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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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淳佑(韓國精神文化硏究院 敎授),金文澤(韓國學大學院 博士課程)
본 연구원에서는 국학진흥사업을 통하여 지금까지 많은 지역의 자료를 조사하고, 나아가 이를 자료집으로 간행하는 사업을 실시하여 왔다. 그중 경남지방은 가장 먼저 조사가 착수된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거창, 함양, 산청, 합천 등의 지역을 시작으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여러권의 자료집이 간행되었다. 지금까지 경남지방에서 조사된 자료를 토대로 간행된 도서는 『古文書集成』二十三-草溪鄭氏篇-(一九九五年刊), 『古文書集成』二十四-藍溪書院篇-(一九九五年刊), 『古文書集成』二十五-德川書院篇-(一九九五年刊), 『古文書集成』二十六-居昌鄕校篇-(一九九五年刊), 『古文書集成』二十九-龍淵書院篇(I)-(一九九六年刊), 『古文書集成』三十一-龍淵書院篇(Ⅱ)-(一九九六年刊), 『古文書集成』三十一-陜川鄕校篇-(一九九六年刊) 등 六종 七책에 이르고 있다.
김해지방의 자료조사는 一九九四년 一二월에 許昌武교수, 丁淳佑교수, 金文澤 자료조사연구원 등에 의하여 처음 이루어졌다. 현지조사와 수집에서는 김해문화원장이신 李炳泰선생님과 당시 향교의 전교이셨던 李康琳선생님의 도움이 매우 컸음을 밝혀둔다. 본 자료집에서 소개한 문서들은 모두 이 때에 김해향교에서 발견된 것이다.  1)
조선조에 있어서 김해지방은 무엇보다도 南冥 曺植(一五〇一-一五七二)이 오랫동안 거처했던 곳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김해는 曺植의 妻家가 있던 곳으로, 그는 김해의 炭洞에 山海亭을 짓고 三十세가 되던 해부터 十五년간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때에 密陽의 申季誠, 淸道의 金大有, 草溪의 李希顔, 丹城의 李源 등과 교유하면서 인근의 학문이 발전하였고, 이후로 曺植을 중심으로 한 학맥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특히 申季誠은 당시 曺植과 從遊한 인물로, 그는 후에 新山書院에 曺植과 함께 병향되었다.
조선후기 김해지방의 사족들은 이같은 남명학풍의 영향으로 성장하였다. 이 지방 士族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鄕校, 留鄕所(鄕所), 書院 등이었다. 다행히 김해향교에서 발견된 자료들 중에는 鄕校문서 뿐만아니라 鄕案 관계문서나, 新山書院 관계문서가 함께 발굴되었다.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이 지방의 유력사족들은 적어도 一七세기까지는 鄕校나 留鄕所, 書院 등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출입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 자료집에서는 향교문서 뿐만 아니라 김해향교에 보관되었던 모든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은 그 양이 비교적 풍부하고, 동시에 자료들이 대부분 一七세기에 작성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이다.
김해향교는 현재 김해시 대성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향교는 이미 고려시대에 건립되어 유림들의 학문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李穀(一二九八~一三五一)의 「金海府鄕校水軒記」를 통해 알 수 있다. 李穀은 梁州守令을 맡을 당시 金海府의 수령도 겸하였는데, 이 때에 향교의 부속건물인 水軒을 건축하였다. 당시 이곡은 향교의 學舍가 좁고 누추하였기 때문에 學舍의 동쪽 夏課할 때의 작은 정자를 확충하여 水軒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3)
조선조에 이르러서 향교의 운영은 더욱 활발하여졌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현재 향교에 보존되고 있는 다양한 資料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 향교에 대하여 몇 차례에 걸친 이건 및 중수의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一六八八年(肅宗一四) 향교를 이건하였는데, 이 때의 이건은 五년전인 一六八三年(肅宗九) 鄕校 主山에 산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산사태가 난 바로 그 해에 宋瀜이 觀察使에게 狀啓를 올려서 이건이 허락되었으며, 五년이 지난 뒤에는 본격적인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一六八八年 (肅示一四) 가을에 金後修(義城人)가 논의를 일으키고 부사 李行益이 이에 응하여, 聖殿 三間, 東西 各 四間을 처음 짓고 다음해인 一六八九年(肅宗一五) 四월에 移安하였다. 一六九二年(肅宗一八) 봄에는 神廚 四間을 건조하였고, 一六九三年(肅宗一九) 봄에는 明倫堂 五間을 건립하였으며, 南樓 七間을 건조하였다.  4)
그 뒤 一七七〇年(英祖四六)에는 茶田洞에서 主山이 붕괴한 것 때문에 文廟를 松岳山 아래로 移建하였다.  5) 또한 一八八〇年에는 金益成의 주도로 校宮이 중수되었고, 이어서 一八八五年과 一八八七年, 一九〇四年 세 차례에 걸쳐 鄕校에 대한 중수가 계속되었다.  6)
조선조 이 지방의 사족세력은 옛부터 이 지방에 전해오는 四大姓인 昌寧曺氏, 光州盧氏, 金海許氏, 淸州宋氏와 그외 金海金氏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鮮初에는 金海金氏家門이 두드러졌다. 김해김씨는 이미 선초에 金銚, 金係熙, 金克儉 등이 중앙에 出仕하면서 가문이 성하였고, 뒤에는 金馹孫家門을 중심으로 당대의 名門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7) 물론 김일손가문은 이미 그의 고조인 伉대에 金海에서 淸道로 이주하였지만,  8) 김일손의 종제인 金伯堅家門이나 그외 金係錦가문은 김해에 남아 留鄕所를 주도하는 등 김해의 사족문화를 이끌었다. 또 김일손의 경우 이미 선대에 김해를 떠났지만 김해의 사족과 교류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그가 撰한「會老堂記文」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이 지방 사족들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식의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기의 사족세력은 김해김씨나 창녕조씨, 광주노씨, 김해허씨, 청주송씨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이는 鄕案에 참여한 인물들의 구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지방의 鄕案과 관련된 초기 기록은, 一四九一년 향중의 父老들이 이 고을의 會老堂에 모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會老堂은 留鄕所가 설치되고 운영되었던 곳이었다. 金馹孫(一四六四-一四九八)이 지은 會老堂의 記文에 따르면, 전에는 유향소가 여러번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는데, 己酉年(一四八九)에는 조정의 명에 따라 이 고을에서도 留鄕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정의 법에 따라 고을마다 鄕正을 정하는데, 州府에는 다섯 사람, 郡에는 네 사람, 縣에는 세 사람씩을 두도록 하였다고 한다. 