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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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舜範(韓國精神文化硏究院 專門委員)
本書는 坡平尹氏 魯城派 明齋宗家에 所藏된 古文書를 分類整理한 것이다.
坡平尹氏는 周知하는 바와 같이 三韓統一에 功을 세운 高麗 太師 尹莘達을 始祖로 하고, 그 후 出將入相으로 女眞征伐에 大功을 세운 尹瓘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高麗朝와 朝鮮朝를 통해 名門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 魯城派는 본래 昭靖公(坤)派의 後孫 尹暾(贈左承旨)이 魯城에 정착한 후, 그 後孫이 그곳에 世居함으로써 世稱 魯城尹氏라 불리게 되었다.
魯城의 尹氏는 朝鮮中葉 中宗朝 當時 忠淸兵使를 지낸 尹先智의 세 아들 중 둘째아들인 尹暾이 魯城(尼山縣 得尹面 塘後村)으로 와서 世居의 基盤을 닦았다. 尹暾은 厚德하기로 많은 일화를 남긴 분으로서, 魯城을 중심으로 한 그의 後孫이 國內에서 繁族으로 으뜸이 될 만큼 大盛하여 三百餘年 十餘代를 걸친 一祖孫으로 一萬二千餘名(魯宗派譜 參照)의 大家族을 이루었고, 그의 손자 尹燧와 尹煌 등의 文科及第를 비롯하여 무려 五十餘名의 文科及第者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學文의 淵源과 그 追從關係로 말하면, 尹煌은 곧 儒學의 正統을 이은 牛溪 成渾의 門人이자 사위이며, 本書의 주인공이 되는 尹宣擧와 尹 拯은 당시 儒學의 巨匠인 金長生·金集·宋時烈, 그리고 兪棨·李惟泰·權諰 등을 師事, 또는 追從하면서 같은 西人으로 소위 畿湖學派를 이루었다. 특히 尹拯은 政治的 分黨으로 인해 西人에서 老·少論으로 分裂될 때 趙持謙·韓泰東 등과 함께 少論의 領袖가 되어 朝鮮朝 後期의 많은 政治的 影響을 주었다. 그러므로 魯城尹氏는 朝鮮朝 後期의 政治的 分黨에 있어서도 보다 뚜렷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온 국내가 주시하는 家門이 되었다.
本書의 古文書는 敎旨·完議·試券 등 모두 三十餘種 六千餘點 중 우선 文書類와 簡札 一部만을 整理하였다. 이에 전체를 網羅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보다 중요시되는 文書는 대부분 수록하여 資料利用에 편의를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文籍이 잦은 戰亂을 겪으면서 거의 유실되어 없어진데 반하여 본 文書는 오늘날까지 손실없이 보존되어 있어 약 三百年 동안 축적된 한 家門의 事實을 그대로 증명할 수 있는 점이 보다 다행하다. 이번 本書의 出刊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보다 활발하고 종합적인 調査硏究가 있을 것을 기대한다.
尹氏의 分貫은 文獻에 의하면 一四九貫이 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것은 坡平·海平·南原·漆原·茂松·咸安·海南·海州·醴泉·野城·杞溪·楊州·玄風·竹山·高敞·平山·永川·麗州·新寧·德山·慶州·酒泉·德豊·遂安·淸州 등 二十五貫으로서, 이중에도 南原·咸安·野城·楊州·新寧·德山은 坡平에서 分籍되었고, 이 分籍된 중에서도 野城은 이미 坡平으로 還貫하였다고 한다. 기타의 海平·茂松 등은 坡平과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중 海平尹氏의 遠祖 尹莘俊이 坡平尹氏의 始祖 尹莘達과 「莘」자의 行列字가 같다는 이유로 이 兩人이 혹시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尹莘達은 新羅 眞聖王 7年(893)에 태어났다 했고, 尹莘俊은 高麗 仁宗 때 侍中을 지냈다고 했다. 인종은 1122年부터 1146年까지 24년간 在位하였으니, 尹莘俊이 老境에 侍中을 지냈다 하더라도 尹莘達과는 百餘年의 연대차이가 난다. 이상의 근거로 보아 이 兩人은 형제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坡平尹氏는 始祖 尹莘達의 五代孫이 되는 尹瓘이 七子를 둠으로부터 비롯하여 下系로 내려가면서 수십 갈래로 分派되었다. 그리하여 分籍을 포함한 坡平系의 尹氏는 모두 尹瓘의 後孫이 된다. 그중에도 版圖公(承禮)派와 昭靖公(坤)派에서 보다 많은 仕宦과 學者를 배출하였고 後孫 역시 가장 많이 번창하였다. 本書의 주인공인 魯城系도 위로 昭靖公派에 해당된다.
資料 이용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魯城派直系의 世系圖를 붙이고 이어 本書에 해당되는 주요인물의 약력을 소개한다.
