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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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淳佑(本院 敎育倫理硏究室 敎授),安承俊(本院 國學振興硏究事業 古文書擔當 硏究員),金鶴洙(韓國學大學院 碩士課程 修了)
德川書院은 一五七五年(宣祖八) 南冥 曺植(一五○一~一五七二)의 門徒, 그리고 慶尙右道 士林의 公論으로 창건되었다.  1) 현재 서원이 위치한 곳은 산청군 시천면 원리이다. 건립 당시에는 晉州府 管轄이었으며 地名 또한 德山 蕯川里였다.
당초 서원건립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 것은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三년 후인 一五七五年이었다. 門人 崔永慶(一五二九~一五九○), 河沆(一五三八~?), 河應圖(一五四○~?), 孫天祐, 柳宗智(一五四六~?), 晉州牧使 具忭(一五二九~?),  2) 慶尙監司 尹根壽(一五三七~一六一六) 및 嶺南士林이 협의하여 山天齋 인근에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인 一五七六年에 德山書院으로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門人 河應圖(一五四○~?)가 자신의 茅屋을 서원터로 獻納하였다.  3)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서원 건립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 중에는 崔永慶, 具忭, 尹根壽4) 등 居京 官人 및 慶尙監司 晉州牧使 등 地方官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는 점이다. 이 중 慶尙監司 尹根壽와 晉州牧使 具忭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는 서원의 제도와 규모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그 運營에 있어서도 山天齋의 舊儀에 따라 院規를 정하고 會講을 하는 정도였다.
南冥思想의 핵심은 書院의 堂號로 걸려진 「敬義」로서, 南冥平生의 學問과 處世의 勉勵處와 苦心處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敬義는『周易』의「敬以直內 義以方外」라는 구절에 근거하는 말로 敬은 곧 內向的인 精神를 함축하는 것이며 義는 外向的인 자세를 의미하였다. 敬義 二字는 南冥이 山天齋를 落成하면서 壁書하기도 했다. 이후 敬義는 남명과 그의 문도들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다. 그의 문도들이 배향된 書院祠宇에도 敬義란 懸板이 걸려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草創이후 점차 규모가 정비되어 갔으나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등의 兵禍로 서원이 全燒되었다. 이후 一六○一年(宣祖 三四年) 晉州牧使 尹公說와 士林들의 公議로 重建이 論議되었다. 重建당시에도 草創 때와 마찬가지로 李謰, 陳克敬, 河燉 등 南冥門徒가 중심이 되었다. 아울러 觀察使 柳永詢과 兵使 金太虛가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5) 하였다.
德川書院이 賜額된 것은 光海君이 登極한 一六○九이다. 당시는 南冥의 門人으로서 중앙 要路에서 활약했던 인사가 많았다. 賜額이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一六一五年에는 남명의 제자 가운데 守愚堂 崔永慶(一五二九~一五九○)이 서원에 追享되였다.  6) 최영경은 남명의 初喪을 당하여 題主할 당시 德溪 吳健(一五二一~一五七四)에 이어 이른바 「居二」로 참가하였고, 東, 西齋의 堂號인 敬齋, 義齋의 題字도 최영경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대에 최영경이 追享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명망과 위치 때문이었다.
賜額 이후 德川書院은 一六九○年(肅宗一六)과 一七九六年(正祖二○) 두차례에 걸쳐 重修되었다. 一六九○年의 重修事實에 대해서는 鄭岐胤(一六二九~一七○八, 草溪人, 桐溪鄭蘊後孫)이 지은 敬義重修記를 통하여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一七九六年의 重修事實은 德川書院所藏 文書인〈重修任案〉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重修任案〉에 의하면 당시 院長은 正祖代 南人 領袖의 위치에 있었던 蔡濟恭(一七二○~一七九九, 平江人)이었으며, 有司에는 河應德과 李必茂였다. 중수는 특별히 차정된 重修有司가 전담하였다. 重修有司 曺龍玩은 南冥의 第三子 曺次의 六세손이다. 그는 山天齋의 중건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한 바 있다. 당시 중수는 祠宇, 神門, 敬義堂, 時精門, 洗心亭, 醉醒亭 등 건물이 포함될 정도로 대대적인 규모였다. 중수사실은 〈重修上樑文(李恒茂)〉과〈重修任案〉에 轉載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一八七○年(高宗七)에는 大院君의 書院毀撤令으로 서원이 훼철되었다. 一九一八年에는 朴載華, 朴齊九 등이 敬義堂을 重建하였다.
山天齋는 南㝠이 六一세 때 金海의 炭洞에서 德山의 絲綸洞으로 移居하면서 지은 건물로서, 南冥의 晚年 講道之所이자 考終處였다.  7) 〈南冥先生編年〉(『南冥集』, 卷五)에 의하면 南冥은 頭流山의 山水를 사랑하여 평소에도 이곳에 자주 왕래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에 와서 移居하게 된 것이다.
南冥이 三○歲에서 六○歲까지의 靑長年期 보내면서 학문활동을 하고 또 많은 門人을 길러낸 곳은 金海의 炭洞이다. 당시 그가 고향 三嘉에서 김해로 移居한 것은 妻家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妻家인 南平曺氏는 이 지역에서 상당한 富를 축적, 世居하고 있었다. 이러한 처가의 경제적인 뒷바침은 그의 강학활동 및 사회활동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金海에서 南冥은 山海亭을 중심으로 講學, 交友, 後學敎育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南冥이 「山海先生」8) 으로 불리게 되고 후일 그의 淵源錄이〈山海師友淵源錄〉으로 命名된 것도 이같은 김해에서의 학문활동과 관계가 깊다.
〈南冥編年〉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門人은 南冥이 三五歲때 來學한 宋之麟(樓庵)이다. 이후 鄭復顯(梅村), 權文任山天齋로 移居한 이후에도 鄭琢(藥圃), 趙瑗(雲崗), 李晁(桐谷), 金宇顒(東岡), 李魯(松巖), 崔永慶(守愚堂), 鄭逑 등 쟁쟁한 인물들이 남명문하에 들어왔다. 이들 인물 가운데는 鄭琢, 金宇顒, 鄭逑 등과 같이 退溪門徒로 활동한 인물들이 많았다.
山天齊는 壬辰倭亂으로 소실된 이후 二○○年 이상 복구되지 못하다가 一八一七年(純祖一七)에 가서야 本孫과 士林의 협력하에 중건되었고, 그 이후 줄곧 제 二의 덕천서원(「德院之貳」)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一八一七年 중건 이후 一八二四年에는 齋任이 구성되어 齋任案이 작성되는 등 덕천서원과 별도로 반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山天齋의 重建과 運營에 관여한 인물들 중에는 昌寧曺氏로서 南冥系列이 아닌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위 사족과는 달리 老論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齋任案에 登載된 인물 가운데 曺允亨, 曺允9) 이 외에도 『南冥編年』에서 확인되는 山海亭을 往來受學한 인물로는 李光坤(松堂), 朴齊賢(松巖), 朴齊仁(盼巖), 河洛(喚醒齋), 趙宗道(大笑軒), 李俊民(新巖), 李瀞(茅村), 李天慶(日新堂), 金沔(松庵) 등을 들 수 있다.
