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丁淳佑(韓國精神文化硏究院 敎授),安承俊(韓國精神文化硏究院 專門委員)
古文書는 인간생활의 구체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의의를 지니지만, 현재까지 발굴, 소개된 것은 양반가문의 문서에 국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문서의 작성주체는 대부분 문자를 직접 구사하거나 향유할 수 있었던 지식인들이었다.
舊助羅里(項里) 고문서는 그 소장처가 마을회관이고, 그 관리의 책임이 洞長이었다. 이는 문서의 작성주체와 이해당사자가 특정인이나 특정 가문이 아니라 마을 전체 가 이른바 ‘平民’이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구조라 문서는 마을 공동체내의 생활상과 그들의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기록들이다. 이 점은 본 문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구조라리의 문서가 작성된 것은 18 말~20세기 초였다. 이 시기 구조라리 주민들은 신분문제, 생업문제, 조세와 진상 부역(군역) 문제 등을 가장 큰 고민거리로 여겼다. 문서에는 이러한 주민들의 삶과 제반 조건에 대한 내용이 단편적 혹은 누층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문서에는 구조라의 역사적인 조건 및 지리적 환경과 맞물린 특수성이 배여나 있으며, 한편으로는 시대가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들이 담겨져 있다. 생계를 주로 바다에서 해결하였다는 점, 海防에 집중된 役, 倭人 또는 일본인과의 잦은 접촉 등이 구조라리의 특수성이었다면, 공물와 부역을 부담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은 것은 조선후기인이 겪어야 했던 보편적 삶의 문제였다. 구조라리 문서에서는 이같은 양면성을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조라리 문서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료적 가치 때문이다.
필자를 비롯한 조사단 일행이 구조라리 문서를 조사한 것은 199년 12월과 1995년 4월 두 차례이다. 문서조사와 더불어 구조라리 각 지역에 대한 답사도 병행하였다. 조사단은 문서대여 또는 답사과정에서 문헌으로서 확인할 수 없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사단 일행에게 안내와 더불어 여러 가지 사실을 교시해 준 강정태님을 비롯한 김정록, 이봉래, 강연기, 지점수님, 그리고 문서를 대여해준 구조라리의 주민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구조라리는평범한 어촌마을로서 학계의 주목의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연구성과 또한 거의 없다. 구조라리와 관련한 일차적 참고자료는 󰡔巨濟邑誌󰡕(1785년간) 晋州姜氏世譜(舊助羅系) 󰡔光州]盧氏世譜󰡕 등 전통시대에 발간된 지리서와 족보류를 들 수 있다. 󰡔一運面 舊助羅里誌󰡕1) 는 구조라리의 과거와 현재를 연구한 유일한 저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조라리와 직접 연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해 펴낸 거제에 관한 몇편의 연구는 구조라 지역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된다.  2) 특히 海稅 운영과 民庫에 관한 金鉉丘의 연구는 本書 所載 조세 부역관계문서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거의 유일한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제의 漁場에서의 조세수취, 왜선의 왕래와 守護, 鎭의 설치와 이동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3) 이는 본서의 조세 및 왜선의 수호와 왜인들의 접대에 관한 제문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구조라리는 巨濟島 一運面에 속해 있는 마을로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거제도와 운명의 궤를 같이하였다. 거제도는 동쪽으로는 부산 東萊와 서쪽으로는 統營과 맞대어 있으며 前面으로는 일본 對馬島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적으로對馬島과 가깝기 때문에 삼국시대이래 한말에 이르기까지 戰爭 貿易 漁撈 등을 통해 두 지역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지역이다. 그만큼 關防의 역할이 커 곳곳에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원종 12년(1271)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邑治를 居昌 加祚縣으로 옮겼으며, 160여년만인 조선 세종14년(1432)에 와서야 읍치를 거제로 옮길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主戰場이 되었다. 玉浦戰과閑山大捷은 그 중 가장 대표적 전투였다. 이같은 倭와의 잦은 접촉의 결과 거제에는 官員으로서 倭學이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倭供米의 저장과 수송, 표류 왜인들의 供饋를 위해 ‘倭供庫’를 두고 운영하기도 하였다. 正祖 9년(1785)에 간행된 巨濟邑誌에 의하면,정조 당시에도 ‘최근에도 왜인들이 드나드는 길목의 요충지로서 이를 좌우수영이 번거로워하며 폐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4)
구조라리는 거제도 가운데서도 최남단에 위치하며, 半農半漁의 전형적인 島嶼 마을이다. 형세가 마치 꽃 봉우리의 수술과 같고, 바다를 향해 반도형으로 뻗어 내린 듯하다. 마을 양쪽 對岸에는 두 산맥이 멀리서 감싸고 있어 良港의 조건을 잘 구비하고 있다. 北東 쪽 對岸으로는 臥峴里와 倭仇(曳龜) 마을이 內港을 두고 마주하고 있고, 서남쪽 對岸에는 楊花 마을과 望峙 마을이 멀리서 마주하고 있다.
