으로서도 목래선의 한 무리들에게 추대된 바가 되어 대사헌으로서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은연중에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었다. 그런데 갑술옥사에 세상이 바뀌어 인현왕후가 복위되니 南九萬은 말하기를 ‘기사환국과 같으니 깊이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였고, 윤상운과 윤지완은 ‘6-7년 그 동안이 그리 멀지 아니한데 왕자를 두고 못 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고 중요치 아니 한가’하였으니 최석정도 역시 오십보에서 백보로 별 차이 없으니 백년의 사악함과 정대함이 이에 구별되었도다. 이러한 청의는 궁벽한 시골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고 처사 광산 김공 이성 자 성보도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김성은은 송시열의 영정 개모작업에 간여 하였으며, 증조부 김이성의 서재인 ‘운곡’의 유허비문을 건립할 당시에도 송시열의 연원을 강조하였다. 1820년(순조20) 司宰監 直長 宋欽命에게 ‘雲谷遺墟碑文’을 받았는데 송흠명은 비문에서 ‘나는 송우암선생의 후예로 義로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짧은 글이지만 (김성은의) 위선하는 성의에 부응하는 것은 공이 우암선생에게 수업한 문인이요, 성은씨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송시열을 주향하고 있는 고암서원의 考巖書院誌를 주도적으로 간행하였다.김성은은 「性理辯論」, 「太極解說」, 「華東帝王歷代」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東國文獻錄으로, 그가 본 책을 편찬할 당시 내용 중 道統의 연원과 관련된 시비로 잠시 玉溝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 또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도통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그는 평소 ‘奉先裕後’라 하여 선대의 유적과 행적을 정리하는 위선사업에 성과를 남겼다. 우선 광산김씨족보를 편찬함은 물론 시조 이른바 ‘신라왕자 金興光’의 광주 평장동 유허에 유허비와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그리고 金稹과 金光利의 실전한 묘소를 경기도 豊德縣 亡浦에서 찾았다. 그는 장성의 鰲山 南門에 임란의병비를 건립하였으며, 양난의 사실을 기록한 湖南倡義錄도 편집하였다. 이러한 그의 위선관련 행적은 김장생, 김집 등이 광산김씨로서 그 인연관계를 확립한다거나, 김홍우와 김남식 등이 兩亂에 의병을 창의한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효자, 충신 등을 연이어 배출한 고창․고부 일대 광산김씨의 현양을 목적으로 海東三綱錄, 瀛州三綱錄, 旌忠祠三忠傳 등이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