〈坡平尹氏世系圖〉
〈魯城派世系圖〉
① 尹暾=1519(中宗 14)~1577(宣祖 10). 자는 光遠, 兵使 先智의 둘째아들로서 처음 魯城에 정착하였다. 뒤에 자손들의 榮達로 인해 左承旨에 追贈되었다.
② 尹世昌=1543(中宗 38)~1593(宣祖 26). 자는 興伯. 孝行이 뛰어나며, 壬辰倭亂 때 「誓滅此賊無負吾王」의 8字旗를 들고 倡義하다가 病死하였다.
③ 尹煌=1572(宣祖 5)~1639(仁祖 17). 자는 德耀, 호는 八松堂·魯谷. 成渾의 門人이자 사위로, 1597년(宣祖30) 謁聖文科에 乙科로 及第한 후 承文院 正字에 보직되고 이어 典籍으로 승진, 監察, 正言, 兵曹, 禮曹, 刑曹의 佐郞을 거쳐 軍資監 正에 전임한 뒤, 奸黨들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尼山에 隱居했다. 1623年 仁祖反正이 되자 청렴한 관리로 지목되어 다시 執義·應敎 등을 거쳐 司諫이 되었다. 이듬해 글을 올려 李适의 난 때 檢察使였던 李貴가 賊旗를 보고 도피함으로써 軍勢를 크게 무너뜨린 죄를 탄핵하였으며, 1627年 丁卯胡亂 때에는 司諫으로 和議를 주장하는 李貴와 崔鳴吉을 반박하면서 「名爲和而其實降」이라고 上疏하여 和議를 극력 반론하다가, 上疏 中 「降」자가 凶慘한 말이라 하여 奪職編配의 罪名을 받았다. 뒤에 三司의 極諫으로 留任되어 吏曹參議·大司成·大司諫·全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1637年 正月 丙子胡亂으로 淸에 항복하여 斥和臣을 처벌하게 되자 永同에 流配되었다가 이듬해 가을에 尼山丙舍로 돌아와 卒하였다. 著書에 「八松封事」가 유명하고 文筆에 능하였다. 뒤에 領議政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文正이다.
④ 尹宣擧=1601(光海君2)~1669(顯宗10). 자는 吉甫, 호는 美村·魯西·山泉齋. 金集의 門人. 아버지인 煌이 靈光郡守 在任 당시 靈光 官舍에서 태어났다. 1633年(仁祖11) 生進兩試에 합격하고 成均館에 入學중 1636年 後金의 사신 龍骨大가 왔을 때 館學儒生들의 疏頭가 되어 사신을 斬首하고 明나라에 대한 大義를 지킬 것을 上疏하였다. 그 해 12월 淸太宗이 大軍을 거느리고 來侵하자 江華島로 피난, 이듬해 正月에 江華島가 함락되자 仲父인 烇은 적과 싸우다 戰死하고, 妻 李氏(李長白女 貫公州)도 殉節하였다. 이어 南漢山城이 함락되어 王이 친히 항복하고 그의 아버지 煌도 斥和의 죄로 몰려 流配 당하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나 또는 가정적으로 쓰라린 변을 겪고 나서 일체 벼슬의 뜻을 버리고 錦山에 隱居하여 학문정진에 열중, 특히 禮論에 정통했고 性理學 전반에 걸쳐 대가가 되어 당시 宋時烈·宋浚吉·兪棨·李惟泰와 함께 忠淸山林五賢으로 불리었다. 뒤에 孝宗·顯宗이 그의 學德을 높여 持平·掌令·執義·世子侍講院 進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江華島에서 殉死 하지 못하고 구차히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평소 친교가 있던 宋時烈과 尹 鑴의 학문적 대립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宋時烈로부터 오해를 받아 끝내는 老·少分黨의 前兆를 만들었고, 모든 禮의 源流가 되는 「家禮源流」를 兪棨와 共撰하였는데, 그것이 끝내는 老少論의 싸움을 더욱 격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하고 領議政에 追贈되었으며 諡號는 文敬이고 저서에는 「魯西遺稿」·「癸甲錄」등이 있다.