金海는 府이므로 다섯 사람의 鄕正을 두었는데, 그들은 前 義城縣令 金係錦, 前 引儀 裵炯, 前 參奉 宋叔亨, 進士 金伯堅이었다.  9) 김해지방에 있어서 임란전 유향소의 운영은 이들의 후손에 의하여 후기까지 계승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후, 김해의 향안은 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향촌 세력의 재편성과 함께 곧바로 작성되었고, 그후 비교적 오랜 시기 동안 운영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一五九九년에 작성되기 시작한 鄕案은 一八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향안은 一七세기에 가장 잘 운영되었는데, 향안에는 淸州宋氏, 廣州安氏, 金海金氏, 金海許氏, 昌寧曺氏 등의 가문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향안에 수록된 인물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자료를 소개하면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한편, 이 지방의 사족들은 서원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新山書院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新山書院은 조선조 김해지방에 존재하였던 유일한 서원으로 曺植과 申季誠을 제향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一五八八年(宣祖二一)에 건립되었다. 건립은 鄕人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安憙(一五五一-一六一三)가 일을 주관하였으며, 監司이던 尹根壽(一五三七-一六一六)와 조식의 문인이었던 府使 河晉寶(一五三〇~?)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임란을 만나서 소실되었다가, 一六〇八년(光海君七)에 다시 安憙를 비롯하여 黃世烈, 許景胤 등이 일을 도모하여 건립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一六〇九년(光海君八)에는 新山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10) 이 서원에는 조식과 신계성이 제향되었는데, 처음 건립시에는 조식만 제향되었다가 一六一六年(光海君八)에 신계성이 추가로 병향되었다. 그 후 一八六八年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현재는 서원이 복설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조선조 김해지방에 존재하였던 新山書院 관계자료가 현재 이 향교에 보존되어 있기에 함께 소개한다. 이들 자료는 본래 신산서원에 있었으나, 대원군 훼철 이후에 이 향교로 옮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新山書院에 관계된 자료로는 「成冊」의 상태로 현전하는 것으로는 본 자료집에 소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되며, 개별자료로는 『松溪先生實記』에「請竝享新山書院疏」등 일부의 내용만 전하고 있다. 따라서 본 자료집에 소개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김해향교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여러가지 형태의 성책문서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이 유림들의 명단을 기록한 儒案類이다. 그 종류는 靑衿案 二冊, 儒案 一二冊, 老儒案 二冊, 除隨行儒案 二冊, 內儒案 一四冊, 外儒案 五冊, 童蒙案 四冊, 願納儒生案 三冊, 金海儒生講案 二冊, 金海鄕校儒生案 七冊 등, 五二冊에 이르고 있으며, 그외 양사재 관계문서나 기타성책문서 몇 책이 전해오고 있다.
이들 자료는 대체로 一七세기 초반이후, 이 향교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으로서, 조선후기 향교에 출입하였던 儒林들의 활동상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그 명칭의 다양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향교에 비하여 매우 다양한 종류의 문서가 전해오고 있다. 각각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서를 살펴봄에 있어서 각각의 문서들을 일일이 소개하지 않고 그 종류별로 일괄해서 자료의 성격을 서술하였다. 아울러 문서의 작성연대나 간단한 서지사항은 〈부록〉에 별도로 첨부해 두었다.
(一) 靑衿案
① 靑衿案 ②靑襟錄.
청금안은 향교에 소속된 유림들의 명단으로써, 두 가지가 보존되고 있다. 그런데 두 가지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①靑衿錄은 一六九一년에 작성된 것으로 김해의 유력사족들이 수록되었다. 수록된 인물중에는 「鄕案」에 등록된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중에는 曺時瑩, 曺九齡과 같이 『金海邑誌』11) 인물조에 등재된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적어도 一七세기 후반 김해향교에는 이 지방의 유력사족이 참여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반면 ②靑襟錄에 수록된 인물들은 ①靑衿錄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작성시기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二) 儒案
①儒案~⑨儒案, ⑩儒林案~⑫儒林案.
향교에 소속된 유생들의 명단으로써, 유생안 또는 교생안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儒案은 모두 一二책이며, 一六一二년에 작성된 것에서부터 一六七五년까지의 것이 남아 있다.
수록인원은 통상 二〇명 내외이며, 가장 많을 때는 三三명(一六四四)이었고, 가장 적을 때는 一四명(一六二九)이었는데, 인원상 커다란 변동사항은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모든 儒案에는 각 張마다 官印이 찍혀 있고, 맨 마지막에는 守令의 手決이 있어, 여기에 기재된 인물과 그 인원수에 대해서는 관에서 허가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곳의 유안에 등장하는 성씨들은 廣州安氏, 昌寧曺氏, 金海許氏, 金海金氏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 지방 鄕案에도 수록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鄕校와 鄕案의 운영자들이 별도의 집단이 아니고,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유안 중에서 ①儒案(一六一二), ②儒案(一六一五), ③儒案(一六二三)의 경우에는 유안내에 「童蒙」條를 별도로 추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⑧儒案(一六四四)에는 유안내에 「除隨行」「免講」「納票」條를 두고 있다. 