구조라의 漢文 이름은 項里이다. 項里는 地形이 長鼓의 목(項)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舊助羅라고도 한다. 舊助羅라는 명칭은 옛 助羅城이 있었던 장소라는 뜻에서 연유되었으며, ‘助羅’는 ‘(목을) 조르다’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借音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마을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은 아직도 남아 있는 助羅城을 통해 알 수 있다. 거제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佐成 등의 海賊과 倭人에 의한 침탈이 자심하여, 이를 방비하기 위한 여러 군사적 요새가 散見된다. 마을의 뒷산인 水晶峰에 올라가 보면, 거제도 남동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가 바라다 보이고, 가까이 서남해로는 海金剛, 북동쪽으로는 장승포가 조망되는 천혜의 요충지이다.
舊助羅城은 이러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수정봉 약 8부 능선에 약 430間으로 쌓은 石築이다. 巨濟郡誌에 보면 成宗 20년(1490)에 거제가 海防의 요충임을 감안하여 助羅 玉浦 加背 永登 長木 知世浦 栗浦 등 七鎭을 두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宣祖 37년(1604)에 玉浦鎭 옆으로 助羅浦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군사지로서의 마을의 성격은 후일 거주민의 생활사에 상당한 압박과 영향을 주게 된다.
마을의 경지면적은 협소한 편이다. 마을의 초기 생성과정에 대해서는 상고할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舊助羅里誌에 따르면, 최초의 입주자는 甘氏와 張氏이다. 이들은 1863년 호적 등의 문서에는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나, 현재 그들의 후손은 전무하다. 그 뒤 1620년 경에는 光山盧氏가, 1650년 경에 晉州姜氏가 입촌하였으며, 18세기 초엽에 慶州鄭氏, 慶山全氏가, 19세기 후반기에 密陽朴氏, 仁同張氏, 恩津宋氏 등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특히 18-19세기이래 한말, 일제시기까지도 이 노씨와 강씨가 지배적 성씨로서 里任, 洞長을 역임하고 있다.
1795년 거제읍지에 의하면, 項里는 古縣面 一運 11坊에 포함되어 있었고, 知世浦 舟林浦 倭仇味와 더불어 읍치로부터는 40리 정도 떨어진 지역이었다. 바로 인근에 있는 知世浦鎭와 玉浦鎭은 거제의 關防으로서 조라포진과 더불어 대표적 군사요충지였다. 조라포는거제부 동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전의 동족 40리에 조라포를 옮긴 곳이었다. 따라서이전의 조라포 지역을 ‘舊助羅’라 하였다.