瑞(副提學)는 端宗廟庭에 配享된 曺尙治의 후손으로 居京의 小論系 人士였다. 그리고 李志容(序文 撰者), 趙鍾永(禮曹題), 洪白淳(重建記 撰者) 등도 그 家系가 西論系였다. 따라서 一九세기 초반 山天齋 重建을 전후한 시기에는 本孫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山天齋의 운영에도 西人系 人士 혹은 이들과 提携한 本孫들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本孫 가운데 山天齋의 運營에 주도적 역할을 한 家系는 南冥의 四子 曺次矴의 후손이었다. 曺次矴의 六世孫 曺龍玩(縣監)은 一七九六年 院長 蔡濟恭의 주관하에 德川書院을 중수할 때에는 重修有司로서, 門中契인 昌寧曺氏義契10) 에서는 有司로 활동하는 등 爲先事業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從曾孫 曺垣淳도 山天齋齋任을 역임하였고, 『山海淵源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11) 이는 비록 남명을 承重한 長子系列은 아니지만 曺次矴의 후손들의 德川書院과 山天齋에 대한 관심도를 잘 보여주는 일면이다. 朝鮮後, 末期에는 昌寧曺氏 本孫들이 德川書院 및 山天齋의 운영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명의 學統은 상당부분 外孫 계열로 전수된 일면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南冥의 先系 및 後孫들의 家系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家系圖〉(1)-南冥先系
〈家系圖〉(2)- 南冥父彦亨內外孫關係
〈家系圖〉(3)- 南冥後代
가. 長子 曺次石系列
나. 次子 曺次磨系列
다. 三子 曺次矴系列
先系 가운데 曺松茂系는 昌寧曺氏 가운데에서도 가장 현달한 가계 중의 하나였다. 曺松茂의 세째 孫子인 曺仁鐸系列이 朝鮮王朝에 와서 仕宦 내지는 學問的인 면에서 두각을 드러낸 바 있으며,  12) 曺植도 그의 九代孫이다.
南冥 先代가 三嘉縣에 정착한 것은 그의 曾祖 曺安習代였다. 『昌寧曺氏族譜』의 曺安習 略傳에 의하면 曺安習 때 昌山 즉, 지금의 昌寧에서 三嘉縣으로로 移居했 으며, 그 시기는「國初」즉 조선건국 초기였다. 族譜에는 高祖 曺殷은 中郞將, 曾祖 曺安習은 生員, 祖父 曺永은 將仕郞을 최종 宦歷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父 曺彦亨이 睿宗年間에 文科에 壯元하면서 가문이 중흥할 수 있었다. 彦亨이 현달함에 따라 婚姻相對가 격상되었고, 이 때부터 曺植家門은 士族으로서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曺彦亨은 모두 三男 四女를 두었는데 長子 曺樞은 後嗣가 없고 次子는 曺植이며 三子는 曺桓이다. 一女壻는 鄭雲(八溪人), 二女壻는 李公亮(全義人), 三女壻는 鄭白氷(草溪人), 四女壻는 鄭思賢(晉陽人)이다. 이 중 二女壻인 李公亮은  13) 全義人으로 晉州地域의 望族이었다. 李公亮의 아들 李俊民(一五二四~一五九○, 號 新巖)은 南冥의 門人으로서 師友間에 상당한 명망을 지난 인물이다. 李公亮은 趙宗道(一五三七~一五九七, 大笑軒 咸安人), 趙瑗(一五四四~?, 林川人, 雲岡)과 같은 南冥 門下 俊才들을 壻로 맞아 들이기도 하였다.
南冥의 妻家인 南平曺氏14) 는 南冥의 妻高祖 曺由仁이후로 金海의 炭洞에 世居한 가문이었다. 南冥은 南平曺氏에게서 一男 一女를 두었으나 長男 曺次山은 早夭하였다  15) 長女婿는 金行(商山人, 萬戶)이다. 金行은 金宇顒(一五四○~一六○三)  16) 郭再祐17) (一五五二~一六一七) 두 사위를 두었는데 모두 南冥의 外孫婿가 된다.
曺次山이 早夭한 후 남명은 後嗣를 우려하여 恩津宋氏 宋璘의 딸을 妻로 맞아 들여 次石, 次磨, 次矴 삼형제를 두었는데 次石이 承重하였다. 南冥은 父 曺彦亨의 仲子이지만 伯兄 曺樞이 無後하여 실제 長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 曺彦亨의 가계를 承重한 사람은 曺植의 弟 曺桓이었다. 『經國大典』「禮典」奉祀條에 의하면 「若嫡長子無後則衆子 衆子無後則妾子奉祀(細註)嫡長子只有妾子 願以弟之子爲後者 聽欲自與妾子 別爲一支규 처익 되 어 있는데 曺植의 亦聽」으 로 別薦一支則 亦聽」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曺植의 경우는 동생의 아들로서 後嗣를 삼지 않고 자신의 長子 次石과 함께 따로 하나의 派를 형성하였다. 설제 『昌寧曺氏族譜』所載 曺桓의 略傳에도 「以㑆兄文貞公命 承宗祀 因居三嘉舊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曺次石은 晉州 德山(현재 산청군 시천면)에 거주하였으나 그의 아들 曺晉明이 德山에서 善山으로 移居하였다. 이후 曺晉明의 曾孫인 曺希三代까지 善山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族譜에서도 曺晉明에서 曺希三까지 四代의 墓所는 그 소재가 모두 善山이다. 曺晉明이 善山으로의 移居 이유는 분명하지않다.
남명의 본손이 四代에 걸쳐 善山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적어도 이 기간 동안은 덕천서원의 운영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적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19)
南冥의 長子系列은 아니지만 南冥의 현양에 힘 쓴 家系는 세째 아들 曺次矴(一五六○~一六四五)~曺克明(一五九六~一六五六)~曺夏新(一六四四~一七○八)系列이었다.(〈家系圖〉(三). 다 참조)
曺夏新의 曾孫 曺龍玩은 薦擧에 의해 敦寧參奉에 除授되고 후에 龍宮縣監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南冥의 奉祀와 墓所守護를 위해 후손들에 의해 구성된 昌寧曺氏義契의 有司로  20) 활동하였으며, 山天齋 重建과 運營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조용완의 從曾孫인 曺垣淳은 小川書堂을 건립, 운영하였으며, 南冥의 淵源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所謂「復菴所撰」의 淵源錄이 바로 그 것이다.