⑤ 尹 拯=1629(仁祖7)~1714(肅宗40). 자는 처음에는 仁卿, 뒤에는 子仁으로 개칭, 호는 明齋·酉峯老人. 漢陽 大廟洞 外家에서 태어났다. 9歲때 丙子胡亂을 만나 江華島에 피난 중 母夫人 李氏의 殉節을 목격하는 등 어려운 시기에 자라면서 처음에는 家學으로 그의 부친인 魯西(宣擧)와 仲父인 童土(舜擧)의 지도를 받았고, 장성하면서 愼獨齋(金集)·市南(兪棨)·草廬(李惟泰)·炭翁(權諰)·同春(宋浚吉)·白湖(尹鑴)·尤菴(宋時烈) 등 부친인 魯西와 交誼가 두터운 諸先生의 薰陶를 받았다. 1663年(顯宗4) 學行으로 천거되어 持平·進善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직 학문정진과 후진양성에 전력할 뿐이었다. 肅宗 초반기를 지나 南人의 세력이 꺾이자 다시 大司憲·吏曹判書·右參贊·左贊成·右議政·判中樞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모두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承旨와 史官등을 보내 別諭·敦諭로 부르기도 하고 周急之命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고 辭職疏 만을 올려 그 辭職疏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辭意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魯城에 앉아서 그 여러 顯職을 역임한 셈이 되었다. 물론 俸祿도 받지 않아 본 고을 官倉에 쌓아두었는데, 卒한 후 본 고을에서 그 쌓아두었던 봉록의 처리를 위에 陳達하여 위에서는 장례비용으로 내려 줄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1673년(顯宗14) 尤菴에게 부친인 魯西의 墓碣銘을 써 줄 것을 부탁하면서 朴世采가 쓴 부친의 行狀과 부친이 생전에 尤菴에게 보내려고 써 놓았던 書札(己酉擬書)를 함께 보냈다. 이에 尤菴은 그 書札內容에 尹鑴를 천거한 것을 불쾌하게 여긴 나머지 墓碣銘을 쓰면서 「朴世采가 쓴 行狀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더 할 말이 없다」고 하여 魯西를 기피하는 말로 일축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朴世采를 통해 여러 차례 수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결국 야유하는 글을 받고 불만을 품던 중, 1681年 尤菴의 德行과 學文의 결함을 지적한 書札(辛酉擬書)이 尤菴에게 전해짐으로써 절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庚申大黜陟으로 실각한 南人의 처벌 문제에 대해 강경을 주장하는 노장파에 대립하여 온건을 주장하는 소장파의 領袖가 됨으로써 끝내는 같은 西人에서 老·少論으로 分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로부터 尼山에 머물러 學文硏究와 後進敎育에 힘썼으며, 1715년 鄭澔가 쓴 「家禮源流」序文 內容의 문제로 한때 黨爭이 격화, 少論이 거세되면서 魯西와 함께 官爵이 削奪되고 文集까지 毁版되었다가, 1722년 儒生 金壽龜·黃 昱 등의 上疏로 官爵이 복구되었다. 諡號는 文成이며, 저서에는 「明齋遺稿」·「明齋疑禮問答」등이 있다.
① 己酉擬書=尹宣擧가 宋時烈에게 보내려고 써 놓았던 書札. 尹宣擧가 己酉年(1669, 顯宗10)에 죽음으로 해서 보내지 못했던 것을 尹拯이 宋時烈에게 자기 아버지의 墓碣銘을 부탁하면서 朴世采가 쓴 行狀과 함께 보냈다. 內容에 의하면, 尹 鑴·趙 絅·許 穆·洪宇遠 등은 고폐시키기 아까운 인물이니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는 것이었다.
② 辛酉擬書=尹拯이 宋時烈에게 보내려고 써 놓았던 書札. 辛酉年(1681, 肅宗7) 尹拯은 宋時烈의 學文的·政治的 결점을 들어 규간하는 書札을 써 놓고 먼저 朴世采에게 이 書札을 보였다. 朴世采가 이 書札을 보고 보내지 말 것을 극력 권함으로 해서 보내지 않았는데, 그 후 尹拯은 자기의 妻姪이며, 또 宋時烈의 외손이 되는 權以鋌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 書札을 宋時烈에 보내지 못한 사연을 말하였다. 권이정이 이 書札에 관한 사실을 宋時烈에게 傳言하게 되자, 宋時烈은 朴世采에게 拯의 書札을 찾아보내라고 독촉하였다. 朴世采는 그 書札이 말썽이 될 것을 염려하여 없다고 잡아때었으나, 宋時烈은 자기의 손자이자 朴世采의 사위인 宋淳錫으로 하여금 몰래 그 書札을 찾아오게 하여 결국 그 書札을 宋時烈이 보게 되었다.
⑥ 尹行敎=1661(顯宗2)~1725(英祖1). 자는 長文. 1684年 生員試에 合格하고 1694年 文科에 及第한 후 說書·記注官·知製敎·牧使·觀察使 등을 거쳐 大司憲을 역임했다.
⑦ 尹東源=1685(肅宗2)~1741(英祖17). 자는 士正, 호는 一菴. 1722년 學行으로 천거되어 洗馬가 되고, 이어 掌令 韓山郡守·副司果·執義·進善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一菴遺稿와 三逮錄이 있다.
國王이 직접 臣下에게 官職·加資·資格·諡號·土地·奴婢 등을 내릴 때 주는 文書이다.
本書에는 尹宣擧와 그의 妻 李氏, 尹拯, 尹行敎와 그의 妻 朴氏, 宋氏, 尹東源, 尹永鎭, 尹相甲 등에게 내린 敎旨 170件을 실었다.
