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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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柳碩, 1595-1655) 묘
유석(柳碩, 1595-1655)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사옹원정 시회의 아들이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자로 있을때 선조의 제7가인 인성군 공의 모역(謀逆)사건이 일어나자 무고(誣告)임을 알고 한무제(韓武帝)의 포속지요(布粟之謠)에 비유한 상소를 올려 인성군을 구출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636년(인조 14) 사헌부 장령에 재임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운이 위기에 처했을때 척화를 주장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도망가고 이듬해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대명의리(對明義理)와 대청주전(對淸主戰)을 강력히 주장했으면서도 사태가 위태롭게 되자 책임질 줄 모르고 오히려 군왕을 배반했으므로 문책해야 한다면서 탄핵했다. 그 후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선생은 천성이 강직하고 독립자존의 기풍이 풍만했고, 풍채와 골격이 깍은듯이 반듯했으며, 인조조에 27년, 효종조에 6년간 봉직하면서 두 임금의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다. 별세 후 좌천성에 추증되었다.
묘는 원래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었다가 안산ㆍ심갈간 고속도로 건설로 1988년 현 위치에 개장한 것으로 정부인 경주이씨와 합장되었다. 묘 앞에는 상석ㆍ향로석, 그리고 좌우 에는 동자석ㆍ망주석ㆍ문인석 등의 석물이 각기 배치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