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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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淳佑(本院 敎授),安承俊(本院 資料調査室 專門委員),金鶴洙(國學事業 硏究員)
본원 국학진흥연구사업팀에 의해 합천지역의 고문서를 조사, 수집한 것은 1993년 8월이었다. 당시 조사에는 허창무·정순우·박병련 본원 교수, 오이환(경상대)·정경주(경성대) 교수, 그리고 안승준을 비롯한 국학담당 연구원들이 참여하였다. 기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2개반으로 나누어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하기에 앞서 당시 변종철 문화원장을 비롯, 권병석(합천향교 전교) 이인갑(郡史 편찬위원)·박상기(高靈朴氏 无悶堂 朴絪後孫) 선생 등이 참석하여 조사대상 선정 및 조사방법과 절차, 그리고 합천지방 문화전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쌍방간의 협조사항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회의 후 조사지로 선정된 곳이 老柏書舍(草溪鄭氏), 三嘉鄕校, 坡平尹氏宗家(윤탁장군 후손: 합천군 가회면 구평), 龍淵書院(碧寒亭:高靈朴氏) 陜川鄕校 萊菴鄭仁弘門家(瑞山鄭氏) 등이었다. 위의 모든 지역을 순방하면서 조사·수집작업을 벌였으나 老柏書舍 및 坡平尹氏宗家 소장자료는 수집해 오지 못하였다. 노백서사의 경우 당시 조사한 곳 가운데서는 가장 많은 고문서와 전적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끝내 대여해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 자리를 빌어 합천향교 권병석 전교님을 비롯한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陜川鄕校는 당초 1419년(世宗 元年) 郡의 북쪽 3리에 창건하였다가 후일에 郡守 黃麟이 鎭山의 기슭 1里쯤되는 곳에 이건하였고, 이후 여타의 鄕校와 마찬가지로 4聖, 10哲, 宋朝 6賢 그리고 동방의 儒賢들을 봉안하고 관내의 유생들을 교육하는 陜川地方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후 19세기 후반 陜川地方의 水害로 인하여 소실되는 난관을 겪다가 1891년(高宗 28) 당시 군수 任穉宰가 향내의 유생들과 협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후 누차에 걸친 重·補修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陜川郡 冶爐面 九汀里 3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합천은 원래 新羅의 大良州로서 景德王때 江陽郡으로 개칭되었으며, 高麗 때는 顯宗이 大良院君으로서 卽位하고 또 孝肅王后의 本鄕이라는 이유로 해서 知陜州事가 파견되는 지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朝鮮時代에 이르러서는 太宗때 陜川郡으로 개칭하고 晋州鎭管에 소속되었다. 이후 1629년(仁祖 7) 逆獄罪人의 胎生地라는 이유 때문에 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44년(仁祖 22) 다시 郡으로 還稱된 바 있다. 大良, 江陽, 陜州는 모두 합천의 古名이며, 이외 고명으로는 大耶가 있다.
陜川邑誌에 의하면 19세기 중엽 합천은 戶口 4,772호, 人口가 25,474명에 달하였다. 군 단위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守令을 위시한 관속의 현황을 살펴보면, 地方官인 郡守는 蔭職 4品官이며 그 아래로 교도직인 訓導가 있었다. 그리고 儒品이라하여 鄕校 都有司 1인, 齋任 2인, 敎生 50인이며, 鄕廳에는 座首 1인에 別監은 2인이다. 문서가 집중되는 시점의 수령의 명단과 그 재임기간을 圖示化하면 다음과 같다.

守令名

在任期間

守令名

在任期間

守令名

在任期間

守令名

在任期間

李 潚

1598-1600

兪好仁

1652-1654

李挺皙

1713-1716

金命淳

1775-1779

李 馪

1600-1602

元 簋

1654-1655

尹得仁

1716-1717

李學源

1779-1780

金虎秀

1602-1603

柳 潝

1656-1656

李 涵

1717-1719

李德鉉

1780-1780

李成吉

1604-1605

申 瀚

1657-1658

李世龜

1719-1721

李顯發

1780-1780

金繼燾

1606-1608

金 穀

1658-1659

朴泰遠

1721-1722

沈興永

1781-1783

崔東望

1606-1606

柳 炫

1659-1662

鄭必寧

1722-1724

朴仁榮

1784-1787

呂大老

1606-1608

李善基

1662-1666

李萬維

1724-1725

李彦植

1787-1789

朴明

1608-1610

洪處深

1666-1669

趙奎彬

1725-1726

許 霔

1789-1790

金昌一

1610-1612

李惟馨

1669-1670

金鼎運

1726-1727

李義逸

1790-1794

尹 鞏

1612-1613

任允錫

1670-1671

李廷弼

1728-1728

黃運祚

1794-1797

洪 遇

1613-1613

尹弼殷

1672-1674

吳命瑞

1731-1733

李榮運

1797-1800

李直彦

1614-1616

李 悅

1674-1676

李秉泰

1728-1731

沈誠之

1800-1802

洪純懿

1616-1621

任 暎

1676-1678

趙明震

1731-1733

李 潢

1802-1804

曺鸞瑞

1621-1623

趙持恒

1678-1683

具鼎勳

1734-1738

金命淵

1804-1806

鄭 皓

1623-1624

趙泰來

1683-1684

趙鳳命

1739-1740

鄭冕綏

1806-1806

許 涵

1624-1625

趙景望

1684-1686

徐仁修

1740-1745

安命遠

1806-1808

全以性

1626-1627

鄭載大

1687-1688

金始煥

1745-1748

兪漢寔

1808-1808

李厚根

1627-1629

沈 澂

1688-1689

任安世

1748-1749

安命遠

1808-1810

李敏樹

1629-1629

洪柱震

1689-1691

李存中

1749-1750

趙鎭翼

1810-1812

韓撝謙

1630-1630

徐敬祖

1691-1696

李珪輔

1750-1752

鄭昌耆

1812-1816

鄭 沇

1630-1631

金 戩

1696-1696

洪益彬

1752-1753

徐鳳轉

1816-1820

柳 袗

1631-1633

洪萬選

1697-1702

李復祥

1753-1755

鄭是容

1820-1822

宋錫胤

1633-1635

鄭復先

1702-1705

李昌元

1755-1755

李魯俊

1822-1823

金孝建

1635-1639

鄭道徵

1699-1700

徐命善

? - ?

鄭基直

1823-1826

李道長

1639-1639

金 洵

1697-1702

申大孫

1757-1759

宋啓洙

1826-1827

成以性

1640-1644

沈 潗

1705-1706

沈 鏞

1762-1764

朴宗濂

1827-1829

曺希仁

1644-1646

李弘廷

1706-1709

沈翔雲

1764-1768

申在順

1829-1833

金壽昌

1646-1649

申 泳

1709-1711

洪章漢

1768-1770

洪明燮

1833-1833

鄭 集

1650-1652

柳 綄

1712-1712

金相龜

1770-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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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南道輿誌集成󰡕〈陜川邑誌>, 慶尙南道誌 編纂委員會,1963 참조〉
합천의 대표적인 姓氏로는 李氏, 方氏, 宋氏, 朴氏, 尹氏, 鄭氏, 高氏, 姜氏, 柳氏, 周氏, 文氏 등 24개 성씨를 들 수 있는데, 이 중 조선시대에 번창한 가문으로는 瑞山鄭氏, 高靈朴氏, 密陽朴氏, 尙州周氏, 坡平尹氏, 晋州姜氏, 南平文氏, 文化柳氏, 義城金氏, 昌寧曺氏, 安東權氏 등을 꼽을 수 있다. 鄕校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鄕案에 등재된 인사들도 대부분 위 가문의 출신들이 많다.
陜川은 仁祖反正 이후 鄭仁弘(1535-1623)의 몰락과 더불어 逆鄕으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英祖 戊申亂(1728년) 당시에도 합천 인사로서 亂에 가담한 인사가 다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 逆鄕으로 指目되기도 했다. 따라서 정치적인 탄압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는데, 仁祖年間 郡에서 縣으로 강하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천지역에도 儒風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면면히 계승되면서 상당수의 儒學者가 배출되었다. 姜大遂, 朴絪, 文東道, 曺應仁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을 享祀하는 書院, 祠宇가 세워졌는데, 그 수 또한 적지 않다. 陜川邑誌를 토대로 陜川에 소재한 院宇의 동향을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

書院名稱

創 建 年 代

配 享 人 物

賜額年代

伊淵書院

未詳

主享:金宏弼.鄭汝昌

1660년(顯宗 1)

華巖書院

未詳

主享:朴紹

1727년(英祖 3)

新川書院

1624年(仁祖 2)

主享: 河演.河友明 追享:河渾

未賜額

龍淵書院

1660年(顯宗 1)

主享:朴絪 追享:文東道

未賜額

道淵書院

1707年(肅宗 33)

主享:周世鵬 追享:周怡. 姜仁壽.