尹宣擧는 生員·進士兩試에 모두 합격하고 뒤에 領議政에 追贈되었는데, 本書에는 世子侍講院 咨議, 持平·掌令·執義 등을 임명한 敎旨와 吏曹參議에 追贈한 敎旨, 그리고 諡號(文敬)敎旨를 실었을 뿐, 그 밖의 生員·進士에 합격한 紅牌·白牌, 그리고 追贈敎旨는 수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本家에는 寶藏되어 있을 것으로 간주된다. 尹 拯의 敎旨도 參議·議判·參贊 등에 임명된 것과 諡號(文成)敎旨는 모두 수록하였으나, 그 외의 것은 수록하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本家에서 寶藏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尹行敎의 敎旨는 文科及第의 紅牌를 비롯하여 說書·記注官·郡守·牧使·知製敎·觀察使 등에 임명된 것이 있고, 그의 妻 朴氏·宋氏의 從夫職追贈敎旨가 있다. 尹東源의 敎旨는 洗馬別加를 비롯하여 主簿·佐郞·掌令·執義·縣監·郡守 등에 제수된 것이 있고, 尹永鎭의 敎旨는 縣監·主簿 등에 임명된 것이 있으며, 尹相甲의 敎旨는 進士에 합격한 白牌가 있다.
本書 중 贈職敎旨·及第敎旨 등 중요한 것이 몇 장 빠지기는 하였으나, 5~6대의 것이 그대로 연속되어 보다 士族의 체계를 살피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이상의 敎旨를 받은 尹門諸賢들은 수다히 官職에 임명되었으나 尹行敎 이외에는 거의 出仕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국가에서의 士族에 대한 예우와 학자로서의 그 仕宦에 초연했던 점을 살필 수 있다.
文武官의 임명에 있어 4品 이상은 臺諫의 署經이 없이 직접 王命으로 發令하여 이를 敎旨라 하고, 5品 이하는 臺諫의 署經을 거쳐 吏·兵曹에서 王命을 받들어 發令하였으니 이를 敎牒이라 한다.
本書의 敎牒은 모두 吏曹의 奉命發令으로, 尹 拯에게 내린 守工曹佐郞·世子翊衛司 翊贊, 尹東源에게 내린 通德郞別加, 光緝에게 내린 行萬寧殿叅奉, 尹相甲에게 내린 行健陵叅奉·行元陵叅奉 등 6件이 있다.
上級衙門에서 下級官吏를 임명하거나, 또는 官府의 長이 屬官에게 내리는 辭令書이다.
本書의 差帖에는 吏曹에서 注擬하여 承政院에 보내 담당 承旨가 王에게 落點을 받은 것으로서 尹宣擧를 典說司 別檢·王子師傅로, 尹永鎭을 繕工假監役으로 임명한 1件을 합친 3件과, 尹重夏를 魯城鄕校直員으로 임명한 學部大臣의 發給差帖을 포함하여 모두 4件이 있는데, 끝에 첨부한 鄕校直員의 差帖은 韓末에 발급한 것이라 文書의 형식이 古文書의 差帖과 다르다. 그러나 우선 편의에 따라 本差帖類에 分類하였다.
承政院의 擔當 承旨가 王命을 받아 그 內容을 承旨가 직접 적어 被命者에게 전달하는 王命書이다.
本書에는 尹宣擧가 孝宗·顯宗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과, 尹 拯이 顯宗·肅宗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과, 尹東源이 英祖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으로 모두 85件이 있는데, 주로 벼슬에 임명된 후 부임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임의 권유와 독촉을 받은 內容이다. 有旨는 대부분 간단히 임명된 직함을 적은 다음, 속히 부임하라는 內容의 短句語를 적어 전달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本書에는 임금의 그 간절한 기대를 적은 長文의 有旨도 간혹 있다. 특히 顯宗이 즉위하면서 尹宣擧에게 내린 有旨와 肅宗 20년(1694)에 尹拯에게 내린 有旨는 임금이 국가의 모든 어려운 사정을 일일이 피력하고 그 어려움에 처한 임금을 위해 出仕해 달라는 內容으로서 보다 감동을 주는 長文이다.
吏曹·兵曹에서 王命을 받들어 宗親·文武官員에게 祿科를 제정하여 내리는 하나의 祿科證書이다. 本書에는 兵曹에서 司果 尹行敎·尹東源에게 내려준 祿牌 6件이 있다.
下膳狀
國王이 臣下에게 魚物 등의 膳物을 내리는 物目이다. 文書의 형태는 대개 받는 자의 官職과 姓名을 쓴 다음 보내는 物目을 나열하고 말미에 보내는 날의 年月日을 명기한 후 「奉使之印」을 찍는다. 이를 恩賜狀, 혹은 賜送狀이라 하기도 한다. 本書에는 癸巳년(1713)에 肅宗이 尹 拯에게 乾文魚·全鰒 등을 내린 下膳狀 1件을 실었다.
國王이 비밀히 내리는 命令書로서 敎書의 一種이다. 本書에는 與受者의 人蹟이 밝혀지지 않은 密書 1件이 있는데, 그 內容은, 대략 倭奴가 大闕에 침입하여 宗社가 위급한 때 義旅를 倡導함으로써 망해가는 나라를 扶持하게 되었다는 찬사와 아울러 비밀히 파견한 召募官과 軍務를 의논하되 事實을 누설하지 말라는 것이다. 文書의 末尾에 甲午8月4日로 날짜를 명기하고 「施命之寶」의 印을 찍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高宗末年 甲午更張 당시의 문서로 추정된다.