이 유안에는 총 三三명이나 되는 인물이 기재되고 있는데, 먼저 맨 앞에서 曺惺을 비롯하여 一六명이 기재되고 있으며, 다음으로 「除隨行」條에 安世慶을 비롯한 七명이 기재되고, 또「免講」條에는 李貞吉을 비롯한 二명의 인물이 기재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納粟」條가 추가되었으니, 여기에는 金纓遠을 비롯한 八명이 기재되고 있는데, 이들은 일정한 물질적 댓가를 치르고 등록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유안에 등장하는 인물중 일상적인 儒案에 등장하는 魚敬源, 裵景興과 「納粟」條에 등장하는 魚信源 등의 인물은 二〇년전인 一六二四年과 一六二六年에는 外儒案에 수록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外儒案에 들어온지 二〇년이 지난 후에 儒案에 입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納粟」條에 등장하였던 八명중에서 魚信源, 鄭豪一, 曺文郁 등은 ⑨儒案(一六五二)에는 유안에 정식으로 수록되고 있다. 특히 魚信源의 경우에는 一六二四年 처음 外儒案에 들어갔다가 二〇년이 지난 후인 一六四四年에는 儒案의 「納粟」條에 들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八년이 지난 一六五二年에는 정식으로 儒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⑩儒林案에서는 수록된 인물중 宋淰(淸州人)과 金後修(義城人) 등은 똑 같은 해에 鄕案에도 입록되었다.
(三) 老儒案
①老儒案、②老儒案.
老儒案은 향교 유림들중 나이가 많아 유림으로서의 임무가 면제된 인물들의 명단으로 보이는데, 二冊만 보존되고 있다.
①老儒案에는 一六七五年과 一六七九年 두 차례에 걸쳐 인물이 소개되었다. 수록된 인물들중 四명(一六七五 二명, 一六七九년 二명)은 문서의 훼손으로 직접적인 확인이 불가능하였으나, 一六八八년에 작성된 ②老儒案을 통해서 四명중 三명은 확인이 가능하였다(밑줄친 인물). 수록된 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一六七五년 (乙未)〉
安信賢, 鄭{嵸/耳}, □□□, 許時昌.
「內儒」條: 柳時楨, 柳時楨, 李爾松, 李爾栢
「外儒」條: 魚厚源, 安瑞
〈一六七九년(己未)〉
李希茂, 許時亨, 許柱, 金後脩, 宋洙
또 ① 老儒案중 一六七五년의 노유안은 老儒案내에 다시「內儒」條과, 「外儒」條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老儒들의 경우에도 三단계로 그 지위가 구분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①老儒案중에서 一六七五년에 수록된 인물들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유안인 ⑫儒林案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一六七九년의 노유안에 수록된 인물들은 모두(五명) 四년전인 一七五년의 ⑫儒林案에 등장하고 있다. 유안에 있던 인물들이 일정한 나이가 지난 후에야 노유안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①老儒案에서는 두 해분의 안에 수록된 인물들이 중복되지 않는 반면, ②老儒案에 수록된 인물들은 모두 ①老儒案에 이미 실렸던 인물들이 다시 소개되고 있다.
(四) 除隨行儒案
① 除隨行儒案, ② 除隨行儒案.
除隨行儒案은 다른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형태의 문서인데, 앞의 노유안과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 수록된 인물들은 대개 나이들거나 병이 있어, 유안에서 제외되고, 그 임무도 면제된 이들을 수록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이전까지는 儒案이나 內儒案에 수록되었는데, 이 안이 작성될 당시에 이르러서는 제외되었다. ①과 ②의 除隨行儒案(一六四六, 一六五六)이 작성된 시기와 같거나 비슷한 시기인 一六五二년에 작성된 儒案이나 一六四六년, 一六五二년, 一六五八년에 작성된 內儒案에서는 이미 이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一六四四년에 작성된 ⑧儒案에서는 별도로 「除隨行」條가 있는데, 이는 이들 除隨行儒案보다 먼저 작성된 것으로 함께 참고해야할 자료이다.
(五) 內儒案
①內儒案~⑬內儒案, ⑭新薦內儒案.
內儒案은 대체로 앞의 儒案과 같은 구성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는데, 후에 작성된 일부 내유안은 다른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중 ②內儒案(一六二九)의 경우는 그 수록 인물과 작성형식에 있어서 儒案의 ⑤儒案(一六二九)과 일치하고 있다. ③內儒案(一六三七)과 ④內儒案(一六三七)은 같은 달에 만들어진 동일한 儒案으로, 모두 官印과 守令의 手決이 있다.
한편, 내유안중에서 ⑩內儒案(一六六四)과 ⑫內儒案(一六七一)은 여타의 유안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타유안에 등장하지 않던 새로운 인물들이 수록되고 있다. 이 내유안에 기록된 李爾松, 李爾栢 등은 이전에 一六五六년에 작성된 童蒙案에 수록되었고, 一六六九년에 작성된 金海儒生講案 중의 「內案」條에도 수록되고 있다. 일반적인 儒案은 鄕案 같은 데에 수록되고 있는 전통적인 有力士族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⑩과 ⑫내유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와는 다른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유안의 인물들은 전통적인 유력사족이 아닌 집단이 수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⑬內儒案(丙子年)은 二五명의 등록된 인물중에 八명을 제외한 一七명의 인물들이 朱氏姓을 가진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주씨성은 이전까지 향안이나 유안 등에 전혀 수록되지 않던 성씨였다. 따라서 이들이 어떤 성격의 계충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만 이 시기에 들어와 향교의 구성원들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⑭新薦內儒案(一六五九)은 새로 천거된 四명의 인물만이 수록되고 있는데, 이들중 金景修 만이 一六六一년 內儒案에 수록되었고, 다른 인물들은 이후의 내유안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
(六) 外儒案
①外儒案~⑤外儒案
유안에서 「內」「外」의 차이는 곧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나타낸다. 외유안에 등재된 인물들은 전통적인 유력사족으로서 존재하였던 가문의 후손들이라기보다는, 주로 納粟 등을 통하여 향교에 들어온 새로운 계층의 인물군이었다. 따라서 수록된 인물들도 대체로 기존 儒案에는 보이지 않던 인물이었다. 다만 ③外儒案(一六七一)에서는 수록된 인물중에서 魚厚源과 安瑞 등은 一六七五년에 작성된 老儒案의 「外儒」條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이 해에 이르러 외유안에 소속된 유림으로서의 임무가 해제된 것으로 파악된다. 구성원들로는 주로 魚, 金, 裵, 宋, 宣씨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본
관은 확인할 수 없었다.
(七) 童蒙案
①童蒙案~④童蒙案
동몽이란 본래 一五세 이하의 아동으로서 공부하는 이들을 일컬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鄕校에 들어온 인물들이 동몽안에 등재되었다고 알려진다.