한편 구조라리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왜, 또는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제 합방직전 1909년에 작성된 구조라 주민과 일본 어민, 거류민과의 약정서는 조선후, 말기 구조라마을의 한 단면이다.  5)
舊助羅里 문서는 본서에 게재한 고문서류와 寄留簿(336張), 戶籍簿(1,284張)로 대분된다. 본서에 없는 寄留簿와 戶籍簿는 대부분 일제시대 이후에 작성되었지만 본서의戶籍中草와 함께 인구사 사회사 자료로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 문서는 형태상 成冊古文書와 個別古文書로, 내용상으로는 아래 여섯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모든 문서는 구조라 운영과 관계된 게방촌 문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서의 대체적인 작성시기는 18세기 말~20세기 초이다. 그러나 문서 干支만을 사용하였고, 등장인물이 대부분 평민이었기 때문에 族譜나 邑誌類에서 확인되는 인물이 드물다. 五章 작성연대란에 干支를 먼저쓰고 추정연대를 ( )에 쓴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문서 가운데는 연대를 확정할 단서가 없는 것도 있다. 따라서 많은 문서를 문서의 마멸정도 등 外觀에 따라 추정하였으며, 과정에서 오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은 연구자의 세심한 주의와 천착이 필요하다.
가) 項里의 人口資料 -戶籍中草
① 項里戶籍中草 癸亥:1863 - 247명(남 141명, 여 106명)
② 項里戶籍中草 辛巳:1881 - 212명(남 126명,여86명)
③ 項里戶籍中草 甲申:1884 - 211명(남 127명, 여 84명)
④ 項里戶籍中草 丁亥:1887 - 113명
⑤ 項里戶籍中草 庚寅:1890 - 122명
⑥ 項里戶籍中草 癸巳:1893 - 125명(남 83명 여 42명)
戶籍은 3년마다 한차례씩 작성되는데 반하여 戶籍中草는 重草, 仲草, 中草라고도 불리워지며 각 式年의 한 해 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예비호적조사’의성격을 지닌다. 호적중초는 濟州大靜縣德修里 戶籍中草  6) ,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읍 호적중초  7) , 전라도 남원부 둔덕방 호적중초  8)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19세기 중후반에 작성되었다. 항리호적중초 역시 1863년~1893년 사이 30년간에 작성되었다. 비록 70여호에 지나지 않지만 동일지역내에서 여섯 시기의 호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연구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호적은 주요 구성원이 어업이나 버섯을 채취하고 있는 平民이라는 점, 그리고 知世鎭 舊助羅鎭 등의 군사지역에 軍役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호적과 차별성이 있다. 그러므로 호적에 기재된 직역이 지역의 특성 및 신분구조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호적에는 직역표시가 幼學 正兵 등과 같이 애매하지 않고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예컨데 業武의 경우, 業武 助羅射夫, 業武 放軍, 業武 櫓軍, 業武 知世浦兵, 業武 助羅軍官, 業武 鄕校下典, 業武 業將官 등이 그 예이다. 또 이 중초에는 本貫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여타의 호적이나 중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항리호적중초만의 특징이다. 주지하듯이 本貫은 戶籍의 매우 중요한 기재사항이나 이 호적에서 지배적 姓氏로서 일반적으로 忠義衛로 분류되는 盧氏(本貫:光州) 조차도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나. 각종 역의 부과와 그 弊害是正에 관한 節目類
① 項里各等進上捄弊節目(庚戌:1850)
② 節目(甲寅:1854)
③ 項里防軍案(節目)(癸亥:1863)
④ 五洞節目(癸酉:1873)
⑤ 舊助羅楊花望峙三洞防弊節目(戊子:1888)
項里에 배정된 각종 명목의 公納金의 減量과 調整(①)②⑤), 倭船 선원들을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접대하기 위해 각 동에서 합의한 내용(④) 등에 대하여 官에서 인정해주거나 각 里에서 합의한 내용을 公表한 節目이다.