未賜額

明谷書院

肅宗年間

主享:裵一長 追享:沈日三

未賜額

淸川書院

正祖年間

主享:李秉淳

未賜額

會山書院

1766年(英祖 42)

幷享:朴良佐. 朴而文.李重茂

未賜額

龍崗書院

未詳

幷享: 金斗南.金道南

未賜額

魯峰書院

未詳

主享:柳蕃

未賜額

伊陽書院

未詳

主享:金紐.柳世勛

未賜額

河南書院

未詳

主享:文景虎

未賜額

(1) 西齋齋長案
ㅇ 연대 :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 己巳, 癸酉, 乙亥, 丙子, 戊寅, 己卯, 辛巳, 壬午, 癸未, 乙酉, 丙戌, 庚寅, 癸巳.
ㅇ 내용 : 表題의 ‘癸亥’는 이 案을 작성하기 시작한 시기를 말하나, 정확한 작성시기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성명만 기록하고 있을 뿐 시기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많지 않다. 내용은 癸亥 - 癸巳까지 18년 동안 書齋齋長을 역임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합천향교 西齋는 東齋와 구분되어 주로 中人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別庫田畓’이라는 별도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사항은 田畓都錄類에서 구체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2) 鄕校校生案
ㅇ 연대: 癸巳(1833년 ?) 壬寅(1842년 ?)
ㅇ 내용: 명칭과 달리 校生案이라기 보다는 校任案으로 봄이 타당할 듯하며 내용은 크게 ‘齋長秩’과 ‘執事秩’로 나누어 진다. 매장마다 官印이 찍혀있고 인명 아래에 거주지가 부기되어 있다. 말미에, “壬寅六月十五日齋任河‘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본안의 내용은 癸巳年에 처음 작성된 이래 壬寅年까지 10년동안 追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각 인물과 그들의 재임 연대를 정확하게 연결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밝혀둔다. 문서 말미에는 ‘丙申年 正月 日’의 表題하에 각처에 부조한 사실이 부기되어 있는데, 本案과는 별반 관계가 없다.
(3) 校生案
ㅇ 연대 : 壬午(1882년 ?) 丙戌(1886 ?)
ㅇ 내용 : 陜川鄕校의 齋長과 執事를 지낸 인물들의 명단이다. 表題上으로는 ‘校生案 丙戌十一月日 附丁亥十一月日’로 되어 있으나 校生案이 아닌 執事, 齋長案이며 연대도 壬午年, 丙戌年 兩年의 기록일 뿐 丁亥年 기록은 없다.
(4) 入學錄
ㅇ 연대 : 1623년(仁祖 1, 癸亥)-1645년(仁祖 23, 乙酉)
ㅇ 내용 : 陜川鄕校 入學生들의 名單이다. 16個年度에 걸쳐 20回分이 수록되어 있다. 1623년-1645년까지의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23년 正月, 1623년 10月, 1624년 7月, 1627년 2月, 1628년 10月, 1629년 正月, 1630년 2月, 1630년 7月, 1631년 2月, 1631년 6月, 1632년 正月, 1632년 8月, 1635년 6月, 1638년 2月, 1639년 3月, 1640년 8月, 1641년 2月, 1643년 2月, 1644년 2月, 1645년 8月
(5) 入學錄
ㅇ 연대 : 1680년(肅宗 6, 庚申)-1764년(英祖 40, 甲申)
ㅇ 내용 : 모두 13個年度 19回分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해당 연도는 다음과 같다.
1680년(肅宗 6) 8월, 1682년(肅宗 8) 2월, 1683년(肅宗 9) 3월 , 1696년(肅宗 22) 3월, 1705년(肅宗 31) 7월, 1716년(肅宗 42) 8월, 1717년(肅宗 43) 正月, 2월, 4월, 12월, 1718년(肅宗 44) 2월·8월, 1721년(景宗 1) 8월·9월, 1726년(英祖 2) 正月, 1759년(英祖 35) 2월·8월, 1736년(英祖 36) 8월, 1764년(英祖 40) 正月
(6) 入學錄
ㅇ 연대 : 1716년(肅宗 42, 丙申), 1721년(景宗 1, 辛丑) 6월, 1724년(景宗 4, 甲辰) 6월, 1733년(英祖 9, 癸丑) 7월.
ㅇ 내용 : 1716년, 1721년, 1724년, 1733년 4개년도 4회분에 해당하는 陜川鄕校 入學生의 명단이다. 이 중 1716年度分은 말미에 “丙申春秋案謄書”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당시 原本이 아니고 후대에 베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1) 大祭執事案
ㅇ 연대 : 1649년(仁祖27, 己丑)-1680년(肅宗6, 庚申)
ㅇ 내용 : 大祭는 곧 釋奠大祭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곧 음력 2월과 8월의 初丁에 지내는 享祀를 말한다. 獻官, 執事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당시 각 인물들의 所管事를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移居 및 改名與否를 간단하게 부기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 大祭執事案의 수록연대는 1650년에서 1680년까지 약 30년 동안이며 수록회수는 모두 20회분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1649년(仁祖 27, 己丑)
1650년(孝宗 1, 庚寅)
1652년(孝宗 3, 壬辰)
1653년(孝宗 4, 癸巳)
1656년(孝宗 7, 丙申)
1661년(顯宗 2, 辛丑)
1662년(顯宗 3, 壬寅)
1664년(顯宗 5, 甲辰)
1663년(顯宗 4, 癸卯)
1667년(顯宗 8, 丁未) 3月, 11月
1668년(顯宗 9, 戊申) 7月, 8月
1669년(顯宗 10, 己酉)
1677년(肅宗 3, 丁巳)
1678년(肅宗 4, 戊午) 2月, 6月
1679년(肅宗 5, 己未) 2月, 4月
1680년(肅宗 6, 庚申)
본 大祭執事案에는 姜大遂(1591-1658, 晋州人, 寒沙)의 兄 姜大適을 위시하여 南平文氏, 高靈朴氏, 文化柳氏, 星州裵氏, 義城金氏, 晋州河氏, 利川徐氏, 昌寧曺氏 등 합천 일대의 名門出身 인사들이 상당수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자료를 통해 합천향교의 운영주체, 그리고 합천지역의 지배사족의 면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2) 焚香案
ㅇ 연대 : 1884년(高宗 21, 甲申)-1895년(高宗 32, 乙未)
ㅇ 내용 : 향교에 內謁, 焚香한 인사의 명단이다. 焚香 인사의 대부분은 都有司, 掌議 등 校任이었다. 이외에도 現任 地方官, 前職官吏도 분향자로 참석하였다.
(3) 焚香案
ㅇ 연대 : 1896년(建陽 1, 丙申)-1898년(光武 2, 戊戌)
(4) 文廟釋奠笏記
ㅇ 연대: 未詳
ㅇ 내용: 釋奠祭를 행할 때 그 의례절차의 순서를 써 놓은 笏記.
(1) 鄕校田畓都錄
ㅇ 연대 : 1720(肅宗46, 庚子)-1818(純祖18 : 嘉慶23)
ㅇ 인물 :文某(都有司), 姜某, 曺某(掌議) 외
ㅇ 내용 : 향교소유 전답에 대하여 그 유실 방지 및 소유전답의 規模, 竝作 등 그 경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謄書해 둔 土地臺帳이다. 1720년 - 1818년에 걸쳐 100년 가까이 기록해 둔 것은 그동안 전답을 두고 소유권 분쟁 등이 있었을 때마다 해당 문건을 정리하여 두었기 때문이다. 문서 앞에는 庚子年(1720) 完議와 辛未年(1751) 完議, 이어 田畓都錄이 謄書되어 있다. 이후 1818년까지 등서된 양안과 이를 확인하는 守令의 手決이 문서화되어 있다. 본 문서의 작성목적에 대해서는 1720년(경자) 완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완의를 하는 것은, 校位田畓이 各里에 散在하며, 그 가운데 龍溪員 又(武)字畓 22卜 7束 12卜 8束곳과 密字(畓) 7作 모두 합해 74卜 9束곳이 본래 甲戌量案 당시 校位전답이었으나, 새로 量田을 할 때에 龍溪寺 僧徒들이 量任과 附和雷同하여 校位田을 僧徒의 것으로 삼았으니, 극히 근거가 없다. 이같은 사유로 (관아에) 보고하였다. (中略) 校中에 비록 토지대장을 謄書한 것이 있으나 任長者가 그 卜數의 多少를 알기 어렵고 또한 穀數가 얼마인지도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2건의 都錄을 만들어 두고, 1건은 上櫃에 비치하고 1건은 典穀 담당자에게 위임하여 秋收時 看審할때 해마다 (臺帳內의) 각기 전답 아래에 付紙케 한다. 전답의 陳田과 起耕田을 구분한 뒤에 某田, 某畓, 某人竝作, 某田, 某畓, 某田 某畓이 얼마로 나뉘어 졌는가를 일일이 付紙에 채워 기록하고, 明年에도 이와 같이 하고, 또 그 다음 해에도 이렇게하여 首任으로 하여금 쉽게 알게하여 見失되는 폐단이 없게한다면 幸甚함을 이길수 없겠다. 庚子(1720)(後略)”
