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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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사간 소(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의 아들이며, 금주군(錦州君) 정(炡)의 아버지이다. 박소의 장자 박응천의 6자였던 박동선은「東」자 항렬 16從班 중에서 학식이 출중하고 환력도 가장 화려한 인물이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 문과에 합격하여 검열, 설서, 정언,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거쳐 崇品의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탁월한 학식과 문장으로 閔世伯․李廷龜․李時發․徐渻․金世濂 등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좌참찬 치사 후에는 耆老所에 들어감으로서 人臣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종실 淸城君 李傑의 딸과의 혼인을 매개로 왕실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개인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좌참찬을 지내고 기로소에도 들어갔지만 그에게도 위기와 시련은 있었다. 광해조에 조야를 들끓게 했고,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던 대북정권의 廢母論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초 대북의 당로자들은 그에게 폐모정청에 창여할 것을 강요했으나 그는 두문불출하고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리들이 그를 위해 문서를 조작하면서까지 庭請參與願을 제출해 주었으나 이를 단호히 부정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 결과로서 조정에서 그의 유배를 심각하게 논의하자 그는 廣津에 別業을 마련하고 한동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 좌참찬 동선(東善)의 아들이다. 박동선의 이러한 행적은 그의 아들 박정(1596-1632)이 인조반정에 참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동선의 외아들로 태어난 박정은 1615년(광해군 7) 진사를 거쳐 1619년(광해군 11)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부조 이래의 사환가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는 광해군의 난정, 대북정권의 전횡, 거기에 따른 아버지의 수난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靖社功臣(3等)에 책훈되고 錦洲君에 봉해지게 된다. 인조반정은 향후 전개되는 300년 서인정권의 화려한 서막인 동시에 서계가문에 있어서도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사환을 지속하면서도 청빈을 고수하여 가산을 모우지 않았던 서계가문에 있어 박정의 훈공과 거기에 따른 賜牌地의 하사는 실로 엄청난 특전이었다. 박정의 훈공은 자손들의 출세에 엄청난 Merit가 되었으며, 국가로부터 하사된 전장은 자손 대대로 유족한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정사공신교서에 박정에게 주어진 賞典은 圖像․丘史․奴婢․表裏․金․內廐馬 등과 60結에 달하는 방대한 전답이었다. 그렇다면 사패지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아쉽게도 여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서계가문의 전언에 따르면, 당초 사패지는 서울의 동소문 인근지역, 湖南의 모처, 양주 수락산․도봉산 일대로 거론되었는데, 동소문은 정치적 외풍을 타기 쉽고, 호남은 토지는 비옥하지만 자손들의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양주의 도봉산․수락산 일대로 정해졌다고 한다. 야사류에 따르면, 인조반정공신들은 반정직후에 국혼을 놓치지 말 것, 산림을 숭용할 것, 근기 땅에서 벗어나지 말 것 등의 3대밀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입각하더라도 수락․도봉일대는 사패지로서는 적지였다. 수락산․도봉산 중에서 사패지의 중심을 이룬 것은 전자인 수락산 일대였는데, 현재 서계종택이 있는 경기도 의정부시 長巖洞 일대가 바로 박정의 사패지로 추정된다. 장암동은 과거에는 양주목 관할로서 공식 명칭은 長者洞(장재울)이었다. 장자동은「德人長者」가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의 덕인장자는 바로 서계 박세당을 말한다. 사실 서계가문은 선대부터 양주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반남박씨는 박상충 이래 개성․서울에 세거하는 과정에서 장단․파주․광주․김포․․양주․금천․안산․용인 등 경기일대에 선영을 조성하였는데, 양주 선영은 박소의 부인 남양홍씨와 관련이 있었다. 남양홍씨의 산소는 양주 金村面에 소재하고 있는데, 안동김씨(壯洞金氏)의 별업 석실․미음과는 매우 인접한 거리에 있다. 원래 금촌․석실․미음 일대는 남양홍씨 洪深家門의 별업이 조성되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남양홍씨가 곧 洪深의 손자 洪士俯의 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금촌선영은 홍씨가 친정으로부터 상속 받은 땅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와 관련하여 안동김씨 壯洞派祖 김번이 홍심의 손자 洪傑의 사위가 되어 석실일대의 전장을 상속받은 사실이 있어 이런 추측을 더욱 짙게 한다. 공교롭게도 김번의 후손 김창협․김창흡 형제와 남양홍씨의 후손 박세당은 정쟁의 와중에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고, 사변록의 변파 과정에서는 극단적인 마찰을 야기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작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런 지역적 연고와 수락산의 수려한 경관을 바탕으로 박정은 양주 수락산일대를 賜牌地로 하사받아 자손들에게 世居의 기반을 조성해 주었던 것이다.