동몽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존의 유안이나 내유안 및 외유안 등에서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③童蒙案(一六五六)에서는 수록된 인물중에서 李爾松과 李爾栢은 一六六四년과 一六七一년에 작성된 內儒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인물은 一六五六년에는 동몽안에만 입록되었다가, 八년 뒤인 一六六四년에는 內儒案에 들어갔다. 이들은 一六六九년에 작성된 金海儒生講案의 「內案」條에도 수록되었다. ②童蒙案(一六五二)에 올랐던 孫克明의 경우도 一六六九년 金海儒生講案의 「內案」條에 수록되었다.
한편 儒案 중에서 一六一二년, 一六一五년, 一五二三년에 작성된 것들은 그 안에 「童蒙」條을 기록해 두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童蒙案들과 함께 참고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八) 願納儒生案
①金海祭器願納案, ②願納儒生案, ③鄕校願納儒生案.
원납유생안은 향교에 소속되기 위하여, 일정한 물량을 납부하고 들어온 이들을 기록한 명부이다. 이들은 대개 유력사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자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案의 작성연도나 수록된 인물의 신상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九) 金海儒生講案
①金海儒生講案, ②金海儒生講案.
향교의 유생 중에 講論에 참여해야 할 인물들의 명단이다. 처음에는 명단만 기록하였으나, 나중에는 해당 인물에 대하여 특기할 사항이 있는 경우에는 그 이름밑에 간단하게 관련사항을 부기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卒, 改名, 喪中, 病 등에 대한 사항과 鄕任이나 免講者 등을 표기하였다.
①金海儒生講案(一六五九)은 일상적인 講案에 二七명을 기록하고, 이어서 「新案儒生」條에 一〇명, 「乙巳頉案」條에 六명을 기록해 두었다. ②金海儒生講案(一六六九)은 「儒林案」條에 六명, 「內案」條에 一一명, 「外案」條에 四명을 기재하였다. 당시 講案에 참석하는 儒林들을 三단계로 차별화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儒林案」條에는 本鄕校의 儒案과 儒案에서 통상 볼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內案」條의 인물은 어렵게 확인이 가능하고, 「外案」條의 인물들은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內案」條의 인물중 李爾松, 李爾栢 등은 一三년 전인 一六五六년에는 童蒙案에 수록되었던 인물인데, 이들은 얼마 지난 후 내안에 등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인물은 一六六四년과 一六七一년에는 內儒案에도 수록되었다.
(一〇) 鄕校儒生案
①鄕校儒生案~②鄕校儒生案
이 역시 향교에 소속된 유생들이 명부이나, 수록된 인물들의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一九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존 유력사족층이 아니었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 案에서는 임원(掌議)을 맡거나 나이가 들거나, 거주지를 옮긴 경우는 제외되었다. 한편 ⑥鄕校儒生案에는 인명 밑에 「逃」라고 기재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당시 향교 유생으로서의 역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한 인물로 추정된다.
『鄕案』과 그 운영에 관련된 문서들은 임란 후 이 지방 향안의 운영에 대한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로써, 이 지방 士族들의 동향을 잘 알려주고 있다. 성책상태로 남아 있는 『향안』에는 一七〇여년에 걸쳐 이 지방 有力土族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고문서에는 鄕案의 운영과 관련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고문서는 대개 一七세기 초, 중반에 작성된 원본자료로써, 향교 운영에 관한 제반 내용이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해서 향안의 작성과정, 입록절차, 향원에 대한 처리, 그리고 향회의 운영 등에 대한 사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一) 成冊
현전하는 김해향교의 향안은 모두 六책이다. 이중 五책은 향안운영 당시에 기록된 원본자료이고, 나머지 一책은 一九一三년(大正二年)에 작성된 것이다. 一九一三년본의 책명은『金海鄕案』으로 표기되어 있다. 『金海鄕案』은 당시까지 남아있던 향안을 모아 한꺼번에 필사한 것으로 유생들의 향안입록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기재되어 있다. 一九一三년 『金海鄕案』이 원본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있으나, 기록이 충실하기 때문에 조선후기 김해향안의 입록인원을 파악하는 데에 커다란 지장은 없을 것이다.
① 鄕案
一六〇一년과 一六一三년 두 해분이 수록되어 있는데, 一六〇一년에는 二〇명, 一六一三년에는 一四명을 수록하고 있다. 인원수에 있어서 타 향안의 같은 해 수록인원과 다소 차이가 나는데, 타 향안에는 몇 명이 누락된 채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본 향안 작성 당시에는 향안 소속이었다가 후에 누락된 인물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타 향안과 비교해보면, 一六〇一년 八월 조항에 수록된 二〇명중에서 대체로 다른 향안에는 五명이 누락되고 一五명만 수록되고 있다. 이들은 一六〇一년 八월 직후 향안에서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향안에 다시 入錄되고 있다. 五명의 인물인 安後凱·李元立(一六〇一년 一一월), 宋廷英·柳範(一六〇四년), 安得男(一六一三년) 등은 후에 다시 향안에 들어왔다.
一六一三년에는 一四명이 수록되었는데, 대개 一六一三년까지 타 향안에도 수록된 인물들이었으나, 한 명(曺克振)만은 나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역시 처음에 향안에 들어왔다가 제외된 것 같다.
② 鄕案
이 향안은 一五九九년부터 一六五四년까지 二회에 걸쳐 새로 入錄된 인원을 기재하였으며, 마지막 수록할 당시에는 卒한 인물은 「仙」자로 표기하였다. 수록된 인원은 많을 때는 一〇명이 넘었으며 적을 때는 四,五명에 이르렀다.
③ 鄭案
이 향안은 一五九九년부터 一六七二년까지 一四회에 걸쳐 매년 입록된 인원을 기재하였는데, 필사할 당시 卒한 인물은 수록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앞의 ②鄕案에서 「仙」자로 기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다. 최초의 필사연대는 글자체로 볼 때, 一六四五년(乙酉)에 작성되었던 것 같으며, 이 때에 해당연도의 입록자와 그 이전에 입록자중 生存者를 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一六七二년까지 입록자를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④ 鄕案