(2) 鄕校田畓都錄
ㅇ 연대 : 1749년(英祖 25, 己巳)
ㅇ 인물 :都有司 朴龜文
ㅇ 내용 : 작성시기는 전답도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1749년에 작성되었다. 이것은 이후의 도록(6212, 3-3)에서 본 문서의 節目 등을 轉寫하고 더 첨가한데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表題는 복사상에는 나와있지 않으나 裏面에 ‘鄕校田畓都錄 己巳’라고 쓰인 題名부분이 나타나 있다. 주요내용은 都有司 朴龜文 當時에 만든 節目과 鄕校田畓都錄, 鄕校田畓春秋收稅錢記이다. 당시 전답의 양 및 收稅額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田 : 2결 54복 3속 - 量陳(量案上의 陳田)
1결 17복 1속 - 量後 川浦沙(量案이후 냇물이 범람, 사태를 당한 곳)
32복 1속 - 校代(鄕校 垈田)
1결 8복 4속 - 校奴婢垈
84복 9속 - 龍溪寺基
3결 6복 6속 - 收稅
2결 84복 1속 - 秋收半分(竝作)
11결 87복 5속(총 합계)
畓 : 74복 6속 - 量陳
74복 8속 - 量後 川浦沙
1결 29복 7속 - 校奴婢私受(校奴婢의 私耕田畓)
49복 1속 - 龍溪寺給(용계사에 급여한 것)
6복 9속 - 收稅
4결 87복 3속 - 秋收半分
8결 22부 4속
(3) 鄕校田畓都錄
ㅇ 年代 : 收錄 - 1749(己巳) -1785(乙巳)
成冊 - 1786(丙午)
ㅇ 인물 :文再慱
ㅇ 내용 : 문서 표지의 題名에는 ‘鄕校田畓節目’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기록을 처음 시작할 때의 題名이며, 이후 전답에 관한 모든 사항에 대해 기록하였다. 따라서 ‘都錄’이라 명명함이 내용상 맞을 듯하며, 文再慱의 서문에서도 都錄으로 명명하고 있다. 문서 첫 부분에 당시 校任을 맡았던 文再慱이 都錄을 만들어 둔 사유를 적어둔 서문이 있다. 그는 서문에서, 향교전답이 文蹟의 소홀한 관리, 校任과 校奴輩들의 作奸 등으로 인해 향교재정이 고갈되었으며, 이 같은 이유로 재산관리 차원에서 문서를 정리해 둔다고 하였다.
작성시기는 量案謄書·完議類 맨 첫부분에 1720년 경자년 完議 가운데 ‘龍溪員’ 즉 龍溪寺 승려들이 量任과 부화뇌동하여 교위전을 그들 소유로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문서의 節目에도 그에 대해 일일이 추심하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1720년 이후의 문서로서 그 첫 기록이 1749년(영조25, 기사)으로 추정된다. 그 마지막 기록은 을사년(1785)으로서 문재단이 서문을 쓰기 1년전이었다. 따라서 문재단은 기록된 모든 문서를 도록으로 엮은 뒤, 병오년(1786)에 서문을 붙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크게 竝作 또는 奴婢耕作, 등 농업경영 및 관리방법에 대한 사항을 적은 節目 부분, 그리고 각 지역의 토지대장과 해당 토지에 대한 지세수납현황 등을 적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각각의 문건에 대해서는 문서 첫 부분에 目錄을 만들어 두었다.
‘己巳年(1749)朴有司時節目’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私受田畓’부분이다. 사수전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된 것은 없으나, 대개 다음과 같은 토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향교에 服役하는 行首, 庫子, 奴婢 등의 경우 이들의 생계수단으로 향교에서 田畓을 경작하도록 주었는데, 이 전답이 곧 사수전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私家의 노비의 경우 私耕田畓을 받아 그들의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것에서도 대비가 가능하다. 사경전의 경우 면세토지로서 主家(소유주)사 생계유지수단으로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추정일 뿐 깊이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己巳節目에는 (A)‘私受畓田不得濫給事’, (B)‘私受田畓行首庫子外 奴婢則逐年換給事’ 2개 항목에 걸처 나오고 있다. (A)항에서는 사수전을 함부로 지급하는 폐단을, (B)항에서의 ‘奴婢逐年換給’이란 노비들에게 특정토지를 매년 경작케 할 경우 종당에는 그들의 사유화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때문에 노비의 사수전답을 매년 바꾸어가며 주라는 뜻이다.
한편 節目 가운데 향교전답에 대하여 賭地를 금하는 것은 이익률이 병작이나노비에 의하여 경작하는 것보다 적기 때문일 것이며, 양반에게는 竝作을 주지않게 한 것은 收稅의 어려움, 또는 作奸의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4) 鄕校別庫田畓目錄
ㅇ 연대 : 丙戌(1766 ?, 1826 ?)
ㅇ 인물 : 姜某(西齋齋長)
ㅇ 내용 : 別庫의 전답과 그 내역 적은 문서. 원래 작성시기인 병술년과 그 이후 변경사항을 적기한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변경사항 기재 가운데 ‘癸巳年 通淸時’라는 표현에서 작성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庶孼通淸은 영·정조대에 집중적으로 제기되는데, 특히 영조 48년(1772)에 通淸綸音이 내리고 학교에서도 序齒法을 적용케고 향안에도 이들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조치가 있었다. 따라서 위의 癸巳年은 1773년(英祖 49)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한 干支 이후인 純祖 癸巳年(1826)도 배제할 수 없다.
(5) 鄕校田畓節目
ㅇ 연대 : 1786年(正祖 10)
ㅇ 내용 : 表題에는 ‘鄕校田畓節目’이지만 節目을 비롯한 향교 전답관계 문선을 한데 묶은 都錄이다. 己巳年 朴都有司 在任時의 節目 가운데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一. 田畓의 각종 所出은 낱낱이 査問하여 遺漏가 없도록 한다.
一. 地稅나 鄕校의 奴婢 등은 사사로이 쓰지 못하도록 한다.
一. 私處의 畓田은 濫給하지 못하도록 한다.
一. 川浦와 沙陳處는 別途로 査考한다.
一. 鄕校田畓은 일체 賭地를 불허한다.
一. 鄕校田畓은 兩班에게는 幷作을 금한다.
(6) 鄕校都錄
ㅇ 연대: 1786년(正祖 10, 丙午)
ㅇ 인물: 都有司 文再慱
ㅇ 내용 : 校奴輩들이 향교의 位田과 位畓을 암암리에 賣買하고 사사로이 橫領하는 폐단이 노정되자 鄕校의 재산을 보다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된 일종의 財産臺帳이다. 이 鄕校都錄에는 鄕校所有 田畓의 所在, 面積, 稅入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陜川鄕校의 경제적 측면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都錄의 작성을 주관하고 아울러 序文을 쓴 당시 都有司 文再博은 향교 서책을 확충하는데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본서의 祭服書冊幷附記 참조)
(7) 鄕校春秋等地稅捧上都錄