德川書院이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서원에 소장된 古文書도 건립 초기의 자료는 드물고 대부분 一七·八세기 내지 이후의 자료들이다. 德川書院의 沿革과 規模 그리고 지역내에서의 비중을 고려할 때, 고문서도 많이 소장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중간에 유실된 자료가 많다. 院規21) , 尋院錄, 執事錄 등 서원 운영관계 문서, 奴婢案, 田畓案 등 각종 경제관계 기록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자료 중 가장 오래된 문서중의 하나로는 一五七六년(萬曆四年, 宣祖九)의 院任錄이 있다. 시기적으로 一九○○년대 이전의 자료보다는 그 이후의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현존 고문서를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대체로 다음 세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一) 書院의 沿革, 運營 關係文書-〈德川書院誌〉,〈德川書院任錄〉,〈德川院生案〉
(二) 南冥의 文廟從祀運動 關係文書-〈南冥從享所文〉, 〈南冥先生從享疏軸〉,〈南冥先生請 廡疏本抄〉
(三) 南冥淵源錄 關係文書-〈德川師友淵源錄〉,〈德川師友淵源錄顚末〉,〈山海淵源錄〉
(四) 其他文書-〈享禮儀節〉,〈昌寧曺氏族譜〉,〈座案〉
〈德川書院誌〉에는 서원의 創建, 重修, 毀撤 사실, 그리고 당시의 記文, 上樑文, 告由文, 院任錄, 院生錄을 수록하고 있다. 〈院任案〉 에는 본서에 수록된 〈德川書院任錄〉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萬曆年間의 院任錄이 轉寫되어 있다.
〈德川書院任錄〉은 二冊으로 되어 있고 수록 시기는 一七六九年~一八六六年이다. 〈德川書院任錄〉에 의하면 一七세기 중엽까지 院長을 지 인물은 거의가 南冥의 門人으로서 師友間에 名望을 지닌 인물들이었으며  22) 그 이후부터 一七세기 말까지는 南冥의 私淑弟子들이 院長을 맡고 있다.  23)
一八세기 이후부터는 居京의 人士가 院長에 재직하는 빈도가 증가하면서 원임의 성격에도 다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院誌에 따르면, 居京 人物 가운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당시 晉州牧使로 있으면서 一七○五年(肅宗三一)에 院長을 지낸 李翼年이다. 이후 德川書院이 훼철되기 직전까지 상당수의 居京人士가 院長에 취임하였다.  24) 이들은 대체로 居京 南人系列 人士들이었다. 특히 正祖朝의 蔡濟恭(一七二○~一七九九)은 二次에 걸쳐 院長에 재직하면서 書院重修를 주관하는 등 德川書院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德川院生錄〉은 一六○九年(萬曆三七年 院生錄)~一六七二年(辛亥 院生錄) 사이 모두 7차에 걸쳐 작성되었다. 이 院生錄은 一九三九年『德川書院靑衿錄』이란 명칭으로 出刊한 바 있다.
光海君~仁祖年間, 正祖~純祖에는 南冥門人 및 儒林들을 중심으로 南冥의 文廟從祀運動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文廟從祀關係文書는 이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였다.
南冥의 淵源錄은 无悶堂 朴絪(一五八三~一六四○)의 『山海師友淵源錄』이래 수차에 걸처 修正, 또는 破本과정을 거쳤는데, 최종적으로 집대성된 것이 本書에 수록한 〈德川師友淵源錄〉이다. 그러나 본 〈德川師友淵源錄〉의 편찬에는 序次是非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 是非의 顚末을 기록한 것이 〈德川師友淵源錄顚末〉이다. 물론 〈德川師友淵源錄顚末〉은 南冥 本孫測입장에서 정리한 것인 만큼 다소 주관적 입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에 授受된 기록들을 가급적 全載하고 있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한편 曺垣淳(一八五○~一九○ 三, 號 復菴)에 의해 편찬된 〈山海淵源錄〉은 체제가 완비되지 못하고 내용상 소략한 점도 있으나 편찬과정을 살필 수 있는 草稿本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一. 書院의 組織과 運營 關係文書
(一) 德川書院誌
○ 作成年代: 一九八五
○ 表題: 德川書院誌(附 院任錄, 院生錄)
○ 內容: 創建, 重修, 毀撤事實, 院任錄, 院生錄 등 서원의 史蹟이 기록되어 있다. 院任錄 부분은 收錄 범위로 볼때 크게 上(一五七六~一七四六)과 下(一七六九~一八六六)로 구분되며, 下篇 말미에는 一九三五年~一九八一年 사이의 院任錄이 별첨되어 있다. 一七○九年(己丑, 肅宗三五)에 쓰여진 權必昇의 序文과 趙輝晉의 跋文이 있다. 院生錄은 一六○九年(光海元年) 院生錄과 一六一八年(光海一○) 院生錄으로 구성되어 었으며, 書院誌를 만들 당시 〈德川院生錄〉을 저본으로 하여 轉寫한 것으로 보인다. 一六○九年의 기록에는 李光友(一五二九~?, 陜川人, 號 竹閣) 등 一二명이 收錄되어 있고, 一六一八年 기록에는 成汝信(一五四六~一六三二, 昌寧人) 등 三六二명이 收錄되어 있다. 두 자료 모두 略傳으로 字만 기록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字가 생략되어 있다.
(二)德川書院任錄
① 德川書院任錄(一)
○ 收錄年代: 一七六九(英祖四五)~一八一一(純祖一六)
○ 內容: 德川書院의 院任 즉, 院長과 有司를 역임한 인물의 명단이다. 本 院任錄에 收錄된 院任은 〈山海師友淵源錄〉,〈德川師友淵源錄〉의 私淑篇에 登載된 인물들의 次世代들이다. 院任은 院長 一人에 有司 二人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書院重修 등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는 特別有司를 두고 있다. 院任의 任期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院長의 경우 連任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有司는 주로 인근의 士族子弟 中에서 선임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院長은 居京의 高官 및 星州, 尙州 등지의 儒林 가운데 名望있는 인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晉州圈 이외 타지역 출신의 院長을 擧名하면 마음과 같다.
*李之億(一六九九~一七七○): 延安人, 李光庭五世孫, 居京, 本案 一七六九年己丑條
*張址學: 仁同人, 張顯光五世孫, 居仁同, 本案 一七七一年 辛卯條
*洪名漢: 豊山人, 洪萬鍾 曾孫, 洪景輔 子, 居京, 本案 一七七三年 癸巳條
*鄭致險: 居京, 本案 一七七七年 丁酉條
*李萬育: 延安人, 李光庭 玄孫, 居京, 本案 一七七七年 丁酉條
*趙貞相: 漢陽人, 趙仁璧 一三世孫. 趙公瑾 六世孫, 本案
一七八四年 甲辰條
*蔡濟恭(一七二○~一七九九): 平康人, 居京, 本案 一七八七年 丁未, 一七九七年 丁巳條
*韓大裕: 淸州人, 韓應寅 七世孫, 居京, 本案 一八○一年 辛卯條
*尹光顔(一七五七~一七八五): 城平人, 尹元學 玄孫, 居京, 本案 一八○七年 丁卯條
*鄭宗魯(一七三八~一八一六):晉州人, 鄭經世 六世孫, 居尙州, 本案 一八○九年 戊辰條
*尹光重: 城平人, 尹海學 玄孫, 居京, 本案 一八一○年 庚午條
② 德川書院任錄(二)
○ 收錄年代: 一八一二(壬申, 純祖一二)~一八六六(內寅, 高宗三)
○ 內容: 一八一二年 有司를 지낸(院任錄 參照) 李悳烈의 序文이 있다. 진주권 이외 타지역 출신 원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洪大淵: 南陽人, 洪瑞鳳 六世孫, 居京, 本案 一八一二年 壬申條
*李益運(一七四八~一八一七):延安人, 五峯李好閔弟李尙閔 六世孫, 居京, 本案 一八一四年 甲戌條
*韓敎應(一七六○~一八二四): 淸州人, 韓興一, 六世孫, 居京, 本案 一八一九年 己卯條
*洪時濟(一七五八~?): 南陽人, 洪景渡 五世孫, 居京, 本案 一八二六年 丙戌條
*洪命周( 一七七○~?): 豊山人, 洪柱一 七世孫, 居京, 本案 一八三一年 辛卯條
*鄭鴻慶: 草溪人, 鄭熙普 曾孫, 居京, 本案 一八四三年 癸卯條
*曺錫雨(一八一○~?): 昌寧人, 曺文秀 七世孫, 居京, 本案 一八五四年 甲寅條
*權大肯: 安東人, 權縉 七世孫, 居京, 本案 一八五五年 乙卯條
*鄭元容(一七八三~一八七三): 東萊人, 鄭太和 六世孫, 居京, 本案 一八六三年 癸亥條
(三) 德川院生錄
① 德川院生錄(一)
○ 收錄年代: 一六○九(光海 元年)
○ 內容: 德川書院에 入院한 儒生의 名單.入院錄이라고도 한다. 人名의 記載는 기본적으로 姓名을 기재하고 그 아래에 細註로 字를 적었다. 姓名을 다른 인물에 비해 一段 아래에 기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父, 兄과 함께 기록될 경우 아들이나 아우를 낮추어(卑行) 기록했기 때문이다. 收錄된 인물은 『德川師友淵源錄』의 「門人篇」과 「私淑篇」에 등재된 인물이 대부분이다. 門人 李光友(一五二九~?) 를 시작으로 南冥의 孫子 曺浚明에 이르기까지 모두 九三명이 실려있다.