이 향안은 一七二六년 작성된 것으로 처음에는 二八명의 인원이 기록된 것 같으나 후에 一二명이 刀割되고, 一六명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一六명의 인원중에서도 一九一三년에 작성된 『金海鄕案』의 一七二六년조에는 이들중 一一명이 누락되고 五명만 보이고 있다. 누락된 一一명은 『김해향안 』에서는 一七三二년과 一七三三년 二차례에 걸쳐 다시 나타나는데, 一七三二년에는 尹時顯을비롯한 九명이, 一七三三년에는 宣慶徵을 비롯한 二명이 수록되고 있다. 아마도 이들 一一명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향안에서 누락되었다가 재차 입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도할된 인원이 一二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 향안 입록 후에도 여기에 대한 여러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⑤ 奉承聖敎許錄鄕案
이 향안은 乙巳年에 작성된 것인데, 정확한 年代는 알 수 없었다. 수록된 인물들은 처음에는 一四명이었던 것 같으나 三명이 도할되고 一一명만 확인된다. 이들 一一명은 一九一三년에 작성된 『김해향안』에 실린 인물과 모두 동일하다.
⑥ 金海鄕案
김해향안은 一五九九년(만력 二七)부터 작성되어, 一七七四년까지 一七〇여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해당 연도마다 새롭게 입록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는 당시까지 존재하던 자료를 모아서 새롭게 필사한 것이다. 자료가 원본 그대로는 아니지만 원본자료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적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자료는 김해향안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一五九九년부터 一七七四년까지 김해향안의 입록상황을 가문에 따라 살펴보면 〈表 1〉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향안에는 一七七四년 이후에도 乙巳年, 甲午年 기록이 보이는데, 이 두 해분의 향안은 전통적으로 향안에 수록된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성씨의 인물들이 수록되어, 정확한 연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으며, 그리하여 분석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대체로 〈表一〉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향안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차츰 늘어나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가문에서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 지방에서 사족으로서 행세할 수 있는 계층이 차츰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향안의 정결성이나 권위는 다소 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향안은 一五九九년에서 一七七四년까지 一七五년동안 三六차례에 걸쳐 작성되었다. 四년내지 五년만에 한 번꼴로 작성된 것이다. 향안에 참여한 가문수는 三三개 가문이었다. 가장 많은 인원수가 참여한 가문은 淸州宋氏(五五)이고, 그외 二〇명 이상이 참여한 가문으로는 廣州安氏(三九), 金海金氏(三七), 金海許氏(三七), 昌寧曺氏(三〇), 義城金氏(二九), 載寧李氏(二六), 光州盧氏(二一) 등이었다. 김해지방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전통적인 이 지방의 四大姓으로 曺(창녕), 盧(광주), 許(김해), 宋(청주)의 네 가문을 들고 있는데, 이들 가문은 향안입록에 있어서 각각 五(창녕조씨), 八(광주노씨), 四(김해허씨), 一(청주송씨)위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四大姓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光州盧의 경우 二一명이 참여하고 있어서, 다른 성씨에 비하여 참여도가 다소 떨어지고 있다.
시기에 따른 향안 주도 성씨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대체로 一六五〇년과 一六八〇년, 즉 一七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一六五〇년 이전에는 주로 淸州宋氏, 廣州安氏, 昌寧曺氏, 載寧李氏, 金海金氏, 義城金氏 등이 향안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나, 一六八〇년경부터는 새로운 성씨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다가 一七三二년이 되어서는 한꺼번에 四五명이 향안에 입록되면서, 坡平尹氏를 비롯한 五개의 가문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족들이 향안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들은 새로운 사족들과 함께 향안에 참여하였다.
한편, 입록된 인물중에는 『金海邑誌』의 인물조에 등재된 이들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을 향안에 입록된 연도에 따라 살피면 다음과 같다.
一五九九년:安憙(순흥인) 一六〇〇년:宋廷伯(청주인) 許景胤(김해인)
一六三六년:柳耆壽(문화인)許瀕 김해인 一六四一년:宋齊聖(청주인)
一六四五년:許演(김해인) 一六六四년:金後修(의성인)
一六七二년:盧文弼(광주인) 一六八九년:曺九齡(창녕인) 曺爾樞(창녕인)
一六九〇년:趙時瑩(함안인) 一七三〇년:曺夢徵(창녕인)
『金海鄕案』에 기록된 인물중 一三명의 인물이 『金海邑誌』에서도 기재되고 있다. 이미 주지되다시피, 한 지방의 읍지의 인물조에 등재된 인물은 가장 그 지방을 대표할만한 인물이다. 이들 중 많은 이가 향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김해지방의 향안이 바로 이 지방의 名望士族들의 명부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다.
다음으로, 향안에 참여한 성씨중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가문들인 청주송씨, 김해허씨, 김해김씨에 대하여 참여 인물들을 계보를 통하여 살피면 〈圖一〉 과 같다.
(二) 古文書
김해향안과 관계된 고문서로는 八〇여점이 남아 있다. 종류로는 鄕錄正案草, 完議類, 單子, 書目, 그외 여러 鄕中文書 등이다. 이들 자료는 당시 향안운영의 실상을 알 수 있다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鄕錄正案草는 지금까지 어느 지방에서도 잘 전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당시 유림들에 대한 향안입록절차가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 完議類 중에서는 향원들이 잘못을 저지른 경우, 이에 대한 처벌과 해제를 결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향안운영에 대한 생생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다만 향안의 운영과 관련한 節目과 같은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운영에 관련된 규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鄕案에 관계된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서종류