ㅇ 연대 : 壬午(1822?), 庚寅(1830?) 외
ㅇ 인물 : 朴國岩 등 作人
ㅇ 내용 : 표제에서와 같이 鄕校에서 春秋로 地稅를 받아 이것을 都錄로 만들어 둔 置簿이다. 이 도록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作人(奴婢, 常人)들 뿐이어서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노비가 작인의 대종을 이루는 등으로 보아 앞의 1720년 完議에 따라 작성된 도록의 일종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앞의 완의에 따라 地番 위의 付紙에 일일이 지세를 기록하면서 수납하고 있는데서도 유추가 된다.
(8) 鄕校別庫田畓目錄
ㅇ 연대 : 丙戌(乙丑 추보)
ㅇ 인물 : 姜季胤
ㅇ 내용 : 獎學의 취지하에 설립, 운영된 義庫(別庫) 소속 田畓의 목록이다. 義庫는 鄕中 士林들의 出資에 의해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나오는 斗穀의 殖利으로 전토를 매득하는데 충당하였다. 그러나 점차 관리가 소홀해지자 관리와 운영의 철저를 기하기 위해 別庫 소속 田畓의 目錄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官에 비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말미에 첨부된 乙丑年 8월 당시의 齋長 姜季㣧의 기록에는 本齋의 位畓 4斗落을 운영해 온 내력이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다.
(1) 鄕校奴婢案(仰屬幷附)
ㅇ 연대 : 戊午, 己未
ㅇ 내용 : 鄕校에서 소유한 奴婢의 명단이다. 戊午年分과 己未年分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구체적인 年代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노비안의 체제는 크게 原案과 仰屬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原案은 戊午年에 仰屬案은 己未年에 작성된 것이다. 原案에는 ‘奴婢秩’ 아래에 奴 19구, 婢 3구가 기록되어 있다. ‘外居秩’ 아래에 奴 5구, 婢 3구가 기록되어 있다. 仰屬案은 修正한 것으로 구체적인 명칭은 仰屬案修正이다. ‘舊入秩’, ‘新入秩’로 나누어 각각 21口, 15口씩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말미에는 ‘追入’이라하여 모두 15구가 기록되어 있으며, ‘新入秩’이라하여 2口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전기 ‘新入秩’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2) 鄕校仰屬錢分排各面冊(完節目幷附)
ㅇ 연대: 丙戌(1826, 1886 ?) 7月 日.
ㅇ 인물: 姜圭欽·尹時學·鄭煥黙(齋任)
ㅇ 내용: 鄕校의 부족한 財政을 충당하기 위해 각면에 仰屬人 50人을 분배, 戶布를 감면해 주는 대신 춘추로 각 一兩씩을 바치도록 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당시 陜川鄕校에서는 春秋 釋奠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校位田에 수해가 들어 收稅가 全無하는 등 재정적 고충이 자심했다. 말미에 첨부된 ‘仰屬分排秩’에 의하면, 仰屬錢은 縣內, 崇山, 栗津, 鳳山, 頭山, 大目, 陽山, 宮所, 龍洲, 泉谷, 心妙 등 모두 20개 지역에 1-3명씩 배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1) 五聖位魚鯆各五尾改定事蹟
ㅇ 연대 : 1703년(肅宗 29, 癸未)
ㅇ 내용 : 享祀時 五聖位 전체에 魚鯆 5尾를 쓰던 기존의 祭需體制를 各位當 5尾로 변통하게 된 來歷과 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지은 讚詩와 次韻을 수록하였다. 본 문서에 따르면, 여타 鄕校에서 五聖位에 각각 魚鯆를 5尾를 쓰는데 비해 陜川鄕校에서 五聖位 전체에 5尾를 쓰게 된 것은 당초 節目을 定書하는 과정에서 ‘各’字를 誤漏한데서 기인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魚鯆를 改定할 당시의 합천군수는 沈鏞(在任其間 : 1702-1704년)이며, 본 내력을 서술하고 찬을 지은 인물은 당시 都有司 劉應八이다. 이하 齋任, 儒生들의 次韻이 수록되어 있다.
(2) 鄕校器物都錄
ㅇ 연대 : 1749년(英祖 25, 己巳)
ㅇ 인물 : 朴龜文(都有司)
ㅇ 내용 : 1749년 鄕校所有 田畓, 錢穀, 器物, 書冊 등의 철저한 관리를 위해 〈田畓都錄〉, 〈器物都錄〉을 성책하여 官의 踏印을 받았다. 본 〈器物都錄〉도 바로 이때 작성된 것으로 祭器, 祭服, 書冊의 관리를 위한 帳簿이다.
본 문서의 맨앞에는 당시 都有司 朴龜文(高靈人)이 撰한 完文이 수록되어 있어 본 文書의 작성 취지와 전말을 이해하는데 참고된다.
(3) 祭服書冊幷附記
ㅇ 연대 : 1793년(正祖 17, 癸丑), 1846년(憲宗 12, 丁未)
ㅇ 인물 : 李秀坤(校首) 周尙彦(掌議) 등
ㅇ 내용 : 1793년 鄕校 都有司 李秀坤이 낡은 祭服을 새로이 구비하고, 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鄕校의 諸儒들과 화답한 시문을 수록한 문서이다. 李秀坤은 祭服을 새로이 구비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지만 자신에 앞서 서책을 구비하는데 노력한 文再慱의 공로 또한 높이 평가하면서 몸소 祭服, 書冊을 주제로한 原韻을 지었다. 이에 諸儒들이 次韻하였는데, 모두 30餘首가 된다. 문서 후반부에는 祭服, 書冊과는 무관한 明倫堂重修韻이 기록되어 있는데, 연대는 未詳이고 河達洪 등 8人의 詩가 수록되어 있다. 맨 마지막에 실린 2首의 詩는 1846年(憲宗 12) 당시 掌議 鄭在祿과 李寅燮이 前記 李秀坤의 시를 追加로 次韻한 것이다.
(4) 明倫堂窓戶修理記
ㅇ 연대 : 1908년(隆熙 2, 戊申)
ㅇ 인물 : 金龍淳·河純孝·申彦章(齋任)
ㅇ 내용: 明倫堂의 窓戶를 修理한 다음 尊聖衛道의 본의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작성된 일종의 序文이다.
(5) 鄕校器物重記
ㅇ 연대 : 壬子, 癸丑
ㅇ 인물 :文某(都有司) 文某(掌議)
ㅇ 내용 : 향교 소유의 祭器, 祭服, 雜物, 書冊 등의 數量, 管理來歷이 기재된 문서이다. 祭器, 祭服, 雜物은 수량과 관리내역이 1回에 한하는데 비해 書冊은 매우 철저하게 관리한 것으로 나타난다. 書冊秩에 기본적으로 鄕校所有 서책이 망라되어 있고, 新舊書冊秩이라하여 모두 8回(乙卯 2月, 乙卯 8月, 丙辰 5月, 丁巳 6月, 戊午 1月, 戊午 3月, 戊午 8月, 辛酉 3月)에 걸쳐 서책의 증감을 비교 조사한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新舊書冊秩은 곧 保有分인 舊冊秩과 增加分인 新冊秩을 일일이 기록하여 缺損과 增加 여부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관리에 있어서는 當該年度 校任의 入會下에 守令의 결재를 받았을 정도로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본 문서 중간 부분에 수록된 癸丑年의 ‘新備書冊節目’에는 鄕校의 서책이 부족하던 차 辛亥年에 鄕校首任 文再慱의 노력과 陜川郡守의 도움으로 도두 238권의 書冊을 구비하게 된 경위와 관리에 따른 細部節目이 있다. 節目에는 다음의 준수 사항이 적혀있다.
一. 書冊欌籠은 明倫堂에 둘 것.
一. 新舊都有司 交替時는 확인을 철저히 할 것.
一. 鄕員들도 任意로 書冊欌籠을 開閉하지 말 것.
一. 書冊欌籠 열쇠 3柄은 都有司가 맡을 것.
(6) 祭器都錄冊
ㅇ 연대 : 壬申
ㅇ 내용 : 鄕校所有 祭器의 旣存分과 新備分을 구별하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備品調査表이다.
(1) 鄕案(先輩聞見修正鄕案)
ㅇ 연대 : 1599년(宣祖32:萬曆 27)-1720년(肅宗46 : 康熙59)
ㅇ 인물 : 尹攷善(縣監) 尹耕(司諫) 朴紹(舍人)
