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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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33년(세종 15)∼1489년(성종 20). 조선 전기의 명신·서예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정난종은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세조 13년 황해도 관찰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북방을 견고하게 지미기 위해 평안북도 오정진에 40리 장성을 축조했다. 1470년(성종 1)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좌리공신 4등으로 동래군에 봉해졌다.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초서ㆍ예서에 능통했다. 원각사비ㆍ돈화문 현판 등을 남겼다.
  • 동래정씨 종택이 현 위치에 자리하기 시작한 것은 정난종의 아들인 정광보에 의해서이다.
  •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 동래정씨 27세손인 정학묵(鄭學黙, 1829~1903)은 조선전기의 명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純誠佐理功臣 東萊府院君 鄭蘭宗(1433~1489)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가문의 봉사손(奉祀孫)이었다. 정난종을 소종으로 하는 학묵의 문중은 영의정 3인을 포함하여 3정승만 15인 이상을 배출하는 등 많은 문무관료를 배출한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 가운데 하나였다. 학묵의 가계는 해당 가문의 적손으로 정난종이 현재의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아 정착한 이래 현재까지도 동일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또한 이 종손가는 사패지로 받은 세거지 인근을 비롯하여 경기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였다학묵 역시 집안이 대대로 세거하던 速達(당시 廣州)에서 1829년에 출생하였다. 학묵의 부친 翰東(1794~1873)은 부인 延安李氏와의 사이에서 36세의 늦은 나이에 겨우 학묵을 얻어 성장시켰을 뿐, 다른 아들을 얻지는 못하였다.독자이자 문중의 적장손으로서 학묵은 부모와 문중 모두의 기대를 받았을 것이고, 그에 대하여 충분히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대에 성균관에 적을 둔 학묵은 국왕이 친림하여 주관하는 도기과(到記科)에 응시할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60년 7월 23일 춘당대에서 치러진 추도기(秋到記)에서 강(講)에 입격, 직부전시(直赴殿試)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직부전시의 자격을 획득하였음은 곧 문과에 급제함을 의미하였고, 문과급제는 종가에서 그간 누대에 걸쳐 누리지 못했던 큰 경사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학묵의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추도기가 치러진 다음날인 24일과 25일의 양일간 300명 이상의 친족과 지인들이 축하를 위해 다녀갔다.이듬해인 1861년 4월에 치러진 문과에서 학묵은 병과(丙科) 제8인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학묵은 관직에 나아가 1894년에는 정3품 당상관인 삼사(三司)의 승지(承旨) 및 이조참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품계는 1902년에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제수되었다.이러한 학묵이 적장손으로서 정난종의 혈통을 계승한 문중 내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녔고, 기대를 모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