다. 公納錢·洞錢 의 分配·徵收·利殖에 관한 置簿類
① 洞錢俵殖記(庚戌:1850~丁巳:1857)
② 洞錢捧上記(丙寅:1866~辛巳:1881)
③ 洞錢流音冊(庚辰:1880~辛卯:1891)
④ 各樣公錢捧上冊(癸未:1883)
⑤ 社還錢各人分給冊(庚辰:1880,辛巳:1881)
⑥ 軍布錢民間分給(庚辰:1880)
⑦ 項里軍布錢俵殖區別成冊(丁亥:1887)
⑧ 軍布錢六年幷本利區別記(丁亥:1887~壬子:1912)
⑨ 項里鄕約錢俵殖成冊(辛丑:1901?)
⑩ 項里官傳令及官捐錢俵殖成冊(乙巳:1905?)
⑪ 作廳公契錢項里俵給完定冊(乙巳:1905)
⑫ 洞錢留在置簿記(戊申:1908)
⑬ 項里所任願納錢捧記(丙午:1910,庚戌:1910,壬子:1912)
洞錢流音冊을 비롯한 각종 捧上記는 洞中의 각종 公事에 소용된 비용을 적은 置簿이다. 稧房村이었던 구조라리는 해산물, 표고 등 각종 명목의 징수에 대해 공동으로 이를 납부하고, 납부금액을 다시 각호에 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위 문서들은 이 과정에서 작성된 것들이다. 문서명 가운데 ‘俵殖’(①⑦⑨⑩)이란 ‘分俵殖利’의 준말이다. 分俵란 分與, 分給의 뜻이다. 殖利란 存本取殖 즉 원금은 남겨두고 이자를 취한다는 뜻이다. 社還錢 軍布錢 鄕約錢 官傳令及官捐錢作廳公契錢 등의 분배와 징수는 마을 자체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 문서는 계방촌으로서의 항리의 성격을 잘드러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라. 倭船保護 木材運搬 등 使役에 관한 置簿類
① 四洞倭船公事置簿(丙申:1836~丁亥:1887)
② 倭船公事井間第次冊(丙午:1846~丙戌:1886)
③ 知世鎭使役統營戰兵船駕龍木物載運船四洞第次正間冊(癸丑:1853~丁亥:1887)
①, ②는 항리를 비롯한 望峙 楊花 倭仇 4개동의 倭船 過浹時의 保護 및 留宿時의 제반 대접(支供)에 대한 시행 순번(第次)을 기록한 것이며, ③은 項里 望峙 楊花 倭仇 4개동에서 知世鎭의 使役, 統營戰兵船駕龍木物의 운반을 비롯한 제반 역에 대해서 차례를 정한 문서이다.
바. 일제시대 토지관계 문서
① 山坂所有權申請書 3건(明治43:1910)
② 土地所有權保存證明申請書 3건(明治45:1912)
③ 項里漏落申告人抄冊(明治45:1912)
④ 土地賣買契約書(大正2:1913)
⑤ 土地調査簿(大正3:1914)
①과 ②는 일제에 의한 임야 및 토지조사사업 당시 盧祥憲 등이 거제군에 제출한 山坂 및 土地申告書, ③項里漏落申告人抄冊(明治45:1912)은 토지조사사업 당시 누락된 토지에 대하여 마을에서 자체 조사한 抄本이다. 뒷부분에 본 사업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食床記도 첨부되어 있다. ④土地賣買契約書는 金在鎭·姜暎周 등이 項里 洞中에 토지를 放賣한 문서이다.
⑤土地調査簿(大正3:1914)는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과정에서 謄寫해놓은 문서이다. 당시 세부사업은 地主總代 盧祥憲 姜刱周, 里長 盧應善이 주도하였으며, 전체 토지를 국유지와 사유지로 구분하여, 田 畓 垈 林野 雜地 墓地 등의 地目에 따라 세부측량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파악된 토지는, 국유지 11필지 5,484坪, 민유지 787필지 153,585坪, 총계가 798필지 159,069坪에 달하였다.