② 德川院生錄(二)
○ 收錄年代: 二六二三(仁祖 元年)
○ 內容: 成汝信(一五四六~一六三二) 이하 一八五명이 실려있다. 〈德川院生錄〉一과 중복되는 인물이 많다.
③ 德川院生錄(三)
○ 收錄年代:一六二九(仁祖 七)
○ 內容:成汝信(一五四六~一六三二) 이하 一七二名이 실려 있다. 앞의 院生錄 一, 二와 중복되는 인물이 많다
④ 德川院生錄(四)
○ 收錄年代: 一六三四(仁祖 一二)
○ 內容: 鄭麟祥(龜溪, 晉州人,〈德川師友淵源錄〉門人篇 參照) 이하 二一二名이 수록되어 있다.
⑤ 德川院生錄(五)
○ 收錄年代: 一六四二(仁祖 二○)
○ 內容: 柳德龍(文化人,〈德川師友淵源錄〉門人篇 參照) 이하 二四○名이 수록되어 있다.
⑥ 德川院生錄(六)
○ 收錄年代: 一六五○(孝宗元年, 庚寅)
○ 內容: 梁世鴻(南原人) 이하 南冥의 曾孫 曺晏(『德川師友淵源錄』「私淑編」參照)까지 모두 二六六名이 수록되어 있다.
⑦ 德川院生錄(七)
○ 收錄年代: 一六五七(孝宗八, 丁酉), 一六七二(顯宗一二, 辛亥)
○ 內容: 丁酉院生錄(一六五七)과 辛亥院生錄(一六七二) 二책이 合本되어 있다. 「丁酉三月日院錄」에는 姜大適(寒沙 姜大遂의 弟) 이하 一一四名이, 「辛亥十二月日院錄」에는 李錫生 이하 一二五名이 收錄되어 있다.
(四) 重修任案
○ 作成年代: 一七九六(正祖 二○, 丙辰)
○ 內容: 一七九六年 德川書院을 重修할 때의 任案이다.
당시의 원장에는 蔡濟恭(一七二○~一七九九)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重修事實 및 그 重修記文은 院誌에 실려있다.
(五) 各院通文抄冊
○ 收錄年代: 一八五○(哲宗 元年)~一八六二(哲宗 一三)
○內容: 각 書院과 주고 받은 通文을 후대에 필사한 轉寫本이다. 명칭상으로는 〈各院通文抄冊〉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通文만이 아니고 簡札, 單子, 傳令, 稟目, 節目, 祝文, 關文등의 文書가 다양하게 收錄되어 있다. 본 各院通文抄冊의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먼저 淸香堂 李源(一五○一~一五四七)의 後孫과 南冥의 後孫間의 是非에 대한 것으로서 文書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이 是非는 淸香堂 李源의 新刊된 文集 가운데 李源과 曺植이 四端七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南冥이 李源의 說에 敬服하였다는 內容이 기재된 것과 李鏡潭이 지은 李源의 墓碣銘에 「南冥의 見識은 高邁하고 先生(淸香堂 李源)의 學問은 平實하여 나아간 바는 서로 같으나 純粹濃郁精微愼密에 있어서는 先生(李源)이 그것을 구비하였다」라는 말에 대하여 南冥의 후손들이 이는 근거없는 말(無據之說)이라 반박한데서 비롯하였다. 是非 과정에서 상당수의 通文이 오고 갔는데 德川書院과 培山書堂(陜川李氏 李源家門書堂)의 通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大覺書院(覺齋 河沆 配享) 통문도 일부 收錄되어 있다. 아울러 이 是非와 관련해서 定齋 柳致明(一七七七~一八六一)의 簡札一件도 收錄되어 있다.
다음으로 享祀時節目, 單子, 移安儀節, 移安祝文, 還安祝文, 陳設圖, 祝文, 奉享文, 常享祝 등과 같이 주로 德川書院의 祭享儀禮와 관련된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자료 이외에도 文山書院, 嵋山書院, 新山書院(金海所在, 南冥祭享), 忠烈書院(龍仁所在, 鄭夢周書院) 등의 個別的인 通文들이 실려있다.
(六) 享禮儀節
○ 作成年代: 未詳(一九三○年以後 추정)
○ 內容: 德川書院 享禮時의 諸 儀節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문서. 陳饌圖, 笏記, 祝文式, 執事榜 등이 收錄되어 있다.
二。文廟從祝 關係文書
(一) 南冥從享流文
○ 收錄年代: 一六一四(光海九, 萬曆甲寅)~一六二九(仁祖七, 己巳)
○ 內容: 南冥의 贈職, 說號 및 文廟從祀와 관련된 上疏, 劄子 등과 거기에 따른 王의 批答을 收錄하였다. 다음의 〈南冥先生從享疏軸〉과 내용상으로는 거의 동일한 성격으로 보여지나 時期上 이 문서가 一○○年 이상 앞선다. 上疏文은 一六一四年(光海六, 萬曆 甲寅)에 館學儒生들이 연명으로 올린「請加贈賜諡上疏」로부터 一六二九年(己巳, 仁祖七年)의 「全羅儒生楊時益上疏」까지 모두 三五件이 있다. 거의 年度順으로 收錄하고 있다. 晉州一帶에서 올린 儒疏는 대부분 南冥의 門人 및 私淑弟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上疏가운데는 槐山, 羅州, 綾城, 開城, 扶餘, 淳昌 등지에서 올려진 儒疏도 다수 收錄되어 있다. 上疏 外에 一六一七年(光海九)九月의 弘文館 劄子 一件, 同年一○月의 司諫院劄子 一件도 收錄되어 있다.