매수

작성연대

내용

鄕錄正案草

三二

一六二三-一七五三

鄕案入錄의 원칙과 절차

完議類I

二八

一六三〇-一六五四

鄕員의 처벌과 해제

完議類Ⅱ

一〇

一六三〇-一六五三

貢物관계

書目

一六三〇-一六五〇

留鄕所나 鄕中에서 제반사항을 수령에게 건의함.

單子

一六二九-一六三三

個人사정을 향중에 올림

기타문서

一五

① 鄕錄正案草
이들 문서는 一六三二부터 一七三一까지 鄕案入錄에 대한 원칙과 절차, 혹은 입록대상 인물을 기록한 문서이다. 여기에는 향안에 들어갈 인물을 정하는 과정이 수록되고 있다. 조선조 향촌의 사족에 있어서, 향안에의 입록은 매우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대개의 인물들은 향안에 입록하여, 고을의 향원으로서 행세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향안에의 입록은 각 지방마다 어느 정도의 절차와 형식이 있었다. 지금까지 연구된 논문들을 통해서 살피면, 향안에의 입록과정에는 「直書」와 「圈點」이라는 절차가 따랐다고 한다. 直書는 말 그대로 향안입록시에 심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입록되는 것이고, 圈點은 심사를 거치는 과정에 있어서 각 향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둥근 원을 그려서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입록의 대상자는 「三鄕」이 갖추어질 경우, 즉 父, 妻, 外祖가 모두 향안에 등록된 경우는 곧바로 直書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圈點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12)
그런데 김해의 경우는 「直書」를 실시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대개의 경우 「圈點」의 절차를 거쳐서 입록된 듯하다. 현재 남아 있는 고문서와 향안에 입록된 인물들을 비교해 볼 때, 모두 圈點의 절차를 거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김해지방의 향안입록절차를 「鄕案正案草」를 통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番號

年度

入錄原則

被薦人數

入錄人數

審査員數

一六二三

二不以上

一七

一五

一六二七

二不書之

一一

一三

一六四一

一不已上

一二

一六四五

二不以上

一六

一三

一六四九

一不以上

一一

一〇

一六五四

一不以上

一六六八,九

一二

?

一一

一六六八.一一

一不施行

一八

一一

一六七二

一不以上

二五

一〇

一〇

一七二六

?

二八

?

?