個別 고문서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성책문서의 그것과 상응한다. 傳令 書目 牒呈 單子 所志 等狀 完文 등은 항리 주민들이 부담하는 각종 역과 그 분배 및 그 시정조치 등에 대하여 授受한 對民, 對官문서이다. 항리주민들이 지는 역은 군포전, 향약전, 표고, 어패류 등 금전 및 현물로 납부하는 각종 公納을 들 수있다. 書目과 牒呈을 비롯한 상당수의 문서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잦은 왜선 왕래에 따른 守護와 留宿時의 供饋는 항리인들의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항리주민들은 동리 자체에서 또는 망치, 왜구, 장목 등 이웃 동리와 순서를 정해 이들을 보호하거나 供饋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적에서 나타나는 직역에서 보듯이 助羅鎭 知世鎭 玉浦鎭에 수시로 동원되어 역을 부담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부담은 각 鎭에서 필요로 하는 木材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書目을 비롯한 상당수 문서가 이에 관한 것들이다. 이들 鎭은 통영의 군문에 소속되었으며, 里에서는 수시로 통영 군문과 역의 부과와 이의신청에 관한 문서를 주고 받았다.
목장의 場稅 부담도 항리주민들이 담당해야 하는 고된 역 가운데 하나였다. 성책문서 ‘西四場賭稅錢文結總記’는 이에 관해 발급한 관부문서이다.
구조라리 문서에서 書目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성격상의 차이가 있다. 최승희는 서목에 대하여, 상사에게 올리는 첩보(첩정)에 첨부하는 문서로서 주로 同等 이상의 관에 올릴 때 사용한다.  9) 고 하였다 그러나 본서에 게재된 50여건의 서목은 모두 항리라는 촌락공동체에서 올리는 것이다. 내용 또한 첩정에 첨부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文報’의 일종으로서 서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항리문서에서 서목은 마을내의 세금의 징수, 군역의 수취, 왜인의 호송과 물자의 운반 등 마을과 官府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항에 대하여 보고하고 그 처분을 묻는 문서로 사용하고 있다. 즉 항리에서 서목은 반드시 현감 현령 부윤 부사 목사 감사 등 정식 관청의 관원들만이 아닌, 里任이 府, 鎭 등의 관부에 마을내의 제반사항을 보고하고 그 처리지침을 받을 때 사용한 문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典律通補에 나와있는 〈書目式〉에서 報告當事者를 표시하면서 ‘某職書目’이라 할 때 그 某란 행정적으로 지휘감독선상, 혹은 보고선상에 있는 관원과 里任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完文과 完議·立誼는 계방촌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들 문서에는 동리간의 어업 및 임업에서의 소유권 관계 문서와 각 동간에 合意한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1850년 立誼 및 1880년의 稧房完議의 예를 보자.
① 庚戌(1850)元月日 立誼
右立誼事段 邑之故村(??) 主客勢異之中 貴洞千萬意外 結議稧房 故不忍恝視 依所請稧房結議爲去乎 日後若如前除良 樂同管中 路上逢着之際 兄右弟恭之意 各別分義尊接事 亦爲留意保存厚誼事
庚戌 正月 日
憲功廳
林元起(着署押) 외 11인(이하 명단 생략)
② 壬戌(1880)十月 日 稧房完文
右文爲完誼事 惟我兩洞僻在各處 山海相隔 儀意疏忽 年年採蛤之時 每有相詰之端 故大張公議 後自今爲始 一體成完文爲去乎 稧債段 每年伍兩式當納之意 永久遵行事
壬戌 十月 日 時尊位 姜大仁
公司員 河奉權
赤梁長浦洞 張南石 金得彔 金光世 朴宗連
① 계방완의는 계방 요청자가 임원기 외 11인이다. 이들은 ‘千萬意外’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일방적으로 憲功廳과의 계방을 決議하였다. 憲功廳은 아마도 刑房을 지칭한 듯하다. 아뭏튼 헌공청에서는 계방으로서 인간적 도리를 비롯한 제반 관계를 두텁게 한다는 조건으로 계방결의에 응하였다. 여기서 헌공청에서 말하는 ‘兄右弟恭’과 ‘分義尊接’이란 인간적 또는 경제적 거래관계를 요약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서 계방의 성격을 짐작케한다. 요즘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급납부자와 그 징수자의 관계를 형제간의 友誼에 비견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사회의 稅政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 편린을 짐작케 한다.