(二) 南冥先生從享疏軸
○ 收錄年代: 一七三○(英祖六, 庚戌)
○ 內容: 英祖六年 南冥의 文廟從祀運動 당시의 上疏文과 通文 등을 收錄한 문서이다. 上疏文은 一七三○年(庚戌, 英祖六) 幼學 沈徵賢을 疏頭로 京畿, 忠淸, 慶尙道 儒生들이 合同으로 올린 것이다. 通文은 成均館에 發通된 것으로 二件이다. 시기는 上疏와 같은 一七三○年이다. 末尾에는 宋時烈(一六○七~一六八九)이 지은 南冥의 神道碑銘이 收錄되어 있다.
(三) 南冥先生請廡疏本抄
○ 收錄年代: 一六一五(光海七)~一八一四(純祖一四)
○ 內容: 南冥의 文廟從祀와 관련된 上疏를 收錄한 문서
로 三件의 上疏가 筆寫되어 있다.
*慶尙道儒生河仁尙上疏: 一六一五(光海七, 乙卯, 疏頭: 河仁尙)
*京畿慶尙兩道合疏: 一七九七(正祖二一, 丁巳, 疏頭: 姜馥)
*八道儒生疏: 一八一四(純祖一四, 甲戌, 疏頭: 河治浩)
*河仁尙: 河憕(一五九七~一六五八)의 門人(〈德川院生錄〉(一六二三) 및 〈德川師友淵源錄〉 私淑篇 參照)
*河治浩:〈德川書院任錄〉(癸酉, 一八一三)年 參照
三. 南冥淵源錄 關係文書
(一) 德川師友淵源錄
① 德川師友淵源錄(師友,門人)
② 德川師友淵源錄(私淑)
○ 作成年代: 一九六○年(跋文)
○ 編纂者: 德川儒林(金在洙, 河禹善 등)
○ 內容:「師友」,「門人」,「私淑」의 三篇으로 정리한 南冥의 淵源錄이다. 『南冥集』「附錄」에도 동일한 體制와 內容으로 실려 있다. 모두 六卷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孔子-周疾溪-程子-朱子로 이어지는 道統淵源과 從遊, 門人, 私淑弟子를 수록하였다. 문서 말미에 본 淵源錄의 編纂과 관련하여 一九五七年(丁酉)의 「編纂任所名案」이 첨부되어 있다. 跋文은 河禹善(一八九四~一九七五, 謙齋 河弘度 後孫, 號 澹軒, 晉州人)이 지은 것이 있고, 그 시기는 一九六○年이다.
南冥의 淵源錄은 一六三六年 无悶堂 朴絪(一五八三~一六四○)에 의해 최초로 편찬되었다. 『山海師友淵源錄』이 그것이다. 이를 低本으로 하여 一七六四年(英祖四○)에는 金墩, 朴挺新 등이 修正本을 냈으며, 이 修正本은 一七六四年에 重刊된 『南冥集』의 「別集」에 收錄되어 있다. 그리고 一九세기 말에는 南冥의 後孫인 曺垣淳(一八五○~一九○三)에 의해 『山海淵源錄』이 편찬되었다. 本『德川師友淵源錄』은 이처렴 无悶堂本 이래 修正, 補完되어 오던 南冥의 淵源錄을 集大成한 것이다. 참고로 朴絪이 지은 『山海師友淵源錄』의 體制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序文(朴絪)
*凡例
*南冥先生世系圖
*南冥先生年譜
*卷一 南冥을 收錄.
*卷二 聽松 成守琛 이하 四人.
*卷三 三足堂 金大有 이하 六人.
*卷四 李一齊 이하 三人.
*卷五 玉溪 盧稹 이하 七人.
*卷六 德溪 吳健 이하 五人.
*卷七 寒岡 鄭逑 이하 二人.
*卷八 金府使 이하 八人.
*卷九 李判書 이하 二五人.
(二) 德川師友淵源錄顚末
① 德川師友淵源錄顚末(乾)
② 德川師友淵源錄顚末(坤)
○ 收錄年代: 一九五七(丁酉)~一九六五(乙巳)
○內容: 〈德川師友淵源錄〉의 편찬에 따른 是非의 顚末을 收錄한 문서이다. 一九五七年 德川道會에서 『德川師友淵源錄』의 改刊을 결정하고 각처에 通文을 보내 淵源錄의 편찬에 필요한 각 人物들의 單子를 거둬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金宇顒 後孫 金榥(一八九六~一九七八) 등이 이 일에 異議를 제기함으로써 是非가 발생하였다. 이 자료의 기록에 의하면, 金宇顒이 지었던 南冥行狀의 내용을 두고, 南冥의 본손 昌寧曺氏측에서는 그것이 未備하다는 판단하에 南冥, 金宇顒의 文集을 重刊할 때마다 改正을 요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金宇顒 側에서는 先祖의 文字를 경솔하게 修正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曺垣淳(一八五○~一九○三, 號 復菴, 昌寧人)의 아들 曺庸相이 각종 문헌을 들어 金宇顒 所撰 南冥行狀의 未備함을 지적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다. 德川書院을 중심으로 한 南冥의 본손들은 이러한 연유 때문에, 金宇顒 後孫이 昌寧曺氏에 대해 사감을 가지고 『德川師友淵源錄』의 편찬까지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김황을 비롯한 의성김씨측은 淵源錄에 鄭逑와 金宇顒의 등재순서(序次)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 金宇顒(一五四○~一六○三)과 鄭逑(一五四三~一六二○)는 退溪와 南冥의 兩 門下에 들어갔지만 나이로는 金宇顆이 三年 年長이다. 그리고 실제 退溪의 弟子錄인 『陶山及門諸賢錄』에도 金宇顒이 먼저 載錄되어 있다. 그리고 南冥門下에 及門한 순서에 있어서도 〈南冥編年〉에 의하면 金宇顒이 一五六三年, 鄭逑가 一五六六年으로 三年이 빠르다. 이같은 배경으로 말미암아 金榥을 主論者로 한 金宇顒 後孫側은 龍江書院(東岡 金宇顒 配享)을 중심으로 하여 반대의지를 천명하고, 나아가 金宇顒의 單子를 投單하기에까지 이르렀다. 寒岡, 東間閔의 이른바 兩岡是非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一○年에 걸쳐 지속되었던 것이다.
『德川書院淵源錄顚末』은 본 是非와 관련된 각종 通文, 簡札 등을 年代順으로 收錄하고 있다. 南冥에 淵源하는 家門들이 이 是非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통문 또는 간찰을 통해 표명하였다. 이외 晉州隣近은 물론 星州의 會淵書院(寒岡 鄭逑 配享), 安東의 臨川書院(鶴峯 金誠一 配享) 등지에서 발급된 通文들도 다수 收錄되어 있다. 이 중에는 鄭逑側 내지는 昌寧曺氏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과 金宇顒 側의 입장을 응호하는 것이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收錄되어 있다. 이 외에도 本 是非와 관련된 문서로 〈德川書院辨誣通文〉, 〈應辨辨〉, 〈單子〉등이 덕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내용이 〈德川師友淵源錄顚末〉과 거의 동일하여 이 문서만 收錄하였다. 이 문서는 一九五七年~一九六五年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어서 古文書로 취급하기는 다소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德川師友淵源錄』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收錄하게 되었음을 아울러 밝혀둔다.