ㅇ 내용 : 陜川地域 鄕案의 修正本.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선배들의 聞見을 토대로 修正해 작성하였다. 따라서 원문과는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다. 陜川鄕案은 壬亂의 와중에서 舊案이 소실된 이래 1599년 重修되었으나, 1718년에 또다시 소실되었다. 본 鄕案은 1718년 소실된 지 2년 뒤인 1720년에 修正한 것이다. 수록시기는 1599년 閏四月부터 修正 當該年인 1720년 2月까지 약 120년에 걸치며 모두 29個年度에 걸처 35回分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연대도 앞서고 가장 방대한 것은 1599년 10월 案이다.
각 人名에는 官銜이나 生進, 幼學 등으로 표시한 것이 있고 생략한 것이 있다. 일부 초기의 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본안에 수록된 鄕案의 구체적 연대를 정리하고 수록인원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鄕案 作成時期 및 登載人員〉
1599(宣祖32:萬曆27,己亥) 縣監 尹孜善 등 171명
1599(宣祖32:萬曆27,己亥) 幼學 柳萬春 등 39명
1600(宣祖33:萬曆28,庚子) 僉知 尹乙臣 등 15명
1607(宣祖40:萬曆35,丁未) 幼學 柳榮春 등 13명
1609(光海1 :萬曆37,己酉) 幼學 柳安 등 11명
1613(光海5 :萬曆41,癸丑) 幼學 姜近 등 25명
1621(光海13:天啓1,辛酉) 判事 李希仁 등 22명
1625(仁祖3 :天啓5,乙丑) 幼學 文景晉 등 5명
1627(仁祖5 :天啓7,丁卯) 李邦俊 등 7명
1630(仁祖8 :崇禎3,庚午) 河應濩 등 11명
1637(仁祖15:崇禎10,丁丑) 裵溟 등11명
1639(仁祖17:崇禎12,己卯) 參議 宋駿 등 15명
1644(仁祖22:順治1,甲申) 周賀胤 등 22명
1650(孝宗1 :順治7,庚寅) 裵晥 등 2명
1652(孝宗 3:順治9,壬辰) 權克信 등 42명
1656(孝宗 7:順治13,丙申) 李智立 등 2명
1659(孝宗10:順治16,己亥) 文命周 등 9명
1660(顯宗 1:順治17,庚子) 朴暹 등 53명
1660(順治17:顯宗1, 庚子) 李再華 등 4명
1663(顯宗4 :康熙2, 癸卯) 河晉元 등16명
1671(顯宗12:康熙10,辛亥) 劉翰龍 등 16명
1672(顯宗13:康熙11,壬子) 裵晙 등 26명
1672(顯宗13:康熙11,壬子) 朴翰衢 등 8명
1672(顯宗13:康熙11,壬子) 李玧 1명
1672(顯宗13:康熙11,壬子) 文德馹 등 5명
1673(顯宗13:康熙12,癸丑) 李廷稷 등 9명
1683(肅宗9 :康熙22,癸亥) 周寓 등 95명
1683(肅宗9 :康熙22,癸亥)
1690(肅宗16:康熙29,庚午) 劉鳳岺 등 69명
1697(肅宗23:康熙36,丁丑) 權斗宰 등 23명
1708(肅宗34:康熙36,戊子) 金處鳴 등 40명
1715(肅宗41:康熙54,乙未) 鄭益 등 90명
1718(肅宗44:康熙57,戊戌) 裵一禎 등 141명
1720(肅宗46:康熙59,庚子) 裵一虎 등 17명
(2) 鄕案(文簿)
ㅇ 수록연대 : 1625年(仁祖 3:天啓 5, 乙丑)-1718年(肅宗 44:康熙 57, 戊戌)
ㅇ 인물 : 姜翼文(司諫) 河景受(郡守) 姜翼武(察訪) 등
ㅇ 내용: 크게 ‘鄕案座目’과 ‘座首薦’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양자가 분리된 것이 아니고 鄕案座目 사이사이에 ‘座首薦’이 수록되어 있다. 鄕案座目의 수록연대는 1625년에서 1718년까지이며, ‘座首薦’은 1654-1690년까지이다. ‘鄕案座目’과 ‘座首薦’의 수록부분을 년월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鄕案座目〉
天啓5年(1625,仁祖 3)6月13日錄.
崇禎3年(1630,仁祖 8)10月29日錄.
崇禎4年(1631,仁祖 9)12月7日錄.
崇禎10年(1637,仁祖 15)正月17日錄.
己卯(1639,仁祖 17)9月29日.
甲申(1644,仁祖 22)2月初5日.
庚寅(1650,孝宗 1)正月17日.
壬辰(1652,孝宗 3)壬辰正月5日.
丙申(1656,孝宗 7)丙申7月15日.
己亥(1659,孝宗 10)正月5日.
庚子(1660,顯宗 1)正月初4日.
庚子(1660,顯宗 1)正月5日.
癸卯(1663,顯宗 4)正月3日.
辛亥(1671,顯宗 12)11月24日.
壬子(1672,顯宗 13)正月初3日.
壬子(1672,顯宗 13)7月23日.
壬子(1672,顯宗 13)閏7月16日.
癸丑(1673,顯宗 14)9月22日.
癸亥(1683,肅宗 9)正月初4日.
庚午(1690,肅宗 16)4月11日.
庚午(1690,肅宗 16)9月18日.
癸未(1703,肅宗 29)12月23日.
戊子(1708,肅宗 34)2月10日.
戊戌(1718,肅宗 44)3月10日.
〈座首薦〉
甲午(1654,孝宗 5)6月16日.
戊戌(1658,孝宗 9)6月17日.
庚子(1660,顯宗 1)正月4日.
壬子(1672,顯宗 13)正月3日.
癸亥(1683,肅宗 9)正月4日.
戊辰(1688,肅宗 14)11月6日.
庚午(1690,肅宗 16)4月11日.
이 鄕案座目은 시기적으로 위의 先輩聞見修正鄕案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 검토하여 相異, 同一 여부를 보다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625년 분(天啓五年, 1625, 仁祖 3, 六月十三日錄)의 경우, 先輩聞見修正鄕案鄕案의 당해연도와 비교할 때 등재된 인물의 수가 각기 29명, 38명으로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양 鄕案에 함께 등재된 인물은 无悶堂 朴絪을 포함한 16명에 지나지 않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심층적 연구가 요망된다. 본 문서의 말미에 향안에 등재할 인물의 新薦과 관련하여 1720년(肅宗 46, 庚子)에 작성된 完議節目 1건이 첨부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新薦者의 入錄 절차에 관한 사항이다. 新薦者는 바로 입록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 草案을 작성한 다음 ‘新薦之會’를 거쳐 鄕案에 입록하며, 이러한 일련의 절차를 마친 다음에 次期 新薦者를 선정토록 한다.
둘째, 新薦의 시기에 관한 사항이다. 新薦은 매 正朝에 실시하며 鄕員 중 40세 이상자들에 우선적으로 通文하여 會同을 촉구하는데, 이때 鄕任과 校任은 여기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셋째, 風憲에 관한 사항이다. 風憲들은 鄕會를 포함 모든 대소사는 서로 상의하여 거행하고 座首 出報時에도 역시 상의하여 定報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네째, 新薦者의 許錄에 관한 사항이다. 기존에는 新薦者의 許錄 과정에서 官令에 구애됨이 많았는데, 이제부터는 官令에 구애받지 말고 ‘新薦之會’ 등을 통해 許錄 절차를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3) 鄕案
ㅇ 연대 : 1682년(肅宗 8 : 崇禎後壬戌)
ㅇ 인물 : 鄭受傅 河世一
(4) 鄕案
ㅇ 연대 : 1682년(肅宗 8 : 壬戌)
ㅇ 인물 : 河澍 金精洛
(5) 鄕案
ㅇ 연대 : 1683년(肅宗 9, 癸亥)
ㅇ 인물 : 金尙仁 李楷
(6) 鄕案
ㅇ 연대 : 1742년(英祖 18 : 崇禎後再壬戌)
ㅇ 인물 : 文道矄
ㅇ 내용 : 이 鄕案은 단순히 姓名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鄕案에서 일반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官銜, 職役 등의 사항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말미에, 작성연대와 당시의 座上, 公事員, 座首, 別監의 姓名뿐이다. 그런데 이 鄕案에서 한가지 의문나는 사항은 陜川의 명망 사족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高靈朴氏 朴壽宗계열은 陜川 地域에서는 상당한 家門임에도 불구하고 수록된 인사가 없다. 따라서 이 鄕案에는 是非의 과정에서 특정계열만을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다.
(7) 鄕案(鄕案座目聞見重修案)
ㅇ 연대 : 1719년(肅宗 45, 己亥)