② 壬戌年(1880)의 완의는 項里와 赤梁長浦洞 사이에 이루어진 계방완문이다. 이 계방이 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 동간의 이해간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당시 항리의 尊位 姜大仁(1827-?)과 公司員 河奉權은 赤梁長浦洞과의 계방결의에 항리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같이 양동간에 계방이 성립한 것은 赤梁長浦洞民이 항리 권역내의 홍합을 채취하는 대가로 매년 稧債 5兩을 납부함으로써 쌍방간의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구조라리 문서에서 완문은 상당수 ‘完議文’의 약어로 사용하고 있다. 완문이란 관의 제반 권리 내지 특권 인정서를 말하며, 완의란 각동 내지 기관 개인들간의합의사항을 나열하고 이해당사자가 확인(서압)한 것이다. 따라서 완의는 각 당사자들의 和解와 友誼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이 때문에 완의를 ‘立誼’라 하기도 하였다. 立誼는 立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구조라 문서에서完議를 完文이라 한 것은 完議 1번 문서(1789년, 정조 13)의 ‘右完議事’에서 보는 바와 같이 ‘完議文’의 略語로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구조라리 문서는 18세기 중엽에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의 평민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며, 이를 통해 어촌의 변화상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1863년 項里는 남자 141명 여자 106명 총 247명이 거주하는 어촌이었다. 신분은 幼學과 忠義衛를 칭하는 양반층도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평민이다. 이들은 射夫, 防軍 등의 군역을 지고 있으며,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 없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리들이 도처에 실려 있다. 160종이 넘는 각종 명목의 진상과 공물이 그 가장 큰 이유이다. 그들은 진상물의 물목과 가격, 각 호당 할당되는 금액을 깨알같이 써서 밝히고 있다.
동민들은 그들의 삶을 괴롭히는 가장 큰 어려움을 세가지 꼽고 있다. 우선 하루가 멀다하고 慓泊해 오는 왜선들의 처리 문제이다. 이들을 供饋하고 일일이 옥포나 통영에 보고해야 하는 괴로운 고역이었다. 그리고 생업도 불사하고 폭풍에도 불구하고 앞 바다에 있는 內, 外島를 수시로 수색하고 조사해야 하여야 했고(순라돌다 죽겠다는 기록도 보인다), 知世浦, 玉浦, 助羅 三鎭에서 만드는 戰船製造에도 수시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또 각종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때는 엄청난 화재가 나서 동리의 삼분의 일이 넘는 33채의 집이 홀랑 불에 기도 했다. 1893년에는 태풍이 불어 모든 전답이 바람에 쓸려가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관에 호소하고 있다. 홍합을 따다가 실족하여 죽은자도 나타난다. 또 이 동네 15명이 고기잡으러 바다로 나아 갔다가 거센 풍랑으로 실종되자 수색대를 돈 15량을 주어 내 보냈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와 그 남은 돈을 돌려 주는 가슴아픈 사연도 보인다.
한 所志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倭船의 漂迫이 조석으로 있다. 그들이 오면 飯曳之節(숙식을 제공해주고 배를 예인하는 제반 절차)과 守護之方(배와 사람을 보호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한 마을로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엄청난 경비와 인원 이 필요하였다. 문서 중에는 왜선의 통행과 止泊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그 결과를 官에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丙申年(1836)부터 丁亥年(1887) 까지 표류한 왜선들을 맞아 들였던 기록과 함께, 그 결과를 萬戶와 鎭長이 있던 玉浦와 知世浦 그리고 통영에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과 노력을 한 마을이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기에 兄弟之誼를 맺은 계방촌에 그 부담을 나누어 가지는 현명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왜인과의 인연은 역사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융희 3년(1909)에는 일본의 고리대금업자에게 75兩을 차용하였다가 갚지 못하자 재산을 압류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한편으로는 일본 愛媛縣 魚島村과 서로 거래하고 싸우지 말자는 내용을 포함한 5개 조항의 마을간 협정을 체결하기도 한다. 다음이 한일 두 마을간에 체결한 증명서이다.