一一

一七二八

二不以上

一三

一二

一二

一七二九

三不以上

三四

三三

一一

一三

一七三〇

三不以上

二二

一四

一七三一

三不以上

二二

二二

一一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향안의 입록에는 「不以上」, 「二不以上」, 「三不以上」의 규정을 근거로 권점이 행하여 졌다. 「一不以上」이라는 용어는 심사원 중 한 명 이상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入錄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초창기인 一六二三년부터 一七二八년까지는 「一不以上」과 「二不以上」의 규정이 지켜지다가 一七二九년 이후로는 이러한 규정이 다소 완화되어 「三不以上」의 규정도 허용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一四종의 고문서를 통해서 볼 때, 一八세기 초반까지는 향안의 입록 규정이 비교적 잘 지켜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② 完議類I
完議는 일향의 서원이나, 향교, 문중 등에서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결정한 내용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여기의 完議는 향중에서의 일에 대한 의결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一六三〇년부터 一七五三년에 걸쳐 주로 향안에 소속된 인물들에 대한 처벌과 해제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같은 자료는 조선조 지방사회에 있어서 향안의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문서에 기재된 내용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六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金瀅에 대한 처벌과 해제에 관한 기사이다. 幼學인 김영(義城人)은 一六二七년에 三명의 인물과 함께 향안에 처음 입록되었다. 그후 一八년이 지난 一六四五년에 향안에서 削籍되는 엄격한 벌을 받게 되었다가, 四년이 지난 후인 一六四九년 一一월에 이르러 「解朔」되었다. 이 때에는 향원들의「完議」로서 결정되었는데, 당시에는 모두 一一인(좌수一, 별감三 포함)이 참석하여 논의하였다.  13) ㉯幼學인 金侃(義城人)에 대한 처벌과 해제에 관한 내용이다. 김간은 一六一三년 七명의 인물과 함께 처음 향안에 입록된 인물이다. 그는 二二년이 지난 一六三五년에 損徒  14) 의 처벌을 받았다. 그후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金侃에 대한 損徒가 해제 되었으며, 당시 참석한 인원수는 알 수 없다. ㉰僉知인 安惺(廣州人)에 관한 기사이다. 그는 一六四五년에 一三명의 인물과 함께 향안에 입록되었는데, 三년만인 一六四八년에 削籍되었다. 그의 경우 해제에 관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察訪인 金纓後(金海人)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一六三六년 七명의 인물과 함께 鄕案에 입록되었다. 그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간에 損徒의 처분을 받았다가 一六四六년에 해제되었다. ㉲幼學 李如璧(본관미상)에 대한 사례이다. 그는 九명의 인물과 함께 一六四九년에 향안에 입록되었다. 그러다 二년 후인 一六五一년에 삭적의 처벌을 받았는데, 그는 당시 別監이었다. 그후 五년이 지난 一六五四년에 삭적이 손도로 낮추어졌다. 당시 논의에는 座首 一人, 別監 一人, 鄕員 二人 등 四人만이 참석하였다.  15)
다음으로 ㉳幼學 裵顯(盆城人), 參奉 李元立(載寧人), 奉事 黃世熙(檜山人)에 대한 사례이다. 이들중 이원립은 一六〇一년에, 배현과 황세희는 一六〇四년에 향안에 입록되었다. 그러다 一六三〇년에 罰을 받았는데, 이 세 사람은 城主의 下馬宴에 이유 없이 不參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벌의 종류는 알 수 없다. 논의시에 六인이 참석하였고, 권점여부도 알 수 없다.  16)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처벌자