上疏에 대한 國王의 下答이다. 本書에 수록한 것은 대부분 辭職疏에 대한 批答으로서, 疏請을 따르지 않는다는 不允批答 19件이 있다. 內容은 대체로 위에 소개한 有旨와 비슷하나 형태가 다르다. 有旨는 擔當 承旨의 姓名을 쓰고 署名한 다음 「承政院印」을 찍는데 반해 批答은 書頭에 答曰로부터 그 內容이 서술되는 것으로서, 대개 임금이 辭職하는 자의 사정을 들어 위로한 다음, 국가의 어려운 점을 열거하면서 出仕를 권유하는 어순으로 되었다.
國王이 發하는 命令 宣布文으로서, 卽位·求言·功臣錄勳·配享·文廟從祀·頒賜·勸農·冊封 등을 명할 때 文臣으로 하여금 製進하게 한다. 頒布된 敎書內容은 대개 官撰史書나 개인 文集 등에 記載되어 그 內容을 알 수 있으나, 原文書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극히 稀少하고 간혹 草案轉寫가 전해질 뿐이다.
本書에는 李敏敍의 製進인 壬戌敎書의 轉寫本과 金盛迪이 製進한 甲戌敎書의 轉寫本 2件이 있는데, 內容은 모두 文廟從祀를 허락한 것이다. 被命者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養兵十年誰識文靖之聖人」이란 구절이 있음을 보아 栗谷 李珥를 文廟에 從享시킬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標題에는 敎書草로 되었으나 본 敎書의 成案者가 尹氏가 아님을 보아 轉寫本임을 알 수 있다.
① 이 말은 본래 西厓 柳成龍이 壬辰倭亂이 일어난 후 栗谷이 앞서 10萬養兵說을 主張한 것을, 宋나라의 李文靖(沆)의 先見之明을 인용하여 말한 것인데, 沙溪 金長生이 栗谷의 行狀을 쓰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栗谷의 先見之明이 있음을 말하였다.
疏는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建議·請願·陳情 등의 內容이며, 封草·奏疏·章疏 등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疏의 內容은 實錄·承政院日記 등의 官纂史料, 혹은 개인 文集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나, 疏本은 전해지는 것이 극히 稀少하다.
本書에 실은 것 역시 草本으로, 光海君의 悖倫을 규탄한 「光海時疏」(提疏者不明), 李景奭의 三田度碑文을 疏斥한 尤菴 宋時烈에 대해 변론한 「平市令鄭纘輝等上疏」, 思悼世子의 억울함을 歎願하고 그의 伸寃을 요구한 「安東幼學李應元上疏」, 李珥와 成渾의 文廟配享이 부당함을 논한 「嶺南儒生論牛溪栗谷不合從祀疏」 등 19件이 있다.
箚子는 간단한 書式의 上疏文이다. 이는 대개 일정한 書式을 갖추지 않고 간단히 사실만을 적어 올리는 것으로서, 箚文·奏箚라 불리기도 한다. 이것 역시 內容은 대개 實錄 등 官纂史料 또는 文集 등에 실려 있으나 原本은 극히 드물다. 本書에 실은 것 역시 草本으로 모두 6件인데, 書頭에 臣으로만 표기하고 上箚者의 姓名은 밝히지 않았다. 內容에 있어 주로 자신의 무능함을 피력하고 辭退의 허락을 요구한 것을 미루어 보아 당시 尹門中에서 보다 많은 벼슬을 거친 尹行敎의 것이 아닌가 싶다. 本書에 실린 疏箚의 草本에 의하면 아에 出仕를 사양한 것은 주로 尹宣擧와 尹拯父子의 辭職疏로 된데에 비하여 본 箚子는 간단한 형식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行敎의 것으로 본다.
이는 대개 私人이 孝子·忠臣·烈女·學行 등의 旌門이나 贈職을 위하여 國王에게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고, 儒生으로서 官職에 임명된 자가 國王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겸사하거나, 혹은 出仕할 수 없는 사정을 진술한 것도 간혹 있다. 本書에 실린 것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尹 拯이 世子侍講의 職을 사양하는 한편 임금의 恩賜에 감사하는 上言草 3件과 尹行敎가 世子侍講院 報德으로서 春坊의 새로운 下命과 아울러 藥物의 恩賜에 감사하는 上言 1件이 있다.
世子(東宮)·世弟에게 올리는 上疏를 上書라 한다. 對東宮世弟文書는 對國王 文書와 그 명칭과 용어에 차이가 있었으니, 즉 上疏는 上書, 啓本은 申本, 啓目은 伸目, 狀啓는 狀達, 傳旨는 徵旨, 啓依允은 達依準, 百拜는 再拜, 傳曰允, 令曰依, 不允은 不從, 批答은 下答, 省疏는 覽書 등이 그것이다. 또 士庶人이 極尊處에 올리는 편지를 上書라 한다.