ㅇ 내용 : 임란이후 1599년(萬曆 己亥)에 중수한 舊案이 官火로 인해 소실되자, 萬曆 己亥年, 즉 1599년의 再周가 되는 1719년(肅宗 45, 己亥)에 다시 聞見을 토대로 重修한 것이다. 序文에 의하면, “수백년 敬奉해 오던 鄕案이 官火로 인해 소실되는 과정에서, 다행히 鄕人에 의해 그 일부가 保存될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全燒되지 않은 것 만은 분명하나, 소실된 부분과 잔존한 부분이 각각이 어느정도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상당한 부분이 소실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본 重修案에서 수록하고 있는 기간은 1599년(萬曆 27, 宣祖 32, 己亥)에서 중수 당해년의 전년인 1718년(康熙 57, 肅宗 44, 戊戌)까지이다. 수록하고 있는 세부 年月도 先輩聞見修正鄕案과 차이가 없다. 다만 여타 鄕案에서 보이지 않던 1599년(萬曆 27년, 己亥)正月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陜川鄕案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선행하는 것이다.
(8) 別案
ㅇ 연대 : 1719년(肅宗 45, 己亥)
ㅇ 내용 : 陜川鄕案의 別案이다. 本 別案은 당초 1599년 鄕案의 중수과정에서 만들어졌으나 1718년 역시 소실되었던 것을 이때(1719年)에 이르러 重修한 것이다. 말미의 ‘崇禎後己亥七月 日重修’라는 기록에 의거할 때, 1659년(孝宗 10, 己亥)로 상정할 수도 있으나 萬曆己亥(1599년)의 再周年에 복구한 鄕案에도 ‘崇禎後己亥七月十二日重修’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참작할 때, 1719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別案’의 명목하에 ‘佔畢齋金先生’, ‘寒喧堂金先生’, ‘周世鵬愼齋先生’으로 세명의 유현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곧 金宗直(1431-1492), 金宏弼(1454-1504), 周世鵬(1495-1554)이며, 모두 합천과 有關한 인물들이다. 일반적인 鄕案에서 寓居, 仕宦 등의 연고와 관련하여 入錄하는 경우가 없는 것을 고려할 때, 본 別案은 여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성격의 자료이다.
(1) 鄕校川浦立完冊
ㅇ 연대 : 乙未(1775년?)
ㅇ 인물 : 李顯稙(郡守)·金聲吉·周佑洪·文炳豹(齋任)
ㅇ 내용 : 陜川郡守 李顯稙의 주관하에 鄕校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작성된 完文이다.
(2) 完文
ㅇ 연대 : 1858년(哲宗 9, 戊午)
ㅇ 인물 : 姜奎永(都有司)·李正斗·尹炳九·文錫祚(齋員) 등
ㅇ 내용 : 文武 大·小科의 新恩者들에 대한 賀禮金의 지급과 관련하여 작성된 完文이다. 기존에는 文武 大·小科에 합격한 후 新恩次 향교에 들르게 되면 本邑과 他邑의 구별없이 약간의 錢緡을 도와 주었으나 점차 부담이 증가하자 節用 차원에서 본 完文이 작성된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一. 本邑의 경우 文科는 10兩을 定式으로 하고, 他邑의 경우 文科는 1兩으로 한다.
一. 本邑의 경우 生進은 10兩을 正式으로 하고, 他邑의 경우 生進은 5錢을 도와 준다.
一. 본읍의 경우 무과는 5兩을 정식으로 하고, 他邑의 경우 武科는 三錢을 내도록 한다.
一. 中人과 常漢은 거론하지 않는다.
一. 校生은 여타 中人들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文武 大·小科에 든 자는 다른 鄕員과 비교하여 절반을 지원하도록 한다.
(3) 完文(春曹立案幷附)
ㅇ 연대 : 1859年(哲宗 10, 己未)
ㅇ 인물 : 行判書 參判 參議 등
ㅇ 내용: 孝子로 선정되어 童蒙敎官에 증직된 姜孝錫의 자손에게 煙戶, 還上 등의 雜役을 면제하는 내용이다. 完文 맨 앞에는 1855년(咸豊 5, 乙卯) 姜孝錫에게 童蒙敎官을 贈職하고 자손들에게 煙戶, 還上 등의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의 禮曹立案이 謄書되어 있다.
(4) 完文
ㅇ 연대 : 1860년(哲宗 11, 庚申)
ㅇ 내용 : 李樑材의 자손에게 煙戶雜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의 完文이다.
(5) 完文
ㅇ 연대 : 壬申(1872년?)
ㅇ 인물 : 李廷器(知郡守)·鄭煥喆(都有司)·金鉄堅·姜啓仁(掌議)
ㅇ 내용 : 1870년 합천군수에 부임한 李廷器가 향교의 固定資産을 파악한 기록으로 祭器 등의 비품에 대한 사항과 土地定稅를 위한 校田畓의 규모를 밝혀놓은 完文이다.
(6) 完文
ㅇ 연대 : 1904년(光武 8, 甲辰)
ㅇ 인물 : 文圭漢·周浩錫·朴龍五(會員)
ㅇ 내용 : 都有司의 임기를 1년에서 半年으로 줄이고, 掌議는 전과 같이 1년씩 在任토록 할 것을 결정하는 내용의 完文이다.
(7) 完議
ㅇ 연대 : 甲寅(1674년 ?, 1734년 ?)
ㅇ 내용 : 晋州城 炮樓 設置에 따른 完議.
(8) 完議
ㅇ 연대 : 1728년(英祖 4, 戊申)
ㅇ 내용 : 英祖 戊申亂에 개입된 인물들을 鄕籍에서 삭적한다는 내용의 完議.
(9) 完議
ㅇ 연대 : 1742년(英祖 18, 崇禎後 壬戌)
ㅇ 내용 : 戊申亂에 가담된 인사들을 鄕案에서 削籍하고 그들이 新薦한 인물들까지도 鄕案에서 除去한다는 내용의 完議이다.
(10) 先父老諸完議
ㅇ 성책연대 : 1814년(純祖 14, 甲戌)
ㅇ 수록연대 : 1765년(英祖 41, 乙酉), 1772년(英祖 48년, 壬辰)
1774년(英祖 50, 甲午), 1776년(英祖 52, 丙申)
ㅇ 내용 : 본 문서는 鄕校運營 관련하여 작성되어 온 기존의 諸完議를 한데모아 성책한 것이다. 표지의 “皇明四甲戌陽月日改粧衣”라는 기록에 의거할 때, 성책연대는 1814년(純祖 14, 甲戌)으로 나타된다. 각 완의의 내용을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
☆ 勸學完議 : 1765년(英祖 41년, 乙酉)
士風을 진작하고 學問을 권장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完議이다. 그 내용은 校案에 있는 인물 중에서 年少하며 자격있는 인물과 各面의 蒙學者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선발, 學長으로 하여금 매월 朔望에 모아서 講誦이나 製述을 하도록 하고, 每 三朔에 한 번씩 향교에서 鄕先生과 함께 講誦이나 製述을 하도록 정하고 있다. 한편 이 勸學完議가 작성된 이후에도 後續 完議가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시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속 完議에서는 不通者와 不參者에 대한 벌칙 조항이 주로 논의된다. 예컨대 不通者는 楚撻 十次를 하고, 2번 不參者는 削籍하는 등의 조항을 두어 完議의 시행에 구속력을 두고 있다.
☆ 壬辰年完議 : 1772년(英祖 48년, 壬辰)
校奴婢의 位田 分給에 관한 完議이다. 私奴婢와 官奴婢에게는 位田을 분급해 주지 않는 것이 慣例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歇役이라고 할 수 있는 校奴婢에게는 오랫 동안의 物情에 따라 位田을 분급해온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들어 차후 이러한 관례를 일체 혁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급격한 更張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하여 명년부터 새로운 규칙을 정해 校奴 가운데 使喚 入役하는 사람에게 한하여 田畓 각 1斗落을 분급하여 老除(60세 이상으로서 放役된 노비) 이전까지 분급하도록 하며, 老除 이후에는 校中에 환납하도록 하였다. 村外에 거하는 者, 老除者, 未入役者에게는 일체 勿給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校任에게는 책임을 묻도록 하였다.
☆ 甲午年完議 : 1774년(英祖 50, 甲午)
都有司의 資格과 관련하여 작성된 完議이다. 요지는 都有司의 나이를 40세 이상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 丙申年完議 : 1776년(英祖 52, 丙申)
