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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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略傳] 조정(1555,명종 10)∼1636,인조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윤영(允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禧)이고,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한강 정구(鄭逑),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부인은 의성김씨 藥峯 金克一의 딸인데, 청계(淸溪) 김진(金璡)의 손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함창 黃嶺寺에서 우복 정경세, 찰방 權景虎, 李弘道 蔡有喜 이봉 등과 倡義하였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 辰巳日錄≫이 있다.
  • 1556년(명종 11)∼1613년(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중(棐仲), 호는 가휴(可畦).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8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필선·병조좌랑·광주목사(光州牧使)·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상주의 속수서원(速修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익의 문집, 1800년경 기연(岐然)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 1∼5에 이르기까지 시가 약 1,070수에 이르는데, 이를 연대별·지역별·사건별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진사일기(辰巳日記)』(1592년 4월 14일∼1593년 12월 30일)는 왜군의 동향, 아군의 방어태세, 정부의 파천(播遷), 중국에의 원병요청, 국민의 참상, 의병의 활동 등을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황화일기(皇華日記)』는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장자이다. 자는 경진(景進)이고 호는 초은(樵隱)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화왕산성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사담사 직장,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큰 흉년에 “비용을 절감하고 국가재정을 절감하여 민본을 중하게 여기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빈한한 자들을 성심으로 구호하여 상주지역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 행장을 종6대손인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가 지었다.
  • 자는 수보(守甫)이고 호는 가곡(柯谷)이다. 조정(趙靖)의 손자이며,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장자이다.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길 포기하였으나 부음(父蔭)으로 통사랑(通仕郞)의 위계를 받았다. 청간정(聽澗亭)을 지었다.
  • 1610(광해 2)~1663(현종 4). 자가 성경(成卿)이다.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둘째이며 18세 때 종조부인 가규(可畦) 조익(趙翊)의 사손(嗣孫)으로 출계하였다. 양가의 외삼촌이 김자점(金自點)으로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김자점의 농권(弄權)을 비판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후에 자점이 패망하였어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옹원(司饔院)과 선공감(繕工監)의 직장(直長), 청암도(靑巖道) 찰방(察訪), 종묘서령(宗廟署令), 연천현감(漣川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일처리가 질서정연하였고, 매우 청빈하여 생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형님에게 환원함으로써 생가의 조카인 용슬헌공에게 물려주었다.
  • 초은(樵隱) 기원(基遠)의 손자이고 예(秇)의 장자이다. 자가 선백(善伯)이고 호가 죽파(竹坡)이다. 소시부터 힘써 공부하여 의리를 연구하였으며, 공자묘(孔子廟)의 위판(位版)을 새로 조성하는 것과 관련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상소문을 올렸으며, 또한 대동균혜법(大同均惠法)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려 서민의 생활고를 개선하는 경제정책이 바로 수립되도록 노력하였으며, 상주객사(현 商山館)의 이건 구기(舊基) 상량문을 썼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제자이며, 익암서당(益巖書堂)을 짓고, 또한 청간정과 익암서당에 미수 허목이 쓴 전서의 현판을 걸었다.
  • 예(秇) 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숙기(叔起)이고 호가 용슬헌(容膝軒)이다. 효우와 문학이 세간에 추중되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적을 찬하고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 묘갈명을 지었다. 유집이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제자이며, 형인 원윤(元胤)과 더불어 익암서당(益巖書堂)을 짓고, 또한 청간정과 익암서당에 미수 허목이 쓴 전서의 현판을 걸었다. (이상 조기원~ 조진윤에 대한 기술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