本條項에는 文學 李文海가 그 兄인 福海의 억울함을 歎願한 일에 관련되 처사를 世弟(뒤에 英祖가 됨)에게 해명한 「副司直權示啇上書」「同副承旨尹尙任上書」·「校理金致仁上書」등만을 싣고 其他 士庶人간에 왕래한 上書는 簡札條項에 넣어 分類하였다.
대개 私人이 억울한 사정을 國王에게 호소하는 文書인데, 혹은 官府에 진정하는 原情도 있다. 文體는 上言과 비슷하다. 本書에는 高敞儒生 柳志榮·柳志潝 등이 高宗 9년(1872) 大院位(高宗 때 攝政)에게 올린 原情 1件이 있다. 그 內容은, 尹相甲이 撰한 柳志榮의 高祖 墓碣銘의 內容에 대해 宋欽植이 자기 先祖인 尤菴에게 욕이 된다는 것으로 트집잡아 金錢으로 보상할 것을 공갈함으로써 이를 엄히 가려달라는 것인데, 사실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당초 「家禮源流」를 尹美村과 兪市南이 공동 撰述한데 대하여 宋尤菴이 美村의 行狀을 쓸 때 이를 증명하였고 朴玄石이 美村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또 이를 증명하였는데, 市南의 後孫 相基가 「家禮源流」의 撰述이 市南의 獨撰임을 주장하였다. 그 후 提訴者인 柳志榮의 高祖가 그 「家禮源流」共撰事實을 肅宗에게 변증하였다. 尹相甲이 柳志榮의 高祖 墓碣銘을 쓰면서 「闢邪衛道國是大定」이란 文句를 썼다. 여기에 「邪」자는 곧 「家禮源流」의 獨撰을 주장한 相基를 가리킴인데, 宋欽植은 이것이 자기의 先祖 尤菴을 지칭한 것이라고 고집하면서 金錢으로 보상할 것을 강요하였다.
科場에서 應試者가 써 내는 詩·賦·頌·表·論 등의 試驗紙를 試券이라 한다. 과거를 본 것이라 하여 科紙·試紙라 일컫기고 한다. 또 試券의 앞부분을 접어서 應試者의 身分·姓名·年歲·本貫·居住地와 四祖의 身分·姓名·本貫(外祖) 등을 써서 秘封하기 때문에 이를 名紙라 일컫기도 한다. 應試者가 각자 試券을 제출하면 錄名官이 「科擧之寶」라는 印을 찍어서 주는데, 이 印이 찍히지 않은 것은 白文이라고 한다. 試券의 內容은 詩文에 불과하지만, 당시 政治·社會相의 表面을 찾아볼 수 있는 資料가 되고 나아가서 당시 선발시험의 제도를 엿볼 수 있다. 試券은 그 成績考査가 끝난 후 본인에게 돌리기 때문에 古文書 중 흔히 찾아볼 수 있다.
本書에는 詩·賦·論의 試券 8件이 있는데, 모두 秘封한 앞부분이 훼손되어 應試者가 밝혀지지 않는다.
完議는 諡號의 議定을 署經하는 司諫院·司憲府의 署經完議가 있고, 宗中·洞中稧에서 墓位·稧事 등에 관하여 의논하고 그 會議된 內容을 서로 지키도록 約束하는 講信完議가 있다. 諡號署經은 해당자의 官職·姓名과 합의된 諡號만을 적어 司諫院의 것은 司諫院의 官員이 署名하고, 司憲府의 것은 司憲府 官員이 署名한다. 講信完議는 合議한 일의 條目을 일일이 들어 羅列해 쓰고 同參한 人員이 모두 署名한다.
本書에는 康熙 50年(1711) 司憲府·司諫院이 署經한 尹宣擧의 諡號(文敬) 署經完議와 擁正 元年(1723) 司憲府·司諫院이 署經한 尹 拯의 諡號(文成) 署經完議가 있다.
戶籍은 3년마다 改修하고 그 樣式은 대개 두 가지가 있다. 改修를 위해 3년에 한 차례씩 提出하는 것을 戶籍(戶口)單子라 하고 개인의 伸請에 의하여 官에서 그 戶籍臺帳에 準하여 謄給해 주는 것을 準戶籍(準戶口)라 한다. 戶籍單子는 대개 2部를 作成提出하는데, 1部는 官에서 帳籍改修資料로 이용하고 1部는 舊籍과 대조하여 착오의 유무를 확인한 후 本戶主에게 還付하는 것으로서, 民家에 전해지는 戶籍은 대부분 이것이 많다. 형태에 있어서도 準戶口에는 書頭에 單年號를 쓰는 반면 戶籍單子에서는 單年號를 쓰지 않고 干支만 사용하며, 注記에 있어서도 準戶口는 家族狀況과 內容을 連書하는 반면 戶口單子에서는 각각 別行으로 쓰는 것이 통례이다.