(三) 山海淵源錄
○ 編纂年代:一八○○년대 말~一九○○년대 초
○ 表題: 山海淵源錄(復菴所撰)
○ 內容: 曺垣淳(一八五○~一九○三, 復菴)에 의해 편찬된 南冥淵源錄이다. 표지에 「復菴所撰」이라 표기되어 있어 曺垣淳의 親筆本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加筆과 修正의 흔적이 뚜렷한 것을 볼 때 草橋本에 해당한다. 연대가 정확하지 않지만 曺垣淳 생졸년을 고려할 때 一八○○년대 말~一九○○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淵源錄은 「道統源流」,「知舊門人」의 단순한 체제 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從遊〉, 〈門人〉,〈私淑〉등의 세부항목을 설정하고 있는 『德川師友淵源錄』, 이나 『山海師友淵源錄』과는 다소 대비되는 체제라 할 수 있다. 「知舊門人」에는 趙光祖를, 비롯해 收錄人物에 대해 모두 略傳을 달고 있다. 단 號, 官啣을 쓰지 않고 姓諱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山海師友淵源錄』및 『德川師友淵源錄』과 다른 점이다.
四. 其他文書
(一) 昌寧曺氏世譜
○ 作成年代: 一八六四~一九○七
○ 內容: 昌寧曺氏 南冥後孫의 世譜이다. 德川書院 所藏文書 중 譜系類로는 유일하다. 一八六四年~一九○七年 사이에 作成된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加筆한 흔적도 간흑 있다. 그 근거는 一八八三年(高宗 二○, 癸未)을 설명할 경우 「今上癸未」 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作成年代는 高宗年間인 一八六四年에서 一九○七年으로 추정된다. 本 世譜는 南冥의 長子系列이 아니고 第三子인 曺次의 次孫 曺景의 家系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收錄範圍는 모두 三六世에 이른다. 一世에서 二○世 까지는 諱와 官職만 간략하게 기록하였고 구체적인 서술은 南冥의 高祖(諱 殷)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서술의 내용은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字, 官職 生卒年, 墓所位置, 配位 등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收錄된 家系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서술의 내용도 다소 소략한 면이 있지만 德川書院을 중심으로 한 南冥의 本孫을 파악하는 데에는 중요한 자료로 파악된다.
한편, 德川書院에 소장된 것은 아니지만 南冥 曺植家門의 계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파악되는 『昌寧曺氏族譜世係』가 단권으로 전하는데 현재 小川書堂에 소장되어 있다. 이 族譜는 南冥의 九代祖인 曹茂松系統의 族譜로서 南冥의 家系는 물론 曺敏修(?~一三九○)家系, 曺信忠家系 등 광범위하게 收錄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 南冥의 家系이다. 南冥의 家系는 曺松茂의 長子系列이 아니므로 系統上 後述이 당연하지만 본 世係가 南冥後孫에 의해 作成(筆寫)된 이유로 해서 이 가계가 먼저 收錄, 記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族譜는 서술방식에 있어 直系에 대한 서술은 餘他 族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外孫系列 즉, 外派에 대한 기술이 상세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族譜에서 南冥 曺植系列의 外派로서 詳述되어 있는 대표적 家系로서 領南地域에서는 金宇顒, 李公亮(全義人 南冥妹弟), 郭再祐(一五五二~一六一七, 玄風人, 南冥外孫壻), 趙宗道(一五三七~一五九七, 大笑軒, 咸安人, 李公亮孫壻), 趙瑗(一五四四年~?, 林川人, 李公亮孫壻) 家系를, 近畿地域에서는 鄭孝俊(一五七七年~一六六五年, 海州人, 李公亮曾孫壻)家系를 들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上記 인물들의 대부분이 南冥의 門人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 族譜를 통하여 새로이 알 수 있는 사항은 이들이 南冥과 학문적인 유대를 가지기 이전에 이미 血緣的으로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南冥의 學問도 外派를 통해 傳承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상정해 볼 수 있다. 南冥 曺植의 直系後孫이 여타 儒賢의 本孫에 비해 다소 쇠락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따라서 南冥 曺植家系의 婚姻關係와 血緣的인 背景, 그리고 學問의 授受關係를 이해함에 있어 이러한 世係記錄에 대한 이해는 불가피한 실정이다.
(二) 座案
○ 作成年代:一八一一(純祖一一, 嘉慶一六 辛未)
○ 內容: 昌寧曺氏 一門에 의해서 조직된 義契의 契員名單이다. 題名된 인물은 모두 五五名이다. 이중에는 南冥의 五世 奉祀孫으로 繼後한 曺希三의 生家 인물들로 다수 收錄되어 있다. 本案의 末尾에는 曺氏義契에서 南冥의 墓祀와 祭享을 위하여 畓 一三卜 一束을 買入하는 내용의 明文 一件이 첨부되어 있다. (嘉慶一六 辛未(一八一一, 純祖一一) 明文의 字間에는 乙酉年(一八二五)에 본 明文內의 買入田畓을 士林의 公議에 따라 다른 곳의 논과 相換한다는 내용이 正書되어 있다. 이 기록은 明文이 만들어진 一五年 후에 加筆된 것이다.
산천재에는 〈山天齋齋任案〉,〈臨齋錄〉,〈上書〉,〈完文〉,〈稟目〉,〈牌旨〉,〈節目〉,〈山天齋文簿〉,〈山天齋考案〉,〈垈稅證書〉,〈(小作)契約書〉 등 山天齋의 運營, 특히 경제관계 고문서가 많다. 이 외에 享禮와 관련된 〈笏記〉와 詩文을 모은 〈山天齋唱酬錄〉이 있다.
산천재는 원래 남명이 講學하던 곳으로서 享祝와 더불어 강학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山天齋任案〉에 齋長과 有司와 더불어 講長을 두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천재는 官과의 일정한 협조, 또는 지원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晉州牧使가 山長(齋長)에 취임하고 있고 山天齋의 중건 등에 관의 도움을 받는 것 등이 그 예이다.
〈臨齋錄〉은 서원의 尋院錄에 해당하는 문서로서 산천재에 출입한 인사들의 名單과 日字가 명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본 손은 물론 柳厚祚, 李震相, 張錫藎 등의 嶺南出身의 儒學者 및 진주인근의 지방관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完文〉을 통해서 볼때 山天齋는 官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관에서 儒生講習之資로 일정량의 收稅權을 부여한 것이 그 단적인 실례이다. 아울러 〈興學錢下記〉에 의하면 禮曹에서 興學錢의 명목으로 三○兩을 지급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上書〉와 〈稟目〉의 기록에 의하면 당초 德川書院의 收稅 대상이던 白雲洞의 陶器匠이 書院毀撤(一八七○年) 이후 산천재에서 收稅를 거부하자 상호 마찰을 빚었다. 上書의 내용은 이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것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관의 題辭의 기록을 볼때 거의 山天齋의 요구가 관철되고 있다. 그리고 〈稟目〉에 따르면 산천재는 중건 당시 禮曹의 完文에 의해 근방의 市廛에 대해 收稅權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禮曹, 議政府, 巡營 등에서 민폐를 우려하자 收稅權을 일시 포기하였으나 이후 오히려 奴輩들이 이를 둘러싸고 작간하는 폐단이 있자 다시 還屬하였다.〈稟目〉중에는 德川書院의 훼철 이후 산천재의 모든 일(凡百事)은 本孫을 배제하고 士林에서 주관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에 와서 산천재의 운영체제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垈稅證書〉와 〈小作契約書〉는 산천재의 재산상황과 관리형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제시대에 작성된 문서이다. 〈垈稅證書〉는 산천재 소유 토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垈地稅納付證明書로서 地主의 명의는 산천재의 時任으로 되어있다. 〈小作契約書〉는 시기적으로 一九三三年에서 一九四○年까지의 자료로서 당시 산천재의 士地規模와 小作制度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본 〈小作契約書〉도 〈垈稅證書〉와 마찬가지로 地主는 산천재의 時任이다.