  • 서계는 1629년(인조 7) 8월 19일 南原府 관아에서 靖社功臣 박정과 양주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崇品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간 조부 朴東善은 일국의 元老로 추앙되었고, 왕실의 따님인 조모 이씨는 누구보다 세가의 법도를 중시한 교양있는 여성이었다. 여기에 저마다 문재가 출중하여 門戶之望으로 기대되던 3인[世圭․世堅․世垕]의 天倫이 있었기에 서계의 출생은 마치 德門의 餘慶과도 같았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안(士安), 호는 백석(白石). 태유는 문과 합격 이후 검열, 병조좌랑, 경기도사 등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경기도사 시절에는 부실 보고를 한 5-6명의 수령을 일거에 파면시켰으며, 사헌부 지평 시절에는 어영대장 金益勳의 역모를 고변하여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모가 허위로 드러나면서 도리어 거제현령․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686년 고산에서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 것이다.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지 6년만의 일이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장원 합격자였던 태보는 출사 초기부터 단연 조정의 기대주로 부각되었다. 이에 수찬․교리․정언․지평 등 3사의 요직을 거쳐 1682년에는 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특전을 누림으로서 명실공히 일류 문신의 자격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양모 파평윤씨는 호서사림의 거두 윤선거(美村)의 딸이었고, 아들 尹拯(明齋)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그러나 태보는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사이에 이른바「懷尼是非」가 발생했을 때에도 비교적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태보 소론 중에서도 吳道一․韓泰東․林泳․趙持謙 등 강경파들과 교유하였고, 시비와 의리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타협도 없었다.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은 그에게 節義之士의 칭송을 안겨준 동시에 생명을 앗아간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요량으로 원자정호를 서둘렀다. 이 때 서인들이 그 불가함을 극론하자 숙종은 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등용한 다음 인현왕후의 폐출을 계획하였다. 이에 박태보는 국모 폐출의 부당성을 논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얻어 국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되던 중 노들나루[鷺梁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물론 뒤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文烈의 시호가 내렸지만 태보의 사망은 사변록의 저술에 한창이던 서계에 있어 실로 엄청난 충격이요 가화였다. 당시 서계는 태보가 중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입경하였으나 이미 의금부에 하옥된 뒤였다. 이후 혹형을 당한 태보가 유배 차 출옥하자 서계는 회생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노들강변에서 아들을 영결하였다. 이 때 서계는 태보에게 평소에 보아 둔 장지가 있는지를 물어 본 다음 조용하게 죽음에 나아갈 것을 당부하였다. 차마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고, 그말을 마친 서계는 밖으로 나와 오열하고 말았다. 이윽고 태보가 사망하자 곡자의 아픔을 억지로 참으며 태보가 점지한 김포로 가지 않고 자신의 幽宮 건너편 언덕에 망자의 시신을 묻었다. 이렇게 서계는 3년 사이에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을 모두 잃음으로서 슬하에는 막내 泰翰만이 남게 되고, 태유의 2자 弼謨로 하여금 태보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처럼 태유․태보 형제는 비명에 죽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한국 文藝史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니 顔眞卿體의 유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서예사는 조선전기 이래로 조맹부의 松雪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태유․태보 형제는 이러한 서풍을 일신시킨 주역들이었다. 안진경체는 이들 형제의 외삼촌인 남구만, 최석정을 중심으로 유행의 조짐을 보이다 태유․태보 형제에 이르러 서예계에서 확고한 자를 굳히게 된 것이다.
  • 서계는 의령남씨와의 사이에서 태유․태보을 두고, 광주정씨와의 사이에서 1남(泰翰) 2녀(李濂․金弘錫)을 두어 슬하에 모두 3남2녀를 두었다. 외형상으로 본다면 매우 다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서계 고종시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아들은 3자 태한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