本書에는 朝鮮朝 純祖年間에 提出했던 尹滋囍(相甲生家)·尹滋天·尹相甲 등의 戶口單子 5件이 있다.
庶民·下吏·賤民이 官府에 올리는 請願書로서, 白活[(발괄)]이라 하기도 한다. 이는 庶民의 生活중에 일어난 民願의 文書이고, 또 當事者들간의 利害關係와 직결되며 官府의 判決文이 첨부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오래 保管되고 量的으로도 其他文書에 비해 많은 편이다.
本書에는 奴 莫男이 上典인 尹拯을 위해 官府에 올린 所志 2件과 尹重夏의 訴狀 1件이 있다. 奴 莫男이 올린 內容은, 監營으로부터 上典 尹拯에 대해 官職에 赴任하라는 王命을 移牒하여 받았으나, 上典이 病弱하여 赴任할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을 官府에 請願하고 그 사실을 위에 禀伸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며, 尹重夏의 訴狀內容은 金聖培와의 土地賣買관계를 관청에 청원한 것이다.
分財記는 대개 財主가 生前에 分給하지 못한 것을 死後 그 子女들의 合議下에 分財하는 「和會文記」, 財主가 生前에 子女들에게 分財하는 「分給文記」, 科擧及第나 生日·婚禮·得男 등의 일을 記念하기 위해 특별히 주는 「別給文記」등으로 구분된다.
本書에는 和會文記 1件이 있는데 이는 崇禎 27년(1654, 孝宗5) 尹拯이 그의 外家로부터 分給받은 文書이다. 內容에 의하면 封祀條, 長男 李長郁의 몫, 次男 李長白의 몫, 庶女 金起敬妻의 몫, 庶男 長煥의 몫, 庶男 長時의 몫, 庶男 長美의 몫, 庶男 長昕의 몫 중 次男 李長白의 몫으로 奴10口와 安城田畓 全數를 받았는데, 李長白은 곧 尹拯의 外祖가 된다.
書院·鄕校·門中·結社 등에서 關係機關·關係人員 등에게 共同의 의미로 通知·周知하는 文書로서, 回文이라 쓰기도 한다.
本書에는 丙寅年(1926) 興德儒生 高濟萬 등이 明齋先生을 鄕賢社에 奉安할 것을 尹氏門中에 요청해 온 通文, 成氏門中에서 자기門中의 外孫이 되는 尹氏門中으로 자기들의 先祖妣墓立石에 대한 財力의 補助를 요청해 온 回文, 魯西와 明齋의 誣告를 변증한 尼山兩先生卞誣通文 등 8件이 있다.
下官이 上官에게, 下人이 上典에게 問安을 드리거나, 혹은 公的인 일을 알릴 때 이를 사용하였다. 文案은 대개 간단하게 썼다.
本書에는 김봉환의 諺告目 6件이 있는데, 內容은 秋收穀·金錢에 관한 일과 아울러 問安을 드린 것으로서 外方에 있는 마름[舍音]이나 山直이 尹門에 보낸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을 거천하는 데에 필요한 名目. 즉 學識·才能·品行 등을 적은 것인데, 本書에는 領相·右相 등의 薦主와 洪致中·南鶴鳴 등의 被薦者를 나열한 薦目 1件이 있다.
婚姻할 때 新郞집에서 新婦의 집으로 納幣와 함께 보내는 禮狀이다. 대개 일정한 書式을 쓰나, 文翰家에서는 주로 임시 취향에 맞게 措辭하여 쓴다.
本書에 실은 19件의 婚書 역시 대부분 措辭한 것으로서 尹宣擧로부터 그 이하 直系孫 6~7代의 것이 구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片紙라고 부르는 簡札은 일상생활중 유일한 통신수단으로서 상호간의 安否·用務·慶弔·通知 등 다양한 內容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보아 그 家門의 生活水準·意識狀態·交際範圍 등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그 地方, 그 時代의 文化的 水準을 엿볼 수 있다.
本書에 실은 簡札은 모두 1200여건으로 本書中 主宗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로 魯西(尹宣擧)·明齋(尹拯) 당시의 것으로서 이들의 公私間 生活狀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資料이다. 특히 本書에 실은 簡札은 「魯西集」과 「明齋集」에 거의 실리지 않은 새로운 資料라는 점에서 보다 의미가 크다. 그리고 老少分黨의 원인이 되었던 辛酉擬書의 草本이 있어 당시 黨爭關係를 살피는 데에도 새로운 資料가 될 것이다.
본 簡札條項의 分類는 尹門의 世代別로 하고 其他 小數의 他人簡札은 모두 뒤에 붙였다.
質問의 條目을 말한다. 혹은 罪人을 訊問하는 條目을 일컫는 用語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言志錄」의 「門人問目皆擧己所當爲質之」를 근거하여 質問紙의 이름으로 붙였다.
本書에 실은 問目은 대개 書簡에 가까운 것이나, 本書 중 問目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또 禮說과 經義를 質疑한 것으로서 보다 중요시되기 때문에 별도로 분립시켰다.