〈笏記〉는 山天齋釋菜時의 笏記로서 執事榜과 祝文이 부기되어 있다. 부기된 執事榜을 통해서 볼때 석채시의 獻酌은 三獻이 아닌 單獻이다.
〈山天齋唱酬錄〉은 儒林들이 山天齋에 회동하여 唱酬和答한 詩軸으로 一九三一年 기록이다. 비교적 근대문서 이기는 하나 당시 山天齋를 출입한 인물의 구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一. 山天齋任案
(一) 出天齋任案(一)
○ 收錄年代: 一八二四(純祖二四, 甲申), 一八三二(순조三二, 壬辰), 一八四○(헌종六, 庚子), 一八四四(헌종一○, 甲辰)
○ 內容: 一八二四年에 쓰여진 李志容의 序文이 있다. 이 서문에 의하면 본 齋任案이 作成된 것은 一八一七年 山天齋를 중건찬 후 七年만인 一八二四年이다. 本案에는 一八二四年에 齋長을 지낸 李志容을 위시 一八四四年까지 모두 七人의 齋長이 收錄되어 있다. 말미에는 山天齋 重建時 및 本 任案을 作成할 당시에 간여한 人士와 그들의 所任이 기록되어 있다.(齋號篆字, 楷字, 重建記, 任案序, 記實, 柱書, 營題, 禮曹題 등의 項目下에 각기 人名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에는 曺尙治(昌寧人, 號 靜齋, 端宗廟庭配享)의 후손들이 다수 기재되어 있다. 이들은 昌寧曺氏이기는 하나 南冥과는 가계가 다르며
당색도 소론계열로 파악된다. 이외 지역적으로 居京의 인사들이 收錄되어 있는데, 당시 南冥後孫과 이들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收錄인물 가운데 파악 가능한 인물은 아래와 같다.
*李志容(一七五三~一八三一): 星州人, 掌令, 李俊耈 七世孫
*曺龍玩: 縣監 南冥의 七世孫
*趙鍾永(一七七一~一八二九): 豊壤人, 判書, 趙守翼 七世孫
*曺允亨(一七二五~一七九九): 昌寧人, 判書, 曺尙治後孫, 曺文秀 六世孫
*洪百淳: 南陽人, 洪友敬 六世孫
(二) 山天齋任案(二)
○ 收錄年代: 一八七七(高宗一四, 丁丑)~一九二七(丁卯)
○ 內容: 山天齋의 齋任案에는 講長, 山長, 有司을 포함
모두 一○二名이 收錄되어 있다. 一八八三年(癸未)에 지은 成采奎의 序文에는 曺錫瓚(縣監)의 주도하에 書院毀撤 이전의 德川書院의 資産 및 書院 所管의 市廛 중 鄕校나 官房에 移屬된 것을 議政府와 禮曹에 呈狀하여 山天齋로 환속, 이를 바탕으로 學田을 두어 講學之資로 삼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아울러 講長, 山長, 齋有司의 체제도 구비되었으며 道會 二회, 講會 二回를 주최한 내용이 기록되어 었다. 山長과 有司는 山天齋의 運營을 주관했으며, 講長은 講學 기능을 위한 象徵的인 존재로서 有名 博識한 人士가 초빙된 것으로 판단된다. 山長에는 당시의 晉州牧使가 재직한 경우가 있으며 講長을 지낸
인물은 李尙輔, 河弘運, 郭鍾錫(一八四六~一九一九, 玄風人, 傘宇) 등 모두 三명으로 나타난다.
二. 臨齋錄
○ 收錄年代: 一八三三(純祖三三, 癸巳)~一八九七(憲宗二三, 丁酉)
○ 內容: 山天齋를 拜謁, 留宿한 인사의 名單. 柳厚祚(一七九八~一八七六) 등 총 四二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기적으로 一八三三年~八四五年과 一八八○年~一八九七年으로 구분된다. 收錄된 인물의 성격은 대체로 丹城, 山淸, 高靈, 咸陽 등 晉州 隣近의 守令이 대부분이며, 이외 安東과 尙州 및 居京人士도 일부 收錄되어 있다. 收錄된 대표적인 인물은 아래와 같다.
*李志容(一七五三~一八三一):〈山天齋任案〉참조.
*柳厚祚(一七九八~一八七六): 豊山人, 柳成龍後孫, 居尙州.
*李震相(一八一八~一八八六): 星州人, 寒洲.
*張錫盡(一八四一~一九二三): 安東人, 承旨, 居漆谷.
*金陽淳(一七七六~一八四○): 安東人, 觀察使, 金尙容 七世孫, 居京.
三. 上書
① 上書
○ 作成年代: 一八八一(高宗一八, 辛巳)
○ 內容: 德川書院의 收稅對象이던 白雲洞의 鋾器匠이 書院毀撤 以後 山天齋에서의 收稅를 거부하자 이에 대한 是正을 요구하는 내용의 上書이다.
② 上書
○ 作成年代: 一八八四(高宗二一, 甲申)
○ 內容: 위 ①의 上書와 동일하다. 참고적으로 郭鍾錫(一八四六~一九一九)이 본 上書에 聯名하였다.
③ 上書
○ 作成年代: 一八九七(光武元年, 丁酉)
○ 內容: 위 ②의 上書와 동일하다. 단 上書 ①과 ②는 晉州府使에 上書한 것이고 ③은 觀察使에 上書한 것이다.
四. 完文
① 完文
○ 作成年代: 一八二六(純祖二六, 丙戌)
○ 形式: 完文과 거기에 따른 山天齋齋直案과 守護軍案이 첨부되어 있다.
○ 內容: 官에서 山天齋齋直에 五人, 守護軍에 一○人을 差定하며 이들에게는 일체의 軍役과 雜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의 完文이다. 첨부된 〈山天齋齋直案〉에는 金時宗을 포함 五人,〈山天齋守護軍案〉에는 金宗伊를 포함 一○人이 기록되어 있다. 完文의 내용중에는 一七七七年에 山天齋가 중건될 당시 監營에서 五十石, 晉州牧使가 租 三十石 및 役丁을 지원한 내용 등 隣近官廳, 本孫, 士林의 共助 현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② 完文
○ 作成年代:一八二九(純祖 二九, 己丑)
③ 完文
○ 作成年代:辛巳(未詳)
○ 內容: 儒生講習之資로 일정량의 財貨를 收納할 권리를 부여한 내용의 完文이다.
