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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정
이 연못 단지(丹池)는 우리 집안 400년 역사의 시원(始源)을 간직한 유서 깊은 유적이다.
진양지(晉陽誌)에 따르면, 우리 집안은 시조 시랑공(侍郞公) 이래로 400년 동안 고을의 진산(鎭山) 비봉산 아래 중안리에 세거한 진양의 대성이었다. 이후 단지공의 6대조 직강공(直講公)이 대여촌(代如村)으로 이거하셨꼬, 5대조 통찬공(通贊公)이 다시 강너머 사죽리(沙竹里)로 이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양지에서는 대여촌을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화목을 돈독히 하는 마을이다."고 했고, 사죽리를 "선비가 많고 대대로 이름난 관리가 끊이지 않으며, 효유(孝友)에 돈독하다"고 했으니 우리 선조들이 마을을 가려서 살 줄 알았던 지혜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예로부터 사죽리는 단목(丹牧), 단동(丹洞), 내당(內塘)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러져 왔다. 생원공의 아홉번째 아드님이시며 우리 집안의 파조이신 단지공께서는 이 연못이 있던 못안(池內)으로 분가하여 세거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자손들도 이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길이 이어져 나가기를 염원하셨던 것이다.
마침 공이 살던 가옥이 단지(丹池)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세서는 공을 단지공이라 불렀고, 자손들은 단지를 중심으로 사방 수십 보 내에 옹기종기 모여 살며 학문과 효우의 가풍을 이어나갔다.
특히 단지공의 6세손이신 국담공(菊潭公, 1741~1807)께서는 이곳 단지주변에 국화를 심고 국담(菊潭)으로 자호하여 은일(隱逸)의 정신을 기르며 학문을 쌓았다.
이토록 우리 선조들은 단지를 근거지로 영욕을 초월하여 참된 선비로 담담(淡淡)하게 살면서 국화향기 만큼이나 진한 문향(文香)을 피웠고 12대 연이어 문집을 남기셨다.
우리가 힘을 모아 단지를 정비하는 뜻도 선조 단지공의 유촉(遺觸)을 더듬으며 종중의 화목과 단합을 기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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