本書의 日記는 八松(尹煌)의 經筵日記와 霽谷南行日記이다. 八松의 經筵日記는 明日堂遺稿중의 經筵日記에서 八松에 관한 것만을 뽑은 것으로, 己巳(1629, 仁祖7) 4월 26일 晝講때 尹煌이 崔有海·徐 渻과 함께 禹貢의 治水를 講論하면서 모든 政事를 治水처럼 순조롭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國家의 元老 金長生·張顯光 같은 이를 우대하는 것이 民心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霽谷日記는 霽谷 黃世禎이 同春·尤菴의 弟子로서 己巳換局으로 尤菴이 다시 海南으로 流配되자 秀甫(李廷傑의 子)와 함께 그 流配를 隨行한 사실을 적은 것이다.
儀式의 禮行節次를 적은 것으로, 本書에는 婚禮忽記 1件이 있다.
儀式의 行事에 있어 그 執事者를 差定한 記錄, 分差記라 칭하기도 한다. 本書에는 明齋先生改葬 당시 그 執事者를 分定한 分定記 1件이 있다.
祭文은 대개 明齋에 대한 것으로서 모두 200餘件이 傳存되나 本書에는 康熙53년(1714) 肅宗과 王世子가 내린 致祭文, 癸卯年(1723) 景宗이 내린 致祭文, 後學 閔禎敬 등이 올린 祭文 등 7件만을 실었으며, 輓詞 역시 傳存되는 것 중 年代가 오래거나 또는 有名人들의 것만을 뽑아 수록하였다.
墓誌는 遷陵誌·順安縣令李公墓表·知中樞府事權公墓碣銘 등 18件이 있다. 이는 모두 文書類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旣刊 文集에 실리지 않았고, 또 被傳者가 대개 有名人들이라 人的 事實을 상고하는 데에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아 그대로 실어두었다. 上樑文은 朴春尙이 쓴 魯西先生書院上樑文 1件이 있다.
記는 吳駿善이 쓴 光山金氏四世五旌移健記와 姜天秀가 쓴 玉下精金記 등이 있고, 序에는 咸豊李氏五世遺稿序, 跋에는 尹東源이 쓴 朴氏毅愍公忠壯公兩世殉忠錄跋 등이 있다. 이들 記文 역시 文書類에 해당되지 않으나 旣刊書에 실리지 않은 것이므로 그대로 실어둔다.
근대의 契約書·領收證 등을 합쳐 證書類라 하였다. 內容은 鄭寅吉·尹吉重과의 土地和解文件을 비롯하여 證書·領收證 등 26件인데 證書와 領收證은 대개 金錢出納에 관한 것들이다.
以上과 같이 대략 本書에 실은 文書를 살펴보았다. 其他門中의 文書에 비해 文書類는 극히 소략한 편이고 書簡文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書簡文은 많은 만큼의 資料的 價値를 지니고 있으며 소략한 文書類에도 보다 특징을 지닌 것이 있다.
文書類의 특징을 든다면 우선 有旨를 들 수 있다. 有旨가 他門의 文書에 없는 것은 아니나, 本書의 有旨는 주로 魯西(尹宣擧)와 明齋(尹拯) 父子의 것으로서 모두 80餘件의 많은 분량이다. 이들이 官職에 任命될 때마다 上疏하여 자신들의 不材함을 들어 사양하므로 國王이 이들의 出仕를 권유하여 下命한 것이 곧 有旨인데, 이로 보아 당시 學者들의 高尙한 處世를 엿볼 수 있고 國王은 賢才를 등용하기에 그 誠意를 다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書簡文에 있어서는 3천여 건의 방대한 분량이 소장되어 있다. 本書에서는 紙面의 제한으로 인하여 전체를 싣지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당시의 社會相이나 日常生活의 실상 등 여러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우선 당시 京鄕各處 많은 人士들과의 受答에서 나타난 그 진지한 사실에 의해 당시 士族들의 交誼를 볼 수 있고, 또 至親間과의 受答한 그 섬세한 內容을 보아 당시 大家族社會의 和睦團結하는 그 연유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本書 중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長文의 問目이다. 이는 주로 經學과 禮說에 대해 問答한 것으로서 보다 진지하고 정밀한 考察을 가하였다.
序說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魯城尹氏는 魯城入鄕後 300餘年 동안 文翰을 지속한 家門이므로 各派의 門中에 많은 文書가 傳存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本書에는 그 전체를 망라하여 수록하지 못하고 오직 尹宣擧以下直系의 것만을 수록하였다. 이에 아쉬운 점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계기로 하여 추후 계속 調査硏究될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本文書를 빌려주신 尹景植氏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本文書를 發掘調査한 本院 鄭求福 敎授와 金乾坤 硏究員에게도 感謝를 드리는 바이다.
坡平尹氏族譜
魯宗史錄(坡平尹氏魯宗派尹德炳發行)
韓國古文書硏究(崔承熙著)
黨議通略
魯西遺稿(癸甲錄)
明齋遺稿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