五.山天齋募軍案
○ 作成年代: 一八四六(憲宗一二, 丙午)
○ 內容: 本案은 山天齋의 齋直과 守護軍에 差定된 인원
의 명단으로 官에서 발급한 문서이다. 山天齋齋直案과 山天齋守護軍案을 합하여 한 건이 된다. 모두 二회분인데 一회분은 前記 丙午年 기록이며, 二회분은 年代가 미상이다. 본 文書는 당초 完文에 첨부된 것인데 完文은 없고 본 山天齋齋軍案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六. 稟目
① 稟目
○ 作成年代: 一八八八(高宗二五, 戊子)
○ 內容: 德川書院毀撤 이후 山天齋의 모든 일은 本孫의 差定을 배제하고 士林에서 주관하겠다는 내용의 稟目이다.
② 稟目
○ 作成年代: 一八三六(憲宗二, 丙申)
○ 內容: 山天齋 西便에 위치하고 있던 市場의 市廛과 廚廚는 원래 山天齋의 所用品을 조달하는 곳으로 政府, 禮曹, 巡營에서 民弊를 우려하자 侵責하는 폐단을 중단하였으나 이후 奴輩들이 오히려 이를 둘러싸고 作奸하는 폐단이 있자 이에 山天齋에서 前記 市廛과 疱廚의, 還屬을 요구하는 내용의 稟目이다.
③ 稟目
○ 作成年代: 一八三六(憲宗二, 丙申)
④ 稟目
○ 作成年代: 一八三六(憲宗二, 丙申)
○ 內容: 원래 山天齋 소속으로 春秋에 甕器를 납부하던
白雲洞 店村에서 甕器의 上納을 거부하자 是正을 요망하는 내용의 稟目이다.
七. 節目
○ 作成年代: 一八四五(憲宗一一, 乙巳)
○ 內容: 구체적인 명칭은 「日新亭利貞門重建所節目」이다. 節目의 내용으로는 첫째, 看事人 외에는 費用을 스스로 마련할 것, 둘째, 飯酒를 금할 것. 세째, 監事人은 番을 나누어 檢事할 것. 등 세 節目으로 되어 있다
八. 牌旨
○ 作成年代: 一八八四(高宗二一, 甲申)
○ 內容: 例納錢 四五兩을 前例에 의거 미리 山天齋에 납부한다는 내용의 牌旨이다.
九. 笏記
○ 作成年代: 未詳
○: 內容: 山天齋釋菜時의 笏記이다. 笏記 외에도 執事榜, 祝文이 收錄되어 있다.
一○. 通文
○ 通文
○ 作成年代:一九○○(庚子)
○ 發給: 東萊鄭氏門中(鄭惟吉家門)
○ 受給: 山天齋
○ 內容: 鋪淵臺는 勒奪에 대해 調整을 요구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鋪淵臺는 원래 居昌愼氏 愼文彬(一五一九~?, 鄭惟吉의 姉兄)의 亭子로 鄭惟吉(一五一五~一五八八, 號 林塘, 東萊人)과 南冥의 詩額이 걸려 있다. 三嘉의 都載均 등이 이를 勒奪하려 하자 先代의 世誼와 관련 鄭惟吉의 후손이 山天齋에 通文하여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聯名된 인물의 官職名이 光武官制인 主事, 度支局長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때 그 年代는 一九○○年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②通文
○ 作成年代: 一九一七(丁巳, 孔紀 二四六八)
○ 發給: 道統祠
○ 受給: 山天齋
○ 內容: 명칭은 「輪告」로 되어있다. 道統祠는 晉州 硏山에 소재하며 文成公 安珦을 察享하였다. 孔子 後孫 孔少霑의 初喪에 따른 訃音 및 察文 服次 등이 收錄되어 있다.
③ 通文
○ 作成年代: 一九一九(己未)
○ 發給: 榮川鄕校
○ 受給: 德山書院
○ 內容: 張文弼의 妻인 安東金氏의 烈行에 대해 포창을 촉구하는 通文이다. 光武官制인 「議官」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一九一七年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安東金氏는 三塘 金瑛(一四七五~?,安東人)의 一八世孫이며 張文弼은 果齋 張壽禧(一五一六~一五八六, 仁同人)의 一一세손이다.
④ 通文
○ 作成年代: 一九二○(庚申)
○ 發給: 黃江亭
○ 受給: 山天齋
○ 內容: 李希顔(一五○四~一五五九, 星州人, 南冥從遊)과 金馹遜(一四六四~一四九八, 金海人)後孫間의 是非에 관한 通文이다.
⑤通文
○ 作成年代: 一九二一(辛酉)
○ 發給: 山天齋
○ 受給: 淵源各家
○ 內容: 敬義堂의 중건 이후 講長, 直月 등의 差任을 위해 山天齋에 會同해 줄 것을 요망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본 通文은 발급주체가 山天齋로서 발통되지 못한 것이다. 내용중「國制已關」이라는 말은 곧 高宗의 喪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할 때 一九二一年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一一. 興學錢下記
○ 收錄年代: 一八七八(高宗一五, 戊寅)~一八八○(高宗一七, 庚辰)
○ 表題: 興學錢下記(戊寅)
○ 內容: 구체적인 명칭은 〈興學錢推尋下記〉이다. 禮曹完文에 의해 마련된 興學錢 三○兩을 推尋하는 三年間의 과정에서 든 비용을 기록한 文書이다.
一二. 山天齋考案
○ 收錄年代: 一八五七(哲宗八, 丁巳)
○ 內容: 山天齋 所有 土地의 小作에 대한 기록이다.
一三. 山天齋文簿
○ 收錄年代: 一九二九(己巳)~一九三六(丙子)
○ 推定根據:본 문서의 山天齋任인 曺悳相을 근거로 추정된다.
○ 內容: 山天齋의 用下記이다.
一四. 垈稅證書
○ 作成年代: 一九三一(大正六)
○ 內容: 山天齋所有 垈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垈地稅納付證書로 명칭은 垈稅證書이며 九件이 收錄되어 있다. 본 垈稅證書에서는 山天齋의 時任이 地主의 자격으로 계약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一五. (小作)契約書
○ 收錄年代: 一九三三~一九四○
○ 內容: 山天齋所有 土地의 小作契約書(一一件)와 土地賣渡契約書(一件)이다. 本 小作契約書에는 地主, 小作人, 保證人은 물론 土地所在地, 地番, 斗落, 小作期間, 小作料가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小作契約은 당시의 山川在任이 地主의 자격으로 계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土地賣渡契約書에는 買賣人, 保證人, 土地所在地, 面積등이 기록되어 있다.
一六. 山大齋唱酬錄
○ 作成年代: 一九三一(辛未)
○ 內容: 儒林들이 山天齋에 會同하여 唱酬和答한 詩軸이다. 辛未年(一九三一)에 쓰여진 李章漢의 序文이 있다. 년대는 河禹善(一八九四~一九七五, 晉州人, 謙齋 河弘度後孫, 號澹軒)의 生卒年에 근거하여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