처벌연도

해제연도

벌종류

당시직위

처벌사유

논의자수

① 金瀅

一六四五

一六四九

削籍

座首

擅削擅筆

九/一一

② 金侃

一六三五

損徒

鄕員

몸가짐잘못

八/

③ 安惺

一六四八

削籍

鄕員

官前에 과실

一〇/

④金纓後

一六四六

損徒

鄕員

體面毀損

/五

⑤李如璧

一六五一

一六五四

削籍

別監

체모훼손

一四/四

⑥裵顯등

一六三〇

鄕員

下馬宴不參

六/

③ 完議類Ⅱ
이 문서는 이 지방 鄕會에서 一六三〇년부터 一六五〇년경까지 부세에 관하여 의견을 모아 결정한 기록들이다. 향안입록자들의 모임인 鄕會에서는 지방민에게 부과되는 부세 및 공물에 대하여 효과적인 납부방안을 모색하였으니, 이러한 내용들이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④ 書目
이 문서들은 一六二九년부터 一六五一년경까지 留鄕所나 鄕中에서 공동의 문제점에 대하여 그 대처방안을 논의하여 결정한 후, 그 시행에 대한 결정을 수령에게 요청하는 내용들이다. 각 문서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一. 惠民署 藥材 수납시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방지책을 정하여 요청함.
二. 新舊官 送舊迎新을 人吏가 전담케 하자고 요청함.
三. 裵氏家 叔姪間의 爭訟 辭緣을 보고함.
四. 田稅米 운반船이 忠淸道 泰安에서 바람을 만나 米를 잃어버린 辭緣을 보고함.
五. 士人을 욕보인 軍官 朴玏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
⑤ 單子
대개 單子라고 하면 士大夫가 守令에게 올리는 訴狀 내지 請願書를 말하는데, 향중의 한 개인이 자신의 처지를 서원, 향교, 향청의 담당자들에게 올리는 문서도 단자라고 표기한다. 본 문서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① 參慕錄
〇 수록연도: 一六八四년(肅宗一〇, 甲子)-一七七四년(英祖四八. 壬辰)
一六八四년부터 一七四七년까지 六〇여년 동안은 매년 빠지지 않고. 춘추로 참석한 인원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후로는 一七七二년(壬辰)과 一七七四년(甲午)의 두 해분의 기록만 있다.
〇 내용: 매년 春秋로 享祀하고, 이 때에 참석한 인물들을 기록한 자료이다. 흔히 이같은 종류의 자료는 타 서원에서도 參享錄, 參祭錄, 焚香錄, 時到記 등의 이름으로 보관되어 오고 있는데, 대개 같은 유형의 자료이다. 자료에는 해마다 춘추로 참석한 인원들을 순서대로 기록하고, 맨 뒤에는 당시의 院任 二인이 매번 「署押」을 하였다. 명단 뒤에 署押이 있는 것은 이 자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된 인원수는 대개 四,五명에서 一〇여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서원의 향사에 참석한 인물들의 구성은 대개가 이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별로는 昌寧曺氏, 淸州宋氏, 金海許氏, 淸州宋氏, 金海金氏 등 김해의 전통적인 四大姓氏 및 김해김씨와 기타의 성씨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중 많은 인물들이 「鄕案」에도 기록되어 있고, 鄕校 관계자료에도 등장하고 있다. 결국, 조선조 김해지방의 사족들은 「향안」 「향교」 「서원」 등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대체로 지방의 유력사족들이 이들 기구에 함께 참여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서 일부 서원의 임원구성과 원장의 명단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자료상에 드러난 서원의 임원은 院長 一人과 院任 二人이었다. 또 院長을 지낸 인물과 자료에 나타난 재임시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金鍰: 一七〇八년(丁亥) 七月 利安時~一七一〇년(庚寅) 春享時
權以鎭: 一七一一년(辛卯) 春享時
趙時瑩: 一七二八년(戊申) 秋享時~一七三〇년(戊戌) 春享時(읍지인물조 등재)
郭元基: 一七三一년(辛亥) 春享時~一七三二년(壬子) 秋享時
원장을 지낸 인물들 중 金鍰(一六五〇~?)과 權以鎭(一六六八~一七三四)은 타지역 인물이고, 趙時瑩과 郭元基는 이 지역 출신이다. 김환과 권이진은 인근 지방의 수령으로 재직중 이 지방의 원장직을 맡았는데, 이들은 각각 원장으로 재직 당시, 김환은 梁山郡守로, 권이진은 東萊府使로 부임중이었다. 김환은 安東人으로 一六八九(己巳)년 進士試에 오르고, 一六九一년(辛未)에 及第하였으며, 관직은 知敦寧에 다다른 인물이다. 그는 一七〇七년(乙酉)에 양산에 부임하였다가 一七一〇년(庚寅)에 차임되었다. 그가 정확이 언제부터 원장에 재직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一七〇七년 이후에 원장이 되었다가 一七一〇년 수령직 차임과 동시에 원장직도 그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權以鎭은 安東人으로 호는 有懷堂, 宋時烈의 外孫이며, 尹拯의 門人이다. 관직은 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一七〇九년에 동래에 부임하였다가 一七一一년에 그만두었는데, 그 역시 수령직에 있는 동안 이 서원의 원장직을 맡았다.
② 新山書院祗謁錄
〇 수록연도: 一八二八년(純祖二八)-一八三二년(純祖三二), 一八四四년(憲宗一〇)(연도 추정은 이 서원을 다녀간 유명인물, 특히 安潤蓍(一七八六-一八六七)의 인적사항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었음). 一八二八년부터 一八三二년간의 五년 동안은 지속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수록되었고, 一八四四년에는 단지 한 사람이 다녀간 기록만 있다.
〇 내용: 一八二八년부터 이 서원에 들렸다가 배알하고 돌아간 인물들을 기록한 자료인데, 이들중에는 祗謁 후에 곧바로 떠난 경우도 있고, 하루 유숙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수록된 인물들은 金海지방에 거주하는 사족들 뿐만아니라 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인물들은 金海를 비롯하여, 晉州, 咸安, 靈山, 昌原, 密陽, 蔚山, 永川 등 대부분 慶南道에 거주하는 사족들로, 주로 金海 인근의 인물들이 많았다. 수록된 인물들 속에는 서원에 모셔진 南冥 曺植과 松溪 申季誠의 후손을 비롯한 인근 사족들이 포함되어 있다. 南冥의 七대손 曺龍海(晉州居), 八대손 曺應喆(晉州居) 八대봉사손 曺應鮮(晉州居), 松溪의 一〇대손 申九錫(密陽居), 申完錫(密陽居) 등이 다녀갔다. 다녀간 인물들 중 과거급제자의 경우에는 이름 옆에다 圓點을 표기하여 두었다. 과거급제자로는 崔龍羽(完山人), 張天鶴(玉山人), 權馥, 安潤蓍(順興人), 張大周(玉山人), 崔允植(全州人), 李攸秀(驪江人), 朴祥欽(密陽人), 郭龍悳(玄風人) 등이 수록되었다.
〈表 1〉 《金海鄕案 入錄狀況》

15

99

16

00

01

04

13

22

23

27

36

41

45

49

54

64

68

72

78

79

86

89

90

96

17

01

02

03

26

28

29

30

31

32

33

40

53

66

74

總員

咸從魚

3

2

1

1

7

淸州宋

2

1

1

1

1

1

1

1

1

2

2

1

6

1

3

4

2

6

1

4

10

3

55

順興安

1

1

文化柳

1

2

1

1

1

1

1

1

1

4

1

1

1

1

18

廣州安

1

1

2

1

1

2

1

1

2

2

2

1

2

1

1

1

3

1

6

6

1

39

昌寧曺

2

1

1

1

1

2

2

1

1

1

3

2

2

2

2

1

4

30

尙山金

1

1

載寧李

1

1

3

2

1

2

1

1

1

1

1

1

3

1

1

4

1

26

金海金

1

1

1

2

1

1

4

1

2

1

1

1

2

4

4

2

3

5

37

義城金

1

1

1

1

3

1

1

4

3

3

3

3

4

29

金海許

1

1

1

2

1

2

1

1

2

3

2

1

1

3

1

7

7

37

檜山黃

1

1

2

盆城裵

1

1

2

密陽朴

1

1

1

3

昌寧張

1

1

1

1

1

1

1

14

全州李

1

1

1

2

1

2

2

1

2

2

4

12

平山申

1

1

1

3

玄風郭

1

1

1

1

1

6

東萊鄭

1

1

1

1

1

1

6

光州盧

1

2

1

2

1

1

2

2

3

2

2

2

21

昌寧成

1

1

2

4

咸安趙

1

1

1

1

2

6

晉州姜

1

1

1

3

2

8

陽川許

1

1

密陽孫

1

3

1

5

淸道金

1

1

2

1

1

6

坡平尹

4

4

安東權

1

1

高靈朴

2

1

2

寶城宣

3

1

1

6

晉州柳

1

1

靑松沈

5

5

南陽房

2

2

미상

1

2

1

1

2

1

2

3

2

1

1

1

5

2

1

5

4

1

3

38

77

總員

14

4

4

11

8

3

5

4

8

5

14

10

4

21

10

7

18

3

15

11

4

9

1

6

14

5

12

33

2

26

45

7

3

49

5

77

477

〈圖 1〉 《주요가문의 향안입록 현황》(밑줄은 향안입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