證明書10)
右證明段은 大日本 愛媛縣魚島村 日吉重太郞 日吉辰次郞 橫井末治 橫井庄平 大林 善作 大林新平等과 本洞人民으로 互相漁業에 雖過幾百年이라되 如兄弟之誼로 無弊安過而追後에 若有彼我間에 相違作弊之人이면 先爲裁判後에 卽報告公廷 依法施行하고 日韓人 相約事는 謄錄左開하니 以此證明할 事
明治四拾貳年 五月 二日
左開
一. 婦人往來路에 勿爲酗辱悖說할 事
一. 漁業은 互相商業할 事
一. 洞前에셔 勿爲脫衣 行步할 事
一. 日韓人이 勿爲相鬪할 事
一. 牛犬을 勿爲害傷할 事
大日本 愛媛縣 越智郡 漁島村 大林新平(印)(이하 6인명단 생략)
項里洞中展
구조라리 문서에는 軍政 還穀 등 삼정의 운영에 관한 매우 상세한 자료가 시기별로 남아있다. 또한 군역에 관한 수 많은 비리 사실을 여러 사례속에서 보여 주고 있다
무려 160여개 조의 진상과 공물을 각 月別, 名目別로, 각 진상처 별로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매 절기별로 바치고, 사은사를 포함한 사신행차시에, 감영 호조 수령을 포함한 각 관서 및 세도가에 바쳤다. 진상과 공물의 종류는 홍합을 포함한 각종 해산물, 표고, 동백기름, 각종판자, 소 가죽, 종이 등 70여 가구의 마을에 실로 수많은 명목의 진상품과 공물을 부과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마을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여 납부하였다. 그 괴로움을 호소하는 수 많은 所志(等狀)와 書目들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 표고버섯 등 산에서 나는 물품 10여 품목을 白紙徵稅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거기에 해물, 홍합등을 또 요구하니 살 수가 없다. 제발 면하여 살게 해 달라.
◇ 本里와 倭仇里가 合洞할 때 冬栢 두말을 供納하다가 수 십년전 分洞 이후에 한말 씩 나누었는데 왜 또 다시 두 말을 바치려 하느냐
◇ 白骨徵布를 돌려 달라. 십년전 죽은 백골이 10명, 원래 있지도 않았던 인물이 10명, 他洞人이 10명이나 끼여 있다.
◇ 배 만들 재목을 山에서 끌어 오고, 또 바닷길로 예인 하였는데 또다시 운반하라는 명령을 내리니 죽겠다. 이제 백성들이 이 문제에 관해 합의가 안된다.(題辭 : 役丁을 再次 쓰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번거럽게 따지지 말고 법대로 시행토록 하라.)
◇ 임능재란 이름으로 2兩 6전 1푼의 稅米가 나왔는데 그러한 인물은 있지도 않다.
◇ 還錢中 金化日 명목으로 8石 14斗 4되의 세금이 나왔으나 그러한 인물은 우리 고을에 없다.
◇ 본리의 船案에서 13인의 선척이 노후하여 다 부서졌다. 그러니 세금을 감면해 달라.
◇ 각종 선박 新造時에 가종 부역을 면해 주도록 무자년에 약속하였는데 왜 또 불러 들이는가. 耳匠 冶匠 등의 造幕之役을 면하게 해 달라. 시간이 없어 고기를 못잡겠다.