掌儀의 자격과 관련하여 작성된 완의이다. 甲午年 完議에서 都有司의 자격을 ‘齒德’(나이와 덕망)으로 제한한 것에 의거, 掌議의 자격도 ‘志學能文者’ 가운데 30세 이상자로 제한할 것을 결정하였다.
☆ 靑衿錄稟議時書案末回啓 : 1779년(正祖 3, 己亥)
靑衿錄의 재작성 과정에서 鄕老에게 稟議한 것에 대하여 回啓한 내용을 담고 있다. 回啓 중에는 당시 陜川 士族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祭案의 존재가 주목된다. 祭案에는 사족으로서 鄕子弟錄이며 儒行과 才望이 있으며 擧業에 종사하는 인물만이 입록할 수 있다.
☆ 甲辰年完議 : 1784년(正祖 8, 甲辰)
靑衿錄의 入錄資格과 관련한 내용의 完議이다. 靑衿錄은 기본적으로 鄕案에 든 인물의 자제로서 內外의 世系가 분명하고 行義에 하자가 없는 인물에 한하여 입록될 수 있으며 一鄕의 公論에 부합되지 못할 경우 鄕案의 예를 따라 可否를 물은 다음에 입록하였다. 完議 말미에는 ‘儒林案薦錄節目’이라하여 세부사항이 부기되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鄕案에 든 집안의 子弟로서 三鄕이 분명하고 文才를 겸한 자를 許錄한다.
② 三鄕이 분명해도 鄕錄에 들지 못한 자는 堂中에서 可否를 通知하여 ‘一不’이상을 허록한다.
③ 三鄕, 文才, 門地를 구비했어도 志行이 不美한 자는 可否를 물을적에 관찰하지 않을 수 없다.
④ 이후의 薦錄은 항상 3년을 기한으로하되 반드시 案中에 든 인사들이 齋會한 뒤 可否를 묻는데, 회원이 20명이 되지 않으면 薦錄하지 못한다.
☆ 丙午年 完議 : 1786년(正祖 10, 丙午)
典庫의 엄격한 관리와 거기에 따른 有司와 掌儀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된 完議이다.
☆ 丙午年完議 : 1786년(正祖 10, 丙午)
勸學의 취지에서 작성된 完議이다. 이 完議는 기존의 勸學完議에 의거, 3월 6월·9월·12월의 1일, 11일, 21일에 향교에서 시강하며, 勸學 차원에서 엄한 벌칙 규정을 두었다. 예컨대 不通者는 회초리 10대를 치고, 1회 不參時는 損徒, 2회 不參時는 削籍토록 규정하였다.
☆ 完議 : 未詳
都有司와 掌議는 鄕錄에 든 인물 가운데서 付標한다는 내용의 완의이다.
☆ 庚申年 完議 : 1800년(正祖 24, 庚申)
鄕校의 財政의 관리에 관한 完議이다. 향교의 財用을 官事를 빙자하거나 혹은 私事로 유용하는 폐단을 없애고, 兩班들이 位田을 竝作하면서 納穀하지 않거나 納稅하지 않는 사실들을 摘奸하여 이를 금하게 하거나 혹은 告官할 것을 決議하고 있다. 1824년(純祖 24년, 甲申) 完議에서도 유사한 성격의 조항이 발견된다.
☆ 完議 : 未詳
鄕校와 外人이 상호 換田하는 폐단을 엄금하는 내용의 完議이다.
☆ 丙寅年完議 : 1806년(純祖 6, 丙寅)
향교전답의 換田에 관한 규정을 정리한 完議. 향교의 전답을 外人과 換田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弄奸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 還退하도록 정한 규칙이 실려 있다.
☆ 己巳年完議 : 1809년(純祖 9, 己巳)
校籍의 入錄資格에 관한 완의. 校籍이 시간이 경과함에 庶孼이나 中人層은 물론 私賤을 면하지 못한 인물들까지 許錄되는 상황에서 향후의 入錄은 사림의 철저한 심사를 거치게 한다는 내용이다.
☆ 辛未年完議 : 1811년(純祖 11, 辛未 四月)
兩班들에 의한 校位田의 侵奪을 막기 위하여 작성된 完議이다. 각처의 校位田을 양반들이 地稅를 내지도 않으면서 무단으로 竝作하거나, 家基 또는 葬地로 사용하는 등의 ‘瘠公肥私’하는 폐해로말미암아 향교의 재정이 어렵게 되었다. 양반가에서 향교의 位畓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代捧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 辛未年完議 : 1811년(純祖 11, 辛未 八月)
中人層의 儒籍入錄을 엄격히 심사할 것을 규정한 完議이다. 中人과 庶孼에 대해 儒籍入錄을 허용하게 되자, 자격없는 많은 良·賤人들도 暗錄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고, 게다가 中人輩들도 校役을 기피하고 향교를 멸시하고 사족을 모욕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 ‘鄕校가 養武堂이 되었다’라는 俗諺이 생겨낭 정도였다. 이에 他邑의 예에 따라 中人과 庶孼 중에 願付者는 반드시 大祭가 파하는 날에 試講의 결과와 門地, 性行을 심사한 이후 許錄하도록 하였다.
☆ 庚辰年完議 : 1820년(純祖 20, 庚辰)
掌儀의 擇定과 관련한 完議이다. 門地와 才行을 근간으로 했던 掌議의 선정기준이 점차 해이해지자 鄕案의 규례에 따라 掌儀를 薦望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다.
☆ 丙戌年完議 : 1826년(純祖 26, 丙戌 二月)
獻官의 齋服을 校生, 執事들이 사사로이 착복하는 폐단을 금하는 내용이다.
☆ 丙戌年完議 : 1826년(純祖 26, 丙戌 三月)
鄕校에서의 ‘持供’ 규칙에 관한 完議이다. 향교의 田畓이 적지않은데도 매년 大祭時에 군색함을 지적하고, 향후로는 鄕校의 일로 들어오는 사람 외에는 일체 향교에서 宿食을 허락하지 않도록하며, 井間冊을 작성하여 후일에 憑驗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 丙戌年完議 : 1826년(純祖 26, 丙戌 八月)
鄕校 大祭時 謁者의 擇定에 관한 完議이다. 大祭時에 獻官이 失禮하는 이유는 대부분 謁者의 習禮 부족에 기인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知禮 與否를 판단한 후에 謁者를 擇取한다는 내용이다.
☆ 丁亥年完議 : 1827년(純祖 27, 丁亥 三月)
入番儒生의 守直에 관한 完議이다. 聖廟에 守直하는 儒生의 문란한 행동을 규제하는 내용이다.
☆ 辛卯年完議 : 1831년(純祖 31, 辛卯)
掌儀의 선출에 관한 완의이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薦擧時에 堂中에서 可否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累薦累罷’의 문제점이 있었다.
☆ 庚辰年完議 : 庚辰(1820 ?)
儒鄕間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자 작성된 完議이다. 儒任과 鄕任은 그 직임의 성격이 엄격하게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 구별이 모호해 지는 것은 鄕父老들의 3백년간의 규정을 해치는 것이라 하였다. 이 完議는 원래 櫃中에 오래 보관되어 상당히 훼손된 것을 새롭게 정서하여 이 完議冊의 권말에 싣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 丙午年育英齋完議 : 丙午(1846, 憲宗 12 ?)
향교에 育英齋를 설치하고, 그 재정관계를 규정한 완의이다.
(11). 鄕中完議
ㅇ 연대 : 1790년(正祖 14, 庚戌),
ㅇ 내용 : 黨論이 지방에까지 확산되자 黨論에 휩쓸리지 말고 鄕風을 유지해가자는 내용의 完議이다.
(12). 鄕校節目冊
ㅇ 연대 : 丙辰 十一月 日
ㅇ 내용 : 享禮補助金, 庫子別給金, 首僕別給金, 齋有司給與, 講會費用, 經常費, 聚會日字, 春秋收入關係, 堂長, 直色, 有司 등의 薦擧, 薦望關係, 大祭時 執事의 遵守事項, 書冊管理事項 등 鄕校의 전반적인 운영과 관련한 모두 20조항으로 구성된 節目이다.
(1). 通文
ㅇ 연대 : 1678년(肅宗4, 戊午)
ㅇ 발급 : 姜大遠 등,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柳晋亨의 妻 鄭氏의 褒旌을 촉구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2). 通文
ㅇ 연대: 1682(肅宗 8, 壬戌)
ㅇ 발급: 文漢經 등 18인, 수급 : 鄕校 鄕射堂
ㅇ 내용: 李瑞犭其(기), 崔溍의 孝行을 闡揚하자는 내용의 통문.
(3). 通文
ㅇ 연대 : 丙寅(1686년, 1746년 ?),
ㅇ 발급 : 三嘉鄕校, 수급 : 陜川鄕中
ㅇ 내용 : 沈日三의 褒贈을 추진하자는 내용의 통문이다. 沈日三은 无悶堂 朴絪의 門人으로 孝行, 學德으로 향중의 명망이 있었던 인물이다.
(4). 通文
ㅇ 연대 : 1691년(肅宗 17, 辛未)
ㅇ 발급 : 曺時遠, 朴明矩(1643-1700, 高靈人) 등 17인, 수급 : 鄕校 鄕射堂
ㅇ 내용 : 손상되고 파손된 邑基를 복구하기 위해 별도의 完議를 작성하자는 내용의 통문이다.
(5). 通文
ㅇ 연대 : 1700년(肅宗 26, 庚辰)
ㅇ 발급 : 李星恒 등 9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校任의 선정에 있어 愼重을 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6). 通文
ㅇ 연대 : 1708년(肅宗 34, 戊子)
ㅇ 발급 : 柳錫禧 등 21인, 수급 : 鄕中僉尊
ㅇ 내용 : 賦稅의 균등에 배치되는 각종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이 통문에는 당시 陜川地域이 안고 있던 賦稅와 관련한 각종 문제점들이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다.
(7). 通文
ㅇ 연대 : 1709년(肅宗 35, 己丑)
ㅇ 발급 : 朴明彬(1647-1721, 高靈人) 등 25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賑政에 힘쓴 守令의 頌德과 관련한 내용의 통문이다. 이 통문에 의하면, 1708년 기근이 극심할 당시 陜川郡守가 진정에 상당히 노력을 기울이자 여기에 감동한 一角에서 頌德의 논의가 발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朴明彬 등이 鄕射堂에 通文하여 각 면이 공히 이러한 취지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한 것이다.
(8). 通文
ㅇ 연대 : 1713년(肅宗 39, 癸巳)
ㅇ 발급 : 李世郁·李星翼·李基華,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倍疏에 따른 費用의 援助를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9). 通文
ㅇ 연대 : 1713년(肅宗 39, 癸巳)
ㅇ 발급 : 劉定國 등 9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賦稅의 경감을 촉구하는 내용의 通文.
(10). 通文
ㅇ 연대 : 1713년(肅宗 39, 癸巳)
ㅇ 발급 : 文漢章 등 18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田稅의 경감을 주선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
(11). 通文
ㅇ 연대 : 1715년(肅宗 41, 乙未)
ㅇ 발급 : 李世郁 등 6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守令을 誣告한 林大良 등에 대한 처리를 위해 신속히 鄕會를 개최하자는 내용의 통문이다.
(12). 通文
ㅇ 연대 : 1715년(肅宗 41, 乙未)
ㅇ 발급 : 李成胤, 李泰章 등 12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賦稅의 완화와 관련하여 鄕射堂에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13). 通文
ㅇ 연대 : 1715년(肅宗 41, 乙未)
ㅇ 발급 : 文漢章 등 19인, 수급 : 鄕校 鄕射堂
ㅇ 내용: 田稅 輕減의 필요성을 官에다 진달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14). 通文
ㅇ 연대 : 丙申 ? (1716년, 肅宗 42)
ㅇ 발급 : 金始鳴·金處鳴·金八垠,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一鄕의 화목을 위해 鄕會를 개최하자는 내용의 통문이다. 이 당시 陜川에는 상당한 내부적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는데, 갈등은 다름 아닌 庶孼層의 성장에 따른 鄕案作成의 난맥상과 鄕校의 二分化 현상 등이었다.
(15). 通文
ㅇ 연대 : 1717년(肅宗 43, 丁酉)
ㅇ 발급 : 申以孝 등 5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客舍를 舊基로 還建하는 것과 관련하여 鄕射堂의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당시 鄕中의 諸般不運을 客舍의 移建 탓으로 보고 客舍의 還建 논의가 있었으나, 그 시행이 지연되는 기미를 보이자 新任 守令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鄕射堂에 협조를 요청하는 通文을 보낸 것이다.
(16). 通文
ㅇ 연대 : 1717년(肅宗 43, 丁酉)
ㅇ 발급 : 周南仲 등 6인, 수급 : 鄕射堂
(17). 通文
ㅇ 연대 : 1717년(肅宗 43, 丁酉)
ㅇ 발급 : 朴明憲(1655-1722, 高靈人) 등 14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客舍를 舊基로 환건하는 것과 관련하여 鄕射堂의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18). 通文
ㅇ 연대 : 1718년(肅宗 44, 戊戌)
ㅇ 발급 : 朴明夏(1665-1722, 高靈人) 등 7명 ,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補民廳의 營建과 관련하여 鄕射堂에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19). 通文
ㅇ 연대 : 戊戌(1718년 ?)
ㅇ 발급 : 鄭纘仁 등 9인,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一鄕의 寅協을 위해 補民廳의 설립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補民廳의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그 구체적인 성격이 파악되지는 않는다.
(20). 通文
ㅇ 연대 : 1722년(景宗 2, 壬寅)
ㅇ 발급 : 鄭斗樞 등 9人, 수급 : 鄕射堂
ㅇ 내용 : 1718년(肅宗 44, 戊戌)에 소실된 鄕案의 복구를 촉구하는 내용의 通文이다. 본 통문에 의하면, 陜川鄕案은 1718년에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곧바로 修正된 바 있는데 鄕案座目聞見重修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聞見을 토대로 중수한 것인 만큼 미비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부 鄕員에 의해 鄕案의 復舊논의가 제기되어 발통되었던 것이다.
(1). 上書
ㅇ 연대 : 1677년(肅宗 3, 丁巳)
ㅇ 내용 : 柳晉亨의 妻 鄭氏의 孝行事實을 朝廷에 보고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上書.
(2). 上書
ㅇ 연대 : 1691년(肅宗 17, 辛未)
ㅇ 인물 : 朴興文(高靈人)
ㅇ 내용 : 春生堂 앞에 있는 池塘을 신속히 매워서 邑基를 鎭靜해야 한다는 내용의 上書.
(3). 上書
ㅇ 연대 : 1691년(肅宗 17, 辛未)
ㅇ 내용 : 官衙의 뒤쪽에 위치한 春生堂의 池塘이 邑運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하여 春生堂을 없애고 池塘을 매울 것을 청하는 내용의 上書.
(4). 上書
ㅇ 연대 : 1697년(肅宗 23, 丁丑)
ㅇ 내용 : 幼學 周南敷를 중심으로 賦稅의 경감을 호소하는 내용의 等狀이다.
(5). 書目
ㅇ 연대 : 1722년(景宗 2, 壬寅)
ㅇ 내용 : 1722년 守令으로부터 鄕案의 복구를 허락받은 상태에서 鄕案의 裝幀에 따른 제반 사항을 보고한 것이다. 향안 冊子의 紙地는 壯紙 3束許, 壯紙錦은 紅大段 2尺許, 案櫃는 塗錦하고, 藍中은 4尺許로 할 것을 보고하였다. 본 서목에 따르면, 陜川鄕案은 1718년에 소실된 후 그 다음해인 1719년에 곧바로 鄕案座目聞見重修案으로 중수되었다. 그러나 이는 聞見에 토대로 중수한 것인 만큼 다소 미비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鄕員들이 鄕案의 復舊를 누차 建議하였는데, 본 鄕校에 소장된 通文 중에도 이와 관련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