契房이란 지방의 衙前들이 임의의 한 마을을 契房村으로 삼고 사사로이 부역을 징수하여 착복하고 대신 그 마을의 신역을 면제하여 주던 관행을 말하였다. 이 때문에 계방촌을 除役村이라 하기도 하였다.  11)
다산 정약용이 지적하였듯이, 계방은 監司의 지방 순찰시의 경비를 충당하는 명목으로 생겨났으나, 기실은 吏房廳 鄕廳 軍官廳 將官廳 官奴廳 皂隸廳 通引廳 등에 소속된 이서들이 그들의 이권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계방은 크게 1개 또는 여러 개의 마을을 대상으로 하는 里契와, 각 戶를 대상으로 하는戶契로 나누어진다. 이계는 마을 전체를 계방으로 삼아 해마다 수백냥에 달하는 금전을 거두는 것을 말하며, 호계란 특정한 호를 뽑아 해마도 백여량의 돈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12) 이 때 관에서는 吏胥 가운데 특정 인물 또는 기관을 里 또는 戶에 배당하여 그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하고 신역을 면제해주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서들의 농간이 자심하였다. 이 때문에 다산은, “계방의 폐는 모든 폐단의 근원이요 뭇 농간의 구멍이다. 계방을 혁파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일정한 급여가 없었던 이서층의 입장에서계방은 그들의 수입원이자 理財 수단이었다. 부임하는 수령이 계방을 개혁하려하여도 수령 자신 또는 감사를 영접하는 데 드는 비용을 달리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수령이 강력히 계방을 혁파하려해도, 오히려 서리는 “그렇다면 도망하겠다”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형편이었다.  13) 이 제도는 국가적으로는 큰 손실이었지만 감사와 수령과 이서들 입장에서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법외의 관행이었다.
계방관계를 맺은 里, 戶는 일반민보다 상대적 특헤를 누렸다. 계방에서 이서에게 바치는 돈은 순순한 세금의 의미와 함께 자기들에게 부과될 세금의 양을 줄여달라는 의미의 뇌물의 성격도 강하였다. 이같은 이서와 계방촌과의 결탁은 결과적으로 계촌민에게 부과될 세금이 일반민에게 전가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다산이 “1만호의 부담이 1천 호에 돌아가고, 1천호이 부담이 1 백호에 돌아가서 예날에는 1호의 부담이 1 백 錢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수천 전으로도 부족하다.”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같은 부역의 편중현상과 특혜대상의 확대는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주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구조라 계방은 마을 자체 또는 2~12洞이 연합된 里契였다. 이계는 진상품의 생산지역, 또는 營門(統營) 및 知世 助羅 玉浦 등 역의 부과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조라리 문서는 사실 대부분 계방문서나 다름없다. 完文 完議 書目 등의 문서가 계방 운영과정에서 洞과 官府 사이, 혹은 對民 사이에서 주고 받은 문서라면, 洞錢置簿類는 契房의 재정 확보와 利殖에 관한 것이다.
다산은 계방의 폐단을 주로 논하고 있지만 구조라문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계방의 기능은 관의 일방적 역과 공물의 부과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관부와의 ‘結託’이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부당한 역의 부과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이의 제기와 그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관의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에 대한 주민들의 대응에서 그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구조라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계방은 민원처리, 잘못된 역 및 세금부과에 대하여 그 시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맡은 창구였다.
구조라에서는 공동납을 위해 里任을 중심으로 洞錢을 마련하거나 그 利殖에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렸다. 주로 ① 洞錢과 軍布錢을 이용한 이식 ② 里任들의 기부금 ③ 선창의 商船과 旅客에 대한 公錢 수납(연간 30兩) ④ 洞畓運營 ⑤ 牧場稅의 수납 등과 같은 방법이 그 수단이 되고 있었다.
계방은 부과된 역의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고, 이해관계에 다라 分洞과 合洞이 빈번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분쟁을 치렀다. 한편으로는 이같은 갈등관계를 조정하려는 관부의 시도와 마을간의 타협도 이루어졌다. 완문과 완의(입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평민들의 納稅에 관한 이같은 자료는 연대기와 文集에서는 찾기 어렵다. 앞으로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